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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준비 1호 평화교육, 비평화적 시대의 교육적 대안

2001.10.11 13:59

박보영 조회 수:1926 추천:2

평화교육, 비평화적 시대의 교육적 대안1)

평화교육, 비평화적 시대의 교육적 대안1)

박 보 영(교육문화분과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교육학 석사과정)

1. 우리 사회의 비평화적 구조

오늘날 우리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이 사회는 우리들을 세기말적인 불안감에 젖어들게 할 정도로 총체적인 비평화 상태에 놓여있다. 전지구적인 생태위기와 거대한 규모의 자연재해, 핵으로 인한 위협, 인구증가와 더불어 가속화되고 있는 자원의 고갈, 그 와중에서도 기본적인 생존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제3세계의 기아현상,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인권 침해 등으로 지구 전체가 비평화적 질서에 얽매여 있다.

지구 전체로까지 생각을 넓히지 않더라도, 우리의 구체적 존재를 규정하는 한국사회에는 거대한 비평화의 요인인 분단과 합리성의 부재, 비민주적인 사회체제, 식민적 성장으로 인한 제반의 문제들, 전통적 의미의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대안의 부재, 성차별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하루하루의 삶을 힘겹고 불행하게 견뎌나가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이 당면한 경제위기는 이와 같은 비평화적 요인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폭력과 비인간적 처우,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적 억압강도의 강화를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악용되는 측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염려스러운 것은 우리의 교육 내에서 벌어지는 비평화적 모습들이다. 학교는 변화하는 세계와는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곳, 학생들의 욕구를 발현시키고 장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하는 감옥과 같은 곳이 되었고, 한 번의 입시로 승부를 결정하는 선발 제도와 그로 인한 중압감, 그에 따라 학생·교사·학부모 모두가 끝이 없는 경쟁의 질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비인간적 구조 등으로 인하여 학교 안과 학교 주변에 폭력이 만연하며, 많은 학생들이 이제는 "학교를 거부2)"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해마다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자살을 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미래 세대에는 현재의 비평화적 상황들이 여러 면에서 극복되고 변화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보이기보다는 여전히 그리고 더욱더 비전이 없으리라는 암담함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결합되어 총체적 비평화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총체적 비평화의 구조가 우리의 언어, 의식과 사고,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생존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며, 좁게는 우리 사회에서의 미래 세대가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건전한 비전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은 "하늘에서 미끄럼틀 타고 오는/그네로 산하를 오르내리는 어린 내일3)"이 아니라 20층 아파트 옥상에서 거의 매일 땅바닥으로 내리꽂히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체념이 우리 자신을 둘러싼 일반적인 자세가 되어 버리기 전에, 우리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과 자신의 행복을 조율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삶의 태도가 생태적이고 우주적인 차원까지 확장될 수 있는 그런 삶은 불가능한가?"

이러한 문제제기를 집요하게 해 나갈 때, '평화'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의 언어로 남는다. 평화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화두이며, 앞서 제기된 비평화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운동들을 포함하여, 결국 정의롭고 자유로운 생존조건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평화교육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 위기에 대하여 이제 교육도 인류가 생존을 지속시키며, 현재 우리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권리까지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신념의 구체적인 표현이다.4)

2. 평화개념의 이해

평화교육에 대한 논의를 펼치기 위해, 우선적으로 평화라는 개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평화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인류 보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 개념과 이해방식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평화개념의 이해를 위한 틀은 요구된다. 노르웨이의 평화연구가 갈퉁(Galtung, J)은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평화의 이해방식을 구분하였다. 갈퉁이 제시한 바와 같은 평화의 이해방식은 대체로 타당한 틀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소극적 평화는 직접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직접적 폭력은 전쟁, 신체에 대한 폭행, 테러리즘과 같이 공공연하고 구체적인 폭력으로서, 직접적 폭력에 의하여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손상을 당하며 이것은 쉽게 식별된다.

