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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0(2016.05.09. 발간)

 

[담론과 문화] 윤주의 육아일기

#20. 세월, 그 은혜로움에 대하여.

 

김윤주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마흔 둘이 되었다. 아기를 낳아서 아주 좋은 점이 있다면, 세월 가는 것과 나이 먹는 것이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 아기도 한 살 더 먹으니까. 이대로 곧장 오십이 된다 해도 쌩유 앤 베리굿! 그럼 아기가 열두 살~오호! 개고생 점프. 이게 웬 횡재냐고요~~.

 

아이를 낳기 전엔 세월에 대해 막연한 위기감 같은 게 있었다. 결혼/출산/육아처럼 남들 대부분이 하고 사는 걸 안하고 사는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강박이랄까. 이를테면 지적, 사회적 성취라던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헌신, 하다못해 남들보다 배로 주어진 시간의 여백에 걸맞는 무진장한 즐거움과 자유를 누려내야 한다는 조바심 말이다. 남들이 한 생명을 키워내는 동안 그 정도는 해내고 누려야 나중에 늙어 후회하지 않을까싶은, 뭐 그렇고 그런 아주 흔한 불안감. 그렇다고 뚜렷한 정체도 없는 그 불안이 굳이 더 빡세게 살 동력이 되는 건 아니라서, 난 그저 남들보다 좀 더 한가하고 게으르게 살 따름이었는데, 해가 바뀌고 나이에 숫자하나가 올라가는 그 순간이면 어쩔 수 없이 좀 심란해지곤 했다. 이룬 건 없이 모든 게 그대로인데 몸만 늙어가는구나. 잔인한 세월~~.

 

그러나 에헴, 그건 뭘 모르는 소리! 생애사적으로 볼 때 세월이 얼마나 은혜롭게 작동하는지 아기 키우며 알았다. 시간은 성장기에는 폭발적으로 작동하지만, 늙어감에 대해서는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만 그저 조용히 삶에 스며든다. 그러니 나이 먹을수록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걸테지. 의식할 수 없으니까. 지난 1년간 나의 늙음이 1이라면, 아기의 성장은 1000. 그러니 아기를 낳아 키우는 그 순간부터는 가는 세월 = 개이득.

 

이제는 특별히 무언가를 일궈내지 않더라도 시간이나 나이에 대한 불안감이 없다. 보통의 성취나 헌신이란 것은 지적/관계적 구성을 끊임없이 자기강제 해야만 지속가능한데, 의식적인 노력, 그게 참 고단한 거다. 아기 키우는 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헌신을 수반하긴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덜 고단하다. 제 새끼에 대한 애착과 모성애는 타고난 거니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한 평생 육아노동의 엔진이 된다. 아이 뒤치다꺼리란 것은 먹고 싸고 자고 사랑하는 일상의 매뉴얼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라 그 속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웃고 울고 짜증내고 행복해하고 걱정하고... 한 마디고 걍 살다보면 되는 거니, 세월 그 자체가 내 노동이자 성취 아닌가.

 

한 풀 젊음이 꺾이고, 하릴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를 때 쯤, 아기를 통해 하루하루의 흔적이 따박따박 남는 느린 세월이 다시 한 번 도래한다. 이토록 인간생애의 모든 걸 꿰뚫고 그에 상응한 속도와 기능을 베푸는 갓세월느님, 내 당신만 믿겠수다.

   

# 21. 생명에 대한 예의.

   

첫 아이가 태어난 후 그 부모가 느끼는 불행감은 배우자를 잃었을 때보다도 크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연구 경로를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사실 크게 신뢰하진 않는다. 2세의 탄생은 내 일상을 완전히 리셋 시키는 사건이므로, 또 다른 행복감의 출현과는 별도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데, 그 스트레스 수치에 연구의 중점을 맞추자면 가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신에 중차대한 상해를 입는 극단적인 사건을 제외한다면, 우리 인생에서 내 11초를 장악하면서, ‘내 삶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는 충격적인 천명을 명백하게 자각해버리는 사건이 아기의 탄생 외에 또 있겠는가.

