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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9(2015.12.15. 발간)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

겨울잠에서 꿈을 긷는 음악

 

송재혁 / 전교조 대변인

 

 

 

민중총궐기를 고작 평화와 폭력을 가르는 시험대 정도로 간주하는 언론의 보도나 여론을 보면 품은 꿈의 실현 시기를 다시 계산하게 된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겨울이 더 길어질 모양이다. 겨울이 왔으니 겨울잠은 자되 꿈을 길어내는 밤이 되어야겠다. 겨울잠을 대비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본다.

 

 

항쟁 유적지를 내려다보는 광주의 음악감상실 베토벤

 

광주항쟁의 유적지인 전남도청과 분수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오래 된 음악감상실 베토벤이 있다. 19825월 문을 열었으니 한국 현대사의 기쁨과 슬픔이 새겨진 공간이다. 맞아 죽지 않으려고 장교가 되어 광주 상무대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시절, 이곳은 주말마다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5월만 되면 군복 입은 사람들에 대한 시민들의 적대적인 시선이 느껴지던 시절, 군발이 복장으로 들어서 홀로 앉았던 단골 자리 옆에는 벽돌 낙서판에 있었다. 당시 새겨 넣었던 군사문화를 저주하는 낙서는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주인장께서는 손님이 오건 말건 베토벤만큼 고집스럽게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어머니의 고향인 빛고을 광주에 갈 일이 생기면 꼭 짬을 내어 이곳에 들러 수십 년의 세월을 곱씹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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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완전히 문외한인 내 눈에 쏙 들어온 그림이 이 감상실의 벽에 걸려 있다. 작가 이름과 작품명은 들은 후 또 잊어버렸지만 기억 속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비스듬한 언덕이 검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단순한 구도에는 지상의 꿈과 하늘의 꿈이 교차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 미술 평론가의 비웃음을 살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밤하늘 쳐다보기를 즐겨했던 나를 동심에 젖게 하는 그림이다. 이 소박한 그림을 볼 때마다 귓가에 어른거리는 음악이 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71악장의 첫 부분이다. 그림의 구도처럼 삐딱하게 시작한다. 기괴한 현의 긁힘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만, 이어지는 호른의 조성을 이탈한 낭만적인 울림과 목관의 되받음은 밤하늘의 별 사이를 떠다니는 느낌을 준다. 공감하시는 분께는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가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의 1971년 녹음(DECCA)을 선물하고 싶다.

 

 

땡땡이의 추억

 

10여 년 전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벌어진 집회에서 살짝 빠져나와 분회원들과 함께 예술의전당에서 말러 교향곡 7밤의 노래를 연주한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지휘, 체코 필하모니의 공연을 봤던 추억이 떠오른다. ‘길 위에서 듣는 음악이라는 칼럼을 올해 주간경향에 연재하고 있는, 인문학적 축구해설가이자 문화비평가로 이름 높은 정윤수 님은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가 다소 죄책감을 안고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이 연주한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들었다며 부분적으로 변명인 칼럼을 썼다. 이 글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는 우선 나 또한 그런 몹쓸 전과가 제법 있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3’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했다는 "절망보다는 분노가 더 쓸모 있다"는 말을 문두와 문미에 배치한 이 칼럼은, 바흐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 속에서 마태수난곡이 가졌던 의의를 잘 표현해 주었다. 바흐는 교회 권력에 굴종하며 작곡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환경을 견디면서 교양인의 라틴어가 아닌 저잣거리의 독일어로 걸작을 완성했는데, 칼럼은 이 작품으로 구 시대의 막차를 떠나보냈고 이를 새 시대의 첫차로 삼았다고 썼다.

 

 

성탄절 무렵 듣는 수난곡(Passion)

 

11월부터 반짝이기 시작하는 거리의 성탄 트리는 대체로 역겹다. 물건 사러 들어오라며 소매를 붙잡는 뻔뻔한 호객꾼처럼 되어버린 거리의 성탄 트리에서 마태수난곡의 예수를 연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트리의 현란한 불빛 넘어 드리워진 을씨년스럽고 짙은 어둠 속에 예수가 보이는 듯하다. 어렸을 때 성탄극에서 동방박사 역을 맡았고 교회에서 빵과 과자도 얻어먹은 경험이 있는지라 여전히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기는 하지만, 이맘 때 즐겨듣는 곡은 예수의 탄생을 그린 헨델의 메시아가 아니라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다. 좋아하는 음반 중에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지휘한 라 쁘띠 방드1989년 녹음(deutsche harmonia mundi)이 있다. 기본 구도가 소박하면서도 극적인 긴장 또한 놓치지 않은 균형 잡힌 연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음반 표지에 담긴 그림은 예수 탄생의 의미를 참으로 아프게 보여준다.

