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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따로국밥의고민

2001.04.26 15:11

정은교 조회 수:1368 추천:2

따로국밥의 고민

따로국밥의 고민

정 은 교

□지난 2월엔가, 「간디학교(경남 산청 소재)」에서 일하는 이수광선생이 「(새길을 여는)교육비평」에 '교육다양성의 실험적 독법'이라는 글을 독자 투고로 보내 왔었다. 일간신문에 보도되었듯이 경남교육청에서 간디학교를 탄압하고 있어 그 부당성을 알리는 글을 썼노라, 이메일 머릿글에 씌어 있어서 그 글귀를 접했을 때는 '음, 당연히 실어야겠군'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파일을 다운받아 들여다보니 경남교육청을 규탄하는 대목은 중간에 한 대목 끼어 있을 뿐, 주된 내용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초한 교육다양성 예찬론 아닌가. 그동안 쏟아져나온 교육담론의 주류가 이 '탈근대 학교해체론'이고(이돈희, 조한혜정, 이인규 등등등), 이 시끄럽고 또 시끄러운 이바구에 맞서느라 우리가 얼마나 힘겹게 목소리를 모으고 있는가, 와락 신물이 났다. 그래서 답신을 보내기를, "관료당국의 행패를 규탄하는 일은 기꺼이 거들 생각이지만, '다양성 예찬론'에 대해서는 우리 기본 논조와 크게 다르군요. 그래서 그 글을 싣는 대신 잡지 첫머리 '편집자의 말' 코너에 경남 교육청을 규탄하는 이야기를 써넣겠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관점이 그렇게 편협한 것은 아니라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하는 쪽이지만, 도맷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를테면 그 사상가들 가운데 리오타르나 보드리야르 같은 친구는 지배체제와 죽이 잘 맞는 체제변호론쪽으로 뚜렷이 흘러가버려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밀치고 싶지만 푸코 같은 사람은 나름의 급진성을 담고 있어서 가볍게 깎아내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따위를 사족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며칠 뒤 편집위원들 자리에서 '독자 투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핀잔을 들었다. 우리와 '논조'가 다르다 해도 기꺼이 실어줘야 토론도 활성화되고 독자들의 참여 열기도 생기는 것 아니냐고. 조금 머쓱해져서 부랴부랴 글 보내온 분에게 이메일 다시 띄웠지. 곰곰이 그래도 다시금 되새겨보니 역시나(?) 싣는 게 좋겠더라고. 그리고는 그 학교 사정이 궁금하여 송순재 교수(교육전문 격월간지「처음처럼」의 편집위원. 감신대 교수)에게 전후 사정을 아시냐고 전화로 문의했더니 좀 당혹스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었다. 교육청쪽에서 함부로 해댈 빌미를 간디학교쪽에서 제공한 면이 있다고. 첫째, 고등학교쪽으로 나온 예산을 중학교쪽에 갖다 썼으니 흠 잡힐 구석이 있다.(고교는 '특성화 고교'로 이미 지정받았고, 중학교를 '특성화학교'로 이번에 신청을 넣었던 것이다. 물론 이수광선생은 저희가 이미 중학교를 운영해오고 있음을 교육청에서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존재를 사실상 수긍했던 것 아니냐고 격노했지만, 예산의 전용은 형식 요건으로 따져서 흠이 되기는 한다.) 둘째, 간디학교의 재정 운영이 투명하지 않다는 얘기가 들린다. 셋째, 그 학교의 커리큘럼이 과연 얼마나 대안학교다운 것인지 논란이 없지 않다.

  예전에 「처음처럼」에서 「간디」 설립자의 글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 있고, '간디'라는 제목 자체가 대뜸 믿음을 주는 대목이 있어, 나는 기본적으로 「간디」를 대안학교다운 곳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양비론(兩非論) 비슷한 말을 들으니 멈칫할 수밖에. 그래서 '편집자의 말'에 강경한 말투로 교육청을 비판해 놓은 대목을 지우고 이수광선생의 글에 조심스레 '편집자 주'를 다는 것으로 후퇴했다.

