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진보교육] 59(2015.12.15. 발간)

 

[담론과 문화] 눈동자의 몽상록

몽상록 1

눈동자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앞으로 회보에 올리는 글은 몽상록으로 제목을 달 생각이다. 이 얘기, 저 얘기 자유로이 건너뛰며, 어느 대목은 자세히, 어느 대목은 가볍게 말하기에 적당한 형식[또는 제목]이라 여겨져서다. 어떤 한 가지를 들이파는 논설문[논문] 형식은 그 주제에 관해 폭넓게 살핀 다음에나 괜찮은 글을 쓸 수 있고, 읽는 사람도 관심이 가는 주제에만 눈길이 쏠리기 마련이다.


 

하나. 아이유 신규앨범을 둘러싼 소동과 관련하여

 

가벼운 얘깃거리부터 꺼낸다. 얼마 전, (경기지부) 광명지회 샘들에게 (‘정세와 실천 과제에 대해) 강연할 기회가 생겼을 때 다음의 요지要旨로 말했다. “뾰족하게 어떤 (실천) 방향을 제시할 것은 없다. 여지껏 지켜온 교사운동의 진지[곧 전교조]를 지켜내는 것이 (나라 안팎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말씀드린다. 다만 우리가 해내야 할 것으로 참교육 실천문제를 더 깊게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혁신학교 실천이든, 자유학기제 프로그램이든 무슨 실적을 올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을 세울 욕심을 버리고], 학생들에게 평소에 어떤 문제의식을 틔워 주느냐 하는 과제를 더 깊게 들여다 보자.”

참교육의 방향과 관련하여, 필자[강연자]교과의 벽을 넘어서자!”고 제안했다. 막연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쿠바에서는 실제 프로그램으로 실현됐다. 중고교 교사들도 초등 교사들처럼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는 쪽으로 교육체제가 바뀌어 가고 있다. 학생들에게 전인격全人格으로 다가가려면 교사 집단에게 그런 도약이 필요하다.

물론 교과마다 구획된 지금의 국가 교육체제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그런 제안이 공허한 얘기로 들릴 것을 필자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볼 틈새가 있으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교과수업 과제와 별도로, ‘계기 수업을 시시때때로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예전에 전교조에서 해 보자!’고 권유한 계기수업이야 무슨 ‘FTA 반대, ‘5.18 광주항쟁이니 하는 사회정치적인 의제들 위주였지만 그것 말고도 저마다 고안해낼 의제는 수두룩 쌨다.

그래서 필자는 광명 샘들에게 이를테면 아이유 (제제) 소동과 관련해 계기 수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권했다.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도 그 수업을 할 때만큼은 국어교사가 되는 동시에 사회 교사가 된다. ‘아이유 소동은 국어교과와 사회교과의 훌륭한 공부거리이기 때문이다. 인권人權의 으뜸 항목인 표현의 자유를 사회교과서에서 암기할 사항의 하나로만 만나는 학생은 그 공부를 통해 인권의식을 높일 건덕지가 도무지 없다. ‘표현의 자유가 함부로 묵살당하는 사례를 하나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학생만이 개념을 얻는다. “저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가수도 표현의 자유가 함부로 짓밟히는데, 힘없는 민중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표현의 자유는 이른바 대중이 공감해줄 때에만 성립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겨도 성립하는 것인지, 학생들은 숱한 입씨름들을 판단하는 가운데에서만 깨닫는다.

아이유의 노래 제제를 불쾌하게 여긴 사람들은 그 노랫말을 진지하게 읽을 생각이 도통 없었다. 문해력文解力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유가 제제에게 제 처지를 감정이입empathy했으리라고 먼저 생각한다. “순진하면서도 교활한 점에서 나[=아이유]는 너[=제제]를 닮았어!” 그랬다면 너 아이유는 어린애를 성적性的으로 탐내는 타락한 X이야!”하는 악질적인 비난이 나올 리 없었다. 이것이 문학작품 읽기의 기본이고, 이 기본을 묵살한 대중[이나 대중 수준의 평론가들]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를 되돌아봐야할 하나의 계기가 된다.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은 이를 가해자[=아동 성애의 성문화를 즐겨온 대중]가 피해자[=거기 부응해 왔지만 거기서 벗어나려는 자기의식을 표현한 가수]에게 혐의를 덮어 씌우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대뜸 읽어냈다. (아이유가 한동안 삼촌[오빠]들의 귀여움을 누리며 덕을 봤지만, 요즘 그녀에게 여성팬이 더 많다는 것은 그녀가 롤리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 애썼다는 증좌다)

대중을 불편하게 하면 못써?

 

이 소동을 둘러싼 (평론가와 신문기자들의) 논평을 대충 훑어 봤는데 아이유, 억울하게 욕 먹었다!”고 단호하게 옹호한 글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를 사납게 닦아세우지는 않아도 너도 잘못이 있지, !”하고 은근히 나무란 평론이나 기사가 많았다. ‘둘 다 잘못!’(평론가에게) 참으로 안전한 잣대다. 그런데 대중을 불편하게 하면 못써!”하는 나무람은 그 대중의 심리에 그대로 편승한 것 아니냐! 그때의 대중은 대중의 모두도 아니면서 대중 전체를 과잉 대변하는 허구적인 개념이요, 이렇게 대중의 눈 밖에 나지 말라!”는 훈수는 지금의 대중문화를 그저 물신物神으로 섬기는 비뚤어진 눈길 아니냐!

