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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9(2015.12.15. 발간)


 [기획] 마르크시즘과 비고츠키 교육학

2. 발달과 주체형

비고츠키와 프레이리 -

 

손지희 / 진보교육연구소 교육이론분과

 

 

 

 

1. 교육과 사회변화

 

1960년대 서구의 자유주의 교육개혁이 스스로 표방한 교육을 통한 사회평등화 등 사회개혁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는 비관적 결과가 나온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구조, 계급관계를 교육이 재생산한다는 논의에 갇혀 한동안 교육을 통한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 현실성 없는 낭만주의에 불과하다는 선입관이 생긴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교육패러다임이 만든 폐해를 치유하고 우리사회의 문화역사적 역량이 성장할 동력을 형성하는 선순환을 이끌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진보적 교육운동진영의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 논의에서 부상하고 있는 주제는 "교육을 통한 사회의 변화"이다.

교육을 통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직접적인 방식이기보다는 많은 부분 매개적 과정을 의미한다고 본다. 교육을 통해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과정은 다음의 과정들이 있을 수 있다(천보선, 김태정, 손지희, “교육패러다임 전환과 한국사회의 변화”, 진보교육연구소, 마이클 애플의 교육사상과 한국교육운동의 만남자료집 중).

첫째, 사회를 올바로 바꿀 수 있는 주체 형성의 문제이다. 평등과 사회정의,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대해 올바른 태도와 역량을 지닌 역사적 주체들이 교육을 통해 형성된다면 그것은 사회변화의 기초적 토대가 될 것이다.

둘째, 교육 변화는 사회 전반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교육 내용과 교육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 학교 문화는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영향을 받으며 또한 영향을 준다.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이 사회 전체의 경쟁이데올로기와 소유적 개인주의를 강화한 것과는 반대로, 보다 민주적이고 협력적인 교육문화를 형성하고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교육내용으로 구성된다면 사회 전반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지형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교육은 자체로 전체 사회의 커다란 구성 부분이다. 교육은 제법 규모가 큰 경제의 일부이며 공공영역이며 사회문화적 공간이다. 교육 변화 자체가 사회 변화의 일각을 형성한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와 경로를 통해 교육변화는 사회변화와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과정 외에도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의 다양한 경로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영역은 주체형성일 터이다.

 


2. 교육과 주체형성

 

1) 비판교육학

교육운동은 일시적 개량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지향하면서 교육의 변화로 나아갈 수 있을까?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재생산이론을 필두로 좌파로 분류되는 교육이론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더 넓고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의미 있는 교육의 변화는 없다라는 규정이 적지 않았다. ‘교육과 주체 형성은 낯선 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명료하게 밝혀진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주체형성 문제에 대해 알튀세는 사회변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상당히 비관적인 분석을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한 주체의 호명으로 설명한 바 있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일부이자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상부구조인 학교를 통한 주체의 형성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내면화한 주체의 재생산으로 귀결된다고 설명했다. 반면 애플 등의 비판적 교육사회학자들은 학교와 교육의 성격을 재생산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고 다른 측면을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이는 실천에 있어서 그리 좋은 영향을 낳지 못했다. ‘교육으로 사회를 어떻게 바꾸지?’라는 의문이 형성된 배경에는 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이 학교가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불평등한 분업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교육을 통해서 경제적 평등화가 가능한 것처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판명이 났고 이때부터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라는 담론은 교육의 사회변화에 있어서의 매개적 성격을 가린 채 직접적 효과를 가져와야만 의미 있다는 식의 인식이 퍼졌다. 나아가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만 기여하는 기제라는 낙인이 찍혔다. 애플 교수의 지적처럼 이렇게 보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관론의 확대라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장기간 발휘해왔으며 이는 패배주의와 개량주의의 온상이 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좌파 이론의 교육을 통한 근본적 사회변화에 대한 회의적 입장에 대해 마이클 애플은 관점의 문제를 제기한다. ‘재생산의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교육을 통해 일어난 의미 있는 변화들조차 간과하게 되고 교육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조조정하고 상품화하려는 파괴적인 힘을 적절하게 공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신자유주의적 경제에 맞서야 할 뿐 아니라, 그 개혁이 합리적이고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여건을 조성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복합체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교육 안팎에서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경제적 관계 이외의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사회를 경제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볼 필요는 있지만, 경제적 관계를 사회를 구성하는 유일한 관계로 보지는 말아야 하며 이러한 관점은 변화될 필요가 있다. 만일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오직 사회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이해에 달린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그리고 그러한 관계들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면, 어떠한 의미 있는 변화도 단 한가지의 방법과 하나의 역학에 의해서만 평가될 것이다. , 경제와 계급 관계를 바꾸었는가?

