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중심을 전복하려는 타자의 언어들

 

산은(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1.

 

201951일 일본의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왕(일본에선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새 연호(年號)레이와(令和)’를 사용한다. 일본의 차기 연호인 레이와(令和)의 출전은 중국 고전이 아니라 일본의 고전 시가집인 만요슈’(万葉集)내일을 향한 희망의 큰 꽃을 피우자는 의미라 한다.

일본의 왕이 바뀌는 사건은 그들만의 관심사일 수 있다. 그러나 에도 막부 시대가 끝난 뒤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새로운 흐름이 이 제도와 함께 했으며, 그들의 지난 150여년의 역사는 지역의 일이 아니라 동아시아인들 전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메이지 시대(明治 : 1867~1912)1889년 일본은 메이지 헌법을 반포하면서 입헌국가로 도약했으며, 1890년에 의회 개설에 의해 천황제 지배체제와 근대법치국가의 틀이 완성되었다. 다이쇼 시대(大正 : 1912~1926)에는 중국 진출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넘어 만주 지역을 넘어 동북아 지역을 침략했으며, 세계1차 대전 중에 강국으로 부상했다. 쇼와 시대(昭和 : 1926~1989)는 만주사변, 독일과 군사동맹, 중일전쟁, 난징 학살사건 등 수많은 전쟁과 사건을 거쳐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45815일 참혹한 원자폭탄의 참상과 함께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리고 다시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 헤이세이(平成 : 1989~ )시대를 거쳐 이제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린다.

부분의 혼란은 언제나 전체와 얽혀 있기 마련이지만, 혹간은 지역적이고 분절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다. 또한 부분의 평화는 전체의 평화로 나아갈 수 있지만, 부분의 평화를 위해 다른 부분이 희생되는 경우를 언제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평화가 전체의 평화로 이어질지, 아니면 새로운 혼란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따져 보아야 한다. 우선 맹목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정녕 일본을 이해하는가. 고정되고 본질화한 상을 만들어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자기만족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나아가 한국 사회는 제대로 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에 가슴 아프고, 박근혜의 탄핵에 환호하는 것이, 혹시 다수자로서 중심으로 굳게 서서 소수자들의 입을 막고, 주변으로만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내부자의 시선, 지배자의 시선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천황제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이루어진 비극을 되풀이 할 수 있다. 이 시기 국적을 일본으로 하고 있는 두 지식인의 글을 읽는다. 일본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두 글은 하나는 일본 사회의 과거를 하나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응시하고 있는 점에서 다르다.

 

2.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 가토 슈이치

 

일본은 전후민주주의 시대라 지칭되는 기존의 질서를 뒤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침략전쟁과 패전, 폐허와 절망이라는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을 돌아보며 일본 사회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 가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가치를 사회 전체에서 실현해 가겠다는 시대. 이때 등장한 일본 전후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하나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그의 저작에서 가려 뽑은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言葉戦車すえて)1968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려 소련군 탱크가 체코의 수도로 진격한 사건에 대한 논평 언어와 탱크를 비롯하여, 1946년에 발표한 격렬한 외침 천황제를 논하다, 일본 문화의 습속을 통찰한 일본 문화의 잡종성, 일본 정치의 교묘한 말 바꾸기수법을 갈파한 교과서 검열의 병리, 헌법 9조를 지키는 모임을 이끌며 만년에 발표한 다시 9까지 일본과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과 발언을 들을 수 있다.

나는 결론짓는다. 천황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그만두어야만 한다. 나는 봉건주의의 암담한 황혼에, 인민과 이성과 평화가 찾아올 아침을 향해 소리친다. 무기여, 천황제여, 인민의 모든 적이여, 잘 가라!”

이는 천황제를 논하다(1946)에서 인용한 것이다. 가토 슈이치는 전시 지도자들, 그들에게 추종한 지식인들 그리고 그러한 체제의 존재양식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의 원인이며, 이를 일본 자본주의의 봉건적 성격과 거기서 유래하는 군국주의적 경향으로 파들어 간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 근대 자본주의의 구조를 전례 없는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철저하게 착취한 빈곤 농민·노동자의 희생으로 파악하고, 여기서 군국주의와 식민지획득 전쟁의 원인을 찾아낸다.

역사의 은폐와 말살로서 말 바꾸기 수법 또한 고발한다. 그것은 항복종전으로, ‘점령진주라 했을 때부터 시작되어 전력자위대, ‘검열검정이라 말한다. 가토 슈이치는 바꿔 말하는 것은 표현의 객관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속여 넘기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것이 대외적으로 문제가 될 때 일본 정부는 쇄국 심리를 작동한다. 쇄국 심리는 국내 사정을 대외 사정에 우선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도 국내용 수법을 그대로 써먹는 것으로 분절화 한다. 국내용 수법은 시치미 떼기 주의와 책임 전가와 일본제 성의라는 세 가지로 분절화 된다. 그는 이러한 언어학적 대책’(인상 조작, 정확히는 말 바꾸기)이 일본 정치권력의 존재양식과 때에 따른 정책적 선택과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역사적 문맥으로 일본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그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가야 한다면, 스스로 타자의 시선으로 일본을 응시한 가토 슈이치의 시선이 일본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데 큰 창이 될 것이다. 자이니치인 서경식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이렇게 추천한다.