반면에 적극적 평화는 직접적 폭력뿐만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구조적 폭력은 직접적 폭력만큼 확실하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난, 기근, 인종차별과 같이 한 사회의 구조적 요인에 의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전체적인 실현 가능성을 차단당하거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폭력의 특징을 갈퉁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 구조적 폭력은 폭력을 범하는 행위자나 폭력이 미치는 대상을 일정하게 전제하고 있지 않다. 둘째, 구조적 폭력은 본질적으로 정태적이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구조적 폭력은 그 발생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사회계층 구조 자체를 중요시한다. 넷째, 구조적 폭력은 불평등하고 억압된 구조들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간접적이면서 항구적인 성격을 지니며, 또 다른 구조적 폭력을 배태시킨다. 다섯째, 구조적 폭력은 구조를 변경시킴으로써 폭력의 근원을 제거 내지는 축소시켜 나갈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구조적 폭력을 단계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적극적 평화는 형성되는 것이며, 이는 곧 사회정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구조적 폭력으로 인한 억압의 정도는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계층, 성별, 나이, 인종, 성적 취향 등에 따라 다양하게 경험된다. 따라서 문화마다 평화에 대한 개념과 차이와 논란의 여지는 존재하지만, 평화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평화교육의 개념과 정의, 그리고 그 과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

3. 평화교육의 역사

평화교육이 처음 태동된 서구에서 평화교육은 2차대전 이후에 크게 전통적 평화교육과 비판적 평화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 평화교육으로 칭해지는 평화교육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루어졌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네스코(UNESCO)의 '국제이해교육'이 그 기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인류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공유하였다. 유엔(UN)의 결성은 이러한 인류의 소망에 대한 표현이었다. 그 당시에 평화란 국가간에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평화교육이라는 것 또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자 하는 교육으로 이해되었고, 민족들간에 상호 이해 증진을 도모하는 모든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유네스코가 실시한 국제이해교육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원인을 인종적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학생들에게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여 왔고, 여타 사회와 어떻게 서로 관련이 되어 있는가를 '알려줌'으로써, 또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관습적, 외형적, 경제발전 정도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비슷한 욕구와 자유에 대한 열망, 가족에 대한 사랑 등 전형적인 인간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세계를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적 평화교육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평화교육이 평화와 비평화에 대해 '알려주는 것'에 그쳤기 때문에 그 지식이 평화를 위한 행동능력으로 연결되도록 하지는 못하였다는 점이다. 무엇에 대해 '알려주는 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전통적 평화교육은 평화를 인간의 도덕적, 정신적 이해와 태도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전통적 평화교육에서 평화교육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 세계 안으로 개인주의적이고 도덕교육적으로 후퇴하였으며,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와 국가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 전통적 평화교육은 갈등의 원인과 구조를 충분히 밝히는 대신에, 개인을 기존의 생활에 마찰 없이 적응하도록 교육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물리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를 평화의 상태로 상정하고 출발한 전통적 평화교육은 서구의 새로운 사회운동의 기류와 비판이론의 영향 속에서 1970년대를 거치면서 비판적 평화교육으로 확대되어 성장하게 된다. 1970년대 초에 제기된 비판적 평화교육은 전통적 평화교육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폭넓은 접근을 시도하였다. 비판적 평화교육은 전통적 평화교육과 달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폭력뿐만 아니라 인간과 모든 생명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비판적 평화교육이 추구한 기본목적은 '문제의식' 혹은 '비판적 안목'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판적 평화교육은 편견, 공격성, 갈등극복의 문제와 같은 전통적 평화교육의 문제들을 다루되, 그러한 문제들을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사회비판의 논리를 통하여 비평화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계몽을 통한 비판 의식의 고양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능력을 기르는 것이 비판적 평화교육의 목표였다. 따라서 비판적 평화교육은 사회비판적 의식의 형성, 새로운 행동을 위한 상상력의 개발, 적절한 참여 능력의 신장을 교육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구조적 폭력(strukturelle Gewalt)과 조직적 비평화(organisierte Friedlosigkeit)에 대하여 문제제기하고, 그 극복을 위한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비판적 평화교육은 포괄적으로 비평화의 기존 체계에 대하여 분석적 인식을 도모하며, 그 구조적 조건들을 밝혀 내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따라서 비판적 평화교육은 평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계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활동을 통하여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평화실현의 노력이 아니라, 행동의 연대를 강조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폭력과 비평화에 대항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비판적 평화교육은 이러한 평화교육을 통하여 사회적 불의, 정치적 폭력, 타율에 의한 부자유와 같은 모든 비평화적 형식들과 대결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문제제기들을 체계화하고, 사회 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조건들을 만들어가며, 편견과 증오와 폭력을 제거하고, 대화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판적 평화교육은 평화능력의 교육이며 평화의식의 교육일 뿐만 아니라 평화행위의 교육이다.

