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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1호 (2016.07.05. 발간)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몽상록

정세교육과 낱말공부


정은교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정세 : 지금 우리는 죽어 있다

 

      그동안 진보적인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신자유주의, 왜 나쁜가?”를 따져 묻는 얘기[담론]를 줄곧 들이팠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개혁언론이 그 얘기를 전파하는 통로가 됐다. 그 덕분에 일반 대중 상당수도 우리 사회[경제], 문제 있다.”는 비판의식을 품게 됐을 것이고, 요새 가습기 살균제 문제니, 강남역 여성혐오 범죄나 구의역 새내기 청년 사망사건이 터질 때마다 항의와 추모의 물결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도 대중이 (그런 비판의식을 토대로 하여) 급진화될 잠재력을 은근히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가 갖고 있는 문제들[모순]을 원론原論으로 짚거나, 단편적으로 치켜드는 것만으로는 사회변화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데 한참 모자란다[무력하다]. 후자의 경우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을 들이대는 데 그치기 십상이요, 전자의 경우는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유인誘因이 미약해서 SNS 상의 추모행동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사스키아 사센이 쓴 책 축출 자본주의지금 이때에 초점을 맞춰서 세계정세의 변화를 포착해 보려고 시도한 저작이다. 그는 남반구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질병/기아로 인한 난민 증가, 북반구의 실업자, 주택압류, 교도소 민영화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생태계[/]까지 두루 묶어서 자본체제가 사람과 자연을 축출해내는 동력이 전방위全方位로 작동하고 있다고 봤다. 그의 축출개념이 과연 남다른[새삼스러운] 것인지는 다소 갸웃거려지지만 케인즈주의 시대만 하더라도 자본체제가 사람들을 노동자로 포괄하려고 하던 데서 지금은 사회로부터 쫓아내는 쪽으로 <사납게> 바뀌었다는 진단만큼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 변화가 정말 사납다면 옷깃을 여미는 우리의 마음도 각별해야하기 때문이다.

 

지금 21세기는 어디로?

 

       그동안 우리의 화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괜찮은 변화냐?”라거나 좀 더 눈을 부릅떠서 자본주의 자체와 사생결단해야 하지 않으냐?”하는 질문 근처를 맴돌았다. 그런데 앞엣 질문은 답이 일찌감치 나와서 대중도 많이들 아는 것이고, 뒤엣 질문은 늘 붙들고 가야 하긴 하지만 당장의 실천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 것이라서 거기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역사책을 읽을 때 내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를테면 함무라비 법전의 역사적 의의가 무엇이었고, 왜 한동안 아시아 문명이 유럽 문명보다 앞섰는데 근현대에 와서는 뒤처졌는지, 따위의 (고답적인) 질문은 신의 눈길로 세상을 봐야 뭐라도 생각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고, 다시 말해 학문을 하는 특권[아카데미]의 자리에서나 어울릴 생각거리다.

      이와 달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한테는 다음 질문이 더 핍진하다. “내 젊어서 세상은 어땠고, 세월이 얼마쯤 흐른 지금 어떻게 달라졌는가? 또 흙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쯤에는 얼마나 달라질까?” 우선 민초民草들은 자기가 겪은 세상만이 생생한 법이니 제 생애 기간의 세상에 대해 탐구의 눈길을 먼저 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게다가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팔뚝질 한번 보태는 것 아니냐.

      그래서 필자는 인류 역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기time20년 전부터 20년 뒤까지로 한정짓자고 권한다. 여지껏의 20년은 우리가 팔팔하게 활동했어야 할 때요, 앞으로의 20년은 제가 벌인 인생을 마감해 가는 때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시절)과 일치해 있는 동안의 세상만이, 실존實存으로서 다가오는 역사만이 우리에게는 중요하거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특히 그래야 할 시기時期.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시절

 

      우리의 눈길을 가까운 과거로 돌려 보자. 20년 전부터, 다시 말해 21세기에 접어들어서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김대중 정권에 의해 전교조가 합법화된 이후의 시절이다. 우리가 전교조[한국 사회 전체로는 민주화] 운동이 이뤄낸 진전에 만족하여 좀 널럴하게 일상日常을 살던 시절에 한국 사회는 IMF 외환위기의 뒤끝을 겪었다[정리해고의 합법화]. 북반구 곳곳에는 서민들이 뛰는 집값만 믿고 빚을 내서 집을 샀다가 하루아침에 살림이 거덜나는 사례들이 무더기로 생겨났다. 그리스와 스페인을 비롯해 상당수 나라에서는 청년들이 변변히 일자리를 찾지 못해 헬그리스, 헬스페인을 자조[저주]하는 잉여들로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뽐내던 나라 미국에서는 인구人口4분의 1이 감옥을 들락날락했다. 미국의 감옥 수감률은 세계 최고인데 그래야만 사회질서가 유지된다는 얘기다. 영국에서 처음 자본주의가 생겨날 때, 강제로 노동자를 만들어내려고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었는데 세상이 그 벌거벗은 자본주의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사실은 최근 미국에서 생겨난 감옥 민영화추세가 딴 나라들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거, 왜 벌이겠는가? 헐값에 노동자를 부려 먹으려고[감옥에서는 ‘(거의) 거저일을 시킬 수 있다], ‘감옥 노동자라는 신종 계층을 만들어낸 것이다.

