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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포스트모더니티와 교육변화에 대한 전망_손지희역

2001.02.08 15:18

하그리브즈 조회 수:7440 추천:1

재구조화의 재구조화

재구조화의 재구조화
- 포스트모더니티와 교육변화에 대한 전망

21세기 진보교육연구소 교육이론분과

<<여는 글>>

1986년, '교육과 경제'를 주제로 카네기 포럼이 열렸다. 그때 나온 '준비된 국가'(A Nation Prepared)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는 '학교의 구조를 바꿀'(학교 재구조화)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교사가 자신의 교육행위에 대해 책무성을 갖고서 지역과 국가의 목표를 아울러 달성해내게끔 의사결정을 할 수 있으려면 <교사의 전문직주의>를 존중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때 제안된 '재구조화'의 취지였다.

이 글에서는 교육가들에게 부과된, 특히 교사의 발달 및 전문성 신장과 관련된 선택사항들과 딜레마들을 살펴, 재구조화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의미를 밝혀보려 한다. 우선, 재구조화와 그것의 선배격인 '개혁'을 구분한다. 다음, 서로 다른 두 재구조화 시나리오를 견준다. Sarason과 Schlechty가 두 시나리오를 각각 작성했다. 둘 다 재구조화 속에서 나타나는 <관료제와 전문직주의 간의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뒤에 보여줄 터이지만, 그런 긴장[관계]들이 비단 교육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교육 부문에 나타나는 긴장[관계]는, 그 뿌리를 포스트모던으로 재편되어 가면서 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전반에 나타나는 긴장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재구조화에 들어있는 이런 긴장[관계]가 함의하는 바를 다음 네 가지, 즉 비전과 의견vision and voice, 지시와 선택mandates and menus, 인간에 대한 신뢰와 절차에 대한 신뢰trust in persons and trust in processes, 구조와 문화structure and culture 속에 들어있는 딜레마와 관련하여 탐구할 것이다.

<<재구조화의 의미와 맥락>>

<개혁에 의한 변화[시도]>는 흔히 교사들이 자기 향상을 꾀하도록 지원하고 교사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교사들에게 구조적으로 기회를 마련해주기보다는 관료적 통제에 순종하라는 식으로 교사들에게 개선을 지시하려 든다. <재구조화에 의한 변화[시도]>는 이런 식의 개혁에 뒤이어 곧바로 나타난다. 개혁의 시대에, 미국은 교사의 자질과 교사의 기본능력 평가에 실질적인 강조를 두었다. 여러 국가 또는 교육구가 교수력(敎授力)을 높이려는 목적에서 성과급, 승진 사다리, 차등 보직 등의 기제를 도입했다. 영국의 경우, 교사양성[교육]에 대해서는 교사교육프로그램을 승인받게 함으로써 국가 수준의 중앙 집중식 통제를 폈다. 이같이 [국가의] 승인을 받은 프로그램들은 실질적인 교수 경험과 교과에 대한 전문적 지식 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뿐, 목적이라든가 윤리, 그리고 상이한 교수 형태들이 암암리에 초래하는 사회적 결과를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다. 1988년에 새로 제정된 교사 [근무] 계약 또한, 교실 아닌 장소에서 '규제받는 시간'(수석교사 내지 교장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최소한도의 계약된 근무 시간에 대해 일일이 열거했다.

<개혁을 통한 변화>의 맥락 안에서, 교사들의 동기를 유발해 내려고 고안된 기제들은 교육과정 및 교수[방법]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기제들과 비슷했다. 영국의 경우, 교사 교육에서 교과지식을 점점 중시하고 국민 교육과정(National Curriculum)에 바탕을 둔 교과를 정부 차원에서 부과하는 것은, 교사에게 주어지는 폭넓은 후원, 학교의 자율연수, 학교의 자기 평가,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이미 결정한 내용과 원리 안에 들어있는 훈련과 유도를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것에서 노골적으로 등 돌리겠다는 발상이다. 미국의 승진 사다리와 교사 지도성 방안의 대다수는 탁월성과 전문성 신장에 관련된 다양한 범주에 의해서 교사를 선발, 보상, 평가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기초 기술의 숙달을 중시하곤 하는 승인된 교수 모델에 <교사가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는지>를 잣대로 하여 교사를 선발, 보상, 평가했다. 이런 몇 가지 사례에서, 교직 개혁과 교수(수업) 개혁은 한 통속이었다. 교사발달은 자기개발이 아니었다. 교사발달의 방향은 '규제와 통제'라는 관료제적 맥락 안에서 [교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개혁 패러다임이 안고 있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개혁 패러다임은 승진 사다리가 가진 효과-교사들 간에 분열을 조장하는-를 얕잡아보았고, 교사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기본바탕을 잘못 이해했다. 즉, 교사들은 외적인 보상 - 외부에서 주는 승진이라는 '당근' - 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주어지는 <내적인 보상>에서 자극을 받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실은 교사 고유의 성역이며 교사가 통제하는 곳이다. 따라서 관료적인 통제를 가해서 교사들에게 개선을 명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개혁 패러다임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부채 위기가 가중되고 전지구적 경쟁에 대해 법인 세계가 굼뜨게 반응하기 시작하자, 고등학교를 마친 젊은이들이 최소한의 전통적인 능력-개혁가들의 머릿속을 지금껏 지배해 온-과 기초 기술보다 더 많이 습득해야 한다며 (개혁가들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미국이 전지구적 정보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문제 해결력, 고차원의 사고능력, 위기 포착력, 팀웤과 협력. 이런 것들이 점점  젊은이들에게 절실한 능력과 기술로 요청되고 있다. 지금의 시스템[은 유지시키되]을 급한 대로 그럭저럭 수리해서 재빨리 정착시키는 것만으로는 기초 기술 습득과 학업 성취같은 '전통적인 학교교육의 목표'조차 달성하기 어려워 보였다. 분명, 그런 식[시스템 내부 수리]으로는 새로운 정보 사회가 주문하는 거대한 교육적 도전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기존의 시스템 테두리 내부를 개혁해 가지고는 충분치 않았다. 더 근본적인 과제가 요청되었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자면 교수-학습 조직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꾸라는 얘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재구조화'는 교육정책들 속에서 공공연하게 떠도는 말이 되었다. 대통령 집무실, 각료들, 공직자들... 그 어디에서든, 지방 수준 정책부터 국가 수준 정책에 이르기까지 화두는 '재구조화'였다. 하지만 '재구조화'의 의미는 다양하고, 상충되며 때로 잘못 정의되곤 한다. Tyack이 본대로, 재구조화와 관련된 곳에는 모호함의 안개가 자욱이  낀다.

재구조화를 구성할 법한 요소들은 가지가지이다. 머피와 에버스톤은 단위학교책임경영1)(school-based management), 소비자 선택, 교사에 대한 권한 부여(혹은 확대), 이해 중심 수업 등을 꼽는다. 전국 (주)지사 협의회는 고차원적 사고 능력의 배양을 위해 다시 설계된 교육과정과 교수[방법]를 '재구조화의 요소'에 집어넣는다. ; 현장 단위에서의 의사결정 및 권위의 탈중심화 ; 다양하고 차별화된 교사의 역할 ; 그리고 책무성 체제의 확장. (여기서 언급한 대로) 재구조화를 구성하는 특정 요소들은 저자마다 다른 게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교사들과 지도자에게 해당되는 학교 내의 규칙/역할/책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규정과 재구조화의 구성요소들이 주로 관련을 맺는다는 데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렇긴 해도, 이쯤의 공통분모를 넘어서, 재구조화에 대해 더 넓은 합의와 헌신을 끌어내려고 욕심부릴 경우, 중구난방(衆口難防)의 의견들을 추스릴 길 없다.

  하지만 재구조화의 뜻을 좀더 넓게 한정하는 게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나하나의 의미들은 제안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재구조화의 일반적인 양상은 분명해지고 있고 이런 일반적인 양상은 힘과 통제에 관한 상이한 원리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매우 상이한 목적들도 포괄한다. 재구조화에 관한 두 가지 시나리오를 먼저 간단히 소개한다.

