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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행동심리학의 문제로서 의식



행동심리학의 문제로서 의식

 

번역(진보교육연구소 번역팀)

 

<번역팀 주석>

 

이제 비고츠키는 지난 호에 번역된 논문 반사학적 조사 방법과 심리학적 조사 방법(1924)’에 이어, 심리학으로 넘어가 인간의 고유한 의식의 심리적 본질에 집중하며, 행동 심리학에서 의식에 대한 미래의 작업가설을 제공하고자 한다.

 

비고츠키는 자신과 그 시대의 철학적 토대였던 변증법과 유물론을 자신의 과학적 연구에 철저히 적용한다. 한편으로 유물론자인 비고츠키에게 세계는 하나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존재와 의식은 서로 다르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인간의 의식은 동물과 동일한 생물학적 토대를 갖고 있지만, 말을 통한 사회적 접촉을 통해 인간 고유의 의식으로 발달한다. 그래서 비고츠키는 끊임없이 뿌리로 내려가, 생물학, 생리학, 의학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신과 의식을 낱낱이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인간 행동의 근원에 무조건 반사와 조건 반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건 반사만으로 인간 행동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비고츠키는 너무 일반적인 말은 말을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비고츠키는 물질과 정신, 존재와 의식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이원론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비판한다. 정신은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신이 물질에서, 의식이 존재에서 나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정신과 의식의 고유성을 인정하며 물질로부터의 질적 변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과학적 연구의 철학적 토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적 토대에 따라 제기하는 질문이 달라진다. 물질과 정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이원론은 정신의 물질적 뿌리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복잡한 정신의 세계 속을 헤맨다. 비고츠키가 자신의 연구에서 종종 스피노자를 호출하는 것은 그의 철저한 일원론이 과학적 연구에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비고츠키의 심리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심리학과 다른 이유는 바로 그 철학적 토대에 있다.

 

이 논문에서 비고츠키는 첫 번째 질문인 의식의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 천착한다. 이 논문의 첫 머리에서 비고츠키가 말하는 작업가설이 그것이다. 의식의 물질적(생물학적, 생리학적) 뿌리를 공식화하고 나서야, 엄청나게 복잡한 인간 고유의 의식의 사회적 뿌리에 대한 연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토대에 기반하여 인간 고유의 의식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그 매개와 과정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그것은 말을 통한 사회적 접촉이다. 인간은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존재이며 이러한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말은 인간 고유의 의식 발달에서 엄청난 역할을 한다.

 

비고츠키의 이러한 탐구 과정은 또한 당대의 여러 심리학 조류와의 투쟁 과정이기도 했다. 비고츠키는 당대 심리학의 두 극단인 기계론적 유물론(반사학, 행동주의)과 관념론적 심리학을 모두 비판하면서 이를 심리학의 위기로 규정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한 새로운 심리학을 개척한다. 비고츠키의 1927년의 방대한 저작인 심리학 위기의 역사적 의미: 방법론적 연구은 아마도 이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비고츠키의 작업가설은 의식의 토대가 반사들의 전송 체계(반사 체계의 전달 기제)라는 것이며, 특히 인간은 말이라는 사회적 접촉을 위한 반사들의 체계를 통해 타인을 의식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행동 기제와 의식의 기제는 동일하다. 이는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질적, 사회적 토대로서의 대답이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비고츠키는 인간 의식은 극도로 복잡하다고 말한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의식에 대한 비고츠키의 후속 연구는 우리가 그의 추후 저작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각, 주의, 기억, 생각, 감정, 의지 등과 같은 정신 기능과 그 사회적 매개로서 말에 대한 연구로 넘어가며, 종국에는 이를 인격과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종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비고츠키가 병상에서 구술했다는 생각과 말의 서문에서 문턱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던 그의 의식 연구, 심리학 연구의 시작을 보고 있다.

 

 

<번역팀 본문 주요 내용 발췌>

 

I. 우리의 과학 문헌에서 의식의 심리적 본질에 대한 질문은 지속적으로 고의적으로 회피되었다. 의식의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심리학은 인간 행동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연구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을 참조하지 않고 인간 행동과 복잡한 형태의 인간과 관련된 활동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사는 추상적 개념이다. 방법론적으로 그것은 매우 가치가 있지만 인간 행동에 대한 구체적 과학인 심리학의 기본 개념이 될 수는 없다. 지각, , 몸짓, 표정, 본능, 실수, 감정은 모두 반사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그런 공허한 진술의 과학적 불모성은 아주 분명하다. 과학은 그러한 발견 방법으로는 연구하는 문제를 밝히지도 명확히 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반사가 아니라, 행동, 그 기제, 그 구성요소 및 그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 행동을 조건 반사의 열쇠로 완전히 열 수 있는 기제로 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의식의 심리적 본성에 관한 예비 작업가설 없이는 이 영역에서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정하고, 선택하고 선별하며,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고,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고, 새로운 문제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II. 인간 행동에 대한 우리 공식의 새로운 부분은 역사적 경험, 사회적 경험 및 중복된 경험이다.

 

III. 반사 조절의 기본 원리는 공통 운동 영역에 대한 다양한 수용 집단들의 투쟁을 수반한다. 행동은 승리한 반응 체계이다. 모든 행동은 한 순간도 진정되지 않는 투쟁이다. 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외부 지점에서 오는 반사들 간의 조정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그 덕분에 신경계는 온전히 개인으로 통합된다.

 

IV. 그러나 동일한 반사 체계뿐 아니라, 다른 반사 체계와 체계들 간의 반사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이 기제 또한 본질적으로 객관적 의미에서의 의식의 기제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새로운 활동에 대한) 자극이 될 수 있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우리 신체의 능력은 그 점에서 의식의 토대가 된다.

 

자각, 즉 행동과 상태를 의식하는 능력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반사 집합에서 다른 반사 집합으로의 전송 기제 체계로 보아야 하며, 그것은 모든 의식적 순간에 올바로 기능한다.

 

무의식과 영적인 것 또한 다른 체계로 전송되지 않은 반사를 지칭한다. 자신의 경험을 의식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다른 경험을 위해 대상적 형태(자극)로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이 그저 대상의 경험이듯, 의식은 경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반사에 대한 자극(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 반사의 능력(대상의 경험), 즉 이러한 의식의 기제는 또한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의 반사 전송 기제이다.

 

반사에 의해 보내진 새로운 자극은 새로운 이차 반응을 유발하며, 그것은 유기체의 일반 조건과 신체에 의해 그 자신의 반사에 돌려진 값에 의존하여 일차 반응을 강화하고 반복하거나 약화하고 억압한다. 따라서 순환 반응은 두 반사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한 반응이 다른 반응을 조절하고 규제하는 결합이다. 이것은 의식 기제의 새로운 측면, 즉 행동에 대한 규제적 역할을 기술한다.

 

이차 반응은 일차 반응을 강화하거나 종결시킬 수 있다. 이것이 의식의 기제를 구성한다. 의식은 반사들의 다중 굴절이다.

 

V. 자기-의식과 자기-관찰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길 또한 마련된다. 내적 지각과 내관은 자기수용 영역과 그와 연결된 이차 반사의 존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언제나 반응에 대한 반향이다.

 

이제 이 경험이 오직 자신의 경험을 경험하고 있는 한 사람에게만 접근 가능한 이유는 분명해 진다. 오직 나 자신만이 홀로 나의 이차 반응을 관찰하고 지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반사는 나 자신에게만 나 홀로 자기수용 영역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음(, 감지되지 않는 이 반사 집단)이 행동 체계에서 담당하는 무시무시하게 중요하고 엄청난 역할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이 다른 반사 체계에 대한 반영을 통한, 즉 간접적 방법에 의한 발견을 거부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내적 자극에 대한 반사를 고려하는 것이다.

 

요점은 억제된 반사를 연구할 새로운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 기법을 반사학적 방법에 포함시키면 이 방법은 실험 심리학에서 오래 전에 확립된 반응을 연구하는 방법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각에 비추어 그 탄생의 순간부터 의식 발달, 경험 속에서 그것의 기원, 그것은 이차적 본성, 그리고 그 결과로서, 환경에 의한 그것의 심리학적 결정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존재는 의식을 결정한다. 이 법칙은 약간의 정교화 후에, 처음으로 정확한 심리적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 결정성의 실제 기제를 드러낼 수 있다.