      남반구 곳곳에서는 난민이 쏟아져 나왔다. 전쟁[내전] 때문에, 질병과 기후 재난[가뭄], 굶주림 때문에! 시리아는 인구의 절반이 나라 안팎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이 사실은 제국주의 열강이 남반구 민중한테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질렀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게 만든다. 작년 9, 세 살 난 아기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터키 바닷가에 떠올랐지만 유럽인들의 동정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선진국 정부와 기업이 21세기 들어 남반구 곳곳의 땅을 작심하여 사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한국 재벌은 마다가스카르의 열대림 일부를 사들였다]. 중남미와 러시아, 라오스와 베트남에서도 영토의 매매가 벌어졌지만 가장 심한 곳이 아프리카다. 팜 야자유를 재배해서 바이오연료를 생산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영토 주권을 훼손하는 짓인데 1980~1990년대에 남반구 국가들이 외채 빚을 빌미로 한 IMF와 세계은행의 간섭으로 주눅이 들어 버렸기 때문에 (영토 매매가) 가능해졌으므로 신식민주의new colonialism’라 불러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신생 국가들 상당수가 열강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갔다[민족주의가 일어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뒷배를 봐준 1960~1970년대에는 그러지 않았다].

      지난 20년은 또 테러리즘의 시대였다. 그것도 예전의 순진한[인간의 얼굴을 한] 테러리즘과 달리, ‘무차별 살상을 특징으로 하는 메가mega 테러리즘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런데 이것의 주범主犯이 누군가?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나 알카에다 따위는 한갓 종범從犯이요, 세계 자본체제[남과 북의 날카로운 균열을 불러낸]야말로 사실상의 주범이다. 그렇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끔찍함이 설명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리비아를 침략한 것이 같은 동전의 뒷면이다. 파리에서 작년 초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벌어졌을 때는 유럽 대중의 눈에 열강列强의 지도자들이야말로 인류의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착한 천사天使들로 비쳤다. 파리 시민들이, 1789년 자유평등 시민혁명의 자랑스런 후손들이 우리 모두 경찰이다! 경찰 만만세!”를 외치는 도착적인perverse 풍경마저 연출됐다.

 

      근래 들어 이상기후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폭염과 가뭄과 홍수의 빈발은 지구온난화를 견고한사실로 만들었다. 지구 육지의 10%가 열파[이상 고온]의 영향을 받고 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극지방[시베리아]의 영구동토층이 최근 들어 차츰 풀려나고 있다. 그 밑에 잠자던 막대한 양의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바다 생태계는 어떠한가. 전 세계 400곳이 (산소가 공급 안 돼 생명체가 자랄 수 없는) 죽음의 바다로 바뀌었다. 전 세계 바닷물이 모여 드는 6곳의 환류 해역은 플라스틱을 비롯해 육지 쓰레기로 죄다 범벅을 이루고 있다. 육지는 멀쩡한가. 사하라 사막의 팽창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전 세계 국가들에게 인권人權을 지도 편달하는 훌륭하신 패권국가 미국은 국토의 3분의 1죽은 땅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렇게 생태계의 위급함이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이르렀는데도 내 죽은 뒤에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알 바가 아닌자본가들은 완강하게 모르쇠. 미국에서는 엄청난 물과 (오염을 초래하는) 화학물질을 퍼붓는 수압파쇄법[프래킹]으로 셰일유[싸구려 석유]를 채취하는 산업이 폭발적으로 커졌다[몇몇 나라에선 그 채취법을 금지했다]. 미국 어느 주는 거기 쏟아 붓는 물이 그 주의 물 사용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하니 막 가자는 나라가 아니냐. 잘 나가는 생수산업 네슬레의 회장께서는 물을 누릴 권리는 인권人權이 아니라고 호기롭게 떠들었단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물도 마시지 마라!”