지배-종속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계급관계는 끊임없이 도전되어야 한다. 하지만, 위의 입장은 다양한 비판적 이론의 전통 내에서 수십 년간 비판 받아온 토대/상부구조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운동을 조직하는 것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이클 애플,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교육이 비록 불평등한 경제구조 그 자체를 직접 바꾸는 기제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교육을 통해 (이를 테면 평등의식등의) 진보적 지향을 보편적 가치로 사회구성원들이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교육을 통한 주체 형성의 문제이다.

비판교육학은 맑스의 교육론 가운데 교육의 계급적 성격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형성되었고 자본주의사회에서의 학교교육의 성격 문제에 유의미한 분석을 다수 제출하였다. 보울스·진티스 이래로 일리치, 윌리스, 알튀세, 부르디외, 플란차스, 애플에 이르기까지 비판교육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학교가 어떤 성격과 기능을 지니며 그로 인한 사회적, 정치적 영향은 어떠한가의 문제를 주로 다루어 왔다. 초기 다수의 비판교육학자들은 학교의 재생산 기능을 분석적으로 폭로하는데 성과를 거두었으나 경제결정론적, 환원론적 경향을 보이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공고함을 설명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대두되었고 이에 대해 애플 등은 상대적 자율성 개념에 근거해 저항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

특히 애플은 재생산이론으로 통칭되는 이전 비판교육학의 성과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점유하면서 비판교육학과 저항적 실천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했다. 애플은 학교가 계층화된 작업장에 알맞게 위계화된 학생 집단을 산출해 낸다는 보울즈와 진티즈의 주장에 일차적으로 동의하는 등 재생산론을 비판적으로 점유하면서 학교는 단순한 경제적 반영 이상으로 학교는 경제와 국가와 문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때로는 갈등하면서 접합하는 장소로 보았음. 재생산/저항의 양 측면을 바라 본 애플의 이러한 논의는 비판적 교육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었고 8-90년대 한국에서 교육운동이 발흥하는 토대 중 하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 형성된 비판교육학의 주된 문제는 결국 주체형성의 사회적(집단적) 과정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재생산론은 거시적인 구조 분석을 통해 학교를 통해 자본주의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계급주체들이 재생산된다는 것이었고 애플 등의 저항이론은 재생산론의 단순한 설명을 넘어 틈새와 불일치, 나아가 저항 주체의 형성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 것으로서 행위자의 능동성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물론 주체형성의 과정이 오직 학교를 통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주체형성의 사회적(집단적) 과정전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판교육학은 학교가 어떻게 기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계급, 권력 관계로부터 규정받고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며, 또한 변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부여받을 수 있는지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체 형성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비판교육학에는 주체형성의 사회적 과정은 있지만 개체적 혹은 개인적 과정은 없다. 인간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교육을 발보는 시각은 부재하다. 따라서 미시적인 교수-학습 과정과 주체 형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력이 결여된다. 비판교육학에 기초한 실천은 주로 학교교육의 불평등, 비민주성 등 거시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에 집중하게 되고 교수-학습의 실천에는 한계가 있다. 실천의 영역에서는 비판교육학의 거시적 담론에 의존하는 불평등과 비민주성에 대항하는 제도투쟁과 교수-학습에 초점을 두는 교실 내의 참교육실천을 통해 개별주체의 형성을 통해 사회변화를 이룰 것이라는 낭만주의의 색채를 띈 참교육실천으로 분리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미시적 과정과 거시적 과정의 통합적 이론과 실천은 아직 제출되지 않고 있다.

