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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1호 (2016.07.05. 발간)


[사회변혁이론 고찰]

그람시, 라클라우와 무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위하여'


이현 - 진보교육연구소 운영위원


 




? 하필이면 이책인가?

 

     이 글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공동저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라는 책 소개를 통해 현재 한국의 진보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어떤 문제의 지점들을 살펴보려 한다. 서평보다는 상세하게 내용을 소개할 예정이며, 중간 중간에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도 끼워 넣을 예정이다.

 

     이 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은 따끈따끈한 최근의 책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 그람시의 저작처럼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도 아닌 매우 어중간한 책이다. 1985년 간행된 저작이며 한국에는 1990년 처음 번역되었다가, 2012년에 다른 사람과 출판사에 의해 재번역 출간되었다. 시류를 타지 않는 철학이나 문학 저작인 경우에는 별 문제 없지만, 정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정치 저작이기 때문에 과연 30년 전에 쓰인 저작이 현재성을 지닐 수 있을까 의문을 품을 만하다.

     둘째로, 출간 당시 유럽에서, 번역 당시 한국에서 이 책은 악명이 높았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두 저자는 포스트-맑스주의자와 신사회운동론자 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남아 있다. 맑스주의를 청산하고 좌파적 진보운동에 비수를 꽂고 전향한 자유주의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난 저작을 다시 끌어들여 소개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셋째로,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기로도 악명이 높다. 철학책도 아닌데, 지은이들이 언어적-지적 유희에 빠져 책을 지나치게 난해하게 썼다는 비난이 있었다. 실제로 처음 번역한 사람들의 소개 글을 보면 책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 번역을 제대로 했는지 (특히 핵심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3) 우려를 표하고 있다.

 

     출간 시기도 애매하고, 논란도 많고, 읽기도 어려운 이 책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 후 계속 이 책을 자양분 삼아 나의 사유를 키워왔기 때문에 소개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2006년경이다. 당시에 책이 절판되어 있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책이 너무 어려워 빨리 진도를 나갈 수 없었고, 결국 책을 복사하여 제본해 읽었다. 왜 읽게 되었는지 기억에 없다. 최근에 제본한 책을 다시 꺼내보았다. 책 처음부터 끝까지 연필로 군데군데 줄이 쳐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책을 모두 읽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포스트맑스주의, 신사회운동 등의 이미지는 독서의 결과가 아니라 이 책에 대한 풍문을 통해 각인된 것이었다. 이것을 볼 때,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무슨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냥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읽었을 것이고, 결국 아무런 독서의 흔적을(무의식에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남기지 못했다.

 

     이 책에 다시 관심을 갖고 읽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나의 최근의 관심사는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은 진보정치(또는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적 역사블록의 형성)를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 또는 1090의 사회에서 99들의 또는 90들의 삶의 잔혹한 현실이 드러나는 사건들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으며, 한국자본주의와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의 징후들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 이런 사건들, 위기들, 징후들이 진보운동 또는 진보정치의 응답을 절실히 요구하는 바로 지금, 진보운동과 진보정치의 추락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 한국의 진보운동은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기력할까? 이런 의문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중에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요즘 세계에서 잘 나가는 진보정당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데모스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찾아 읽던 중에(하지만 제대로 된 번역 자료는 거의 없고 대부분 짧은 기사 수준의 글들만 있다.) 포데모스의 주요 활동가들이 라클라우와 무페의 책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집에 있던 옛날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되었고, 여전히 많은 부분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들이 30여 년 전에 주로 서구의 좌파운동진영에 던졌던 문제의식이 지금 한국의 진보운동 진영에도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책이 현재 한국의 진보운동 특히 진보정치가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지점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좋은 책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충분히 의미 있다.

 


맑스의 정치적 타율성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복원하는 것이며, 복원의 중심에 헤게모니의 개념이 있다. 결국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은 헤게모니 개념을 풍부하게 재정의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장 끝에서야 제대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사회는 강력한 신분질서에 의해 고정된 위치를 지닌 주체만이 존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치는 존재할 수 있지만 정치의 자율성은 존재할 수 없다. 신이나 신의 대리인으로서 왕이 부여한 강력한 신분질서가 파괴된 근대사회에 들어서 정치의 자율성이 본격적으로 출현하였다. 정치의 자율성은 주로 사회계약론(홉스에서 루소까지)이나 공공적 인륜의 담지자로서의 국가(헤겔)에 관한 이론 등으로 정식화되었다.

