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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5호 (2017.07.12. 발간)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몽상록

신학, 아마겟돈의 싸움터

 

정은교_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중딩들한테 하나님에 대해 슬쩍 물어본 적 있다. 그런 것,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성경구절 몇 마디 제법 읊을 줄 아는 녀석도 있다. 후자는 부모 따라 교회에 다니는 녀석이다. 종교와 관련해, 학생들의 앎이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도덕 교과서는 기독교와 불교(와 유학) 교리를 한두 마디 살짝 언급하고 그것으로 땡이다. 학교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사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다. 하지만 국가/학교는 중립을 지키겠다! 그래서 교과서에서 개별 종교들을 자세히 언급하는 것도 되도록 삼가겠다.”

 

 

종교, 가르치는 시늉만 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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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칙이야 시비 걸 일이 아니다. 종교집단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가 현대 정치의 바람직한 모델일 리야! 하지만 그거 하나 신경 쓰느라, 종교 현상들에 관해 우리가 정작 가르쳐야(배워야) 할 넓고 깊은 앎들을 건성으로 방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사회교과서에는 현대 사회에 종교를 둘러싼 분쟁이 많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대목이 나온다. 교과서의 결론은 딴 종교에 대해 관용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게다. 참으로 간단하고 무성의하다. 왜 그런 분쟁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도 (종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찾아야 할 일이지만, 왜 종교인들이 자꾸 독단과 (딴 종교/종파에 대한) 증오에 빠져드는지 그 이유도 자상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학생들이 실속 있는 앎을 얻지, 그저 관용!’만 들이대는 것은 하릴없다. 학교는 종교 바로 알기를 가볍지 않은 지적知的 도전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religio잇다, 결속하다는 뜻인데 실제의 religion은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기 일쑤다. 왜들 그러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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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교과서가 종교를 가벼이 다루는 태도는 근대 사회를 한동안 풍미했던 낙관적인 역사관의 반영으로 보인다. “미신은 저리 가라! 과학이 세상을 다스린다. 인류 역사는 흔들림 없이 진보할 거야. 종교는 차츰 구석으로 찌그러지겠지.” 종교(기독교)의 위세가 머지않아 가라앉을 거라고 맑스와 니체와 프로이트는 내다봤다. 인류는 한동안 계몽주의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중력파를 찾아내고 인공지능나노 기술의 발달을 뽐내는 시대에, “우주를 식민지 삼자고 겁 없이 떠드는 요즘에 종교는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과학의 지혜(가령 진화론의 진리)를 코웃음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여전히 (미국에서) 활개를 치고, 인도에서는 카스트 폐지를 되돌리려는 힌두교 근본주의가 자못 당당하다. 유럽 문명에 줄곧 휘둘린 서아시아 나라들에는 완강한 자기방어(!) 심리로써 이슬람 근본주의가 곳곳에 퍼졌다.

 

근대의 좋았던 것들이 시나브로 퇴색하고 있고, 새로운 봉건(또는 반동)이 여기저기서 꿈틀댄다. ‘나치는 나쁜 놈들이라고 인류 사회에 다 각인된 줄 알았는데 히틀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또 튀어나온다. 현대를 이끌 이념을 어떻게든 다시 잡도리해야 하는데 그 일 가운데 큰 몫이 종교를 옳게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신학, 골동품으로 치부하지 마라

 

대학교 중에 신학대학이 몇 개 있는데 대다수 고교생은 거들떠 보지 않는다. ‘을 둘러싼 관심은 예수쟁이 일부나 저 좋아서 쏟을 일이지, 대다수 학생들한테 권할 공부는 아닌가? ‘이과에 가서 취직 잘 되는 데를 알아보든지, ‘문과에 가더라도 한류韓流 엔터테인먼트 어쩌구... 하는 동네와 결합해서 (과라서 죄)송합니다!’ 신세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인가?

