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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정치의 계절에 생각해보는 몇 가지

2002.04.04 11:35

이기조 조회 수:1685 추천: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치의 계절에 생각해 보는 몇 가지

이기조 ∥ 대전지부 정치위원회 사무국장, 회원

1.

뒤늦게 늦깎이로 전교조에 가입한 나는 작년 한 해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하고 투쟁했다. 아울러 가끔 본부와 지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나의 생각을 담은 글을 실명으로 올리곤 하였는데(부족하나마 내가 가진 생각의 일단을 보고 싶은 사람은 검색해 보시길) 그게 지부 활동가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지부에서는 처음 가입한 조합원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해 반가웠을 게다. 2002년 지부 집행부 구성에서 나는 지부의 정책위원 겸 정치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게 뭐 내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여전히 조합원들이 집행부 맡기를 꺼려하는 지역의 사정을 반증하는 것일 게다. 물론 푸른 20대의 대부분을 80년대 대학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보낸 나에게 '운동'이 생소한 것이 아니었고, 운동에 입문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내린 90년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원칙을 버리면 죽는다'라는 말을 따르고자 하는 '좌파'였다.

2.

 87년 대선(좌파의 민중후보론과 우파의 비판적 지지)

운동진영 내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아마 87년 대선부터일 것이다. 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출발한 학생운동은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와 결합하게 되었고, '노동자가 변혁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은 당시 운동진영 내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제였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노동현장으로 투신하였으며 80년대 노동자운동은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개량주의라는 비판은 최고의 모욕적인 말이 되었으며, '노동해방'은 집회 때마다 외쳐지는 대중적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85-86년 학생운동에서 시작하여 급속하게 세력화된 민족해방-주체사상파가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을 통하여 재야운동의 김대중계와 하나가 되고 이 힘이 운동권의 다수파가 됨으로써, 한국의 재야연합조직(민통련)과 학생회연합조직(전대협)을 한 손에 움켜 쥔 김대중지지-민족해방파의 운동권 지배시대가 열린 것이다. 압도적 다수를 형성한 것에 고무된 이들은 87년 대선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천명하고 '열광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했다. 이 때에 주체사상파의 형성과 앞다투어 시작된 레닌주의적 비합법 조직운동의 진영에서 '민중후보'를 제기했다. 이때부터 대선에서의 태도가 운동권에서의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운동권 다수파(민족해방-주체사상파)

지금도 운동진영 내의 다수파는 여전히 민족해방-주체사상파이다. 민족해방그룹 모두가 주체사상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주체사상파가 주류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스스로 주체사상을 신봉하지 않더라도 근 20년을 지배해 온 다수파 운동권 문화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주체사상파의 가치체계와 어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운동진영의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대협-한총련으로 이어지는 학생운동, 민통련-전민련-전국연합으로 이어지는 민족민주운동 공개조직, 민주노조운동내의 최대 분파조직인 '민주노동자 전국회의'가 바로 넓게 포진되어 있는 민족해방-주체사상파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진영 내에 있는 사람들 중 혹자는 '나는 주체사상을 따르지 않는다'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민족해방-주체사상파의 이념은 주체사상의 신봉 여부를 떠나서 하나의 운동권 이데올로기가 되어있다. (최근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대단한 활약을 벌이고 있는 자칭 사회민주주의자 진중권은 집요하게 민주노동당 내의 주체사상파를 공격하고 있는데, 누구하나 실명으로 떳떳하게 반박하는 사람이 없으며 기껏해야 '나는 주체사상이 뭔지 모른다'는 답답한 얘기만 늘어놓고 있다.) 민족해방-주체사상파 노선의 핵심은 자주-민주-통일이다. 그들에게 있어 최대의 과제는 민족의 통일이며, 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미국을 몰아내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통일(민족)/반미지상주의는 그 동안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진로를 심각하게 질곡시켜 왔고 현 단계 진보운동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최근 사회당 서울시지부가 주최하는 '북한강좌'는 북한/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강의에서 오세철 교수는 "북한은 사회주의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부패한 스탈린주의 국가, 노동자에 대한 억압체제를 통해 형성된 독특한 모순체제일 뿐이며, 지금의 통일이라는 것은 '확대된 자본주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을 기반으로 한 연대가 아니고서는 통일은 무의미하다"며 감성적인 논리로 통일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원한 좌파의 고향(민중회의)