 

밝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렇게 돼먹지 않은 세상이 앞으로 20년 뒤에는 어떻게 달라질까? 생태계 파괴 추세가 가속 페달을 밟는다. 산업혁명 이후로 지구 온도가 0.8도가 높아졌고, 2050년쯤엔 지금보다 1.2도가 더 높아질 것이란다. 산술급수 아닌 기하급수의 변화다! 지금 지구촌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이 10억 명쯤 있는데 2035~2036년 무렵엔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그 인구가 (대강 어림잡자면) 12~15억쯤으로 늘어날 것이다. 한반도는 (다행스럽게도) 기후 변화의 직격탄을 맞는 지역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민중은 지구온난화의 결과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것 같고, 시베리아든 어디든 딴 지역으로 옮겨가야 간신히 목숨줄을 이을 수 있겠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대부분 농경 정착생활을 해왔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다시 유랑민 처지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실업 문제도 예사롭지 않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일방적으로 꺾어서 호모 사피엔스의 자존심을 구겨 놓았지만 더 주목할 것은 (약한) 인공지능 개발이 완성될 것으로 다들 예상하는 20년 뒤에, 그로 인해 사람 일자리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국의 한 조사연구팀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노동자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다면 그 예측보다야 줄어들겠지만 아무튼 민중을 실업자로 만드는 것이 자본가가 이윤을 회복할 가장 손쉬운 길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세계대공황의 한 복판에 놓여 있지 않은가. 경제통계에서 사라지고 사회정책에서 배제될 사람[=비인간]들이 이런 시절에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고 살 수 있을까?

      딴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급진적인 단체일 리 없는) 국회 예산처가 예언했으니까. 앞으로 (20년도 아니고) 18년 뒤에, 대한민국 정부는 모라토리엄[외채 지불 중단]을 선언할 것이 틀림없단다. 여지껏 국가채무가 쌓이는 추세가 일정했으니 앞으로도 그 추세가 달라질 리 없다. 또 국가의 조세 수입도 일정했으니 그것도 달라질 이유가 없다. 북반구 여러 나라가 그러하듯이 갈수록 줄면 줄었지 늘지 않는다. 그렇다면 2034년의 대한민국 모라토리엄은 기정사실이요, ‘따 놓은 당상이다. 왜 이렇게 미래를 못 박아 단언하는가?

 

      그동안 지구촌에 쏟아져 나온 숱한 영화를 떠올려 보라. 인류가 멸망하거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미래를 그린 것들이 다반사茶飯事가 아니었던가? 탐욕스런 자본 체제를 걷어치우고 칡범과 사슴이 함께 뛰노는그런 부푼 미래를 그린 영화가 있기나 했던가? 현대인들한테 인류 멸망을 떠올리는 상상력은 차고도 넘치지만 사람다운 성숙한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은 (인류의 몸뚱아리에서 지워진) 퇴화된 꼬리처럼 퇴화돼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예언한 대로 되는 거지, !” 사실 모라토리엄의 위험이야 지금부터 증세에 나서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며 어느 정치인이 서슬 퍼런 자본가들 앞에서 감히 증세를 입에 올리겠는가?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증세增稅를 그려볼 상상력마저 말라붙었고 얼마쯤 뒤에는 모라토리엄이 자연필연적인 결과로 찾아올 것이다. 그런 마당에 악당 알파고를 무찌르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미세먼지도 퇴치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수로 지구온난화를 막아내겠는가. 산업화[대량소비 경제]와 인구 증가를 과감하게 통제하지 않고서 환경위기의 극복은커녕 자원 전쟁으로 이어질 나라 간의 생존[살아남기] 경쟁인들 어찌 다스릴 수 있는가.

      예전에는 무슨 위기라는 것이 한두 나라나 지역이 저희끼리만 겪는 것이지[가령 잉카제국이 있었는지/왜 몰락했는지 딴 인류는 전혀 몰랐다], 전 세계적인 게 아니었다. 1929년의 대공황은 범세계Pan-world’의 관형사를 붙일 만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소련이나 아프리카처럼 자본체제와 선을 그었거나 거기에 별로 포섭되지 못한 나라[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된 것이었다. 전 세계가 단일 시장[자본체제]으로의 통합이 마무리된 1990년대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무슨 일이든 전 세계에 그 영향이 곧바로 파급된다. 생태계 위기와 경제공황을 통틀어 전 지구적 위기는 바로 최근 들어 생겨났다. ‘인류라는 낱말 자체가 상상적 허구의 관념으로부터 실제적인 관념으로 바뀌었다. 달라진 시대에 능동적으로 맞서려면 정말로 세계를 내다보는 눈길을 틔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인류 대다수가 그렇게 성숙해 있는가?

 

      지금 나[우리]는 죽었다[죽어 있다]. 20년 뒤, 뚜껑을 예매해 놓고 있을 나는, 그때 되면 국가[사회]가 모라토리엄의 지경에 빠지고, 입에 풀칠할 길이 없는 인생들이 곳곳에서 절망의 몸부림을 칠 것이 틀림없는데 호젓하게 내 몸뚱이를 선산先山에 뉘일 겨를이나 찾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생물학적으로는 그때 사망할 것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지금 벌써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후배[후손]들이 살아갈 길을 최소한이나마 열어주는 것이 선배[선조]의 마땅한 도리이거늘, 그럴 앞길을 낙관하기는커녕 미래에 대한 비관을 못 박고 앉았는 사람이 무슨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산송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내가 무엇이 잘나서 흐뭇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곡성의 어느 불쌍한 젊은이는 제 삶을 중단하는 일조차 민폐를 끼쳤는데 내 죽어 있는 삶은 또 누구한테 민폐가 되고 있을까. 내가 얼마나 비루한[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날마다 되새기지 않고서 어찌 짐승[벌레]에서 사람으로 올라설 수 있을까.

