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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교육공공성을 논의하기 위한고찰

2002.07.22 12:37

특집팀 조회 수:1721 추천:4

진보교육13호 특집글 : 공공성이 대안이다.

:::특집글Ⅰ

교육공공성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고찰들

 

1. 공공성과 교육공공성

내부 논의 과정에서 교육 공공성 논의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공공재, 공공부문, 공공영역의 개념과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래에서는 공공재, 공공부문, 공공영역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교육의 성격을 이 개념들에 비추어 논의한다.

(1) 교육공공성 논의를 위해 살펴야 할 것들 : 공공재, 공공부문, 공공영역(또는 공론영역)

가. 공공재(public goods)1) :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 어느 선까지 공공재로 확대하느냐가 관건

경제학의 대상은 크게 재화2)와 용역·서비스3)로 구분된다. 공공재에는 재화와 용역 둘 다 포함되며 <모든 국민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들이다. 공공재는 사유재(private goods, 또는 사용재)와 대비되어 사용되는 개념이며, 시장 원리에 따라 그 가격이 결정되는 '사유재'와 달리 수요자와 공급자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재화나 서비스로서, 도로나 댐처럼 수익자가 모호한 사회간접자본이나 교육, 국방 등 수익은 없고 비용만 많이 들어 아무도 공급하려 들지 않는 서비스가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공공재를 시장에 맡겨 두면 민간기업이 공공재를 생산하지 못하므로 세금을 재원으로 정부가 직접 생산, 공급한다. 잘 알다시피, 공공재 공급은 정부의 역할로 여겨져 왔으나 이제 그 속성이 공공재라 할지라도 공급 권한을 사적 주체에게 넘기는 흐름이 강하다.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과 사유화 정책 단행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공공재로 분류되는 것은 국방, 치안, 공공시설, 전력, 체신, 통신, 교육 등이다. 그밖에 물, 공기, 쌀, 토지, 주택, 지식, 정보, 공원, 도서관, 의약품 등도 성격으로 따지면 공공재이다. 이 중 어떤 것은 공공재로서의 성격에 맞게 공급, 소비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속성에 위배되어 사유재의 원리에 따라 공급, 소비되기도 한다. 따라서, 공공재와 관련해서,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공공재냐 사유재냐에 대해 현재의 공급-소비 형태를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비록 사유재의 방식을 따라 공급, 소비(주택, 쌀, 정보 등)되고 있다 해도 그 대상을 확장하고 공공재적 성격에 부합하는 형태로 공급과 소비체계를 바꾸는 일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쟁점으로 부각된다.

일반적으로, 공공재냐 아니냐를 놓고 따지는 잣대는 비경합성과 비배타성(혹은 비배제성)이다. 다시 말해, 비경합성과 비배타성을 공공재의 특성으로 규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각각은 통상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비경합성(non-rivalry)이란, "공공재가 생산된 후 다른 경제주체가 추가로 소비하여도 이미 소비하고 있던 경제 주체들의 소비가능성이 감소하지 않는 특성"을 말한다. 따라서 공공재를 소비하는 경제주체들은 공공재의 소비를 놓고 경합을 벌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공공시설의 경우 혼잡할 경우 경합의 특성이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서점에서 파는 책은 한 경제 주체가 소비하면 다른 경제 주체는 소비할 수 없으나 국방서비스는 그렇지 않다.

비배타성 혹은 비배제성(non-exclusive)은 "공공재의 사용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경제주체를 소비로부터 배제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특성"을 말한다. 예컨대, 서점에서 파는 책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은 책을 소비할 수 없으나 국방서비스는 그렇지 않다.

공공재를 둘러싼 논란에서 논쟁적으로 제기할 사항은 사물에 대한 공/사 구분의 '자의성'이다. 경제학자들은 당위성을 떠나 비배타성과 비경합성을 기준으로 공공재/사유재를 단순 구분한 후 스펙트럼에 배치하곤 한다. 그러나, 공공재/사유재의 구분 자체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일반화된 공/사 구분행위에는 자의적인 면이 있다. 공공재냐 아니냐가 문제로 부각되는 이유는 '사적 소유'를 기본질서로 삼는 자본주의 상품경제를 전제한 상황에서 재화의 속성을 논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따져 물었을 때 과연 몇 가지나 순수 '개인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볼 문제다. 그 어떤 사물도 반드시 배타적, 경합적이어야 하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 어느 것도 완전히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기 어렵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이 공공재냐 아니냐 라는 논란은 사실 일어날 까닭조차 없지만, 논란이 일 수 밖에 없는 건,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공/사 구분의 상황 때문이며 현상적으로는 교육이 공공재로서의 성격(비배제성, 비배타성)에 위배되는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탓이다.

