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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2호 (2016.10.21. 발간)


그람시, 라클라우와 무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위하여’(2)


이현 (진보교육연구소 운영위원)


 


  지난 호의 글에서는 1장과 2장의 내용을 검토하였다. 저자들은 1장과 2장에서 기존의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준비하였다. 3장과 4장은 저자들의 독창적인 정치이론을 전개하는 장이다.

  저자들의 정치이론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접합, 담론성, 적대, 등가, 헤게모니 등이다. 이번호의 글에서는 저자들의 핵심개념을 중심으로 그 개념들이 현재의 정치적 실천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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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합과 담론

  우선 접합의 개념을 살펴보자. 접합의 개념을 살펴보기 위해서 (유물)변증법과의 비교는 꽤 유익할 수 있다. 구소련에서 정식화된 유물변증법의 제1법칙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다. 상호 대립하는 대상들은 상대방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없는 부르주아는 존재할 수 없으며, 부르주아 없는 프롤레타리아도 존재할 수 없다.) 대립물은 상호 통일되어 있으나, 모순의 추동에 의해 대립물들은 항상 갈등하고 투쟁한다. 그리고 이런 갈등과 투쟁이 어떤 임계 수준에 이르면 질적 변화 즉 이전 상태의 지양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형성체가 탄생한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필연성이 지배한다. 즉 모순의 추동에 의한 대립물의 투쟁은 존재의 객관적인 운동 법칙이다.

  그렇다면 접합은 무엇일까? 접합은 영어로 articulation이며 절합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articulation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생물학에서 관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관절의 기능을 생각해보면 접합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요소들이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결합되어 작동하는 상태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 지양이 대립물들이 모순에 의해 추동되는 필연적 운동을 지시한다면, 접합은 대립물과 상관없이 여러 대상들이 우발적으로 맺게 되는 결합이며, 다시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는 가변적인 관계이다.

  접합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접합에 의해 결합된 요소들은 접합에 의해 정체성의 변화가 온다는 점이다. 입과 입이 접합되면 입은 사랑기계의 정체성을 띠게 된다. 입과 음식이 접합되면 입은 영양기계의 정체성을 띠게 된다. 입과 말이 접합되면 입은 언어기계가 된다. 즉 접합은 입의 정체성의 변화를 초래한다. 노동운동이 페미니즘 운동과 접합되면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성격을 벗어나 모든 사회구성원들 특히 소수자들의 평등과 해방을 추구하는 시민적 보편성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접합에 실패한 미국의 백인노동자들이 인종주의의 틀에 갇혀 트럼프의 강력한지지 세력이 되고 있음을 상기하자.)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이 생태운동과 접합되면 생산력 지상주의와 물신성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보편적 윤리성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노동계급이 나치즘과 접합되면 부르주아에 대한 적대성을 상실하고 인종주의와 국가주의의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세력이나 사회운동의 접합은 자기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공동의 이해를 위해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동맹과는 분명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많은 진보정치세력들의 강령에서 매우 긴 가치들의 목록을 볼 수 있다. 노동을 중심으로 평화, 생태, 페미니즘 등등. 강령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망라되어 있지만 각각의 가치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고립된 항목들의 나열인 경우가 많으며, 중요성에 따라 위계화 되어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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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접합은 어떻게 발생하는 걸까? 예를 들어 노동계급과 나치즘의 접합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시각으로 보면 착취는 매 순간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가들과 항상적인 계급적 적대 상태에 있어야 한다. 나치즘이 자본과 노동에서 벗어나 그 위에 군림하는 허위적 보편성을 내세웠다할지라도 나치즘은 자본편향적이며 따라서 노동자들의 객관적 이해에 조응할 수 없다. 따라서 경제적 시각으로만 보았을 때, 노동자들이 나치즘과 접합된 것은 오로지 기만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나치의 기만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나치즘과 노동계급의 결합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기만이 문제라면 폭로로 충분할 수 있지만 현실 정치에서 기만에 대한 폭로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난점을 돌파하기 위해 저자들은 접합이 현실화될 수 있는 조건으로 사회적인 것의 담론성을 제시한다. 사회적인 사건, 사회적 관계들, 사회적 정체성 등은 항상 담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담론은 일정한 해석, 의미, 가치를 생성하는 이야기들의 묶음이다. 인간은 어떤 사회현상을 접하거나 사회적 관계에 들어설 때 현실 그 자체를 날 것으로 접촉할 수 없으며, 항상 담론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과 접촉한다. 그런데 이 때 담론은 개인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인 차원에서 형성되고 유통된다. 사회적 현실(실재)보다 담론은 매우 유동적이며, 의미는 쉽게 고정화되지 않고, 과잉화되기고 한다. 이렇듯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사회적인 것의 담론성에 의해 접합이 가능해진다.

