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8호 개혁의 허구_강신현역

2001.10.18 12:16

마이클애플 조회 수:2588 추천:1

개혁의 허구 : 시장과 기준과 불평등

개혁의 허구 : 시장과 기준과 불평등

마이클 애플(위스콘신 대학)

우회전

유명한 교육과정 논쟁사에서 허버트 클리바르(Herbert Kliebard)는 교육적인 논쟁거리는 항상 집단들간에 무엇을 "훌륭한" 가르침과 배움으로 볼 것인가, 어떤 것을 "정의로운"사회로 볼 것인가를 두고 "기준이 되는(legitimate)"인식에 대한 전망을 두고 다투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분쟁과 타협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한 갈등은 교육에서 인종과 계급 그리고 성적 정의(justice)에 대한 견해가 상이하기 때문이며, 보다 큰 사회에서는 현재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이러한 투쟁하고 있는 전망들은 교육자나 일반 시민에 대한 상상(imagination)을 똑같은 이해력으로 가지지 않을 뿐더러 전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힘이 같은 것도 아니지만, 교육이 작동하는 장을 여전히 변형시키고 있는 현재의 투쟁을 핵심에서부터 민감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교육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다.

오늘날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일련의 "새로운" 타협과 새로운 동맹 그리고 새로운 권력집단은 교육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인 현상에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런 권력집단은 교육적인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시장화 해법으로 푸는 것에 동의한 다수의 자본분파, 높은 기준과 "통속적인 문화(common culture)"로 "복귀(return)"를 원하는 신보수주의 지식인, 세속주의와 자신들의 전통보존을 상당히 염려하는 권위적인 인민주의 종교근본주의자1)(populist religious fundamentalist), 책임/평가/"경영"의 이데올로기와 기술에 동의한 상당한 수의 전문화된 신 중간계급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동맹에는 상당한 긴장과 갈등이 있지만, 대개 이들의 전반적인 목적은 국제적인 경쟁, 이익, 학습을 증가시키고 낭만적인 과거의 "이상적인"가정, 가족, 학교로 돌아가는데 필요하다고 믿겨지는 교육적인 조건을 공급하는데 있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동맹은 더 폭넓은 일련의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의하는 그룹들로 교육을 묶었다. 교육의 목적은 경제사회적 복지가 가리키는 것과 같다. 그들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벨 곡선2)(The Bell Curve)이 비참하게 보여주듯이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가역할의 극적인 감소, 학교 안밖으로 광범위한 경쟁적 이동구조의 강요, 경제적 확신에 대한 대중의 기대 하락, 문화와 육체의 "훈육화"(disciplining), 다윈주의적 사회인식 방법의 대중화로 요약되는 자유시장이란 극적인 허구를 유창하게 퍼뜨려 놓았다.

경쟁, 시장, 선택과 한편으로 책임, 실행, 목적, 기준, 국가시험, 국가교육과정이란 외견상 모순되는 용어는 너무 시끄럽게 울려퍼져서 어느 것도 듣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가 {교육과 문화정치}에서 밝혔듯이, 이런 경향은 실제 묘하게 서로를 강화하여 공고한 보수적 교육입장이 많은 나라에서 일상화하는 것을 돕고 있다.