요컨대, 모든 것을 재화나 서비스로 보는 관점에 도사린 맹점을 잠시 접어두고서 이러한 틀 내에서 교육을 굳이 분류하면 교육은 분명 공공재다. 쟁점이 되는 부분은 교육을 공공재냐 사유재냐로 규정하는데 있지 않다. 이러한 교육의 공공재적 성격을 떠나 문제가 되고 있고 또한 문제삼아야 할 건, 당연히 그 속성상 공공재인 교육을 사적인 영역의 논리에 기대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교육도 '배타적'이고 '경합적'이므로 그들이 만든 재화의 스펙트럼에서 사유재 쪽에 끼워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되곤 하지만, 교육이 공공재임 혹은 공공재여야 함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공공재이라 할지라도 시장원리에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이 주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공공재를 공적이 아닌 방식으로 해결4)하려 들면 성격 자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므로 이런 입장은 내적으로 모순된다. 다시 말해 공공성은 말로만 그치고 사실상 공공적 성격의 탈각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보면, 공공성은 총체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영역이나 사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성격 뿐 아니라 성격을 뒷받침할 제반 요소들까지 포함하여 공공성의 개념을 다루어야 공공성은 완결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나. 공공부문(public sector)5) ->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필요에 따라 공공부문을 확장하는 한편 그것의 공적 기능을 강화하는 실천이 관건

자본주의에서 공공부문은 총자본가로서의 국가가 사적 자본들의 재생산에 없어서는 안되지만 사적 자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른바 생산의 일반적 조건을 창출하여 담당하는 부문이다. 공공부문이라 이야기되는 것들을 보면 하나같이 국민의 일상생활, 그리고 산업의 기초와 직결된 국가기간산업들로서 이윤, 시장의 논리에 그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되는 분야들이다. 계급관계의 재생산, 특히 노동력의 재생산도 공공부문의 대상이 되는데, 교육, 질병, 실업, 노후보장, 주택 등 노동력의 재생산과 관련된 사항들은 과거처럼 노동자가 개별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점차 국가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로 되었다. 역사적으로, 공공부문은 자본주의 성립과 확립에서부터 불가피한 것으로 자리잡았으며, 현대자본주의로의 발전과정에서 이는 더욱 확대되었다.

공공부문의 정의 및 분류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소유와 지배구조 측면에서 분류할 수 있다. 이는 좁은 의미의 공공부문으로서 <정부나 공공단체가 운영하는 부문>을 말한다. 노사관계에서 정부가 사용자로 되는 경우로 정부기관, 정부투자기관, 출연기관, 공공법인체 등이 있다. 또 하나는 생산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성격을 기준으로 할 수 있다. 이는 넓게 공공부문을 규정하는 방식으로서 <공공재를 생산하는 공공서비스 부문>이 여기에 속한다. 이 두 정의는 상당부분 중복되며, 공공부문의 정의나 분류는 사회적 조건, 정부의 성격과 자본주의 발전정도에 따라 변화한다.

한국사회 공공부문 현황6)은 다음과 같다.

정부기관

행정영역

(정부 각 부처, 지방행정기관)

사법부/법률정보

입법부(대한민국국회, 정당)

일반행정기관 및 철도, 체신

각 시·도 교육청

지방자치단체

법무, 경찰, 소방

공기업

(182개 기업)

정부투자기관

조폐공사 등 13개

정부출자기관

담배인삼공사 등 13개

재투자기관

한전기공 등 67개

지방공기업

서울지하철 등 89개

정부출연·위탁·보조기관

(188개 기관)

정부출연기관

산업연구원 등 105개

정부위탁기관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등 68개

보조연구기관

국방군사연구소 등 15개


신자유주의는 공공부문의 관료성과 비효율성, 사회보장의 남용에서 공공부문 나아가 공공성에 대한 공격의 논거를 찾는다. 공공부문이 주인이 없는 데다 시장경제의 원리를 침해해서 시장경쟁의 최적화 효과를 훼손시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는 공공부문이 지닌 현실의 모순과 폐해들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시장경쟁이 자원의 최적배분과 사회구성원의 최적 후생을 가져다준다는 신자유주의의 교리는 현실에서 그 올바름이 실증된 바 없음 또한 사실이다.