  얼마 뒤에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리 「간디」쪽에서 빌미를 주었기로서니 고등학교에까지 '재정지원 중단'의 으름짱을 놓는 것은 너무한다 싶어 전교조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계간지'가 현실 문제에 개입해 봤자 무슨 힘이 되겠느냐. 전교조에서 이 문제를 감싸 안고 있는지 궁금하다. 본부가 나서든 경남 지부에 '도와주라'고 말 좀 넣으시든 어떻게든 거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편집자의 말'에서 빼버린 찜찜함을 지우려고 잠깐 수를 써본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전교조 마산지회쪽에 알아보았더니 전교조가 당면한 일들 감당하는 것만도 벅차서 「간디학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고, 이 사정은 경남지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란다)

  우리는 간디학교가 어떤 커리큘럼을 얼마나 짜임새있게 운영해 왔는지 자세히 모른다. 「간디」의 한 선생이 교과모임 자리에서 저희의 교육실천에 대해 "수준별 수업을 해보았는데 별로 성과가 없었고, 예술교육 해온 것은 보람이 있었노라."고 자평했다는 얘기만 지난 여름에 얼핏 들었다. 그 선생을 수소문하여 그쪽에서 수준별 수업 실천해본 것에 대해 자평하는 글을 써달라고 그때 청탁했었는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서 쓰기가 어렵노라'는 답변이 되돌아 왔지. 그런데 최근의「우리교육」4월호에 "간디학교에서도 수준별 학습을 벌이지만 '서열화'를 통하거나 인위적이지 않고 아이들이 인정하고 스스로 참여케 한다는 점이 (신자유주의쪽과) 다르다."는 그 학교 교사의 자평이 실렸다. 얼핏 보아 상반된 두 자기평가는 양립 가능한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인원수 많지 않은 학교에서 공동체성을 기르는 딴 프로그램들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면 서열가르기의 부정적인 효과가 적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여 그 프로그램의 내실있는 진행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자세한 참여관찰의 기록을 접하지 않은 마당에 더 이상 언급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는 무주「푸른꿈 고등학교」이야기도 짤막하게 들었다. 그곳에 자기 자식을 보낸 한 여선생에게서였는데 자식이 털어놓는 말과 학교 방문한 소감을 간추려 보건대 '학교가 아직 대안학교다운 궤도에 오르지 못했구나'하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 아이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중학교때) 자퇴까지 했었는데 그곳에서도 말벗 없이 외롭기는 마찬가지이고, 눈길 깊은 상담교사가 그곳에도 없는 모양이더라고 탄식한다. 자식의 학교 편력담과 부모로서 자신이 겪은 체험을 글로 써줄 수 없겠냐 했더니 붓솜씨도 짧고 충분히 알지도 못할 뿐더러 「푸른꿈」에 누가 될까봐 쓰지 못하겠단다. 아무리 허술함을 많이 안고 있다 해도 그래도 교사들의 헌신에 의해 지탱해가는 학교 아니냐는 것이다. 그 학교의 지금 가장 큰 문제점은 다달이 35만원의 그야말로 쥐오줌 분량의 월급으로 견디느라 교사들이 다들 지쳐버린 현실인 성 싶다 한다.             

  우리는 대안학교의 실천을 공공예산으로 지원해야할 필요성을 두 학교에서 다시 확인한다. 재정 문제를 민간의 자발성에 맡기기에는 그 한계가 뻔하다. 문제는 '이 학교는 공공재정을 지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판정을 누가 내리느냐는 것이겠다. 지금의 관료집단? '사학의 주인은 거기 돈 댄 돈사장 아니냐'며 앵무새처럼 골수자본주의 교리문답이나 되뇌는 여지껏의 관료패거리에게 그 소임을 맡길 수 있는가. 즈그덜 끗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벌이는, 권력의 단맛에 취해 있는 패거리에게! 무엇보다도 교원단체의 정책참여 권리를 사전봉쇄하고 있는, 교원단체들과 교육정책 결정의 동등한 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하는 보수정권의 충실한 충복들에게!