4. 평화교육의 정의

평화와 평화교육은 만인의 관심사이지만, 이에 대한 이해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입장에 따라 상이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평화의 개념이나 평화교육의 목표와 내용과 과제에 대해 합의와 공유점을 찾는 것이 어렵다. 그 동안 평화교육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는데, 오인탁은 평화교육을 "평화능력을 키우는 교육5)"이며, 평화는 "행해지는 것으로서, 구체적이며 철저한 능력의 한 형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김정환은 평화교육을 "인류의 영원한 이상인 평화를 실현하려는 교육이며(목적), 평화를 파괴하는 공격성, 폭력성, 갈등성, 편견성 등을 극복하게 돕는 개인, 사회, 자연, 우주적 차원에 걸치는 교육과정을(내용), 정서순화, 역사의식 배양, 사회개혁에의 참여의식 고양, 고난에의 동참 등을 통해서(방법), 모든 시민과 교사가 모든 교과, 모든 교육의 마당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개하는 일련의 통합적 교육으로서(체제), 인류가 풀어가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교육의 과제(당위성)6)"라고 보고 있다.

연구자는 평화를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의 네 차원 - 개인적·주관적 차원, 대면접촉의 차원, 사회적·정치적 차원, 생태적·우주적 차원 - 에서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정의하고자 하며, 또한 평화교육은 이와 같은 '삶의 중층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정의하고자 한다. 결국 평화교육은 평화와 관련된 적절한 교육의 내용을 평화적인 방법과 교육적 분위기를 통하여 평화능력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하여 교육을 실천하는 것이다.

5. 한국 평화교육의 현단계

한국에서 평화교육이 하나의 교육학적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한국에서 1980년대부터 평화교육의 논의가 가능했던 것은 한국교육과 한국의 사회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싹트고 있었던 1980년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0년대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의 흐름은 영역을 불문하고 모든 학문연구에 영향을 주었고, 교육학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에는 교사운동과 교육운동이 성숙하였으며, 민중교육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동시에 서구의 비판적 교육학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한국에 도입된 서구의 비판적 교육학에는 평화교육과 환경교육 또한 포함되었다.

1980년대의 평화교육은 이론의 도입과 소개기로서, 평화교육에 대한 활발한 논의보다는 평화와 평화교육의 개념 논의, 서구 평화교육 이론의 도입, 서구 평화교육의 발달사에 대한 개관 등으로 연구의 내용들이 특징지워진다. 1980년대의 평화교육이 도입과 소개는 비평화와 갈등의 본질적인 측면에 천착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외연적인 갈등이 해소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갈등과 비평화의 문제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되 교육적 관점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교육과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1980년대의 평화교육 연구는 한국교육에 긍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의 평화교육 논의는 평화교육을 아직 한국적인 것으로 소화해내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갖는다. 대부분의 연구가 독일의 평화교육을 중심으로 한 소개에 그치거나 그 당시까지 유럽에서 이루어진 평화교육의 발전단계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종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양한 평화개념과 평화교육의 개념에 대해 연구하거나, 평화교육의 이념을 한국교육의 현실에 적용하는 구체적 논의를 발전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 후 1990년대에는 1980년대 '해방의 정치'의 동력들이 보다 성숙되고 세분화되어 '삶의 정치'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그 동안 '민주화'와 '통일', '노동해방' 등으로 집약되었던 1980년대의 이슈는 '삶의 질'의 문제로, '평화'의 문제로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 논의의 색깔을 변화시켜 갔다. 이러한 변화의 분위기는 교육과 교육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한국의 비판적 교육학이 민족적, 민중적, 역사적 총체성의 거대담론 속에서 교육을 논의하였다면, 1990년대의 논의는 좀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현실에 천착하는 교육학으로서의 자리매김을 시도하고 있다.