현대자본주의에서 공공부문의 확대는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위기에 대응하여 국가의 경제개입이 불가피하게 된 데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부문은 궁극적으로는 독점자본의 이윤원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국가는 총자본의 이해를 위해 자본의 일반적 생산조건을 창출하면서도, 그러한 개입을 계급중립적인 외관 속에서 관철하기 위해서는 공공서비스의 공급을 통한 일반적, 전사회적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공공부문은 사적 자본의 이윤생산에 궁극적으로 복무하면서도 그것은 이윤원리로부터 형식적으로 벗어나서 보편적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고 이로부터 공공부문의 구체적 형상과 기능을 둘러싸고 계급간의 이해가 대립하게 된다.

공공부문을 매개로 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공공부문 일반의 기능이 그렇듯이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이윤증식에 복무하지만 이윤원리에 의한 지배형식을 벗어나서 보편적 서비스의 급여형태를 취함으로써 자본의 전일적 지배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을 제공해준다.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함께 공공부문을 공격하는 것은 결국 이들 영역을 사적 이윤원리의 직접적인 지배 하에 돌려놓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부문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이윤원리에 종속되어 있지만, 또 그 때문에 정경유착과 관료주의적 부패로 왜곡되어 있지만, 동시에 공공부문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사적 자본의 시장적 지배에 대항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공공부문의 존립근거를 단순히 시장 실패의 보전에서만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시장실패가 없는 (결코 가능하지 않지만) 상황을 이념형적으로 상정한다 해도,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부문이 완전히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공공부문은 주로 파쇼정권에 의해 그 복지적 성격이 왜곡되어 있고 주로 이윤창출과 관련된 공기업이 주류를 차지하지만, 투쟁을 통해 공공부문을 확장해온 역사를 보이는 경우에 있어서 공공부문은 '복지'를 위한 곳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앞에서 '사유화'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공공부문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측면이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 하에서 노동자, 민중의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전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교육은 사회구성체에서의 위치상, 일부는 공공부문에 속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은 형편이다. 모든 교육현상을 망라해 놓고 보았을 때 공교육이 공공부문에 속해 있다. 자본주의가 출발할 당시만 해도 교육은 사적 영역에 있었다. 다시 말해, 교육은 사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화가 진전되면서 노동력 재생산의 새로운 기제가 요구되었고 무한정한 노동착취에 직면한 노급은 '교육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공공부문의 일부로 성립된 것이 바로 공교육이다.7) 만일 모든 교육이 공공부문으로부터 퇴출되어 사적 영역에 편입되면, 개인은 교육에 대한 욕구를 사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야 하고 특정집단의 이해에 종속된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면, 교육이 왜 공공부문에 있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다. 공공영역 혹은 공론영역(public sphere)

-> 자본의 전횡에 제동을 걸고 노급, 민중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관건

맑스는 공공영역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했는데, '부르조아 계급 의식을 은폐하는 기만성이고, 노동자의 공론을 조작하는 허위의식'으로 기능할 뿐이라 했었다. 이는 자본주의적 질서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보인다. 공공영역에 대한 지배계급의 패권적 장악을 생각해보면 맑스가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는지가 이해된다.

하버마스에게 공공영역8)은 우선, <시대를 막론하고 사적 영역(개인적 생활, 노동, 가족 등 친밀한 인간관계)의 의미와는 구분되는, 초개인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적 행위와 의사소통 관계의 영역9)>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역사적으로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의 조직원리로 이해하였다. 이때, 공공영역은 여론이 형성되는 곳인데, 공공영역은 정부로부터 독립적, 즉 지배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합리적 논쟁에 일반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는 공공영역을 국가와 사회가 통합되어 있던 前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유의 산물로 간주한다. 봉건적 관계를 지속하는 교회와 국가에 대하여 투쟁하고 그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를 축적하게 된 신흥자본가들이 문화적 '교양'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권력으로부터 분리된 비판의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공공영역은 일단은 '비국가', '비자본'이라는 특성을 가지며 형성의 주체는 바로 신흥 부르주아지이다.

한편, 아렌트는 "공공영역은 사적으로 소유된 장소인 사적영역과 구별된 영역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해를 따르면, 공공영역은 주체에 있어 소부르주아지로 국한되지 않으며 발언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출하고, 자신의 정체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세계의 현실을 인식시켜주는 '누구에게나 열린' 출현의 공간이다.