  또 하나 지적해야할 지점은 주체의 위치 자체가 담론의 분산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나치즘 하의 독일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노동자인 동시에, 게르만족의 백인 남성이고, 1차 대전 이후 주변 국가들로부터 핍박받는 독일국민이고, 가정에서는 가부장이며 등등 다양한 담론으로부터 규정받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 때 어떤 정체성도 미리 선험적으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다.(맑시즘은 경제적 생산관계에서의 위치를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담론들이 서로 경합하고 영향을 미치고, 접합되는 복잡한 과정이 존재할 뿐이며, 단지 일시적으로 누빔점이 형성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담론의 질서(즉 의미의 생성 구조)를 구성한다. 즉 나치 지배 하에서는 인종주의적 담론이 누빔점의 역할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나치즘과 노동계급의 접합은 단순한 기만의 산물이 아니며, 따라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적 실천을 통한 새로운 접합이 필요한 것이다.

 

  중세까지는 유럽의 경우 신으로부터 부여되었다고 생각하는 강력하고 폐쇄적인 사회적 질서가 존재했고, 따라서 사회적 정체성의 유동성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고정된 사회적 정체성은 해체되고 개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유동적인 담론의 물결 속에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근대 정치의 기본적인 조건이다.(반면에 맑스주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착취로 인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적대가 정치의 기본조건이다.)

  저자들이 접합과 담론성을 자신들의 정치 이론에 도입하는 실천적 의미는 명확하다. 기존의 좌파정치의 수동성과 소극성에 대한 비판을 위한 것이다. 혁명적 좌파는 계급적 적대의 근본성을 주장하면서 계급적 갈등이 필연적으로 고양될 것이며 따라서 혁명적 고양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대기주의적 모습을 자주 노출하였다. 반면에 개량적 좌파(사민주의 세력)는 유럽에서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해를 소극적으로 방어하는(이른바 복지주의)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 역시 계급적 이해를 정치와 사회적 차원과 분리된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해로 제한시켰으며, 노동자 대중을 정치적-지적-윤리적 헤게모니 세력으로 조직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담론을 매개로 접합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지배계급이었다. 지배세력들이 민족(국가) 공동체의 신화와 경쟁력 담론의 결합, 자유-시장-효율성 담론의 접합,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와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필연성 담론 등을 내세워 신자유주의 공세를 펼쳤을 때, 좌파 정치세력들은 세계적 차원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담론성에 기초한 접합적인 정치적 실천에 대한 이해와 적극성이 부족한 좌파 정치의 필연적이 귀결이었다.