  문제를 푸는 길은 '민주화'다. 교원단체와 사회운동단체(→전국적/지역적 단위에서 '학부모'의 대표성은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와 학자집단이며 언론인 등이 참여하여 민의(民意)를 모으는 공공기구가 '공공예산 지원 여부'를 결정하게 한다. 국가의 횡포에서 벗어날 길은 국가기구를 민주화하는 길 뿐 아닌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 규제를) 무조건 풀라!'고만 외친다. '획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만사 형통하리란다. 과연 그러한가? '섬머 힐'처럼 학생의 권리를 진지하게 추구하고자 교육학적 성찰을 거듭하는 학교를 획일화의 덫에서 풀어주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극우 인종주의집단이 '아리안족 우월론' 비스무레한 사이비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했을 때, '획일 거부'의 고귀한(?) 명분을 위하여 그 학교에도 공공예산을 기꺼이 쾌척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야 물론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이러한 걱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학부모들 가운데는 공립학교가 (진화론 대신) 여호와의 창조론을 곧이곧대로(즉, 과학인 양) 가르치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자기 자식을 '순결한' 신자로 만들기 위하여 학교를 거부하는 사람도 꽤나 많다고 한다. 이들은 무신론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에 무에 보태줄 게 있냐며 '딴 아이들의 교육'을 거들 교육세 납부에 도리질하기도 한단다. 어딘가 떨떠름한 짓 아닐까? 만일 이들이 '하와는 아담의 갈빗뼈로 만들어졌다'는 교리를 가르칠 마음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공공예산의 지원을 요청한다 했을 때, 거룩한 '선택권과 민영화' 이념을 위하여 기꺼이 나라 곳간을 열어야 할 일일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일편단심 부르짖는 구호는 '차이를 존중하라!'는 것이겠다. 옳거니! 남성과 여성의 젠더 차이, 쉰 세대와 (열라/졸라) 싱싱한 세대의 문화 차이, 동양과 서양의 문명 차이, 다 존중해야 옳다. 그러나 모든 '차이'가 다 존중받을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부자의 빈자의 차이는 찬양할 현실이 아니라, 줄이고 없애야할 차이에 속한다. 또, 차이가 존중받는 만큼 '보편성'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다르다 하여 '보편 문화'의 윤곽 그리기를 퇴짜 놓을 수는 없다. "카스트제도랑 가부장제도랑 다 우리네 문화의 고유성/차이에 속하는 것이니 괜히 헐뜯지 마셔!"하고 누군가 쌍심지 돋울 때, 거룩한 '차이'를 위하여 꿀 먹은 벙어리로 돌아갈 것인가? 과학의 이론이 아무리 중구난방이라 해도, 학문공동체의 대다수가 기꺼이 맞장구칠 최소한의 객관적인 과학지식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구난방의 백화쟁명에 들떠서 '객관적 진리 따위는 (눈곱을 씻고 봐도) 없다!'며 설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짓일까?           

  경남 교육청의 서슬푸른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집권세력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고개가 새삼 갸웃거려진다. 즈그덜 금과옥조인 5.31개혁안의 취지에 따르자면 학생의 선택권 보장을 위하여 「간디」중학교는 당연히 '특성화 중학교'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의 지배세력 부르조아계급의 지엄한 명령을 중뿔난 관료집단이 어찌 감히 퇴짜 놓는 것일까?  계층간 불평등을 키우는 효과로 치자면 '특성화 학교'쪽보다는 '자립형 사립고 설립'쪽이 훨씬 무섭다. 압구정동 유한마담들이 몰려가는 곳은 「간디」가 아니라 자립고 쪽이다. 그런데 이돈희 전 교육부장관 같은 이는 '자립고를 허용하자!'고 버젓이 제안한 지경이다. 한국의 교육관료들은 아무리 눈먼 사학재단이라도 다 두둔하기 바쁘다. 한켠에서는 '사학 찬양!'에 그렇게 열 올리면서, 딴켠에서는  저희들 공식 구호와 어긋나게 '사학 탄압'을 일삼는다. 뭐랄까, 한국의 교육계에서는 신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이 영국이나 미국처럼 폼나게 결합되지 못하고, 아직 삐걱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털어놓자면 우리도 내세울 것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뚜렷이 방침을 정하여 개입하지 못했다. 연구소도 그렇고, 전교조쪽도 사정은 별로 다를 바 없다. 대안학교를 표방하여 나선 쪽은 (신자유주의에 놀아날 구석이 있건 없건) 일정하게 개혁성을 담지하고 있다. 선을 긋기만 해서는 안 되고, 함께 힘을 모을 계책도 찾고, 나아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그들을 불러들여야 하는데 그저 멀거니 따로국밥으로 지내기만 했다.