하버마스든 아렌트든 본질적으로 공공영역은 정치-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성격을 띠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공영역의 '정치적 성격'에 천착한 이는 그람시다. 그람시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그람시는 이상적인 시공을 '공공영역'이라는 이름으로 상정하여 이것이 자본 혹은 국가의 침투에 의해 (하버마스 식으로) 재봉건화 또는 퇴행하였다는 식으로 보지 않는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시민사회는 구조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계급간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각축이 일어나고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보다 넓은 영역>으로 이해된다. 그가 보기에 시민사회는 '부르조아의 낭만적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계급간 각축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정치적 쟁투의 공간이다. 시민사회는 헤게모니의 영역으로서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결의 장이며 끊임없이 타협과 양보와 접합의 과정이 지배하는 곳인 것이다.10) 따라서 시민사회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공적 영역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의 종속계급에 대한 '강제와 동의'를 통한 지배, 말하자면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곳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그람시가 말하는 '시민'은 계급적 시각을 견지한 개념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공공영역에 대한 규정과 이해 역시, 관점에 따라 시민사회적 공공영역/계급적 관점에서의 공공영역이 대립하게 된다. 전자의 '시민'은 무계급적인, 아니 무계급적이고자 애쓰는 개념일 따름이다. 말하자면 중산층 이상만이 주체로 상정되거나 명백히 존재하는 계급 간 대립 구도를 의도적으로 희석시킨다. 다만, 국가와 비국가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공공영역에 대한 개념을 어떤 언어로 정식화하든,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공공영역 내부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연유하는 '힘의 관계'와 무관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낭만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적으로 공공영역 혹은 시민사회를 거론하는 이들은 근본적 문제, 즉 자본이 장악한 생산의 영역을 재편하는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이를 회피한다.

그람시의 '시민사회' 개념을 빌어 헤게모니의 영역으로서 공공영역의 개념을 다시 새기면, 공공영역은 계급사회에서 '공론의 장'으로서 이는 결코 무갈등의 장이 아니라 치열한 대립과 각축이 벌어지는 장이며 부르주아들은 이를 은폐한 채 기만하고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전유'하려 든 게 역사 속에서 관찰되는 일반적 경향이다.11) 부르주아지들의 지배를 위한 '또 하나의' 공간으로 공공영역이 지배계급에 전유될 가능성 반대편에는 노동자 계급, 민중이 자신의 목소리를 펼칠 공간으로서 자리매김될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이는 '가능성'일 뿐 '필연성'은 아니다. 관념 속에서 필연성을 부각시키면, 공공영역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점과 결별하기 어려워지고 '개량'으로 흐를 여지가 많아진다. 다시 말해, 공론의 장에 '진출'하는 데에만 몰두할 경우, '포섭'으로 귀결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교육 자체를 정치적, 문화적 공간인 공공영역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공론의 장(공공영역)에서 교육은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진다. 자본이나 국가에 직접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여러 주체가 목소리를 내는 논의의 장(이를테면, 언론, 의회 등)에서 교육이 논의거리로 등장하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공론영역에서 교육이 의제로 다루어지는 모습을 보면 공론영역을 계급적 시각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떠나서 교육을 '순순하게' 논의하는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자신의 '배경'을 가지고 공론의 장에 참여할 뿐이다. 물론, 공공영역의 '개방적' 속성은 노동자, 민중의 진출가능성을 열어두고는 있지만, 부르주아 언론, 방송에서 정치적, 경제적 소수자들은 쉽게 배제되곤 한다. 즉, 언론이나 의회에 대해 지배계급은 패권적 장악을 하려 들며 이는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비교적 많이 성공한다.

그러면 공교육을 공공영역과 관련하여 살펴본다면, 공교육의 틀과 제도 자체(물리적 시스템)는 공공 영역에 내부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12), 공교육의 장에서도 공론의 장이 형성되어 각 주체들이 틀과 제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공교육이 토대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위치에 있어서 가능하다. 물론 이는 여타의 공공부문이 그렇듯이 사회적 힘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사적 영역에 속해 있어서 철저히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교육의 장에서는 그런 정도의 '공론의 장'조차 형성될 수 없다. 그저 교육에 대한 사적 가치의 지배와 능력에 따른 소비만 존재할 뿐이다. 공교육에서 이런 '각축'이 벌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교육 역시 '지배계급의 전유 시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다시 말해 '공공적 성격'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 하는 곳일 수밖에 없다.

 

<공공영역(공론의 장)과 공교육>

·교육영역은 상부구조에 있으며 영역의 특성으로 따지면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양쪽에 걸쳐 있다. 이때 공교육은 공공부문에 속하며, 사교육은 민간부문에 놓여 있다.

·교육은 토대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며, 공교육은 그람시가 말한 대로 이데올로기의 쟁투가 벌어지는 헤게모니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계급에 공교육이 전일적으로 귀속되지는 않으나, 물적토대를 기반으로 한 지배집단의 주도성, 규정성이 관철된다.