 

이 곡의 백미는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신음하는 예수, 그를 조롱하는 무리들의 신랄한 야유, 조용히 숨을 거두는 장면,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경건하고 절절한 기도, 이어지는 천재지변, 그리고 그의 진정한 위대함에 대한 조용한 승복의 장면까지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합창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무릎 꿇고"에는 절정의 숭고미가 넘친다. 이제는 유물론자에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서구 종교음악에 많이 끌림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에 대한 남은 갈망이나 정화의 경지를 보여주는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던 예수의 삶이 주는 각별한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인 종교음악

 

마태수난곡이 가진 오페라 못지않은 극적인 면모를 대편성으로 표출한 칼 리히터 지휘, 뮌헨 바흐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1959년 연주(Deutsche Grammophon, Archiv)은 불멸의 명반인데, 이들의 1971년 연주는 한글자막 처리된 디비디(DVD, Unitel)로 나와 있다. 최근 사이먼 래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니의 2010년 연주 영상이 블루레이와 디비디(DVD) 합본으로 나왔다. 베를린 필하모니 자체 레이블로 만들어진 이 영상물은 마태수난곡의 본질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연출가 피터 셀라스의 기획 하에 성악가와 합창단의 연기가 펼쳐진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롱하는 군중의 합창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부분은 이 곡이 전례에 따르는 단순한 종교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베를린의 필하모니 홀 무대 위로 나지막하게 백열등이 켜져 있다. 마치 시골 오두막 안을 밝히는 전등 하나처럼 보이는 이 장치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신의 계시가 아닌,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영상에 펼쳐지는 극적인 구성과 더불어 한글자막이 이해를 크게 돕는다. 내용은 같지만 패키지가 다른 일부 수입품들은 한글자막이 없으므로 구입 시 주의가 필요하다. 글쓴이와 음반업자 사이에 아무런 유착 관계가 없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강조해야겠다.

 

 

주여, 10억을 주옵소서?

 

"주여, 정원 교회(garden church)를 건립할 수 있도록 10억을 주옵소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예배 중 졸다가 목사님의 이 경악할만한 기도를 듣는 순간 교회를 그만 다니기로 결심했다. 성경 공부 선생님은 당시 어느 실업계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교회를 나서는 나를 미련 가득한 눈으로 오래도록 지켜보셨다. 그 목사는 어느 사립 여자 실업계 고등학교의 이사장인데, 운동장을 파서 교회를 짓겠다는 계획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교조 활동하면서 듣게 되었다. 3 때 기특한 결정을 했다는 생각에 내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어 주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을 분노로 내쳤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일반적으로 돈과 너무 친해 보인다. 재물(낙타)을 버리고 작은 문(바늘구멍)을 통과해야 성문 밖 민중과 하나 될 수 있음(천국)을 잊은 것 아닐까.

 

대학 진학 후에도 무교로 지내다가 4학년 때 영화관에서 본 로메로(Romero’는 나의 발길을 성당으로 인도했다.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종교라면 가까이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공부해서 합격하지 않으면 신자가 될 수 없다기에 공부 싫어하는 천성으로 포기하고, 대신 해방신학을 책으로 믿었다. 세속과 결별한 게 아니라 이 땅의 불행을 해소하기 위해 권력과 일전도 불사하는 정의로운 사제들의 신학은 종교에 대한 환멸감을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려면 말과 기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니 손발을 움직여야 한다고 일깨우는 메시지는 알티(ROTC)의 노선을 흐트렸다.

 


로메로 신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 보며 이 처럼 창피할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린 것은 1989년 개봉된 로메로(Romero)’ 외에 2012년 말 박근혜 당선된 직후 개봉된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 작곡 뮤지컬의 영화 버전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 거의 전부 아닌가 싶다. 엘 살바도르의 평범한 사제였던 로메로는 독재정권 횡포와 민중의 처참한 삶에 대해 각성한 후 해방신학자가 되어 용기 있는 사회적 발언을 하지만, 광주 학살 직전인 19803월 미국제 M16 소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그의 생전 발언과 설교는 대중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고 그의 암살 이후 6만 민중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엘살바도르의 참상은 80년대 한국 현실과 너무나 닮은 것이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영화관은 한동안 불이 켜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학생이었던 관객들이 너도나도 흐느껴 울었기 때문에 극장 측이 배려해 준 것인데, 자기네 가게에서 비싸게 파는 팝콘만 입장 허용하는 요즈음 멀티플렉스에는 기대하기 힘든 미덕이었다.

