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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5호 (2017.07.12. 발간)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

혁명의 배신과 시대의 소음

 

송재혁 전교조 해직교사

 




언어의 반사회성

 

   언어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동물임을 확인시켜준다. 폭력의 언어는 맹수의 이빨과 본질적으로 같다. 멋대로 규정하고 일방적으로 쏴붙이고 주제넘게 훈계하여 상대방의 굴복에서 희열을 느끼는 동물적 쾌락 추구의 수단이다. 언어는 사회성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반사회성을 지닌다.

 

   과거나 지금이나 말하고 쓰는 일은 괴로운 짐이다. 학교 다닐 때 글짓기로 상을 받은 유일한 기억은 중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합고사를 마치고 한가할 때 무슨 교내 글짓기 공모가 있었다. 교육당국의 방침에 따른 영혼 없는 대회였을 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 원고 내라 하셔서 나름 노력하여 제출했더니 3등상을 받았다. 기쁨은 잠시였다. 공모작이 전교 통틀어 총 4편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이다. 늦은 나이에 어쩌다 보니 말하고 글 쓰는 직업(?)’을 한시적으로 갖게 되었다. 천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집단지성의 것을 주문형으로 생산해야 하는 일이다. 글의 질을 떠나 무엇이든 만들어내면 책임은 종료된다. 하지만 써도 곤혹스럽고 안 써도 곤혹스러운 상황이 가끔 발생한다. 집단지성께서 아직 하나의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말과 글을 요구받을 때 당하는 괴롭힘은 참 괴롭다.

 

   일리 있는 몇 개의 논거가 학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이슈에서 충돌했고 지난 8개월 참 많은 사람들로부터 참 많은 전화를 받았다.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예의의 수준이 천차만별임에 놀랐다. 스스로 교사, 조합원, 공무원, 학교근무자라고 자기를 소개하지만 과연 진짜일까 의심하기에 충분한, 그리고 정말로 학교에서 근무한다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일 거라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광란의 언어폭력이 있었다. 이를 감당해내려면 초인적인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런데 초인이 아니므로 자기 보존을 위해 때로는 광란의 춤을 함께 추며 스트레스를 풀어주곤 했다. 다짜고짜 욕을 쏟아내며 투항을 강요하는 극우 할배들의 전화 처리는 차라리 휴식에 가깝다. 교묘한 비아냥과 점잖은 협박은 때로 마음의 바닥까지 휘젓고 간다. 어느 날 문득 LG 유플러스 하청업체에 현장실습 나갔다가 감정노동에 겨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학생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힘든데 그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주문은 그냥 폭력일 뿐이다. 생계수단과 자기방어권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방황해야 하는 원초적 감정노동자들이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가?

 

   언어 구사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언어 소통은 갈등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더 키우기 일쑤다. 소통하면 할수록 소통의 필요성이 커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에 대해 파고들었던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철학적 저작에 대해 비관하면서 또 다른 소통 체계인 음악으로 도피했던 것일까? 고전음악을 휘파람으로 연주하면서 언어의 세계를 조롱했던 것일까? 그가 말한 대로 올바른 철학적 사고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해체하는 것이라면, 언어를 통한 소통에 임하기에 앞서 언어의 혼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타인에 대해 자기를 관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즉자적으로 쏟아내 온 자신의 언어로부터 스스로 소외되어 이를 대자적으로 분석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소통을 불통으로 말하고 비폭력을 폭력으로 말하고 평등을 오만으로 말하는 언어도단은 자기 언어에 대한 진지한 점검 과정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너머 음악

 