새로운 시장과 과거의 전통

혼란스러운 조화를 보이는 신우파의 급격한 등장의 배경에는 "백인(기독교)전통과 가치의 (절멸 할지도 모를)안식처로서 문화주의적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신화화되어 현재를 혹평함으로서 과거의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게리 맥클로우(Gary McClloch)는 본질적으로 학교의 이상은 역사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안전하고, 교화하고, 진보적인"(말하자면 사회의 개인의 발전과 진보를 이끄는) 교육의 지배적인 이상은 "위협적이고, 일탈적이고, 퇴보적인"것이 되어버렸다. 오래된 과거는 더 이상 안정의 근원이 아니라 실패와 실망, 손실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혁신론이(progressivism) 교육정책과 방식(practice)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전 유물을 파괴했다는 인식이 윌리암 베넷(William Bennett), 이.디 히쉬 주니어(E.D. Hirsch, Jr)와 같은 인물의 대중적인 발언속에 울려퍼지고 있다. 그들은 교육과정과 학습(학생은 물론이고)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우리의" 잃어버린 전통 회복과 과거에 교육이 그러했듯이 더욱 훈육적이고 경쟁적으로 교육을 만들어야 그때에야 비로소 효율적인 교육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런 인물들은 비판은 유사하지만 대신에 다른 미래를 위해 다른 과거를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과 결합했다. 그들의 과거는 외경과 권위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로서 과거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단지 "훌륭한" 인간만이 생존할 수 있기 위해 학교를 시장의 방임으로 재편하지 않고는 외경과 권위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달성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런 정책이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면 우리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흐름이 있는 여러 곳에서 상당한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정책은 낭만화된 소박한 과거에 기반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개혁은 연구결과의 근거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실행된 연구조차도 대개 강력한 책임을 지는 관리체제나 시장의 전제된 효율성에 관한 기존의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서 사용되었거나 상당히 결함이 많은 연구에 - 시장화에 관해 상당히 출판된 큐브(Chubb)와 모이(Moe)의 경우처럼 -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주장의 임상적 지지기반이 취약할지라도 그들은 교육과 관계된 논쟁지반을 모두 재정의하고 있다. 몇 년 동안 보수주의자의 공격과 움직임이 있은 후에 "한때 희망적이고 가능하게 생각되었던 혹은 단지 평범한 극단으로 생각되었던 이상들"이 이제 점차 상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전술적으로(Tactically), 그동안 이룩되었던 상식의 재구성은 매우 효과적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솔직히 말하기(plain speaking)" 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특징을 지니는 논증적인(discursive) 전략들이 여기서 명백하게 이용되고 있다.(나는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다. 이런 것의 중요성은 상당수의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을 상당한 학자를 포함해서 "진보적인" 교육자들이 이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전술은 일반인의 위치를 "상식"으로 설명할 뿐 아니라, 논쟁하고 있는 당사자간에 진실을 거부하거나 "유행하는" 것만을 말하기로 하는 암묵적인 공모가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헤른슈타인(Herrnstein), 머레이(Murray)의 유전학과 지성에 관한 터무니없는 "진실"의 선전이나 히르쉬(Hirsch)와 같은 진보적 교육자에 의한 최근의 "딱딱한" 학습의 파괴를 위한 "거친"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적인 문헌에서 이러한 특징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시장과 성취도(performance)

이런 모든 것이 보수적인 퇴보의 한가지 요소가 움직이게 하는 방식을 예로서-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당연하게 더 낳은 학교로 만든다고 하는 신자유주의자의 주장 - 살펴보자. 로저 달(Roger Dale)이 우리에게 회상시켜주듯이 "시장"은 행동의 명쾌한 지침으로서가 아니라 상징(metaphor)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외연적인(denotative) 것이 아니라 함축적인(connotative) 것이다. 그래서 시장은 시장에 존재하고 시장의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유통될 수 있어야(marketed)"한다. 시장은 탈정치화된 전략에 의해 시장화되어야 하고 규제되어야 한다. 시장은 자연스러우며 중립적이며 효과와 장점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개념적인 정의에서 시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효과와 장점에 반대한다. 시장은 물론 반드시 정치적인 간섭과 관료적인 방식의 부담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더해서 개인 행위자의 이성적인 선택에 근거해야 한다. 그래서 "중립적인" - 긍정적이지는 안지만 -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시장과 시장의 효과와 장점으로 인한 보상에 대한 보증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동구조는(mechanism) 당연하게도 관료적인 효율성과 효과가 있어야 한다. 명확한 성과를 보이기 위해 시장과 관료적인 작동구조(mechanism)의 결합했던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가는 의문시되는 것이지만.

시장화의 나라의 경험에 대해 아마 가장 광범위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한 조프 위티(Geoff Whity)는 우리에게 사실에 대한 허구를 간과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러 나라의 연구조사를 검토한 그는 시장화를 "선택"한 전략의 지지자들이 학교의 효율성과 반응성(responsiveness)을 높이는데 시장이 효과가 있으며 기회가 불리한 아이에게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는데 이것은 헛된 기대라고 주장한다. 이런 기대는 현재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 문화적 심각한 불평등을 치료하기 위해서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괄적인(broader)정책만 계속된다면" 실현될 것 같지 않다. 이어서 "계층화가 심해진 사회에서 원자화된 의사결정은 모든 이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것 같아 보이지만, 대중에서 사적인 개인으로 의사결정의 책임을 전환함으로서, 실질적으로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 질적 향상을 도모코자 하는 집단의 활동반경을(scope)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것이 내가 잠깐 보여주려 하듯이 시장의 "해법"을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전통적인 인종과 종족의 피라미드형 계층구조를 전복하기는커녕 재생산할 것이라는 사실과 연계해서 본다면 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저지되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face value)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런 정책의 제창자(proponent)의 수사와 상징속에 가려져 있는 숨겨진 효과에 관해 의문을 품어야 한다. 누구에 의해 지적될 지도 모를 이번 논문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과거에는 진정한 가치가 묵살되었던 중요한 연구결과를 선택하고자 한다.