여튼 내게 누가 이런 질문을 해온다면, 삶의 질이 훅 간 건 맞는데, 내 삶의 질보다 아이가 소중하니 딱 잘라 대답하기는 꺼려질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웬수/애물단지”, “무자식 상팔자같은, 자식 키우는 애환을 구수하게 자조한 옛 표현이 정말이지 지혜롭다. 자식의 탄생과 더불어 한평생 짊어지게 되는 숙명 같은 고단함을 애써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내 지독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함축하고 있는 저 표현 말이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이 고단한 짝사랑을 한탄하는 것이니, 말하는 부모도 안 찜찜해, 듣는 자식도 안 슬퍼. 부모와 자식 두 존재를 동시에 긍정하고 위로하는 참 훌륭한 표현.

 

어찌됐건 나는 이 연구가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2세의 탄생이 단순히 스트레스나 디프레스가 아닌, “불행감이라고 표현될 수위의 생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유발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내가 본 그 어떤 부모도 그런 종류의 마음을 일체 진지하게 발설하거나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 연구결과가 공공연하게 떠들어지지 않는 것도, 산모의 생리적 홀몬 변화에 국한한 산후우울증만 주구장창 얘기되는 것도 아마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 왔고, 나에게 제 존재자체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저 연약한 생명은 부모에게만은 오롯한 기쁨의 존재로서 축복받아야 하리. 그것이 내가 잉태한 생명에 대한 예의라는 것!

신기하기도 하지,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 태도만은 필사적으로 사수한다는 게 나는 못내 뭉클하다. 아이 없이 살 때의 그 존재적 자유로움, 유유자적한 일상이 한순간에 빼박 책임감과 전쟁 같은 하루살이로 바뀌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너무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으니 괜찮아^^” 라고 쿨하게 퉁 칠 수 있는 강도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게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실생활에서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사람들조차 자식에 대해서만은 그 존재의 축복을 욕보이는 생각과 말을 본능적으로 삼간다는 것. 혹시 나만 뭉클한가?

아이를 두고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이들조차도 생전에 아이는 내 삶의 버팀목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것을 직간접적으로 봐왔다.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절망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존재는, 그들이 보살펴야할 아이가 아니라, 그들을 보살펴 줄 연인이나 벗, 후견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죽음 그 직전까지도 아이가 자기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선물이었는지를 기도문처럼 말하고 또 말했다. 필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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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 는 말에 상당한 저항감을 갖고 있지만, 아이를 키운 지 3년이 지난 지금, 그 말 한 켠에 묵직한 진실 하나가 우두커니 앉아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인간이 자식 외에 어떤 연약한 존재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이토록 전 생애에 걸쳐 철저하고 필사적일 수가 있을 것인가.

돌이켜보면 인생의 모든 찰나가 살 궁리의 연속이었는데, 내 몸이 태어난 순간 내 생명의지가 함께 탄생했듯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의 몸은 이 아이와 더불어 살기 위한 궁리로 리셋되는 것 같다. 생생한 내 경험으로 깨달은 바다. 나는 아이 신생아기에 수면제도 듣지 않는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는데,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을 즈음, 아이가 제 힘으로 뒤집고 길 줄 알게 되면서 저절로 대폭 완화되었다. 아기가 절대적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에 내 몸은 24시간 극도의 각성상태로써 아기의 생존에 최적화되었다가, 영아돌연사의 위험이 사라질 즈음 나를 좀 더 위해줌으로써 나와 아기를 함께 살렸다. 그 당시 내 눈에 아기는 바람 한 줌에도 풀썩 주저 앉아버릴 듯한 코스모스처럼 보였다. 마음을 아무리 편히 먹고자 해도 반란의 몸은 단 한순간도 긴장의 스위치를 끄지 않아 환장할 것 같았는데, 이제 아기가 제법 딴딴한 꽃잎이 빼곡하게 들어찬 국화쯤으로 보인다. , 살겠다! 아직은 매일 물도 주고 병충해 관리도 해주어야 해서 나는 여전히 피곤하지만, 언젠가는 뭉툭한 선인장처럼 보일 날이 분명히 올테니 견딜 수 있다. 어미의 몸은 아기와 모체, 두 개의 생명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그것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후 내 맘은 좀 더 편해졌다. 어르신들이 자식 다 필요 없다, 내 잘 사는 게 최고!”라고 속 편히 외칠 수 있게 되는 것도, 내 심신의 쇠잔함을 보살피며 내가 행복한 노년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자식과 나 둘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몸의 소리를 듣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한가운데서 또 다른 생명을 통해 동일한 강도의 생명의지가 다시 한 번 탄생하는 체험, 그래서 내내 주기만 해도 별로 빡치지 않는 실로 드라마틱한 자아의 확장은... 그렇습니다, 강력한 성숙의 체험으로 판결합니다! 꽝꽝광!

