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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담론과 문화> 예의와 윤리

2020.08.17 02:33

진보교육 조회 수:59

담론과 문화> 예의와 윤리



눈동자의 몽상록

예의와 윤리

 

 

다시 이어지게 해 주소서!

 

부동산 폭등 문제로 정부 여당이 호되게 흔들렸다. ‘그린 벨트 풀기를 묘수로 여기는 공급확대론의 에 걸려 들더니(토건업자 홍남기/김현미), 그게 반발을 사자 행정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자는 제안을 꺼냈다. 앞엣 잔꾀보다야 좀 나은 대안 제시이기는 하지만, 수도권 집중의 거센 흐름을 얼마쯤 늦추는 것에 불과하고 뒤탈이 없으라는 법도 없다. 부동산 이슈를 이것의 설왕설래說往說來로 덮어버리려는 속셈인가? 몇몇 재벌과 권문세족이 돈과 권력을 대부분 움켜쥔 현실에 큼지막한 철퇴를 후려치지 않는 한, 조무래기 투기꾼들이 개미떼처럼 서울로, 투기판으로 몰려드는 것을 화끈하게 멈춰 세울 수 없다. 우리가 까맣게 잊은 재벌 해체의 의제를 부동산 해법으로 들어올릴 때가 아닐까. , ! 불황에 대한 극약 처방으로 던져진 제로 금리가 부동산 투기광풍을 한껏 부채질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제로금리), 한국 정부가 주권적으로 내린 처방도 아니고, 미국 연준(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지령인데 걔네 미국의 채산성 없는 산업들을 기어이 연명延命시키려는 발악이다. 그러니까 시장논리에 따르자면 부도 처리해야 마땅한 미국 산업을 살리려고 한국이 부동산 몸살의 대가代價를 치르는 중이다. 한국의 토지 자산은 작년에 8800조원에 이르러, GDP4.6배로 상승했다(공시지가 아닌 실거래가로 치자면 훨씬 높다). 게다가 갈 곳 잃은 1100조원의 돈이 주식/부동산으로 몰렸다. 정권 위기 뒷전에는 체제 위기가 어른거리고 있다. 세계적 정치/경제 난국을 헤쳐내지 않고서는 수도권 집값을 본때 있게 가라앉힐 길이 없다.

그런데 미래학자 둘이 쓴 신간新刊 뉴 노멀이 딴 얘기를 한다. 코로나로 사회적 격리가 지속될 터라서 재택(원격) 근무가 크게 늘어날 것이란다. 그러니 기업체가 큰 돈 들여 서울 강남에 본사 빌딩을 사들일 필요도 없고, 사원들이 서울을 벗어나 전원주택에 깃들여도 된다. 그래서 서울 집중이 가라앉을 거라는데 그리 된다면야 오죽 좋으랴. 그런데 사원들끼리 만나지 않고도 기업체가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이 (컴맹으로선) 실감이 나지 않는다. 두어 달도 아니고 영영 그럴 수 있는가? 물론 그들 말대로 실물경제가 줄곧 죽을 쑤는데도 부동산시장이 천세만세 활황을 이어갈 수는 없다. 언젠가는 가라앉는다지만 글쎄, 그렇게 내버려 두지들 않을 텐데 그때가 저절로 올까? 혁명 없이 그럴싸한 변화를 바랄 수 있는가?

신간 '뉴 노멀은 여러 분야의 기술적 발달의 흐름에 관해 쓸모있는 지식을 준다. 이를테면 10년 뒤에는 정착될 것으로 보이는 저궤도 인공위성 인터넷기술로 동남아, 아프리카의 디지털화가 빨라질 전망인데 한국 기업들이 이 기술에 종속될 위험이 높단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문화콘텐츠 개발이 빨라져서 사람 배우/가수/성우가 설 공간이 줄어들 거라고도 한다. 하지만 노자勞資 대립의 기본 모순이 미래사회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충분히 들여다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그들의 부동산 (장기적) 낙관론만큼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원격 근무뿐 아니라 원격 교육도 실감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케임브리지대학이 완전 온라인교육!’을 내걸었다며 한국 학생들도 서울대 연고대 놔두고 거기로 몰려갈 거라는데 글쎄? 교육부장관이 원격교육, 서둘러 실시하라!’고 학교에 지령을 내렸을 때, 좀 답답했다. 걔네가 그저 주어진 교육과정, 어찌 치러낼 거냐는 데만 잔뜩 정신을 팔고 있어서다. 상상해 봤다. 대통령이 나서서, 시민사회 리더들과 석학碩學 여럿 불러 토론해서 비상한 단안을 내릴 수는 없었을까?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그러니까 지금의 교육과정(교육내용)은 잠깐 멈추고,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인문학을 통해서든 인수공통감염병의 증가 사태를 비롯해 환경위기, 체제위기 전반을 되돌아보는 발본拔本의 성찰을 전국민 전학생 교육으로 진행한다. 1급의 학자/교사가 교육방송을 통해 일제一齊 강의하고, 일선 교사들이 이를 이어받아 학생들과 토론한다. 1년쯤 그렇게 하고, 그 특별교육이 시행되는 동안, 기존의 교육과정을 전면 재검토하여 코로나 이후에 걸맞게 쇄신된 교육과정을 마련한다!”

