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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착취에 대한 망각'의 기억

2001.11.08 14:15

송권봉 조회 수:1568 추천:4

'착취에 대한 망각'의 기억

'착취에 대한 망각'의 기억

송 권 봉(교육문화분과원)

 

메멘토 -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레너드의 기억 저편에는 아내와 함께 했던 행복한 나날들이 있다. 범인들에 의해 아내가 강간당한 뒤 살해되기 전까지 그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그의 아내는 강간당한 뒤 살해되고,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10분 이상을 기억 못하는 상태다. 그 상태 때문에 레너드는 주변 사람들 - 예컨대 테디와 나탈리 - 에게 끊임없이 이용당한다. 관객의 기억조차 의심케 한다는 '메멘토'는 '끝 장면의 원인'이 '첫 장면의 결과'라는 면에서 실은 매우 단순한 구조다. 레너드가 테디를 죽였다. 왜? 처음에 테디는 우연히 '존 G'라는 자신의 이니셜을 말했고, 주인공은 이를 기억했으며 주어진 10분 안에 테디의 차번호를 메모했다.

시간이 흘러 결말(즉 영화의 처음)에 이르자 주인공은 천신만고 끝에 기억의 편린을 모아 멋있게 복수한다. 그러나 그 복수는 '아내를 죽인 범인에 대한' 응징이 아니었다. 테디는 단지 주인공의 상태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패한 형사였다. 결국 주인공은 주어진 10분동안 자신의 기억을 조작해 빗나간 복수의 화살을 쏘았다. 기대했던 선한 자는 사라지고 그저 그런 인간들과 '권선징악'에 속은 관객만 남았다. 그러나 이것 뿐일까?

 

복지후퇴, 보험사기와 수사관

문제는 결국 '기억'이다. 레너드가 '새미'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영화 속 흑백화면에 나오는 새미. 보험 수사관으로 일하던 레너드는 새미의 사건을 맡는다. 새미는 커다란 사고로 3분 이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엄청난 보험금을 타기 위해 술책을 부린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조사에 착수한다. 주인공은 그의 '뇌'에 하자가 없음을 논리적으로 밝혀낸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새미의 아내는 레너드 말대로라면 남편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새미는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아내는 그의 기억을 되찾아 주기 위해 극약처방을 내린다. 당뇨병 환자인 아내는 새미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아 달라고 한다. 3분마다 아내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는 새미. 그러나 그는 3분전에 자신이 주사를 놓았다는 걸 까맣게 모른다. 결국 아내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새미는 결국 정신병동에 수감된다. 비극이다. 그러나 이는 새미만의 비극이 아니다.

이윤율이 하락하자 자본의 효율성 제고가 중요해진다. 국가부문의 확장을 통해 유효수효를 창출하고자 했던 복지영역은 대거 민영화되고, 국민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존재했던 각종 사회보장제도는 후퇴한다. 대중은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업의 공포에 직면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제도적 보장은 '안전하지 못한 망' 정도로 축소된다. 기금의 형태로 모아진 자본 역시 은행 이자율 이상의 잉여를 낳지 못하게 되자, 각종 보험기금을 엄격히 관리하기 위한 수단들이 동원된다. 영화 속에서 레너드가 전직 보험 수사관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레너드는 각종 보험사기 사건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하여, 유능한 평가를 받는 자다. 새미의 사건 역시 레너드는 사기극으로 처리하여 '보험금'을 아끼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레너드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도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우리는 수없이 많은 보험사건들을 접해 왔다. 자기 몸을 자해하거나 아내를 죽이고 자식을 유기하는 형태로 보험금을 타내려다 결국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아마 그 과정에서 우리 경찰관과 검찰 혹은 보험회사 직원들은 유능함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리라.

 

노동대중의 공포와 '착취'에 대한 망각

한편 새미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레너드의 상상과 몸안 문신 속에 존재한다. 실은 레너드가 곧 새미다. 한때 그는 아마도 전형적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를 지칭하는 이 말은 미국 사회의 중상류층을 지칭한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 노동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험금조차 탈 수 없어 풍요로운 삶에서 퇴출당한 자가 새미와 레너드임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옛날 좋았던 삶을 끊임없이 회상하는 레너드는 이제 노동대중이다. 아니 그는 이전부터 노동일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였다. 단지 그 일이 자본측의 입장에서 보험금의 누수를 막고 심지어 정당한 보험금 청구조차도 부당한 것으로 몰아세울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일에서 쫓겨난다. 실직자가 되었지만, 그는 실직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의 복수를 꿈꾸는 그에게는 중요한 단서들을 기억하고 문신하는 일이 중요할 따름이다. 레너드 주변의 인물들은 레너드의 상태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부패한 형사 테디는 그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고 살인까지도 교사한다. 나탈리 역시 그의 상태를 이용해 연민을 끌어내고 살인청탁을 한다.