국가와 신자유주의의 개혁

영국의 사례가 여기에 딱들어 맞는데 특히 큐브나 모이와 같은 시장주의 제창자들이 상당히 영국에 의존하고 있고 내가 분석한 경향이 가장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영국의 교육개혁법3)은 시장화의 공약을 명문화했다. 지방교육국(LEAs)의 운영위4)(govening body) 는 현재 공식적으로 매년 "GM(general market)을 지향할"수 있게 되어있다. (말하자면, 지방학교체계의 통제에서 벗어나(opt) 경쟁적 시장을 지향하는 것) 그래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향하라는 압력(press)은 국가에 의한 강조보다도 더욱 거세다.5) 그러나 교육과정의 반응성(responsiveness)과 다양성을 유도하기는 커녕, 경쟁적 시장에서의 학교가 오늘날 학교의 전형인 전통적인 모델과 달라진 것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다가 학교의 특징인 불평등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도 못했다. 볼(Ball)과 그의 동료들은 시장주의적 개혁의 결과가 "토대에" 끼친 결과에 관해 광범위하게 분석했는데 왜 우리가 상당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장화된 상황에서는 교육적 원리와 가치가 타협의 대상이 되어서 교육과정의 기획과 학습기회에서  상업적인 논쟁만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학교별 시험순위비교표(examination league tables)"와 같은 성적(performance indicator)공개가 시장에서의 요구와 결합함으로서 학교가 점차 "능력있는" 학생과 "요구수준이 높은(motivated)" 부모들을 유혹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는 지방체계의 경쟁구조에서 그들의 상대적 위치를 올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학생의 수요에서 학생 성취로, 학교가 학생을 위해서 하는 것에서 학생이 학교를 위해 하는 것으로, 미묘하지만 - 과거에는 공개적으로 공개적인 논쟁이 되지 않았던- 중요한 강조점의 전환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너무 불행하게도 특수장애아동나 학습장애아로 분류된 학생들을 위한 학습기회 같은 반드시 필요한 학습기회를 빼앗아 갈 뿐 아니라, 국가에서 시장과 대중의 책임이 되어가고 있다. "특수장애" 학생은 돈이 많이 들 뿐 아니라(expensive) 그런 모든 중요한 순위비교표에서 성적을 떨어뜨리까지 한다.

이런 전반적인 기획(enterprise)은 시장게임에서 앞으로도 계속 승리하기 위해 척도와 일련의 목표를 새로 구축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 중요한데, 이런 기획의 결과와 방식은 학교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척도와 목표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은 좋은 사회와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무엇이 중요한 가에 대해서 전환을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에 관해 일반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나는 모든 교육 계획들은 정의로운 사회와 훌륭한 학생에 관한 전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서술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구축한다.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넓게 고전자유주의의 - 특별히 고전 자유경제주의자 - 중심적인 신조에 기반하고 있지만, 고전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교육의 정치학과 현재 교육이 겪고 있는 전환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런 차이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마크 올슨(Mark Olssen)은 아래 단락에서 이 차이를 분명하게 분석했다. 전문을 인용한다.

고전 자유주의는 개인을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의 행사에 부정적인 반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작동에 필요한 조건, 법률, 기구를 국가가 제공케 함으로서 최적의 시장을 형성하는데 있어 국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본다. 고전 자유주의에서 개인은 자유로운 인간 본능을 가지고 있어 자유를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모험적이고(enterprising) 경쟁적인 경영자로서 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고전적 모델에서 이론적인 국가의 목적은 보편적 이기주의(개인이익을 지향하는 개인주의)를 -즉, 개인의 이해관계는 또한 전체적으로 사회의 이해관계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 이론과 무간섭주의의(laissez-faire) 정치적 극대화- 포함한 공리에 근거해서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고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전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왜냐하면 천성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서 상대적으로 국가의 간섭에서 떨어진 "경제적 인간"에서 국가에 의해 형성되어 계속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무되는 "조작적 인간(manupolatable man)"으로 주체의 위상에 대한 변화가 전환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적인 주체란 개념은 "신자유주의"시대에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복지가 보편화된 이 시대에서는 게으름의 가능성을 감시, 감독하고 "성취도 평가"와 통제의 형식 등을 새롭게 만들게끔 한다. 이 모델에서 국가의 역할은 그 자체가 우리 모두를 기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 각각이 "지속적으로 우리 자신을 경영하게끔"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통제 없는 통제"의 과정이 될 것 같은 것에서."