 

2) 유물론 철학에서의 주체

주체 형성의 문제를 논의할 때 알튀세와 같이 구조에 함몰된 파생적 결과물로 주체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구조와 주체의 관계에서 구조에 일방적 설명의 우위를 두게 된 결과 구조의 변화를 발생시키는 주체의 창조적 행위와 그러한 주체가 발생하는 역동적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주체로 형성당하는측면에 무게중심이 쏠린 구조주의적 입장은 실천적으로 문제를 낳을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한계가 있다. 갖는다. 현실보다 더 비관적으로 현실을 과잉 해석한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주체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주도해 나가는 세력을 의미한다. 주체와 대비를 이루는 낱말인 객체주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대상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크시즘에서는 주체를 어떻게 보느냐를 살필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인간의 사고나 행위는 객관적인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이 스스로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갖는 의의를 중시한다. 변증법적 유물로에서는 구조에 의해 틀지워지는 수동적인 주체개념이 아니라 능동성과 의식성을 매우 강조한다. 구체성의 변증법 : 인간과 세계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카렐 코지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실세계란 사물이나 의미 그리고 관계들이 사회적 인간의 생산물로 이해되고 자신이 사회적 세계의 현실적 주체로서 나타나는 세계이다. 현실세계는 천국에 관한 세속화된 이미지도 아니며 이미 완성된 무시간적 상태에 관한 이미지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와 개인이 그들의 진리를 실현해 나가는, 즉 인간을 인간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와는 달리 진리를 실현해 나가는 세계이며, 진리가 주어지거나 예정되며 인간의 의식 속에 이미 완성되어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복제되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가 생겨나는 세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진리의 이야기이며 진리의 발생사가 될 수 있다.”

 

사이비 구체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장막을 찢어, 그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활동과는 독집하여 존재하는 이미 완성되어 주어진 현실을 발견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이비 구체성이란 인간의 생산물이 자율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인간이 공리주의적 실천의 수준으로 환원됨을 말한다. 사이비 구체성의 파괴는 구체적 현실을 형성하는 과정이며 현실을 그 구체성에서 바라보는 과정이다. 관념주의적 경향은 주체를 절대화한 나머지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아야 그것이 구체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집착하거나, 혹은 객체만을 절대화한 나머지 주체가 현실로부터 완전히 제거되면 될수록 현실은 더욱더 현실적으로 된다고 믿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이비 구체성의 유물론적 파괴는 주체의 해방(즉 현실에 대한 물신주의적 직관과는 구별되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파악)과 아울러 객체의 해방(즉 인간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상황으로 인간의 환경을 형성하는 것)을 결과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회적 현실은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통일로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주체란 현실이 인간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인식하고 나아가 이를 인간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고 의지적으로 이를 실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는 곧 문화역사적 주체이며 개별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집단적 존재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른바 좌파의 교육이론에서는 자본주의의 학교교육은 기존의 구조가 재생산되는 과정의 일부로서 주체의 능동성이나 의식성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논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교육을 통한 변혁적 주체의 형성이라는 문제의식이 뿌리내릴 자리가 사실 없다.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의식 고양이라는 차원에서 교육을 바라본 이론을 소개한다.

 

 

2. 비고츠키 : 체계적 학습을 통한 의식의 고양

 

오늘날 대세가 되고 있고 미래교육의 방향으로 각광받고 있는 협력교육의 과학적, 이론적 토대가 형성된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1930년대를 전후해서 이루어진 러시아의 한 천재심리학자와 그 동료들의 협력 작업을 통해서였다.

러시아 혁명기의 심리학자였던 비고츠키(1896~1934)가 동료들과의 협력작업을 통해 정립한 문화역사적 인간발달이론80여년이 지난 지금 현대교육의 새 지평을 여는 이론적 토대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비고츠키는 동료들과 함께 맑스가 여러 저서에서 인간발달과 교육에 대한 짤막하게 기술한 문장들을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펼쳐내는 작업을 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맑스의 기본 관점을 수용하여 발달개념을 핵심으로 정교한 과학성을 담보하면서도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펼쳐냈다.

비고츠키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인간발달의 문제에 적용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스탈린주의의 탄압으로 당대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장기간의 판금조치로 인해 소련 내에서도 한동안 연구가 중단되었고 동료들은 연구방향과 입장을 선회하는 등의 방식으로 생존하였다.

스탈린 집권이 끝나고 1950년대 말미에 비로소 복권되어 비고츠키 저작 러시아어 선집이 출판되었고 [사고와 언어]가 서방세계에도 번역 소개되었음. 6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피아제의 대안으로 각광받아 1980년대 1차 비고츠키 붐에 이어 현재 2차 비고츠키 붐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상당히 현대교육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론이다.