우선, Seymour Sarason이 쓴 {교육개혁, 그 예견된 실패}(The Predictable Failure of Educational Reform)에 나온 내용을 보자.   교실에 미친 충격(영향)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대부분의 교육개혁은 실패해왔다>고 Sarason은 주장한다. 이런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 교육 개혁을 구성하는 상이한 요소들은 상호 관련 속에서 전체로서, 그리고 복합적인 체제로서 구상되지도, 제출되지도 않았음을 지적한다. 만일 교육과정 개정이나 전문성 발달 혹은 새로운 교수 전략 같은 요소들을 다른 것들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따로 분리시켜 고립되게 다루면, 개혁의 성공이 뿌리부터 흔들리리란 건 거의 자명하다. Sarason은 그런 식으로 실패를 맛본 개혁의 사례들을 샅샅이 열거한다. 그것들은 단지 역사적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양상들은 지금 시스템의 만성적인 특징들로 변함없이 남아있다. 이런 사실은 캘리포니아에서 <문제 해결적 접근을 통한 수학교수방법의 실행>을 다룬 최근의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평가들은 보통, 교사들은 이런 방안이 아닌 기본 기능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방법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리고 지배적인 평가형태와 종이와 펜으로 치르는 관습처럼 굳어진 시험 때문에 교사들이 그런 방안을 실행하는데 실패함을 보여준다. 이 주장에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교육과정, 평가 그리고 딴 영역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실현되려면 '교사 발달과 전문가적 판단의 원칙 그리고 재량'까지 그 안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교사 발달과 전문직업주의 강화는 교육과정, 평가, 전문성, 학교 조직의 발달과 맞물려 추진돼야만 한다는 점이다.

Sarason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두 번째 요소는 근본적인 논쟁을 촉발할 소지가 있는 것으로서, 학교의 권력관계를 문제삼지 않은 채 거대한 교육적 변화를 이뤄내기란 어렵다는 점이다. '(학교는).....학교의 기존 권력구도에 맞서지 않고 피하려고만 들면, 학교는 바람직한 개혁을 취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육관료-교사, 교사-학부모, 교사-학생 간의 관계 모두가 학교내 권력관계에 포함된다. Sarason은 교실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근본적 발상전환이 학교에 필요하다고 본다. 그에게 재구조화는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즉 재구조화는 교장, 교사, 학부모, 학생 간의 기존의 힘의 관계를 껍데기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재구조화는 힘의 분포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것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변화여야 한다. 이런 통찰(전망)은 학교에 대한 사회심리학적인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그의 전망은 '학교'를, 교수와 학습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힘의 관계와 통제가 일어나는 장소로 이해하는 데서 나왔다. 재구조화에는 이런 관계들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다시 자리매김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시나리오의 저자는 Philip Schlechty인데, 재구조화에 관련된 포괄적인  주제들을 제시한다. Sarason와 마찬가지로, Schlechty 역시 근대사회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학교구조는 (이제) 온당치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관심에서 재구조화를 지지한다. 모두 똑같은 형태의 교실, 수업, 교사형으로 된 (획일적) 구조는 100여년 전(19세기후반과 20세기 초반) 상황에는 맞아떨어질지 몰라도, 후기산업사회의 질서가 내세우는 복잡한 요구와는 맞지 않는다. 그 시기에 학교는 대중에게 단순 기능을 가르쳐야 했고,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할 것 같지 않은 직업 역할을 위해 교육은 엄격한 선발체제 구실을 맡아야  했다.

Schlechty와 Sarason 둘 다 후기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과 품성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리고 후기산업사회에 알맞은 기술과 품성을 기르자면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잘 안다. Sarason은 이런 기술과 품성을 사회, 정치적으로 폭넓게 정의하며, 새로운 사회세계, 즉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위기가 감도는 세계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기능과 문제 해결력이라 간주한다. 그것들은 직업에 불가결할 뿐더러 문화적, 정치적 능력이기도 하다. 한편, Schlechty는 21세기 교육의 목적은 특별히 기업의 관심에 이끌려 가리라고 내다본다. 그에게  새로운 세기의 도전은 전지구적 정보사회의 도전이다. 아이들은 '지식-노동자'로 규정되며, 학교는 '지식-노동'의 거래 속에 놓인 것으로 정의된다.

정보가 점차 미국 경제의 기반이 되어 가고, 근육노동에서 지식노동으로 노동의 양식이 바뀌고 있듯이, 평생에 걸친 계속적 성장과 학습에 시민/노동자들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쏟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노동조건은 집단들 속에서 역할을 다하는 걸 배우기를 강제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 규율을 굉장히 강화하도록 훈련한다든지, 비판적인 능력을 가지면서도 충실성을 보여야 한다든지, 자신의 권리가 존중받기를 원하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따위를 배우는 게 앞으로의 노동조건에 적응하는 데 필요할 것이다....여기서 나열한 품성들은 민주주의 시민의 덕목들이기도 하다.

여기에 담긴 내용들은 Sarason의 것과 적지않이 비슷하다. 그렇지만, Schlechty의 논제에서 제시하는 법인적(기업) 맥락은 앞으로의 학교교육이 길러내야 하리라 간주되는 능력과 품성의 범위를 좁히고 있다. '존중'을 거론하지만, '배려'는 빠져있으며-타인에 대해서든 환경에 대해서든-'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 이는 미래 학교가 떠맡아야 할 온당한 구실을 헤아리는 데 ('왜곡'까지는 아니라 해도) '제한'이 많다.

Schlechty가 옹호하는 기업적 맥락, 특히, 재구조화된 학교에서의 힘과 리더쉽에서 그의 시각이 드러난다. 참여적 리더쉽은 옹호하지만, 진리와 아름다움과 정의의 바탕 위에 그것이 서 있지는 못하다. 겉으로는 힘의 관계에서의 변화를 지지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힘의 상징들'이 다시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만 나타낼 뿐이다. 리더십의 기제들은 상당수 바뀔 테지만, 궁극적으로 조직에 대한 통제는 '강력한 리더들'에게 부여된다. ; 조직의 전망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바로 그 조직에 속한 리더들이다.

힘과 리더십에 대한 Schlechty의 관점은 Sarason이 견지하는  민주적인 관점과는 무척 다르다. 대신에 그것은 기업의 관점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Schlechty는 행정관료들에게 교육 바깥을 더 넓게 읽어내라고 충고하지만, 그가 꼽는 참고문헌들은 죄다 법인과 경제 영역의 것들이다. 도덕 철학, 조직 정치학, 그리고 인간 발달은 목록에서 빼놓는다. 게다가, 그는 '학교의 재구조화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과 미국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Schlechty에게 재구조화는 기업 맥락에서의 재구조화이다.-이 때 기업적 맥락이란 학교나 사업주에게 기대되는 학습결과라는 테두리에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기업적 관점으로 인해 Schlechty식으로 힘의 관계와 교사의 권한 강화를 추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생긴다. - 거기에서 요란한 수식어는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감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문성의 신장은 행정적인 통제의 틀에서만 이야기된다.

이 두 시나리오는 모두 재구조화에 대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나 '태생부터가 그릇된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많은 부분이 통제하는 사람에 달렸으며, 관여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시하는 목적에 달렸다. 재구조화의 주제들은 여러 가지 중요한 딜레마들을 안고 있으며, 그 딜레마들은 가치와 목적에 대한 심오한 윤리적, 정치적인 선택과 관련이 있다.