볼과 그의 동료들의 결과는 국가가 어떻게 대중의 지속적이고 경쟁적인 동의를 통해 시장화된 개인과 통제의 결합과 같은 이상한 결합을 도모할 수 있었는지 그 수행과정 설명한다. 학력수치비교를 대중적으로 공개함으로서 교육시장에서 개인의 비교가치는 결정된다. 높은 성취도를 올린 학교만이 가치가 있다. 그리고 "계속 자신을 경영할 수 있는" 그런 학생만이 학교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차별적인 결과가 생기게 하는 다른 메커니즘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볼, 보위(Bowe) 그리고 게위츠(Gewirtz)가 밝힌 계급논쟁이 두드러진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

중간계급 부모들은 경제적 자본, 사회적 자본, 문화자본에서 가장 혜택받은 집단임에 분명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학교가 그들을 매우 열심히 찾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계급 부모들은 대개 교육의 시장 메커니즘을 개척하고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는데 상당히 익숙해졌다. "중간계급 부모들은 점차 복잡하고 탈규제화된 선택과 학생모집(recruitment) 체계를 해독하고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지식, 기술, 문제해결능력(contact)을 점점 더 원하는 것 같다. 더 많은 규제는 더 많은 비공식적 절차의 이용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대체로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아이를 체계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복잡한 방식의 계급과 인종의 교차와 상호작용은 결과에서의 차이가 - 시장화된 교육구조는 종종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여 의식적 무의식적 존재이유(raison d'etre)를 명백히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종차별적 교육정책의 감춰진 표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지라도 - "자연스럽게" 계층과 인종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6)

사회자본과 경제자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자본이 될 수 있다. 시장화 전략속에서 여가시간이 더 많아 부유한 부모들이 여러 학교를 찾아다닐 수 있다. 그들은 한대 이상의 차를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을 "더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전국을 차로 다닐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캠프와 방과후학교(춤, 음악, 컴퓨터교실 등)같이 "품위"와 "여유"를 줄 수 있는 숨겨진 문화적 교육기회를 "자연스럽게" 제공해 줄 수 있으며 이것은 문화적 교육기회로 작용한다.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회적 문화적 자본은 -누구를 알고 있는가, 교육공무원과 사회에서 만남을 통해 얻는 "편안함"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러므로 더 부유한 부모들이 시장화된 제도를 해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데 있어 비공식적인 기술과 지식을 - 부르디외가 하비투스라 부르는 - 쉽게 가질 수 있다. "자신감(confidence)" - 경제적 선택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부여하는 경제적 자원에 강력하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의존하는 과거의 선별 결과이다. - 이라 불리는 이런 감각은 시장화된 제도와 협상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뒷받침하고 비공식적인 문화규칙을 통해 "체제를 작동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다.

분명, 노동계급과 저소득층 그리고/혹은 이민자 부모들은 이점에서 결코 기술이 없다. (결국, 착취하고 억압적인 물질적 조건에서 앞서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 자신감, 사회적 문화적 자원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집단적 유대(bonds), 비공식적인 연결망과 접촉, 체제를 활용하는 능력이 상당히 미묘하고, 지적이고, 종종 민감한 방식으로 발달되었다.) 하지만, 학교와 학생들에게 기대되는 역사적인 요인의 하비투스와 더 부유한 부모들의 하비투스의 결합은 부유한 이들이 쉽게 접근 가능한 물질적 자원과 결합되어 결국 경제 사회적 자본이 문화자본화 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돕는다. 영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같다.

전지구적 시장화모델의 결과에 관한 최근의 종합적인 분석은 학교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례와 폭넓은 권력관계 유형에 관해 분석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정책간에 긴강감이 없지는 않지만 효과적인 결합의 결과에 관한 연구조사는 이러한 결합이 강력하게 진행된 몇몇 나라에서 - 예를 들면, 미국, 영국과 웨일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 경향을 비교설명한다. 결과는 지금껏 말한 주장들을 재확인 하는 것이다. 그런 조사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우려할 만한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자.