1990년대에 평화교육 논의는 평화교육을 좀더 한국적인 것으로 소화하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의 평화교육, 환경교육, 생명교육, 통일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경향으로 이어진다. 평화교육은 이와 같은 구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평화교육과 관련되는 교육실천들의 이론적, 철학적 바탕으로 자리잡아 가기 시작하였다.

6. 한국 평화교육의 의제 설정

한국 평화교육의 위와 같은 흐름 속에서 연구자는 현재 한국의 평화교육이 고민해야 할 의제들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봄으로써 과제를 해결해나갈 대화를 열고자 한다. 제기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교육의 한국적 주요 주제들에 대한 논의가 요구된다.

둘째, 교육의 평화, 즉 평화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교육은 명시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를 통한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더욱 강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평화교육은 평화롭고 또한 평화를 만들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머리-가슴-손'을 통하여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셋째, 평화를 만들어가는 능력인 '평화능력'(Peace Capacity)에 대한 조직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평화능력은 평화교육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평화교육에 관한 이제까지의 선행연구들에서 평화능력의 중요성은 충분히 강조되어 왔으나, 이러한 평화능력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삶의 다양한 관계의 차원에서 어떠한 모습을 띠는 것인지, 또는 어떠한 요소들로 구성되는지에 관한 조직적 연구가 부재하기 때문에, 평화능력은 다분히 선언적이고 애매하며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의 것으로 남아 있다.

위와 같은 의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연구자는 평화교육을 '평화에 관한 교육', '평화를 통한 교육', 그리고 '평화를 위한 교육'의 결합체로서 제시하려고 한다. 다음의 각 절에서는 분류된 각각의 교육이 가지는 성격과 내용, 그리고 그것들이 전체적인 평화교육의 틀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에 관한 논의를 펼칠 것이다.7)

1) 평화에 관한 교육 - 한국에서의 평화교육의 내용

'평화에 관한 교육'은 평화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교육을 의미한다. 평화교육은 전세계적으로 행해져야 하겠지만, 비평화의 상황은 언제나 시대적이고 사회문화적이며 정치경제적인 맥락 속에서 상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의 다양한 생존 조건들 속에서 한 개인과 집단 또는 한 국가가 처한 시급한 비평화의 문제는 특수한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한국적 상황에서의 평화에 관한 교육은 한국의 시간적·공간적 특수성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제 하에 본 연구자는 한국의 현재 시점에서 '평화에 대한 교육'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으로 평화, 통일, 인권, 환경, 지구화 등을 꼽았다. 다음에서는 이 각각의 주제에서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내용들을 간락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평화에 관한 교육에서는 평화문제와 관련된 여러 지식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핵심적인 내용으로는 평화에 관한 소극적·적극적 이해방식과 비평화적 상태의 가장 대표적이고 참혹한 예인 전쟁의 본질을 무기경쟁, 군사문화, 전쟁의 대가 등에 관한 학습을 통하여 다룰 수 있다. 또한 지구 전체를 '공포의 평화' 상태에 놓이게 하는 핵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둘째, 통일에 관한 교육에서는 통일의 필연성과 더불어 분단 이후의 역사가 야기한 총체적 비평화의 문제들, 현재의 북한에 대한 자료와 정보의 수집, 다른 나라의 통일의 선례들, 통일과 함께 감당해야 할 것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일능력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인권에 관한 교육에서는 인권의 개념과 성격을 학습하고,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인권의 눈으로 읽고 쓸 수 있는 문제제기의 과정을 거치며,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의 근거를 찾을 수 있도록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의 구체적인 내용을 학습하여야 하며, 인권과 관련된 사회문제를 논의하여야 한다.