 

신학을 전공으로 삼으라고 권할 것까지야 없어도 누구든 에 관한 기본 공부를 (지금 교육과정에서 베푸는 것보다) 쬐끔은 더 해야 한다. 과학 이론이든 철학 이론이든 그 배후에는 과 관련한 어떤 생각을 전제로 삼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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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뉴턴이 중력이 어떻게작동하는지는 수학으로 밝혔지만 누가 왜 그랬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 때 신이 들어온다. 탁월한 과학자의 말씀인즉슨 우주는 신의 작품!”이랬다. 양자역학이 나오자 아인슈타인의 머리에 쥐가 났다. “마이크로=미시 세계는 신도 알 수 없다구? 에이, 말도 안 돼!”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무슨 숨은 변수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요즘 과학자들 중에 그의 숨은 변수 이론을 수긍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튼 양자역학이 밝혀낸 결과는 그의 신 관념과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와 달리, 데카르트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2 + 3 = 5”가 옳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자문自問하고는 “(그 앎을) 신이 보장해 준다.”고 행복하게 믿었다. 우리도 데카르트처럼 단순해져야 할까? 인문학 쪽을 보자면 (유럽에서) 인간의 법은 결국 그 권위를 신법에 두었다.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대담하게 퇴짜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의 잣대로 세상을 살폈기 때문이다. 해석학도 성서 읽기에서 비롯됐다.

 

필자는 예전에 철학사 책을 몇 번 읽었는데 중세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증명어쩌구 하고 떠든 대목은 바로 건너뛰었다. 사변적인 얘기만 잔뜩 골치 아프게 늘어놔서다. 칸트 선생께서 그딴 거, 다 쓸 데 없다.”고 일갈해 주셨기 때문에 곧장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적어도 그게 왜 쓸 데 없는지는 쬐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사회적 영성이라는 책을 들추다가 공저자 중 한 사람의 이력을 보고는 살짝 놀랐다. 사회학과 신학, 두 가지를 다 전공했다고 적어놔서다. 분과학문 체제를 당연시하는 흔한 통념으로는 이 둘이 전혀 남남이 아닌가. 전에 누가 김홍중이 쓴 책 마음의 사회학을 소개해 줘서 들춰봤을 때도 신선한 느낌을 받았는데(학문의 통합추구), 전자前者의 경우는 다시 신학(=종교에 대한 비판적 검증)이 절실해진 시대를 실감할 수 있어서 신선함 플러스 알파가 있다. “사회학자들아, 여론조사 따위 허접한 통계의 늪에 빠지지 말고 신학(영성)의 감수성도 틔워 봐!” 지금 부활하는 신학은 신은 있어, 임마!”하고 다그치는 존재신론의 신학이 아니다. “왜 온갖 비합리적인 종교가 요즘 창궐하고 있지? 그 작자들의 신 관념은 대관절 어떻게 어그러졌지? 우러를 별빛을 어디서 찾지?” 하고 캐묻는 질문이다. 그 신흥 학문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문학(해석학)과 정신분석학, 정치경제학이 베푸는 앎을 두루 아우르는 접근법이지 저희끼리 울타리를 둘러친 분과학문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 형성의 결정적인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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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얘기부터 해보자. 아시는 분들한테는 구문舊聞이겠지만 이것, 모세가 사람들을 이끌고 사막으로 갔을 때부터 적어두기 시작한 책이 아니다. 기원전 600년 무렵, 유대 왕국이 멸망하고 상당수 사람들(주로 지배층)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 거기서 비로소 구약 성서가 씌여졌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이야기들이야 대체로 사실이겠지만 창세기를 비롯한 앞 대목은 다 픽션이다. ‘설마...’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우직한 크리스찬이 있다면 그거, 문서학자들이 객관적 사실로 밝혀낸 거라고 내지르라. (학자들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그게 우화집이라는 것은 까막눈이 대충 봐서도 대뜸 안다.