비판적지지-민족해방파의 열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87년 대선에서 3위로 낙선했고 비판적지지-민족해방파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그들이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하여 창안해낸 용어가 바로 '대동단결'이다. 그들에 의하면 여전히 자신들을 주류로 하는 조건으로 운동권은 대동단결해야 했다. 한편 재야 정치권은 김대중지지 여부를 기준으로 김대중지지- 민족해방파(김근태)와 반김대중지지-독자세력화파(장기표, 이부영,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로 나뉘었는데, 반김대중지지-독자세력화파의 일부는 의원배지를 좇아 운동권에서 영원히 탈퇴하였고 나머지가 민족해방-주체사상파와 대립하던 좌파 양대 비합조직(인민노련/노해동) 파견원들의 지지를 받아 민중당을 창당했다. 당시 당권파는 이우재, 장기표, 정태윤, 이재오 등이었고 인민노련 파견 대오가 이들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노해동을 계승한 사노맹의 파견원들과 20대의 젊은 활동가들이 민중당 안에서 좌파블럭이라는 비주류를 형성하여 당권파들에 맞서 개혁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당권파가 그들을 제명하자 오세철 교수가 이에 항의, 탈당하여 좌파 합법정당을 꿈꾸는 민중정치연구소를 만들었다. 전국연합을 김대중지지의 정치적 대표체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며 좌파 전국연합을 꿈꾸던 사람들(서민련/사민청)과 민중정치연구소가 합쳐 만들어낸 것이 바로 민중회의이다.

민족해방파의 변신(회개와 시민운동으로 이전)

90년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에서 이탈했다. 그 동안 김대중지지를 노골적으로 표명하여 진보정당운동을 방해하던 민족해방파 선배의 일부는 회개하여(강철서신의 저자로서 한국의 주체사상 창시자 김영환은 현재 '북한민주화 네트워크'인가 뭔가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반가운 일이다. 뒤늦게 나마 북한사회의 폐쇄성을 깨닫고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니 말이다.) 보수당으로 들어가 개혁세력임을 자처하고 있거나 개량주의 시민운동(90년대 들어 80년대 민중운동과는 사뭇 다른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등장하여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를 족벌경영의 재벌과 군사문화가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로 보는 시민운동은 모든 시민이 법적으로 동등한 계약의 주체가 되는 제대로 된 자본주의사회를 꿈꾼다. 그들은 부정부패에 대하여는 소리 높여 반대하지만 자본주의 질서의 수호자인 국가권력에 대하여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임금노동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를 원한다.) 활동을 하고 있다. 활동의 일선에 있지는 않지만 개혁세력이라 자처하는 386세력 다수가 민족해방파 출신이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묻혀 있다가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 비판적 지지의 폭발적 힘으로 뭉치기도 한다.(최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노사모'가 바로 이들이 주역이 되어 만든 모임이다.) 물론 그들 후배들의 다수는 아직도 주체사상의 망령에 붙잡혀 변절한 선배들을 증오하고 있지만 말이다.

92년 대선(백기완 선거운동본부)