·공교육의 제도와 틀 자체는 공공영역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공교육에서도 공공영역(공론의 장)은 형성된다. 그리고 보다 넓은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교육은 주요한 의제로 다루어진다.

·교육은 사회 재생산의 주요 기제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도교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불평등을 은폐하면서 위계적 분업체제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토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교육이 놓인 제약 상황 탓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육이 자본에 직접 종속되어 있지도 않으므로 공공성 확장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2.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시기의 교육공공성 논란에서 나타난 혼란과 오해들

교육공공성에 대한 '공론'의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오류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논의가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교육공공성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이해와 엄밀하지 못한 논의들, 그리고 명백한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판명되는 문제를 짚어 비판한다.

교육공공성의 강조는 교육에 대한 국가주의적 통치구조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용인하고 정당화한다?

공공성 강화론자들에게 겨누어지는 화살 가운데 하나는 국가주의자 아니냐는 혐의이다. 더불어, 관료주의의 폐해를 깡그리 무시한 채 관료의 전횡을 용인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종종 가해진다. 교육공공성 강화의 의미가 국가의 비민주적, 관료적 통제구조를 용인하는데 있지 않은데도 이렇게 인식되곤 한다. 이러한 인식은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식민지 통치 세력이나 그 뒤를 이은 파쇼정권이 제도교육을 한낱 이데올로기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한 역사적 현실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즉, 공교육은 민중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세력이 통제용으로 '던져준 것'에 불과하다고 인식되어 나쁜 것으로 치부된다.

교육공공성과 국가주의를 엄밀히 규정하지 않은 채 경험적 근거만을 가지고 공공성과 국가주의를 연결시키는 데에서 나타나는 오류이다. 역사 속에서 보이는 국가주의적 교육독점 현실은 <공공성의 왜곡과 부재 혹은 무시>로 보아야 옳다. 여기서 '국가의 성격'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개별 국가의 성격을 따져보기 전에 한정된 경험적 근거에 기대어 '성급한 일반화'를 한다. '파쇼정권'의 교육에 대한 비민주적 통제를 국가 일반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 더, 국가의 성격을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일반은 무조건 '악'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을 사유화 전략에 동원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물론, 교육공공성은 국가 관리가 전부가 아니다. 다만 국가의 관리는 국가의 여타 계급으로부터의 중립성 가정이 성립할 때 용인될 수 있을 뿐이다. 공공성은 국가주의 혹은 관료적 통제구조의 폐해를 포함한 비민주적 통제구조의 극복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국가주의라는 혐의의 추궁은 공공성의 부재나 왜곡을 공공성 자체의 문제로 바꾸어버린다는 점에서 또한 오류이다. 공공성이라는 원칙 하에 교육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고 추동하느냐가 남는 문제일 뿐이다. 민주적 민중 통제의 확립이 이 문제에 대한 잠정적이고 추상적 수준의 해답이다.

교육부문에서 공공성(=획일성, 편협한 평등주의)과 자율성·다양성은 상호배타적이므로 끝내 화해할 수 없다? 설사 공공성을 폐기하지는 않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자율성'과 '다양성'13)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공공성의 강조가 자율성 혹은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주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특정한 자율성과 다양성 개념에 기울어진 채 출발함을 알 수 있다. 공공성과 자율성을 상호배타적 관계로 설정하는 경우, 대체로 시장주의적 관점 쪽에 기울어져 있거나 시장주의에 대해 명료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다. 누구의 개념인가가 문제다. 자율성은 사적 소유, 소비관행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상품선택, 공급자의 경쟁이 잘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자율성에 그 의미를 한정지어선 안된다. 이건 특정 입장에서 자율성을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다수를 '자율성'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규정이다. 정치적 자율성과 집단적 자율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양성도 마찬가지로 상품적 다양성으로 환원시켜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물론, 시기(특히 소수자의 문화적 특성을 '병리현상' 정도로 취급한다던가 하는)에 따라 자율성과 다양성 강조가 나름의 진보성을 담보할 수도 있으나, 시장화가 진행되는 지금 시기에는 맥락을 고려치 않은 혹은 특정 맥락(시장화)과 결부된 자율성과 다양성을 앞세우는 건 민중의 교육권 보장과 확대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다양성이 공공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논거 역시 적절치 않다. 교육이 추구해야 하는 다양성이 '상품적' 다양성이 아니라 '교육적' 다양성이라면 이는 당연히 공교육의 임무이다. 교육적 다양성은 총체적 존재인 인간이 전면적으로 발달하도록 돕는 개념이다. 그리고, 학교교육의 보편성은 개개인의 차이를 가로질러 인간이 보편적으로 배워야할 지식과 가치를 전수하는 기능을 표현하는 말이다. 보편성과 다양성은 당연히 양립 가능하며,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학교를 여러 갈래로 쪼개고 교육과정을 개인마다 맞춤식으로 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개인 하나하나는 함께 다양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보장해 주는 건 개인의 구매력에 맡기는 시장적 다양성이 아니라, 공교육을 공공적으로 운영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공공성의 강조는 편협한 혹은 기계적 평등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공공성은 획일성을 만들어낸다고 몰아붙인다. 앞서 짚은 바대로 이는 공공성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석 또는 특수 경험에 기반한 판단에서 비롯된 인식이다. 획일화는 공공성의 강조에서 야기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획일화는 특정집단의 교육 '통제'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교육을 모든 이의 것'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원인이 아니다.

