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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3호 (2016.12.21. 발간)


[사회변혁이론 고찰]

 스피노자, 발리바르

- 이성과 정념의 정치적 인간학 -

 

이현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왜 지금 스피노자인가?

 

   이 글은 발리바르의 저서 『스피노자와 정치』(그린비, 진태원역)를 소개할 것이다. 한 때, 어쩌면 여전히 지금까지 스피노자는 니체와 함께 서양 현대 사상에서 뜨거운 아이콘이었다. 들뢰즈와 네그리 그리고 발리바르 등이 스피노자를 재해석하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펼쳐나갔다.

 

   지난 글의 말미에서, 이 시리즈의 목표가 역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재구성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재구성은 나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고, 재구성을 위해 우리가 어떤 지점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 과연 스피노자의 사상은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재구성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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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 역사적 유물론이 여전히 의미 있는 이론(즉 변혁을 위한 사회분석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이라면 적어도 아래의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현실사회주의는 왜 비가역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실패하고 붕괴하였는가? 이에 대해 경험적인 답변을 넘어 보편적인 원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현대사회에서 특히 근대적 국가장치들이 발전한 서구사회에서 왜 사회주의 혁명은 지연되거나 유실되고 있는가? 왜 계급적대는 자주 다른 것으로 전위되거나, 중화되는가?


   셋째, 도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양한 사회라는 네거티브한 정의, 또는 평등한 사회, 생산수단의 공유 등의 추상적인 정의를 넘어 포지티브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우리는 대중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소련에서 정식화한 역사적 유물론으로는 이런 문제 대하여 충분히 답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기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부분은 전화시켜야 하고, 공백은 보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 전화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분석의 도구인 이론도 다시 정정되는 변증법적 과정이 필요하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사상의 재독해를 통해 이런 작업을 위해 분투한 프랑스의 현대 맑스주의자다. 그의 작업이 완성되었거나 성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품었던 문제의식과 그의 작업 진행 과정은 충분히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 글은 발리바르의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피노자를 경유하면서 전개하였던 정치적 사유만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그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품은 문제의식도 위에서 제기하였던 세 가지 문제와 상당히 유사하다.

  


대중들(multitude)이란 문제

 

   우리는 지금 (12월 초) 한국사회에서 대중의 복귀를 목격하고 있다. 국가의 인민 또는 신민(한국의 용어로는 국민)이라는 통치의 대상에서 권력의 주인, 정치의 주체로서 대중으로의 복귀이다. 하지만 대중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multitude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스피노자에게 철학은 항상 정치적인 문제이다.) 사유가 해명하고자하는 핵심이다. 대중을 권력의 주인, 정치의 주체 즉 구성적 능력이 충만하고 모두에게 유용한 공통성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개체들의 네트워크로 일방적으로 정의하는 것은(이것이 네그리의 다중의 관점이다. 네그리주의자들은 multitude를 다중으로 번역하며, 이것에 고유한 구성적 역량을 부여한다.) 틀렸다기보다는 부분적이다. 즉 대중들은 극히 제한적이고 현실화되기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만 구성적 역량을 즉 상호 유용한 공통성을 창출하고 지속할 수 있다. 만약 대중들이 상호 유용한 공통성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구성적 역량을 보유할 수 있다면, 그래서 대중의 능동적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런 대중들의 역량(요즘 유행하는 용어로는 다중지성, 집단지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네그리는 현대 노동의 특성 즉 지적-정서적 노동의 확산을 근거로 다중의 지성과 구성역량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대중의 출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여전히 대중의 모습은 양가적이다. 능동성(대중이 자율적 역량)과 수동성(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한)의 양가성, 지성적 측면과 정념적 측면(특정 지도자, 정치세력, 이데올로기에 종속된)의 양가성, 직접성(대중운동의 고양국면에서)과 대리성(대중운동의 퇴조 국면에서)의 양가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아직 대중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자율적 상태로 스스로를 구성할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항상 양가적인 운동에 사로잡혀 있다.