이런 딜레마들의 한복판에는 관료적 통제로서의 재구조화와 전문가의 권한 강화로서의 재구조화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가 놓여 있다. 전자(前者)의 경우, 교사들은 교사 아닌 사람들이 내리는 지시를 실행하게끔 통제되고 규제받으며, 후자(後者)의 경우, 교사들에게 학부모, 교장, 학생과의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그들 자신을 개선하게끔 구조적으로 기회를 마련해주고 지원하며, 장려한다. 동의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변화의 추진력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근본적이고 난해한 딜레마들을 문제삼지 않고 비껴가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나서서 그 문제와 씨름하지 않고 또 우리 자신이 만족할 만큼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타인들은 나서서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와 헌신을 깎아내리고 그것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변화를 밀고갈 뿐이다. 다음 장에서는, 지금 통용되는 '재구조화에 대한 합의'의 밑부분을 들춰 보려고 한다. 그리고 가치와 목적 그리고 통제 속에 들어있는 딜레마를 드러낼 것이다. 다가오는 세기에 교육부문에 들이닥칠 도전에 맞닥뜨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이것들이라고 믿는다.

<<재구조화의 딜레마>>

재구조화는 많은 선택과 딜레마를 포함한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사이의 선택처럼 익숙할 뿐만아니라 이미 광범하게 토론되었다. 여기서는 마찬가지로 중요한 문제인데도 별로 토론되지 않은 재구조화의 4가지 딜레마-재구조화가 함축하는 교원의 발전경로들 뿐만아니라 재구조화의 목적과 재구조화를 단행하는 판단에 위력적인 함축을 가지는 딜레마-에 대해 살펴본다. 우리는 이들 딜레마 모두에 관료제와 전문성 사이의 긴장이 관통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의견과 비젼 Voice and Vision>

재구조화에서 핵심적 긴장의 하나는 Voice 와 Vision사이에 있다.그것은 교육개혁에만 남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재구조화 전반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근대에서 탈근대로 또는 자유주의에서 후기자유주의 형태로의 변동을 밝히는 논문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에게 이러한 변동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접두사 post를 붙일 때, 우리가 '어디로' 움직이고 있다는 면보다는 '무엇을 넘어서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더 초점이 놓여 있다.(Flemig 1991) 그렇긴 해도 그러한 변동의 중심에는 정보,통신 기술의 세계화가 있다는 데 다들 동의한다.

(Giddens1990,Harvey.1989,Menzies.1989)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생산과 의사결정 속도의 신속성과 함께 닥쳐왔다. 컴퓨터의 발달은 위성통신과 광섬유에 의한 원격통신과 결합하여 정보와 유통시장에서 국제교역을 놀랍게 팽창시켰다. 상품과 용역의 회전속도는 짧아졌고, 경제적 협력은 지방시장과 노동력과 토지의 기회비용을 극대화 시키고 현대의 통신기술로 경영의 전체 네트워크를 통해 즉각적인 연결과 조정을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이익과 전문성을 국경을 넘어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무역과 경제적 행동의 세계화 추세로 말미암아 세계는 더 넓고 튼튼한 더 적은 숫자의 경제 단위로 재조직되어 국경의 중요성이 약해졌다. 1992년 말까지 유럽공동체에서 관세와 무역장벽은 철폐될 것이다. '유럽 화폐'라는 상상키 어려운 제도의 도입 또한 원칙적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도버해협의 터널이 개통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이미 획득된 통합이 물리적,기술적으로도 공고해질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지금은 멕시코까지 체결된 자유무역협정은 대서양의 다른 편에서도 비슷하게 경제적 통일과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유연성을 높이고 있다. 여러가지 점에서 경제 생활의 세계화는 경제적,정치적,물리적으로 독립된 실재로서의 민족국가를 위협하고 약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위협에 대응하여 국가적 정체성을 방어하고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긋선에 의해 서술된 바에 따르면 그것은 특히 민족적 문화유산의 요소를 강조하는 '국가교육과정'의 발전을 통해 시도되고 있다.(Goodson 1990) 긋선은 영국과 웨일즈의 국가적 교육과정에서 전통적 대학과목들이 다시 옹호되는 것에서, 흔들리는 국가 정체성을 북돋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읽어냈다.

"경제적 생활 특히 통신,정보,기술의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조정과 작동의 존재양식에 대한 거대한 도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이 중앙집중화된 국가적 교육과정에 대한 추구는 경제적으로 쇠퇴 위기에 있는 국가의 대응으로 보인다."

그는 역사의 특수한 국면을 다루면서 말을 잇는다.

"국가적 교육과정에서 과목의 균형은 산업적 상업적 요구보다는 국가적 정체성과 조정의 문제가 현저히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서 역사과목이 학교에서 중요시되지 않음이  분명한데도 기초과목으로 포함되는 동안 기술공학은 대부분 생략되고 있다."

역사교육에서 대영제국이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복원된 전통을 전승하는 부담은 대부분 다른 사회적 짐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세계화가 강력하게 진행되고 맥도널드가 모스크바에서 개장하고 sush bar가 뉴욕에서 어울릴 때, 삶의 지구적 상품화에 따라 국제적인 도시풍경이 서로 닮은꼴이 돼가고 있을 때, 세계화에 맞닥뜨려 소련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라트비아.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투쟁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는 민족적,종교적,언어적 정체성의 부흥을 목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캐나다에서도 헌법적 통일성의 붕괴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퀘벡지역의 자주성을 인정받으려는 싸움에서 그리고 '국가안의 국가'로서 자치(自治)를 위한 이들 '일등국민'의 투쟁에서 목격된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티의 맥락에서 이전까지 들리지 않고 무시되고 거부되고 부정되었던 사람들의 의견이-이전에는 극소화되고 박탈되었던 사람들의 의견- 등장한 사실이다. 예를들어 길리버그의 영향력있는 책 '다른 의견에서'는 도덕적 발달에서 평가절하된 여성들의 관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Gilliberg.1982)  하비가 그것을 검토했을 때, '모든 집단이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정당한 것으로 수용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은 복수성(複數性)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는 기본적인 것이다.' 교육변화와 교육연구문헌에서 이전에 들리지 않았거나 평가절하된 교사들의 의견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존중되고 권위가 높아지고 있다.그리고 특히 초등학교에서 교사들의 의견은 대개 여성들의 목소리이다.  엘바즈는 지식,생각,권한부여에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일이 있는지는 '의견'개념과 주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의견' 개념이 적용되는 곳에서 그 용어는 항상 이전의 침묵의 조건에 대항하여 구사되며 따라서 그것은 인식론적 용법일 뿐만아니라 정치적 용법이다.(Elbaz.1991) 긋선은 교사들의 의견은 그들의 삶,삶의 방식, 일생에서의 위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연구자이거나,행정가이거나 동료이거나 가르치는 것을 이해하려면 단지 교사들의 가르치는 행동,기술과 동작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교사들의 목소리와 그 표현 목적을 파악해야만 한다. 교사들의 의견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면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단지 교사들의 의견을 듣는 것 뿐만아니라  교사들의 의견이 나올수 있도록 먼저 지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의견의 등장'은 중앙의 전통적인 권한과 조정의 역할을 위협한다. 예를들어 지역자치와 민족적 분리를 위한 투쟁은 오래 지속돼온 중앙집권적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교육에서는 중앙으로부터 관료적 추진력에 의해 변화와 개선이 이루려는 경우,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교사들의 목소리를 듣지않거나 침묵하게 하거나 '단지' 저항으로 나서게 한다.이런 점에서 관료적 통제의 힘과 교사발전이 서로 대립하고 있을 때, 교사들 목소리의 출현에 가장 큰 도전중의 하나는 교육적 비전의 편성방법이다. 공통된 비전의 발전, 공유된 목적의 분권화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진 목표를 더욱 명료하게 이해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변화와 개선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교사공동체에서 신뢰와 지속성을 발전시키는 데서 핵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비전의 실현을 위해 동기를 부여함에 있어서 교육지도자는 매우중요하게 평가된다.예를 들어 Achilles(1987:18)에 의하면 '지도자들은 학교를 개선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며 기대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학교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먼저 교장들은 좋은 학교에 대한 비전을 제공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비젼을 분명히 밝혀 비전에 대한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비전은 기본적으로 교장의 비전이며, 다른사람에게 설명되는 비전이며(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비젼에 대한 동의의 획득은 부차적이다. 이들 비판들은 비전과 학교참모들사이에서 공유된 목적과 판단을 논쟁할 작정이 아니었다. 그렇긴해도 '이것은 누구의 비전인가?'라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몇몇 학자들 생각에, 학교개선을 북돋우고 학교문화를 발전시키는 데에 학교장의 역할은 교장의 비전을 실현하도록 교사들을 다루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딜과 피터슨은 교장들이 그들 학교의 문화를 이해하고 나면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한다. '좋은 학교에 대한 내 구상과 일치하는데, 그렇다면 기존 형태를 재강화하고 힘을 주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 비전이 기존의 경향,가치,행동하는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학교문화를 바꾸고 재형성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협력적인 전망'에 관해 많은 글을 썼던  딜과 피터슨에게 이것은 학교의 지도력을 해결하는 일의 일환이었다.그러나 많은 점에서 그것은 해결의 일환이라기 보다는 문제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강력하고 획일화 된 지도자가 '비전 만들기'의 선봉에 나선 경우의 우매함은 카나다항공의 새 회장 클로드 타일러가 회사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방법에서 드러난다.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타일러는 항공사를 위한 직무강령을 작성했는데,그것은 그 혼자 손으로 짜여졌고 모든 피고용자의 가정에 보내졌다.'(the Globe and Mail Report on Business,1991 2월)