교육 공공성은 소비-공급 구도에서의 상품적 다양성(->이 또한 국가주의적 획일성을 능가하는 시장적 획일성으로 흐를 것이 뻔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옮기면)은 지양하되, 교육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을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경쟁과 효율을 위한 시장적 자율성은 단호히 배제하지만,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주체(개인과 집단을 포함하는)의 정치적 자율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교육에 대해 공공성만 강조하면 효율성, 즉 수월성과 국가경쟁력은 공염불로 그치고 만다? 따라서, 공공성과 효율성을 '조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옳다?

'효율성' 잣대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발상임을 전제해야 한다. 세상을 온통 경제적 관계(소비-공급)로 환원시켜 파악하는 입장에서라면 교육 또한 효율성의 잣대에 충실히 구조화되어 마땅한 대상이다. 이런 조망 틀을 벗어나려는 수세적 방편으로, 교육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공공성 강화가 효율성을 저해하지는 않는다고 방어론을 펴기에 앞서 우선 '효율성' 담론이 터해 있는 이데올로기적 바탕이 뭔지를 살펴 공세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효율성 담론에는 20대 80의 세계관이 깔려 있다. 경제적 효율성은 최소비용, 최대효과이다. 투입 비용을 놓고 따지면 지금의 공교육은 사실 비용은 많이 들면서 자본의 입장에서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제도에 불과하다.(물론, '세금'으로 공교육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본은 이런 '엄살'을 부릴 자격조차 없다.) 다시 말해 '낭비'가 많은 '비경제적' 제도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서 폐기한다면 그건 더 큰 원칙(민중교육권 보장)을 훼손하는 일이다.

교육공공성은 경제에 효율적으로 복무하는 교육시스템을 만들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공공성이 논의되어야 할 영역에 대해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대상을 잘못짚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과연 효율성을 높인다는 신화로 포장되어 있는 경쟁의 논리가 과연 효율적인지도 의심해볼 대목이다.

시장원리의 확대가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보다 효능이 있다?

아주 극단적인 시장주의자가 아니라면, 공공성의 의의를 깡그리 부정하지는 않는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시장원리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절충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무리 '부분'적이라 해도) 시장원리 도입이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는지부터 따져물어야 한다. 이들이 말하는 공공의 이익이란 다름 아닌 '보다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상품을 제공받는 것'이다. 주체를 그저 '소비'차원에 가두어둔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시장화가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켰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사유화(혹은 민영화)가 의도한 것과 가져온 것은 자본의 이익이었지 다수의 이익(=공공의 이익)이 아니었다. 공공재도 시장원리에 맡기면(=사유화) 공급자 간 경쟁으로 가격은 하락하고 질은 상승하여 '소비자'에 유리하다는 논거를 펴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경쟁은 독점을 낳고 독점은 결국 높은 가격으로 이어져 다수는 자연스레 배제된다. 이것이 과연 공공의 이익인지 되묻고 싶다. 예컨대,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노동착취와 자본의 이익 증대에 그 목표가 있는 것이지 결코 공공의 이익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14). 교육의 사유화(혹은 사사화)가 빚어낼 결과도 다른 부문의 사유화에서 벌어진 일들과 다를 리 없다.