 

VI. 인간에게는 쉽게 구별할 수 있는 하나의 반사 집단이 있는데, 누구나 그것을 가역 반사라고 바르게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차례로 창조될 수 있는 자극에 대한 반사이다. 들린 낱말은 자극이며, 발음된 낱말은 동일한 자극을 생산하는 반사이다. 자극은 반응이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 반사는 가역적이다.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가역 반사는 행동의 집단적 조절에 이용된다. 자극의 전체 다수에서 한 집단은 명백히 사람들로부터 나에게 오는 사회적 자극 집단이다.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나 자신이 동일한 자극을 재현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나에게 매우 일찍 가역적이 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방식으로 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를 타인과 비교할 수 있게 만들고, 내 행위를 서로 동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사회적 행동과 의식의 원천이 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한 것이 옳다면, 그것은 사회적 행동 기제와 의식의 기제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지나는 김일지라도, 확립하는 것은 여기서 극도로 중요하다. 한편으로 말은 사회적 접촉을 위한 반사들의 체계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장 현저하게는 의식의 반사들의 체계, 즉 다른 체계를 반영하기 위한 체계이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을 의식한다. 그리고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 우리는 우리에 대한 타인의 관계에서 타인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의식한다.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타인인 정도만큼만, 즉 내가 나 자신의 반사를 새로운 자극으로 새롭게 지각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나 자신을 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했던 낱말을 큰 소리로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과 내가 타인이 말했던 낱말을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간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그 기제에서도 주요한 차이는 없다. 둘 다 가역적 반사인 자극이다.

 

의식의 개인적 측면은 사회적인 것에 기반하고 정확히 그 모형에 따라,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말과 사회적 경험에 대한 의식적 파악이 동시에 서로와 완전히 평행하게 출현한다는 것이다.

 

VII. 자극의 맥락 속에서 그것은 외부 세상이며, 내 반사의 맥락 속에서 그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단지 반사들에 대한 반사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예비적 성격을 지닌 몇몇 생각을 간단하고 피상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식 연구가 그것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과학은 여전히 최종 주장을 마무리하는 기하학 정리의 종결 공식인 Q. E. D[증명해야 할 것]에서 먼 길 위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증명해야 할 것의 우선순위를 정한 후에야 비로소 증명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과업을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나는 이 글이 그 과업의 서술로 활용되길 바란다.

 

 

거미는 직공과 비슷한 작업을 하고, 밀랍으로 벌집을 창조하는 꿀벌은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맨 처음부터 최악의 건축가는 밀랍으로 방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어 보았다는 점에서 최고의 꿀벌과 다르다. 작업 과정의 끝에서 받은 결과는 이 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사람의 표상 속에 이상적 형태로 존재한다. 사람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형태를 바꿀 뿐 아니라,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에서 동시에 자신의 의식적 목적을 깨닫는다. 그것은 법칙으로써 그의 행위 방식과 성격을 결정하며,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여기에 종속시켜야 한다.” 칼 맑스

 

 

I

 

우리의 과학 문헌에서 의식의 심리적 본질에 대한 질문은 지속적으로 고의적으로 회피된다. 새로운 심리학에서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그것을 인식하지 않으려는 시도조차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우리 눈앞에서 발달하고 있는 과학적 심리학 체계는 처음부터 수많은 유기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볼 때 주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을 몇 가지 언급할 것이다.

 

1. 의식의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심리학은 인간 행동의 다소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연구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심리학은 생명체와 세계 사이의 가장 기초적인 연결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의 책 인간 반사학의 일반 토대’(1923)의 목차만 언뜻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에너지 보존의 원리. 연속적 변화의 원리. 리듬의 원리. 적응의 원리. 힘과 대등한 반력의 윈리. 상대성 원리.” 한 마디로, 그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리, 동물과 인간 행동 뿐 아니라 전체 세계를 포괄하는 원리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동물 행동에 반대되는 인간 행동의 고유성을 특징지을, 현상들 간의 관계나 상호의존성을 공식화하는 심리학 법칙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베흐테레프의 책의 다른 극은 조건 반사를 확립하는 고전 실험으로, 작은 실험 하나를 포함한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1(first degree)의 조건 반사로부터 상대성 원리까지의 간격을 채우지는 않는다. 지붕과 토대 간의 격차, 그들 사이의 건물의 부재는 반사학적 재료에 대해 보편 원리를 공식화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 이르며, 다른 지식 영역으로부터 법칙을 취하여 그것을 심리학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명백히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취할 원리가 광범위하고 포괄적일수록,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실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더 쉽다. 우리는 개념의 용량(volume)과 내용이 언제나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편 원리의 용량은 무한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 내용은 0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베흐테레프 강좌의 특별한 결함이 아니다. 동일한 결함이 그 밖의 이런저런 형태로 출현하여 단순 반사학으로 인간 행동 이론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려는 모든 시도에 그 흔적을 남긴다.

 

2. P. P. 블론스키[1]의 표현을 빌면, 의식의 부정과 이 개념이 없는 심리학 체계, 즉 의식 없는 심리학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맨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내적 운동, 내적 말, 신체 반응 등과 같은 잠재적 반응을 연구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수단과 도구를 박탈당한 방법적 상황을 초래한다. 맨눈에 보이는 반응들만 연구하는 것은 인간 행동의 가장 단순한 문제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조차 완전히 무력하며 지지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행동은 그런 방식으로 조직된다. 실제로 그것을 지시하고 안내하는 것은 사실 지각하기 어려운 이러한 내적 운동이다. 개에서 타액 조건 반사를 발달시킬 때, 우리는 특정한 외적 장치를 가지고 개의 행동을 사전에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실험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개를 세우고, 끈으로 묶는다, .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특정한 내적 움직임을 가지고, 지시와 설명 등을 통해, 인간 피험자의 행동을 사전에 조직한다. 이러한 내적 움직임들이 갑자기 실험 과정 중간에 바뀌면, 행동의 전체 그림이 급격히 바뀐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억제된 반응들을 이용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끊임없이 몸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의식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행동에 있어서 매우 영향력이 크고 규제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내적 반응을 연구할 수단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 존재는 항상 자신에게(to himself) 생각하고 있다. 이는 인간 행동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실험 중에 생각이 갑자기 바뀌면 피험자의 전반적 행동에 언제나 어떤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예컨대, “나는 그 장치를 보지 않을 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생각). 그러나 이 영향을 평가할 어떤 방법도 모른다.

 

3. 동물 행동과 인간 행동 간의 모든 주요한 차이점이 없어진다. 생물학은 사회학을 집어삼키고 생리학은 심리학을 집어삼킨다. 인간 행동은 포유류의 행동으로 연구된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 의식과 정신이 인간 행동에 가져오는 것은 무시된다. 두 가지 법칙을 예로 언급할 것이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2]가 발견한 조건 반사의 소멸(또는 내적 억제)의 법칙, 우흐톰스키[3] 교수가 공식화한 지배성의 법칙이다.

 

조건 반사의 소멸(또는 내적 억제)의 법칙은, 어떤 조건 자극물에 의해 유발된 지속적 흥분이 다른 무조건적 자극물로 강화되지 않는다면, 조건 반사는 강도가 서서히 약화되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이제 인간 행동으로 넘어가 보자. 인간 피험자에게 어떤 자극물에 대한 조건 반응을 발달시키자. 예를 들어, “종소리가 들리면 버튼을 누르세요.”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제 이 실험을 40, 50, 100번까지 반복해 보자. 소멸이 일어날까? 반대로 할 때마다, 날마다 연결은 강화된다. 피로가 시작되지만, 이는 소멸의 법칙이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동물 심리학에서 인간 심리학으로 법칙의 단순한 외삽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주요한 몇 가지 규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규정이 무엇인지,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지조차 모른다.

 

지배성의 법칙은 동시에 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다른 부지배적(subdominant) 흥분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흥분의 초점이 동물 신경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제기한다. 고양이의 성적 흥분, 삼킴과 배설 행위, 개구리의 포옹 반사, 이 모두는 실험이 보여주듯, 다른 모든 외적 자극물의 희생으로 강화된다. 이로부터 인간의 주의 활동으로의 직접적 걸음이 이루어지며, 지배성이 이 활동의 생리적 토대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주의에는 실제로 지배성의 특징인 다른 모든 외적 자극을 희생하여 강화되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모든 외적 자극물은 주의를 흩뜨려 트리고 약화시킨다. 다시 한 번 고양이나 개구리의 지배성과 관련된 법칙들로부터 인간 행동의 법칙으로의 걸음은 어떤 본질적 수정을 필요로 한다.