  해결의 일환인가 문제의 일환인가?

  '나의 회사''나의 비전''나의 교사''나의 학교'등 이들 독점적 요구와 태도들은 집합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이고, 자발적이기보다는 강압적이며 민주적이기보다는 위계적인 학교와 변화를 제안한다. 이러한 독점적 소유권은 대부분 남성적인것이며 권력은 여성들에게 행사된다.

  이처럼 단일한 비전이 주어지게 되면, 이내 교사들은 그들의 의견이 억압당하게 됨을 알게 된다. 관리는 교묘한 조작이 된다. 협력은 신회원의 가입과정이 된다. 무엇보다도 나쁜 건, 교사들을 교장이 제시한 비전에 순응케 함으로써, 그 비전에 들어있는 결점을 교장들이 스스로 깨칠 기회를 최소화한다는 데 있다. 즉, 교사들의 비전은 때때로 교장들이 제시하는 비전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장이 가진 비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장들이 가진 비전의 질과 명료함은 그들의 지도성을 드러내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교장만이 지혜롭다고 볼 수는 없다. 혹은 우리가 교사들에게 하라고 해온, 문제제기하기, 질문하기 그리고 심도깊은 반성 등으로부터 교장이라고 해서 면제될 수는 없다. 따라서 교장들의 비전은 잠정적으로만 인정되어야 한다. 즉 바뀔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교장들의 비전은 협력적인 혼합 속에 녹아들어 그 일부를 이루어야 한다. 교장의 관점이 갖는 권위는 그것이 교장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 질과 풍부함을 가지고 잠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비전을 세우는 데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집중되어서는 안되며, 여럿이 함께 책임을 가져야 한다. 협력이란, 교장의 비전에 맞춰나가는 것이 아닌, 함께 비전을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어야 한다. 뒷짐지고 지켜만 보던 사람들도 학교의 사명과 목적을 분명히 하는데 참여시켜야 한다. Leithwood와 Jantzi는 학교를 개선하기 위해 학교 공동의 목표를 발전시켜나가는 실제 사례를 기술한다. 이때 학교 개선팀에게 그 과업에 대한 책임이 맡겨진다. 그들은 이것이 교장이 가진 목표가 절차(과정)를 지배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비록 그들이 '혹은 그것들(교장이 가진 목표)이 절차(과정)를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이라는 구절을 께름직하게 추가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비전 혹은 목소리(의견) 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재구조화를 위해서나, 특히, 전문성 발달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 비전은 없고 목소리만 난무하는 세계는 여러 소리가 뒤얽혀 혼란으로 빠져버리는 그런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목소리들을 중재하고, 조정하고, 모아내는 아무런 기제도 없는 혼란의 세계이다. 이는 탈근대 세계의 어두운 측면이다. 공동체와 권위가 사라져버린 그런 세계.

  예컨대, 교사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그저 무턱대고 찬양하는 조사연구들, 그리고 학부모와 학생의 판단보다 (그것들을 무시하기도 하면서) 교사의 판단을 자의적으로 신뢰하는 연구 전통들은 이런 탈근대적 전망 속에 있는 몇가지 어려움들을 예증한다. 목소리들(의견)은 들어야 할 필요는 물론, 참여시키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논쟁해볼 필요가 있다. 교사의 목소리(의견)들을 명료화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의견)를 명료화하는 데에 있어서 윤리의 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지껏 목소리(다양한 의견)가 없는 비전의 세계 역시 문제가 있음을 살폈다. 목적이 강제로 부과되고 합의가 조작되는 이런 세계에서는, 교사의 경험에서 오는 판단과 지혜는 설 자리가 없다. 즉 교사들의 목소리(의견)를 경청하기 위한 적당한 자리라곤 없다. 교육 재구조화를 위한 거대한 도전은 비전과 목소리(의견) 간에 존재하는 이런 긴장을 뚫고 나가 조화시키는 일이다. 즉 불협화음에서 합창을 창조해내는 일.   

<지시와 선택 mandates or manus>

  탈근대성의 모순은 정보와 통신과 경제적 생활의 세계화에 따라 지방적,즉각적 생산의 필요와 소비자의 욕구를 채택하고 반응하며 강조하는 것이 추세로 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활동에서 '대량생산으로부터 다양성으로의' 이동은 앞장에서 설명한 지방화, 지역화된 문화적,민족적,언어적 정체성의 부흥과 함께 지식과 신념체계 그리고 그것이 기초한 전문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수준에서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적은 수의 단일한 경직된 지식으로부터 동요하고 변화하는 복수의 신념체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념체계에 대한 신뢰는 약화되고 있다. 지구적 규모에서 거대한 환경 재앙에 대한 이해가 늘어남에 따라 이성적인 진보의 추구를 통해 세계를 정밀하고 신뢰성있게 예측하고 조절하는 수단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고 있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에 따른 정보의 팽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의해 상징되고 추동된 변화는 과학적으로 예측된 사회주의의 변혁에 대한 신념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한 거대이론과 인간이해의 거대서사(巨大敍事)는 권위를 위협받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서사적 통일'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서사적 지식조차도 사람들의 삶과 일대기가 주장된 어떤 통일성보다 가변성,모순,그리고 분열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는 점에서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여 왔다.( Willinsky)

따라서 vision으로부터  voice로의 이동은 단일하고 꽤나 경직된 신념체계로부터 다양하고 신속하게 이행하는 신념체계로의 변동을 동반하고 있다. 이것은 정보와 이해의 세계화를 배경으로 한다.그것은 또한 세계화가 우리가 알고자 하는 세계와 그것을 알려고 하는 방법론-우리들의 지식기반을 돌이킬 수 없게 지역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견고성과 지속성을 계속 위협하고 있는 흐름- 의 변동속도를 증가시키면서 공간과 시간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고 있다. 게다가  여행과 문화간 유입이 확대됨에 따라 상이한 신념체계의 접촉이 늘어남으로 하여 지식과 신념의 다양화가 촉발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행은 사회연구와 사회발전사이의 긴장되고 순환적인 관계 때문인데 사회적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연구하고있을 때 조차도 변화하고 있으며 특히 세계를 구성하려는 바로 그 탐구에 대한 대응으로 변화한다.(기든스 1990)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인식방법의 전환은 확실성의 문화로부터 불확실성의 문화로의 이동을 표현한다. 연구전문성 자체와 결부되었던 확실성의 감소와 이에 따른 <전통적 지식의 신뢰성의 약화>는  교육과 교육의 재구조화에 엄청난 함축을 가진다. 이러한 함축들은 교육개혁을 다루고 발전시키는 방법들인 선택mandates과 지시manus 사이의 긴장의 증가로 표현된다. 그것들은 여러 영역에서 서로 긴장관계에  놓이는데 여기서 그중 두가지 부분에 대해 검토하겠다. 두가지는 첫째, 새로운 교수전략의 실행과 둘째, 상이한 종류의 협력관계의 발전이다.