시장원리의 도입을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논거는 비효율의 온상인 관료주의의 폐해라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한 현실을 건너뛴 주장이다. 민주주의의 부재라는 현실을 돌아보지 않은채 관료주의의 폐해를 들먹여 곧바로 시장원리 도입으로 '개혁'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국가주의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민중 통제 원리의 구현을 모색함으로써 해결할 일이다. 시장원리에 편승15)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관료주의에 대한 환멸이 시장판으로 만들자는 주장으로 바로 이어지면 관료주의 못지 않은 아니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교육 공공성의 강조는 독점체제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교육공공성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 중 하나는 '학교교육의 위상' 문제다. 기존 공교육 시스템 하에서는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고 있다는 게 그 주요 논지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것'이 허용되지 않는 획일화로 나아간다고 본다. 그래서 '다양한 다른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일면 옳기도 한 문제제기이지만, 누누이 지적한 대로 이는 공공성의 강화에 그 탓을 물을 문제가 아니다. 만일 지금까지의 교육체제가 독점적이었다면 엄밀히 말해 그 주범은 학교가 아니라 학교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정권의 독점이었다. 학교교육이 획일적이었다면 그것은 통제의도가 도사린 정당하지 못한 정권의 제도교육 장악 때문이었다. 교육이 시장화되면 독점의 주체는 다양(물론 이것도 '상품적 다양성'일 뿐이지만)과 자율(실 내용은 소유, 소비, 경쟁의 자유)의 외피를 쓴 자본을 위시한 지배집단으로 바뀔 뿐이다.

공교육이 해야 할 역할을 생각하면 '독점'에 대한 문제제기의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교육이 과연 공공성(공공의 이익/만인의 기본적 권리의 사회적 보장)이라는 원칙을 지킨 가운데 목표를 설정했고 이를 실천했는지를 물을 문제다. 그렇다면 결론은 '다양성'의 강조 혹은 공교육의 위상 조정이 아니라 공공성의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문제로 이어진다. 공교육이 공공성이라는 원칙 하에 재구조화되는 것은 특정 집단의 교육독점을 막는 것이며, 결코 독점을 유발하지 않는다.

주--------------------------

1) 일각에서는 "교육은 공공재다"라는 명제를 놓고, "경제주의"라 몰아붙인다. 왜 교육은 교육의 논리로 짚어내지 않고 경제학에 기대려 하느냐는 비난이다. 공공재라는 용어의 용처는 기본적으로 경제학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물론 염두에 두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물질과 관계를 경제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태도의 맹점을 전제한 상태에서 공공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함을 미리 알려둔다.
2) goods :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의 것
3) services :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인간이 하는 행위. 교사의 교육, 운전기사의 운전 등
4) 의약품의 경우 '생존'과 직결된 '재화'이기 때문에 당연히 성격상 공공재여야 맞다. 그러나 의약품은 철저히 자본의 이윤추구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을 개발한 노바티스사가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어떤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처럼 한가롭게 재화의 스펙트럼에서 여기 두었다 저기 두었다하는 짓이나 일삼고 있을 일이 아니다. 글리벡 같은 재화도 기업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그에 대한 소유권과 상품화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사적 소유'를 골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탓이다. 설사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받아들인다손 치더라도, 재화나 서비스의 사회적 성격상 공공부문에 있어야 할 것을 상품적 가치로 판단하여 개별자본의 이윤추구 수단으로 넘겨주는 건 지적해야 마땅하다.
5) 『신자유주의와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내용을 대폭 참조하였음. 김성구, 심용보 편(2002), 문화과학사.
6) 김성구, 심용보, 앞의 책에서 재정리.
7) "그들에게 있어 완전히 사적인 일로서의 교육은 교육하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었고, 공적인 일로서 교육을 조직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권의 실현이었다." (신현직, 1990, 「교육기본권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1쪽) 1869년 8월, 제1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에서 의무교육에 대해 논의된 내용을 신현직이 정리하여 쓴 구절임.
8) 공공영역으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인 독일어 공공영역은 때로는 공개장, 공개성, 公衆, 공론장, 여론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영어 번역어 Public Sphere는 물리적 공간의 뉘앙스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공공영역이란 개념이 단지 물리적 장소의 의미 뿐 아니라 관계, 과정, 공공적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 및 그 주체의 행위라는 의미까지 담는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한 논자는 제안하기도 한다.
9) <하버마스의 도식>

사적영역

공공영역

공적 지배영역

시민사회

(상품교환과 사회적 노동영역)

소가족공간

정치적 공공영역 및

문화적 공공영역

(국가로부터 자율적)