 

  담론성에 기초한 접합적 실천은 분명이 정치적 능동성과 유연성을 강화하는 장점이 존재하며, 특히 지배세력들이 피지배세력을 포섭하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준다. 하지만 저자들은 사회적인 것의 담론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에게 사회적 실재는 칸트적 의미의 물자체에 불과하다. 그것은 접근 불가능하며 그것의 효과는 오로지 담론의 차원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된 특징)

  하지만 이런 이해는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담론의 부침을 추적해보자. 사실 신자유주의 담론이 출현한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하이예크 등은 이미 2차 대전 중에 국가 통제 중심의 전시 자본주의가 확대되고, 종전 이후에도 확대된 국가의 역할을 중심으로 하는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이 지속되자 이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후 장기 호황이 지속되면서 신자유주의 논리는 확산성을 지닐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전후 장기호황이 종식되고 자본축적의 위기가 심화되자, 신자유주의적인 담론이 기존의 케인스주의에 대한 공격과 대안의 논리로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헤게모니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도 2008년 세계적인 금융공황이다. 금융공황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약속했던 효율성과 경쟁력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과 삶의 불안정성만 가중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신자유주의 담론의 부상과 이를 매개로 한 다양한 사회-정치적 접합은 결코 신자유주의 담론과 케인스주의 담론의 경합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축적 운동의 변화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술과 경영혁신의 효과가 소진되고, 장기 호황 속에서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과잉축적 등이 맞물리면서 자본축적 운동의 위기가 발생하는 객관적 조건 속에 신자유주의 담론이 부상하였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담론과 경합 속에서 신자유주의 담론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인한 자본축적 위기와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신자유주의 담론의 헤게모니적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경제적 조건이 담론들과 정치적 실천을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자본축적의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부상으로 연결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정한 정정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것(사회적 관계, 정체성, 사건 등)은 사회적 실재 (사회구조 특히 경제의 운동과 변화들)와 담론성에 기초한 접합적인 실천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우리는 자본의 축적 운동(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 과정 속에서의 모순들, 착취와 수탈 형태들)을 중심으로 사회 현실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추적해야 한다. 동시에 지배적인 담론들과 이에 기초한 정치적 접합들의 지형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실천적 좌표를 설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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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등가