 

가장 풍요롭게 살지만 바닥 모를 위험에 빠진 세대

 

      자라나는 학생들한테 정세교육을 똑바로 시키자. 막연히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 있다고 읊는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란다.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닿아 있지 않은 얘기는 (공책에나 적히지, 제 머릿속에는 적히지 않는) 설익은/한가로운/죽은 관념으로 겉돌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인문사회 교과 수업은 정세교육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최소한이라도) 할 일은 무엇인지일깨워주지 않는 사회공부는 참교육이 아니다. 아니, ‘공부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쿠바의 학생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그런 정세교육을 학교에서 받는데 한국의 교사들은 학생들한테 과연 그런 살아서 맥박이 뛰는 정세교육을 꾸준히 시켜주고 있을까?

      어떤 얘기를 해줘야 할까? 먼저 인류사를 커다란 시각에서 비춰볼 일이다. “역사상 지금의 우리만큼 물질문명을 윤택하게 누린 사람들이 없었다. 소비생활로 치자면 일찌감치 파라다이스를 실현한 것이고,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눈먼 탐욕이다. 지금은 사상누각 위에 쌓아놓은 그 파라다이스가 무너져 내리는 시절이다. 너희는 누리는 것도 많고, 잃을 것도 많은, 갈림길 위에 놓인 세대다. ‘속 빈 강정같은 탈 숙련된 사람들이 양산될 수 있다. 부디 정신 차려라!” 그러고서 환경 위기와 한반도의 전쟁 위기와 대공황의 경제메카니즘을 일깨워줘야 한다. 이것이 다 선조/선배 세대가 잘못한 업보業報라는 자인과 더불어! 학생들 앞에서 선배 세대의 잘못을 먼저 정직하게 뉘우치지[=석고대죄하지] 않는 교사는 참교육 근처에도 갈 수 없다.

      제갈량은 존망지추存亡之秋를 앞둔 자기 나라를 생각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우리는 무슨 실천을 다짐해야 우리 자신부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 낱말 공부에 대한 메모

 

       교사들끼리 방담을 주고받다 보면 아이들의 어휘력 부족을 한탄하는 얘기가 나올 때가 많다. “시험 감독을 하는데, 어떤 애가 말이야, 글쎄, ‘경솔하다가 무슨 뜻인지 물어 보지 않겠어? 아니, 그런 낱말조차 모르면 글을 어떻게 읽으려구...어쩌구저쩌구...” 한국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낱말을 습득했는지, 자세히 조사해본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 돈이 많이 드는 조사[연구]라서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교사들이 살갗으로 느끼는 현실에 비추어 보자면 대체로 빈약할 것 같다고 넘겨짚어도 그리 틀릴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벨기에의 인문학자 페르하에허가 쓴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는가를 들추다가(이 책, 읽어 봄직하다), 그 나라의 교육자들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해 전부터 동료 대학교수들끼리 모여 앉았다 싶으면 학생들의 어휘력 부족을 흉보기 바빴다는 것이다. “이거, ! 대학 신입생들한테 받아쓰기 시험을 보게 하든지 해야지...” 그러니까 어휘력 부족은 학교교육의 실패를 말해주는, 거의 전 세계적인 현상일 거라고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 원인cause을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겠다. 수많은 낱말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현대의 특징과 책을 멀리하게 만드는 디지털 문명의 영향을 비롯해 갖가지 원인이 뒤엉켜 있으리라. 필자는 그 중에 한 가지로, 학교가 낱말 공부에 대한 접근법을 체계[심층]적으로 마련해 놓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싶다.

      아시다시피 중고교 과정은 교과별로 칸막이를 해놓고 있다. 역사 교사는 역사책에 나온 낱말만, 국어 교사는 국어책에 나온 낱말만, 한문 교사는 한문책에 나온 한자만 떠맡으면 된다. 국어/한문 빼놓고 딴 교과에선 낱말 뜻을 (시험에서) 따로 물어 보지도 않는다. 학생들의 낱말 공부전체(!)를 책임지는 교사가 없다. 꽉 막힌 분업 체제다.