국가

궁정

10) 여기에서 진지전이란 개념이 도출된다.
11) "최근의 예로 지난 50년대를 보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800개 노동신문이 매주 2천만~3천만 명에게 배포됐습니다. 더 과거로 돌아가 20세기 초를 보면, 지역 사회와 노동에 기반한 언론과 기타 언론이 기업 언론과 대등한 상태였습니다. 최근의 양상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법정 행동주의와 기타 사적인 압력에 밀려 정부가 힘의 집중을 허용한 탓이며, 이 흐름은 뒤바꿀 수 있고 극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노암 촘스키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진보교육연구소 홈페이지 이론분과게시판 참조)
12) 고길섶은 "학교라는 현장은 <공공영역>이며 공공성 수행의 장소하고 알려져 있지만, 항상 사적 영역화 및 사사성 수행의 과정과 얽혀지며 긴장하고 갈등하고 충돌하는 장소다."라고 하였다. 즉, 학교가 공공영역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살핀 대로 학교는 엄밀히 말해 공공영역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공공영역이 제도교육 장면에서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 공공영역에 대한 학문세계의 논의에 비추어보면, 그는 용어 사용을 엄밀하게 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는 공공영역 혹은 공론영역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정의 자체가 논자에 따라 유동적일 수는 있다. 고길섶의 논의를 수용하여 학교를 공공영역이라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는 현실에서 '왜곡'(공공영역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면을 보이는 현실)이 나타난 이유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왜곡이라는 현상을 문제삼을 뿐이다. (그의 규정에 따라) 학교를 공공영역이라 했을 때도, 학교가 공공영역답지 않은 사실 자체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당연히, 이는 공공영역이 중립적이고 자율적인 정치적 공간으로 남아있기 어려운 탓이다. 고길섶의 논의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순수결정체'의 형태로 공공영역의 성격을 100% 구현하고 있는 곳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촘스키의 말대로 자본을 위시한 지배집단은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공공영역을 끊임없이 장악하려 든다. 이건 그들의 본능이다. 한국의 학교가 공공영역답지 못하다면 이건 다른 공공영역 일반과 마찬가지로 자본 혹은 지배 집단의 '전횡' 탓으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기회의 확대 과정에서 사적 자본(사학 재단)과 학부모의 개별적 부담에 의존한 바가 크다. 애초 출발 당시부터 공공영역적 성격에 위배되는 모습이었다. 용어사용을 정확하게 하면, 공교육임에도 기관의 소유가 공적이지 못한 상태로 출발한 데서 오는 왜곡이다. 심지어 그는, 사설학원이라 해도 공공적 기능에 충실하다면 공공영역으로 불러야 하고, 학교라 해도 이사장이나 학교장이 사적 관계로 전횡한다면 그 학교는 공공영역을 가장한 사적영역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적 주체가 '자율'적으로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걸 기대하는 건 모순이다. 구체적으로, 기존의 사학이 보인 모습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개인의 자율성'에 바탕한 공공성을 주장하는 건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사학이 정부기관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사적으로 전횡하는 마당에 완전히 자율을 부여받은 사적주체가 공적기능을 수행할 리 만무하다. 이는 공/사의 구분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서 비롯되는 오류다. 그의 공공성 논의는 철저히 '개인'에 치우쳐 있으며 그가 사용하는 자율성 개념 역시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화적 차이의 인정'에 매몰되고 있다.
13) 신자유주의 득세 이후 자율성, 다양성이란 말만큼 많이 등장하고 또한 많이 왜곡된 용어도 없다. 자율성과 다양성은 단어 자체로만 보아서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용어가 쓰이는 '맥락'과 그 용어를 사용하는 '주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즉, '누구의 개념 규정인가'가 중요하다. 자율성과 다양성이란 말을 신자유주의자들이 선점하여 자신들의 정의대로 사용하면서 (이 역시 언어에 대한 공적 성격을 탈각하고 자기 멋대로 '전유'해버린 경우다) 이 용어들을 입에 올리기조차 조심스러워져 버렸다. 이미 자율성과 다양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언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특정의 맥락에서 사용되어 이데올로기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그 용어를 아예 진보진영의 단어목록에서 빼버리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오염'되지 않은 '단어'는 사실 얼마 안 된다. 차라리 세상의 절대다수인 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 서서 보편의 이익을 담아 개념정의를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공공성'이다.
14) 김성구, 심용보, 앞의 책
15) 우리교육 1998년 8월호에「신자유주의와 교육의 공공성 문제」를 쓴 천세영은 "공공재는 국가와 정부관료를 위한 민간재로 둔갑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라며 교육이 공공재가 아니라는 논지를 펴고 이어 '공정거래의 확립'을 주장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교육시장을 구성하고 여기에서 공정거래만 확립하면 공공성은 담보된다는 이야기인데, 글쎄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완전히 공정한 거래가 가능한 시장이 성립될 지도 의문스럽고, 시장은 기본적으로 '경쟁'이 지배하는 곳인데, 그런 시장판에서 교육이 무엇으로 다루어질 지도 대단히 걱정스럽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김기수도 마찬가지의 논거를 펴는데, 이 둘에 대한 비판은 천보선, 김학한(1998)『신자유주의와 한국교육의 진로』1장 후반부를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