 

이 참신한 이론은 스탈린 시대에 잠시 탄압받지만 1950년대 말부터 부활하여 재평가받는다. 하지만 미국 심리학회는 이런 움직임을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비고츠키를 심리학계의 모차르트라고 부른 시카고 대학의 툴민이 “1920~30년대 러시아에서 행해졌던 연구의 본질은 현재의 미국의 연구에 버금간다.”라고 쓴 것은 1978년의 일이다. 평가 움직임은 러시아보다 30년이 늦은 1980년대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1990년 소련붕괴 이후에 비고칔 연구가 더더욱 활발해져간다.

핀란드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집 근처 학교에 다니며 1명의 교사에게 소수정원으로 배우고 있다. ‘성취도별 수업은 중지되고 16살까지는 학교선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기본으로 그룹학습이나 서로 가르쳐주는 것을 중시한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독자 여러분도 이미 아실 것이다.“ (요시다 다로 지음, 위정훈 옮김, 2012, [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92)

 

서구 일부 구성주의 교육학자들은 비고츠키 이론적 맑스주의적 성격을 회피하면서 피아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론의 지극히 일부만 알려진 상황에서 비고츠키의 이론을 사회적 구성주의의 원조인 양 왜곡하기도 하였으나 비고츠키의 선집 전권이 1980년대에 영어로 완역 출간되면서 왜곡이 가능한 조건은 사라졌고 현재는 비고츠키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토대로 하는 맑스주의 심리학자로 규정하고 비고츠키가 인간발달과 사회적 상호작용의 문제를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과학적으로 분석, 설명하여 발달이론으로 정립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맑스주의자인 비고츠키의 이론과 저작들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교육학에서도 탁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수용되는 이유는 맑스의 사회와 인간에 대한 기본관점을 계승하면서도 발생적 방법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발전시켜 인간발달의 보편적 원리와 과정을 밝혔다는 데에 기인한다. 특히 발달의 기제, 변화의 역동에 대해 매우 탁월하게 설명하고 입증했다는 것에 대해 후대의 교육학자들은 다른 이론과 견주어 보았을 때 이를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 평가한다. 비고츠키는 실제로 발생적 방법을 방법론적으로 유난히 강조하였으며 이를 통해 고등정신기능의 발달과정 그리고 고등정신기능의 발달과 교육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교육과정, 교수-학습론, 평가론 등 교육의 전 분야에 걸쳐 토대가 될 만한 이론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맑스의 인간의 전면적 발달사상을 고등정신기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 형성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를 과학의 영역으로 가져옴에 따라 전인교육은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과 사상의 위치에서 이제는 현실의 교육목표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먼저 시작된 핵심역량논의는 고등정신기능 논의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현재 협력의 강조는 교육 분야 뿐 아니라 현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담론의 대세임. 협력을 도덕적 가치 이상으로 상승시키는데 기여하는 이론 중 하나가 바로 비고츠키 이론이다. 핀란드와 쿠바가 경쟁의 유혹을 물리치고 협력을 근간으로 공교육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협력의 교육적, 발달적 가치를 비고츠키 교육학이 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이다. 비고츠키 교육학은 국가 차원의 공교육 시스템의 철학으로서 뿐 아니라 교육혁신의 열망이 있는 여러 주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피아제의 대안으로 서구사회 일부학자에게 주목받던 위치에서 이제는 현대교육의 큰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심이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비고츠키 교육학이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정치이념으로써 강조될 뿐 이론적, 실천적 답보상태에 있었던 맑스의 교육사상이 비고츠키 교육학을 통해 이제 과학적 교육이론의 지위를 가지고 전세계 교육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황들은 교육의 본질에 충실한 맑스의 교육사상을 문화역사적 인간발달이론을 발판삼아 현대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미래교육의 새로운 교육의 지평을 여는데 있어서 맑시즘이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전면적 인간발달은 소외를 극복한 인간의 존재적 실현이면서 동시에 사회변혁의 조건이자 목적이다. 한편으로는 교육이 지닌 계급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교육에 대한 사회적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맑스의 교육론은 향후 올바로 계승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한계와 이론적, 실천적 과제에 대해 시사점을 주는 것은 앞서 언급한 핀란드와 쿠바 교육의 근거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비고츠키 이론이다.

