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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고 프레이리 교육사상 네 번째 이야기

 

프레이리와 교육운동

이성우(구미 도량초)

 

파울루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은 실천의 교육학(pedagogy of praxis) 또는 연대의 교육학(pedagogy of solidarity)으로 상징되는바, 그의 저작물이나 담론들은 낡은 제도권 교육을 혁파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교육운동 주체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선사한다.

교육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운동은 실천을 내포하는데, 프레이리의 용어로는 프락시스(praxis)이다. 프레이리에게 프락시스를 구성하는 두 축 성찰(reflection)과 행위(action)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했다. , 실천을 위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성찰이 전제되는데, 현재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기존 실천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는 성찰은 필연적으로 바람직한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을 품기 마련이다. 여기서 파울루 프레이리 교육사상이 지향하는 가치론(axiology)이 대두된다.

 

 

인간화

 

인간화(humanization)는 프레이리가 지고의 이상으로 품는 가치이다. 프레이리가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 인간해방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화인 것이다. 프레이리적 의미에서 인간화란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Freire, Pedagogy of Hope, 1994: 98)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존재와 지식의 속성을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으로 보듯이, 가치론에서도 프레이리는 인간의 가치를 부단히 생성 발전해 가는 존재로 본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인간화는 예정되거나 저절로 주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 노력에 의해 획득되어야 할 소명(vocation)이다. 인간이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하는 조건, 즉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상황 속에서 인간화는 부정되는데, 박탈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인간해방을 이루는 것이 피억압 민중의 소명이다. 그리고 비인간화는 인간성을 빼앗긴 피억압자들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빼앗은 억압자들에게도 일어나는데, 이 둘을 모두 해방시키는 것은 오직 피억압 민중의 몫이다.(한글판 페다고지, 51~52)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의 가능성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basetriangle.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96pixel, 세로 411pixel 모든 인간이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해 가는 인간화의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프레이리 이전의 좌파 사상가들 사이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에 따르면 상부구조에 속하는 교육은 토대(하부구조)인 경제 조건에 따라 결정될 뿐이기 때문에 교육이 사회변혁에 미칠 영향력은 생각할 수 없었다. 프레이리가 훌륭한 점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생산관계라는 토대의 종속변수로 결정지어진 상부구조로서의 교육의 가능성을 통찰해낸 것이다.

교육에 대한 결정론적 사고는 어느 정도는 옳다. 학교는 사회 안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교육의 갈등은 경제적 모순을 요체로 하는 사회적 갈등과 맞물려 있고, 교육의 모순은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모순의 해결 없이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 봉착하게 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학교가 사회의 단순한 부분집합 내지 종속변인에 지나지 않는다면, 교육의 담지자가 할 일이 없어진다. 기실 우리 교사들은 기존의 지배구조를 재생산할 뿐인 교육과정을 갖고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억압의 기제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호도하는 지식기능공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왔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 즉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폭로하며 인간화의 길을 쫓는 교사들의 집단적 반발도 있었다. 암울한 군사독재시절 지배계급과 파쇼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거부하며 굴종의 삶을 떨쳐 교육민주화와 인간화 교육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들에 의한 참교육운동이라는 이름의 프락시스는 이 땅의 교육사와 학교 문화를 바꿔 놓았다. 경제결정론자들의 주장대로 제도권 교육체제 속의 교사들이 기존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면, 참교육운동 따위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이 사회의 변화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이 부조리한 사회를 현상유지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나팔수 노릇을 해온 극우 보수 신문인 조선일보가 잘 안다. 참교육운동이라는 게 있으나마나 한 프락시스라면 왜 그들이 전교조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겠는가?

 

 

프레이리와 그람시

 

스탈린주의로 상징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배하던 코민테른(* 국제공산당을 뜻하는 영어 표기 Communist International에서 따온 ‘Com-’‘Intern-’의 합성어로 제3인터내셔널이라 일컫기도 한다. 1919년에 설립되어 1943년에 해체되었다.) 체제 하에서 상부구조에 속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다가 거센 집단적 반발로 곤혹을 치른 두 사상가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프레이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인데 헝가리의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규 루카치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이다.