 

물론 픽션 투성이라고 해서 성서에 담긴 가치가 죄다 허물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이 놀라운 것은 그 신앙이 국가 없는 백성들 사이에서 싹텄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의 종교는 다들 국가의 뒷배 속에 생겨났다. ‘국가로 결속하자는 사회계약의 산물! 그러니까 국가가 무너지면 그들의 종교도 대뜸 사라진다. 그런데 야훼 사상은 국가라는 보증물도 없이 신을 믿자는 결단이다. 나중에 기독교를 창시한 바울은 로마제국도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호기로운 생각을 펼쳤는데 그 기개는 바빌론 유수幽囚에서 크게 깨달은 600년 전의 유대인들한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2600년 전, 지구촌 딴 곳에선 어떤 사람들이 호연지기를 펼쳤던가? 인도에는 붓다가, 중국에는 제자백가가, 그리스에는 이오니아 학파(와 조금 뒤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백 가지 사상의 꽃을 피웠더랬다.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정신적인 활력이 넘치던 시절의 하나다(견줄 시대는 프랑스혁명의 18~19세기, 세계 사회혁명의 20세기 쯤이겠다). 구약성서의 탄생을 같은 시대, 지구촌 곳곳의 예언자들과 한데 묶어서 읽어야 한다.

 

구약 시편 137편은 이렇게 읊었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압제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흥을 돋우라하는구나. 우리 어진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리리라...“

 

유대인들은 거기, 바빌론 강가에 앉아 망국의 설움에 겨워 울었다. 그리고 눈물 어린 눈으로 자기네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우린()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비뚤어진 삶을 살지 말라고, 권세와 이욕利慾에 눈멀지 말라고 자기들을 꾸짖었던 저항적 예언자들(이사야, 예레미야...)이 저희들 세상에 있었음을 마침내 기억(!)해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지막 보루는 참된 기억이요(‘리멤버는 다시 하나 되기다), 거기서 위대한 사상이 싹터난다.

 

곁가지로 덧붙일 것은, 바빌론 유수幽囚가 아무리 서럽다고 해서, 그들의 국가를 짓누른 바빌로니아 제국이 천하의 몹쓸 압제 국가인 것처럼 흑백 이원론의 통념을 대입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옛 제국들은 19세기 제국주의만큼, 21세기 신제국주의 국가만큼 폭력(군사력)을 앞세워 국제질서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지배집단 사이의 호수(주고받기) 행위를 통해 화평스런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바빌로니아가 얼마 뒤, 포로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너그러이 돌려보낸 것만 봐도 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선악(윤리)의 관념을 들여온 조로아스터교에서 큰 배움을 얻었다. 유일신 사상은 거대 이집트 제국에서 먼저(한때) 잠깐 싹텄으나 그 경우는 로부터의 하나님이 아니라 제국의 국가 종교였다.

 

견줘볼 것 하나는 미국이 독립의 감격을 찬양해온 이야기! 그들은 자기들이 (영국의) 식민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맹렬하게 떠벌였는데 그들이 속국으로서 ()존심이 상했던 것이야 분명하지만 저희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처럼 그렇게 끔찍한 밑바닥 인생을 (영국 치하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물론 자주 국가를 세워 ()존심을 스스로 북돋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일신교와 신의 죽음

 

일신교는 우리 동네 뒷산에는 신령님이 살고 있을 거야...” 따위의 자연스런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라 여기는 것이 신이 아니라, “오직 신만이 신이라는 깨달음이다. (모세가 황금 소를 부쉈듯이) 사람들이 안락하게 살아가려는 태도/심리를 이렇게 흔들어 놔야 낯선 외부, 또는 타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품을 수 있다. 유태교도 한때는 단순한 종교였겠다. 다비드왕 때는 권력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신을 믿었을 터. 히브리민족이 단순한 종교와 더불어 사라져가기 직전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이 생겨났다. “국가 없이 참 국가의 길을 찾아보자.” ‘선민選民이 된다는 것은 혈통 귀속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범주다. 어디서건 신의 법을 따르는 사람! 그런데 신의 법은 고아와 과부, 사회적 약자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저 신을 섬기기만 하는 자는 한갓 우상 숭배자에 불과하다. 참된 종교는 그저 종교이기만 할 수 없다.