레너드에게 '복수'는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물론 죽은 아내가 살아돌아오고, 단기기억상실증을 벗어나는 따위를 상상할 필요는 없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기억'속에서 레너드는 어떤 조건의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테러나 마약거래, 심지어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항상 지금의 10분만을 기억하고 나머지는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여서 이는 더더욱 쉽다. 알다시피 노동대중은 굶어죽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어서, 일을 해야 살아간다. 끊임없이 착취당하지만, 그 착취를 잊도록 만드는 것이 재생산이다. 레너드는 문신과 기록을 남겨 '복수의 기억'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기록과 문신 덕분에 쉽게 이용(=착취)당한다. 퇴직자들이 심심치 않게 사기당한 사건들을 보면, '좋았던 한때'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려 있다. 착취는 '과거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욕망으로 삼아 현재에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한류 - 꿈을 쫓아 착취를 망각하다

"난 한번도 남의 영토를 침략한 적 없다는 우리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끊임없이 정복하며 확장할 것"이라며 아발론의 웅장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근래 등장한 이 광고는 광개토대왕의 북방 영토확장을 연상시킨다. 저 광활한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해 어느 기업은 세계가 오케이 할 때까지 고객만족을 추구한다는 카피를 내걸었다. 1-2년 전까지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주가를 들썩였던 바이코리아 펀드는 IMF 경제위기에 난파한 한국경제가 '일본 어느기업보다 못하냐'며 한국을 사라며 애국심을 노골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실상은 주가조작의 원조였으며 결국 소액투자자들의 등만 쳐먹은 꼴이 되어 버렸다. 소액투자자들의 '꿈'을 팔아 등쳐먹는 구조로는 한국경제가 살아나기 힘들었음일까?

잃어버린 네 마리 용의 신화를 기억하라고 외치는 소리들. 남의 영토를 침략하라. 그 침략은 한국을 다시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하게 해 줄 것이다. 근간에 불어오는 한류열풍은 자본의 훌륭한 침투영역을 소개한다. 한국자본은 이제 세계적인 도약을 위해 문화컨텐츠 개발에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이른바 한류열풍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응답이 그것이다. 연일 언론에서는 한류열풍에 대해 떠들어 댄다. 탤런트 누구는 베트남 공연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으며, 영화배우 누구는 중국 본토에서 인기순위 1위를 차지했다는 등 문화면을 채우는 기사와 토론들은 생생한 방증인 셈이다. 그러나 한류열풍의 이면에는 이런 영토확장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민족의 문화를 수출해서 기백을 높이자는 주장이던, 문화역량을 강화해서 새로운 착취영역을 구축하자는 전략이던, 속내는 한 때 잘 나가던 한국경제의 영광을 복원하자는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자는 것이다. 대중의 욕망을 꿈으로 전화시켜, 그 속의 착취를 감추는 논리는 바이코리아 펀드 만큼이나 오래되지 않은 사기가 아닐까?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참혹하게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던 역사적인 참회와 사과도 없이, 연변 조선족에 접근해서 등쳐먹던 행각에 대한 반성없이, 한국 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착취에 대한 개선책조차 없는 상태에서, 한류라는 바람에 편승해 중국과 동남아로의 진출만을 말한다는 것은 자기 미화일 뿐이다. 그리고 '문화 컨텐츠'란 대중의식을 마약처럼 젖게 만드는 속성이 있어서 역사인식 없는 문화교류란 문화제국주의로 빠져든다. 군사파쇼시절 3S정책이 민중통제의 핵심기술이었음을 다시금 기억해 내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전제의식 없는 상태에서 문화컨텐츠 개발을 위해 한국내부의 문화역량과 소프트웨어를 키워 낸 후 문화교류에 나서자는 얘기 역시, 문화기획자가 되어 문화자본의 운동 속에 그쪽 대중을 착취하는 방법 이상의 길은 아닐 성 싶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레너드 기억 저편의 새미는 복지 후퇴와 깨어진 중산층의 신화를 역설한다. 그러나 10분동안의 행위를 애써 기억하고, 각인하며 아내의 복수를 꿈꾸는 레너드는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키워가고, 덕분에 쉽게 이용(=착취)당할 수 있었다. 결국 메멘토는 인간의 '기억'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미국의 중산층 몰락과  그 신화에 대한 기억 속에 착취가 벌어지는 상황을 그려 낸 것이다. 착취에 대한 끊임없는 망각. 자신의 주변인에게 끊임없이 이용당하고 그 기억 자체를 잃어 버린 노동대중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네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아내와 아기를 살해해 보험금을 타내려 하거나, 바이코리아 펀드의 꿈에 속아 퇴직금을 날리는 개인투자자의 모습에서, 그리고 대중의 욕망을 정복의 꿈으로 환원시켜 중국으로 동남아로 진출하려 하는 지금의 한류열풍에서 읽어 낼 수 있다. 노동대중이 자본에 포섭되어 생산관계에서 착취당하고, 그 착취당한 사실 자체를 망각한 뒤 끊임없이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며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과 대중의 열망을 꿈으로 환원시켜 대국민 호명의 기치를 들고 있는 자본의 나팔소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문제는 '기억(=메멘토)'가 아니라 착취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