   언어 너머에 음악이 있다. 언어나 음악이나 매우 정교한 소리의 체계이지만, 언어는 당사자 간 사회적 관계를 규정짓는 반면, 음악은 그러한 강제성과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모호한 음의 체계는 무엇을 함부로 규정지으려 들지 않는다. 삶의 필수 요소가 아니어서 선택권이 보장된다. 그래서 음악은 언어처럼 피곤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소통하는 세계다. 나이 들면 시력만이 아니라 청력도 쇠퇴한다는 생로병사의 상식을 잊고 살다가 불현듯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음을 깨우치는 날이면 귀 좋을 때 조금이라도 더 들어야겠다는 조바심이 엄습한다. 언어의 세계에서 만신창이가 되신 분들은 음악의 세계로 옮겨가시라! 누구도 당신을 윽박지르거나 조롱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가 당신과 진정어린 소통을 청한다. 그리하여 가끔이지만 진짜로 통하는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 느끼는 희열이란 언어 전쟁으로 남을 굴복시켰을 때 스쳐가는 자기도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것은 생각 없는 생각이고, 설득 없는 설득이며, 개념 없는 개념이다. 시나 소설이나 영화가 남기는 언어에 기반 한 감동과 달리, 그냥 감동이다.

 


시대의 소음

 

   언어로 가해지는 폭력 속에서 음악은 자기 보존의 수단이 된다. 비관적인 쇼스타코비치에게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가 요구되었다. 예술가는 비관적이고 신경질적인 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어야 했던 소련 스탈린 체제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자기모순을 어떻게 해소하였는가? 셰익스피어의 싯구처럼 예술이 권력에 혀가 묶여 있다고 말하는 대신 그 셰익스피어를 음악으로 만들어버렸다. 인민과 혁명을 음악으로 말할 때조차 냉소와 해학을 한 자락 깔아두었다. 그것을 듣고 알아채면 소통이 된 것이다. 폭력의 시대에서 생존하는 이 고급 기술을 아는 사람은 알면 좋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그만이다. 이래서 쇼스타코비치가 좋고 음악이 좋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글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꼭 명료하게 써야 하는가? “침묵이야말로 말이 힘을 다하고 음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쇼스타코비치를 소설에 불러 온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시대의 소음(The Noise of Time)중 한 구절이다.

 

그림 1-줄리언 반스 장편소설, 시대의 소음.jpg

그림 1 - 줄리언 반스 장편소설, 시대의 소음

 


촛불혁명? 퇴행을 멈춘 또 하나의 퇴행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지만, 아주 쉬운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를 놓고 정치적 득실이나 따지며 주판알 굴리는 새 권력의 모습을 보자면 또 음악이 땡긴다. ‘촛불혁명이라 했던가? 언어의 과잉이자 기만이다. 그냥 앞당겨진 평화로운 정권교체라고 하는 게 솔직한 표현일 수 있다. 어느 분 말씀대로 우리는 80년 광주항쟁과 876월항쟁의 성과를 아직도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개념은 더 확장되지 못하고 그냥 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는 극우정권이 남긴 간접적 폐해로서 극우만 아니면 된다는 퇴행적 의식이 가져온 결과임과 동시에, 아직은 작다고 할 수 있는 차이에 발끈하고 균열해온 진짜 진보 스스로의 발목잡기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의 국면에 대해 퇴행을 멈춘 또 하나의 퇴행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한 번 초현실적인 언어의 과잉이 전화기를 통해, 그리고 웹 공간을 통해 광풍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혁명의 배신, 베토벤의 분노

 

   ‘우리 인이운운하는 박사모스러운 사람들한테 지치셨다면 이 곡을 들으며 조롱하시라! 음악 시험에 곧 잘 나오는 베토벤의 에로이카교향곡이다. 혁명을 빙자해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에 분노하여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바친다는 표제를 씩씩하게 찢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하지만 이런 배경이 없더라도 3번 교향곡은 음악적으로 매우 위대하다. 베토벤 교향곡 9개 중 최고로 치는 분들이 많이 보인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이 가끔 있는데 이 곡이 그렇다. 촛불혁명에 배신감이 느껴지시거든 문빠들에 맞서 글도 쓰시고 이 음악도 들으시라.