 

   스피노자 시대의 대중(multitude)의 역량은 더욱 취약했을 것이다multitude는 분명 다수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국가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계급처럼 단일한 이해관계보다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는 무정형적인 존재이며, 인민(국민)과 다르게 국가의 지배(, 폭력, 제도, 이데올로기 등)를 항상 흘러넘치면서 유동하고 운동하는 존재이다.

 

   동시대의 홉스는 대중을 국가주권으로의 포섭을 통해 인민으로 전화해야할 존재, 따라서 국가구성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대상, 또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화 이전의 자연상태의 인간들이라는 부정적 의미로서의 대중을 사유했다. 반면에 스피노자에게 대중은 국가구성 이후에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인 존재로, 국가(임페리움)에 포섭되면서도 항상 흘러넘치는 존재로 사유하였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국가는 원초적인 계약 이후에 이미 국가권력의 계약체계(또는 법체계) 안으로 들어와 있는 인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법의 지배를 흘러넘치는 대중들을 마주해야 한다. 인민(국민)은 자주, 시시때때로 대중으로 복귀한다. 따라서 사회계약은 허구적이거나 매우 제한적이다. 국가(또는 지배세력)는 항상 대중들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다. “공포에 휩싸여 있지 않은 대중은 공포스럽다.” 하지만 폭력으로 대중을 공포로 몰아넣을 때, 대중은 폭력적인 따라서 공포스런 존재로 변한다.

 

   계급이라는 개념을 정초한 사람은 당연히 맑스이다. 맑스는 노동의 인간학(인간은 사변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형성되며, 진리 검증의 최종 심급은 실천이며, 실천의 중핵에 생산활동으로서 노동이 존재한다. 또한 생산 활동 즉 노동은 사회의 구성과 재생산의 토대이며 등등)과 정치경제학 비판(즉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의 생산과 지배계급에 의한 이의 전유 즉 착취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계급 개념을 정초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 바로 그것이며, 제 사회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관계(노동의 인간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규명해낸 결과에 의하면)이며, 생산관계에서의 위치가 바로 계급이다.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하지만, 정치적 실천의 관점에 서면 어떤 난점이 발생한다. 우선 동일한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집단으로서 계급은 어떻게 실존할 수 있는가? 단일한 계급개념으로 포괄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피지배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노동계급 내부의 수많은 분할이 존재한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노동자 간에 분할이 존재하고, 기업 내부의 분할도 존재한다. 단일한 이해관계를 지닌 계급이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해야할 지향이다.