루카치의 기념비적인 저서 [역사와 계급의식](*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이 책은 낡은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를 탈피하여 열린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 서구 마르크스주의 Western Marxism’의 효시로 평가된다.)으로부터 프레이리는 혁명당이 민중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포착하여 자신의 저서 [페다고지]의 곳곳에서 인용하였다. 하지만, 루카치가 이 책에서 말하는 교육의 대상은 혁명을 위한 노동계급에 국한하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반면, 그람시의 경우는 형식적 교육과 비형식적 교육을 아우르는 문화적 지배라는 개념인 헤게모니론을 펼치고 있어 현대적 의미의 교육운동진영에서 참조할 바가 매우 많다. 프레이리가 그람시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포괄적이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프레이리의 흥미로운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람시를 읽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그람시를 알기 훨씬 전부터 이미 내가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상가의 저작물을 접하지도 않고서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되다니 놀랍기만 하다.(Figueiredo-Cowen and Gastaldo, 1995에서의 프레이리의 말, Coben, 1998: 117, 재인용.)

 

프레이리가 그람시에게 품은 주된 관심사는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위한 교육의 역할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해방을 위한 교육의 역할에 대한 그람시의 관심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이어 유럽에서는 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같은 물음에 대한 그람시의 생각은, 서구사회에서 혁명이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통용되고 합의가 형성되는 것은 혁명전의 러시아에서처럼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교회, 노동조합 그리고 교육과 같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조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각에 터한 그람시 교육이론의 중심개념이 헤게모니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한 계급이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해 가는 사회적 조건을 의미한다. 헤게모니 장악을 통해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해를 관철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레이리 식으로 설명하면,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술적 신화로 대중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를 전파함에 있어 지배계급은 동의보다는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지만, 헤게모니의 구축에는 강압 외에 동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헤게모니 관계는 윤리적인 동시에 교육적이다. 모든 헤게모니 관계는 필연적으로 교육적 관계이다.(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 1971: 57)

그람시는 지배의 방식보다는 지도성과 전망 그리고 민중과의 협력을 골자로 하는 리더십을 강조하는데(Gramsci, 앞의 책, 133), 이 점은 프레이리가 반대화적 교육을 거부하고 대화적 교육의 지향을 주장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그람시는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대중이 주체가 된 투쟁이 없으면 서유럽 사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사고는 피억압자가 해방의 주체이어야 한다는 프레이리의 관점과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민중은 스스로 해방의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기에 혁명적 교육자를 필요로 한다는 프레이리의 관점은 그람시 교육이론에서 유기적 지식인개념과도 통한다.

 

 

주관-객관 변증법

 

경제결정론으로 대변되는 기계론적 사고는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교조주의일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프레이리의 견해와 비슷한 입장을 마르크스가 이미 일러두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프레이리의 대응과 비슷한 맥락인 기계론적 유물론자의 교육에 대한 그릇된 견해에 대한 반박을 통해서이다.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인 까닭에 변화된 인간이 (기존 환경과는) 다른 환경 및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세 번째 테제인 이 글을 프레이리는 자신의 주저 [페다고지]에도 각주로 붙일 만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Pedagogy, 2003:53)