 

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심리학의 영역에서 의식을 배제하면 이전의 주관적 심리학의 모든 이원론과 유심론을 상당 정도 보존한다는 것이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자신의 반사학 체계가 영혼의 가설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4] 주관적 또는 의식적 현상은 그에게 2차 현상으로, 즉 결합 반사를 수반하는 고유한 내적 현상으로 묘사된다.[5] 이원론은 특수 과학인 주관적 반사학[6]이 미래에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사실로 강화된다.

 

반사학의 기본 전제, 즉 주관적 현상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모든 인간 행동을 설명하고 정신을 배제한 심리학을 건설한다는 원칙적 취지의 가능성은 주관적 심리학이 물려준(hand-me-down) 이원론이자, 순수한 추상적 정신을 연구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낡은 이원론의 다른 절반이다. 저기는 행동 없는 정신이 있고, 여기는 정신 없는 행동이 있다. 두 경우 모두 마음과 행동은 두 개의 다른 현상으로 이해된다.

 

어떤 심리학자도, 비록 그가 극단적 유심론자(spiritualist)이자 관념론자(idealist)라 할지라도, 바로 이 이원론 덕분에 반사학의 생리학적 유물론을 결코 부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철두철미한 관념론이며 실제로 필연적으로 그것을 전제했다.

 

5. 심리학에서 의식을 버리고, 우리는 생물학적 부조리(absurdity)에 영원히 갇혀 버렸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 조차 우리는 자연에서 잉여적인 모든 것은 퇴화하여 없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관적 과정을 자연의 완전히 잉여적이고 이차적인 현상(부수현상)으로간주하는 중요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반면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주관적 현상은 가장 복잡한 상관 활동(correlative activity) 과정에서 가장 고도의 발달을 획득한다.”[7]

 

따라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는다. 하나는 이것이 실제로 사실이며, 인간의 마음을 참조하지 않고 인간 행동과 복잡한 형태의 인간과 관련된 활동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마음은 부수현상이자 이차적 현상이며, 모든 것은 마음 없이도 설명될 수 있고, 우리는 생물학적 부조리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없다.

 

6. 이런 식으로 질문이 제기될 때, 우리는 행동 구조와 그 구성과 형태의 분석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연구에 영원히 접근할 수 없다. 우리는 행동이 반사의 합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영원히 유지할 운명에 처한다. 동시에 인간은 결코 반사로 가득 찬 피부 자루가 아니며 뇌는 우연히 지나가는 조건 반사를 위한 호텔이 아니다.”

 

반사는 추상적 개념이다. 방법론적으로 그것은 매우 가치가 있지만 인간 행동에 대한 구체적 과학인 심리학의 기본 개념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반사로 가득한 가죽 가방이 [아니며] 뇌는 복잡한 집단을 위한 호텔, 즉 가장 다양한 유형에 따라 건설된 결합 및 체계가 아니다.

 

동물의 지배적 반응과 반사 통합에 대한 연구는 각 기관의 작용과, 그 반사가 뭔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의 전반적 상태에서 비롯된 기능일 뿐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8] 신경계는 통합된 전체로 작동한다” - Ch. 셰링턴[9]의 이 공식은 행동 구조 이론의 토대로 기능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반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는 카니트퍼쉬탄Kannitfershtan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한 가난한 외국인이 네덜란드에서, 그들은 누구를 파묻고 있는가? 이 집은 누구 것인가? 누가 방금 지나갔는가? 등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 이름을 들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카니트퍼쉬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순진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 낱말은 단지 그가 만난 네덜란드 사람이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목적의 반사또는 자유 반사는 조사된 현상에 대한 그런 오해의 명백한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 의미의 반사, 즉 타액 반사가 반사라는 의미에서의 반사가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구조적으로 구별되는 행동 기제라는 점은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다. 모든 것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환원시킬 때에만, 우리는 모든 것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때 반사는 이 카니트퍼쉬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반사라는 용어 자체는 그 의미를 잃는다.

 

지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사다. 말이란 무엇인가? 몸짓, 표정은 무엇인가? 모두 반사다. 본능, 실수, 감정은? 또한 반사다. 뷔르츠부르크 학파가 고등 지적 과정에서 발견한 모든 현상이나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10] 또한 반사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그런 공허한 진술의 과학적 불모성은 아주 분명하다. 과학은 그러한 발견 방법으로는 연구하는 문제를 밝히지도 명확히 하지도 못한다. 조사 중인 대상, 형태 및 현상을 해부하고 구분하는 대신, 그것은 반대로 모든 것을 희미한 반영 속에 둔다. 거기서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함께 혼합되어, 대상들 간의 어떤 명확한 경계가 사라진다. 이것도 반사고 저것도 반사지만, 이것과 저것은 무엇으로 구별하는가?

 

우리는 반사가 아니라, 행동, 그 기제, 그 구성요소 및 그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 동물이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때마다, 우리는 반응이나 반사를 연구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실제로 모든 경우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행동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저런 반응이나 반사가 지배할 것을 보장하기 위해, 예외 없이 피험자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사전에 조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개는 다수의 매우 다양한 내적, 외적 운동 반응으로가 아니라 정말로 타액 반사로 반응하는가? 이러한 반응들이 관찰된 반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이러한 실험에 도입된 조건 자극제가 그 자체로도 같은 종류의 반응(, 눈 등을 지향하는 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인가? 왜 타액 반사와 종 사이에 일시적 연결이 형성되는가? 왜 반대로는, 즉 왜 고기는 귀의 지향 운동을 유발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어떤 신호에 키 버튼을 누르는 피험자는 그의 전체 반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일반적 신체 이완, 의자에 파묻히기, 고개 떨구기, 한숨 등, 이 모두는 반응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아닌가?

 

이 모두는 모든 반응이 얼마나 복잡한지, 이 복잡성은 그 반응을 일부로 하는 행동 기제의 구조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그리고 반응을 추상적 형태로 연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우리는 조건 반사를 이용한 고전 실험에서 어떤 주요하고도 결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전에, 이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되어 지금까지 매우 협소한 영역만 다루어 왔으며, 타액 반사와 방어 운동 반사와 같은 한두 가지 유형의 반사들만 연구한 다음, 1차 또는 2차 수준의 조건 반사와 언제나 생물학적으로 동물에 불리한 유형의 조건 반사만 연구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동물은 매우 먼 신호, 높은 수준의 조건 자극물에 대한 반응으로 침을 흘려야 하는가? 따라서 우리는 반사학 법칙을 심리학으로 직접 변형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반사는 토대이지만, 그 위에서 무엇이 건설되고 있는지에 대해 토대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바그너 교수[11]의 말은 옳다.

 

이 모든 고찰 덕분에, 나는 우리가 인간 행동을 조건 반사의 열쇠로 완전히 열 수 있는 기제로 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식의 심리적 본성에 관한 예비 작업가설 없이는 이 영역에서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정하고, 선택하고 선별하며,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고,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고, 새로운 문제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적 심리학은 의식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의식을 물질화하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객관적 언어로 번역하고, 한 번에 허구, 어지러운 환영 등의 가면을 벗기고 파묻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치고 비판하고 연구하는 어떤 작업도 불가능하다.

 

의식은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이차 노선의 현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의식의 장소를 찾아야 하며, 의식은 다른 모든 유기체의 반응과 동일한 노선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작업가설의 첫 번째 요구다. 의식은 행동 구조의 문제다.

 

다른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가설은 반드시 의식에 속하는 주요 질문, 즉 에너지 보존과 자기-의식 문제: 다른 마음을 아는 심리적 가능성, 경험 심리학의 세 가지 주요 영역(즉 생각, 느낌, 의지)의 의식적 성격, 무의식의 개념, 의식의 진화 그리고 그 정체와 통일을 설명해야 한다.

 

여기, 이 간단하고 피상적인 글에서 우리는 가장 예비적이고,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생각들의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생각에 그 생각들은 혼합되었을 때 행동 심리학에서 의식에 대한 미래의 작업가설을 제공해야 한다.

