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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의 미국생활 적응기

 

그들의 미국,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 떠난 봉사활동

 

한송(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송, 세인트 토마스 섬으로 재해복구 봉사활동 가지 않을래?”

2월의 어느 날, 영어를 가르쳐주시는 은퇴한 경제학 교수 빌의 이메일 한 통.

펜실베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 이하 유펜 Upenn)의 진보 개신교 단체에서 3월초 봄방학 동안 희망자들을 이끌고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 봉사활동을 떠나는데, 나를 추천해주신 것이다. 함께 가는 멤버들은 소속 개신교 단체의 목사들, 유펜과 펜실베니아 주립대 학생들, 그리고 나까지 포함 모두 6명. 이미 그곳에는 재난구호 단체인 올 핸즈 앤 하트(All hands and hearts, AHAH)가 6개월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터라 우리도 그 곳에 합류하여 함께 복구 작업을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참고로 버진아일랜드는 알려진 대로 영국령과 미국령으로 나눠지는데, 조세 피난처로 유명한 곳은 영국령이고, 그 곳도 재해가 심해 AHAH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년 9월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 어마(Irma)와 마리아(Maria)는 카리브 지역 섬들과 미국 본토를 강타했다. 카테고리 5등급, 시속 295km의 강풍을 동반한 어마는 1920년대 이후 이 지역에 찾아온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기록이 되었고,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남겼다. 그리고 2주 뒤, 아직도 어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카테고리 4등급의 허리케인 마리아가 불어 닥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 주민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 전에 미국 본토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허비로 인해 텍사스 지역이 초토화 되었던 상태에서 또 다시 불어 닥친 허리케인에 미국 남동부 지역은 비상상태를 선포하고 주민대피령까지 내리면서 플로리다에서는 항공기 2천여 편의 운항이 취소됐고, 낮에는 물론이고 늦은 밤 까지 대피 차량 행렬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웠다. 마이애미는 말 그대로 유령도시가 되었던 터다.

기록적인 허리케인 이후, 복구 작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허리케인 어마가 휩쓸고 간 세인트 토마스 섬의 주택가, 뉴욕타임스>

 

아니, 그렇게 된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 본토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카리브해의 섬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비롯한 작은 섬 주민들은 아직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재난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는 것이었다. 허리케인이 강타한 직후, 피해복구를 요구하는 재난 사진들과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가 미디어에 올라왔으나, 곧 얼마 되지 않아, 이들 지역은 잊혀졌다. 물론, 재난구호 단체와 관심 있는 시민들은 여전히 펀드기금을 마련하고, 봉사자들을 모아 피해 복구에 힘써왔으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몰랐다. 궁금했다. 빌에게 물었다.

“미국 본토는 우리의 땅이지만, 미국령 땅인 푸에르토리코, 버진아일랜드는 그들의 땅이라 여기는 트럼프를 포함한 미국 주류의 사고방식”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 가는 머나먼 여정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지 벌써 6개월이 지난 3월, 미국 연방정부가 외면한 미국 땅, 버진아일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부터 모였다. 필라델피아에서 한 시간을 운전하여 애틀랜틱 시티 공항까지 갔고, 보딩타임까지 여유있게 도착했다.