  부르주아 사회학의 주류 중에 하나인 기능주의는 사회를 완전히 폐쇄되고 봉합된 닫힌 체계로 이해한다. 그런 사회에서 차이들은 상호 기능적 보완 속에서 통합된 체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완전한 봉합과 차이들의 통합된 체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적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대는 차이들의 안정적인 체계를 끊임없이 흔들고 무너뜨리는 힘이다. 즉 적대는 현존하는 차이들의 체계나 관계들을 부정하는(또는 전복하려는) 흐름들이다. 저자들의 적대에 대한 설명은 역시 담론성과 결합된다. 보통 적대는 착취, 수탈, 억압 등의 객관적 현존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저자들은 적대와 종속을 구분한다. 종속(종속관계는 어떤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결정에 종속되는 것이다.)이 있는 곳에 항상 적대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남녀 간의 종속 관계는 가부장제의 성립 이후 객관적으로 존재해 왔지만 이것이 적대로 발현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중세 시대의 남녀 간의 종속 관계는 오히려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차이, , 사회의 정상적인 질서체계였다. 명령하는 남자와 복종하는 여자의 관계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로 수용되었다. 마찬가지로 교사와 학생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권위적인 교사와 순종적인 학생은 적대적 관계이기는커녕 교육이 가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권력(종속관계에 기초하여 타인의 품행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곳에 저항이 항상 존재한다.’는 푸코의 언명을 인정한다할지라도 이런 저항이 종속관계 그 자체의 종식을 위한(즉 적대적인) 정치적 투쟁의 성격을 띠는 것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적대가 출현하는가? 저자들에 의하면 적대는 종속관계가 일정한 외부적 담론과 접합될 때 발생한다. 이 때 적대를 발생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담론은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담론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된 자유 평등 명제는 모든 인간은 어떤 자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그 사실 자체로 자유와 평등의 권리 즉 인권을 소유하게 된다. 모든 권력의 원천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으로 천명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 담론이 확산되면서 적대의 장소가 증가한다. 자유-평등 명제에 의해 자연적인 것처럼 보였던 종속관계가 적대로 전환되는 것이다. 평등 담론은 정치적 평등에서 성적 평등으로, 경제적 평등으로, 문화적 정체성 간의 평등으로 계속 확대되고, 이에 따라 적대의 장소는 계속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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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혁명을 매개로 적대의 장소는 증식하지만, 민주주의는 적대들을 개별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나 독재정권 시절에는 사회에 산재하는 많은 적대들은 하나의 공통된 적 즉 제국주의나 독재정권을 향하여 연결된다.(저자들은 공동의 적에 대한 대항을 위해 연결되어 있는 주체의 흐름들을 인민이라 칭한다. 나중에 라클라우는 인민주의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반면에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발달한 사회에서는 적대가 발생하는 장소는 늘어나지만 각각의 적대는 쉽게 묶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각각의 적대를 연결해내기 위한 정치적 실천 즉 접합적 실천이 필요하다. 이 때 필요한 접합의 형태가 등가이다. 우리는 맑스의 경제 이론에서 등가의 논리를 접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관계에 들어선 상품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사용가치나 구체적인 유용노동의 성격은 제거되고 오로지 추상적인 사회적 필요노동의 양만이 남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적대들 사이의 등가도 마찬가지이다. , 적대들 사이에서 등가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공동의 적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순수한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 지배 하에 있는 식민지에서는 노동자, 농민, 학생, 여성, 지식인, 민족자본가 등등이 제국주의에 의해 착취와 억압을 받고 있다는 공통성 속에서 쉽게 등가 체계를 형성한다. 물론 구체적인 적대의 내용은 다를 것이다.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자본이나 매판 자본에 의해 잉여가치를 착취를 당하고 나아가서 초과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농민들은 제국주의 지주들, 이들과 결탁한 자국의 지주들의 지대의 수탈과 식민통치 기관의 조세 수탈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학생들은 모욕적인 식민지 교육과 교육기회의 박탈이 가장 커다란 문제일 것이다. 식민지 사회의 여성들은 민족 차별, 사회에서 성차별, 가정에서의 가부장제 의한 억압 등 삼중의 억압으로 신음할 것이다. 지식인들은 사상 탄압과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의 압력에 의해 괴로울 것이다. 이렇듯 적대의 실정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에 대한 대항이라는 공통성 속에서 각각의 실정성은 소거되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부정성의 측면으로 등가 관계가 형성된다.

대개 등가관계는 적대적인 두 계열의 평행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현재 한국사회의 경우 대자본을 정점으로 보수 정치인들, 고위 관료들, 고위 언론인들, 어용 지식인들이 1%의 특권 세력으로 폐쇄적인 카르텔(등가 관계)을 형성하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에 대립하는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학생, 영세자영업자, 실업자, 저항지식인들이 등가사슬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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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이제 마지막 개념인 헤게모니에 대해 논의할 차례이다. 철학적 용어로서 헤게모니는 어떤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역할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헤게모니는 접합의 특수한 형태이다. 헤게모니적 접합은 적대하는 세력들의 현존과 이 세력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경계(즉 등가 사슬)의 불안정 속에서 출현한다. 즉 유동하고 떠다니는 요소들, 세력들, 흐름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할 때 그것들을 대립적인 진영들에 접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만이 어떤 실천을 헤게모니적 실천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형을 형성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과 항상 적대관계에 있는가? 노동자들은 분명히 항상 종속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최근에 노동자들의 분화 현상이 격화되면서 어떤 종류의 노동자인가에 따라 적대성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포섭능력이 약화될 때, 이로 인하여 기존의 체계가 불안정해지고 떠다니는 요소들이 증식할 때, ,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유기적 위기의 정세에서만 적대성의 관계로 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저자들은 노동계급은 이미 항상 준비되는 헤게모니 세력 즉 반자본주의나 반체제의 등가의 사슬을 중심적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선험적인 세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반면에 레닌과 그람시는 그렇게 생각한다.) 헤게모니 세력이 되는 것은 일정한 정세 속에서 그리고 일정한 실천 속에서만 가능하다. 현재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체제 운동에서 조직된 노동자가 헤게모니 세력으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오히려 실업자, 청년들, 불안정 노동자들, 자영업자들 등 다양한 세력들이 헤게모니적 세력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람시에 의하면 체제의 위기가 증가하는 즉 유기적 위기의 시기에는 적대가 증식하고 사회적 정체성의 유동성도 증가하게 되는데, 그는 이런 불안정한 사회세력들과 유동하는 정체성들을 일정한 결절점의 설립을 통해 그리고 경향적인 관계적인 정체성들의 구성을 통해 상대적으로 통일된 사회적-정치적 공간으로 결집시키는 것을 역사적 블록이라 불렀다. 저자들은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을 헤게모니 구성체라 부른다.