그는 전면적인 인간발달을 위해서는 첫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계급폐지를 통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둘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 협력적 생산활동의 전개. 셋째, 제반의 사회적 관계의 (협력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교육을 통해 의식적이고 사회적으로 형성해 나갈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학교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적 노동분할과 파편화된 발달을 극복하고 생각과 활동의 결합, 정신적 발달과 육체적 발달의 통일을 지향하는 교육이 되어야 전면적인 인간발달이 가능하다고 여겼다.(천보선, 2014, “애플과 비고츠키”, 진보교육 54)

비고츠키는 인간발달의 원천은 사회적 관계이며 기호를 매개로 한 체계적이고 협력적인 상호작용이 인간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열쇠임을 밝혀냈다.

비고츠키는 혁명기 러시아 상황에서 주로 인간발달의 보편적 과정을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연구하였다. 궁극적 지향은 인간발달에 대한 총체적 해명과 혁명적 발달을 담지할 역사적 주체 형성에 있었는데, 그는 개체(개인)발달의 보편적 과정을 의식발달을 중심으로 과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사회적 의식해명의 장대한 과제는 미처 진행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인간발달에 대한 그의 총체적, 인과역동적, 발생적 관점과 도구와 기호, 언어의 매개적 역할, 고등정신기능, 개념적 사고와 주체성의 발달과정, 근접발달영역 창출 등의 개념들은 교육현상과 실천을 이해하는 틀과 개념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단지 지향적 개념에 머물러왔던 전면적 발달은 비로소 과학적 분석의 개념이자 실천의 방법론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와 접촉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사고양식을 획득하고 개념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되어 간다. 또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토대로한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핵심적인 질적 변화의 방향을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나아간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또한 세계를 지각하는 존재에서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주체로의 변화가 바로 인간의 발달이다. 따라서 전면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에 포함되어야 할 핵심적 의미는 자유의지를 지닌 능동적 주체이며 이를 위해 세계와 자신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역량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상호작용능력과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는데 상호작용 능력을 전제로 고차적 역량의 형성이 가능하며 반대로 고차적 역량을 통해 고차적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전면적으로 발달된 인간에 대한 흔한 오해는 다기능적이라는 이미지에서 비롯되며 전인교육은 인성교육’ ‘품성교육등으로 지적인 것과 대립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비고츠키에 따르면 여러 기능을 능숙히 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기능들을 학교 교육과정에 대응적으로 도입하여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역량의 형성에 있으며 학교 교육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여러 고차적 기능들이 이후 사회적 문화적 과제들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응하고 창조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로서 작용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예컨대, ‘융합이 대세라고 해서 융합을 초등 어린이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창의성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을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등은 인간발달의 변증법적 성격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사실상 이러한 미래에 나타날 모습을 현재에 들이붓는 것은 사실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미래의 계급의식은 현재에는 동료와의 협력과 학생자치 활동을 통한 민주적 의사소통의 실천에 그 맹아가 있으며 미래의 변증법적 사고는 청소년기의 개념적 사고의 형성에서 그 가능성을 배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합기술교육이 직접적으로 생산노동과 학습을 결합한다고 해서 이분법적 상황이 극복되고 전인적 발달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인간발달의 변증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 제도교육의 여러 정책들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어온 일들이다. 미래의 총체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현재의 모습을 어린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과거 전성설(어린이는 어른의 축소판)과 마찬가지이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과학적 개념과 일상적 개념의 결합을 통해 의식은 고양된다. “생산노동과 학습의 결합을 통한 인간의 전면적 발달이라는 맑시즘 교육학의 기본지향은 종합기술교육을 통해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노동을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개별적, 집단적 형성 과정이라는 철학적 측면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생산현장에서의 일하기 내지 그와 유사한 상황을 학교교육에서 경험하기 정도로 협소하게 바라보고 이를 교육에 적용하면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노동이라는 활동을 통한 주체 형성을 직접적 직업기술교육의 측면으로 한정시켜 버렸다.