 

모든 교사가 낱말공부 신경 써야

 

      예를 들자. 과학 교사는 학생들한테 굳이 /본디/바탕 소의 낱말 풀이를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냥 산소, 탄소, 질소...” 하고 물질의 기본 성분을 가르치고 끝내도 된다. 아니, 진도를 나가느라 바빠서 따로 낱말 공부에 시간을 들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글자가 들어간 낱말을 죄다 찾아보자. “산소/탄소/질소 + 원소/영양소/색소/효소/독소/활력소/엽록소/섬유소 + 형태소/요소/음소 + 소복(을 입다), 소박함/간소함/검소함, (수학의) 소수/복소수/소인수 분해, 소질/소지/소재/소인극/소묘/소립자/기억소자...” ‘는 국어/수학/과학 공부에 두루 연관돼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휘력?’ 하면 일단 국어/한문 교과가 책임지는 것으로 은연중에 떠넘길지 모른다. 하지만 낱말공부만 (국어/한문 시간에) 따로 하는 것은 학생들한테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과학 용어는 과학 시간에, 역사 용어는 역사 시간에 그 학습 내용과 더불어 새겨야 자연스럽다. 그런데 과학/역사 교사들은 엽록소/색소도병마사/도총관의 뜻만 일러주고 끝내지, ‘우두머리 도의 뜻을 따로 새기게 (학생들을) 독려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과학 교사가 과학 용어를, 역사 교사가 역사 용어를 단단히 책임지면 그것으로 족할까? ‘라는 낱말을 과학 교사는 엽록소/색소와 관련해서만, 기술/가정 교사는 영양소와 관련해서만, 국어 교사는 형태소와 관련해서만 뜻풀이를 해준다? 우리는 교과별 칸막이 체제에 너무 길들여져서 내가 맡은 교과만 챙긴다는 의식이 무척 뿌리 깊다. 그런데 바람직한 것은 여러 교과를 통합해내는 수업이 아닌가? “나는 과학 교사이지만 국어도 가르치고, 역사도 가르치겠다.”는 태도로 임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사의 태도가 아닌가? 이미 쿠바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중고교 교사가 모든 교과를 다 가르치는 쪽으로 학교교육의 틀을 바꿔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각 교과는 낱말 공부부터 먼저

 

      국어[한문] 교사라면 다음 낱말을 신경 써서 가르쳐야 한다.


격식 인격/품격/성격/주격/목적격/규격/가격/자격/합격/파격적/체격/격언/승격/격조/결격/적격/엄격함/실격/율격, 격상/격하하다, 격물치지

가락 調어조/음조/성조/곡조/장조/단조/논조/훈계조/진양조/조사기관/기조/조미료/사설시조, 조율/조화/조절/동조하다/강조하다/보조를 맞추다

부릴 使사동사/사역병/하늘의 천사/저승사자/암행어사/사용처/사명감/견당사/수신사/절도사/폭력을 행사하다/기술을 구사하다

마디 주절/종속절/부사절/관절/명절/악절/소절/음절/어절/정절/수절하다, 절개/절약/절제/절전하다, (고려사) 절요

끊을 절벽/절창/절경/절대자/절세미인/절연체, 단절/절명/절교/혼절하다

~하는 바[] 소원/소망/소신/소재지/소행머리/소출이 많다/소용 없다/소관 사항/소생/소산/소견서/소문/소정 양식/소위/소회

말씀 주례사/축사/(연극)대사/사설시조, 사양/사절하다, (국어)사전

과학 교사가 다음 낱말을 떠맡는 게 좋다.

무더기/무리 군집/군서동물/식물군락/군중/군계일학/군상/남양 군도/군혼제/군소 정당/군무를 추다/군웅할거/군산 시청, 인물군/후보군/증후군/학군/직업군/고분군/어군 탐지기/발군의 실력/몽고어군

바뀔 산화/풍화/염화/액화/기화/문화/노화/승화///인간화/세속화/보편화/진화/강화하다/소화제/2산화탄소/정화 작용, 화신化身/화합물/화학/화석

/~발견/발명/발표/발성/발진/발열/발신/발광/발상/발정/발언/발원지/발작/발음/발악/발현/발굴 작업/발병하다/발차/발설하다/발동기

같을 등식/부등식/등거리/등가/8등신/등신불/등고선/열등감/차등 지급/평등/균등

좀먹을 침식/해식 동굴/개기 일식/월식/융식/부식 작용/빙식호/내식성/풍식

물결 만조/간조/적조/풍조/조수/조류/조력 발전/홍조를 띠다/퇴조하다/방조제

바닷말 남조류/녹조류/해조류/홍조/갈조류/패조류

태보 생식세포/포자낭/해외 동포[교포]/포태/폐포/기포/난포

흙 빚을 가소성, 조소과[=조각과 소조를 가르치는 학과], 탄소성

녹을 수용액/용매/용제/용질/지용성/용출/용존산소/용해되다/용식 지형

 

      역사 교사가 떠맡을 낱말이 많다.