 

일신교는 신성과의 싸움을 통해 생겨났다. “저런 신들, 죄다 가짜야!” ‘의심은 무릇 드높은 사상들의 핵심이다. 붓다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하고 선동하지 않았는가. 자기 신자들 안에 고집스럽게 들어 있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종교로 뒷걸음질치려는 경향과 줄곧 싸움을 벌일 때라야 (그런 일신교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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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신교의 비판정신을 철저하게 밀고 갈 때 그 결론은 무신론이 아닐까? 우리는 칸트가 신의 의의를 도덕명령을 부과하는 존재로만 인정했음을 안다. ‘종교로서의 일신교에 거리를 뒀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겠지만) 헤겔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의 핵심을 신의 죽음으로 파악했다고 한다.우리가 절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큰 타자Big Other는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신은 죽었다는 것이여!” 니체나 맑스를 기다릴 것 없이, 독일 관념론 철학이 이미 종교(기독교)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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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신론의 싹은 이미 성서나 토라(유대교 경전)에 들어 있었다. 토라의 심상치 않은 한 대목을 옮긴다. <<랍비들이 세상일을 갑론을박하고 있는데 야훼가 참견하려고 했다. 그러자 랍비들이 퇴짜를 놓기를, “십계명 만들어준 것으로 당신 할 일은 다 끝나지 않았소?” 그 말을 듣고 야훼가 느그덜 말이 맞다고 울며 달아났다.“>>

 

유대교는 이렇게 즉자적으로(=의식하지 않고) ‘신의 죽음을 언뜻 내비친 반면, 기독교는 대자적으로(곧 숙고하여) 그 깨달음을 표현한다. 예수에 앞서 욥이 먼저 깨달았다. <<사탄이 욥의 신앙을 놓고 하나님과 내기를 했다. 욥에게 불행이 닥치자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 그저 겁박하는 말이어서 서로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다. 하나님이 찾아와 욥의 고통에 자상하게 대답하는 대신, 자기의 초월적 권능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냐고 윽박지른다.>>

 

신자들 대부분은 결국 욥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은총을 받은 것만 머리에 새겨 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욥을 설득한답시고 늘어놓는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길 수 없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었다. “왜 신은 자기가 창조한 세상에 이토록 무거운 고통을 떠안기는가?” 그리고 욥은 깨달았다. “신은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 않다. 그저 무능할 뿐이다. 신은 텅 비어 있을 뿐 아무 권능도 없다.” 욥의 진정한 윤리적 위엄은 자기가 겪는 불행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줄기차게 거부한 데 있다.

 

2600년 뒤, 유대인 여성 에티 힐섬이 이 생각을 더 선명하게 밀고 나갔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중에 우리를 불러 해명하라 하겠지요." 그녀는 자기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나치 수용소에 스스로 찾아갔으며 가스실 행을 선고받고 두려워 떠는 이웃 대신에 자청하여 가스실로 들어갔다. 비슷한 무렵 독일 신학자 본회퍼도 신을 도우러 나섰다. 히틀러를 끌어내리는 실천[=암살단 참가]에 나선 그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고 간추렸다. 머리에 쥐가 날 얘기인가? 세상의 도저到底한 진리는 이렇게 역설(파라독스)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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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서를 들춰 보자. “신은 있다. 그리고 전능하다.”고 굳세게 믿는 소박한 신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은 대목을 무심히 건너뛴다. 거기서 예수가 지탱한 믿음은 초월신은 있다(위대하다). 나는 그 옆자리 앉을 예정이지, 어쩌구...”하는 순진한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 아닐까(그랬다면 그것은 웃기는 도착倒錯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어간 것과 동시에 (그들 믿음의 무리들 사이에서) 성부聖父도 죽은 것 아닐까? 얼마 뒤 제자들이 예수의 환영幻影과 맞닥뜨렸다. “너희들 몇몇이 모인 자리이면, 너희들 사이에 사랑이 있을 때면 어디든 거기 내가 있을 거야.” 제자들한테는 예수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는 것이고, 믿는 이들의 모임에 성부聖父가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선명히 알고 있었지 않을까? “초월은 필요 없다. 세상엔 성령(을 품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예수는 초월신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초월신 없이 세상을 버팅길 어떤 신앙으로 다리를 놓아 준 사라지는 매개자가 아니었을까? 물론 주류 교회는 머지않아 구닥다리 초월신앙으로 많이들 복귀했지만 말이다.