더 중요한 것은 특히 정치적 실천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결코 경제적 이해에 기초한 계급적 정체성으로 단일하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계급의식(맑스는 결코 쓴 적이 없고, 루가치에 의해 일반화된 용어인)으로 무장한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출현은 좀처럼 경험하기 힘들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은 민족주의-국가(애국)주의-성장주의-인종주의-가부장주의 등에 의해 과잉결정된 (과잉결정은 여러 요인들에 의한 결정이라는 의미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덮어쓰는 따라서 개별적 요인들이 상호영향을 미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가 변형된다는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음) 노동자 대중이거나, 자신들의 이해의 독립성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지배계급의 이해와 절충하는 개량주의와 타협주의에 물든 노동자 대중이다. 즉 순결한 계급의식과 계급적 이해의 토대 위에 서있는 혁명적 노동자 계급을 목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하고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계급이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동적이고 무정형적이고 운동하고 있는 대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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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이 글의 앞에서 제기하였던 역사적 유물론이 답해야하는 두 번째 질문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이다. 노동의 인간학과 정치경제학 비판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질문이다. 대중운동이 계급성을 띠기 쉽지 않고, 거꾸로 계급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장하기 쉽지 않은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노동의 인간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위해 두 가지의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인간학을 보완하기 위한 정치적 인간학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며, 잉여가치의 생산과 착취에 대한 이론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보완할 자본주의 근대 국가들의 다양한 국가 장치들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국가장치들이 존재한다. (나는 장치를 제도(), 담론(이데올로기), 물질적 도구 및 공간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국가장치를 이렇게 이해했을 때, 국가는 지배계급들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다. 국가장치는 훨씬 복잡한 작동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고, 단순히 지배계급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유지-재생산이라는 더 포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에 봉사하고 현존의 질서를 유지해나간다. 따라서 국가장치에서 피지배계급의 이해는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국장장치내부에는 개혁(개량)의 공간이 존재하며, 대안적 장치의 마련 없는 국가장치의 마비와 붕괴는 피지배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안전과 일상생활의 유지를 위한 각종 행정-관료 장치들 (치안 유지, 물과 전기, 도로 등 사회적 인프라의 건설과 관리, 각종 재난과 질병의 예방과 구호 등등), 사회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삶의 유지를 보장하기 위한 복지 장치들 (각종 사회보험들, 빈민구제 제도들), 집단적 계급구성원들을 원자화된 개인으로 전환시키고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해 주는 각종 정치 장치들(선거제도, 의회, 정당 활동, 여론조사 등등), 개개인의 능력 개발과 경쟁에 공정한 참여를 보장해주는 교육과 선발 장치들 (각종 학교들, 능력중심의 각종 선발제도들), 정보의 공유, 전달, 소통, 왜곡, 편중 등을 통해 자신이 판단의 주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하는 각종 미디어 장치들 (일방적인 미어디들과 최근에는 쌍방향의 SNS들까지), 대중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특정한 대상에 대해 과도하게 욕망을 투여하게 하는 문화장치들 (종교, 스포츠, 영화, 텔레비전부터 각종 취미 동호회까지), 그리고 물리력에 기반한 폭력 장치들 (군대, 경찰, 정보기관, 사법부까지..)

이런 국가 장치들의 분석은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능력이 된다면, 언젠가 알뛰세르와 푸코를 읽으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싶다.)

 

   두 번째는 노동의 인간학을 보완할 정치적 인간학이다. 이 글의 핵심 주제이며, 발리바르를 통해 스피노자의 정치적 인간학을 탐구하여, 무엇이 대중의 계급적 주체로의 형성을 방해하는지, 어떻게 하면 대중이 자율적인 구성의 주체 즉 사회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자.

 


스피노자의 정치적 인간학

 

스피노자의 주요저서는 『신학정치론』, 정치론 에티카(윤리학)이다. 이 세 저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스피노자의 주저인 『에티카는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전개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정치적 사유를 뒷받침하기 위한 인간학으로 독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는 자신의 실존을 지속하려는 욕망 즉 코나투스를 본질로 한다. 코나투스는 개체의 본질 그 자체이다.(이것이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철학의 기초이다. 어떤 개체도 외적으로 부여된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실존의 역량을 지속하고 확대하려는 욕망만이 개체의 본질이다.) 그런데 개체는 더 낮은 수준의 개체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지속을 위해 더 높은 수준의 개체 형성에 참여한다. 즉 인간의 신체는 다양한 개체들의 합성이며 (특히 인간의 신체는 매우 복잡한 합성이며, 이에 따라 변용의 범위가 매우 넓다. 개체들의 합성에 의한 더 높은 수준의 개체의 형성은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로 이루어지며, 이 비율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합성된 개체는 분해 즉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의 신체들은 자신의 보존을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즉 더 역량 있는 개체 구성(즉 가족, 단체, 사회, 국가 등)에 참여한다. 특히 정치적 인간학에서는 후자가 중요한데, 인간이라는 개체의 독특성(개인성)은 이미 항상 사회성 (즉 다른 개체와의 관계와 더 높은 수준의 개체 즉 사회와의 관계라는 이중적 관계)을 내포한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개체는 코나투스의 전개 과정에서 특히 다른 개체나 더 높은 수준의 개체와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이성과 정념으로 분할된다.