  교수전략에 있어서 핵심적인 쟁점은 우수성의 단일한 기준을 인정하고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複數)의 기준을 지지할 것인가 또는 단일한 성취(구원)의 진로만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많은 진로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이다. 최근 수년간의 개혁노력의 대부분은 우수성의 단일한 모델에 입각하여 진행되었다. 이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을듯한 교육연구에 기초하였고 정당화 되었다. Madeline Hunter에 의해 재조명된 '교수의 기초'모델이 한 사례이다. 이 모델은 '직접교수'의 규정된 원칙에 의거하여 효율적인 지도의 관점에서 훈련을 조직한다. 한때 이 모델은 참모의 훈련방법으로 효율성이 거의 입증된 필수과정으로 미국과 카나다의 여러 학교구에서 채택되고 장려되었다. 수많은 학교구에서 이 모델은 교사평가를 위한 기초로 구실했다 .적어도  한 교육구에서는 신임교사의 고문이 될 수 있는지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데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왔다.(Popkewitz and Line. 1989)  

  직접교수는 어디에나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단지 특별한 경우 특히 기초기술을 강조하는 경우에만 유효하다는 점에서(Hallinger and Murphy 1987), 또한 그것을 학교에서 광범하게 채택할 경우, 위기 관리, 열린교육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존성과 경직성을 강화한다는 점(Smyth and Garman)에서 그뒤로 줄곧 비판받아 왔다. 따라서 교사의 효율성을 개선하고 교사들의 추정된 <효율성에 기초해서 평가하고 지원>하는 정책적 노력은 실제적으로 넓은 범위의 효율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 제한된 기준'에 근거하여 진행되었으며 다른 종류의 교사들 사이에서 효율적 특성과 행동의 발달을 저해하는 기준에 기초하였다..

  조이스와 웨일에 의해 재조명된 교수모델도 비슷한 비판을 받았는데, 이 모델은 '동료장학'을 통한 현직교원의 훈련계획의 기초로서 이용되어왔다.(Joyce and Weil 1986) '학생성취도를 위한 참모의 개발'에서 조이스와 쇼워즈는 협동학습과 전문가의 교수와 같은 실행된 교수전략을 채택하기 위하여 '동료장학의 전략'을 장려하였는데,이러한 교수전략의 유용성과 효율성은 교육연구의 성과에 튼튼하게 뒷받침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학교조직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어진 죠이스와 쇼워즈의 연구는 첫째, 교사들의 현실적인 통찰과 지혜를 평가절하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째, 몇몇 과학적 전문가들의 소유이고 규범인 지식과 전문성을 교사들더러 갖추라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판되었다. 로버트슨은 과학적 확실성에 대한 기술주의적으로 낙관적인 그들의 주장에서 교사들의 활동에 개입을 하기위한 정당하지 않은 이유들 뿐만아니라 강한 성적(性的) 함축을 가진 '엄한 연구'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쓰기를

  학자가 그들의 서문에서 Ron Edmonds를 인용할 때,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과신(過信)을 들을수 있다."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어디서든지 그들의 학교생활이 우리의 관심인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우리는 해야할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한 확실성과 예측가능성은 외부보다는 내부의 탐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남성적인 관점의 접근과 유사하다.Edmonds가 언급하고 있는 '우리'는 이미 교실의 교사들이 아니다.지식과 교수주의의 힘을 옹호하는 이러한 주장은 단지 위계적인 체계안에서만 타당성을 얻는 그들의 전문성만을 언급한다. 학자들은 교사들이 많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칠 만큼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음을 믿고 있다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오히려 예상된 결과를 산출해낼,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행동영역에서 전문가들이 교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수전문성의 단일한 모델'에 대한 신뢰는 교사들 사이에 경직성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교실에서 그들이 적절하고 사려깊은 판단을 내리는 것을 어렵게 한다.그것은 교사들의 수업 진행에서 다양한 줄거리의 가치에 대한 내면적인 거부감 때문에 (수업의 줄거리-레퍼토리-를 만드는데 투여된 삶과 사람에 대한 ) 교사들의 저항에 직면한다.또한 그것은 '효율적인 교수'가 이뤄지려면 실제 수업현장에서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만한 다양한 교수전략의 계획을 교사들이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절감했을 때조차도 우리를 특수한 기술의 매우 협소한 영역으로 안내한다. 교육개혁의 길은 폐기된 과거의 확실성으로 뒤덮혀있다. 읽기계획, 어학실습실, 계획된 학습, 열린교실등의 개혁은 혁신의 박물관에 적합한 전시물들이다. 오늘의 해결이 자주 내일의 문제가 된다. 혁신의 박물관에서 미래의 전시물들은 완전언어, 협동학습 또는 조작적 수학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수 없다. 우리들의 지식과 이들 방법의 효율성에 대한 이해는 자주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되어졌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존적 기반에 근거하고 있는 연구에서  전문성의 단일한 모델은 인식론상의 모래밭 위에 지어졌다.

  우수성에 대한 복수 모델은 교사들과 다른 교육자들의 공동체의 집합적인 지혜에 기반하고 이로부터 출현한다(연구를 포함하지만 규정되지는 않는). 그들은 교수에서 일시적이고 맥락의존적인 지식기반의 성격을 인정한다. 그들은 교실에서 교사들의 사려깊은 판단을 존중하고 교사들의 공간을 남겨둔다. 그리고 풍부한 교수줄거리의 소유와 적용을 고무함으로써 그들은 필연적으로 내포된 과거방법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감 없이 새로운 접근법을 점차적이고 선택적으로 채택하고 도입한다.

 또한 이러한 모든것에 더하여 우수한 교수의 복수모델은 교사들이 협조에 기초해서 상호보완적인 교수전문성을 인정함에 의해 교사들 사이에 더욱 깊은 협력관계를 발전시킨다. 초등학교 교사의 준비시간의 사용에 대한 연구에서  Wignall과 나는 교사들이 과목-과제의 분야에 대해서는 '협력적인 상호보완의 전문성'을 일반적으로 승인하고 있음을 알았다.(Hargreaves and Wignall)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말하기, 미술, 물리교육 또는 음악에서 충분히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학급운영 또는 교수방식에 대해서는 상호보완적인 전문성을 더욱 인색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교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범위에서 대안적 교육형식을 더욱 쉽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사들이 다른 교사들의 수업형식에서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교수방식의 가치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교사로서 다른 사람의 뛰어난 기술을 인정하며 다른 교사들의 가르침의 적합성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학급우수성의 복수모델은 단일한 모델을 능가하여 진행되었다. 선택할 수 있는 Menus는 Mandates보다 우월하다.   

 Menus가 Mandates를 능가하는 두 번째 영역은 교사협력과 협조의 관계에서이다. 교사들 사이에서 협력작업은 많은 상이한 형태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사들은 학교의 목표나 직무진술을 발전시키는 데서 협력할 수 있다.그들은 커리큘럼과 다른 종류의 계획에서 협력할 수 있다.교사들은 동료장학 또는 자문프로그램의 방식으로 구조화된 협력과 지원체계를 통해 협력 할 수 있다. 그들은 체계적인 탐구와 행동연구에서 협력할 수 있다.그리고 교사들은 교실활동에서 협동교수를 통해 협력할 수 있다.그러나 때로 행정조직은 협력이 하나의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행동하며 교사들이 그것을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지시에 의한 동료장학, 강제적인 협동교수, 강제적인 협력계획등은 이들이 단일한 협력우수성의 모델에 기반한 것만큼 경직되어 있으며 민감하지 못하다.그들은 협력적인 활동이 취하는 다양한 형태를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과 맥락에 적당하지 못한 협소한 기술을 실행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더 넓은 지원을 제공하는 넓은 범위의 협력적 원칙을 놓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교사전문성의 핵심인 교사들의 세심한 판단을 방해한다. 행정적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종류의 협력관계를 지시하는 것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을 몰수하는 처사이다.