 

예수의 무덤 앞의 장면을 더 떠올려 보자. 예수는 자기를 만난 마리아한테 똑 부러지는 부활 증명을 남기지 않았다. 자기에 관한 기억을 사람들이 이어받기를 당부했을 뿐이다. 빈 무덤의 언어는 연약한 언어다. ‘우리가 또렷한 진리를 갖고 있다는 호언장담이 아니라 당신의 기억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애태우며 건네는 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혼자 깨닫는 진리가 아니라 여럿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공유하는, 아직 형체도 없이 머릿속에 웅얼웅얼 맴도는 기억들! 사람 세상에 진리는 그런 모습으로 현존하는 것 아닌가? 세월호(가 사람들한테 남긴 충격) 사건에서도 우리는 얼핏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기억하라. 잊지 마라.”

 


참종교와 가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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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는 이와 같이, 참사람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사상적 유산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여주는 크리스찬들의 모습은 그런 진정성과 한참 먼 것들 투성이였다. 원시기독교의 (종말론의) 열정은 시나브로 사그라들고 얼마 뒤 교회가 국가에,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체제에 포섭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따금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분출돼 나오기는 했다(13세기초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실천 등). 하지만 빛보다 그림자가 더 짙었다. 이른바 신의 섭리는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고(한국 목사들이 열심히 떠든 청부론淸富論 어쩌구...),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美化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에 충만하라. 그 끝이 창대하리라!” 창세기 첫 대목에 고취된 크리스찬들의 교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기독교든 딴 어느 종교든 종교운동들이 (‘빛과 소금되기는커녕) 한가롭게 헛발질하거나 미친 광기를 띠어가는 요즘, 참 신앙과 허튼 신앙을 준별하는 지성이 어느 때보다도 요긴해졌다.

 

이 둘을 가르는 데는 정신분석학의 메스가 필요하다. 사례 하나. 19193.1 운동이 터져 나오자 이완용이 매일신보기고문에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하나님 뜻이라고 언명했다. 이태 전, 중앙일보 문창극도 고매하게 훈시했다. “하나님은 조선 사람들한테 36년간의 시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야 정신 차린댔다!” 앞엣 놈이나 뒤엣 놈이나 도착증倒錯症 환자다.

 

무의식의 저항에 따른 부정否定의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신경증neurosis 환자는 진실을 <억압>하고, 도착증자perversion<부인>하고, 정신병자psychosis<거부>한다. 주전자를 빌렸다가 깨진 주전자를 돌려줄 때, 신경증 환자는 난 니가 요구하는 주전자를 빌린 적 없어요.”하고 제 기억을 억누른다. (물신주의에 빠진) 도착증자는 난 너한테 멀쩡한 것을 돌려줬어.”하고 낯빛도 바꾸지 않고 오리발을 내민다. 상징질서인 큰 타자를 내쫓은 정신병자는 터무니없이 떠든다. “어쨌든 그것은 애시당초 구멍이 나 있었어.”

문창극은 자기 발언이 논란을 빚자 사과는 무슨 사과냐?”하고 콧방귀를 뀌다가 논란이 계속되자 일반인의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고, 오해의 소지가 생겨 유감이라 얼버무리다가 또 태도가 바뀌어 사실을 왜곡한 언론사에 대응하겠다.”고 을러댔다. 몇몇 목사는 어쨌든 (문창극의 생각은) 성경적이었다.”고 두둔했다. 성경 해석권은 즈그덜한테 있다는 식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틀렸다. 그의 말과 반대로, “신이 있어야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은 마법의 지팡이라서 그것을 손에 움켜쥔 자는 무슨 짓을 벌여도 된다. 신이 있다면 가장 끔찍한 테러를 벌여도 스스로 용서되고, 어느 예수쟁이 전직 판사 말마따나 박근혜도 예수가 될 수 있다! 우라질! 야훼쟁이 알라쟁이가 내뱉는 생각이 곧 하나님이 떠올리시는 생각이란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 말씀으로 둔갑시키는 뻔뻔스런 마술 쇼!