우두머리 도병마사, 도읍지/도방, 도성/도시/도심, 도편수/도목수/도매상/하도급, 도총관/도승지, 수도권/천도/환도/항도

정림사지 석탑/탑지/도요지/지대석

맡을/관아 비변사/사간원/사회자/사령관/보안사/사법부/천주교 사제/상사의 명령

도서관 사서/사직 당국/고려의 삼사/사목 서간/사정반/

여럿/열전/열강/열녀전/열외하다, 행렬/항렬/병렬/정렬/직렬/동렬, 1/2,

거울 동의보감/자치통감/귀감이 되다/감정원/시 감상/인감증명/식물도감/통계연감

감식안/정감록/명심보감/동국통감/감별사

헌법/헌장/사헌부/개헌/위헌/제헌절/당헌당규/입헌국가/국헌문란

/다스릴 경세제민/경국대전/경륜/경력/경도와 위도/신경쇠약/경로/경전/월경

염병 면역력/역학 조사/검역/방역/구제역, 역병이 돌다, 홍역을 앓다

다스릴 금위영/진영/병영/경영자/영양분/영업증/운영자/영리단체/민영화/야영장

어지러울 병인양요/신미양요, 소요죄, 자기磁氣 요란

따라 죽을 순장 풍습, 순교자/순국열사/순직자/순애보/순절하다

옮길 천도/좌천되다/변천사/아관 파천/개과천선/천이도

다스릴 섭정/자연의 섭리/포섭하다/섭취하다/섭씨온도/섭생/섭식/섭동론/통섭

들어올릴 4.19 의거/거병하다/거국내각/거수기/거중기/폭거/선거/거론하다

알릴 포고령/반포/배포/선포하다/분포도/포교하다/살포하다/포석/면사포/포대화상

닦을 (마음) 수양/돈오점수/재수생/수신제가/수녀/수능시험/수행승/수도원/수사학

 

      학생들이 낱말공부가 지루하다고 넌더리 내지 않을까? 그렇게 어렵지 않은 낱말은 굳이 필기筆記하라고 시킬 것 없다. 이를테면 앞 전이나 지금 현을 교사가 칠판에 적어 놓고 그 말이 접두사로 쓰이는 낱말을 이것저것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이 몇 개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의 뜻을 머리에 새긴 것으로 봐도 된다. 이렇게 부담을 덜 주고 가볍게 낱말 공부를 시킬 것으로는 다음 낱말들이 있다. 학생들을 잠깐씩 테스트해 보기 바란다.


접두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접미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머리에 별로 입력돼 있지 않은 낱말은 학생들더러 공책에 써가며 새기게 한다. 다음 글자가 들어간 낱말들을 떠올려라.


접두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滿-, -, -, - -, -, -, -, -, -, -, -, -, -, -, -, -, -, -, -.

 

접미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상급 학년에게는 다음과 같이 부수部首마다 묶어서 한자어를 기억하게 한다.


힘 력助功動男勤勸加勞協, ‘칼 도分利刊別制副判刑削劍到初刻割, ‘회초리 복攻改敎敗政效放收敵敬. ‘돌 석硬破岩拓砂砲磁磨. ‘창 과成伐戒戰殘. ‘대나무 죽筆第節算築等. ‘풀 초머리花苦茶草蓮葉菊蘭舊藝落藥菜’. 를 줄인 近遠進退連速通追迷途週還造逃運過迎送. ‘마음 심情忌恥憤怒忙忘悲必性慾惰恨感恐怪想惜愁愼愛恩念惟意忍慈志忠憲愚悔. ‘실 사約線純緣終紙綿紅組網織系係素綱紋編絃縣緖繼續級給累經. ‘물 수()’ 江河泉海洋混洗淸濁淡酒溫渴治演滯減消深洞. ‘사람 인()’ 仁囚借代保例傳傷債依侍. ‘조개/돈 패貧財責負費買賣資. ‘볼 견觀視覺現. ‘수레 차/軍連庫輕轉軟陣運. ‘말씀 언信計誠獄討論訴訓詩說設談譚講課記調謝誤認註證讚請護. ‘손 수投捕拓持擧打揚振指推技招提. ‘불 화炎灰炭熱烈照焦榮營.

 

국어 따로, 영어 따로가 아니다

 

      영어 공부도 살펴보자. 학생들은 흔히 국어 따로, 영어 따로라고 여긴다. 낱말 공부를 덮어놓고 외우는 식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능機能이나 사회社會라는 낱말을 새긴다고 치자. ‘’, ‘의 뜻을 안다고 그 낱말을 온전히 새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술용어의 태반이 수입된 말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일본이 유럽 학문의 용어를 번역할 때 거의 태반을 조어造語 같은 한자말로 옮겼고 이를 한국과 중국이 받아들였다. 機能/社會는 그 이전에는 쓰이지 않던 낱말이므로 유럽말과 연관 지어서 그 말뜻을 새겨야 한다.