  그러한 단일한 협력적 우수성이 채택되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이야기 한 '고안된 협력'이다.(Hargreaves) 이는 자발적이기 보다는 강압에 의한 형태이며 교사와 학교의 발전적 필요이기보다는 관료조직의 지시된 필요에 부응하며 그것의 결과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계획되어 있으며, 그리고 결과적으로 작동의 방식에서 여성적이기보다는 전형적으로 남성적 관점에서 조망된다. 그러나 협력적 교사문화는 매우 비형식적인 협력적 활동의 상호연관된 여러 가지 형태를 포함한다. 그것들은 교사들이 어울리기를 원하는 많은 종류의 협력적 연구에 대해 교사들에게 많이 배려한다. 그것들은 협력적 관계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신뢰와 인내를 매우 천천히 발달시킨다. 그리고 참여하는 교사들의 수준 차이로 하여 협력으로 인한 결과물에 대해서는 더더욱 예측할 수 없다. 이것은 관료적,위계적인 행정조직에서 협력적인 연구를 기존의 행정적 통제와 결합시키는 것이 특별히 어려움에 봉착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지시 앞에 선택을 놓는 것이 특별한 하나의 접근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일반적인 협력원칙을 인정하고 허용하며 경험하도록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행정적으로 협력적 원칙을 허용하는 것만큼이나 실제로 넓은 범위에서 교사들이 자신에게 가장 적당한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협력의 위임'이 중요한 만큼, 지나친 위임이나 강제성은 해악이 될 수 있다. 협력적 활동에 대한 위임을 늘리고 대부분의 교사들이 그것의 몇가지 측면을 시도하도록 하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100%비율로 (협력을)채택하도록 하는 것은 실제적이지도 않고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함께보다는 혼자서 잘 가르친다. 독자적 모형은 그 나름의 자리가 있다.(Hargreaves.1993) 개인적인 교사들은 전혀 나약한 교사가 아니다. 특히 우수반 개설자의 경우 매우 유능하다. 그들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며 주인공적이고 협력적으로 일하는 것을 어려워 하지만 그들의 교실에서는 기술적이다. 그러한 교사들의 특유한 우수성은 협력적 개념의 추구로 대응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협력에 대한 위임이 중요하지만 행정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입각하여 추구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협력 조치가 학생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교사들의 판단을 존중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선택이 지시보다 우월한 까닭'이다. 그러한 선택을 쟁취하려는 투쟁은 행정가들과 행정조직에 의한 관료적 통제의 유지와 재구조화에 대항하여 학교차원의 교사공동체에서 전문적이고 사려 깊은 조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궁극적 투쟁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냐 절차에 대한 신뢰냐 ?>

(Trust in People or Trust in Process ?)

관료적 통제와 개인의 권한 강화를 두고 벌어지는 다툼은 포스트모던(탈근대)으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협력관계들 및 각 협력관계의 여러 형태가 그러한 다툼에서 주된 것이다. 이제껏 주장해왔듯이, 그러한 (협력) 관계들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표출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또한 협력관계는 재구조화에 관련된 핵심적인 논의 주제의 하나이자, 재구조화가 가진 현실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가능성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럿이 공유하는 지도력과 협력적인 문화 풍토를 다룬 저서들을 관통하는 주제들은 뻔한 소리들이다. 그것들이 주장하는 바, 신뢰의 확립이야말로 효과적이면서도 의미가 있는 협력적인 직무관계(working relationship)를 강화하는 데 핵심이라고 한다. 리버만과 그의 동료들이 말하는 바, '신뢰와 래포는 ... 학교 안에 권한의 평등을 세우는 데에 긴요한 초석이다.' 예컨대, 로우든은 함께 일한 교사와 자기 사이에 협력 관계를 높이는 데에 신뢰가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우리가 발전시킨 신뢰는 성격상 매우 인간적이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친구가 되었으며, 그 연구과제는 우리 둘 다에게 사소한 일 이상이 되었다. 나는 조한나와 작업하는 게 즐거웠고, 학교 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내가 그녀 주변에 있는 걸 좋아했으며, 내 연구가 잘되길 바라마지 않았다.

 협력적인 직무관계 속에서 (위의 예가 보여주는) 그런 신뢰가 갖는 가치는 누구나 수긍한다. 그 덕에(!) 신뢰의 의미와 성격을 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꼼꼼하게 따지고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니아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예외에 속한다. 그들 말씀. '마치 신뢰가 모든 걸 해명해주기라도 하는 듯 신뢰를 논하는 것은...그것(신뢰)을 "검은 상자" 속에 집어넣고는 개인적 의미들로 꽉 찬 추상적 단어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신뢰는 <예측가능성과 공동 목표>라는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신뢰가 존재하려면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제법 잘 예측한다는 사실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며, 같은 목적을 실질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이들의 주장을 재해석하려면 신뢰란 인격적이고 (서로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상호관계에서의 (정보처리)과정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신뢰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가능케 해준 사회심리학의 유산은 '작은 집단에서의 협력'이라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 상호관계의 역동을 이해하는데는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는 신뢰의 모든 형태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제한된 이해에 불과하다. 이런 이해는 특정한 환경에서 나타나는 신뢰에만 해당된다. 즉, 인간상호관계가 시간이 흘러도 비교적 안정적이고 지속이 되는 그런 환경에서의 신뢰에 해당될 뿐이다. 하지만 기든스가 꿰뚫어 본 대로, 신뢰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들이 있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상호관계의 안정성과 지속성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 맥락에서 발견된다. 기든스 자신이 내린 신뢰에 대한 핵심적 정의 안에서 이런 대조되는 (신뢰의) 형태가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신뢰는 인간 혹은 체계의 타당성에 대한 믿음(자신감)으로 정의될 수 있을 듯하다. 타당성에 대한 믿음(자신감)은 주어진 성과들 및 일어나는 일들을 고려하는 데서 생겨난다. 거기에서 믿음(자신감)은 타자의 성실과 애정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 혹은 추상적인 원칙들이 갖는 정확성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신뢰는 인간에, 혹은 절차에 부여될 수 있다. - 개인들의 품성과 처신에, 혹은 추상적 체계의 전문기술과 작업에 부여될 수 있다. 신뢰는 의미있는 인간 관계의 결과물에 부여될 수도 있고, 혹은 그런 관계들이 존재하는 조건에 부여될 수도 있다.

작고 단순한 사회가 거대화되고 근대화된 사회로 바뀜에 따라 인간 생활 속에서 우위를 점했던 신뢰형태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지배적 신뢰 형태의 변화는 위기와 신뢰, 이 둘 사이의 관계 변화에서 특히 분명하게 관찰되어 왔다. 신뢰와 위기 사이에는 호혜적 관계가 있다. 단순한 사회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위기(risk)는 사나운 야생동물의 위협, 약탈자들, 기근, 홍수 등 항상적인 위험(danger)과 관계가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공동체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는 사람들이 이같은 끊임없는 위험들에 대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단순한 사회에 존재하는 위기(risk)는 최소화할 수 있거나 비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근대의 거대조직 및 사회에서의 위기와 신뢰는 이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근대의 거대조직 및 사회에서는 종종, 모두 알고 지내기엔 구성원들이 너무 많다. 지도자를 포함하여 조직구성원(직원)은 빈번히 바뀔 소지가 있었다. 개인에 대한 신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핵심 인물이 떠나거나 지도자의 이동이 있을 때, 인간에 대한 신뢰에만 매달렸다가는 커다란 불안정이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산업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런 류의 문제들은 관료적 형태의 조직에 대한 그럴 듯한 논거가 등장한 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변화와 복잡성이 진전되자, 전통적 형태의 권위는 쇠퇴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선두에서 이끄는 혁신적인 학교들조차도 그런 지도자가 떠나게 되면 집단운영체제로 뒤바뀌곤 했다. 이에 따라, 근대의 대규모 사회 및 조직들은 다른 종류의 신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절차 혹은 추상적 체계에 대한 신뢰!!