애틀랜틱 시티 공항은 정말 귀엽고 작았다. 너무나 작았던 게 문제였나. 해당 항공사 발권데스크가 오직 2개. 그 시간 출발하는 비행기는 여러 대. 사람들은 밀리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오버부킹이었는지, 티켓을 가지고도 비행기를 못 타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시간이 지연되며 항의가 빗발치는 와중에도 항공사 직원들은 느긋하게 발권을 진행했고, 우리 일행의 일부가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게이트 직원은 2분 후에 비행기 출입문이 닫히니 어서 뛰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직 우리 팀 일부는 게이트에 도착을 못한 게 문제라 우리 팀의 리더인 메건이 “항공사의 잘못이다, 이건 아니다, 책임있는 행동을 보여라” 항의하자, 직원은 “우리는 그런 건 모르고, 우리는 제 시간에 비행기를 출발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라며, “늦게 온 일부 손님은 너희만이 아닐 것”이라며 오히려 당당하게 나왔다. 결국 나를 포함한 도착한 일부만 비행기에 탑승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남은 팀원들을 기다렸다. 이번 비행기를 놓치면, 다음 비행기는 이틀 뒤에나 있다는데 어떻게 되는 것인가 머리를 굴리는 찰나, 간발의 차로 모두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다. 가끔, 고객님~하며 우대해 주는 한국 항공사들에 익숙해진 나는, 이런 류의 모습은 참 당황스럽다. 고객들의 갑질도 천박하지만 항공사의 이런 당당함에는 어쩌란 말인가. (참고로 이 항공사는 작은 물 한병도 4달러에 육박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3시간 정도가 지나, 플로리다에 있는 포트 로더데일 공항에 내렸다. 이제 3시간을 기다려 세인트 토마스 섬에 들어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예정이었다. 예정대로라면 4시 30분에 도착하여 6시까지 AHAH가 베이스 캠프로 쓰고 있는 홀리 패밀리 성당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엔 기상악화가 문제였다. 미국 본토는 화창한 날씨인데, 비행기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버진아일랜드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 비행기 이착륙이 어렵단다. 또 다시 3시간을 기다렸다. 지연 방송이 나오는 동안,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제 야유를 붓기 시작했다. 결국 세인트 토마스, 우리의 숙소에는 밤 9시가 되어 도착했다. 급하게 장소와 시설물 사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씻으러 들어가니, 9시 15분에 소등이 되어 어둠 속에서 나의 침대를 찾아 잠자리에 들었다. 75명이 함께 머무는 성당 3층의 큰 홀은 여러 개의 이층침대와 그 사이로 모기장들과 가방들과 사람들과 그들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얽히고 설킨 모양새였다. 첫날 밤은, 너무 더웠고, 바깥의 차 경적소리와 짖어대는 개들과 울어대는 수탉들 소리가 여러번 나를 깨웠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United States Virgin Islands),

언제부터 그곳은 미국령이 되었을까.

 

<카리브 해에 위치한 버진 아일랜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는 마이애미에서 1770km 남동쪽에 대서양과 카리브해가 만나는 온화한 바다 위에 있다. 이 지역을 형성하는 약 50여 개에 달하는 작은 섬들이나 암초는 세인트 토마스와 세인트 존에 모여 있으며 이 두 섬은 푸에르토리코에서 120km, 그리고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세인트 토마스와 세인트 존은 겨우 3km밖에 안 되는 필스베리(Pillsbury) 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아늑한 섬이다. 멀리 떨어진 큰 섬인 세인트 크로아는 남쪽으로 72km 떨어진 카리브해에 턱하니 자리하고 있으며 크기도 205sq km나 된다. (shoestring.kr에서 발췌)

버진아일랜드 초기 정착민들의 역사는 대략 BC 1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카리브 인디언은 1493년 콜럼부스의 도착과 함께 내몰려졌고, 이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말타 기사단 등이 이곳에 항구적인 정착촌을 세우려고 했으나, 1733년 덴마크가 세인트 크로아, 세인트 토마스, 세인트 존, 이렇게 세 섬을 합쳐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만들었다.

이후 이곳은 전적으로 노예제도와 노예 매매에 의존한 주요 설탕 생산지가 된다. 1797년까지 이 섬 전체 인구인 30,000명중에 25,500명이 노예였다고 한다. 1848년 노예 해방이 이루어진 후 노동력이 비싸지고 가뭄, 허리케인, 미국과 유럽의 사탕무 생산 증가 등이 겹치면서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의 쇠퇴를 몰고 왔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섬들은 카리브해 지역과 파나마 운하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 있어 중요해졌고 1917년 미국은 2500만불 상당의 금을 내고서 이곳을 매입했다. 1970년에는 자치가 인정되었고 오늘날은 미국의 미합병 준주로 남아있다.

이 곳 주민들은 다른 미국령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지역 선거를 치르기 위한 주민투표권은 있으나 미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은 없고, 연방상원 선거도 치루지 않아 주민들의 현안을 대변할 연방상원의원이 배출될 수도 없다고 한다.

사실, 봉사활동을 가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우리가 머무는 홀리 패밀리 성당의 3층 측면에 햇살이 머물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계단은 아침식사 장소로 인기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만난 장기 자원봉사자 스티브가 말해줬다.

“이 곳은 주민의 의견여부는 물어보지 않은 채, 미국 정부가 사 버렸다. 그리곤 미국령이 되었다”라고. 슬픔의 역사다.

 

 

재해가 지나간 삶의 현장으로 가다

 

<베이스 캠프 입구> <일하러 가기 전, 기다리는 작업부츠들>

첫날밤이 지나고, 오늘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 온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오리엔테이션이 이루어졌다.