비고츠키는 맑스의 사회적 관계와 교류가 개별 인간이 발달하는 토대라는 것을 바탕으로 발달시기에 따라 발달을 이끄는 유의미한 활동들을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의 체계적 협력과정을 바탕으로 과학적 개념과 일상적 개념의 상호 침투와 결합과정을 통해 개념적 사고가 형성된다고 규명함으로써 생산노동과 학습의 결합을 통한 인간의 전면적 발달이라는 맑스 교육론의 기본 취지를 발달교육학의 차원에서 풀어냈다.


 
또한 비고츠키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전면적 발달의 한 축으로서의 노동을 발달의 과정에 맞게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비고츠키는 발달의 시기 시기마다 인격은 총체적으로 변화하지만 각 발달단계마다 이러한 총체적 변화의 문을 여는 열쇠의 구실을 하는 '중심기능'이 있고 발달의 다음 영역으로 이끄는 '선도활동'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육단계별 선도 활동 (비고츠키의 논의를 레온티에프가 정리)

교육 단계

비고츠키의 선도적 교육 활동

유아원

정서적 반응/대상 중심적 활동

유치원

사회 역할극/놀이 활동

초등학교

학교에서의 학습 활동

고등학교

동료와의 협력 활동

대학과 직장

직장에서의 노동 활동

 

생산노동과 학습의 결합은 이러한 비고츠키의 이론을 통해 교육학적 재정립이 가능하다. “과학적 개념과 일상적 개념의 결합을 통해 사고가 고양될 수 있고 발달을 이끄는 선도적 활동과 핵심기능이 발달시기별로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 전면적 발달은 연령과 상관없이 노동과 학습을 병렬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발달시기의 특수성을 고려한 교육과정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린이 청소년 시기의 발달을 토대로 향후 협업적 생산노동과 민주적 정치문화공동체 속에서 보다 고차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있으며 고차적 상호교류와 창조성을 발휘하는 주체 간의 사회적 관계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밝혀준다.

하지만 비고츠키의 발달이론은 주로 발달의 개별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며 사회적 관계가 발달의 원천이고 토대라고 하지만 정작 그 사회적 관계의 성격에 따라 발달의 경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주제로 삼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3. 프레이리, 사회변혁을 위한 해방 교육

 

사회적 주체형성과 개인 발달의 문제는 하나의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것일 뿐 실제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과정이다. 기존 교육이론의 학문체계 속에서 두 측면을 결합하는 논의가 아직 없었을 뿐이다. 각자의 문법과 논리를 가진 별개의 분야로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인간-사회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교육을 통한 올바른 역사적 주체 형성과 사회형성을 위한 새로운 실천교육학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시도에 해당하는 현존의 업적 중 하나는 프레이리의 인간해방 교육론이다. 브라질 사회에서 사회적 주체형성과 개인의 발달 두 가지 문제를 통합하여 실천적 교육학으로 구성한 것이 페다고지인데 페다고지는 당대 브라질 사회의 특수성이 반영된 성인문해교육론의 모습을 보이지만 페다고지에 내포된 문제의식은 교육을 통한 인간발달과 사회변화라는 훨씬 더 방대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영향은 전 세계적이다. 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들에서 여러 형태로 현실에 적용이 시도되었다.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사명이란 자기 세계를 새롭게 각성하고 자기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이 관계하고 있는 이 세계는 결코 고립되거나 폐쇄된 질서이거나 인간이 받아들여 적응해야 하는 주어진현실이 아니고, 계속해서 극복해 나가야 할 하나의 변화의 대상이라고 여긴다.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교환을 할 수 있는 만남을 통해 자기세계를 비판적으로 직시할 수 있으며 그러한 만남을 이루는 적절한 도구들이 마련되면 인간은 점차 자신의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의 모순들을 이해하면서 그 현실에 대한 자기 자신의 의식을 인식하게 되어 거기에 비판적으로 대처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프리이리는 의식화라고 지칭했다. 프레이리 논의에서 의식화라는 용어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제모순들을 인식하고 현실의 억압 요인들에 항거하는 행동을 취하기 위한 학습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의식화는 인간을 책임있는 주체로서 역사과정에 개입할 수 있게 해준다.