 

교회 다니는 학생들에게 기독교기독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아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예배 보고 나오는데 길에서 누가 째려봐서 두들겨 팼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학생에게 그렇게 해서 천국 갈 수 있겠냐고 주제넘게 훈수한 기억도 난다. ‘이슬람을 모조리 테러 분자로 아는 아이들에게 이슬람의 뜻을 물어보면, 알라신을 믿는데 왜 이슬람교라고 하는지 의아해한다. ‘역전앞과 같은 모순을 가진 알라신이라는 말을 여전히 즐겨 쓰다 보니 이슬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을 리 없고, 그리하여 미지의 존재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만 넘친다. 밤길 전등 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해와 사랑이 아니라 증오와 배제의 근거가 되어버렸다면 종교가 아니라 미신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절 밖으로 내치라는 조계사 일부 신도들과 스님들의 무자비함은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또 한 번 접게 만든다. 그들의 폭력은 마태수난곡에서 예수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무리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보다 나은 세상 만들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돕거나 감싸기는커녕 마녀사냥으로 잡아 사탄마귀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 일부 종교인들의 광태를 어찌해야 할까. 한상균 위원장은 우리 시대의 예수이다!

 

 

나의 조국?

 

이 영화에서 군인들이 신부님과 아이들이 탄 차량에 총격을 가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이 때 신부님의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스메타나가 작곡한 연작 교향시 나의 나라(Má Vlast)’ 중 두 번째 곡 몰다우 강(블타바 강)’이었다. 5월 광주 도청 앞 분수대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할 때 애국가가 흘러나왔음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장면이다. 박정희 작사작곡 '나의 조국' 따위가 차라리 더 어울릴 텐데 하필이면 아름다운 명곡 블타바가 사용된 덕에 이 장면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다. 한편 지금도 궁금한 것은 이 탁월한 전 국민용 군가 나의 조국과 더불어 새마을 노래를 진짜로 박정희가 만들었냐는 것이다. 스메타나의 작품 제목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나의 조국이라 하지 않고 굳이 나의 나라로 고쳐 쓰고 있는 이유를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체코 출신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이 40여년 만에 자기 나라에 돌아와 1990프라하의 봄축제에서 체코 필하모니와 연주한 스메타나의 나의 나라실황 녹음은 연주의 배경으로 인해 각별한 감동을 안겨준다. 체코의 수프라폰(Supraphon)’에서 나온 음반이다.

 

권력과 나란히 그네 타지 않으면 법 밖으로 확 밀어버리는 살벌한 세상이 오니 오래 된 영화 로메로를 다시 꺼내 보게 된다. 흔히 말하듯 지금은 80년대와 다른가? 극단의 폭력인 고문만 없어졌을 뿐, 고문만큼 잔인하고 간교한 통제 기재들은 민중으로 하여금 자기를 갉아먹어도 좋다고 스스로 허하도록 조종하고 있다. ‘노동개악노동개혁으로 받아들이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노예적 삶을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약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 ‘Dona dona’ 가사에 나오는 송아지 신세로 전락하게 될지 모르겠다.

 


돈아, 돈아?

 

수업 시간에 도나 도나(Donna donna 또는 Dona dona)’라는 노래를 가르쳐준다. ‘돈아, 돈아(money money)’가 아니고 돼지 부르는 소리도 아니므로 자본주의 찬가일리 없다. 검색 결과에 따르면 도나 도나는 히브리어로 , 하느님'이란 뜻이라고 한다. 세쿤다 숄롬(Secunda Sholom, 1894-1974)이라는 유태인 작곡가가 만든 곡으로, 가사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 시인 카체넬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사에서 송아지학살되는 유태인’, 또는 나라 없이 떠도는 유태인으로 볼 수 있다. 유태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짓을 보면 자기들의 수난을 통해 교훈을 충분히 얻지 못한 것 같다. 잔혹한 식민지와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던 우리 역시 외국 또는 외국인에게 해 온 짓이 유태인보다 낫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업용으로 직역에 가깝게 가사를 다듬었다. 3절로 된 노래에는 후렴이 반복된다.

 

시장 가는 마차 위에 슬픔에 잠긴 눈을 한 송아지가 있네. 송아지 위로는 하늘을 재빠르게 날아가는 한 마리 제비가 있네. / 농부가 말하기를, "불평일랑 그만해라. 누가 너더러 송아지가 되라고 했냐, 저 당당하고 자유로운 제비처럼 날 수 있는 날개를 갖지 그러니?" / 송아지들은 쉽게도 묶여서 도살당하네. 영문도 모르는 채로; 하지만 누구든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자는 저 제비처럼 날아가는 법을 이미 배웠지.