시험성적의 함의

불행하게도 표준성취도시험의 결과는 학교개혁의 "성공"을 측정하게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개혁이 전반적으로 학교와 학교의 구성원인 교사, 학생, 행정관, 지역사회 일원, 지방 활동가 등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시장화된 "독립경영(self-managing)"학교가 여러나라에서 성장할수록 학교장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적지 않는 권력 즉, 많은 권력이 실제 경영구조속으로 통합되어가고 있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좋은 학교"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높이는데 사용되고 있지만 교육과정과 교육에 관한 부분에 투여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줄어들고 있다. 동시에 교사의 자율과 전문성은 증가하지 않고 강요(intensification)만 증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앞에서 말했듯 학교는 점점 더 비슷해져서 표준화되고, 전통적이고(종종 단일문화적인) 전체적인 교실수업방식과 기준, 전통적 교육과정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시험성적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면 진실로 심오한 전환은 기대하기 어려우며, 우리는 상당한 불안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여러 나라에서 신자유주의의 준시장(quasi-market)계획이 대개 국가교육과정, 국가 기준, 국가 승인 체계와 같은 것을 통해서 내용과 행동을 규제하고자 하는 신보수주의적 압력에 의해 승인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합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일이다. 즉, 두가지 강력한 경향이 결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연은 아니다. 하지만 약한 국가와 시장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한 국가와 지식, 가치, 육체에 대한 규제를 승인을 강조하는 경향과 쉽게 결합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특성이다.

성취도

이것은 부분적으로 "평가적 국가(evlauative state)"의 권력이 증가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것은 언뜻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국가가 시장에서 점차 경쟁하고 있는 개인과 자율적인 기구에 권력을 양도할수록 국가는 여전히 주요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내가 초기에 말했듯, 고전 자유주의의 "경영하는 개인"에 대한 신뢰와 현재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차이는 후자가 국가의 규제 권력을 승인하는 것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실제로 "개인에 대한 경영을 수행하고 있는가"하는 증거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격, 절차, 경영의 상징이 지배적인 교육은 빵과 자동차처럼 시장에서 팔리기 위한 상품이 되어갈 뿐 아니라, 교육의 결과는 표준화된 "성취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지식, 가치, 행위가 표준화되어야 하고 공식적으로 "합당한"지를 정하려는 신보수주의의 체계를 구성하려는 시도와 이상적으로 어울리는데 이점은 이 문서의 다음 장에서 확장해서 다룰 것이다.

사실 교육기회(access)와 성과(outcome)의 명백한 불평등과 같이 국가가 줄이기로 약속했던 책임에 대해서 개별학교, 학부모, 아동에게로 책임을 전가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주류경제 집단이 잘못 인도하여 초래한  광범위한 불평등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국가로 떠넘기는 더욱 폭넓은 과정의 부분이다. 국가는 정통성(legitimacy)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국가가 이런 위기를 외부로 떠넘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교에 대한 가장 최근의 다른 결과는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어, 교장은 이런 확실히 탈중심화된 학교에서 더 지역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신보수주의적 정책의 내면적 공고함 때문에 교장은 "점차 국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을 따라 성취도를 제시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어 통제권력을 잃게 된다". 내가 앞에서 얘기했던 강요(intensification)로 인해 교장과 교사는 상당히 무거운 업무량과 책임성이 계속 증대하며, 끝없는 회의 일정, 많은 경우에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역량의 희생이 증대되고 있다.

전통주의(traditionalism)