넷째, 환경에 관한 교육에서는 유기적·생태적 세계관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재의 환경위기의 사례들을 통하여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체험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환경운동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사례들을 학습하고, 그 속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작고 가능한 실천들을 모색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학생들이 소비주의를 극복하고, 환경친화적인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다섯째, 지구화에 관한 교육에서는 지구화가 지닌 양면성, 즉 평화적 가능성과 비평화적 가능성을 문제제기하여 현재 비평화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지구화의 과정을 평화적 가능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대안에 대하여 학생들이 함께 비전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식과 안목의 지구화와 관용이 문제해결의 핵심적 기술로서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에서의 평화교육은 위와 같이 평화, 통일, 인권, 환경, 지구화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교육의 내용이 구성되어야 한다. 평화에 관한 교육에서 이와 같은 내용들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의 평화문제가 이와 같은 문제들을 중핵으로 할 때에 비로소 현실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2) 평화를 통한 교육 - 교육의 평화적 분위기

평화는 교육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가 평화이어야 한다. 따라서 평화교육은 평화에 관련된 내용을 직접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분위기, 학교환경, 학교 내에서의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주요한 삶의 공간이면서도 사회적 현실이 반영된 하나의 소우주이다. 실제로 학생들에게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갈등이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장소가 바로 학교이다. 그러한 학교에서 평화로운 가치와 방법이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폭력과 강요, 권위주의와 비합리성이 통용되고 있는가는 어떠한 직접적인 교육보다도 학생들에게 강력한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절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평화를 통한 교육'은 전체적으로 교육의 평화적 분위기에 대한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교육의 평화적 분위기를 위해서 학교는 어떠한 곳이어야 하는가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교육을 통하여 어떠한 체험을 하여야 하는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평화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급의 규모가 작아야 한다. 현재와 같이 학급당 학생수가 많은 상황에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진정한 교육적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학생들의 의견의 획득, 경험의 확장, 신념의 형성이 가능하도록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둘째,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비인간적 상황에서는 평화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공허할 뿐이다. 특히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에 명기된 청소년의 기본권들이 보장되어야 하고,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나 가혹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셋째, 교사는 동반자·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교사는 학생과의 상호교호적 관계에서 절대적인 권위자의 위치를 벗어나 학생과 함께 평등하게 대화하며, 스스로 가르치며 동시에 배우는 입장에 서야 한다. 그리고 학생과 교사는 서로의 역할을 떠나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넷째, 주입식 교육방법을 극복할 자유롭고 유연한 교육 형태를 개발하여야 한다. 평화교육에서 교육방식은 특정가치관에 의한 교화를 벗어나야 하며, 주입식 교육방법을 극복하여 학생들이 옳은 대답을 아는 것보다는 해야 할 옳은 질문들을 알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교육적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평화로와야 한다. 경직된 물리적 시·공간의 구성은 그 자체가 비평화이며 폭력이다. 교육 실천 속에서의 교사와 학생들은 여유를 가지고 개인의 삶의 속도에 맞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충족감과 평화, 행복감을 느낄 권리가 있다. 또한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교실을 포함한 학교의 공간을 평화적이고 자율적으로 가꾸고 관리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교육의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체험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학생들은 성취감을 체험해야 한다. 학생들은 자아신뢰에 기초한 성취감을 통하여 자기긍정과 타인긍정의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학생들이 성취감을 통하여 경험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는 것은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반이 된다.

둘째, 경험적이고 참여적인 학습활동을 체험해야 한다. 경험적이고 참여적인 학습활동을 통하여 학습의 자유가 보장될 때, 학생들은 스스로의 학습과 성장·발달,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배울 수 있다.