 

후렴 : 새들이(바람이) 얼마나 비웃던지 있는 힘 다해 그들은 웃지요. 대낮 온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밤의 절반마저 웃지요. , 하느님(Dona dona .......) ”

 

도나 도나는 미국의 저항운동가이자 반전 가수였던 조운 바에즈(Joan Baez)가 부른 1960년 앨범도 유명하지만, 핀란드의 타피올라(Tapiola) 어린이 합창단이 핀란드어로 부른 연주는 천진난만한 음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조롱의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북유럽과 세계 민요를 노래한 음반, ‘다리를 놓은 노래들(Songs Building Bridges)’의 한 트랙이다(에르키 포욜라 지휘, 1980~1983년 핀란드에서 녹음, Finlandia). 한국 노래는 없고 일본 민요가 담겨 있지만 표지에는 한복 입은 아낙네들이 등장하니 이상하다. 이 핀란드 음반을 구하는 것은 교총 회원 전교조 가입시키기만큼 어렵다. 관심 있는 분께 행운이 함께 하기를!

 

 

우애 넘치는 수수께끼

 

우리도 사람인지라 동지들 간에 가끔은 까칠하게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사상의 차이, 입장의 차이, 개성의 차이가 조금 있더라도 세상의 뭇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이질성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일 것이다. 민중총궐기 국면에서 폭력이 평화로 둔갑하고 평화가 폭력으로 매도당했다. 이에 동조한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한 사회 안에서 똑같은 것을 보고도 이렇게 판단이 다를 수 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넘어서야 할 거대한 상대 앞에서 우리 사이의 작은 차이는 따뜻한 방식으로 녹여내야 할 것 같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s)’이라는 특이한 작품을 남겼다. 하나의 주제를 변화무쌍하게 변주하면서 각각의 변주곡들을 주변 인물들과 연결해 놓았다. 각 변주에 영문 이니셜이나 실명 또는 부호로 제목을 붙여 놓고는 누구게?’ 하고 수수께끼를 냈다. 각 변주에 반영된 주제를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수수께끼다. 변주가 너무 심해서 제 각각 다른 곡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주제에 바탕하고 있다. 이렇게 곡을 쓰고는 수수께끼 변주곡이라 명명하는 센스쟁이 엘가.

 

9 변주 님로드(Nimrod)’가 특히 유명하다. 사람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곡은 짧은 제8 변주 ‘W.N.’의 여운에 이어서 들어야 제 맛이다. ‘님로드에서 풍기는 이미지를 짧게 써보라는 단답형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하겠다. "우정 어린~". 영화 , ’(‘색계아님)에서 홍콩의 대학 연극부가 반제국주의 투쟁 의지를 고양시키는 극을 공연할 때 레코드판으로 재생한 배경 음악이 이 곡이다. 홍콩과 영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선곡으로 보인다. 단조로 시작하는 기품 있는 주제에 이어지는 제1 변주에는 센스 있게도 자기 부인을 배치했다. ‘C.A.E.’ 엘가의 아내인 캐롤라인 앨리스 엘가(Caroline Alice Elgar)’이다. 음반으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BBC 심포니의 연주를 추천하고 싶다(1982, DG). 우애를 듬뿍 담아 느려터진 연주여서 악평도 있지만 내가 듣기에는 좋기만 하다. 아울러 롤프 클라이네르트가 지휘한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동독 시절 녹음(1971, ETERNA)도 추천하고 싶다.

 

 

노태우도 빨갱이?

 

전교조 홈페이지 첫 화면에 포함된 아버지는 군사 쿠데타, 딸은 역사 쿠데타라는 상식적인 문구가 북한 것과 비슷하다며 비난을 퍼부은 새누리당 김진태의 논리대로 하면 노태우도 빨갱이가 된다. 미국의 아론 코플런드(Aaron Copland)가 작곡한 보통사람을 위한 팡파르(Fanfare for the Common Man)’라는 곡이 있는데, 그 제목이 노태우 정권이 주창했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와 매우 닮았다. 히틀러처럼 정치적 목적으로 유치했던 88 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에서도 이 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정작 코플런드는 1950년대에 미국에 몰아친 매카시즘 공산주의자 사냥의 표적이 되었던 좌파 성향의 작곡가였던 것이다. 몰랐다고 해도 소용없다! 이 곡 제목을 인민을 위한 팡파르라고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이 곡과 같은 테마를 사용한 교향곡 3번의 4악장도 듣기에 상쾌하다. 긴 세월 미국 정보기관의 집요한 감시를 당했고, 미국 사회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어 유럽으로 떠나 활동했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과 뉴욕 필하모니의 연주(1966, CBS-Sony)가 유명하며, 최근 녹음으로는 에이지 오우에 지휘, 미네소타 관현악단의 연주(2000, Referensce Recordings)가 탁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