한편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최대/최강의 노동-정치운동 그룹 인민노련은 사노맹을 제외한 전국의 사회주의 써클을 통합하여 한국사회주의노동자 창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가 90년 초반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신노선'으로 비합법 조직운동 포기를 선언하고 합법공간으로 나왔다. 그들은 합법잡지 <길을 찾는 사람들>을 발간한 바 있고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를 발족하여 활동하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결성했다. 현재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황광우, 노회찬, 주대환 등)이 바로 진정추파이다. 인민노련과 함께 좌파의 두 축을 이루던 사노맹(저 유명한 노동해방시인 박노해가 바로 이 조직의 중앙위원으로 있었는데, 이후 사노맹계열이 지리멸렬해 가면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이 김철수를 중심으로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를 결성했다. 비로소 92년 대선에서 비판적지지-민족해방파에 맞서 진정추, 사추위, 민중회의, 전국노련(전노운협에서 인민노련 파견원들과 제파PD가 주동이 되어 선노론을 비판하며 만든 조직인데, 인민노련이 한사노당 창준위에 힘을 집중하는 바람에 92년 당시에는 제파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92년 대선 이후 진정추파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이 힘을 모아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나 23만표라는 저조한 득표는 민중후보운동진영으로 모였던 좌파대오를 해체시켰다. 이후 통합 논의가 계속되어 사추위와 민중회의가 통합 민중정치연합(민정연)이 되고 민정연이 진정추와 통합 진보정치연합(진정연)이 되었다. 진정연에 가담하지 않은 민정연 일부는 다시 노동자중심의 진보정당추진위원회(노진추), 노동정치연대(노정연)를 결성하게 된다. 한편 민중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젊은 활동가 그룹이 진보정당운동에서 우회하여 우리청년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이후 함께 하는 노동청년회(함노청)-한국노동청년연대(한청련)으로 탄탄히 실력을 키워갔다.

97년 대선(국민파의 득세와 개량주의)

50개 가량의 청년단체가 주체사상의 지도력 아래 모여있던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이 주체사상파 조직의 하나인 자민통파가 주동하여 만든 푸른 사람들과 함께 주체사상을 버리고 현대적 국민정당의 꿈을 키웠다. 한국운동권 최대의 인맥이라고 자신하는 이 회개한 주체사상파가 자신들 스스로 정치의 전면에 나설 것을 다짐하며 추구하는 것이 현대적 국민정당이다. 이 현대적 국민정당 노선이 전국연합을 움직여 그 동안의 김대중 무조건 지지를 철회하고 독자세력화를 추구하도록 했으며, 민주노총 지도부를 움직여 국민후보 운동에 나서도록 하였다. 독자정당화 노선에 운동권 다수파인 민족해방파가 나섰다는 사실은 좌파 일부에게 귀가 솔깃한 사건이었다. 구래의 좌파 중 좌파라 불리는 것에 미련이 없는 진정추파가 제일 먼저 과거의 반대파였던 민족해방파와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만든 것이 국민승리 21이다. 한편 좌파 통합 조직 진정연에서 빠져있던 나머지 좌파가 오세철 교수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 정치연대를 만들었다. 정치연대는 국민승리 21 참여를 두고 다시 민중후보운동 계승파(한청련)와 국민후보운동 합류희망파로 나뉘어 충돌하고 결국 한청련이 빠진 정치연대가 국민승리 21에 참여한다. 그러나 여전히 비판적 지지(당선 가능한 민주 후보 지지)라는 망령이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속에 두 눈 부릅뜨고 있었다. 원래 국민후보라는 것이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 자리를 예매해 놓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던 상황에서 나온 전략이다. 그러나 아들 병역 문제로 이회창이 추락하고 김대중이 당선이 예견되면서 한총련은 전국연합에게 국민후보 방침을 재고하라고 강력히 요청하게 되고 전국연합내의 일부 지역연합(호남)은 국민후보의 사퇴를 요구한다. 결국 좌-우파가 거의 집결한 국민승리 21은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권영길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고 희대의 코미디 '일어나라 코리아'를 외쳐 싸웠지만 30만표라는 득표로 마감하게 된다. 사실 이는 92년 백기완 후보가 얻은 표인 23만표와 비교할 때 너무나 낮은 득표였다. 전국연합이 빠져나간 국민승리 21은 민주노총의 지지(민주노조운동의 역사는 70년대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되었다. 85년 구로동맹파업을 거쳐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거침없이 진군하던 한국의 노동자들은 90년 전노협을 건설했다. 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건설되면서 민주노조 단결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동안 민주노조운동을 추동하고 지원해왔던 노동운동단체들의 참여를 배제함으로써 노동조합만으로 운동을 풀어가려는 조합주의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어 95년 민주노조 진영은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96-97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을 통해 합법화를 쟁취한다. 그러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내세우는 국민파의 득세는 개량주의가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파라는 말은 97년 대선 국민후보파에서 나온 것이며, 민주노총 내의 다수파인 국민파는 프로운동권을 우습게 아는 노동자주의와 80년대의 주체사상파의 두 중심에 진정추파가 첨가된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파에 대한 비판은 <교육비평> 최근호를 참고하시길)에 힘입어 99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민주노동당' 당명이 5표 차이로 채택되어 2000년 창당한다.