간단한 자기 소개가 끝나고, 현지 상황 설명부터 시작이 되었다.

작년의 거대한 허리케인으로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만 51,000명을 포함한 3개의 섬 지역 주민 100,000명, 즉 100%가 피해를 입었단다. 현재도 음식, 물, 가스, 통신, 교통 및 전기를 비롯한 기본 시설물들이 복구가 덜 되었고, 대부분의 큰 도로들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로만 복구된 상태다. 아직도 일부 지역은 고립이 되어 생활이 불편하며, 병원도 큰 피해를 입고 현재는 제한적으로 의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프리젠테이션 설명이 사진과 함께 진행이 되었다. 앞으로 우리가 할 활동은 현지 피해 가구들을 찾아가 집 주인들과 상의하여 부서진 집안과 집밖 곳곳을 치우고 정리하고 필요하면 소독까지 하는 일이란다.

하루 일과는 이렇다.

6시 30분 기상,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각자 싸고, 8시에 작업장으로 떠나서 그 곳에서 오후 4시까지 작업, 돌아와 5시에는 전체 모임을 갖고, 이후 저녁 식사, 그리고 9시 15분 3층 생활관 소등. 물론 2층엔 함께 이야기하고,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보드게임도 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은 늦게까지 가능하나, 대부분 11시 무렵이면 노곤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모두들 잠자리에 든다. 주변 치안이 안정적이지 않아 오후 6시 30분이면 숙소에 들어와야 하고, 그 시간 이후 외출할 경우엔 스태프에게 하루 전 통보하고, 지정된 택시기사를 호출하여야 하며 9시 이후엔 통금이라는 규칙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했다.

오리엔테이션 후, 각각의 팀들과 작업내용이 적힌 보드를 확인하고, 팀 리더들의 간단한 브리핑 후, 짐을 싣고 작업장으로 향하는 봉고차에 올라탔다.

아, 가는 길은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섬의 왼쪽 끝에 자리잡은 우리가 작업할 곳은 데이지와 찰스,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다. 섬의 해안도로를 따라 30여분을 가는데, 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가 그저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평균 기온이 28도인 이 곳은 ‘미국의 천국’이라며 지상낙원이라 불린다던데 과연 그 말이 과장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교차하며, 한 눈에 산꼭대기와 해안가가 보이는 경사로 사이사이로 보이는 부서진 집들과 건물들, 쓰레기 더미가 된 공터들, 방치된 부서진 차들로 이어진 허리케인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은퇴한 대학 교수였다는 데이지와 찰스 부부는 너무나 다정하고 위트가 넘쳤고, 그들의 집은 아름다웠으나, 곳곳이 침수된 흔적으로 천정과 가구들은 부식되어 들뜨고, 곰팡이와 벌레들로 처참했다. 우리 팀은 다시 3개 팀으로 나눠져 방 3개의 천정과 벽면들을 부수고, 싱크대와 욕실의 캐비넷, 벽장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섭씨 27도인 실내에서 안전모와 보호안경, 마스크를 낀 상태에서의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벽을 걷어낼 때 나오는 분진들로 눈은 따갑고 흐르는 땀에 눈 뜨기조차 어려웠다. 전동 드릴과 해머로 내려치는 아수라장 속에 오후 4시까지 작업은 계속 되었다. 중간 중간 물을 마시는 휴식과 점심 시간에 그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해변 풍광을 바라보는 것이 위안이었다.

<천정과 벽 해체 작업>

작업 후, 오후 5시 전체 모임이 진행되었다. 각팀 별로 오늘의 작업과 느낌 등을 돌아가며 이야기하고, 진행 스태프들의 공지, 의견, 새로운 봉사자 인사, 떠나가는 봉사자 인사 등 시종일관 유쾌한 가운데 전체 모임이 진행되고, 발언자에 대한 동의 표시로 손가락을 부딪쳐 딸각딸각 소리를 내기도 하고, 손바닥을 보이며 흔들기도 하는 등 즐거웠다. 의견 개진도 활발하고, 경청하며, 서로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긍정적인 에너지에 힘든 하루 끝에도 다시 기운이 나는 시간이었다. 대부분 미국 본토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주를 이뤘고, 영국, 노르웨이에서도 왔고, 나이대도 십대 후반에서 70대 은퇴자들까지 다양했다. 젊은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갭 이어(Gap year)를 가지고 몇 달씩 장기 봉사하는 친구들부터,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방학과 휴가 기간 동안 짧게는 일주일에서 한 달 머물기도 하고, 은퇴자들은 이 곳 뿐만 아니라 도움이 손길이 필요한 이곳저곳을 돌며 봉사활동을 한다고도 했다. 한 달 봉사하러 왔다가 아예 몇 달간 스태프가 되어 봉사활동을 진행하는 친구들도 여러 명이었다.