 셋째,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경험하여야 한다. 학생들은 수업과 학교생활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학교운영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에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경험해야 한다.

넷째, 평화로운 갈등해결을 경험하여야 한다. 성별, 빈부차, 문화적 차이, 재능의 차이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학교 생활에서 학생들이 서로가 삶의 주체인 자신을 존중하고, 또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과, 서로 '다름'을 나누고 존중하면서 서로가 상생하는 삶의 과정을 학교 안에서 어떻게 마련하고 진행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 가능성과 실천의 원칙을 세워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다섯째, 학생들 스스로의 자치활동을 경험하여야 한다. 학생들의 자치활동에는 학급활동과 학생회 활동, 동아리 활동 등이 있을 수 있는데, 학교는 학생들의 이러한 자치활동들을 본질적인 의미에서 활성화시키고, 긍정적으로 지도하여야 한다.

여섯째, 실존적인 '만남'을 경험하여야 한다. 학생들은 교육의 과정 속에서 교사와 동료들과의 깊이 있는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온 삶을 전환시키는 실존적 '만남'을 경험하여야 한다.

일곱째, 전체적인 배려와 존중의 분위기를 경험하여야 한다. 평화교육은 교실에서의 수업뿐만 아니라 복도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쏟고 또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평화는 교사와 학생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들의 전체적인 기본입장으로서 학교생활을 특징짓는 것이 된다.

여덟째, 학생들 자신이 이미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경험하여야 한다. 평화교육에서는 학교에서의 일과가 협동적으로 구성되어, 자발적이며 공동체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전체적인 경험을 통하여 학생들은 '변화가능성'을 체험하여야 한다. 현실이 불합리하거나 모순적일지라도 체념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천과 노력을 통하여 생산적인 대안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경험하여야 한다.

평화교육은 앞서 논의된 바와 같은 전제조건 속에서 전체적인 체험으로서 학생들에게 경험되어야 한다. 평화교육은 평화에 대한 지식이나 특정한 주제 등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교육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성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평화교육의 중요한 과제들은 특정한 주제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과에 그리고 교육의 분위기 전체에 관련된다. 즉, 평화교육에 이르는 길은 따로 없고, 평화로운 교육 자체가 그 길이다.