 

 

II

 

이제 심리학 분야가 아닌, 외부에서 그 질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본질적 형태로 모든 동물 행동은 두 반응 집단: 선천적 또는 무조건적 반응과 획득된 또는 조건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천적 반사는 어떤 의미에서 종 전체에 상속된 집단적 경험의 생물학적 추출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획득된 반사는 이 상속된 경험의 토대위에서 개인적 경험에 의해 제공된 새로운 연결의 형성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동물 행동은 잠정적으로 상속된 경험과 개인 경험에 의해 증대된 상속된 경험을 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상속된 경험의 기원은 다윈에 의해 발견되었다. 상속된 경험이 개인적 경험에 의해 증대되는 기제는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가 발견한 조건 반사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 공식은 모든 동물 행동을 포괄한다.

 

이 상황은 인간 존재와 다르다. 인간 행동을 완전히 포괄하려면, 그 공식에 새로운 구성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첫째, 인간의 상속된 경험은 동물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사람은 신체적으로 상속된 경험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 노동 및 행동은 출생할 때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이전되지 않는 이전 세대의 경험에 광범위하게 의존한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지정할 수 있다.

 

사회적 경험, 즉 타인의 경험은 이 역사적 경험을 따라 분류되며(ranked), 인간 행동에서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나는 무조건 반사와 특별한 환경 요소 사이의 개인적 경험에서 형성되어 온 연결들을 소유할 뿐 아니라, 타인의 경험에 의해 확립된 수많은 연결도 소유한다. 해외여행을 해 본적이 없고 망원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하라 사막과 화성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경험의 기원은 분명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고 망원경을 본 적이 있는 타인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동물들에게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우리 경험의 사회적 요소라 부르자.

 

마지막으로, 인간 행동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인간의 적응과 이와 관련된 행동이 동물의 행동과 비교하여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반면 인간은 환경을 자신에게 능동적으로 적응시킨다. 분명 동물에서 우리는 그들의 본능적 활동에서 능동적 적응의 초보적 형태(둥지 만들기, 집짓기 등)와 마주친다. 하지만 동물의 왕국에서 이 형태들은, 첫째, 지배적, 근본적 중요성을 갖지 않으며, 둘째, 그들의 본질적 특성과 그들이 수행되는 기제의 측면에서 여전히 수동적이다.

 

거미줄을 짜는 거미와 밀랍으로 벌집을 짓는 벌은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이를 수행하며,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적응적 반응에서보다 더 많은 활동을 보이는 경우는 결코 없다. 그러나 직공이나 건축가에서 그 상황은 다르다. 맑스가 말했듯이, 그들은 먼저 머릿속에서 작품을 만든다. 그들의 노동의 결과는 이 노동 이전에 관념적 형태로 존재했다[12].

 

논쟁의 여지가 없는 맑스의 설명은 인간 노동에 필수적인 경험의 중복(doubling)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테면, 움직임과 재료에 대한 작업자의 상상 속에서 모형을 통해 사전에 이미 행해졌던 노동이 손의 움직임과 작업 중인 재료에서 생성된 변화로 반복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에는 존재하지 않는 능동적 적응 형태를 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 중복된(doubled) 경험이다. 이 새로운 종류의 행동을 중복된 경험이라 부르자.

 

이제 인간 행동에 대한 우리 공식의 새로운 부분은 역사적 경험, 사회적 경험 및 중복된 경험이다.

 

의문은 남아 있다. 어떤 기호(sign)를 통해 공식의 이 새로운 성분을 서로 그리고 이전 부분과 연결하는가?

 

개인적 경험에 대한 유전된 경험의 증식의 기호(sign)는 우리에게 분명하다. 그것은 조건 반사의 기제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논문의 이후 절에서 다른 연결 기호(sign)를 찾아 볼 것이다.

 

 

III

 

앞 절에서 우리는 문제의 생물학적 및 사회적 측면을 요약했다. 이제 그것의 생리학적 측면을 간단히 살펴보자.

 

고립된 반사들을 이용한 가장 기초적인 실험들조차 반사들의 협동 또는 행동으로의 전달 문제에 직면한다. 앞에서 우리는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의 모든 실험은 개의 행동이 두 반사의 충돌 속에서 단일한 필연적 연결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사전에 조직되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나가면서 언급했다. 그리고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개에서 좀 더 복잡한 다른 반사도 다루어야만 했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실험 중에 일어나는 서로 다른 두 반사들의 충돌에 대해 한번 이상 언급했다. 그런 충돌의 결과가 언제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논문 2125 참조 어떤 경우 그는 동시적인 방어(guarding) 반사에 의한 음식 반사의 강화에 대해 논하고, 다른 경우 그는 방어(guarding) 반사에 대한 음식 반사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다).[13]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이 점에 대해 두 반사는 말 그대로 저울대 위의 두 접시로 볼 수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반사 완성의 유별난 복잡성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외적 자극에 대한 모든 반사가 외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다른 반사 작용뿐 아니라 다수의 내적 반사와, 중추신경계의 다른 부분뿐 아니라 활성 조직 요소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내적 자극 화학적, 열적 등 - 의 효과에 의해 제한되고 지배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반사 현상의 엄청난 복잡성에 대한 완전하고 현실적인 그림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14]

 

셰링턴이[15] 자신의 연구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반사 조절의 기본 원리는 공통 운동 영역에 대한 다양한 수용 집단들의 투쟁을 수반한다. 요점은 신경계에 원심성 뉴런보다 더 많은 구심성 뉴런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운동 뉴런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아마도 모든 수용기와 반사 연결을 갖는다. 공통 운동 영역의 다양한 수용기들 사이에 하나의 작동 기관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이 신체 내에서 언제나 계속 진행된다. 이 투쟁의 결과는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수많은 원인들에 의존한다. 따라서 실현된 모든 반응, 승리한 모든 반응은 투쟁 후에, ‘충돌 지점에서의[16] 갈등 이후에만 출현한다.

 

행동은 승리한 반응 체계이다.

 

셰링턴은 말한다. “의식 문제는 제쳐놓고 정상 조건 하에서, 모든 동물 행동은 최종 영역의 연속적 전환, 지금은 한 반사 그룹으로, 다음은 다른 반사 그룹으로의 전환으로 구성된다.”[17] 다시 말해 모든 행동은 한 순간도 진정되지 않는 투쟁이다. 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외부 지점에서 오는 반사들 간의 조정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그 덕분에 신경계는 온전히 개인으로 통합된다.

 

셰링턴(1904, p. 466)에 따르면, 공통 운동 영역의 조절 기제는 주의를 정신적으로 처리하는 토대로기능한다. “따라서 보장된 순간순간의 행위의 단일성은 개인 구성의 핵심 요소이며, 개인의 통일성을 완성하는 것이 신경계의 고유 업무다.” (같은 글, p. 466)

 

반사는 유기체의 총체적 반응이다.” 각 근육, 각 작업 기관은 어떤 수용기 그룹일 수도 있는 지참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수표로간주되어야 한다. 신경계의 일반적 관념은 다음 비교로부터 분명해 진다.

 

수용기 체계는 깔대기의 넓은 상단이 좁은 하단 개구부로 연결된 원심성 경로 체계이다. 그러나 각 수용기는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아마도 모든 원심성 섬유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연결의 강도는 변한다. 따라서 깔대기와의 비교를 확장하려면, 우리는 전체 신경계가 한 쪽 개구부가 다른 개구부보다 5배 넓은 깔대기라고 말해야 한다. 이 깔대기 안에 또한 깔대기 수용기들이 들어 있으며, 그 넓은 입구들은 더 큰 깔대기의 출구를 향해 뒤집어져 완벽히 그것을 덮는다.”[18]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뇌의 반구를 환경 요소들과 다양한 반응들 간에 새로운 일시적 연결이 확립되는 전화 교환기에 비유했다.[19] 그러나 우리의 신경 체계는 전화 교환기보다 수천의 군중들이 허둥지둥 몰려드는 큰 건물의 좁은 문을 더 많이 닮았다. 몇 사람들만이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죽거나 밀려난 수천 중 소수뿐이다. 이는 우리가 행동이라 부르는 그 투쟁의 비극적 본성, 환경과 사람 간의 그리고 개인 내의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을 더 가까이 전달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행동 기제로서 의식 문제를 적절하게 제시하는데 필요한 두 서술이 따라 나온다.

 

1. 외부 세계는 수천의 자극, 끌림, 소환을 따라 깔대기의 넓은 구멍으로 흘러들고’, 깔대기 내에서는 끊임없이 투쟁과 충돌이 일어나며, 모든 흥분은 양이 크게 줄어든 유기체의 반응으로 좁은 구멍으로 흘러나온다. 행동으로 일어나는 것은 가능한 것 중 무시할 정도의 일부뿐이다. 매 순간 개인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우리 행동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깔대기의 넓은 구멍과 좁은 구멍 간의 차이는 완벽한 현실이며, 반응의 세 가지 측면이 모두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승리한 반응의 현실과 동일한 현실이다.