  그람시의 진지전은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 등가 사슬을 확장해나가는 동시에 이를 결집시켜 나가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역사적 블록을 확장하고 강화해나가는 것이다. 그람시는 자본주의에 의해 두 개의 분리된 적대적 공간을 미리 설정하는 오류는 있지만 역사적 블록 즉 인민적 정체성(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인민은 등가사슬에 의해 형성된 통일된 주체들이다.)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 구축해가는 것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헤게모니적 요소는 등가의 사슬을 형성하게 해주는 결절점이며, 헤게모니적 주체는 이런 헤게모니적 요소를 통해 주도적으로 둥가의 사슬을 구성해나가는 세력이다.

  역사적 블록을 구성하기 위한 포데모스의 헤게모니 전략은 시사점들이 존재한다. 포데모스는 전통적인 좌우개념을 거부하고 상하개념을 도입한다. 즉 포데모스는 상층 특권 계층이 아닌 모든 하층계층을 대변하는 정치조직이라는 위상을 내세우며, 등가사슬의 경계선의 구축도 특권 상층계급 대 비특권적인 하층계급으로 설정한다. 또한 역사적 블록을 구성하는 접합적 실천도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여 블록 내부의 수평성과 주체들의 참여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헤게모니와 각 부문운동의 자율성과의 관계의 문제가 존재한다. 헤게모니의 강화는 운동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노동운동과 접합되었을 때 더 온전하게 성차별을 폐지하고 여성의 해방적 공간들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헤게모니적 접합은 자율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문운동들이 자신의 과제들을 더 온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나아가며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현재 한국 사회는 그람시의 용어로 유기적 위기로 확실하게 접어들고 있다. 자본의 위기와 통치의 위기가 결합되면서 적대의 장소가 증식하고 있다. 하비에 의하면 자본주의 모순은 잉여가치의 생산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가치의 실현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되면 반자본의 주체들은 매우 광범위하다. 거기에 통치의 문제와 특권 세력들의 횡포의 문제까지 확대해보면 적대의 장소가 더욱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이런 증식하는 적대를 등가사슬로 묶어 낼 수 있는 헤게모니적 실천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연히 역사적 블록도 제대로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유동하는 세력들, 떠다니는 흐름들은 계속 확산되고 있지만 이를 진보적인 지향으로 묶어내는 정치적 실천은 미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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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헤게모니의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 반특권-평등주의인지(1%의 특권세력에 대항하는 99%의 평등주의인지), 반신자유주의-복지인지(케인스주의의 부활인지, 최근에 재미있는 주장인 환수를 통한 복지인지), 반자본주의-사회주의인지, 반박근혜-민주주의인지, 여전히 반제국주의-민족자주인지.... 아니면 이런 다양한 요소들의 접합이 필요한 것인지.