     그런데 정치의 자율성에 관한 이론에 강력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바로 맑스다. 맑스는 정치의 타자 즉 정치 밖에서 정치를 규정하고 결정하는 심급으로 경제를 제시한다. 정치는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투쟁하고 협상하고, 타협하고, 대표를 뽑고, 권리를 양도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자율적 공간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와 정체성과 권력관계는 이미 경제에 의해 특히 생산관계에서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자율적 개인이나 집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 구성원은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 계급적 주체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들 중에서 생산관계가 절대적인 중심성을 지니며, 사회구성원의 사회적 정체성은 생산관계의 객관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제 정치적 공간은 경제에 의해 결정되는 타율적 공간이다.

 


2인터내셔널 : 정통맑스주의의 출현과 정치적 자율성의 죽음

 

     맑스 사후 제2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이론은 기계론적-환원론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정식화된다. 카우츠키 등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 이론가들이 재구성한 맑스 이론이 정통 맑스주의의 지위를 얻게 된다.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환원론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국가는 지배계급의 도구로 단순화된다. 존재에 의한 의식의 결정이라는 기계적 반영론이 인식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역사적 필연성의 범주가 정통 맑스주의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들에 의하면 역사의 변화는 토대(경제적 층위)의 발전 법칙에 의해 필연적인 경로를 따르게 된다. 도식화시키면, 생산력이 발전하면 기존의 생산관계와 모순(갈등)이 심화되고, 이는 계급투쟁을 격화시켜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이 발생한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계급투쟁을 통해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필연적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 이론가인 카우츠키에 의해 역사적 필연성은 더욱 확고한 것으로 체계화된다. 그는 계속 확대되는 프롤레타리아화 (피지배층의 절대 다수가 노동계급이 되며, 이들의 통일성은 더욱 강화된다.)와 그들의 궁핍화 그리고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위기를 통해 사회적 적대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급적 적대로 점점 단순해지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의 필연적 도래를 언급한다.(51) 그리고 이런 필연성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명료한 것으로 취급되었다.1873년부터 1896년까지의 유명한 대불황은 이런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카우츠키 : 정통주의의 강화 - 과학적 이론의 저장고로서의 당

 

     하지만 대공황의 종료와 함께 역사적 필연성의 패러다임에 위기가 시작된다.(53) 조직자본주의(미국은 법인자본)로의 이행과 1914년까지의 호황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에 대한 전망을 불확실하게 했으며, 노동조합들의 성공적인 경제투쟁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에 대한 필연적 지향성에 대한 불투명성을 강화하였다. 즉 자본주의 단선적인 위기의 누적적 강화나 노동계급의 통일성 확대와 사회주의적 지향성 강화에 대한 반대의 흐름들이 확대되면서 복잡하고 불투명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사회적인 것의 불투명성, 자본주의 복잡화 및 반격, 사회적 행위자들의 파편화)

 

     위기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정통 맑스주의자 즉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 등에서 나타났다.(56) 카우츠키는 노동계급 분할을 위한 부르주아의 정책이나 노동계급 파편화 현상 등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사회주의적 목표를 자동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그의 대응은 지식인과 과학으로서의 이론 그리고 과학의 저장고로서의 당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과학적 이론은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복잡하거나 불투명해도 과학이론의 저장고로서의 당은 사회주의의 필연적 도래를 예견한다. 사회주의당은 현실의 복잡성과 사회주체들의 파편화에 대응하여 그들을 통일된 주체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타협이나 동맹을 일체 거부한다. 그것은 비본질적인 외양이나 일시적인 현상에 현혹된 것이다. 당과 노동계급은 필연적으로 도래할 자본주의의 위기의 국면을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이런 입장이 언뜻 급진주의로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적 주도권을 포기하는 무저항주의와 대기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그것은 정치적 보수주의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좌파 정치조직에서 카우츠키의 냄새의 흔적을 맡지 않을 수 없다. 대중의 흐름이 증폭되고 정체성이 형성되는 정세적 결절점에 대한 적극적 개입, 파편화된 주체들을 통일된 정치적 주체로 세우기 위한 능동적인 실천 등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과학적 이론의 담지자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순혈적 신념의 소유자로서의 정체성 강조 등등)