 

실현되지 않은 이 행동은 최종 공통 영역과 복잡한 반사의 약간 복잡한 구조가 주어질 때조차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복잡한 반사에서, 반사궁은 때로 영역의 다른 부분을 위해 공통 영역의 한 부분과는 동맹하고 다른 부분과는 서로 경쟁한다.”[20] 따라서 반응은 반쯤 실현된, 언제나 어떤 불명확한 부분만 실현된 상태로 있을 수 있다.

 

2. 반사들 간의 뒤얽힌 투쟁에 의해 신경계에서 확립된 극도로 복잡한 균형 덕분에, 투쟁의 결과는 종종 새로운 자극의 매우 미미한 힘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경쟁하는 힘들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하찮은 새로운 힘조차 합력의 결과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거대한 전쟁에서는 작은 나라조차 한 쪽과 동맹함으로써 승리와 패배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미미해서 무시할 수 있는 반응조차 들어간 충돌 지점의 상태에 따라 어떻게 지배적 역할을 떠맡을 수 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V

 

가장 기초적, 근본적, 보편적 반사 관계의 법칙은 다음처럼 공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반사는 한 반사(운동, 분비)의 반응 요소가 적절한 조건하에서 다른 반사의 조건 자극(또는 억제)이 될 수 있다는 조건 반사 법칙에 따라 결합되며, 그것과 연관된 주변 자극의 감각 경로를 경유하여 새로운 반사와 반사궁을 형성한다. 일련의 전체적인 그런 연결들은 발생적으로 주어지며 무조건 반사의 부류에 속할 수 있다. 이러한 연결의 나머지는 경험의 과정, 즉 유기체 내에서 중지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지 않을 수 없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이 기제를 연쇄 반사라 불렀고 그것을 사용하여 본능을 설명했다.[21] 실험 중에 젤레냐 박사는 또한 연쇄 반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판명된 주기적인 근육 운동을 연구하면서 동일한 기제를 발견했다.[22] 따라서 이 기제는 무의식적인, 반사들의 자동적 결합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동일한 반사 체계뿐 아니라, 다른 반사 체계와 체계들 간의 반사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이 기제 또한 본질적으로 객관적 의미에서의 의식의 기제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새로운 활동에 대한) 자극이 될 수 있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우리 신체의 능력은 그 점에서 의식의 토대가 된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반사 체계들 간의 의심할 바 없는 상호작용과 한 체계에 의한 다른 체계의 반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개는 침을 흘림으로써(반사) 염산에 반응하지만, 침 자체가 산을 삼키거나 뱉어내는 반사의 새로운 자극이다. 자유 연상에서 나는 장미라는 낱말에 수선화라고 말한다. 이는 반사이지만, 또한 다음 낱말 패랭이꽃에 대한 자극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체계 또는 조절 체계 내에서 일어난다. 자극으로서 늑대가 울부짓는 소리는 나에게 두려움의 신체적, 모방적 반사 - 변화된 호흡, 심장 박동, 떨림, 입이 마름 (반사들) - 를 야기한다. 이 모든 것은 나는 두렵다라는 말을 하거나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의 전송이 일어난다.

 

자각, 즉 행동과 상태를 의식하는 능력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반사 집합에서 다른 반사 집합으로의 전송 기제 체계로 보아야 하며, 그것은 모든 의식적 순간에 올바로 기능한다. 자극으로서 모든 내적 반사가 점점 더 올바르게 다른 체계로부터 일련의 다른 반사를 이끌어낼수록, 즉 다른 체계로 전송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점점 더 잘 설명할 수 있고, 그 경험(감각, 낱말로 공식화하기 등)은 점점 더 의식적이 된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반사 집합을 다른 반사 집합으로 전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식과 영적인 것 또한 다른 체계로 전송되지 않은 반사를 지칭한다. 무한히 다양한 자각 수준, 즉 작용하는 반사의 기제에 참여하는 체계들 간의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의식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다른 경험을 위해 대상적 형태(자극)로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이 그저 대상의 경험이듯, 의식은 경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반사에 대한 자극(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 반사의 능력(대상의 경험), 즉 이러한 의식의 기제는 또한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의 반사 전송 기제이다. 이것은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가 설명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없는 반사라 일컫던 것이다.

 

의식 문제는 심리학에서 의식이 서로 다른 반사 체계들 간의 상호작용, 반사, 상호 흥분이라는 의미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자극으로서, 반응을 갖는 다른 체계에 전송된다는 것이다. 의식은 언제나 반향, 즉 반응 장치이다. 나는 세 가지 문헌을 언급할 것이다.

 

1. 심리학 문헌이 따라서 일어나는 구심성 전류의 도움으로 유기체에게 자기 자신의 반사를 돌려주는 기제로서 순환 반응을 지적해 왔다는 것과 이 기제가 의식의 토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적절하다[23]. 그런 순환 반응의 생물학적 의의가 종종 강조되었다. 반사에 의해 보내진 새로운 자극은 새로운 이차 반응을 유발하며, 그것은 유기체의 일반 조건과 신체에 의해 그 자신의 반사에 돌려진 값에 의존하여 일차 반응을 강화하고 반복하거나 약화하고 억압한다. 따라서 순환 반응은 두 반사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한 반응이 다른 반응을 조절하고 규제하는 결합이다. 이것은 의식 기제의 새로운 측면, 즉 행동에 대한 규제적 역할을 기술한다.

 

2. Ch. 셰링턴은 외수용성 영역과 내수용성 영역, 즉 신체의 외부 표면 영역과 외부 환경의 일부가 들어가는특정 기관의 내부 표면 영역을 구분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유기체 자신에 의한, 즉 근육, 힘줄, 관절, 혈관 등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에 의한 흥분인 자기수용성 영역을 언급한다.

 

외수용성, 내수용성 영역의 수용체와 달리, 자기수용 영역의 수용체는 외부 환경에서 오는 영향에 의해 이차적으로만 흥분된다. 이러한 수용체의 자극은 예컨대 근육의 수축과 같은 특정 기관이나 기관들의 활성 상태이며, 이는 다시 외부 환경 요인에 의한 수용체 표면의 자극에 대한 일차 반응으로 작용한다. 대개 자기수용성 기관의 자극에 의해 유발된 반사는 외수용성 기관의 자극에 의해 유발된 반사와 결합한다.”[24]

 

연구가 보여주듯, 이러한 이차 반사와 일차 반응의 결합, 즉 이 이차 연결은 동맹 유형과 대립 유형 모두의 반사를 결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차 반응은 일차 반응을 강화하거나 종결시킬 수 있다. 이것이 의식의 기제를 구성한다.

 

3. 마지막으로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말했다 주관적 세계에서 신경 현상의 재생은 매우 특이하며, 말하자면 여러 번 굴절되어, 전체적으로 신경 활동의 심리학적 이해는 상당 정도 잠정적이고 근사적이다.”[25]

 

여기서 파블로프는 단순 비교 이상의 의미는 없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의 정확한 의미에서 이해하고 의식은 반사들의 다중 굴절이라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다.

 

 

V

 

이를 통해 마음의 문제는 어떤 에너지의 낭비도 없이 해결된다. 의식은 일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반사들의 전송 기제로 온전히 환원된다. 즉 반응 이외의 다른 어떤 과정도 유기체에 허용될 수 없다.

 

자기-의식과 자기-관찰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길 또한 마련된다. 내적 지각과 내관은 자기수용 영역과 그와 연결된 이차 반사의 존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언제나 반응에 대한 반향이다.

 

J. 로크의 표현을 빌면, 어떤 개인 자신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지각으로서 자기-의식은 이로써 온전히 규명된다. 이제 이 경험이 오직 자신의 경험을 경험하고 있는 한 사람에게만 접근 가능한 이유는 분명해 진다. 오직 나 자신만이 홀로 나의 이차 반응을 관찰하고 지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반사는 나 자신에게만 나 홀로 자기수용 영역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경험의 근본적인 분열적 속성도 쉽게 설명된다. 즉 정신적인 것은 자기 자신의 신체외의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독특한(sui generis) 자극에 영향받기 때문에 다른 것과 같지 않다. 눈으로 지각되는 내 팔의 운동은 또한 내 눈과 타인의 눈 모두에게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자각, 즉 발생하여 이차 반응을 유발하는 자기수용적 흥분은 나 혼자에게만 존재한다. 그들은 눈의 첫 번째 자극과 공통점은 전혀 없으며, 여기에는 완전히 다른 신경 경로, 다른 기제, 다른 자극이 존재한다.