게다가 영국의 연구조사처럼, 시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교육과정, 교수법(pedagogy), 구조(organization), 고객(clientele), 외형(image)에서 조차 다양성을 독려하지 않았다. 대신 대안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가치절하하여 주류모델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인종, 민족, 계급에 따른 교육기회와 결과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악화시켰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전통주의"로 복귀는 많은 일을 일으켰다. "전통주의"로 복귀는 비판적인 교수모델을 인정하지 않았는데,(delegitimate) 학교에서 문화적이고 비판적인 교수법의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하려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요점이다. 이것은 학교내에서 재계층화를 도입했으며 탈 능력별 반편성(detracking)이 일어날 여지를 감소시켰다. "재주를 타고난"(gifted) 아이와 "능력이 우월한"(fast track) 교실만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학습 능력이 떨어져 보이는 학생들은 "덜 매력적"으로 보였다. 영국의 놀라울만한 학교중퇴율 수치는 이런 심각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속적으로 더 높은 성취율에 대한 광범위한 압력이 이런 일을 낳은 원인이었다. 이것은 특히 시장화된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의 주요 추진력은 교육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감추어진 우려스러운 결과에 대한 분석에서 휘티(Whitty), 파워(Power), 할핀(halpin)은 준-시장(quasi-market)전략의 가장 위험스러운 결과중의 하나는 시장에서의 위치를 유지하거나 높이려 하는 학교에서 특정한 특성을 가지는 특정 부류의 학생이 입학 허가되고 특정부류의 원하는 학생을 모집하는 것을 허용하는 "더 좋은 학생 빼가기(cream-skimming)"에 가담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몇몇 학교에서 아시아지역에서 온 학생들처럼 여자학생이 우대받는 식으로 인습(stereotype)이 되풀이 되었다.7)  이런 상황에서 카리브해-아프리카 아이들은 분명한 패자였다. 전반적인 결론은 분명하다. "현재의 사회적배경 선택(circumstance choice) [속에서]는/은 교육기회와 전체적인 학교의 질 향상에 있어 계층화를 강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학교개혁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한" 학교의 구조적인 특징이 아니라 외인적(exogenous) 사회-경제적 특징을 유심히 살펴볼 때라야 모든 학교의 성공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다. 부자의 수입 균등화를 통해(greater income parity) 가난을 제거하고, 효율적이고 보다 평등한 보건과 주택정책을 세움으로서, 많은 나라에서 보여지는 근본적인 배제와 계층화(degradation)의 숨겨진 정치와 그다지 숨겨지지 않은 정치의 진행을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서,(시장화된 계획은 부분적으로 "타자(the Other)"의 문화와 육체를 거부하기 위한 구조로서 간주될 필요가 있다.) 이런 주제들과 대결할 때라야 비로소 본질적인 발전이 가능할 수 있다. 비판교육학의 논의가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역시 학교가 혼자서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국가 교육과정과 국가 시험

신자유주의 개혁하에서 작동하고 있는 적어도 두가지 동력 사이에는 - "자유"시장과 감시의 증대 -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전 장에서 보았다. 이것은 많은 경우 시장화는 교육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 즉, "생산자"를 위한 일련의 정책과 함게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정책은 규제가 심했으며 상식을 재구성하는데 유익했다. 국가시험과 성취도가 결합되어 성적 순위비교표에 의해 공개되듯이 그들과 관련되는 일들은 외부 감독과 규제 그리고 외부 성취도평가에 의해 묶이게 되었으며 점차 "적절한" 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으로 간주된 것을 소유한 부모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외부 감독과 규제는 "생산자"(예를 들면 교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관련되어 있으며 사람들에게 그들에 의해 학교가 경영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분명히 신보수주의자의 잃어버린 과거의 높은 기준, 수양, 권위, "실제"지식으로의 "복귀"필요성과 경영기술과 효율성을 위임받은 국가의 테두리 내에서 전문중간계급의 권위적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효율적 경영을 강조하는 것은 많은 신자유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가 똑같이 유용하다고 보는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련의 시장화와 탈규제적 흐름과 - 예를 들어 바우처와 선택 전략 - 일련의 규제강화 흐름 - 예를 들어 국가교육과정과 국가시험- 사이에 필연적인 모순관계는 없다. "규제강화는 국가로 하여금 시장구조내에서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조타수(steerage)'의 역할을 계속 하게끔 하는 것이다." 조타수는 국가 기준, 국가 교육과정, 국가 시험과 같은 일이 주어졌다. 이런 모든 형식은 현재 미국에서 추진되고 있으며 상당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인데 그들 일부는 이데올로기적 경계선에 영향을 미쳐 보수적인 퇴보의 우산(umbrella)아래 내재되어 있는 다른 요소들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다.

나는 {교육과 문화정치}에서 역설적으로 국가교육과정과 특별히 국가시험 계획은 시장화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처음 단계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소비자"시장을 시장답게 만드는데 필요한 비교데이타 조성을 위한 구조를 실질적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구조없이 "선택"을 위한 정보의 비교 토대가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규제강화의 형태에 관해 논쟁할 필요는 없다. 이전 장에서 논의했던 신자유주의 시장과 마찬가치로 그것은 역시 영국에서 구축되었으며 이런 경로를 기록하는데 있어 적절한 관심을 기울일 만한 중요한 연구결과가 역시 있다.

일련의 국가표준, 국가 교육과정, 국가 시험이 "도덕성의 강화" 를 위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결국 그런 규제강화의 개혁은 공통관심사에 대한 주제가 논쟁되고 도덕적 의문대상이 되기 쉬운 사회적 공간을 생성하는 가치의 분배와 공통의 감정에 필경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상식"으로서 생각되어지고,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이것이 결정되는 가는 강화된다기 보다는 약화된다.