 

   스피노자에게 이성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적합한(또는 필연적) 원인에 근거하여 외부를 인식하는 능력이고, 인간들 사이에서 공통의 유용성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다. 전자는 자신의 코나투스를 방해하거나 촉진하는 요인들을 적합하게 인식함으로써 인간 개인에게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킬 수 있는 자유(즉 능동성)를 부여한다. 후자는 자신의 코나투스를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사회(상호 유용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후자는 전자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다른 인간개체와의(인간에게 다른 인간은 가장 유용하다. 우선 실용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고립되어 있을 때 무능하다. 다른 인간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유지할 수 있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자신과 유사한 존재인 다른 사람들을 통해 가장 크게 자극받는다. 타인과의 사랑과 유대가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다. 물론 반대도 가능하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 의해 자신의 실존을 가장 크게 위협받을 수 있으며, 타인과의 증오와 갈등은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의 원천이다.) 관계에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스피노자의 이성은 인간의 인식론적인 특권의 지점이기보다는 다른 개체와 교통하기 위한(소통하고 협력하기) 실천적 지점이다. 그에게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상상할 수 없다. 인식과 의지와 실천은 동일하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당장 반론이 가능하다. 우리는 지식과 삶이 분리되는 수많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입시교육은 지식과 삶을 완전히 분리하고 지식을 오로지 시험의 수단, 출세의 수단으로 취급하게 만든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이런 지식은 참된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인 부적합한 인식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은 이성의 타자인 정서(affect)의 지배를 받으며, 특히 수동적인 정서인 정념(passion)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정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기쁨과 슬픔으로 분할된다. 기쁨은 자신의 실존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즉 코나투스의 역량)이 증가할 때 발생하는 관념이며, 슬픔은 자신의 실존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될 때 발생하는 관념이다. 따라서 정서는 일정한 수위를 오르내리는 운동이다. 즉 기쁨과 슬픔의 절대적 기준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 발생하는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의 비교를 통한 편차에 의해 발생하는 운동이다. 정서는 항상 가변적이다. 기쁨과 슬픔이 교체되거나, 각각의 정서의 강도가 변하는 운동이다. 우리가 매일 매일 체험하듯이 정서는 변덕스럽다.

 

   인간은 매 순간 외부 세계와 마주치며, 마주침의 순간마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변용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인간은 변용된다. 그 이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기쁨으로, 내가 증오하는 사람이라면 슬픔으로 변용된다.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인도된다면, 즉 자신의 코나투스의 역량에 영향을 끼치는 마주침들에 대하여 (그 필연적인 원인에 근거하여)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정서의 운동은 매우 안정적일 것이며, 슬픔의 정서를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슬픔의 원인을 적합하게 인식할수록 그것을 제거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합리적인) 방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 인간의 인식 능력은 제한적이다. 보통 인간들은 스피노자의 인식의 분류법에 따르면 제1종의 인식 즉 상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독특한 유한 양태들로서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의식하고 있지만, 이 욕망들을 생산하는 원인들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인간은 무지한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 놓는 것이 아니라 상상(가상)으로 채워 넣는다. 상상은 정서의 운동을 더욱 증폭시키고, 정서를 정념으로 전화시킨다. 즉 인간은 수동적 정서인 정념의 포로가 되어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 사실 인간에게 상상과 정념은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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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인간의 고유한 특성들이 정서운동을 더욱 증폭시킨다.

   인간의 상상의 지평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간은 훌륭한 기억의 능력에 의해 과거의 일을 지금 눈앞에 현전하는 것처럼 느낀다. (과거에 어떤 사람에 받았던 모욕의 기억은 그 사람과 관계되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심지어는 그런 상황이 없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힌다.). 또한 인간은 항상 앞으로의 일을 예측한다. 이런 훌륭한 예측력에 의해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일을 현전하는 것처럼 느낀다. (다가올 재앙들 또는 행운들, 타인의 변심, 죽음 등등) 상상에 의한 희망과 공포가 우리를 지배한다. “희망 없는 공포 없고, 공포 없는 희망 없다.”