3) 평화를 위한 교육 - 평화능력(Peace Capacity)의 형성

'평화를 위한 교육'은 학생들이 평화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다. 따라서 평화를 위한 교육은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인 '평화능력'(Peace Capacity)의 형성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삶의 중층적이고 다양한 양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평화적으로 구성해 나가야 하며, 개인적 일상생활에서부터 우주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모든 평화적 노력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이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놓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평화할 수 있는 능력'은 단지 소박하고 애매한 또는 '타고난' 개인적 인품의 문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전지구적인 비평화가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평화'가 유일한 희망의 언어로 남아 있는 시점에서 평화능력은 단지 개인적인 '인품'의 문제가 아니라, 위기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사회적 능력'으로서, 교육을 통하여 학습과 내면화가 가능한 '후천적이고 사회적인' 성질의 것으로서 정의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그것을 구성하는 관계의 양상들이 다층적이기 때문에 각각의 관계 속에서 개인이 취해야 할 태도와 지녀야 할 평화능력들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연구자는 한 개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을 (1) 개인적·주관적 차원, (2) 대면접촉의 차원, (3) 정치적·사회적 차원, (4) 우주적·생태적 차원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차원에서의 평화능력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개인적·주관적 차원의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화능력이 요구된다. 첫째, 긍정적 자아개념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인식은 우리가 어떤 일에 접근할 때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둘째, 자신의 가치를 명료화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명료화함으로써 개인은 표현과 의사소통의 능력을 획득하게 되고, 대면접촉의 차원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자율성이다. 자율성이란 개인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림으로써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판단·선택·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자율성은 개인의 삶을 책임있게 이끌어 가는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의 평화능력을 위해서도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넷째, 책임감이다. 평화의 전제조건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성찰성이다. 성찰성이란 개인이 자신의 행동과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정당화에 대해 살펴 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이러한 성찰성이 결여되면 사회생활에 침전된 불합리하고 비평화적인 요소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대면접촉의 차원에서의 평화는 다음과 같은 평화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타인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긍정이다. 관계 속의 개인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능력과 장점, 그리고 상이성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개방적인 의사소통과 대화의 능력이다. 인간은 그 자신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나 대화에서 상대편의 입장을 들어주는 태도가 되지 못하는 한, 그리고 자기 의사만을 관철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평화로운 관계란 불가능하다. 셋째, 독립적 존재로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독립적 관계란 관계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 그 자체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유지, 변화되는 관계이다. 관계를 지탱해 주는 것은 관계의 당사자들이 관계에서 얻는 혜택이 관계의 지속을 가치롭게 만들만큼 충분히 크다는 데 대한 당사자들 모두의 인정이다. 넷째, 화해와 용서의 능력이다. 합리적 이성이 아무리 평화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투시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여도 마음을 붙들어 주고 영혼을 흔들어 주는 체험적 뜨거움이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외부로 표현되기 전에는 결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다섯째, 신뢰의 태도이다. 신뢰를 통하여 관계 당사자들은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동적 관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여섯째, 도덕적 반성의 태도이다. 도덕적 반성이란 간단히 말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도덕적 반성을 통하여 개인은 관계 속에서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일곱째, 이해이다. 이해를 통하여 개인과 개인은 관계에서의 책임성을 지니게 된다. 여덟째, 관계에 대한 책임성이다. 관계에 대한 책임성이란 관계 당사자들이 관계를 통하여 서로가 변화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기실현과 평화가 나의 행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배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관계 당사자들은 '상생(相生)'의 관계, 즉 평화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의 평화능력은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관용이다. 관용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만이 우월하다거나 우리의 관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추정하지 않음으로써 나와 타인,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모두 살리는 방법이 된다. 둘째, 참여를 통한 자치이다. 참여란 어떤 현상·과정 또는 결과에 직접적으로 작용을 하는 것이다. 개인은 참여를 통해 사회 속에서의 자치의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참여를 통한 자치 속에서 개인은 자유로운 삶과 공동체의 평등한 구조를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저항이다. 정치적·사회적 차원의 비평화적 질서에 대해서는 저항을 통하여 권리를 획득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넷째, 연대이다. 평화는 중심의 전환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자신이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 다섯째, 비판이다. 평화란 폭력과 차별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다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섯째, 개인의 선(善)과 공동선의 조화이다. 우리는 개인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의무뿐만 아니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존립해야 할 공동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의 유지와 보존에 기여해야 할 적극적인 책무를 지닌다.

생태적·우주적 차원의 평화능력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첫째, 검소한 생활양식이다. 평화교육은 학생들이 이러한 소비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검소한 생활양식이 생태친화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학습하고, 소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결단과 실천능력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개체적 자아의 극복이다. 개체적 자아를 뛰어 넘어 존재와 존재의 연관성을 몸으로 익히고 '확장된 나', 그리고 '우주적 자아'에로 차원을 넓히는 것이 요구된다. 셋째, 생태적 사고이다. 생태적 사고란 더 큰 전체, 우주를 고려하는 차원이다. 개인이 자신의 사소한 행동에서도 확장된 자아, 우주를 고려할 수 있을 때 생태적·우주적 차원에서의 평화는 가능하다. 넷째, 변증법적인 이성이다. 생태적 위기에 이르러, 근대를 이끌어 온 동력인 '이성에 대한 신뢰'는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보다 확장된 의미에서의 대안적 이성이 요구된다. 대안적 이성은 유기적이면서 비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고, 발전적이면서 여전히 분석적인 통찰력을 유지하고 있고, 윤리적이지만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평화능력을 통해 개인은 삶의 다층적인 양상 속에서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상생의 질서 속에서 생명체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이 협력의 근거가 되는 평화상태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위와 같은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개인에게 심어주는 일에 평화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만들어 가지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지 못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힘들고 불행하며 보람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주관적 차원, 대면접촉의 차원, 정치적·사회적 차원, 생태적·우주적 차원의 평화능력이 요구된다.