문명 성찰 교육이 절실한 이유는 그래야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헤쳐 나갈 지혜를 다 같이 공유할 수 있어서다. 감염병 확산 사태가 반년이 넘었건만 트럼프를 비롯해 각국의 지배층은 사태가 곧 끝날 거야. 그때는 얼른 경제를 굴려야지.” 하고 저희들 생각버릇을 끝끝내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마이동풍馬耳東風! 과학자들 경고는 알지만, 우리는 그 얘기를 믿지 않을 거야! 훗날의 인류야 어찌 되든 우리 앞가림이 더 급해!” 지금쯤이면 대대적인 여론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아직도 코로나가 머지 않아 물러갈 거라는 미련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문명 전환의 간절함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는지! 코로나 대응은 훗날 더 큰 파도로 들이닥칠(=올해도 사막 메뚜기떼, 중국의 물난리로 전조前兆를 보인) 기후위기에 대한 예행 연습이다. 모든 사회생활을 비상한 눈길로 되살펴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교회가 혼쭐이 났다. 방역을 훼방 놓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울분을 느낀 목사들이 참 많았을 거다. 그런데 필자는 코로나 사변이야말로 점점 쇠락해 가는 종교가 다시 활력을 되찾을 기회라고 여긴다. ‘종교religion’의 어원語源다시 잇다(연결하다)”가 아닌가. 일찍이 인류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버릇대로 살아 왔더라면 지금 같은 문명을 일구지 못했다. 남녀가, 여러 사회 신분이, 인종/종족들이 벽을 넘어 하나 되자!’는 생각이 싹트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보편종교가 해낸 일의 역사적 의의가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인류가 초래한 신종 질병이 다시 나라/인종/계급 사이에 벽을 쌓아 올리고 있다. ‘격리 방역으로 인해 고립되고 소외된 사람도 셀 수 없이 늘어났다. 흔히 재난 원년에는 긴장이 걸려 재난의 무게를 미처 느끼지 못한다. 코로나와 영영 더불어 살아야 함을 점점 깨닫게 될 내년, 내후년 쯤에는 (사회적 격리 속) 기다림에 지친 사람이, 재난의 세월에 짓눌려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눈덩이로 불어날 거다. 디지털 기술이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다독일 수 있는가?

어느 신학자의 글을 읽었다(신간 포스트코로나 사회에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영혼과 영혼이 가까워질 수 있단다. 비대면非對面의 선교가 가능하다. 전광훈 교회처럼 교인들을 서로 떼어 놓으면 앗 뜨거라, 하느님/예수님이 달아날 것처럼 아우성치는 것은 철없는 짓이다. 남북 이산가족처럼 수십년간 까마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그리움이 식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않았던가. 불립문자不立文字!! 때로는 물리적 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남들을 구하러 사지死地로 뛰어들 수도 있단다. 그는 초대교회 때의 사례를 든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로마시민 3분의 1이 죽어나가던 시절에 일부 크리스천들이 감염을 무릅쓰고 병자들을 돌봤다. ‘바라볼라노이(위험을 무릅쓰는 자들)’라 일컬었다. 널리 퍼져나갈 코로나 우울증을 가라앉힐 길은, 사람들의 무너지는 마음을 벅차게 살려낼 길은 (어렵기는 해도) 이 길이 아닐까?

 

윤리가 옳게 서지 않은 사회는 무너진다

 

참종교운동이, 아니면 참사람운동이 간절해지는 까닭은 재난(에서 돈 벌어 먹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야만을 불러올 개연성이 무척 짙어서다. 그 야만스러움의 핵심은 신판 고려장高麗葬윤리적 위기. “경제를 살리려면 방역을 풀어야 돼! 늙고 병든 사람은 죽게 내버려 두자!!” 감염병 확산 초기에도 여기저기서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앞으로 10억 인구가 일자리를 잃는 미증유의 사태가 들이닥친다면 그 소리가 우레보다 더 우렁차게 울려퍼질 거다. “병원이 환자를 감당 못해요!” 하는 아우성이 들리면 그 소리가 더 독기를 띤다.