 

   마주침 중에서도 다른 인간과의 마주침은 정서의 진폭을 크게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가상한다. 인간은 무지할수록, 즉 필연적인 원인에 의해 세상을 인식할 역량이 적을수록 상상과 가상은 커지고 이에 따라 본인이 더욱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모든 일을 자신의 취향과 의지에 따라 결정한 것으로 오인한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가상하는 인간은 타인도 자유롭다고 가상한다. 스피노자의 이론에 따르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대상이 필연적 원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인식하면 외부의 대상에 대한 정서의 강도는 약화된다. 왜냐면 외부의 대상과 그것을 규정하는 원인으로 정서가 분산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외부의 대상이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상하면, 모든 정서는 외부의 대상에 투입된다.(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나에게 대들었을 때, 그 학생의 불우한 가정적인 요인들, 경쟁적 학교문화의 문제들이라는 원인과 함께 학생의 행위를 인식할 때, 학생에 대한 분노는 감축된다. 즉 나의 분노는 그 학생과 그 학생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반인간적인 교육환경으로 분산된다. 하지만 그 학생이 오로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가상하면, 그 학생에 대한 분노는 증폭될 것이다. 본능에 의해 조정되는 개가 주인인 나를 좋아하는 것에서 얻는 기쁨보다는 자유의지에 의해 나를 좋아하는 인간으로부터 얻는 기쁨이 훨씬 크다. 따라서 나와 유사한 그리고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나와 일치하는 한에서 가장 유용하다. 반면에 나와 불일치하는 한에 가장 해롭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동물에게도 볼 수 없는 동류에 의한 동류의 학살과 잔인함들...

 

   인간의 정서는 상호모방(전염력)의 힘이 매우 강하고, 양가적이며, 쉽게 전위된다.

한 개인의 정서들을 다른 개인의 정서와 소통시켜주는 기본적인 심리 메커니즘은 동일시(정체화)이다. 우리는 타인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경험하면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반대로 타인이 어떤 대상을 증오하는 것을 경험하면 그 대상을 증오하게 된다. 특히 그 타인이 내가 좋아하거나 신뢰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그 강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우리는 동료교사들이 학생들에 대한 호와 불호를 표현하는 경우를 자주 마주치게 되고,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확실하게 모르는 학생들에 대한 호와 불호가 강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동료교사를 신뢰할수록 이 강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 동료교사를 불신하거나 싫어한다면, 나에게는 양가적인 감정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자.)

 

   특히 내가 이미 사랑하는(또는 증오하는) 대상을 사랑하고(증오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의 사랑(증오)은 배가된다. 그리고 이미 사랑(증오)하고 있는 대상은 지난 시기에 어떤 사람의 사랑(증오)을 모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예를 들어 모방의 첫 번째 대상은 가족일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것을 증오한다. 다음으로는 친구일수도 있고, 요즘에는 미디어일 수도 있다. 모방은 자연스럽다. 이런 모방의 메커니즘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장치에 의해 조장되고 조절되는 것이며, 이는 이후의 연구과제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편과 상대편을 분리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우리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쉽게 모방할 것이며, 서로 모방한 정서들의 동일성(동일한 대상을 사랑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정서는 증폭되고 배가될 것이다. 다시 이런 정서의 증폭은 우리편과 상대편의 분리를 더욱 강화시킬 것이고, 이에 따라 사랑과 증오의 대상의 동일성에 기초한 정서는 더욱 배가되는 순환체계가 형성될 것이다.

(우리는 왜 패거리문화가, 지역주의가, 민족(애국)주의가, 인종주의가, 성차별주의가 만연하고, 쉽게 제거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노동계급으로 동일성을 체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남자이고, 한국 사람이고, 경상도 사나이고, 두산 팬이고, 엑스오 팬이다. 등등// 우리는 정당의 정책이나 대안보다 대중적 정치인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정책과 대안을 꼼꼼히 따져 이것이 나의 이해와 또는 우리의 이해와 일치하는지를 파악하는 이성적 힘보다, 사이다를 날리는, 또는 정서적 매력에 어필하는 어떤 인간에 대한 정서적 동일시의 힘이 훨씬 강력하다.)