비극적이고도 아이러니컬하게, 베버가 그토록 분명하게 드러낸 대로, 그리고 그가 그렇게 분명히 드러냈는데도 근대 관료제로의 속박은 체계에 대한 신뢰가 갖춰야 마땅한 것들을 간단하게 왜곡해버렸다. 예측가능성은 경직성으로 탈바꿈했다. 관계와 반응성은 규칙과 규제로 인해 억제되어 갔다. 일단 경직성 등의 요소들이 자라나서 정착되자, 근대적 관료 조직은 지역의 환경과 변화하는 요구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는 너무 경직되고 이기적이 되어버렸다. 절차의 관성은 사람들의 관심사항들을 차단해 버렸다. 따라서 비인격적 권위와 기술적인 전문성에 대한 신뢰는 시들해졌다. 추상적 원칙에 대한 확신은 무너졌다.

예컨대, 근대 중등학교들은 방대한 관료조직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거대 관료조직인 학교는 공동체의 의미를 세울 수 없으며, 학생에 대한 애정과 성실을 보장하지도 못하며, 또한 학생을 변화하는 사회세계에 제대로 적응케 해주지도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즉, 중등학교는 근대의 병폐를 총체적으로 안고 있다. 교육에서의 변화와 개혁의 일반적 양상들 역시 비판받아왔는데, 이는 '상의 하달식의 표준화된 관료적 적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덧붙이자면, 개별교사의 특성과 관심, 그리고 교사의 일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체계전체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변화와 개혁) 양태들은 끊임없이 비판받아왔다.

근대로부터 탈근대로의 이행이 나타내는 특징의 하나는, 전통적 형태를 띠는 <사람에 대한 신뢰>는 재구성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절차에 대한 신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탈근대사회에서는 공동 활동의 형태와 활동 간의 접목방식이 달라진다. 즉, 대규모의 집약적 공장은 소규모의 분산된 사업 중심지들이 고속의 통신 및 정보처리 수단으로 연결되는 형태로 바뀐다. 이러한 발달로 인해 신뢰의 재구성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흐름이 일어난다.

먼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재구성되는 경향이 생긴다. 지역 환경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교육활동이 지역 내에서 의미를 갖게끔 지역적인 사업 단위를 만드는 데 대해 교육계에서 찬성하는 소리가 높아진다. 협동적인 생산 작업관계, 친밀감, 온기, 보상체계에서 인간적 신뢰를 재구성할 것이 강조된다. 이런 목적들이 고려되자, 수많은 교육구들이 학교기반 운영(school-based management) 방안에 착수해 왔다. 탈인격화된 대규모 중등학교들은 교사·학생에게 보다 큰 의미를 가지는 자율적 의사결정체 형태의 소규모학교 혹은 부설학교의 실현가능성을 학교 내부에서 탐색 중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재창조하는 작업에는 상반된 효과가 따른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성실성과 헌신, 그리고 효율성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즉 신뢰에 기반하여 함께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역량이 쌓이며, 그런 역량 속에 성실, 헌신, 효율성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에는 온정주의(가부장주의)와 타율성 등 전통적인 권위와 조직 형태가 갖는 특징을 다시 끌어오게 될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사실, '협력적인 학교문화'는 아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 있는 소규모 집단에서 번영한다고 여러 저자들이 지적해 왔다. Acker가 제시하듯이, 이로 인해 내부의 집단적 믿음은 '집단적 자기만족'으로 옮아갈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외부 전문가와의 연결과 그로부터 배우려는 의지와 역량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외부 전문가는 직접적이고 신뢰가 바탕이 된 인간관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의존은 외부와의 연계책임을 기관장(교장)의 몫으로 남겨둔다.

오로지 인간적 신뢰에만 매달려 만들어낸 협력 형태는 가부장주의(온정주의)와 파벌주의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탈근대적 조직은 문제와 도전거리가 끊이지 않으면서도 변화무쌍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런 환경에 놓인 조직이 연속성 있는 기반을 가지려면 <인간적 신뢰>에다 <전문가와 절차에 대한 신뢰>를 덧붙여야 한다. 이런 연속성이 유지되는 기반 위에서 조직은 발전하며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여기에서 신뢰를 부여해야 하는 절차(과정)는 조직의 집단적 전문성을 극대화하고, 문제해결력을 키우는 그런 절차(과정)를 말한다. 이런 절차(과정)에는 의사전달체계의 개선, 함께 하는 의사결정, 동료 학습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 외부 환경과의 연결망 구축, 지속적인 탐구열 등등이 포함된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전문가 및 절차(과정)에 대한 신뢰가 그것을 대신한다. 절차에 대한 신뢰는 개방적이며 위험부담을 안는다. 그러나, 배우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핵심일 터이다.

이는 탈근대적 학교 시스템에서 위기는 회피의 대상이기보다는 오히려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배움, 적응력, 향상은 위기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촉진된다. 그것이 가정하는 신뢰는, 아마도 일찍이 협력적 문화풍토를 만드는 것이라고 기술된 바 있던, 밀접한 인간상호간의 이해를 넘어서 확장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해와 문화는 무척 중요하다. 특히 작은 학교와 팀에서! 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더 빨리 바뀌는 학교에는 <절차에 대한 신뢰>를 가진 교사가 필요하다. 즉 잘 알게 되기 전일지라도, 잠정적으로 동료들을 신뢰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필요하다. 인위적인 협력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옹호하려는 건, 인간 상호관계를 깊게 알지 않더라도 뻗어나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신뢰이다.

신뢰 쌓기는 교육의 재구조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뢰에 대한 도전>은 가부장주의(온정주의)나 분파주의의 위험을 피하면서 동료간의 협력적 직무관계 -인간적 의미를 고양시킬 수 있는-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교사들일지라도 서로간의 신뢰를 상호보완적 전문성 안에 부여함으로써 신뢰와 연대가 형성되도록 하는 일이다. 이런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관료제로 나아갈 소지가 있다. 신뢰에의 도전은 재구조화를 구성하는 부분이며, 궁극적으로 이런 도전은 <권한부여를 정말로 강화>하느냐 아니면 <행정적 통제를 다시 구축>하느냐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구조냐 문화냐 ?>

교육의 재구조화와 재구조화의 조직 방식에 들어있는 네 번째 긴장은 '변화를 위한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구조가 적절한가> 아니면 <문화가 적절한가>에 있다. Werner는 이를 집중 조명한다. 그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지역에서 최근 나타나는 재구조화 노력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Werner는 1989년, '문제해결력 및 창의적 사고를 계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지역 교육과정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라는 지역장의 요청'을 언급한다. 여기에서 재구조화를 목적으로 제안된 내용 중에는 학년 구분이 없는 통합 초등공통교육과정 및 평가와 과정에 대한 책무성 강조도 포함된다.