      ‘기능은 유럽말로 뭔가? function! 그럼 function은 우리말로 뭔가? 사전을 찾아보면 기능, 구실, 작용, 행사, 집회, 직무, 함수...”로 되어 있다. 적어도 7가지 낱말로 옮겨진다. function이 함축하는 뜻이 매우 많다는 것, 그리고 그 7가지 우리말의 뜻이 서로 비슷하거나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능/구실/작용은 쓰이는 곳이 다를 뿐, 같은 뜻[=하는 일]이고 ‘yx의 함수라는 말도 “xy에게 일을 한다는 뜻이다. 학생들은 function의 뜻을 새기는 것을 단순히 영어 공부라고만 간주할 터인데 7가지 낱말을 견주는 것은 우리말 공부이기도 하다. 학생들한테 이 사실을 일러 줘야 한다.

      ‘사회는 유럽말로 society인데 라틴어 societas에서 나왔다. society는 말[]의 맥락에 따라 사회, 사람들, 친구들, 동아리[모임], 사교(), 협회[조합]...”으로 옮겨진다. societas는 처음에는 친구들이라는 뜻이었다. 학생들더러 이렇게 상세하게 새기라고 주문하기는 어려워도 아무튼 society의 여러 우리말 번역어를 훑은 뒤, “사람들, 모임으로 간추려 새기게 한다. ‘The society of the dead poets’라는 제목의 미국 영화가 있었다. 그때 영화업자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말로 번역해서 퍼뜨렸지만 옳은 번역은 옛 시인들을 기리는 동아리라 하겠다.

      비고츠키는 외국어 교육의 목표의 하나로 우리말을 잘 알려는 것을 꼽았다. 적어도 학술 용어에 관한 한, 유럽말을 모르고서 우리말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적어도 두 가지 뜻으로 읽어야 할 영어를 몇 개 모아 봤다.


account 은행계좌/설명 : bear (아이) 낳다/견디다 : care 돌보다/주의를 기울이다 : express 나타내다/빠르다 : matter 문제/중요하다 : save 구해내다/저축하다 : state 상태/국가/말하다 : side //편들다 : speculative 사변적인/투기적인 :

art 기술/예술 : rule 규칙/지배하다 : cause 원인/대의/원인이 되다/근거 : right 권리/올바르다 : tone 음조/어조/말투/신호 : lord /주님/영주 : mind 마음/사람/걱정하다 : romance 중세의 소설/연애 : orient 동쪽/동양/지향하다 : subject 주체/종속되다 : object 객체/저항하다 : stand 서 있다/지지하다 :

 

다의어를 소화하려면 어원語源 찾기부터

 

      어원語源을 살피면 그 말뜻을 더 깊이 새기게 된다. ‘독재자는 영어로 dictator. ‘독재자는 그저 권세를 혼자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뜻만 읽히지만 dictator는 원래 말하다라는 뜻의 dic(t)에서 나왔다. 오랜 옛날에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 권세의 표현이었음을 새기게 된다. 요새도 권세 있는 놈들이 언론에서 발언권을 독점하고, 무지렁이 민중은 그저 듣고만 있지 않은가. orient동쪽/동양/지향하다는 여러 뜻을 지녔는가? 옛 사람들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경배했다. 유럽의 성당은 다 동쪽을 향하도록 지어졌다. ‘지향하다동쪽으로 뜻이 분립한 것이다. 유전자遺傳子는 유럽말로 gene. 유전자는 물려받은 것에 주목하는 낱말이지만 gene낳는 것을 가리킨다. 한자말과 유럽말을 동시에 알아둬야 그 뜻을 온전히 새긴다. ethics는 관습[습관]이라는 뜻과 윤리/덕성이라는 뜻, 두 가지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사상을 반영한 낱말이다. 그는 좋은 습관을 기른 사람이 덕성이 있다고 봤다.

      우리말과 유럽말을 견주는 것은 인류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지름길이다. 직업은 job, career, occupation, vocation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vocation은 소명召命, 천직天職, 직업으로 옮겨진다. 막스 베버가 캐낸 개신교의 윤리가 그 낱말 속에 들어 있다.

      이렇게 새기다 보니 영어 공부도 무엇에 힘을 쏟아야 할지 깨닫게 된다. 그 우라질 놈의 지긋지긋한 영어 회화, 또는 거룩한(!) 실용 영어에 능통해지는 것? 그거, 공부 얕은 사람도 미국놈과 자꾸 만나면 어렵지 않게 숙달된다. 학생들더러 영어 단어는 3백 개 밖에 모르면서도 회화 솜씨는 끝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수 천 수 만 개의 영어 단어에 능통하고, 그래서 훌륭한 학문을 이뤄낼 사람이 되라고 해야 할까? 전자前者는 기업체에서 당장 즈그덜이 써먹을 영업 사원 양성해내는 데만 도움 되는 것이다. 뛰어난 학자와 기술자를 키워내는 데 도움 되는 공부가 아니다. 영어 교과서도 어원語源 탐구를 통해 인문학 소양을 북돋는 쪽으로 많이 바뀌어야 한다.