 

심리적 절차에 대한 또 다른 매우 복잡한 질문은 이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관찰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다. 이전의 심리학은 자기-관찰을 근본적이고 심리적 지식의 주요 원천으로 간주했다. 반사학은 자기-관찰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보충 정보의 원천으로서 객관적 자료의 통제하에 두었다.[26]

 

그 문제에 대해 제출된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거칠고 일반적인 개요로, 피험자의 구두 보고가 과학적 연구에 대해 지닐 수 있는 (객관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감지되지 않는 반사 (무언의 말), 즉 수험자(examinee)의 직접적 지각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내적 반사는 간접적으로 매개, 즉 그것들이 자극으로 작용하는 관찰 가능한 반사를 통해서 종종 감지될 수 있다. 완전한 반사(낱말)의 존재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는 상응 자극의 존재에 대한 표식으로 작용한다. 이 경우 그것은 완전한 반사를 위한 자극이자 그 자체가 이전 자극에 대한 반사이다.

 

마음(, 감지되지 않는 이 반사 집단)이 행동 체계에서 담당하는 무시무시하게 중요하고 엄청난 역할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이 다른 반사 체계에 대한 반영을 통한, 즉 간접적 방법에 의한 발견을 거부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내적 자극에 대한 반사를 고려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 사고의 순서, 증거는 동일하다.

 

이 관점에서 피험자의 보고는 어떤 의미에서도 객관적인 과학 조사라는 꿀 한 통에 타르 한 수저를 집어넣는 것과 같은 방해하는 자기-관찰 행위가 아니다. 어떤 자기-관찰도 없다. 피험자는 전혀 관찰자의 상황에 있지 않다. 그는 실험자가 그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반사를 관찰하는 것을 돕지 않는다. 맨 끝까지, 그리고 실제 설명을 하는 동안, 피험자는 전적으로 실험 대상으로 남는다. 하지만 후속 질문을 통해 특정한 변화나 변형이 실험 자체에 도입된다. 즉 새로운 자극이 도입되고 (새로운 질문하기), 새로운 반사는 우리가 앞의 반사에서 감지되지 않은 부분을 평가할 수 있게 해 준다. 전체 실험은 이중의 렌즈를 통과한다.

 

의식의 이차 반응을 통해 심리적 조사 방법에 그러한 경험의 전달을 포함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의 행동과 새로운 조건 반응의 확립은 완전히 드러난 충분히 감지되는 반응뿐 아니라, 맨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외부 부분에 드러나지 않은 반응에 의해서도 지배된다. 완전한 말 반사를 연구할 수 있다면,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의심할 바 없는 반응일지라도, ‘노정의 3분의 2지점에서 부서진(torn off)’[27], 반사-사고들을 고려할 수 없겠는가?

 

자유 연상에 의해 떠오른 저녁이라는 낱말을 내가 발음한다면, 그래서 그 말을 실험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언어 반응, 조건 반사로 간주된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생각할 때, 알아들을 수 없게, 나 자신에게 발음한다면, 그것은 반사이길 중지하고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는가? 발화된 낱말과 발화되지 않은 낱말의 경계는 어디인가? 입술이 움직였다면, 즉 여전히 실험자는 들을 수 없는 속삭임을 말했다면 어떻겠는가? 그는 나에게 이 낱말을 들리게 다시 말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는 나에게만 용인될 수 있는 주관적 방법인가? 부탁할 수 있다면(거의 모든 사람은 아마 이에 동의할 것이다), 내가 생각 속에서 발화한, 즉 입술을 움직이거나 속삭이지도 않은 말을 크게 말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그것은 언제나 말 운동 반응이었고 여전히 말 운동 반응이며, 그러한 조건 반사 없이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미 심문, 피험자의 발화, 실험자의 청각에 의해 감지되지 않은 탐지되지 않은 반응에 대한 그의 구두 설명이지만(이것은 생각과 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이다), 그럼에도 반응은 여전히 객관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들이 일어났으며 물질적 존재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많은 방법들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방법의 개발은 심리학적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다. 정신 분석은 이러한 방법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응 자체가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주의한다는 것이다. 후속 반응 과정에서 그것은 실험자로 하여금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그것이 분출되는 반응 과정을 연구할 것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힘과 강도로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다. 실제로 억제된 반사가 침범하지 않을 행동 사례가 많이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인간 행동을 가장 본질적 형태로 연구할 것을 거부하거나 우리의 실험에 이러한 내적 운동을 의무적으로 등록할 것을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을 보여주는 두 사례가 있다. 내가 무언가를 떠 올리고 새로운 말 반사를 확립한다면, 내가 이 시간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 내가 단지 주어진 낱말을 되뇌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 낱말과 다른 낱말과의 논리적 연결을 확립하고 있었는지 - 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이 두 경우의 결과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자유 연상에서 나는 제시 단어인 천둥에 대한 반응으로, 처음에 번개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음에도, ‘이라는 낱말을 말한다. 내가 이 생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천둥이라는 말에 대한 내 반응이 번개가 아니라 이었다는 고의로 잘못된 관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전통적 심리학에서 새로운 심리학으로 실험적 자기-관찰을 단순히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요점은 억제된 반사를 연구할 새로운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근본적 필요성과 가능성을 주장했을 뿐이다.

 

방법에 대한 질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인간에게 적용될 때 반사학적 조사 방법이 최근에 겪은 흥미로운 변형에 대해 간단히 다루어 보자. 프로토포포프 교수[28]는 그의 논문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처음에는 반사학자들이 전기-피부 자극을 발바닥에 적용했다. 그 다음 반응 여부의 기준으로 반응을 맞추기 더 적합한 더 최적의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발은 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일단 ‘a’라 말했다면, ‘b’라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은 훨씬 더 완성된 장치, 그것을 통해 세상과 더 폭넓은 연결을 확립해왔던 장치인 말 장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어 반응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것은 조사자들이 작업 중에 우연히 발견한 어떤 사실들이다. 요점은 인간에서 반사의 분화가 극도로 느리고 완만했다는 것이며, 출현한 것은 대상에 제시된 말 반사에 따라 조건 반사가 억제되거나 고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발견된 것은 인간에 있어 특정 신호에 대해서는 손을 빼고, 다른 신호가 주어지면 손을 빼지 말라는 것을 말로 보장할 수 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두 진술을 주장해야 한다.

 

1.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 대한 미래의 반사학적 연구는 주로 이차적 조건 반사의 도움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의식이 별안간 반사학자들의 실험이 되었고, 행동의 그림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의식을 문 밖에 내놓으면 그것은 창문을 넘어 들어올 것이다.

 

2. 이 연구 기법을 반사학적 방법에 포함시키면 이 방법은 실험 심리학에서 오래 전에 확립된 반응을 연구하는 방법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이를 언급하지만, 이 일치를 우연적이고 외적인 것으로만 간주한다. 반대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개에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이용되었던 순수한 반사학적 방법이 인간 행동의 문제에 철저히 굴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험 심리학이 마음을 나누는 세 가지 영역 의식, 느낌, 의지 - 모두가 또한 그것과 관련이 있는 동일한 의식적 파악의 본성을 쉽게 드러내며, 우리가 여기서 제시한 가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가설과 그것이 수반하는 방법과 쉽게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극도로 중요하다.

 

1. 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느낌의 의식적 파악에 대한 해석의 길을 연다. 세 가지의 일반 요소, 즉 느낌의 원인 A, 느낌 자체 B, 그 신체적 발현 C를 취한 후, 제임스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은 A-C-B 방식으로 재배열했다[29]. 나는 모두에게 알려진 그의 주장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공식화가 (1) 느낌의 반사 특성, 반사 체계로서 느낌 AB, 그리고 (2) 자신의 반응이 새로운 내적 반사를 위한 자극으로 기능할 때 느낌의 의식적 파악이라는 이차적, 파생적 특성 BC를 드러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전체 유기체의 빠른 평가 반응으로서, 반응 속에서 전체 유기체의 참여 활동으로서, 특정 순간에 나타난 모든 행동의 내적 조직자로서 느낌의 생물학적 의의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또한 느낌에 대한 분트의 3차원 모형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반응에 대한 유기체의 반향으로서 감정의 이러한 평가적 성격을 기술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특별한 경우에 감정의 비재현가능성과 특이성을 설명한다.