  

#22. 아줌마.

   

임신 막달과 체중이 같아졌다. 임신 살이 안 빠진 게 아니라, 출산 전 몸무게로 돌아갔다가 서서히 다시 컴백했다. , 진짜 이해할 수가 없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맘 편히 깊은 잠을 잔적도 없고, 여유시간조차 푹 퍼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종종거렸는데 대체 왜?!!!!

체중계를 내려오며 울분을 토하는 나를 볼 때 마다 남편은 기가 차 한다. 자기가 보기엔 하루 종일 먹고 운동을 전혀 안하는 게 명백한 팩트고 그러니 살찌는 게 당연한데, 왜 이 정의로운 심판을 갖고 과격한 규탄사를 내뱉는 거니? 란 거지.

내 말도 사실이고, 남편 말도 사실이다. 왜 그런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애 엄마의 일상을 겪어본 사람이면 다 아는 것들이니 생략. 여튼 출산 전까진 아무리 내 맘대로 먹고 퍼져 생활할 때조차도 절대 넘지 않는 체중의 마지노선이 있었는데, 그 마지노선을 5키로나 돌파한 것을 보니, 신진대사율 자체가 떨어진 것 같다. 출산이나 연령증가로 인한 대사율 저하는 아닌 것 같고, 어떤 정적인 심신의 상태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

어떤 엄마들은 애 어린이집 보낸 뒤에 헬스도 하고 공부도 하더만 어휴, 독한 여자들 같으니. 난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현재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를 한 나절 내내 어린이 집에 보내는 전업주부 되시겠다. 가사와 육아도 꼭 필요한 것만 겨우 해치우는 열성 없는 주부 맘이라서 하루일과는 무지 널널, 아기도 완전 졸귀. 이상도 하지, 대체 왜 이렇게 항상 피곤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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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자식이전의 세계를 붙잡은 채로 자식의 세계를 산다는 것.

  

가끔 나는 자식이 커서까지도 자식과 자신을 일심동체로서 완전히 동일시하는 유형의 엄마들이 그렇게 되어간 마음의 행로가 그려진다.

앞서 언급했던 연구가 말하는 불행감의 실체는 이를테면 이런 것일 것이다. 아기 이전의 내 세계를 끝까지 놓지 않고 기억 한 편에 붙잡고 있으면서, 실생활은 전적으로 아기에게 맞춰 살아야하는데서 오는 상실감 그리고 두 세계를 헤매는 정신적 피로감.

그래서 불행감의 원흉이자, 붙잡고 있어봤자 지금 당장은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이전 세계를 잠시 지워버리고 자식이라는 한 가지 세계를 사는 생존전략을 택하는 거다. 그리 보면 일심동체 엄마들이 자아독립성을 지켜낸 엄마들보다 더 강렬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그저 그 불행감을 인정하면 되는데, 인정한다고 아이로 인한 행복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부모 된 본능이 너무 강하다보니 어린자식으로 인한 불행감을 인정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아예 싹을 잘라버린 것일 테니까.