 

   그런데, 모방에 의한 정서의 전염과 증폭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증오는 쉽게 전위된다. (사랑과 증오는 외적 원인에 의한 기쁨과 슬픔일 뿐이다. 즉 외적 원인에 의해 나의 코나투스의 역량이 증가하여 기쁨을 느낀다면 나는 외적 원인을 사랑한다. 증오는 그 반대이다.) 사랑과 증오는 매우 복잡한 관계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르게 사랑하는 한에서, 또는 공유 불가능한 대상을 사랑하는 한에서 또는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서로 다르게 상상하는 한에서 서로를 증오한다.

전교조 조합원인 나는 전교조를 사랑하는 조합원을 만날 때, 전교조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배가되고 그 조합원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전교조를 투쟁하는 노동조합으로 사랑하고, 그가 전교조를 참교육 실천의 단체로 사랑하며, 이 둘의 노선이 대립할 때 나는 그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즉 그에 대한 나의 정서는 양가적이다(동일한 대상을 사랑한다는 측면에서 그를 사랑하지만, 사랑의 방식의 차이에 때문에 그를 동시에 증오한다.). 특히 노선 대립이 치열해져서 하나의 입장만 선택해야 할 때, 사랑은 더욱 강력한 증오로 전위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동일한 사랑의 대상인 전교조가 공격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전교조를 지키는 투쟁을 함께 할 때 우리는 더욱 강력한 사랑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실제 상황에서 사랑과 증오는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공존하거나(양가적이거나), 상호 전화하는 복잡한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계급적 단결이 왜 쉽지 않은지 이해할 수 있다. 대의에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할지라도 단결보다는 분열의 모습을 더 자주 목격하게 된다. 같은 대상(사회의 변화)을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 동일한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상에 대한 차이 등등에 의해 서로 사랑하며 증오한다. 광장의 촛불 대중은 박근혜-최순실 일당의 부정의와 몰염치 그리고 근대국가에서 볼 수 없는 비정상-몰상식에 대한 공동의 증오의 정념으로 일치되어 있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를 넘어서는 순간 대립과 분열이 발생할 것이다. 공동의 증오의 정념으로만 이후의 일치와 공통성이 확보될 리 없다. 박근혜가 물러나면 내가 사랑하는 정치인들에 따라, 박근혜 이후 체제에 대한 서로 다른 상상에 따라 촛불대중은 분열할 것이다. 이런 분열을 넘어 일치와 공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정치적 기획과 실천이 필요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을 보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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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속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나의 연인을 증오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를 증오하는 동시에 나의 연인에 대한 감정의 동요(나의 연인에 문제가 있나? 내가 사랑하고 있는 연인의 참모습을 정말 알고 있는 걸까?)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의 연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연인은 공유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나는 그를 사랑하면서 증오할 것이며, 연인에 대한 사랑도 커지는 동시에 증오도 커질 것이다.(동일한 대상을 사랑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사랑을 빼앗길 위험 때문에 그를 증오할 것이다. 또한 나의 연인에 대한 사랑이 커지면서 - 왜냐면 다른 사람도 나의 연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나의 연인이 사랑할만한 대상임을 더욱 확신시켜주기 때문이다. - 동시에 나의 연인의 변심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연인을 증오할 것이다.) 나의 이런 감정을 질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정서는 끊임없이 동요하며, 서로 상반된 정서가 공존한다.