 

2. 경험 심리학의 인지 활동 또한 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이중적 본성을 드러낸다. 심리학은 그 속에 있는 두 ’, 즉 인지 활동과 이러한 활동에 대한 의식을 명확히 구분한다.

 

이 점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심리학자들의 순수한 심리학이라는 뷔르츠부르크 학파의 극도로 정제된 자기-관찰의 결과이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비롯된 결론 중 하나는 지적 활동 자체는 관찰이 불가능하며, 지각에서 벗어나 있음을 확립한다. 여기서는 자기-관찰이 스스로를 철저히 규명한다. 우리는 의식의 바닥에 있다. 여기서 스스로를 제시하는 모순적 결론은 사고 행위의 무의식적 성격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서 발견하는 사고의 요소는 그 실제적 본질이라기보다는 사고의 대용물이다. 그것들은 사고의 단편, 파편, 찌꺼기이다.

 

O. 퀼페는 우리는 라는 것이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생각에 완전히 몸을 내맡기고, 그 속에 잠겨 동시에 이 생각을 관찰할 수는 없다.”[30]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식이 자신에 초점을 맞출 수 없는 이차적 계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도 자신의 생각들을 생각하는 것, 즉 의식의 기제 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기제는 반사가 아니라서 경험의 대상인 새로운 반사의 자극이 될 수 없으며, 단지 반사 체계들 간의 전송 기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이 완료되자마자, 즉 반사가 형성되자마자, 그것은 우선 이것, 그 다음 저것이라는 O. 퀼페의 말처럼 의식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크롤 교수는 자신의 논문 중 하나에서 고등한 의식 과정에 대한 뷔르츠부르크의 연구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현상이 놀랍게도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와 유사하다는 점을 언급한다[31]. 사고의 자발성, 그것이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발견된다는 사실, 질문과 탐색의 복합적인 활동의 느낌 등이 이를 실증한다.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우리가 여기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기제에 우호적이다.

 

3. 마지막으로 의지는 가장 완전하고 명백하게 그 의식의 그러한 본질적 특성을 드러낸다. 운동 표현(즉 기관의 운동에서 비롯된 이차적 반응들)이 의식 속에 미리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점을 분명히 한다. 어떤 운동도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운동 감각(즉 이차적 반응)은 그 의식적 자각의 토대가 된다[32]. 귀 운동에 대한 베어의 실험이 이를 예증한다. 의지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자각은, 나는 생각하고 그 다음 행동했다는 두 측면의 환상을 창조할 것이다. 실제로 여기에는 두 반응이 있지만, 그것들은 반대 순서로 되어 있다. 이차적 반응이 첫째로 오고 그 다음 기초적인 일차적 반응이 온다. 때로 그 과정은 더 복잡하다. 그리고 동기, 즉 몇몇 이차적 반응의 충돌에 의해 복잡해진 복합적인 의지적 행동과 그 기제에 대한 이론은 또한 앞에서 제시된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각에 비추어 그 탄생의 순간부터 의식 발달, 경험 속에서 그것의 기원, 그것은 이차적 본성, 그리고 그 결과로서, 환경에 의한 그것의 심리학적 결정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존재는 의식을 결정한다. 이 법칙은 약간의 정교화 후에, 처음으로 정확한 심리적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 결정성의 실제 기제를 드러낼 수 있다.

 

 

VI

 

인간에게는 쉽게 구별할 수 있는 하나의 반사 집단이 있는데, 누구나 그것을 가역 반사라고 바르게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차례로 창조될 수 있는 자극에 대한 반사이다. 들린 낱말은 자극이며, 발음된 낱말은 동일한 자극을 생산하는 반사이다. 자극은 반응이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 반사는 가역적이다.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가역 반사는 행동의 집단적 조절에 이용된다. 자극의 전체 다수에서 한 집단은 명백히 사람들로부터 나에게 오는 사회적 자극 집단이다.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나 자신이 동일한 자극을 재현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나에게 매우 일찍 가역적이 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방식으로 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를 타인과 비교할 수 있게 만들고, 내 행위를 서로 동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사회적 행동과 의식의 원천이 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한 것이 옳다면, 그것은 사회적 행동 기제와 의식의 기제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지나는 김일지라도, 확립하는 것은 여기서 극도로 중요하다. 한편으로 말은 사회적 접촉을 위한 반사들의 체계이며[33], 다른 한편으로 가장 현저하게는 의식의 반사들의 체계, 즉 다른 체계를 반영하기 위한 체계이다.

 

여기에 또한 다른 사람의 에 대한 질문, 즉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뿌리가 있다. 자신을 아는(자기-인식) 기제는 타인을 아는 기제와 동일하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우리 지식의 일반 이론들은 그 불가지성을 즉시 선포하거나[34], 다양한 가설을 통해 감각 이론이나 유추 이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그럴듯한 기제를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자신을 알기 때문에 타인을 안다. 다른 누군가의 분노를 아는 데 있어, 나는 나 자신의 분노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35].

 

사실은 반대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을 의식한다. 그리고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 우리는 우리에 대한 타인의 관계에서 타인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의식한다.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타인인 정도만큼만, 즉 내가 나 자신의 반사를 새로운 자극으로 새롭게 지각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나 자신을 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했던 낱말을 큰 소리로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과 내가 타인이 말했던 낱말을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간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그 기제에서도 주요한 차이는 없다. 둘 다 가역적 반사인 자극이다.

 

그러므로 이 가설의 직접적 귀결은 모든 의식의 사회화’, 즉 의식의 사회적 계기는 시간과 사실에서 일차적이라는 인식이 될 것이다. 의식의 개인적 측면은 사회적인 것에 기반하고 정확히 그 모형에 따라,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구성된다.[36]

 

의식의 이중적(dual) 본성은 여기서 나온다. ‘이중(double)’이라는 개념은 현실에 가장 가까운 의식의 그림이다. 이것은 개인을 S. 프로이트가 분석적으로 기술한 자아이드로 나누는 것과 매우 가깝다. “‘이드와의 관계에서, ‘는 말의 뛰어난 힘을 제어해야하는 기수와 같다. 그 차이는 기수가 그 자신의 힘으로 이를 행하려 하는 반면, ‘는 빌린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확장될 것이다. 말에서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기수가 종종 말이 원하는 곳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것을 부득이하게 허용하는 것처럼, 그렇게 또한 보통 이드의 의지를 그 자신의 의지로 보이는 행위로 변형시킨다.“[37]

 

의식의 기제와 사회적 접촉 기제의 동일성과 의식이란, 말하자면, 자신과의 사회적 접촉이라는 이러한 생각을 훌륭하게 확증하는 것은 농아의 말 자각 발달 과정과 부분적으로 맹인의 촉각 반응 발달이다. 농인의 말은 대개 발달하지 않고 반사 울음의 상태에서 얼어붙어 있다. 이는 말 중추가 손상된 것이 아니라 청력 손실 때문에 가역적인 말 반사의 가능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말이 화자 자신에게 자극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 때문에 그것은 무의식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남는다. 농인은 대개 전통적인 몸짓 언어에 제한되며, 그것은 그들을 다른 농인들과의 협소한 사회적 경험의 영역과 연결하고 그 반사들이 눈을 통해 농인 자신에게 되돌아간다는 사실 덕분에 그들 안에 의식을 발달시킨다.

 

심리적 측면에서 농인의 교육은 파괴된 반사 가역성의 기제를 복원하거나 보완하는 일을 수반한다. 농인은 말하는 사람의 입술의 분절적 움직임을 읽어냄으로써 말하는 법을 배우며, 말 운동 반응 동안 일어나는 이차적인 운동감각 자극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운다.[38]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말과 사회적 경험에 대한 의식적 파악이 동시에 서로와 완전히 평행하게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의 주요 주제를 확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특별히 배열된 자연의 실험이다. 특별한 작업에서 나는 이것을 더 명백하고 충분히 보여주길 바란다. 농인은 타인을 의식하는 법을 배운 만큼 자신과 자신의 운동을 의식하는 법을 배운다. 두 기제의 동일성은 놀랍도록 분명하고 거의 확실하다.