영국과 웨일즈에서 구축된 현재 평가 계획에 대해 상당히 철저하게 비평하는 연구가들은 국가교육과정을 둘러싼 투쟁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요약해서 보여준다. 깊스와 머피(Gipps & Murphy)는 국가교육과정과 연관된 국가평가계획은 점점 전통적 시험모델과 배후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가정에 의해 명백히 지배되고 있다. 동시에 평등에 관한 주제는 점점 더 뒤로 밀리고 있다. 규제강화를 진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에 대한 계산에서 효율성, 속도, 비용통제가 사회적이고 교육적인 정의에 대한 종합적인 사고를 대체하고 있다. 빠르게 시험을 치루는 것이 통용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시험발달의 속도가 중요하며, 교육과정과 평가의 변화가 규칙적이며 시험이 모든 집단에게 공정한가를 보장하기 위한 세밀한 분석과 시도를 수행할 시간이 [그곳에는]없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약화"의- 시장의 경쟁하는 개인이 지배적이며 사회적 정의는 어떻게든 알아서 될 거라는 - 조건이 이곳에서 재생산된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과 국가의 규제강화의 결합은 정말로 "잘 작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시장, 장점, 효과의 상징이 생산되어진 다른 실제를 가리는 방법으로 작동한다. 한편 이것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비판 교육학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지만, 실제로 실행되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전략적으로 사고하기

이 논문에서 현재 몇몇 나라에서 진행중인 교육"개혁"의 효과에 관해 진지한 문제제기를 던졌다. 단지 한 곳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시장계획과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와 중간관리계급의 규제강화계획이란 두가지 연관된 전략의 결과에서 숨겨진 면을 서술하기 위해서 영국의 사례(들)을 연구했다. 허버트 클리바르드(Herbert Kliebard)의 역사적 분석에서 힌트를 얻기 위해, 교육과 사회의 전망을 달리하는 상이한 이해관계들이 교육정책과 방식을 둘러싼 사회적 장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서술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의 영역에서 몇몇 복잡성과 불균형을 입증했다. 이런 복잡성과 불균형은 도덕성의 "강화"가 아닌 "약화"를 가져왔으며, 지배적인 교육과정과 교수과정의 형식과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였으며, 그것을 승인하는 사회적 특권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약 우리가 이런 우파의 심각한 전환에 정직하게 맞서지 않고 그것에 대해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면, 대항 헤게모니적 상식의 구성이나 대항헤게모니적 동맹을 구성하는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시장화와 국가규제 강화라는 이상한 결합의 성장, 교수법의 유사성과 "전통적인"학문 교육과정과 가르침으로의 움직임, 이러한 투쟁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지배계급의 능력, 병행해서 일어나는 상식의 이동, 이런 모든 것은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대신 정직하고 자기반성적으로 맞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잠시 내가 만한 것중에서 숨겨진 모순(paradox)를 지적하고자 한다. 최근 나와 그리고 다른 연구자들의 상당한 연구조사가 보수적 퇴보의 경향을 다루고 있지만, 그런 관점에는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위험이 있다. 역사와 정치와 우파의 사회적 교육적 움직임과 "개혁" 방식에 관한 사례 연구가 그런 정책과 방식의 모순적이고 불균등한 결과를 알 수 있게 했다. 명확한 증거의 기반위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주장을 재정의 하게 했다. 이것은 유용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과정에서 잠재적인 결과의 하나가 보수적인 의제의 관점에서 전반적으로 교육적인 주제를 형성했다. 그런 개념들은 - 시장, 선택, 국가 교육과정, 국가 시험, 기준 - 신자유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에 의해 구축된 영역에서 논쟁을 유도했다.  "무엇인가(What is)"에 대한 분석은 "무엇일수도 있는가(What might be)"에 대한 분석을 결여케 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전망, 정책, 실제,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들에 관한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토론이 사라졌다.

