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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담론과 문화> 우리 사회의 노동자를 위한 ‘인사과’
2018.10.27 16:03
한송의 미국생활 적응기
우리 사회의 노동자를 위한 ‘인사과’
한송(진보교육연구소 회원)
미국에 온지 2년
일주일 전에 한국에서 친구가 왔다. 그 친구와 도시 곳곳을 다니면서 다시 여행자의 눈으로 필리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 친구 표현을 빌리자면, 필라델피아는 보물찾기 하는 도시 같다고. 그 친구와 함께, 오래된 도시 속에 구석 구석 숨어있는 멋진 매력들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관광명소가 아닌, 동네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작은 가게, 작은 갤러리, 작은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익숙한 거 같은 이 도시의2주년을 기념했다.
<거리 벽화 feat. 동네 아저씨>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헌 책방>
그러고 보니, 작년 3월부터 시작했던 이민자 대상 영어교실 자원봉사도 이제 무려 1년 반이 지났다. 꾸준히 봉사를 하면서, 다른 봉사자나 정규 교사들과 나름의 인맥이라는 게 쌓여졌다. 그러다 봉사자로 시작했다가 파트타임으로 취직이 된 동료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근로계약서 작성도 없이 일을 시작하는 많은 파트타이머들과 안전규정에 관한 별도의 주의도 없이 바로 위험한 작업현장에 투입되어 목숨을 잃는 우리나라 청년들의 기사들을 접하며, 나의 20대 알바하며 당한 부당한 대우를 비롯해 심지어 정규교사로서 학교현장에서 일을 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이곳에서의 근로계약서 작성과 함께 설명되어지는 직원으로의 노동조건과 권리가 특별한 건 아닌데도, 그게 나의 한국에서의 첫 번째 취업과 비교하자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첫 발령은 98년
모두 6학급, 병설유치원까지 7학급, 전체 학생수는 70여명의 지방의 단촐한 시골학교였다. 1학년 담임을 맡았다. 담임도 초짜, 아이들도 초짜, 9명 아이들을 데리고 첫 해를 참 즐겁게 보냈다. 아이들과는 참 즐거웠다. 그러나, 학교안에서 교직원으로서의 삶은 행복하진 않았다.
가르치는 일보다 행정업무가 더 많았던 소규모 학교 상황은 둘째 치고, 여교사였기 때문에, 가장 나이어린 막내 교사였기 때문에 받았던 부당한 지시가 어찌나 많았던지, 교사로서 여러모로 회의가 들었던 시기였다. 아침에 출근과 동시에 커피 심부름, 시도 때도 없이 교무실로 호출하여 잡다한 보조업무를 시켰고, 교장 출장 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출장비(?)를 드리자드니, 기초학습지도 후 나온 수당의 일부를 교장께 드려라, 급식실에서의 회식 후엔 설거지를, 회식 후 뒷풀이 땐 교장보다 먼저 절대 자리를 떠나지 말 것과 직원여행 때는 교장의 이부자리를 담당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들이 당연한 듯 내려왔다. 대부분, 이러려고 교사된 거 아닙니다 라고 대답한 나는 어린게 싸가지 없는 교사라 찍혔고, 이런 답답함을 선배교사들에게 호소를 하면, 당신 젊은 시절엔 더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나는 다행히 1년 만에 그 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학교로 이동한 후에도 이러한 지시는 대동소이했고, 나의 반응도 대동소이했고, 얼마 없던 여교사들 모아 회식 후 설거지 거부를 조직해내자 교장실로 불려가 아버지뻘 되는 당신들에게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는 소릴 들었다.부당한 업무거부가 설거지 거부라니, 참 씁쓸한 일이었다.
3년차 되던 해, 오지를 돌며 쌓은 점수로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교장이 되어서 무서울 게 없다는 새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교무실에 커피 자판기를 놨고, 그 이후로는 커피 실랑이가 사라졌다. 교장에게 상납(?)하는 돈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선언을 하고, 급식실 회식도 지양하고, 교육청에서 오는 쓸데없는 공문에는 교사는 수업만 신경 쓰라며, 오히려 장학사들을 혼내던 그 분이 오시니 학교 분위기가 순식간에 많이 바뀌었다.학교가 잠시 즐거운 곳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를 옮기고는, 교장, 교감 한마디에 바짝 엎드리는 분위기로 복귀했다. 법에 따라 교육을 한다면서도 관리자의 권력이 막강하여 반기를 드는 순간 교장실 호출에, 반말로 하는 인신공격에, 많이 울고, 그러면서도 함께 하는 동료교사가 있어서 또 웃고 그랬다. 전교조 합법화 바람을 타고 당시 분회모임을 하면 조합원이 한 교실에 꽉 찼던 학교였고 당시 네이스 투쟁은 가열차게 잘 하던 분회였어도, 이런 분회 대 관리자 싸움은 정말 힘들었다. 사실 그 때는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행위에 대해 제도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학교는 여전히 불편하고 모순투성이였지만, 전교조 선생님들과 함께 많은 활동들을 해 나가며 변화도 느끼고,무엇보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참 좋았으나, 늘 마음 한 구석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해서, 나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하고 런던으로 떠나기로 했다.