프레이리도 비고츠키와 유사하게 의식화를 가능하게 하는 방도로서 학습을 강조했다. 프레이리에게 있어서 학습은 의식의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옮아가는 과정이며 비판적 의식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존 엘리아스 지음,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옮김, 프레이리와 교육, pp.224~225). 의식 고양, 비판적 의식 형성에 있어서 개인적, 집단적 학습이 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프레이리는 지배계급이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교육을 이용하는 등 학습에는 분명히 정치적 측면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프레이리의 학습 개념은 의식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에 기반하여 그가 구안한 문해 학습은 세계 여러 곳에서 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민중들은 짧은 기간에 읽고 쓰는 것을 배웠으며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자각하게 되고 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기도 했다(존 엘리아스, 앞의 책, p.229)

프레이리의 성인 학습 이론은 교화와 조작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모든 가정을 드러내고, 모든 주장을 의문시하고, 모든 결론에 대해 교사와 하습자가 평가하는 그 교육의 과정에 학습자를 참여시키려고 시도하는 비판적 교육학의 발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프레이리의 의식화론이 이론 상으로는 민중들의 자유와 자발성, 그리고 교수자와의 수평적이고 민주적 관계를 가정했음에도 교화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의식의 고양 과정에서 일어나야 하는 교수와 학습의 변증법적 결합 문제를 스스로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어린이 청소년은 사회변혁의 미래의 주체일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주체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브라질 민중의 상황에 기반하여 프레이리가 펼친 성인 교육이론은 이런 점에서 가치가 있다. 사회변화에 있어서 현재 진행된 교육이 미래의 혁명의 씨앗으로 될 수는 있지만 당장의 현실에 있어서 성인들의 의식변화, 계급적 의식의 형성이라는 문제는 계속 미루어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프레이리가 당장의 사회 현실에서 성인 교육에 먼저 부딪혀 이론화하고 실천을 전개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제한점이 있는데 프레이리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으나 그가 교육의 목적으로 제시한 비판적 의식과 사회현실에 대한 자각 등은 적극적 목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데올로기 조작에 가려진 현실을 폭로하고 이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불가피한 한계일 수 밖에 없는 것일 텐데 현대 사회 성인교육의 이론으로 곧바로 가져오기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1960년대 브라질의 높은 문맹률과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 상황에서 프레이리는 최선을 방책을 찾은 것이겠지만 현대 많은 나라에서는 공교육이 보편화되어 예전과 같이 문맹이 의식 고양의 직접적 걸림돌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의식 고양과 집단적 실천을 위한 새로운 형태와 방식의 성인 학습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제에 대해 프레이리가 당대의 사회 현실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포착한 지점에 대해 천착하고 실천을 했다는 것이 현재의 실천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일 부분이라고 여긴다. 비고츠키의 용어를 빌어 이야기하면 예전에는 프레이리 이론에 근거하여 행한 문해학습만으로도 근접발달영역이 창출되었다면 현대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선 현재의 상황을 교육운동활동가들이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을 실천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4. 비고츠키와 프레이리

 

각각의 이론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지만 비고츠키는 청소년기까지의 발달에 대해 주로 논의했고 프레이리는 성인기에도 충분히 의식의 변화와 고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체형성 논의에 두 이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학교교육을 통한 개념적 사고의 형성은 이후 변증법적 사유의 경로를 개척한다. 변증법적 사유의 토대를 보유한 성인들을 조직하여 어떻게 실천하고 학습할 것인지에 대해 대학교, 노동조합, 사회단체, 정치조직 등 기존의 여러 단체와 조직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 비고츠키와 프레이리의 의식고양을 위한 학습에서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의식의 고양을 우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 학습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의식의 고양은 개별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집단적 과정을 통해서이며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쉬운 과정도 아니라는 사실을 두 이론은 알려 준다. 다시 말해 주체 형성은 단기간에 쉽사리 이룰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종종 사회 변혁을 갈망할수록 조급한 마음이 들기 쉽다. 그래서 성급하게 교조화된 커리큘럼으로 백지 상태라고 여기고 그야 말로 의식화를 목적적으로 하려고 들거나 아직 개념적 사고조차 할 수 없는 어린나이의 학생들에게 성인 수준의 비판적 자각과 실천을 기대하게 되기도 한다. 거꾸로 주체 형성의 과정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우연에 기댈 수 없다보니 패배주의와 숙명론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주체형성과 사회변혁 모두 일직선의 흐름으로 전개되지 않으며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급격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인간의 발달과 집단적 주체 형성 그리고 사회의 역사적 변화는 비슷한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조급증이나 패배주의에 쉽게 빠지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