 

본래 일신교라는 것은 (다신교의) 거짓 신들에 대한 싸움 곧 비판이다. ‘을 모든 것이 비판받을 준거점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그 준거점의 자리에 야훼쟁이들이 올라타서, 그 자리를 저희가 독차지할 때 사단事端이 일어난다. 자기들은 그 비판에서 면제된 존재인 양 깝죽대는 데서 독단이 빚어진다. 이슬람교 동네에 선교하러 납신다.’고 뽐내는 한국의 일부 야훼쟁이들을 보라. 그러다가 (분격한 무슬림들한테) 총을 맞지 않았는가. 어디 불교도나 무슬림들이 그렇게 교만하던가? 도착증倒錯症의 구석을 내포하고 있는, 그래서 딴 종교를(아니 자기들 빼고 나머지 다를) 관용할 줄 모르는 나르시시트를 가장 많이 보유한 동네가 바로 기독교다. 저희가 미지未知의 신의 위치를 차지했으니 저희가 세상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척 한다. 일신교도가 빗나가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위험한 종자가 된다.

 

 

기독교와 자본주의

 

기독교는 이렇듯 숱하게 허깨비를 쏟아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여 살필 것이 자본주의 논리와의 관계다. 막스 베버가 잘 밝혀 주었듯이, 개신교 곧 칼뱅 사상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도운 사라지는 매개자였다. “깨끗하게 부지런히 부를 쌓으면 하나님이 이뻐하신다!” 그런데 자본주의 자체가 (단순히 경제 하부구조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종교라는 사실까지 더 살펴야 우리의 앎이 더 풍부해진다.

 

자본주의는 종교라고 벤야민이 못박았다. 그것은 주식거래소 등등에서 날마다 의례儀禮와 전례典禮가 거행되는 제의종교다. “(자본)은 영원하다!”는 신앙이 뒷받침되어야 탈없이 굴러가는 축적 체제다. 그 신앙을 대중이 자기 성찰하기 전까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세뇌시키는 관념적 상부구조(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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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낱말 공부 하나. ‘를 라틴어로 debitum이라고 한다. 그런데 debitum으로도 번역된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사람이 (태곳적에) 원죄를 지었다고 단정 짓는데 그게 무엇에서 생겨난 얘길까? 그 옛날에는 빚을 짊어진 사람을 가리켜 죄를 지었다고 단죄했던 것 아닌가? 그 빚을 못 갚으면 심지어 채권자의 노예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원죄를 무슨 추상적인 도덕성의 문제로 볼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는 신용제도에 의해 굴러가고, 빚을 잔뜩 창출해내야 성장이 가능하다. 후기 자본주의에 와서 이 사실이 한결 뚜렷해졌다. “미래 세대야, 폭탄을 너희들한테 돌리마. 너희들 품 안에서 그게 터지든 말든 우리는 이 지금now’만 소비하며 살게!” 요즘 미국의 대학생들이 대부분 빚의 노예가 돼서 대학을 떠나는 것을 보면 자본체제가 어디로 치달을지가 훤히 내다보인다. 만인에게 빚과 죄를 떠안기는 체제! 존재의 개혁이 아닌 존재의 붕괴로 몰고 가는 눈먼 종교가 바로 자본주의 아닌가? 그 체제로부터 탈출을 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세계가 절망의 밑바닥에 다다를 때까지, 신이 최고의 죄인이 될 때까지 그 지옥 같은 삶을 견뎌야 한다.

 

기독교 곧 개신교는 근대, 곧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한 몫 하고(그것을 무척 잘 한 일인 줄 여긴다), 그걸로 이었을까? 그럴 리가! 자본주의 논리는 기독교 사상에 빌붙어서 제 발언권을 점점 움켜쥐더니 어느 때부턴가 기생충이 제 숙주宿主를 잡아먹듯 기독교인들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가지 않았는가?

다음 기도문을 읽어보자.

 

제 몸과 마음의 지배자, 자본을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이윤利潤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나신 신용을 믿사오니 둘 다 자본인 주님한테서 나시고 자본인 주님과 한분이시나이다.”

 

뜬금없는가? 맑스가 쓴 글도 옮긴다.