 


베른슈타인 : 자율적 정치와 진화주의의 이상한 결합

 

     위기에 대한 두 번째 대응은 베른슈타인이 주도한 수정주의이다.(76) 베른슈타인이 주도한 수정주의는 흔히 개량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이해는 아니다. 개량주의는 노동계급을 조합주의적 이해관계로 한정하는 것이다. 계급을 매우 한정된 정체성 즉,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로 제한하며 이에 따라 정치적 무저항주의를 획책하는 것이다.

     반면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정통 맑스주의와 분기점을 형성하는 것은 후자가 파편화와 분화를 토대에서의 변화(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확대, 경제 위기의 심화 등)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전자는 자율적인 정치적 개입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이 지점에서 토대에서의 변화와 자율적인 정치적 개입의 양자택일에 빠지는 경향성을 보인다. 토대에서의 변화가 사회나 역사의 변화를 전일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토대 즉 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특정한 정세와 국면에서 정치적 실천 즉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접합과 헤게모니적 실천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거나 예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저자들의 논리가 전개될수록 양자택일적 경향은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 번 논의할 예정이다.)

     베른슈타인의 독점자본주의 분석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이 단계에서는 노동계급의 통일화보다는 파편화가 더 일반적인 경향이다. 현대자본주의에는 노동자의 분할의 경향이 각인되어 있다. 특히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의 분파적 이해관계가 자주 표출된다.

     따라서 파편화를 극복하고 통일화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은 토대가 아니고 자율적인 정치적 공간이고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당이다. 정통 맑스주의 당에서 정치적 통일성은 하부구조의 운동에 의해 달성될 통일성의 과학적 예견인 반면, 수정주의 당에서는 정치적 실천(접합)을 통해 정치적 통일성이 확보된다.

     그런데 자율적인 정치적 실천은 경제적 파편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노동계급의 정치적 통일성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베른슈타인은 진화 개념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경제적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성에 부과하는 윤리적 주체라는 초월적 주체를 설정하고 이 주체들의 실천이 진화의 법칙에 따라 성과들을 축적하고 역사적 상승과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 예상한다. 또한 진화의 과정은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조화로운 과정을 포함하며, 국가의 민주화는 역시 진화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확대될 것인 바,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조화로운 과정이 우위를 점할 것이다. 이 때 발전의 성과는 비가역적으로 축적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민주적 개혁의 점진적 연속체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의 자율적인 정치적 실천은 개량주의 및 점진주의와 조우한다. 진화의 법칙에 의해 축적된 점진적 성과들에 의해 노동계급의 정치적 통일성과 사회주의 달성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베른슈타인의 논의 속에서 이후 서구의 사민주의 정치의 경로를 예견할 수 있다. 적대의 포기-적대는 이 책의 핵심개념으로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전선으로 다양한 주체들을 결집시키려는 정치적 실천의 부족, 구체적이고 부분적 영역에서의 실천을 통한 성과의 지속적 축적을 통해 총체적 발전을 추구하는 전략 등등.. 이는 또한 한국의 현재의 합법 진보정당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은가? 당의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실용주의와 개량주의에 경도되어 있지만 대중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줄 실용과 개량을 확보할 역량이 없기 때문에 이마저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딜레마의 상황에 빠져 있는 당. 현재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의 지형이 카우츠키의 정통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대립 구도를 반복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러시아의 특수성과 레닌의 헤게모니 개념

 

     정통 맑스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의 논리에 따르면 역사는 정해진 단계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발전 단계에 따라 각 계급의 고유한 과업이 있다. 반절대주의-민주주의의 과제는 부르주아지의 과업이고 노동계급의 과업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즉 사회주의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에 따라 러시아에 선진자본주의가 이식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는 정치적으로 무력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서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의 과업까지 떠맡아야 하는 탈구가 발생했다. 즉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반절대주의(민주주의 과제라는 부르주아지의 과업)를 떠맡아야 했는데, 이렇게 노동계급과 이들에게 주어진 이질적 과업과의 이례적인 관계를 헤게모니라 불렀다.