7. 맺음말 - 평화교육의 학교현장으로의 도입

본 연구에서는 평화의 개념, 평화교육의 정의, 평화교육의 역사와 한국 평화교육의 현단계에 근거한 한국에서의 평화교육의 의제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평화교육을 '평화에 관한 교육', '평화를 통한 교육', 그리고 '평화를 위한 교육'의 결합체로서 제시하고, 한국의 평화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 교육의 평화적 분위기, 평화교육의 목표인 평화능력 조직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평화교육을 학교현장으로 도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로들을 통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경로들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 평화교육을 교과목 속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이 중 한국의 상황에서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은 현재의 사회교과나 도덕교과의 대안으로서 평화교육을 도입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을 교육 내용으로 할 수 있으며, 새로운 가치교육을 실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둘째, 틈새전략으로서의 평화교육이다. 틈새전략으로서의 평화교육이란 현재의 학교제도와 교육과정을 인정하되, 학급활동이나 교실활동, 학생자치활동 등에 평화교육적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무반성적으로 실시된 반장선거나 환경미화와 같은 일상적인 학교에서의 활동들을 보다 평화적이고 공동체적인 방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셋째, 대안교육의 교육과정으로서 평화교육을 도입하는 것이다. 현재 대안학교 운동이나 실험학교 운동 등을 통하여 입시위주의 비평화적 교육을 극복하고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러한 대안교육 현장에서는 평화교육을 교육의 기본적 전제로서 도입하고 그에 기반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실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전반적인 윤리적 이념으로서 평화교육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공존을 위한 가장 시급한 화두가 평화임을 절감하고 이를 위한 교육의 내용과 교육적 분위기, 그리고 교육의 목표를 평화와 관련하여 설정하여 평화적 가치지향을 지니고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 연구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평화에 관한 교육'의 교육 내용과 '평화를 통한 교육'의 교육적 분위기, '평화를 위한 교육', 즉 평화능력을 형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평화는 학교에서의 모든 교과와 교육적 프로그램들에 녹아 들어가고, 전반적인 교육의 분위기와 학교에서의 생활이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 결과 학생들이 교육을 받은 후에는 평화능력을 충분히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우리 나라에서의 평화교육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평화교육은 교과목 속으로 도입될 수도 있고, 틈새전략일 수도 있고, 대안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총체적 비평화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교육의 전반적인 윤리적 이념으로서, 비평화적 시대의 교육적 대안으로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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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cks, D., "Peace Education : Attempting to Teach for a Better World", The New Social Curriculum,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0.
-----(ed.), 고병헌 옮김, 『평화교육의 이론과 실천』, 서원, 1993.

 주--------------------------
1) 이 글은 평화교육의 개념과 구성요소를 소개하기 위한 글로서, 글쓴이의 석사학위논문(박보영, 『평화교육에 관한 연구 - 한국에서의 평화교육 실천을 위한 이론적 기초』,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심화된 자세한 논의는 위의 논문을 참고하라.
2) 조혜정,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또 하나의 문화, 1997을 참조하라. 3) 안도현, "놀이터", 『모닥불』, 창작과 비평사, 1989.
4) 고병헌, "평화, 평화교육의 이해를 위하여", 『평화, 평화교육의 종교적 이해』, 내일을 여는 책, 1995, 14쪽.
5) 오인탁, "평화교육의 이념과 내용", 『기독교사상』, 1998년 9월호, 103쪽.
6) 김정환, 『인간화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내일을 여는 책, 1995, 190쪽.
7) 이 글에서의 논의는 지면의 제약으로 인하여 심도깊게 이루어질 수 없고, 다만 간략한 개요들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자세한 내용은 연구자의 앞의 논문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