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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백혈병 환자는 살고싶다

2001.11.08 14:17

정혜주 조회 수:1438 추천:4

백혈병 환자는 살고싶다!

백혈병 환자는 살고싶다!
주목받는 글리벡

정혜주(민중의료연합 회원)

 

글리벡은 만성골수성백혈병(CML) 치료제로 노바티스사의 신약이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알려진대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수개월 내에 사망하고, 치료를 하더라도 반드시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아주 치명적인 질환이다. 글리벡은 이전의 항암치료가 어렵거나 효과를 보지 못했던 환자에게 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약제이며 대부분이 주사제인 다른 약물과는 달리 경구용제제로 투약이 용이하다.  따라서 글리벡의 개발이 백혈병 환자들에게 삶의 희망으로 여겨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난 2001년 5월, 미 FDA의 정식승인을 받은 후 '기적의 약'으로 거론되며 엄청난 이목을 집중시킨 글리벡은 지금 국내에서 또다른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환자복을 입은 백혈병 환자들이 거리로 나와 제발 글리벡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약사와 정부를 상대로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의 약'이 '절망의 약'으로...

처음 글리벡의 소식이 한국에 전해졌을 때, 환자들은 하루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관계당국을 찾아다니며 민원을 제기했고,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이루어 글리벡은 금방이라도 환자의 손에 전해질 듯 했다. 그러나, 노바티스가 환자들을 상대로 터무니없이 높은 약값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글리벡의 소유주인 노바티스는 미국과 스위스의 약값과 동일하게 최소 월 300만원의 가격(한 캅셀당 25,000원)을 제시했으며 전세계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자사의 원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약값이 각 국 정부의 개입으로 어느정도 조정이 가능했지만, 글리벡은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미국가격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환자들은 보험적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치료비를 제외하고 오직 글리벡 약값만 매달 100만원이상을 부담해야 하기에, 사실상 치료를 위해서 가정경제가 파탄나거나 그나마 파탄 날 재정조차 없는 환자는 생명을 포기해야한다.  

한편, 약가결정과정에서 정부는 글리벡의 보험약가를 17,055원으로 정하고 노바티스사의 의견을 물었으나, 노바티스가 기존약가를 고수, 수용불가 입장을 보이자 다시 보험약 가격을 올려 17,890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노바티스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한국에서의 글리벡 공급중단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현재 글리벡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들은 매월 300∼600만원을 자비로 모두 충당하고 있고 노바티스와 정부의 기약 없는 줄다리기 속에서 그나마 빚을 낸 돈이 떨어지면 당장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노바티스의 시간끌기-사실상의 협박과 정부의 무책임으로 백혈병 환자들은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 뿐만아니라, 돈 때문에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치료약을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하는 현실!  '기적의 약'이 제약회사의 무리한 욕심으로 '절망의 약'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글리벡을 둘러싼 쟁점

이러한 사태의 원인 중 하나가 의약품 지적재산권이다.  WTO협정 하의 TRIPs(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는 개발자의 이윤을 보장해준다는 이유로 특허권자에게 20년간의 독점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고, 때문에 이들은 환자가 약을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할 수 있는 가격으로 약을 팔고 있다.  글리벡의 경우, 특허법에 따라 노바티스만이 유일하게 글리벡을 생산, 판매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노바티스는 마음대로 환자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허법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국가에 대해 제약회사가 압도적인 정치적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을 보장해 주고 있다.  

의약품 특허가 없다면 또는 강제실시와 같이 정부의 권한이 보다 확실히 보장된다면, 노바티스가 약값이 25,000원 이하면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물론 노바티스는 왜 가격이 25,000원 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인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하여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글리벡을 다른 곳에서 생산할 수 있기에 문제는 오히려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글리벡의 싸움은 생존권이 재산권의 우위에 서야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고, 이는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건강권 싸움-대표적으로 AIDS운동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하는 이유가 된다.

글리벡에서 또하나 중요한 문제점은 정부의 국민건강에 대한 책임과 의지부족이다. 이번 협상에서 정부는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노바티스의 입장을 고려하여 약값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하거나, 이마저도 지속시키지 못하고 추가인상을 하는 등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라도 백혈병이나 암과 같은 소위 "비싼"병에 걸리면 가정이 파탄이 날 정도로 건강보험은 말만 보험일 뿐, 할인 티켓에 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보장성을 확대하여 환자의 부담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보험적용대상을 축소하겠다고 한다. 약값이 너무 비싸서 보험재정에 부담이 되니 그에 대한 보완으로 보험대상 환자수를 줄여서 재정을 줄여보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은 얼마전 자국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국적제약회사에 맞서 강제실시권을 발동하는 브라질 정부와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다.  

우리는 책임있는 정부를 원한다!

글리벡 싸움은 다국적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그리고 무책임한 정부를 상대로 한 백혈병 환자들의 생존권 투쟁이다.  믿지 못할 정부를 둔 탓에 이들은 거리로 나서서 직접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글리벡은 시작일 뿐이다. 현재의 지적재산권이 의약품을 이윤놀음에 충실한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한 특허를 이용한 제약회사의 횡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의 문제는 빈곤으로 신음하고 있는 아프리카만의 문제도 지구 반대편 남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다. 때문에 오는 9월 19일 열릴 TRIPs 이사회에서의 논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정부는 글리벡 약가결정에 있어, 노바티스의 수용여부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국민건강을 지킨다는 공공의 목적으로 글리벡 강제실시를 실제적으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강제실시는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다국적제약회사를 상대로 국민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명확한 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사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정부의 책임이다.   

정부는 의약품 지적재산권이 건강을 훼손하고 있는 현재의 문제점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들의 노력에 지지를 표해야 하며, 함께 노력해야 한다. 또한 취약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여 더 이상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슬픈 한국의 오늘이 반복되게 하여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