헤게모니 과업의 존재는 사회적 공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즉 적대와 단절의 지점이 다양화된다. 절대주의 대 인민들의 전선, 부르주아지 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선 등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노동계급의 경우 헤게모니 과업인 반절대주의(민주주의 실현)와 노동계급의 고유한 과업인 사회주의 과업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도 매우 중대한 문제가 된다. 전선은 계급대립으로 단순화되지 않고 계급으로 포괄할 수 없는 대중(인민)들이 출현한다.

     그런데 트로츠키나 레닌에게 헤게모니 과업(즉 러시아 노동계급에는 반절대주의-민주주의 실현)의 실천은 노동계급 정체성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닌 과업일 뿐이며, 이는 사회주의 과업의 단계에서 얼마든지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된 노동계급의 본래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과업에 불과할 뿐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의하면 헤게모니 과업의 기간을 최대한 압축하고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해야 한다. 짜르와 귀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절대주의 투쟁에서 중요한 주체 중에 하나는 농민이다. 레닌은 이와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에 노동자 농민의 계급 동맹을 제안한다. 하지만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 두 계급은 항상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정체성은 반절대주의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적 공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이해관계에 의해 배타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레닌주의에 있어서 계급동맹의 주도세력은 당연히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의 실천적 중심성 때문이 아니라 존재론적-인식론적 중심성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보편계급으로 위상을 가지고 있고, 노동계급과 그 정당만이 과학의 보고(寶庫)이며, 그들만이 궁극적 목표(즉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보편적 주체이다.

 

     이런 인식에 의해 레닌주의는 두 가지 경향성을 띠게 된다.

     계급과 대중들의 분리, 과업과 전선의 중첩과 분산 등 복합적 상황은 전위와 대중의 분리를 촉진하고 전위의 지도의 필요성을 강화한다. 복잡한 지형에서 노동자 대중은 방향을 상실하기 쉬우며 전위(지식인)만이 계급적 대자성에 도달할 수 있고 따라서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인식론적인 특권을 지닌다. 특히 전위가 모인 정당은 인식론적 특이점으로서 과학의 독점 공간이다.(스탈린 시대에 가면 무오류의 전능성을 지닐 것이다.)

     또 하나는 헤게모니 과업 자체와 헤게모니 과업 수행을 위한 연대적 주체들을 매우 조작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출현한다. 그 이유는 노동계급과 그 전위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주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궁극적 과업 수행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레닌주의의 정치 용어는 군사용어로 전환된다. 전술적 제휴, 전략적 타격, 공세와 후퇴 등등.

     우리는 러시아의 볼세비키 당과 그 이후 세계로 퍼져 나간 공산당들이 왜 민주적이지 않고 권위적인지, 왜 개방적이지 않고 음모적인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레닌주의가 가지고 있는 헤게모니 개념의 결함에서 연유한다. 레닌주의에서는 헤게모니 개념이 오히려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온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적 과업은 부르주아적 성격만을 지니는 것인가? 복합적인 사회적 공간에서 왜 노동계급의 요구만 특권화되어야 하나? 사회주의가 건설되면(즉 생산수단의 사회화) 모든 억압과 불평등이 해소된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 또한 사회주의 건설까지 다른 요구들은 모두 수단화-주변화해도 좋은 것인가? 왜 사회적 정체성은 생산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정치적 실천은 정체성의 구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가? 등등. 이는 저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인 헤게모니의 민주적 실천이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요구와 이해와 적대의 다원성)와 결합의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그람시, 새로운 분기점

 

    그람시 사상의 종별성(특수성)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우선 그람시 사상이 후진적인 이탈리아의 특수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통일된 국민국가 형성의 지연, 북부와 남부의 강한 지역적 분할, 바티칸과 가톨릭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한 대중들의 근대적 정치의식의 미발달 등등. 이에 의하면 그람시는 불균등 발전의 독창적 이론가이지만 선진자본주의의 조건에는 적용할 수 없는 사상가이다. 반면에 그람시의 사상을 정치와 경제가 점차 얽혀가는 상황, 정치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발전한 국가, 시민사회가 두텁게 형성되 사회 등 20세기 이후 변화된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복잡해지는 대중투쟁의 이론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그람시는 이 양자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람시의 사상은 이탈리아의 특수성과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성의 결합의 산물이다.