  또한 유동하는 대중들, 세력들, 운동들, 저항들을 결집시켜낼 능동적인 정치적 기획도 거의 부재하다. 헤게모니적 실천에서 헤게모니적 요소를 설정하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실천의 방식을 창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중들의 교통 체계와 대중 역량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대중의 통일적 흐름(즉 인민적 주체 위치)을 창출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의 방식들을 고안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안의 마련도 매우 중요하다. 저자들이 사족처럼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대안의 중요성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적대세력에 대립하는 부정성만으로는 역사적 블록을 구성할 수 없다. 부르주아의 대의정치가 기만적이든, 실제적이든 각종의 대안을 가지고 경합하는 게임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미시적-거시적 대안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들 즉 헤게모니적 결절점의 요소들에 대한 확정, 새로운 접합적 정치적 실천의 방식의 창출 그리고 대안 생산의 기획 등을 통하여 하루빨리 진보적 역사블록을 결성해나가야 한다. 진보적 블록이 제대로 결성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와해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합리적 보수세력 (주로 자유주의 야당으로 대표되는)은 붕괴와 와해를 지연시키는 역할 이상을 할 수 없다.

 

  이 책은 많은 논쟁의 지점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인 정치적 기획을 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실천적으로 포데모스 등을 통해 시사점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일방적인 수용이나 배제의 관점에 설 수 없다.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실천적인 긴급성에 응답하는 동시에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재구성하는데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역사블록 구성의 지지부진함에는 이론적 이유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시대적 흐름들을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힘의 부재가 결국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한 역사적 블록의 구성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새로운 이론적 구성의 핵심에 역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재구성이 놓여 있다



11-사회변혁이론고찰(122~12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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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책 광고] 비고츠키와 발달 교육 file 진보교육 2016.07.04 470
160 [열린 마당] 맑시즘 2016에 초대합니다 file 진보교육 2016.07.04 337
159 [열공] "초짜세미나" 교육운동의 아포리아를 맞보는 시간 file 진보교육 2016.07.04 521
158 [교육혁명 이야기] 교육혁명의 공세적 국면의 도래와 <2016 교육혁명 대장정> file 진보교육 2016.07.04 385
157 [사회변혁이론 고찰] 그람시, 라클라우와 무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위하여' file 진보교육 2016.07.04 655
156 [만평] 情이 그립다 file 진보교육 2016.07.04 274
155 [현장에서] 전임자 해직투쟁기 - 평범한 조합원에서 해직교사로 file 진보교육 2016.07.04 395
154 [현장에서] 학교비정규직으로 살아가기 - 비정규직 차별 없는 평등한 학교, 교육노동자들이 함께 만들어가자 file 진보교육 2016.07.04 779
153 [현장에서] 기간제교사로 살아가기 - 기간제 교사임을 밝히지 마라? file 진보교육 2016.07.04 1342
152 [담론과 문화] 윤주의 육아일기 - #24. 아픈 아이를 돌보며. file 진보교육 2016.07.04 851
151 [담론과 문화] 타라의 문화비평 - '마을' 전성시대 file 진보교육 2016.07.04 619
150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몽상록 - 정세교육과 낱말공부 file 진보교육 2016.07.04 973
149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 - 제창이 아니라 합창, 하모니의 에너지! file 진보교육 2016.07.04 671
148 [논단] 비고츠키 현장노트 "경계선 아이" (1) file 진보교육 2016.07.04 839
147 [특집] 2. 교원의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방향 file 진보교육 2016.07.04 543
146 [특집] 1. 전교조운동과 교육노동운동의 전망과 투쟁방향 file 진보교육 2016.07.04 449
145 [권두언] 부당해고를 뚫고 전진하는 전교조, 교육의 미래이다. file 진보교육 2016.07.04 371
144 [서평] 『비고츠키 아동학 강의 Ⅱ - 연령과 위기』 file 진보교육 2016.10.19 730
143 [열공] [리얼 유토피아] file 진보교육 2016.10.19 721
» [사회변혁이론 고찰]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위하여(2) file 진보교육 2016.10.19 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