 

   특히 사랑의 대상들이 공유 불가능하면 이런 현상은 더욱 커지고 인간 상호간의 증오와 불신은 더욱 커진다. 사적 소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개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이 사랑의 대상(권력, 지위, , 이성 등등)은 공유불가능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는 경향적으로 인간 간의 상호불신과 증오와 의심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성에 인도되는 선은 반드시 공통선 즉 공유가능한 선이어야 한다.(즉 권력과 부와 명예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만 인간은 서로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정서만 더 살펴보도록 하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더 많은 타인이 사랑하게 만들수록 자신의 역량은 증가하고 기쁨의 정서를 느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랑의 방식까지 일치하도록 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반대로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과 방식의 차이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이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모든 타인들이 자신의 기질에 맞추어 살기를 원하고, 아니면 오로지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들이 다수이고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의 기질에 맞추어 산다. 스피노자는 이를 암바치오(즉 야망)라 부른다.(이는 야망가들의 대표적인 부류인 대중적 정치인들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하며, 반대로 대중의 정서적 흐름에 영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이 타인에 대하여 자신의 기질에 맞추어 살리기를 원한다면, 독특성(독특한 기질)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은 서로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인간들이 정념에 의해 인도되는 한, 인간사회는 일치와 협력보다는 갈등과 증오가 경향적으로 우세할 것이며, 항상적인 불안정 상태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홉스는 다르다. 홉스의 인간들은 본원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이기적이고, 불일치한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연권 전체를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유지할 수 있다.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인간들은 정념에 의해 인도될 때에도 다른 개체들과 교통하고 있으며, 사랑(일치)과 증오(불일치)가 교차하고 있으며, 자신의 실존을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확대하기 위해(자신의 권리 모두를 양도하는 한 자신의 실존은 순전히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노력한다. 스피노자에게 정념도 코나투스의 전개 양상이다. 또한 어떤 정념적인 삶도 이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스피노자의 『에티카3부는 기쁨과 슬픔에서 시작되는 수많은 정서들의 정의와 목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정서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증폭되고 전위되는가를 추적하는 생생한 정서의 운동에 관한 과학적 보고(寶庫)이다. 1,2부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독해 불가능하지만 3부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정서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우리와 항상 함께 하는 정서의 원인과 현상과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서에 대한 좀 더 적합한 이해만으로 우리의 삶은 풍성해질 수 있다.)

 


개체성과 교통, 그리고 민주주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서적 교통은 대중이라는 개념 자체이다.” 그런데 인간 개체는 또는 개체들 간의 교통인 대중은 그리고 개체들의 합성체인 정치사회는 정서에 의해 단일하게 지배되는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제시한 세 가지의 인식의 종류는 상상, 과학적 이성, 신의 지적 사랑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제1종의 인식인 상상은 부적합한 인식을 생산하고 인간의 정서를 증폭시킨다. 2종의 인식은 이성을 활용하여 과학적 원인에 근거한 적합한 인식을 생산한다. 이 때 생산되는 인식을 스피노자는 공통통념이라 부른다. 이 스피노자의 용어법에서 우리는 과학적 인식 활동이 고립된 이성의 고독한 이론 활동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인식의 교통 과정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공통의 개념을 형성함으로써 적합한 인식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2종의 인식은 “1종의 인식에서 이루지는 최초의 언어활동을 정정해주고, 단어들이 자연적 필연성에 일치하게 연쇄되게 해주는 지적인 작업이다.” (3종의 인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2종의 인식이 아직은 부분적인 인과성에 대한 적합한 인식이라면, 3종의 인식은 세계 전체에 대한 자연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정도로 정의하자. 스피노자에게 신은 자연 전체의 필연적 인과 체계 그 자체이다.)

 

   인간 개체와 그들 사이의 교통 체계인 사회는 이성과 정서에 의해 동시에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억압적인 사회라도, 그리고 정념의 유통이 우세한 사회라도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역량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전시키기 시작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연대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어떤 인간 개체도 각자 지적 역량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온전하게 상상과 정념의 의해 전일적을 지배당하지는 않는다. 2종의 인식을 통해 1종의 인식을 정정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며, 상호 유용성의 인식을 통한 공통성을 창출하려는 사회적 활동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확산될수록, 이성의 교통은 활발해지고 인간 개개인이 이성을 통해 정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증가한다.(물론 완전한 극복은 불가능하겠지만)

 