 

이제 우리는 앞 절들 중 하나에서 제시했던 인간 행동에 대한 우리의 공식에서 용어들을 한데 모을 수 있다.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경험은 그 자체로 다른 실체가 아니다. 심리적으로 말해서, 그것들은 경험 속에서 분리될 수 없이 언제나 함께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 기호를 가지고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다. 내가 보여주고자 했듯이, 그 기제는 의식의 기제와 정확히 같다. 의식은 사회적 경험의 특별한 사례로 간주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부분 모두 이중 경험의 동일한 색인으로 쉽게 지시될 수 있을 것이다.

 

 

VII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내가 여기서 발달시킨 결론과 의식에 대한 윌리엄 제임스의 찬란한 분석의 결론이 일치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극도로 중요하고 본질적이라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완전히 다른 경로를 따라 추진된 생각이 제임스가 사변적 분석으로 제시했던 것과 동일한 관점을 이끌어 내었다. 나는 이를 내 생각의 부분적 확증으로 보고 싶다. 이미 자신의 심리학에서 제임스는 의식 상태의 존재 그 자체가 완전히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깊이 뿌리박힌 편견이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이를 확신시킨 것은 그의 찬란한 자기-관찰 자료였다.

 

활동 그 자체를 내 생각으로 돌리려고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순수한 신체적인 사실, 머리, 이마, 목구멍, 코에서 비롯된 어떤 인상과 충돌한다.”라고 그는 썼다.[39] 의식은 존재하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의식과 외부 세계(반사에 대한 반사와 자극에 대한 반사) 간의 모든 차이는 단지 현상의 맥락 속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자극의 맥락 속에서 그것은 외부 세상이며, 내 반사의 맥락 속에서 그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단지 반사들에 대한 반사일 뿐이다.

 

따라서 의식은 특수 범주로, 즉 특수한 존재 양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동, 특히 맨 앞 인용구로서 선택된 글 속에서 노동에 상대적으로 제시된 것처럼 이중(doubling) 행동의 매우 복잡한 구조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나 자신에 관해서는, 생각의 흐름은 좀 더 세밀한 분석에서 본질적으로 호흡 흐름인 것으로 판명된 것에 용이한 용어일 뿐이라는 것을 납득했다.“고 그는 말했다. ”I. 칸트에 따르면 나의 모든 대상에 수반되는 나는 생각한다는 실제로 그것에 수반되는 나는 숨쉰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생각은 사물과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40]

 

이 글에서는 예비적 성격을 지닌 몇몇 생각을 간단하고 피상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식 연구가 그것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과학은 여전히 최종 주장을 마무리하는 기하학 정리의 종결 공식인 Q. E. D[증명해야 할 것]에서 먼 길 위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증명해야 할 것의 우선순위를 정한 후에야 비로소 증명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과업을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41] 나는 이 글이 그 과업의 서술로 활용되길 바란다.

 

 

주석

 

1. 블론스키, P. P. (1921). 과학적 심리학 소론. 국영 출판; 1, p. 9.

 

2.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 I. P. (1923). 동물의 고등 신경 활동에 대한 객관적 연구의 20년 경험. 모스크바; 9장 등.

 

3. 우흐톰스키, A. A. (1923). 신경 중추의 작동 원리로서의 지배성. 러시아 생리학 저널, 6.

 

4. 베흐테레프, V. M. (1923). 인간 반사학의 일반 토대. 3.

 

5. 같은 글, p.78. 그의 마음과 생활 또한 참조.

 

6. 같은 글, 46.

 

7. 같은 글, 4.

 

8. A. A. 우흐톰스키의 논문 참조. Vinogradov, M. I., and Kaplan, I. I. (1923). 러시아 생리학 저널, 6.

 

9. 셰링턴, Ch. (1906). 신경계의 통합적 작용. 뉴욕: Charlres Scribner’s Sons.

 

10. 베흐테레프, V. M. (1923). 인간 반사학의 일반 토대, 50, 51.

 

11. 바그너, V. A. (1923). 생물심리학과 관련 과학. 페트로그라드; 4.

 

12. K. 맑스. 자본론. Vol. 1; Part 3; Chapter 5.

 

13. 파블로프, I. P. 20년 경험...

 

14. 같은 글, 25.

 

15. 셰링턴, Ch. (1912). 중추 신경계 반사의 상관관계와 공통장 원리. (Russian translation in Uspehi Biologii, Odessa; 1912.)

 

16. 헤링의 표현

 

17. 셰링턴, Ch. 중추 신경계 반사의 상관관계...

 

18. 셰링턴, Ch. 중추 신경계 반사의 상관관계...

 

19. 파블로프, I. P. 동물의 고등 신경 활동에 대한 객관적 연구의 20년 경험, 모스크바.

 

20. 셰링턴, Ch. (1912). 중추 신경계 반사의 상관관계와 공통장 원리.

 

21. 파블로프, I. P. 20년 경험..., 25.

 

22. Dr. 젤레냐, D. T. (1923). 주기적 근육 운동에 대하여. 러시아 생리학 저널, 6. 파블로프 학파에서는 같은 용어가 또한 반사들을 연쇄적으로 결합하는 몇몇 다른 기제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Cf. D. S. 후르시코프 (1922). 연쇄적 조건 반사에 대하여. 러시아 생리학 저널, 4.

 

23. 랑게, N. N. (1914). 심리학. 과학의 성과. 8. 미르 출판사.

 

24. 셰링턴, Ch. 중추 신경계 반사의 상관관계와 공통장 원리.

 

25.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 I. P. 20년 경험..., 23.

 

26. 베흐테레프, V. M. 인간 반사학의 일반 토대, 2.

 

27. 세체노프의 정의

 

28. 프로토포포프, V. (1923). 인간에 대한 반사학적 연구 방법. 심리학, 신경과 및 정신과 저널, 3, p. 22.

 

29. 제임스, W. (1905). 심리학. 상트페테르부르크. Lopatin 번역; 24.

 

30. 퀼페, O. (1922). 현대 사고심리학의 의의에 대하여. In O. 퀼페, 심리학 강의, Russian translation in Novie idei v filosofii, 16.

 

31. 크롤, M. B. (1922). 생각과 말. 벨로루시 주립 대학 저작집에서, 1.

 

32. H. 뮌스텐베르크의 의지적 행동 분석 (1909) 참조. 교사 심리학. 20and G. 에빙가우스 (1902). 심리학의 기초. 모스크바; Vol. 1, 2, Chapter IV.

 

33. 잘킨트, A. (1924). 혁명적 시기의 문화에 대한 소론. 모스크바;

 

34. Vvedenskii, A. (1917). 형이상학 없는 심리학, p. 71 and Vvedenskii, A. (1892). 생명있는 존재의 한계와 속성에 대하여.

 

35. 립스, Th. (1907). 낯선 나에 대한 지식. See also Lapshin, I. I. (1910). 현대 철학에서 타인의 마음에 대한 문제.

 

36. See Natorp, P. (1899). 사회적인(Sozialpädagogic), p. 95: “타인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이해도 없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가 타인과 격리되어 조용히 스스로 생각할 때조차, 우리는 계속 낱말을 사용하며, 따라서 최소한의 가상의 의사소통을 유지한다.” 우리가 볼 때 의식은 바로 이 가상의 의사소통이다.

 

37. 프로이트, S. (1923). 자아와 이드. 모스크바; 2, p. 25.

 

38. W. 예루살렘 (Laura Bridgman, V, pp. 54-55), 농인과 맹인의 생각 과정과 의식을 분석하고 Laura Bridgman은 언급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생각은 처음에는 당연히 감각 기관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또한 생각 과정을 감각적으로 지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Laura는 자신이 네 가지 감각 기관(생각, , ,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Lamson, p. 56). 여기서 생각은 분석자의 작업과 나란히 위치한다는 것이 완전히 분명하다.

 

39. 에필로그(맺는 말).

 

40. 제임스, W. (1913). 의식은 존재하는가? Russian translation in Novie idei v filosofii, Vol. 4.

 

41. 이 글은 이미 이 문제와 관련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몇몇 작업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인쇄되어 있었다. 의식의 문제는 이 저자들에 의해 반응들 간의 관계의 문제로서 여기서 개발된 생각과 매우 밀접하게 공식화되고 해결되었다(J. B. 왓슨의 언어화되지 않은 행동’ (1924). 인간 행동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것. 심리학 비평, 31, p. 273-280 그리고 Lashley, K. S. (1923). 의식에 대한 행동주의적 해석. 심리학 비평, 30, p. 237-272; 329-3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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