때때로 아이 키우는 생활이 지루하다는 마음이 들 때면 나도 그렇게 맘 먹어볼까 하는 유혹이 일었다. 그 싹을 자르고 나면 자식 키우는 게 얼마나 더 신바람 날까. 신바람이 날수록 더 몰두하게 되고 팽창하는 자식의 세계. 그 신바람으로부터 절대 벗어나고 싶지도, 벗어날 수도 없는 상태로 접어들고 나면, 너와 나는 한 몸의 샴이 되어 서로를 결박하겠지.

 

그리하여 나는 상실감과 피로감을 견디는 채로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충분히 견딜 만하다. 아이가 내 삶에 남기는 사랑과 행복의 족적은 이 사소한 불행감보다 훨씬 깊고 원대하다는 것.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성령이 역사하듯 훅 하고 내 맘 깊이 자리 잡은 그 확고한 믿음이 새삼 경이롭다. 마치 환웅이 비/바람/구름 신을 끌고서 지상으로 내려왔듯이, 모든 자식들은 부모에게 올 때 그 믿음도 같이 끌고서 온다. 세상 모든 아기들은 이 탄생신화의 주인공들이다.

  

#22-2) 매력은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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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행한 것을 나열하는 일상수다나 남을 교정시키기 위한 잔소리를 전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삼가는 게 아니고 진짜로 그런 말은 하기가 너무 귀찮고 힘들다), 아기 발달단계 상 일상수다와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야만 하는 게 최고의 고역이다. 그러다 때때로, 예를 들면 유모차를 끌고 갈 때나 TV를 볼 때 아무 말 없이 멍 때리며 한숨 돌리게 되는데, 내가 입을 다물면 대번에 찡얼찡얼, 자기를 방치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아기. 그럼 다시 수다 모터 작동, “~저기 꽃이 피었네! 히야~~ 꽃향기 좋다.” “바람 분다! 아이 추워~~” 당면한 오감의 정보를 풀이하는 쫑알쫑알~~~아이와 있는 동안은 모든 말이 아이의 언어발달과 개념인지, 생활습득을 촉진하는 말로 구성되며, 오랜 침묵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이고, 대체 나는 언제까지 쫑알거려야 되는 것이냐.

내가 사랑하던 말의 세계 (농담짓거리 혹은 허심탄회한 감정이나 밀도 높은 지식의 교류)는 사라지고, 가장 취약하던 말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말하기가 지칠 때면 노래를 불러주곤 했는데,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도 너무 잦아서 그조차 지치면 걍 닥치고 껴안아버린다. 깨물깨물 쪽쪽 뒹굴뒹굴 쪽쪽, 깨물 쪽 뒹굴 쪽, 깨물뒹굴 쪽쪽. ‘물빨이 제일 쉬웠어요.’

다른 엄마들은 어떨까 싶은데, 오가며 보아온 애 엄마들은 대체로 수다가 너무 심하거나, 아니면 진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뚝뚝하고 무표정했다. 아마도 아기 키우며 꺼둘 새 없이 말 모터를 풀가동 하다 보니 전원의 온오프기능이 사라져 버렸거나, 모터 자체가 녹 쓸어버렸거나.

학력과 경제적 상황이 나을수록 이전의 나이스 걸 애티튜드를 그나마 좀 더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조금이라도 더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는 물리적, 심리적 조건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쳐도 미모/태도관리가 잘된 애 엄마와 평범한 수준의 애 엄마 아닌 여자를 같은 또래에서 차출해 함께 세워두고 관찰한 후, “이 중 애 엄마는 누구일까요?” 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높은 확률로 맞출 자신이 있다. 이건 내가 애 낳기 전 부터도 그랬다. 애 엄마 쪽이 피부도 더 좋고 더 날씬하며 더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내 눈엔 아기가 없는 쪽이 뭔지 모르게 더 어려 보이곤 했는데, 그 기묘한 젊고 늙음의 기운을 가르는 게 바로 자식 키운 세월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온전히 내 시대를 사는 존재와, 내 시대를 사는 채로 (혹은 내 시대의 커튼을 완전히 내린 채로) 또 다른 시대의 스태프가 되어 무대를 지원하는 존재에게서는 분명히 다른 기운이 풍겨난다.