“...가치는 이제 자기와 사적 관계를 맺는다. 최초의 가치로서의 자기를 잉여가치로서의 자기와 구분짓는다. 이는 성부聖父가 성자聖子로서의 자기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짓는 것과 비슷하다. 부자父子는 둘 다 나이가 같고 실제로 둘이 한 몸이지만 처음 투하된 100원은 10원이라는 잉여가치에 의해 비로소 자본이 되고, 그것이 자본이 되자마자 다시 말해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생겨나고 아들에 의해 아버지가 생겨나자마자 그 둘의 구분은 다시 소멸한다...”

 

2003년 미국이 죄 없는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 미국의 네오콘(극우 지배세력)들은 자기들의 승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떠벌였다. 우리는 홀로코스트와 맞닥뜨린 본회퍼가 놀라서 물었듯이 되물어야 한다. “신이라고 (사람들이) 일컫는 자, 당신은 대관절 누구요? 당신은 지금 화폐신의 아바타로 놀고 있지 않소?”

 

바디우가 갈파했다. “지금 세상은 점점 세계 없음의 공간이 돼간다. 자본주의는 전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세계 없는이데올로기적 상태를 재생산하고, 사람들 대다수는 인식론적 지도를 박탈당한다. 그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상의) 의미를 무너뜨리는사회경제질서다. 오로지 축적하라!’는 눈먼 명령만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는 묻지 말란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공간에는 사회, ‘세계도 없다.” 그래서 현대의 크리스찬들은 갈림길에 서 있다. “당신들은 무턱대고 신이 있다고 우길 셈인가? 당신들이 제 것으로 사유화하려는 (‘존재신론) 신이야말로 적그리스도 아닌가?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가겠는가, 아니면 그와 더불어 가겠는가? 전자는 변혁의 운동이요, 후자는 지배(자들)의 운동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

 

기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페미니즘으로부터 나왔다. 70년 전 보브와르가 샅샅이 성토했다(‘2의 성’). “너희, 여자 몸뚱이는 불결하다며? 여자들은 아무리 해도 남자들보다 열등하다며? ‘여성 해방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짓누를 셈이니?” 50년 전 미국의 신학자 메리 데일리가 바티칸을 견학 갔다가 실존적인 경험을 했다. “멀리 추기경과 주교들의 무리를 봤다. 구석엔 베일 쓰고 검정옷 입은 몇몇 수녀들. 화려한 옷을 입은 교회의 왕자들과 개미떼처럼 벌벌거리며 기어가는 여성들을 견줘 보니 소름이 돋았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라틴어로 문서를 읽었다. 신문기자의 질문을 받은 수녀들은 이런 자리에 동석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수줍게 중얼거리거나 감히 마이크 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녀는 여자를 ‘2등 존재로 낙인찍는 가톨릭교회에 따져 묻는 책을 썼다가 제가 몸담은 대학에서 쫓겨날 뻔했다. 학생들의 응원 덕분에 살았다. 이 무렵부터 유럽과 미국에 68혁명의 바람이 일어났다.

 

크리스찬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아버지!’를 호명해 왔다. 다들 이것을 당연시했지만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라는 꼬리표를 떼고 하나님!’만 부를 수는 없을까?” 뿌리 깊은 가부장주의를 교회에서 걷어치울 길을 찾아 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나름으로 가톨릭 개혁에 애쓴 해방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의 좋았던 면들을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시큰둥했다. “그래요, 예수가 페미니스트였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요? (교회가) 죽었다 깨어나도 아버지라는 꼬리표 없이 하나님만 부를 수는 없는 것을!”

 

메리 데일리는 훨씬 대담한 생각을 끌어냈다. “예수의 진리 사건에 감동받을 구석이 많다지만 결함 있는 우화寓話에 지나지 않는다. 참 신앙이란 결국 참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인데, 왜 꼭 옛날 옛적에서 그 모델을 찾아야 하는가? 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옛날로 돌아가서 지침을 얻으려 하는가? 우리가 내일이나 모레, 앞으로 닥칠 길에서 참사람의 모델을 찾아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당분간은 모델 없이, 북극성 없이 살아가 보자.” 그러고서 그녀는 교회를 떠났다.