자본주의 근본적 반대파(노동자의 힘/사회당)

정치연대 일부는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오세철 교수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힘을 결성한다. 노동자의 힘은 현재의 합법정당운동이 의회주의(선거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으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합법정당만으로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원칙적으로 옳다. 따라서 반합 정치조직의 성격을 띠며 노동자를 계급적으로 조직하는 활동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진보정당운동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근본적 반대파로서 진보정당에 대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하리라 본다.) 민중회의 초동주체가 중심이 되어 건설한 우리청년회-함노청-한청련 그룹은 99년 청년진보당을 창당하여 2000년 총선에서 서울 전지역구 출마라는 기록을 낳았고, 2001년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활동하고 있다. 사회당의 핵심 노선은 '반자본주의/반조선노동당'으로 표현된다. 반자본주의는 좌파가 그 동안 지켜온 버릴 수 없는 원칙이며, 반조선노동당은 한국의 진보운동을 질곡시키고 있는 조선노동당추종세력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표명이다.(사회당에서 말하는 반자본주의는 국가사회주의/유럽식 사회민주주의/북한의 독재사회주의 모두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는 것이다. 물론 대안체제가 뭔가는 선명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는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에서 오해하고 있는 반자본주의/반조선노동당은 전혀 모순된 것이 아니며, 민족해방-주체사상파가 민족/통일지상주의에 빠져 감싸고 있는 북한은 수령독재체제이며 조선노동당을 추종하고 있는 세력이 운동진영내에 존재하는 한 우리의 진보운동은 계속 질곡에 처할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한 인식의 표현이다. 민주노동당 강령에도 '노동자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대안적 체제로 제시하고 이를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하였던 사회주의 이념과 전통을 계승하되, 역사적으로 현존하였던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가 지녔던 비민주성과 관료적 억압 그리고 경제적 비효율성을 극복하며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민주노동당이 그래도 건강할 때 제정된 것이며 현재 국민파라는 개량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로 가고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으며, 나아가 민족해방-주체사상파가 다수파로 등극한 다음에야 민주노동당이 갈 길은 뻔하다. 조선노동당추종세력에게는 조선노동당이라는 당이 이미 존재하며 민주노동당은 그야말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 강화에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새로운 주체 형성의 필요성(전국노동자회)

최근 여기저기서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말한다. 흔히 노동자 계급을 변혁의 주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에서 국민파/개량주의파가 득세하면서 근본변혁에 대한 관점이 실종된 지 오래다. 근본변혁의 전선에 나서지 않는 노동자는 노동자계급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어쩔 수 없이 자본가 밑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들이 '임금 등 고용 조건의 개선'을 위해 만든 방어적인 조직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자본에 적대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본가와 대립하고 타협해 왔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노동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자본은 국가의 힘을 빌어 불법적인 것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자본(가)는 노동(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마냥 법의 테두리 밖에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에 합법화하여 자본주의적 파트너로 순치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의 위치와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근거한 노동자 대중의 열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자본 및 국가와의 대립 속에서 그 위치와 역할을 변경하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어떤 이념적 지향을 가진 주체들이 이끌어 가는가가 노동조합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의 해결에 일조하려면 자본주의 속에 규정되어 있는 자신의 경계까지 그 활동을 밀고 나가야 하며 그리하여 그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효상의 '민주노총에 관한 단상'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90년대 후반 등장한 것이 소위 현장파라 말하는 현장조직대표자회의이다. 이들은 민주노총대의원대회 등에서 민주노총 주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여 왔고 총파업은 언제나 그들의 구호였다. 그러나 대기업 단위노조운동에 주력하는 현장조직의 느슨한 연대체로는 단위노조의 이해를 넘어서는 강력한 전국적 정치행동을 조직할 능력은 없었다. 물론 민주노동자전국회의라는 현장파와 비교가 되지 않는 안정된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은 무엇보다 확실한 사상의 중심이 서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가진다. 문제는 그 사상이 조선노동당추종주의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민파라는 외부의 명칭처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타개할 주체라기보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우경화를 선도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주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현재 한국노동자운동연대/한국노련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 건설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미 서울과 인천 지역에 '노동자회'라는 명칭으로 준비되고 있으며 조만간 전국 작업을 마친 후 5월 메이데이 전후 전국노동자회가 건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것이 민주노총의 대안조직은 분명 아니며 오히려 민주노총의 주도 분파로서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조직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본다.)