 

     그람시의 초기 헤게모니 개념은 레닌의 계급동맹 개념에 의존한다.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다수의 노동인구(즉 농민)를 동원하기 위한 계급 동맹이며, 당연히 노동계급이 선험적으로 주도력(헤게모니)을 행사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이해는 분리되어 있지만, 공동의 적과 공동의 이해를 위해 동맹을 형성하며 노동계급은 이를 위해 농민의 이해까지 대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람시에게 결정적인 이행이 발생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정치적 차원에서 지적이고 도덕적 평면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계급 동맹은 특정한 정세에서 계급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일치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지적-도덕적 지도력은 특정한 관념과 가치 전체가 수 많은 부문 구성원들에게 공유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정세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적 이해를 충족시킬 사회주의와 새로운 삶의 양식, 새로운 윤리적 가치체계,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서의 사회주의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반드시 분리되거나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될 필요는 없다. 즉 후자의 내포에서 전자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자의 사회주의는 전자처럼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등으로 제한되지 않는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질 것이다.)

     그람시에 의하면 지적이고 도덕적인 지도력은 조합적-경제적 이해를 뛰어넘는 더 수준 높은 종합, 즉 집합의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집합의지를 매개로 이제 계급동맹 (경제적 이해관계의 공통적 실현을 매개로 하는)을 넘어 역사적 블록(공통의 가치, 지향성, 이데올로기를 공유한)이 형성된다. 역사적 블록이 공유하는 집합의지의 핵심은 이데올로기다.

     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는 관념이나 허위의식이 아니라 제도들과 장치들 안에 구체화된 유기적이고 관계적인 전체이다. (뒤에 가면 필자들은 모든 사회적 공간이나 사회적 관계들은 담론적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을 검토할 때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시 논의할 것이다.)

     또한 지적-도덕적 지도력의 핵심적 매개물로서 이데올로기는 헤게모니 계급(노동계급)의 일방적인 가르침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람시에게 정치적 주체는 계급들이 아니라 복합적 집합의지이기 때문이다.(한국의 노동계급을 보라. 노동계급이기 때문에 어떤 통일적인 정치적 정체성이나 주체성을 가지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노동자는 보수적-영남패권주의적 집합의지에 포섭되기도 하고, 어떤 노동자는 자유주의적-호남지역주의의 집합의지에 가담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규정된 계급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정치적 주체성도 생산하지 않는다.)

     나아가 헤게모니 계급에 의해 접합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 조차 필연적인 계급적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근대 부르주아 혁명을 상기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이 헤게모니 계급으로 지도한 혁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동되었나? 절대주의 체제의 낡은 특권세력을 타파하고 전체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 즉 인권의 확립이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였다.)

     그람시에게 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되는 것이다. 즉 노동계급이 국민-인민적 역사블록을 형성하고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의 실현이 아니라 새로운 국민-인민적 삶의 양식과 사회적 공간을 창출하는 것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헤게모니는 레닌주의와 다르게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 있다. 노동계급이나 그 정당은 전체 인민과 분리된 별도의 자기들만의 숨겨진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해가 특권화되지도 않는다. 인민적 블록의 다양한 요구가 모두 수평적으로 승인된다. 노동계급의 궁극적 승리는 경제적 토대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지도력을 발휘하고 국민-인민적 역사적 블록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람시에게 진지전은 역사적 블록을 사회적 공간 내에서 지속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과정이며, 하나의 지배적 문명이 진보적으로 분해되고 새로운 계급적 핵심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문명이 구축되는 과정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1장과 2장의 내용입니다. 3장과 4장에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더 급진적으로 계승, 해체, 재구성하면서 저자들의 논의를 전개해 나갑니다. 접합, 적대, 등가, 헤게모니 등에 대한 개념들의 정의가 매우 어렵게 설명되고 현대사회의 분석 속에서 급진민주주의 혁명과 헤게모니적 접합의 결합을 주장하게 됩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은 적대와 등가에 기초한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진보적 블록을 창출해야할 절실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또한 블록의 창출이 가능한 충분한 정세적 주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호에는 저자들의 기본 개념을 알아보면서 한국사회의 분석을 통한 우리에게 주어진 진보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8-사회변혁이론고찰(92-9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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