지금까지 논한 상부구조-토대 관계에서 교육이 점하는 상대적 자립성(relative autonomy) 개념이나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 사회변혁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가능성과 관련한 거시적 차원에 관한 것이라면, 마르크스의 위의 테제는 학교나 교실 차원의 교육실천에 중요한 의미를 던지고 있다. 이에 우리는 두 번째 글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진보교육 69, 2018)에서 논한 주관-객관 변증법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언제나 마음은 태양 To Sir With Love(1967)]이나 [고독한 스승 Lean on Me(1989)], [프리덤 라이터스 Freedom Writers(2007)]와 같은 교육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극단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헌신으로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며 폭력과 냉소주의로 붕괴된 교실을 사제지간에 신뢰와 존경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희망의 교육공동체로 바꿔낸다. 실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감동과 전율로 우리의 눈물샘은 촉촉이 젖어든다. 하지만 영화의 막이 내리고 현실로 돌아갈 때 이런 영화는 우리에게 감동적 정서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불편한 심사와 함께 회의에 빠져들게 한다. 도대체 이런 극단적 악조건(=객관성 objectivity) 속에서도 가공할 인내와 의지 그리고 역량(=주관성 subjectivity)을 발휘하여 기적을 이뤄낼 교사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하는 것이다. 열악한 객관 조건을 주관적인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꿔낼 수 있다면, 그러하지 못하는 우리는 얼마나 초라하고 무능한 교육자들인가?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프리덤 라이터스.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391pixel, 세로 764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6년 11월 15일, 오후 9:25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의 한 장면)

 

위의 영화들은 실제 있었던 일을 재구성한 논픽션이다. 그러나 이 극단적 사례를 들추기며 아무리 교육 여건이 나빠도 모든 것은 교사하기 나름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면 이는 프레이리가 말하는 주관주의(subjectivism)의 폐단에 해당한다. 반대로, 넉넉한 교육환경이 구비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교육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바람직한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불만타령을 일삼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객관주의(objectivism)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주관주의나 객관주의의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교육자는 없다. 교사인 사람은 누구나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관점을 품기 마련이거늘 우리의 관점은 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시소를 타게 된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정확하고 바람직한 관점이나 입장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고정불변한 절대적 수치의 모습을 띠진 않는다. 모든 것은 매순간 그때그때의 주관-객관의 형편이나 조건에 따라 상대적으로 접근하고 구체적으로 판단할 문제이다.

 

 

우리 교육운동 성찰

 

1989, 암울한 교육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참교육의 기치를 내걸며 전교조를 결성했을 때 국민대중들은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전교조는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며 1,500명의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 뒤 10년간 인고의 세월을 버티면서 1999년 합법화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합법화 이후 전교조는 국민들이나 교사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해갔다. 전성기 때 조합원 가입률이 30퍼센트대에 이르던 것이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그나마 남은 조합원들이 대부분 고경력자들이어서 이대로라면 향후 10년 내에 10퍼센트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우리 사회 진보 조직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이나 그 산하의 전교조의 운영체제는 레닌주의의 전통인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민주집중제는 그 순기능이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민주집중제 속엔 집중만 있고 민주는 없기 때문이다. 전교조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대의원대회가 있지만, 절대다수의 전교조 교사들은 대의원대회가 열리는지조차 모른다. 하물며, 안건이 무엇이며 핵심 이슈가 뭔지에 대해 아는 조합원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형편 속에서 조합원 대중에게 의견을 수렴해서 대의원대회에 참가하는 대의원은 전무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전교조 교사대중이 조직 일에 무관심한 현상에 대해 어떤 활동가들은 대중의 우매함을 탓하곤 한다. 그러나 대중 스스로 우매함을 자각하고 의식화의 길로 나아가길 기대할 순 없다. 조직은 이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우매한 대중을 참여시키지 않고서는 절대 바꿀 수 없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운동조직은 어떻게 대중을 깨어있게 할 것인가? 프레이리의 초기 저작물 [지시냐 소통이냐 Extension or Communication]은 대중교육에 관한 금쪽같은 매뉴얼을 전하고 있다. 프레이리는 운동조직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절대 지시 혹은 지도의 형식을 띠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한다. 지적으로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일방적 가르침을 전하는 지도(extension) 행위에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육은 소통(communication)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소통은 대화의 방식을 취한다.(Freire, Education for Critical Consciousness, 1974: 112-113)

운동조직의 활동가들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대중과의 수평적인 만남에 기반한 대화적 관계를 견지하는 것이다. 더디게 가더라도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프레이리가 역설하듯이, 대중에게(to the people) 지시할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with the people) 바람직한 방향을 고민하고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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