  따지고 보면 진보적 교육운동진영이랄 만한 부분이 이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한 줌도 못되지 싶다. 근래 들어와 TV와 기성 언론들이 심심하면 떠들어대는 교육담론의 방향이 어느쪽인지 유심히 들어보라. 공교육 글러먹었으니 아예 미련 버리고 딴 길을 찾자는 얘기다! 자립형 사립고도 확 풀고, 기여입학제도 쫙 풀고, 하여튼 돈 많은 분들 불편하지 않게 해달라는 분부이시다. 확성기 수백 수천개 매달아놓고 만날 떠들어대니 어리숙한 백성들 그쪽으로 쭐레쭐레 따라가게 돼 있다. 얼마 전에는 좃선, 똥아, 주앙 족벌 언론들의 쩍 벌린 아가리에서 한동안 '한국의 학교교육에 절망하여 이민 떠난다!'는 울부짖음이 요란하여 진보교육 연구합네 자처해온 나도 귀만 멀끔, 어리삥삥했었는데 한겨레신문에 시원한 글 하나가 실렸더라. 기자출신 재미교포의 글인데,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만 이민의 명분을 그렇게 가짜로 둘러대는 사람도 상당수라는 것이다. 교육위기론의 상당 부분은 거짓부렁이요 호들갑이라는 말씀인데, 이처럼 지배세력이 마구잡이로 퍼뜨리는 담론에 제대로 맞서려면 시민/민중운동 진영의 목소리를 한껏 모아낼 구심이 한결 절실해진다.1)

  요즘 송순재/심성보 교수가 주동이 되어 진보적인 교육계 인사들 불러모으기가 한켠에서 조용히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학부모운동의 연혁은 제법 깊지만 제대로 길찾기하려면 발본할 필요가 있고, 대안교육도 헌신하여 나선 이들은 여럿이나 '이것이야말로 대안교육!'이라 꼽을 실천은 아직 드문 현실이다. 새로 주도세력이 모여야할 필요성이 무척 크고, 우리도 나름껏 힘을 보탤 생각이다. '교육다양성' 예찬론자들 중에는 우리를 '국가주의적 실천에 붙들려 있는 패'라 몰아붙이고파 안달난 사람들도 있는 성 싶은데, 우리에게 "당신네들 대안은 아직 흐릿하다. 더 구체화하여 제시해 보라!"고 요구한다면야 기꺼이 수긍하겠다만, '다양성과 획일성 중에 선택하라!'고 무식하게 들이대서는 좀 곤란하다.2)

  나는 온나라 곳곳의 강단/연구실에서 학문적 실천에 정진하고 계신 분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학회보'에 실리는 고립된 아카데미즘의 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시는가? 송순재/심성보 교수의 발의에 호응하여 '참개혁을 바라는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야지 않겠는가. 우리는 '진보교육연구소'의 흥부네 오막살이가 진보적 연구자들의 모임을 거들어줄 공간으로 쓰일 수 있다면 사립문 활짝 열어제칠 생각을 진작부터 품고 있었다.3)