   따라서 완전히 정념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와 완전히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는 어떤 한계를 표현해주는 이념형에 불과하다. 실재하는 사회는 이 두 한계 사이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이성의 인도에 따른 실제적인 일치와 정서의 모방에 따른 상상적인 양가성의 통일이다.” 달리 표현하면 합리적 동일성과 정서적 가변성의 대립물의 통일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지적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정치론은 의미심장하게도 민주적 정치체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끝을 낸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데, 단순히 이른 죽음이 원인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난점을 표현해주고 있다. 과연 대중은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성에 의한 합리적 일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란 대중들이 자신의 권리나 역량을 양도하지 않고, 스스로 권리나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정념에 의해 분할되지 않고, 감정의 동요나 양가성에 휩싸이지 않고, 합리적 일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들의 광란(물론 그 이면에는 정치세력의 개입이 있지만)에 의해 홀란드 공화국이 붕괴한 것을 목도한 스피노자에게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경향이 정념에 의해 인도되는 경향을 압도하는 대중의 출현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공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대중은 공포스런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동요하고, 망설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대중이 이성에 인도되는 한,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최대화시키는 한편, 국가의 안정도 극대화시킨다.” 정념들에 따라 규정되는 자신들의 활동을 이성적으로 원인지으려는 개인들의 노력은 항상 존재하며, 서로에게 유익한 공통성을 창출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연대도 항상 존재한다.

 

   스피노자에게 개체성은 항상은 하위의 개체, 동일 수준의 다른 개체, 상위의 개체와의 관계로부터 생산된다.(관개체성, trans-individuality) 즉 개체성은 교통에 의해 생산되며, 개체의 활동은 교통 활동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의 질문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성이 정서를 경향적으로 압도하는 교통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정치적 변혁은 결국 교통양식의 변혁이다. 맑스는 혁명을 생산양식의 변혁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추가해야 한다. 사회의 혁명은 생산양식의 변혁과 교통양식의 변혁이 결합되어야 한다. 교통양식의 변화 없는 생산양식의 변화는 새로운 지배-피지배 관계를 부활시킨다. 그것이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이다.

 

   좀 더 완전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교통양식의 변혁은 어떤 방향을 취해야할까? 대중의 교통 은 대중의 지성의 수준과 교통의 구체적인 수단과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된 대중의 교통양식에 따라 교통의 과정에서 이성과 정념(상상) 중에 어떤 것이 우세할 것인가를 결정된다.

 

   대중의 교통과는 독립적으로 대중의 지성만을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와 이에 기초한 교육기관의 확대로 대중의 지성이 향상된 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이는 새로운 교통양식 구축을 위한 매우 귀중한 재산이다. 하지만 계몽주의는 어떤 문턱을 넘지 못한다. 계몽은 지식인과 무지자의 양분법에 기초해 있으며, 일방적인 전달과 교화의 과정을 전제한다. 이는 무지자 즉 대중의 수동성과 의존성을 일정하게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대중의 교통과 대중의 지성은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과정이다. 대중 지성의 형성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 대중의 교통과정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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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의 능동성과 자율성을 최대화하고, 대중의 지성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교통양식은 무엇일까? 모든 정보의 최대한 신속한 공유, 토론과 표현의 자유의 최대한 보장 및 활성화, 결정권의 양도 없는 행사 등등. 이것이 가르키는 것은 직접민주주의다. 스피노자는 물론 발리바르도(물론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 당대의 물질적 조건의 한계 때문에 새로운 대중의 교통 양식 즉 새로운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가 열망하였던 이성에 따라(또는 이성이 정서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인도되는 사회가 맑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외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개인들이 권리의 양도 없이 상호 교통을 통해 서로에게 유익한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 나가는 관계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능한 최대 다수가 가능한 최대한을 인식하기를 구호로 내건 스피노자의 해방의 전략이 맑스의 사회주의 혁명과 공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무기 삼아, 대중의 교통양식의 변혁을 위해, 새로운 민주주의의 도입을 위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실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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