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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 연가

  정은교(진보교육연구소회원)

 

1. 낡은 자전거 하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의 로마시에 실업자失業者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때. 안토니오가 직업소개소에서 모처럼 일자리를 얻었다. 시내 곳곳에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다. 그러려면 자전거가 있어야 한다. 아내가 궁리 끝에 침대 시트를 죄다 걷어서 전당포에 맡겼다. 그런데 안토니오가 벽보를 붙일 때 곁에 세워둔 자전거를 누가 훔쳐서 달아났다. 어린 아들 브루노, 또 친구들과 함께 그 자전거를 찾으러 로마 곳곳을 애타게 뒤지고 다녔다. 천신만고 끝에 범인을 찾아냈더니 간질을 앓는 가난한 청년이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청년이 간질이 발작해 쓰러지자 그 이웃들이 도리어 안토니오한테 욕을 퍼붓고 덤벼들었다. 빈손으로 돌아오던 안토니오가 원통함을 주체하지 못해 남의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다 붙들렸다. 자전거 주인은 어린 아들 브루노가 가엾어서 안토니오를 용서해 준다. 부자父子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안토니오의 꾸부정한 등 뒤로 애잔한 음악이 깔린다. -영화 ‘자전거 도둑(1948년)’

 

오래 된 신사실주의 영화. 출연자들은 모두 일반인이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을 겹쳐 떠올리게 한다. 한때, 가난한 품팔잇꾼들한테 자전거가 밥줄 곧 생명줄이던 시절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1948년의 이탈리아가 그랬다(하기는 팔다리가 수레 노릇하던 인력거人力車 시절도 있었지).

 

요즘은 자전거가 흐뭇한 소풍(놀이)의 수단이 됐다. 주말에는 청춘남녀가 한강 둔치에서 발랄하게 은륜銀輪을 굴린다. 하지만 지금도 문래동에서는 자전거가 고단한 노동의 도우미다.

가게 앞의 허름한 자전거가 이제나저제나 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쉼없이 내리쬔 햇살에 모든 것이 낡아 있다.

 

 

2. 빵과 장미

  

멕시코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밀입국해 들어온 마야는 언니 로사가 일하는 청소 용역회사에 취직한다. 불법 취업의 반대급부로 중간관리자가 한달치 급료를 가로채간다. 청소부들의 근로조건이 형편없다. 늦게 출근했다고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동료를 밀고하라고 꼬드기는데 이를 거부하면 또 쫓아낸다. 노동운동가 샘이 이 용역회사의 청소부 명단을 훔치러 들어온다. 조직활동의 자료가 필요해서다. 경비원에게 들켜 쫓기는 샘을 마야가 대형 쓰레기통 안에 숨겨준다. 다음날 샘이 마야와 로사의 집에 찾아와 청소부들이 단결해 싸워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들이 일하는 고층 빌딩은 엄청난 연봉을 누리는 변호사와 펀드매니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들이 제복을 입는 까닭은 ‘잘 나가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영화 ‘빵과 장미(2000년)’

 

여기서 ‘장미’는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 그 권리를 얻어내는 싸움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들은 임금인상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마야는 멕시코로 쫓겨난다. 하지만 벅찬 싸움을 벌여낸 사람의 자부심을 한 송이 장미처럼 가슴에 품고 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로스앤젤레스의 히스패닉(스페인계) 청소노동자들이 실제로 벌인 싸움의 기록을 문학으로 윤색한 것이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는 말은 일찍이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옷 만드는 여성노동자들이 처음 외친 구호다. 그러고 한참 뒤 UN이 이 날을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철공소 옆의 카페. 우중충한 산업지대 안에 산뜻한 휴식공간이 둥지를 틀었다. 저녁이 어둑해지면 기름때 묻은 작업복의 노동자가 저 철공소에서 걸어나올 것이다. 그는 (빨간 테두리를 두른) 카페에 성큼성큼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경쾌한 음악을 들을 것이다. 사람은 문화 없이, 장미꽃 아니 핀 세상에서 도무지 살 수 없다.

  

 

3. 두 세계

  

 

.... 헐린 집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키가 작았다. 어머니가 다친 아버지를 업고 골목을 돌아 들어왔다. 아버지 몸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내가 큰 소리로 오빠들을 불렀다. 오빠들이 뛰어나왔다. 우리는 마당에 서서 하늘을 쳐다봤다.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 위에 서서 손을 들어보였다. 어머니가 조각마루 끝에 밥상을 올려놨다. 의사가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울지 마, 영희야.” 큰 오빠가 말했다. “제발 울지 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 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꼭.”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세상은 언제나 두 세계로 나뉘어 있었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더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시커먼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동네, 그 너머에는 깨끗하고 때깔 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의 동네가 따로 있었다. 후자는 전자 덕에 호사를 누리면서도 늘 전자를 손가락질하고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영희’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문래동이 요즘은 ‘예술촌’으로 더 자주 불린다. 하지만 그에 앞서 쇠를 다루는 노동자들이 살았다. 그들의 역사를 알지도 못한 채 예술을 희롱한다면 거기서 나올 것은 산업쓰레기만도 못한 쭉정이들이리라. 거기는 지금도 예술촌이기 앞서, ‘철공소 골목’이다.

1960년대부터 쇠판을 자르고 붙이는 일꾼들이 이곳에 모였다. 값싼 중국 제품이 수입되고부터 내다팔기도, 일꾼을 구하기도 어려워졌지만 아직은 여러 철공소가 버티는 중이다. 난장이 가족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小工人도 나라 살림의 한 몫을 변함없이 떠맡아 왔다. 저녁 햇살이 철공소와 중산층 동네 둘 다 평등하게 덥혀 준다. 헌데 그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울까?

  

4. 피에로의 슬픔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김수영의 ‘봄 밤’

 

어둑해진 도시에서 누군가가 무슨 쇠통 같은 것을 들어 올리고 있다. 그는 활짝 웃고 있지만 실은 힘겨운 노동을 버티는 중이다.

우리 모두는 피에로다. 입으로는 웃지만 눈은 슬픔에 젖은 사람들. 저 나름의 진실을 길어 올리려고 아득바득하며 살아간다. 살갗으로 어둠이 스며든다. 어디선가 밤하늘의 트럼펫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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