2002년 대선(분별 정립의 시대로)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민주노동당은 이번에야말로 집권의 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매진하자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2012년 제1야당, 2016년 집권이라는 야심만만한 포부까지 내비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60만 조합원을 무기로 정치방침으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결정하였으며(민주노총은 엄연한 노동자대중조직이다. 그러한 민주노총이 특정정당 지지를 정치방침으로 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원칙에서 이탈했다. 노동자정치세력화란 말 그대로 '노동자를 계급으로 조직하여 정치세력으로 성장시킨다'라는 말일 텐데 과연 노동자 계급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체노동자 억압의 근원인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에 대한 반대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를 계급적으로 정치의식화하여 조직하는 것이 요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가도 문제지만 다수파라는 이유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대중조직의 정치방침으로 결정한 것은 민주노총내의 민주노동당 지지자의 단결과 세력화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와 별도로 그 동안 비판적 지지의 선봉에 서 왔던 전국연합과 한총련이 한국민족민주전선(자칭 주체사상파 전위조직)의 교시(?)에 따라 민주노동당으로 집결하고 있다. 작년 서울 구로-동대문 보궐선거에서 사회당에 망신을 당한 민주노동당은 청년진보당 시절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급기야 사회당에 통합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노동당에서 추진하는 대통합은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통합이 아니며 민주-진보대연합으로서 모든 민주-진보세력을 결집하자는 것이다.(작년 말 황광우 민주노동당 정치연수원장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에 실린 '사회당에 드리는 일곱 가지 질문'이라는 글에서 사회당에 대해 점잖게 타이르더니 최근에는 분열주의의 멍에를 씌우려 하고 있다. 그는 사소한 차이를 넘어 통큰 단결을 얘기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니던가. 그 지긋지긋한 대동단결론이라는 망령이 살아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든다. 이제 좀만 더하면 되는데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분열을 초래하지 말고 단결하라! 그래서 그들은 항상 다수파로 모이지 않으면 종파주의로 몰아 단죄하였다. 그들은 차이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진정한 단결은 차이를 드러내놓고 극복하는 것이라는 기본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그들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일지 몰라도 끝내 가는 길이 다르다면 같이 할 수 없지 않는가. 아니 정당이 애들 장난인가? 정말 강력한 진보정당이 되기 위해서 이제 진보정당은 이념정당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념이 다르다면 대중조직은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정당운동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회당에서도 언제까지나 분열의 멍에를 쓰고 있을 수 없어 당대표 회담을 통하여 원칙/이념에 입각한 통합을 제의했다. 그러나 원칙/이념이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면 됐다. 이제 서로 경쟁하면 되고 실천의 장에서 연대하면 된다. 그것을 두고 분열주의니, 종파주의니 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사회당 입장은 조선노동당추종세력과도 올바른 실천이라면 연대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조직/입장에 연대한다는 것은 아니며 현실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내의 민족해방-주체사상파는 전국연합을 포함한 범계층연합당으로서 민족민주당으로의 재창당 계획을 추진중이며 이미 민주노동당 여러 지구당에서 토착세력과 한 판 힘겨루기(민주노동당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민족해방파의 용산지구당 장악과정에서 생긴 문제와 아리랑 축전 참가를 제 1의 사업계획으로 설정하여 생긴 경기도지부 사업계획 문제는 그 일단이라 볼 수 있다.)가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민주노동당을 정파-계급(층) 연합당이라 하여 그러한 갈등이 당내에서 용해되기 바라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민주노동당내의 구래의 좌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우파와의 예속적 동거를 청산하고 다시 좌파의 길을 걷느냐, 아니면 국민파로서 개량의 길을 지속할 것이냐'인 것 같다. 이제 그 분별 정립의 시대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이다.