뭐랄까, 자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주인공의 기운이 있다. 각자의 인생스토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조절할 필요가 없는 원탑 주연배우.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드라마의 장르와 주인공 캐릭터는 다양한 법이니, 그녀가 어떤 사람이건 뷰파인더는 그에게로 맞춰진다.

그에 반해 애 엄마들은 더 이상 주인공만 고집해서는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왕년의 주연배우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지금은 에피소드의 한 꼭지를 담당하며 탄탄하게 드라마를 받치고 있는 조연배우의 자의식 같은 것이 그들의 분위기에 녹아있다. 드라마의 흐름이 방해되지 않는 수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조절하며, 자신의 역할에 자긍심을 잊지 않는 노련한 중견배우의 분위기 말이다. 이게 그녀들이 노숙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이 끌어가는 에피소드는 주연배우가 끌어가는 메인스토리에 비해 희로애락의 농도와 주제의 에너지가 희석되어 있는 대신, 메인스토리의 진부함과 극성(劇性)으로부터 드라마의 담백함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삶의 환타지가 걷힌 말간 자태. 다음 시대의 무대에서 새 시대의 환타지를 탄생시킬 오랜 배경 노릇을 할 그 말간 자태가 새삼 애틋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아줌마를 매력 없게 느끼는 까닭은, 나와 함께 있는 저 사람이 같이 요번 무대의 총평을 나누며 술 한 잔 기울일 틈도 없이, 다른 무대의 스태프 노릇을 할 궁리로만 마음이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줌마. 매력은 없지만 알고 보면 애틋한 존재. , 그런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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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자유가 떠난 자리.

  

얼마 전 두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한 친구는 열애 중이었고, 다른 한 친구는 오랜 솔로. 친구들의 재잘재잘 근황을 듣고서 내가 한 말은? “부러우니까 둘 다 닥쳐.”

연애하는 기분이 그리운 거야 모든 아줌마들의 공통된 감정이지만, 솔로친구의 외롭다는 감정조차 노스텔지어로 사무쳐 온 건, 외로움도 자유의 식솔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식솔을 다 데리고 집나간 후, 한동안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소식이 끊겼던 자유가 불현듯 나타나 내 귓전에 대고 속삭인다.

 

안녕? 내 이름은 관능이라고 해

나와 주구장창 함께 붙어있을 땐 네 이름이 지리멸렬이라고 하지 않았어?”

, 난 항상 떠난 인간들한테만 본명을 까지. 그럼 잘 있어^^”

 

자유, 이 요망한 년ㅎㅎ. 그래 너도 부디 잘 살아라.

스무 살에 독립한 후, 나는 내내 자유랑 동거하였으니 그가 주렁주렁 딸고 들어온 그의 식솔들이 지겨울 만도 했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유혹과 혼돈, 사랑의 기쁨과 허망함, 홀가분함과 불안감, 여유로움과 방만함, 가역성과 한시성, 가뿐함과 외로움이 모두 자유의 식구였다. 이 모든 것들이 관능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그 때도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지겹도다, 너의 식구들이여!

이렇게 나는 자유를 내보냈고, 자유의 관능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자리 잡았다. 내가 원했던 진짜 식구가. 원했던 바대로, 그것들은 따사롭고 타당하고 묵직하여 영원하리라는 믿음을 준다. 오랜 세월 자유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나는 그것들과 살 것이다.

가끔은 자유와 함께 지낼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너와 나는 진짜 찰떡궁합이었는데, 그 때 난 왜 그렇게 네가 지겨웠을까.’

네가 지겨워진 걸 눈치 까자마자 그렇게나 서둘러 떠날 것까지야... 이름값 인정한다

가끔 네가 그리워....내 귓가를 간질이며 너의 이름을 실토하던 네 모습이 아른거리는구나. 그러나 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원치 않는다. 너와 내 새 식구들은 같이 살 수 없을 테니까. 부디 꿈에서 찾아와주렴.’

 

이토록 흔하디흔한, 모든 아이엄마들의 한결같은 이야기. 노래나 부르며 마무리하련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모두 다함께~ ~~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꿨노라 말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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