인간은 이제 풍전등화다. 하지만 그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이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보편적 요청이며, 그 요청은 우리들 한민족에게도 향해 있다. 가토 슈이치가 남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그것은 동시에 전 세계가 현재와 같은 기세로 점점 더 비인간적 차원으로 전락해 가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인 것이다. 가토 슈이치라는 지적 자산은 인류, 즉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3. 무명의 말들 - 후지이 다케시

 

이 글은 후지이 다케시가 2014년 여름부터 시작해 2017년 겨울까지 3년여 동안 <한겨레>에 연재한 칼럼 44편과 사진집에 실은 해설 1, 문학지에 실은 글 1편을 엮은 것이다. 그의 글이 천착하고 있는 3년여 동안 한국 사회에는 4·16,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메르스 사태, 국정 교과서 논쟁, 최순실 사태,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 메갈 논쟁, 문재인 대통령 당선 등 숱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 변화무쌍한 기간에 후지이 다케시는 계속 낯설고 불편한 글들을 발표했다.

후지이 다케시는 20002월부터 올해 2018년까지 서울에서 살며 여러 연구와 집필, 연대 활동을 하다가 얼마 전 일본으로 떠났다. 한국어로 논문을 쓰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 역사학자이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구실장을 지냈다. 그러나 한국 사회 특히 학벌의 카르텔은 박노자에 이어 후지이 다케시마저 한국을 떠나게 했다.

서문의 첫 문장에는 이 책은 유고집이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이 유고집인 까닭은 글쓴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버리고 새로 이름을 짓기 위해서 무명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주어진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얻는다는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안전하다고 말한다.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것, 질서를 가장한 치안이 안전이라고 말하는 권력자들의 안전과 우리의 안전은 다른 것임을 일깨운다. 그래서 오히려 불편하길 선택하고 흔들리길 선택해야 함을 말한다.

차별과 소외와 혐오와 배제는 지배층의 전략이다. 그는 특정 고유명사, 특정 집단, 특정 문제로 고유화되는 지배자의 전략에 예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곳에 바로 차별과 소외와 혐오와 배제가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싸우고 있는가에서 광장 시위의 주체가 국민으로 호명되는 것의 문제를 지적한다. 실제 광장에 모여 이 사회를 바꾸려고 싸우고 있는 자가 국민뿐인가? 운동이 국민주권의 논리로 추진되는 한 국민이 아닌 사회구성원은 소외된다. 우리 안에도 다양한 경계가 존재하며 거기서 무수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여성,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성적소수자 등등.

말도 편하게 못하겠다를 통해서는 우리 일상속의 폭력과 권력관계를 파헤쳐 보인다. 폭력에 대한 감각의 차이는 폭력을 느끼는 자와 폭력을 느끼지 못하는 자로 선명히 드러난다. 억압된 사람들에겐 말도 편히 못하는 상황이 일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임을 잘 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은 이렇게 억압된 경험에서의 사유로부터 나온다. 메갈로 상징되는 여성들의 폭력적인 언어 사용은 단순히 남성들의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불편한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일상 속에서 불편하게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별금지법과 촛불민주주의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지를 본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이 빠진 이유는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가능성이었다. 사회적 합의에는 반드시 이 과정이 있다. 그들은 합의 형성 과정은 줄여야 하는 거래비용 정도로 간주한다. 대의제 민주제에서는 동일성이 민주주의의 바탕인 것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를 지우는 일이며 촛불민주주의가 보여준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직접민주주의를 무시한 처사이다. 동일성 또는 합의를 손쉽게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것이 차별과 혐오였다.

 

4.

 

춘추 전국시대, 천하에 도()가 사라진 혼란의 시대에 지식인들은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사유했다. 제자백가라고 통칭되는 그들의 사유는 세상에 대한 인식, 인간의 존재, 그리고 정치제도나 경제개혁방안, 사회제도 등에 관한 나름의 방안을 설파했다. 당시의 승리자는 진의 통일을 이끈 법가였으나 이후 중국 통일왕조에서의 승리자는 유가였다. 이름은 다르나 기실 법가든, 유가든 그 중심에는 명()과 위()의 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나라의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 君君臣臣父父子子였다. 정치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부여된 이름이란 그 위계와 역할을 규정하며, 권력과 삶을 배분한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정치며, 도가 사라진 시대에 도를 찾는 방법이다. 이것은 치안이지 정치가 아니다. 이는 현재도 재현된다. ‘학생답게’ ‘교사답게라는 표현은 학생으로 규정을 지어 그 안에 가두려는 질서유지책일 뿐이다. 박근혜에게 한 비난인 대통령답게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명을 버릴 때, 비로소 기존 질서의 전복,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타자의 시선과 언어는 그 타자됨으로 인해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 파란으로 인해 세계는 다르게 인식된다. 동일성의 반복은 권태이거나 지옥에 다름 아니다. 타자가 존재할 수 없도록 하는 동일성의 폭력은 우리의 감옥이다. 그것의 경계는 견고하며, 내부는 균질화된 평면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지배자의 언어뿐이다. 주어진 이름을 반납하고 무명으로 돌아가듯, 우리 또는 국민의 경계도 흔들려야 한다.

 

장자에 널리 알려진 조삼모사라는 우화가 있다. 대다수는 734로 분할하거나, 43으로 분할하더라도 동일한 결과에 이른다는 교환법칙조차 모르는 원숭이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타자에 대한 비웃음에는 이를 알고 있는 자로서의 오만함을 넘어선 배타의 시선이 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3, 4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할하여 던져주는 그 손에 있다. 34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 변화가 아님을 기만임을 이미 알고 있다면, 3 또는 4로 규정당하는 위치를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변화임을, 그것이 이름을 바꾸는 일임을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