3.

전교조에 대한 얘기로 이 글을 정리하자. 이제 전교조 새내기에 불과한 나로서는 원칙적 얘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교조 또한 위의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전교조 또한 민족해방-주체사상파/국민파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물론 다수의 조합원은 정치적 이념이 뭔지, 운동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또는 자기의 권익을 위해 조합에 가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은 항상 주도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 2001-2002년 사업계획으로 잡혀있는 '국민과 함께 하는 단체교섭과 제도개선투쟁이' 은 민주노총의 국민파의 인식과 동일하고 올해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상설위로 통과된 통일위원회 사업은 민족(통일) 지상주의자의 인식이 들어있는 것이다.(지난 번 전국일꾼연수에서 제시된 '2002년 전교조 통일사업 계획'의 '김정일 답방시 환영운동 전개'와 '3-5월 통일위 사업' 문건에 나오는 '아리랑축전 참가자 모집'이 대표적인 것이다.) 본부에서 조합원 교육사업으로 제시되고 있는 활동가 프로그램이 '사회적 조합주의'(합의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정치방침도 문제가 많다.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정치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십분 인정한다 해도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특정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진보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아닐 텐데(나만의 착각인가. 만약에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현실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분열주의다. 문제는 민주노총내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현실에서 민주노총 정치방침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로 관철시키려 한다는 것에 있다.) 여전히 진보정당 통합 운운하면서도 민주노동당 이외의 진보정당(정치조직)에 대해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지난 겨울 전교조 전국일꾼연수에서 사회당 당보가 배포되었다. 이에 전교조 본부의 한 간부는 주최측이 허락한 유인물이 아니라며 회수할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 사회자는 주최측이 허락되지 않은 유인물이 뿌려져-무슨 불온 유인물인가-죄송하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장소에 아직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노동당 정책이론지 '이론과 실천'을 사회자가 공개적으로 선전하고 민주노동당 가입서가 행사장에 전시되어 있던 것에 반해 이러한 처사를 어떻게이해해야 할까) 한편 전교조내의 공식 조직은 아니지만 진보적 교육운동을 고민하는 '진보교육연구소'가 있다. 나 역시 이 연구소의 회원이며 이 연구소와 긴밀한 우리 지역의 진보교육연구모임인 '진보교육실천연대'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교조 주류에 대항하는 비판그룹이 형성되어 있는데, 아마도 민주노총 분류법에 의하면 얼추 현장파가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어정쩡한 태도이다. 일부는 '노동자의 힘' 조직원으로 보이나 다수는 민주노동당을 비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편다.(지난 겨울 진보교육연구소 워크숍 장소에 사회당 당보가 놓여있었다. 이에 어느 회원은 연구소 안에 프락치가 있다는 말을 서슴치 않았고, 어느 회원은 워크숍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것을 권유했다.) 이제 비판그룹에게도 명확한 입장이 필요하다. 올 겨울에 전교조 위원장 선거가 있을 예정이란다. 나는 주류에 반대하는 비판그룹이 지도부를 맡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지도부가 바뀐다고 해서 전교조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파(개량주의)/자본주의 근본적 반대파(근본주의)'로의 분별 정립! 전교조 비판그룹도 예외가 아니다.(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다. 마땅히 이인제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노무현의 기세가 대단하다. 민주노동당 주대환은 '어차피 이인제가 되는 것이니까 노무현지지자로 하여금 일단 노무현을 지지하고 경선에서 이인제가 되면 노무현 지지자는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면 된다'라는 괴상한 논리를 폈는데, 아직은 모르지만 만약에 노무현이 후보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지난 97년 대선에서 전국연합이 국민승리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다가 막판에 김대중이 될 거 같으니까 오락가락하였는데, 이번에 노무현이 후보가 되면 과거의 비판적지지 세력은 과연 어떻게 할지. 지난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30만표를 얻었는데 민주노동당 후보가 그들이 목표하는 100만표를 얻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