5시 모임이 끝나기가 바쁘게 일부 봉사자들은 숙소 바로 옆 구멍가게 한켠에 콜라박스를 쌓아 만든 보데가(bodega)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바(bar)로 달려가 6시 30분까지 허락된 숙소 밖에서의 자유시간 동안 동료들과 함께 한 두잔 즐기고 오곤 했다. 저녁 식사 이후엔 각자 책을 읽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요가를 하거나 게임이나 이야기를 하거나, 평화로웠다.

 

<유쾌한 오후 5시 전체 모임>

 

있는 동안 작업은 고됐다. 데이지와 찰스 집 작업 후에, 아네타 집으로 옮겨 작업은 진행됐다. 첫 번째 집과는 달리 그 집은 무척이나 좁았다. 허리케인이 잔인하게 강타한 그 집안 곳곳에 쓰러진 가구들과 부서진 유리장이 그대로 방치된 채, 노부부는 그 곳에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를 톱으로 잘라 해체하는 작업부터 널브러진 가재도구들을 정리하고, 녹슬고 부서진 가전제품들을 폐기처분하고, 부식된 벽면들을 해체하는 것 까지,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게 몸이 힘든 일이었다면,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 동안의 살았던 공간과 함께 했던 많은 역사들과 흔적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또 그것을 마주봐야 하는 이재민들의 모습이었다. 손수 지은 집안 곳곳을 돌며, 애정이 담긴 집 역사를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자라왔던 공간과 얽힌 이야기들과 이제 못 쓰게 버려진 의미 있는 물건들을 보며 어찌 할 바 모르는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나또한 뭔가를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더욱 감정이입이 되었을라나.

마지막 날, 아네타가 “집 떠나 아주 먼 길을 우리를 돕기 위해 여기까지 와 준 여러분의 도움의 손길로 우리는 다시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지쳤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했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손길을 건네 준 여러분에게 신의 은총이 내리길 바랍니다.”라며 모두를 안아주었다.

 

 

All hands and hearts 라는 재난구호 단체(www.allhandsandhearts.org)

 

마지막 날, 떠나는 자의 인사자리에서 나는, 한국에서 온 교사이고, 이 경험을 진보교육이라는 매체에 쓰겠다 했다. 아주 먼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작은 기회가 될 것이라 했고, 봉사자들은 진보적인 독자들이 보는 것이라면 더욱 더 관심을 갖겠다하며 박수로 화답했다.

2004년에 발생한 인도양 쓰나미로 28만명 이상이 사망했던 참극에서부터 시작한 올 핸즈 봉사(All Hands Volunteers) 단체는 그동안 자연재해가 일어난 현장 곳곳에서 자원봉사들과 함께 재난구호를 이끌었다. 그리고 2017년, 해피 하트 펀드(Happy hearts fund)라는 또 다른 단체와 통합하여 지금의 AHAH가 재난구호 단체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쓰나미 이후, 2007년 페루 지진, 2015년 네팔 지진 등 세상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자연재난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이 단체는 그동안 45,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약 289,000일의 시간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약 1,165,000명의 재난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현재도 플로리다, 버진아일랜드, 텍사스, 푸에르토리코, 페루, 네팔 등에서 재해구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힘든 일은 닥칠 수 있는 것이고, 그럴 때 손 내미는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는 기적. 그 힘이 희망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2007년에 네팔에 자원봉사를 보름동안 했던 적이 있다. 당시는 의미있고 그 지역 사회에 가까워지는 여행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네팔의 자원봉사 단체에 지원해서 갔던 것인데, 정말이지 아직도 마음에 남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거창한 자원봉사 전에, 다른 형태의 여행의 모습으로도 자원봉사는 뜻깊고, 또 실제로 갈 수 없다면 작은 액수의 기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기뻐할 수 있는, 그리고 가슴이 뛸 수 있는 그런 일. 이번 6일간의 봉사는 내게, 그런 일이었고, 참 감사한 일이었다.

 

<첫날 작업 후, 집주인 데이지와 함께한 우리팀 자원봉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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