 

그림 2-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1960년, DECCA.jpg

그림 2 - 베토벤 교향곡 3영웅’,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1960, DECCA

 

   올해 초 대학 지도교수님 댁을 방문했는데, 독일 유학 때 사 오신 30여년 된 오디오를 다시 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고장난지 오래되었으나 병환으로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하셨던 것이다. “저거 다시 한 번 들어보면 원이 없겠다”. 옛날 오디오는 왜 그리 무거운지 모르겠다. 친구와 수리점을 오가며 가까스로 고쳐 온 텔레풍켄 앰프, 토렌스 턴테이블, 그리고 JBL 구형 스피커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아날로그의 인간적이고 따스한 소리는 경이로움과 아울러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들어온 최신 녹음 디지털 CD 소리조차 가짜였단 말인가? 인간의 귀는 분명 퇴화되었을 것이라는 은사님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오래된 것의 가치에 대해 승복하게 되었다. 테스트용으로 바늘을 얹은 레코드(LP)는 클래식계의 진부한 이름, 카랴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니의 말러(Gustav Mahler) 교향곡 5번이었다. 4악장 마지막에서 전에는 듣지 못했던 뚝 떨어졌다 상승하는 더블베이스 소리가 또렷이 들리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음반가게에서 발견한 명반 역시 어렸을 적 라디오로 듣던 낡은 녹음이었다. 80년대에 라디오에서는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라는, 발음도 귀티 나는 지휘자와 악단의 이름이 곧잘 등장했다. 당시 그의 베토벤 교향곡 레코드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었지만 전축을 가질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뒤늦게나마 저렴한 CD로 나온 것이다. 들어보니 과연 그 시절의 명연주다. 특히 3번 에로이카에서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매우 선동적인 팀파니 소리에 힘입어 굉장한 박력이 뿜어져 나온다. 1960년 낡은 녹음이지만, 최신 녹음보다 어떤 면에서 더욱 나은 것 같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1악장과 2악장만 30분이다. 혁명에 대한 기대가 넘치는 1악장과 달리, 2악장에서는 느릿한 장송행진곡이 천재적인 독창성으로 발전해간다. 배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들린다면 지나친 주관이 빚어내는 환청일까? 당시 교향곡 3악장에 배치되던 우아한 귀족풍 3박자 미뉴엣 춤곡이 전복되고 이를 대신하여 전대미문의 초고속 3박자 스케르초가 신랄하게 질주한다. 이어서 그래도 역사는 전진하고야 만다는 낙관론으로 4악장이 마무리된다. 베토벤이 살던 당대의 시대 상황은 오늘의 역사 속에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교향곡이 당대에 던졌던 충격은 오늘날에도 오롯이 되살아날 수 있다.

 


장송행진곡

 

   ‘영웅교향곡의 2악장은 나폴레옹의 죽음을 예견하고 쓴 게 아니라 혁명 전사들의 희생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담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곡의 수많은 연주들을 비교할 때 특히 2악장의 표현력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흡족한 연주가 의외로 적어진다.

 

   루돌프 켐페(Rudolf Kempe)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니의 1959년 기록(Testament)은 앙세르메와 마찬가지로 낡은 녹음이지만, 참으로 진지하고 무거운 2악장을 듣고 나면 마치 민주열사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것처럼 숙연해진다. 얼마 전 노구를 이끌고 내한공연을 한 귄터 헤르비히(Günther Herbig)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휘자이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독일적인 소리로 해석해 탁월한 음반들을 냈다. 1982년 동독에서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베토벤 영웅교향곡의 기록(베를린 클래식스)2002년 재발매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보석과도 같은 연주다. 특히 2악장은 정곡을 찌르는 명연이다.

 

그림 3-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루돌프 켐페 지휘, 베를린 필하모니, 1959년, Testament.jpg

그림 3 - 베토벤 교향곡 3영웅’, 루돌프 켐페 지휘, 베를린 필하모니, 1959, Testament

 

 그림 4-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귄터 헤르비히 지휘,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 1982년, Berlin Classics.jpg

그림 4 - 베토벤 교향곡 3영웅’, 귄터 헤르비히 지휘,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 1982, Berlin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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