비록 중요하긴 하지만 퇴보적인 교육정책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파는 얼마나 중요한 상식의 변화가 교육에서 투쟁중인지 보여준다. 도덕성의 "강화", 민주주의의 "강화"가 오늘날 실제로 가능한 의미를 재구성함으로서 교육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아마 몇몇 대답은 {민주주의적 학교(Democratic Schools}8) 와 같은 책이나 {학교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Schools)}9) 에서의 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자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의해 제안되고 있는 정책과 실제에 대해 비판적인 대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는 확실한데, 실제에 대한 시장의 수사를 잘못 받아들이면 해답은 절대 찾을 수 없다.
주--------------------------
1) 역자주>> 인민주의자들의 목적은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 고양이다. 그들은 집단내지는 연합, 당이 그들의 주인이 된다고 여겨 그에 기반한 정당의 후보를 거부하며, 선거에서의 한 때의 승리가 결코 그들의 권리와 이해를 항상적으로 대변하지 않는다고 여겨 선거에서의 승리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그룹들이다. 그들은 로렌스 굳윈(Lawrence Goodwyn)이 [인민주의자의 현재]에서 말했던 "미국 자본주의의 틀내에서 다양한 협동적인 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근대 미국의 교계적인(hierarchical) 경제형태로 구조적인 개조를 위해 노력한다" 는 말처럼 이를 위해 국가에 의해 빼앗긴 인민의 선택권리와 결정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자 한다. 그들은 다양한 인종, 다양한 그룹으로 형식의 제한없이 이루어졌으며 진보를 지향하고 폭력을 삼가는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리고 가족의 가치와 노동, 동기와 책임을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온건한 자들이면서도 다른 이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고 한다. 〔www.populist.com〕에서 인용
2) 역자주>>1994년 Herrnstein.R과 Murray.C에 의해 출간된 이책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일반지성 'g'- 지성의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복잡한 정신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 과 IQ(지성지수)가 표준화된 지성측정시험에 의해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 IQ는 40-80%기 유전성이 있고, 평생동안 비교적 덜 유동적이다. 흑인의 IQ는 백인의 IQ보다 낟은데, 낮은 IQ는 가난, 범죄, 실업, 불합리, 복지의존성과 같은 사회적 문제의 이유이다. 높은 IQ는 성공의 유일한 관문으로 세상은 인식능력이 높은 엘리트와 인식능력이 결여된 하위계급으로 빠르게 분리되어가고 있다.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도 IQ를 올릴 수 없고 불평등을 해결 할 수 없으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적당한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The Bell Curve Debate」에서 인용
3) 역자주>> 영국은 1988년 교육개혁법을 제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국가교육과정을 도입하였다. 1991년 개정에서는 교육과정 문서의 체제를 보다 체계화하는데 주목적이 있었고, 1993년 개정에서는 학습량의 축소를 통해 학교재량의 폭을 넓히고 학습내용을 보다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교육개발』1999년 여름호
4) 역자주>> "운영위는 교육적 성취기준을 더 높이기 위해 학교를 관리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 운영위의 임무는 학교의 상태가 성취도를 재검토하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행동을 취하고, 발전을 검토하는데 효율적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기준을 올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운영위와 지방교육국은 지원하는 관계이다. 학교가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면 운영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업(business)을 운영할 여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운영위가 학교 성취도에 악영향을 줄 위험이 있는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면 지방교육국은 관리자의 입장이 되어 필요한 모든 권력을 이용하여 논란거리가 이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국교육 및 고용국 홈페이지 中
5) 지난 선거에서 "신노동당"의 보수당에 대한 승리가 이 관점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지는 지켜볼 문제이다. 어떤 면에서 신자유주의적이고 신보수주의적 정책은 이미 노동당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전 보수당정부에 의해 지지된 지출에 관한 엄격한 통제와 엄격한 성취도에 관련된 공격적인 "기준의 상승"의 중요시와 같은 것이다
6) 인종차별적 국가에 관한 논의는 오미와 위난트(Omi & Winant)를 참조하고 인종과 표현(representation)에 관한 분석은 맥카시와 크리크로우(McCarthy & Crichlow)(1994) 그리고 맥카시(1998)을 참조하라.
7) 역자주>> 1989년의 경우 중등학교 졸업시험에 해당하는 GCSE에서 5개 이상의 과목의 A-C를 받은 여학생의 비율은 35.8%였던 데 비해, 남학생의 비율은 29.8%에 머물렀고, 1999년 5개 이상의 과목에서 A-C를 받은 여학생의 비율이 53.2%에 달한데 비해 남학생의 비율은 42.6%에 그쳤다. 『교육개발』 2000년 가을호
8) 이책은 일본, 스페인, 아르헨티나, 브라질, 포르투갈 그외 나라에서 번역되었거나 될 예정이다. 그래서 "월요일에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절박한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수많은 나라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9) 「학교를 다시 생각한다」는 비판적인 학자, 초등/중등/고등 학교 선생님, 학생, 지역사회 활동가들이 비-엘리트적인 방식으로 함게 활동할 수 잇는 방식의 가장 좋은 예이다. 다시보는 학교에서 정보를 얻을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