Werner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 제안된 재구조화를 '전통적 교육과정의 손질'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이는 교육과정 개혁이 변화에 대해 갖는 위력에 대한 믿음, 즉 효과적인 변화(특히, 현직교육과 장학이 뒷받침되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는)를 보장하는 힘을 교육과정개혁이 갖고 있다는 보편화된 믿음을 반영하는 재구조화의 예라는 이유에서다. Werner는 이러한 구조 편향적인 변화전략에 반대하여, 브리티시 콜럼비아 지역의 교장·교감 협의회, 대안전략을 제시한다. 즉 '교사발달을 촉진하고, 학교문화를 강화하며, 학교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바람직한 관습들 위에다 건설하기 위한 전략.' 결국, Werner는 거기에 없는 것을 가지고 개혁하기보다는 이미 거기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부터 개선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데 지지를 표한다. 그는 중앙집중식으로 교육과정 개발과 시행을 통제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집단.'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교사들은 학교 구조 안에 속해 있으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도) 높고, 그것을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 탐구하고 논의할 뿐아니라, 그 방식을 학교구조 속에서 실제로 실천하는 건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Werner는 <교사 권한의 확대>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브리티시 콜럼비아 정부는 <여전히 학생평가와 프로그램 평가로서 교육과정 통제를 유지했다.>는 데에 관심을 표명한다. 결국 이는 교육과정을 둘러싼 힘의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Werner가 교육변화에 대한 해법의 두 가지 대립항으로 설정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대중에게 영합하는 <구조적 해법>과 그와 달리 시류에는 민감하지 않지만 보다 지속적이고 효과를 발휘하는 <문화적 해법>이다. 인상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조이다. 초기에 브리티시 콜럼비아 지역에 제안된 것과 비슷한 구조적 변화는 여지껏의 관습들을 심층에서부터 이뤄온 직무관계, 전통, 假定들을 얕잡아 본다. 그 결과, 그들은 구조적 변화의 위력을 과대 평가하였다. 심지어 현직교사 연수를 지원하면서도 그랬다. '구조는 강력하고 결정적'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구조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결정요소로 작용하며, 이때 행위는 구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좌지우지하기 쉬운 것으로 비친다. 그러므로, 여기(구조중심주의)에서 변화에 주된 요소는 교육의 목적을 지원할 수 있는 상태로 구조를 [먼저]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구조에 적합한 형태로 행위하면 된다.

이에 반해,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뿌리깊은 믿음(신념), 교사들과 학생들간의 일의 관계가 현재의 행위를 결정하며, 그런 것들[신념과 관계]이 학교의 문화와 체계의 관습을 구성한다. 심층적 문화가 [행위를] 규정하는 모형[문화결정론] 속에서는 구조 개혁을 미미하고 일시적이며 비효과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기존의 문화가 가진 힘과 대적하기에 [구조개혁이 가진 힘은] 미미하기만 하다. 문화적 관점에서는, 변화가 가능하려면 교사들이 파악한 학생들의 관심사 안에서 공동체로서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문화 그 자체를 지원하고 문화 그 자체에 작용을 가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문화적 관점에서, Werner가 '정책 지원 전략들'이라고 일컬어온 것들에 의해 변화가 촉진될 수 있다. - 교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고, 협력 방안 속에서 교사들에게 조력하고, 교사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게끔 촉진하며, 목표설정에 교사들을 참여시키고, 협력적인 문화를 일궈내는 등의 지원 전략들.

교실에서의 실천행위를 개선하는 데는, 심층문화를 바꾸는 것이 구조를 급속하게 고치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지적이 점점 많아지고는 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한계도 있다. 즉, Werner가 제안한 문화[중심]적 모델은 효과성과 적용가능성 면에서 한계가 있다. 교사발달과 학교문화를 다루는 다른 책들에서처럼, Werner의 저서 역시 교사의 신념과 시각을 존중하는 입장과 그것들을 낭만화하는 입장 사이를 오가고 있다. 협력에 기반한 전문성 발달과 그 개선을 위한 탐색에서는 모든 교사들을 본래 관용적이고 이타주의적인 존재라고 가정하지 못한다. 물론 교사들이 가진 신념과 그들의 실천행위는 전문성과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하기도 하지만, 구조와 일상 속에 기반을 둔다. 즉 그들이 뿌리박고 살아온 구조는 이기심이 개입될 여지가 상당히 많은 구조이자 틀에 박힌 일상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와 일상들이 교사들의 신념과 실천행위의 기반이 된다. 여지껏 보아온 대로, 그런 구조들은, 지금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는 매우 다른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진화를 거듭해 오기도 했다. 집단적 개선을 위한 효과적인 교사발달은 따라서 도덕적 미덕을 완화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또한 기정사실로 인정되는 관심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예컨대, 교사의 직무 문화 속에 더욱 단단한 협력형태를 만들려면 교사들을 고립시키고 자기 이해의 영역에 얽매이게 하는 <분과주의적 교과전문가를 공격>해야 한다.

그러므로 몇 가지 경우, 특히 규모가 큰 중등학교에서는, 실질적인 의의가 있는 동료간의 직무관계와 협력적 지원의 기회를 증대시키려면 학교구조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구조상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적인 학교문화는 세워지지 않는다. 재구조화에 있어서 구조적 선택은 "어떻게 하면 안정된 조건에서 교사들이 더불어 일할 기회를 마련하느냐"는 측면보다 "교육과정, 평가, 능력 배치"등을 재구조화는 데는 덜 중요할 지도 모른다. 따라서, Sarason이 제기한 바 있는 변화된 힘의 관계의 궤도를 따라 재구조화라는 과업에 도전하는 것은 구조와 문화 중에 하나를 개혁의 타겟으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또는 관료제의 중앙부에서 이미 정한 구조적 목적과 의도에 교사들이 기꺼이 따르도록 학교 문화를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100여 년 전 모델에서 벗어나 학교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일에 재구조화는 도전장을 내야 한다. 즉, 재구조화란 교사들이, 좀더 효과적으로 위기에 대응하여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협력적인 문화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일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학교 구조를 다시 만들어내는 데 도전하는 일이어야 한다. 어찌됐건 이는 생산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핵심적인 전제조건으로서 지시될 필요가 있는 사항이다!

<결론>

재구조화는, 여지껏 주장해온 대로, 하나의 합의된 정의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재구조화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목적과 맥락 속에서 찾아야 한다. 교육과정 변화 및 평가 요구들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한, 재구조화는 '개혁'을 위해 세운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집중으로 인해 관료적 통제는 강화될 수 있다. 강력하고, 단일한 미래상(像), 그리고 억지로 부과되는 경직된 지시들, 이런 게 바로 관료적 통제를 구성하는 재료들이다. 동시에, 재구조화는 불확실하고 찰나적인 탈근대 세계로 우리를 몰아넣을 수도 있다.- 공통의 미래상이나 목적 없이, 뚜렷한 차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운 중구난방의 목소리들이 불협화를 이루게 되는 그런 세계로 : 문화풍토에 의해 의사결정 권한이 좌지우지되는 학교세계를 만드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는 요소는 바로 물려받은 전통과 利害이다. 즉 학교세계는 윤리에 따르는 집단적 선택보다는 구래의 관습과 뿌리 깊은 利害의 관성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만들어진다.

교육 혹은 그 밖의 영역의 재구조화를 위한 도전은 관료적 통제와 경직된 지시, 온정주의적(가부장적) 형태의 신뢰를 폐기하는 일이다. 교사들과 교육 관계자들의 상이한 목소리들을 빠짐없이 경청하고, 그것들을 서로 접목할 수 있도록 신속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협력의 절차에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사람에 대한 신뢰'는 물론, 위기와 끊임없는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학교문화를 탄탄히 받쳐주고 힘을 거기에 불어넣는 일이다. 지속적인 토대 위에서 변화 그 자체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변화에 관련된 것들을 뒷받침하고 힘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러나 느슨해진 행정적 통제 속에서, 탈근대적인 재구조화를 위한 도전은 공동의 목적에 대한 감수성과 목표에 대한 헌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전문성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관료적 통제를 팔아치울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혼돈을 얻기 위해 공동체까지 팔아넘겨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복잡한 딜레마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늘어놓은 장광설이 아니라, 그런 복잡한 딜레마들에 접근하는 방법을 대략적이나마 설명하려는 시도일 따름이다. 해결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데에 이 글의 목적을 두었다. 재구조화는 문제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전문직주의와 교사에게 힘 실어주기(교사의 권한 확대)라는 목적과 의도를 성실하고 진지하게 추구하려면, <재구조화의 '개념과 실제' 자체부터 재구조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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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chool-based management. 현재 우리나라에선 '단위학교책임경영'이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재정 등 학교운영에 관련된 제반 권한을 학교에 부여하되 학교의 책임자에게 그 권한이 집중되는 형태로 도입, 사용되고 있다. 또한 학교는 운영의 자율성을 가지는 동시에 국가로부터 평가를 받을 의무가 여기에 보태진다.
*이후 용어의 사용맥락에 따라 '학교기반 운영'과 혼용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