어학연수라 처음 계획할 땐 유학휴직으로 가기로 했으나, 막상 휴직원을 제출해야 할 시기가 되자 장학사는 규정이 바뀌어 이제 어학연수로는 휴직 사유가 안 되니, 갈 거면 사직하고 가라고 했다. 하루를 꼬박 고민하고, 사직하기로 했다. 마침, 최악의 관리자와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사직서를 제출할 때 “당신같은 관리자는 젊은 교사들의 열정과 의지를 꺾고, 학교 현장을 비민주적으로 만드는 최악의 존재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한마디와 함께 사직서를 면상에 날려버릴테다, 각오를 하고 집에서 거울보며 멘트 연습도 했다. 그러나 사직서 제출 당일, 나는 교육청 출장이었고, 출장 중에 교감이 오늘 안으로 사직서 결재가 되어야 한다며 급히 학교로 호출을 했고, 그 날, 사직서를 쓰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워 교감에게 이렇게 하는 거 맞냐 물어보다 엉겹결에 결재가 나버렸다는 흑역사가 있다.
그렇게 런던으로 떠났다
런던생활 3개월이 지나 학생비자로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하는 파트타임 일을 구했다. 프레따망제(Pret a Manger, 프렛)라고 하는 영국의 커피, 샌드위치 체인점인데, 당시 알바계에서는 꿈의 직장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노동자로서, 직원으로서 존중받는 환경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 매장은 런던에서 유명한 하이드 파크(Hyde Park) 바로 앞에 위치하고, 런던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큰 도로 옥스퍼드 스트릿(Oxford Street)이 시작되는 마블아치(Marble Arch)에 있어서 규모가 상당히 큰 지점이었다.수많은 관광객과 런던 시민들이 오가는 곳이라, 아침 출근 시간이면 주문하는 손님들 줄이 계산대 수대로 바깥 출입구까지 이어지곤 했다.
<근무했던 매장> <근무 시작 전 동료들과 함께>
취업과 동시에 근무규정과 복지혜택에 관한 안내를 받았다.
일주일에 20시간 근무하는 직원으로서 쓸 수 있는 병가 일수와 유급휴가, 직원 교육 프로그램, 보너스 규정, 근무 안전수칙, 임금노동자로서 세금납부를 위한 소셜넘버 인터뷰 예약까지 회사에서 준비해주었다. 또한 근무태만(대개 출근 시간 엄수)으로 3번 경고 후에는 해고할 수 있다는 규정도 야무지게 교육받았다. 영국이 물가가 비싸긴 했어도 임금도 좋았다. 2004년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시급이 5.10 파운드. 한화로는 7-8천원 정도. 그리고 트레이닝을 받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시급은 점점 더 올랐고, 보너스도 자주 받았다. 임금은 바로 통장으로 입금되었고, 세금내역과 함께 명세서는 우편으로 받았다.
그 곳도 한 달에 한번씩 전직원 회의를 했다. 2004년 당시만 해도 오후 6시면 매장 문을 닫는 곳이라, 영업이 끝나고 텅빈 매장에 직원들은 널브러져 앉아 회의에 참가했다. 본사에서 나오는 지시사항도 있지만, 대개는 직원들의 고충 해결이 대부분이었고, 발언은 자유로웠다. 매니저는 직원들의 고충사항을 귀담아 듣고, 그러면 그게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다.
나는 아침 8시부터 정오까지 하루에 4시간을 근무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나갔다. 처음에는 벌려놓은 일을 정리하느라 퇴근시간을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매니저는 내게 와서, 정오까지 칼퇴근하라며, 정리 못한 일은 다음 담당자가 할 일이니, 그냥 두고 가라, 퇴근 시간 이후는 수당을 주지 못하는데 왜 자꾸 일을 계속 하느냐며 오히려 나를 타박했다.
당시 회사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거의가 이민자였다. 알제리 출신의 매니저, 이탈리아 출신의 어시스턴트 매니저, 그리고 레바논,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덴마크,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중국, 가나, 한국에서 온 직원들이었다. 회사는 직원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켰고, 일정정도 성과가 좋으면 매장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근무 중인 전 직원(풀타임, 파트타임)은 커피를 비롯한 음료는 무한대로, 샐러드와 샌드위치 등 무료로 식사를 제공받았다. 직원카드를 만들어, 영국 전체 매장에서 무료제공이 안 되는 품목들에 대해서는50% 할인 혜택을 받게 했으며, 무조건 4시간 근무 후엔 의무적으로 30분 쉬는 시간을 갖고, 쉬는 시간일 때에는 어느 경우에도 업무지시를 하지 않았다. 런던 전체 매장 직원들을 위한 크고 작은 파티를 정기적으로 열어,매장이 달라도, 프렛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뭔지 모를 유대감을 느꼈다. 서로 다른 언어, 문화를 가진 직원들이었지만, 한번도 이런 다름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프렛에서 일하는 자부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직원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가장 인상적인 일은 따로 있었다.