  끝으로, 요즘 전교조쪽의 실천 동력은 어떠한가?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거니와, '7차 교육과정 반대싸움'의 결의가 점점 흐려지는 조짐이 보여 걱정을 지울 수 없다. 조합원과 일반 교사들이 「전교조신문」이나 대회 참가를 촉구하는 포스터 따위를 접할 때는 전교조가 언제나 제 역량껏 잘 하는 것으로 속편히 여기겠지. 학교의 일상(日常)에만 눈길이 머물러서는 우리네 사회의식이 늘 흐려지기 마련 아닐까. 진보적 교사/교육운동이 가는 길은 두 길 중의 하나다. '점점' 약해지는 길과 조금씩 힘을 보태가는 두 갈래 길! 주변 사회세력들이 우리일을 시원시원 거들어 나서면 오죽 좋으랴만 지금 시민/민중운동의 힘은 사분오열되어 있고, 지배세력의 기세는 호락호락 꺾이지 않는다. 우리는 여지껏 김대중 정권의 '상대적 진보성'을 누릴 만큼 누렸고, 이제는 그들에게 배신당할 일만 남아 있다. 아니, 진작부터 배신당해 왔는데도 미련의 지푸라기에 애오라지 매달린 사람이 적지 않았다.4)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우리는 늘 이 물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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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전에 한겨레신문의 보수적인 논조에 대해 썽내듯 비판한 적 있는데, 그렇기는 해도 우리가 끌어당겨 우리 목소리를 담아낼 언론매체로는 한겨레신문만한 데가 없다는 사실도 엄연한 것이다. 한겨레의 주류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부화뇌동하고, 김대중 비판적 지지노선에 오랫동안 경도돼온 것은 사실이지만, 한겨레 지면이 그쪽 일색으로 완강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까.
  '진보적 교육운동진영이 제대로 구실하노라' 말하려면 어떤 정도가 돼야 할까? 그저 전교조가 교원복리를 위한 단체교섭 무리없이 해내고, 대안학교 몇 군데가 재정에 허덕이지 않고 유지되는 상태? 일상(日常)에 안주하고픈 사람들은 그쯤에서 더 고민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쯤의 실천만 갖고 교육의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림 반푼도 없다. 제도교육권 안과 밖에서 다들 제 앞가림에만 골몰하고 있을 동안, 경제/문화자본 넉넉히 누리는 지배세력은 저희 꼴리는 쪽으로 개혁의 방향을 슬슬 몰고 간다. 신자유와 신보수가 찰떡 궁합으로 감미로이 탱고춤 추는 '당신들의 천국, 당신들의 마당'으로! 예전에 갤브레이스가 말했던가? 상류층이 비명 지르지 않는 나라에서 사회개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관료집단이 비명 지르지 않는 어떤 개혁도 거짓 교육개혁이라고. 여러해 전부터 '국가규제를 풀라!'는 얘기를 떠든 사람이 많았는데, 어느 패가 그랬냐 하면 DJ지지에 열 올렸던, 다시 말해 지금의 집권세력의 한 분파와 죽이 잘 맞았던 패가 그랬고, 민주화 운동에는 털끝 관심도 없이 독재시절에 국가권력에 늘 순응해왔던 전문가집단(가령 이돈희)이 그랬으며 관료집단들은 이 구호에 대해 더러 떨떠름해 하긴 했어도 한번도 비명 지른 적 없다. 5.31교육개혁은 관료집단의 환골탈태와 판갈이를 강요하는 개혁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제대로 구실하려면? 좃선,똥아,주앙과 KBS, SBS에서 헛다리 긁는 얘기 시도때도 없이 떠들 때마다 너끈히 맞받아칠 때라야 그렇게 자임할 수 있다. 아니, 언론사에서 껍죽대는 친구들이 늘 우리 얘기를 경청하여 그딴 헛소리 함부로 못할 때라야.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우리힘만으로 될 일도 아니요, 꼭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고 자책할 일도 아니다. 이 사회의 개혁을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힘은 어찌 보면 똥파리 끓는 국회라기보다 '밤의 대통령'을 '형님!'으로 모신 조/중/동 패거리들 아닌가. 민주/진보역량을 모아 언론개혁 이뤄내지 않고서는 교육개혁을 감히 꿈꿀 수 없다는 얘기다.       
2) 가령 한국교육연구소의 이인규/유상덕/박부권/박성규가 관철하고 싶은 '다양성/선택권 담론'은 친체제/친자본의 노선을 등뒤에 숨긴 것이기 때문에, 영미의 부르조아세력이 주도해온 신보수 교육개혁의 완전수입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극력 경계한다. 조한혜정이 내세우는 '차이의 철학'? 페미니즘이나 문화적 상대주의를 내세우는 대목에서는 기꺼이 공감할 부분이 있으나, '하향평준화'를 규탄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분이 '차이의 철학'을 마구잡이로 일반화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교육 최근 4월호에서 「문화과학」의 일원인 고길섶이 '차이와 연대의 철학'을 내세워 진보교육연구소 천보선의 '교육공공성' 담론을 비판했다. 이인규/조한혜정과 마찬가지로 '차이의 철학'을 바탕에 깔았지만, 반자본주의의 입장을 나름껏 견지하려는 쪽이다. 그러니 고길섶과는 다소 관점이 다르긴 해도 생산적인 토론과 실천적인 연대가 가능하다. 그의 입론에 대해 어떻게 답변할지는 우리의 연구과제다.   
3) 내 경우, 그동안 주제넘게 달고 지냈던 소장(所長) 명함을 언제든 떼어내서 과업을 더 잘해낼 분에게 건네드릴 용의가 있다. 그동안 우리 연구소를 지탱해온 두 축은 첫째, 기꺼이 살림밑천과 조직적 바탕을 마련해준 여러 전교조 활동가들이요, 둘째, 대학에서 교육운동에 투신해왔던 젊은 청년들이다. 진취적인 연구자들께서 이 실천역량들과 잘 결합해주신다면 본때있는 연구소 하나 일으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 지난 해만 해도, 단체교섭안이 헌신짝처럼 파기되었을 때, 전교조 지도부 가운데 '교육부가 그럴 줄 몰랐다!'고 썽을 터뜨린 사람이 있었다는데, 이미 불보듯 예견된 '교육부의 배신'에 새삼 놀랐다는 것은 그분의 현실인식이 대단히 순진했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극렬한 탄압에 영웅적으로 맞서온 '전교조 10년 투쟁사'의 기억으로 하여, 전교조 지도부의 지도력이 매우 막강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는데, 우리 사회정치현실의 엄중함에 견주자면 전교조 활동가집단이 총체적으로 발휘하는 실천역량은 그렇게 탄탄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