<군사 윤리>를 떠올려 보자. 중상을 입은 병사와 경상을 입은 병사가 의무대에 들이닥친다면 누구를 먼저 돌봐야 하는가? 목숨이 위태로운 병사부터 먼저 돌본다! 경상자 10명과 중상자 1명이 들이닥칠 경우는? “중상자는 우리 전력戰力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 경상자 10명부터 돌보자!”고 주판알을 튕기는(=공리주의 세계관을 뽐내는) 군의관은 없다. ?

6.25 동란 때 소대장들이 많이 죽었다. “돌격 앞으로!” 외쳤는데 호응이 없다. “총알이 빗발치잖아? 돌격해야겠거든 소대장 너부터 나가!” 할 수 없이 소대장들이 1순위 총알받이가 됐다. 그런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사지死地로 뛰어들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중상을 입어도 제 목숨을 살려내려고 군대가,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목숨을 잇는 목숨의 공동체! 그 믿음이 사라진다면 아무도 사지死地로 나서지 않을 거고, 탈영병이 잇따른다. <옳은 윤리>가 서지 않은 군대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민간 사회도 다르지 않다. 소비 재화가 아무리 지천으로 널려도, 생리적/물질적 욕구 충족의 기회가 아무리 넘쳐나도 내 목숨이 위태로울 때 나를 돌봐줄 병원이 곁에 없다면 사람들은 그런 동네를 아수라阿修羅가 판치는 무간지옥으로 느낄 거다. ‘늙고 병든 것들은 알아서 죽으라고 대놓고 내치는 사회에서 기꺼이 죽어 드리리다. 공리주의 만세!”하고 외칠 노약자들이 있을까? “우리는 죽으라고? X같은 세상, 다 같이 죽자!”고 혹시 덤벼들지는 않을까? 거기는 (사람 세상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아귀餓鬼들의, 좀비들의 나라가 아닐까?

근래 들어 교회 동네에서 꼰대들이, ‘태극기 부대가 참 많이 나왔다. 하지만 교회가 갱생更生할 구석이 얼마쯤 있을 거라고 믿는 까닭은 거기 노약자들이 모여 살아서다. 요즘 젊은이들은 교회를 별로 찾지 않는다. 교회의 리더들은 자기 교인들을 천당에 보내기 위해서라도 고려장 몰이에 맞서야 한다. 어쩌면 더불어-목숨 공동체의 윤리를 지켜낼 전략적인 자리에 그들이 서 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재난이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거꾸로(역설적으로) 작은 희망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코로나로 살림이 곤궁해진 사람이 많지만 자본 경제가 멈춘 덕분에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꽤 맑아졌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보다 맑아진 공기로 목숨을 살린 사람이 더 많단다. 교회는 친교의 공간이었다. 인간 소외를 견뎌낼 정다운 보금자리! 코로나가 그 친교의 시간들을 앗아갔지만 더 영혼 깊은 참종교의 오솔길을 개척할 기회도 베풀어 주었다.

한편으로, 올 들어 코로나에 엉망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분노의 손가락질을 받은 패거리가 꽤 많았다. 인류의 운명은 아랑곳 않고 저희들 살 궁리만 들이파는 미국의 트럼프 일당이 으뜸으로 혐오를 샀지만, 중국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도 만만찮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니?” 유럽 지배층들은 이 참에 중국공산주의, 무너질 거 같다.”고 많이들 설렜다. 그들의 중국 때리기는 재난의 시대, 속죄양 찾기다. 격변하는 세상이므로 그들의 희망대로 중국(집권층)이 점점 무너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정신적 좌표)’가 무너질 까닭은 없다.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중국 국가자본주의체제 속에 놓여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뚜렷하게 실현될 길은 감염병 확산 사태와 지구적 환경위기 체제위기에 공동으로 맞서는 인류의 슬기롭고 숭고한 노력 속에 있다. 딴 계급계층을, 딴 나라 백성을 돕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도 살아남지 못한다. 국가체제에서 내쫓겨 험한 곳을 떠도는 난민難民, 기민棄民까지 보듬어 살피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가 없다. “재난(에서 힘센 놈들만 살아남는) 자본주의냐, 아니면 재난(에서 더불어 살아날 길을 찾는) 사회주의냐?” 변함없이 던져지는 화두話頭는 이것이겠다. 밤이 깊다. 하지만 도마뱀이 다리가 짧다란 덕분(?)에 날개 돋친 용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은가. 끝모를 재난의 한 복판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는 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다. 아아, 그 일을 떠맡아야 가까스로 새벽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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