어느 날, 한 영국인 손님이 주문을 받는 직원에게 “영어가 안 되면, 너네 나라로 가라”는 발언을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직원은 모멸감에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갔고, 그 손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매니저가 먼발치서 지켜보다가 무슨 일이냐며 다른 직원들에게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매니저는 지체 없이 식사 중인 그 손님에게 다가가더니, “우리는 당신 같은 인종차별주의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지금 바로 매장을 떠나고, 앞으로 우리 매장에 당신은 출입금지이다.”라고 했다. 그 손님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자리를 떴다. 매니저는 그 직원에게 괜찮냐며 위로를 했고, 이런 일은 언제든지 보고하라고 했다.벌써 14년 전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갑질 손님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과하는 직원들의 기사를 볼 때마다, 갑질하는 회사를 볼 때마다, 나는 런던의 이 매장에서의 근무가 떠오른다. 회사가 ‘가족’같은 직원을 보호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먼 일이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취업한 그 동료에게 파트타이머로서의 근무 환경을 물었다.
평소 함께 일한 교사의 추천을 받고, 이력서를 제출하고, 범죄기록과 아동 성범죄 조회 후 바로 계약서를 체결했는데, 이 인사 관련은 직속 상사와 일대일로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아니라, 이를 담당하는 에이전시와 따로 처리한다. 에이전시는 계약서에 근무조건과 복지혜택을 상세히 기록하여 전자문서로 알려주고, 성희롱과 인종차별 등을 포함한 직장 내 폭력 및 부당한 일과 관련해서 어떠한 경우가 거기에 해당되는지 상세한 예시를 보여주고, 해당일이 발생 시에 상담 받을 에이전시 내 인사과(HR)를 안내하고, 이에 관련한 법적 규정을 첨부한다.이 규정들은 연방정부나 주정부, 필라델피아 시에서 안내된 것으로 이 권리가 침해받을 시 도움 받을 연락처가 함께 제공된다. 병가나 휴가(유급, 무급) 사용과 관련하여 상사는 이유를 묻지 않으며(개인정보는 보호되어야 하므로), 계약서와 규정에 명시된 대로 사용한다.
<필라델피아 시에서 발행한 병가 사용 규정과 모성보호 규정>
<질병 및 가족을 위한 휴직 규정>
물론 우리나라도 이러한 규정들은 버젓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규정이 정부기관을 비롯하여 민간 기업에서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나가 관건이다. 미국의 전체 근무환경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내가 겪은,내 주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환경을 보면, 일단, 합법인 상태로 취업한 경우, 이곳은 명문화된 문서를 기본으로 한다. 서로 계약한 규정이므로 이를 침해받았다 생각되면 회사의 인사과(HR)에 신고하고, 인사과는 규정대로 처리하는 분위기다.
몇 달 전, 필라델피아의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구입 않고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흑인 손님 둘이 경찰에 의해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 스타벅스 매장이 남편 회사와 한 블록 떨어진 곳이어서 남편의 동료들도 자주 가는 곳이었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직장 내에서 대화가 오고간 모양이다. 교묘하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직원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자 직장에서 이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으니 이제 그만 하자고 마무리 한 다음 날, 그 직원은 미국의 일베와 같은 단체에서 나오는 가짜 뉴스들을 직장 내 메신저를 통해 전달했는데, 이를 받은 직원들은 아주 불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충’을 회사 내 인사과에 보고하고 인사과에서 그 일을 처리한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주 단편적인 이유에서 나는 한국에서의 내 직장생활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인사과’는 어디에 있었을까. 직장 내 성희롱을 당했을 때,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았을 때, 조퇴, 연가를 쓰려고 해도 관리자는 이유를 대라고 하며, 된다 안된다를 본인이 결정을 할 때, 장학사의 갑질에 민원을 제기하면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왔을 때, 학부모의 부당한 요구에 관리자는 그들의 편이 되었을 때, 명시된 규정은 관리자의 해석에 따라 학교마다 달리 적용되었을 때. 이 고충을 해결해 주는 우리의 인사과는 어디에 있었나. 고충심사위원회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이는 너무 멀리만 느껴졌다. 상시적으로 제도적으로 그것을 해결해주는 시스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전교조의 교권상담팀이었다. 결국은 개인적으로, 분회에서, 지회에서 같이 대응해 나간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무엇인가
사실 어떻게 결론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노동이, 노동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 수많은 노동자가 어째 마인드는 관리자이고 기업 CEO인 것이 참으로 답답하다. 노동자를 위한 법과 규정이 있다면 이것은 지켜져야 하는 문화, 사회 여기저기에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당연시 되는 문화, 노동자를 위한 인사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전교조의 부당한 법외노조에 대한 취소 요구가 해를 넘기고 이 살인적인 여름 더위를 지나 계절이 지나도록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선생님들과 투쟁하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우리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우리 사회의 ‘인사과’는 진정 어디에 있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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