 

그녀의 책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에서 제일 인상 깊은 대목은 잔 다르크(1412~1431)에 대한 소개였다. 교회는 그녀를 성인이라고 (뒤늦게) 시성諡聖했지만canonize, 그러기 전에 마녀로 불태워 죽였다. 그것, 가장 끔찍한 처형방식이었다. 마녀로 몰린 결정적인 이유가 남자 옷을 입고 다녔기때문이라나? 전쟁터에서 남자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이야 별것 아닌 일이 그 시대에는 가부장주의에 대한 정면 거부였다. 그 무렵 유럽에는 민중들 사이에 여자도 사람대접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옛 여신 디아나에 대한 숭배로 표현되고 있었단다. 민중은 그 연장선에서 잔 다르크를 가리켜 신이 사람 되어 나타났다고 우러렀다. 교회는 민중 신앙과의 갈등을 덮어 가리기 위해 (교회를 가벼이 여긴) 그녀를 뒤늦게 성인으로 받들어 모셨다. 잔 다르크한테 교회가 들씌운 허튼 면류관을 걷어내라! ‘불타는 마녀로서 그녀의 진정한 성스러움을 경배하라! 세계사 교과서는 마녀 사냥의 부끄러운 역사를 미래 세대한테 숨김없이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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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대기 1 : 첫머리에 바빌로니아가 포로로 붙들려온 유대인들을 풀어줬다.”(부정확하게) 쓴 서술을 바로 잡는다. 유대인 4만 명이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났다. 그런데 그런 관용조치 말고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진취성이 무척 놀랍다. 키루스 1세는 키루스 원통이라 일컫는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다(19세기말에 와서야 발견된 사실). 그 문서는 민족들 간의 형제애를 말했을 뿐아니라 황폐한 주거지에 대해 염려했고(곧 주거 인권), 노예제도를 분명하게 금지했다. 그리스나 로마가 (자기들 인구의 절반 가까이 또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노예를 완전 착취하는 것에 기초하여 문명을 일으킨 사실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요람이었다는 식으로 속 편하게 말하는 것은 유럽제국주의의 색안경을 벗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앞서 말했지만, 어쩌면 유대교보다 조로아스터교가 더 선진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질문도 던져봄 직하다.

 

덧대기 2 : 도착증의 사례 하나.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한 표준적 해설은 라스콜리니코프(분열된 자라는 뜻)가 이른바 나폴레옹적 이념과 러시아적 이념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강한 자한테는 모든 게 허용된다는 생각이고, 후자는 인류에 대해 사심 없이 헌신하자는 메시지란다. 그런데 이런 버전(대립구도)은 둘다 전체주의발상을 깔고 있음을 빠뜨린다. “나는 인류의 도구이므로(러시아이념), 내겐 모든 것이 허용된다(나폴레옹이념).”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착증자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분열 그 자체곧 두 가지 허튼 이념 사이의 거리다. 패러독스가 거기 들어 있다.

 

덧대기 3 : God큰 타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문自問했다. “신이 우리 마음속을 훤히 꿰뚫고 있다면 왜 (신에게) 고백하기가 필요한가?” 그 대답은 모두가 내 스캔들을 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가상 심급인 큰 타자Big Other’가 그것을 알게 되고, 내 비밀은 큰 타자 안에 새겨진다. 그래야 내가 그것을 더 이상 모르는 척 할 수 없다. ‘큰 타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이자 우리를 몰래 조종하는 주인으로서의 큰 타자. 둘은 모른다고 가정된 순수한 가상假象의 대리인! 모든 것을 꿰뚫는 절대적 주체로서의 은 정신병자의 신이다. 라캉의 윤리를 간추리자면 큰 타자에 대한 참조를 포기하라! 그것이 자율적 윤리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신을 믿을지/말지를 둘러싼 내기에서 파스칼은 더 그럴싸한 쪽을 선택했지만(신이 있는지/없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그는 털어놨다), 라캉은 우리더러 더 나쁜 쪽을 선택하자고 한다. 성공한다는 어떤 보장(토대)도 없이 행위(자유)의 심연을 수용하는 쪽을. 그런데 악명 높은 관념론의 선발 주자, 플라톤도 그의 책 파르메니데스에서는 존재(실재)와 일자(하나)의 관계들에 관한 8가지 가정을 살피면서 큰 타자는 없다는 사실을 도출한 바 있다. 그게 우리가 찾던 것임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그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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