 

속담/격언 공부도 틈틈이

 

      속담은 국어 교과에서 잠깐 맛뵈기로 살펴보고 끝낼 때가 많다. 말공부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학업이 뛰어나지 않은) 대다수 중학생한테 그 뜻을 물어보면 시원하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학생들은 국어책에 실린 긴 글들을 읽고서 말뜻 새기기를 쬐끔 연습하는데 그거, 연습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반면에, 속담 공부는 그리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문맥 살피는 연습을 많이 시켜주지 않는가.

      또, 학생들이 그 속담들을 알아듣기는 해도, 자기의 말글살이에서 그것들을 능숙하게 부려 쓰지는 못한다. 이 사실을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신문에 실린 칼럼이나 기사 제목을 보라. 안성맞춤의 속담[격언]을 양념으로 넣는 게, 글맛을 살리는 데 얼마나 요긴한지 (신문을 보면) 대뜸 알 수 있다. 언어 표현력에서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학생들한테 다음 속담의 뜻을 (테스트 삼아) 물어 보라. 그애들 실력을 금세 엿볼 수 있다.


* 바람 불 때, 연 날린다 * 가마 타고 시집가기는 틀렸다

* 굽은 나무가 선산先山 지킨다 * 마디에 옹이 * 말로 온 동네를 겪는다

* 안방에선 시어미 말이 옳고, 부엌에선 며느리 말이 옳다

 

곁다리 하나. 낱말 공부는 아니지만, 짤막한 시의 핵심 구절을 빈 칸으로 만들어 놓고 떠올려 보게 하는 공부도 학생들이 재미있어 한다. 다음 것은 중3이나 고등학생 돼야 얼마쯤이라도 맞출 것이다.

에서 : 내려갈 때 봤다 /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그 ( )

( )의 힘 :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군산놈들밥만먹고똥만싼다! 군산놈들밥만먹고똥만싼다! --- 아침저녁으로 ( )

사람들 사이에 ( )이 있다. ( )에 가고 싶다

 

( ),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군가한테 뜨거운 사람이었던 적 있느냐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우리말로 옮겨 보라.

노래 삼긴 사람 ( )도 하도 할샤 닐러 못다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고 묻길래 / 웃고 ( ) 마음이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 가거니 / 또다른 세상일래 인간人間이 아니로세

( ) : 그거 있지?/ 되게 허무한 거 / 너무 길면 짜증날 때도 있는 거 / 돈은 안

드는데 / 힘은 엄청 드는 거 / 해본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거 / 그래 그거, 너도 해본 거 / - / 답답해

내 귀는 ( ) 껍질 / 바다의 소리를 듣는다

얼굴 하나야 손가락 두 개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 )

 

연습 문제


1. 다음 낱말을 영어와 견줘 가며 그 뜻을 살펴 보라.

물질 물체 사물 물건

목표 목적 대상

주체 주관 주어 주인

권력 폭력

사랑

정의正義 의리義理 윤리

 

2. ‘라는 낱말이 인사를 나누다‘(회사의) 인사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경우, 각각 어떤 뜻인가? 事大主義事人如天은 무슨 뜻인가?

3. 다음 낱말들의 어원이나 속뜻을 알아보라.

family, child, politics, economy, philosophy, culture, psychology, music, democracy, reason, citizen, classic, unit, pharmacy, 어리다, 修身齊家, 國家, , 人民, 君子/小人, 儒家, , , 和而不同,

 

4. 다음 낱말들은 다의어다. 그 낱말이 갖고 있는 여러 뜻을 떠올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파생됐는지 살펴 보라.

age, arm, article, bill, bound, capital, case, charge, company, count, custom, civil, direct, department, end, fair, figure, gift, manner, matter, mean, might, nature, order, ought, party, reflection, term,

4. 다음 낱말은 우리말로 무엇이라 읽는가?

항구오런/강고꾸징 차오시안런/조센징 수쉬에/수가꾸

서후이/시야까이 스여우/세키유 스지에더/세카이데끼

다쉬에성/다이가꾸세이 아이칭/아이죠우 성밍/세이메이

 

5. 학생들한테 각운이 맞는 낱말 찾기를 시켜 보면 몹시 흥미로워한다. 일종의 말놀이를 하면서 낱말의 기억을 북돋우니 一石二鳥인 셈이다. 연습 삼아, 다음의 스펠링으로 끝나는 낱말을 죄다 떠올려 보라. 이것 말고도 말놀이[곧 각운 놀이]를 해볼 거리는 널려 있다.

-ace, -ase, -ose, -ake, -ate, -ain, -aim, -ame, -ail, -all, -are, -ay, -ill, -it, -in, -ine, -ire, -ight, -ink, -ind, -ive, -ose, -one, -ound, -ost, -ear, -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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