필자는 계기수업의 주제로 대중문화의 비판적 이해를 중하게 여긴다. ‘한류韓流에 대한 자랑이 고교 사회교과서에까지 실릴 만큼 우리의 대중문화를 흐뭇해 하는 분위기가 한반도에 짙기 때문에도 그렇고[세상에,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유튜브 동영상 조회수 20억 회를 기록했다는 것이 과연 민족의 자랑이냐!], 한국의 드라마와 음악이 실제로 아시아 민중 대다수의 감수성까지 휘어잡을 만큼 영향력을 떨치고 있어서도 그렇다. 파죽지세破竹之勢 같은 자본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적어도 대중의식에 있어서만큼은 자본의 바깥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베토벤의 음악과 톨스토이의 문학이 얼마나 위대한지 일깨워주기 전에(그것은 무척 더딘 일이다), 대중문화 속에 들어 있는 (미미하지만) 소중한 싹을 일깨워주는 것이 더 급하다.

더군다나 10대 초중고생한테는 대중문화 읽기가 더 막중한 일이다. 아직 취업과 고용 현실을 몸으로 겪을 나이가 아니라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기에는 때이른 느낌이 없지 않을뿐더러 수많은 학생들이 지겨운 성적 올리기 공부의 도피처를 (달콤한) 대중문화에서 찾고 있어서도 그렇다.

 

대중문화 비평과 관련해 인터넷 서핑으로 몇 사람 알게 됐다. 비판이론[라캉, 지젝]을 들먹이며 풍월을 읊는 평론가로 이택광이 있고, ‘엔터미디어사이트에는 황진미와 이승한 등등 열댓 명의 글이 올라오는데 대체로 괜찮은 친구들로 보인다. 1~2학년들한테 제목이 괜찮은[, 호기심 끄는] 것 몇 개 갖다가 슬쩍 디밀었더니 관심을 갖고 읽는다. 학구열이 별로 없는 아이들도 들여다 보기는 한다.

결론! 필자는 <제제[=‘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주인공] 소동>이 시대의 징후로 읽힌다. 언론 미디어에 올라온 여러 (진보적인 관점의) 글도 이것이 국정화 강행 사태와 많이 닮았다.”고 했고 심지어 세계 없음의 징후라 짚은 사람도 있었다. 전에는 서태지를 헐뜯고 타블로를 닦아세운 익명의 무리가 있었던가? 조금만 역지사지易地思之해도 소란 피울 일이 아닌 것을 갖고서 핏대 높이고 심술 부리는 사람들! 파시즘은 히틀러에게 호응한 대중이 있었기에 맹위를 떨쳤더랬다. 가냘픈 소리이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들려줘야 한다. 미래에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나 일베충으로 커갈 수도 있을 10대 초중고생에게!

 

 

. 거짓 교과서에 침을 뱉어라!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강행될 무렵, 1주일 동안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뒤 맹숭맹숭 끝내는 것이 좀 거시기해서 스티로폴 판대기에 큼지막하게 몇 글자 써서 (교무실) 내 책상 옆에 세워 놨다. “거짓 (역사) 교과서에 침을 뱉어라!”라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고등학교 가거든이라 덧붙였고, 볼펜 글씨로 세월호 귀신들이 아직 이 땅을 떠돈다고 끄적거려 놨다.

옆엣 선생이 그거, 전교조에서 내려온 문구인가요?”하고 묻는다. 표현이 강렬해서 놀랐는갑다. 학생들[2] 중에도 이 팻말을 보고 격렬하게 호응하는 녀석들이 제법 많았다. 수업 시간에 무슨 좋은 얘기 많이 하는 것보다 이런 선전문구 하나가 아이들 마음을 잡아 끈다. 현실에서 전국민의 관심사가 돼 버린 일에 대해, 그것도 선전 팻말을 통해 알리는 것만큼 아이들한테 강력하게 다가가는 얘기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참교육을 해냈구나, 하고 드물게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같은 얘기도 사람들한테 울림을 주는 표현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를테면 거리 행진 때도 “00 정권, 퇴진하라!”고 외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다. “00 정권, 물러나라!”고 외쳐야 그 말이 시민들 귀에 가 닿는다.

거짓 교과서라 못을 박으니까 아이들 속에 숨어 있던 생각이 튀어 나왔다. “딴 교과서에는 거짓이 없나요?”하고 묻는 녀석도 나오고, “저는 사회교과서가 밥맛이에요.”하는 녀석도 있다. 국정화 문제로부터 모든 교과서를 의심하라!”는 켐페인으로 확대해 가야 한다는 얘기다.

세월호 뱃지도 줄곧 달고 다녔다. 한동안은 그거, 안 끝났어요?”하고 묻는 학생이 많더니 요즘은 대부분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이따금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학생이 다가와 선생님, 멋있어요.”하고 살짝 속삭인다.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무덤 갈 때까지 뱃지를 옷에 달고 다니라는 얘기구나, 싶었다. 아우슈비츠의 학살이 있고난 뒤, 거기서 살아남은 누군가는 수용소 옆에 집을 짓고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 “내가 그 (살아 있는) 증거요!”하는 메시지를 줄곧 퍼뜨리면서. 자본의 물신物神에 빠져 살아가는 대중은 그렇게 끈덕지게 실재實在의 세계를 일깨워 줘야 비로소 그 문제를 제 마음 속에 담는다. “아직도 뱃지를 다세요?”하고 내년에 물을 학생에게는 이렇게 대꾸하리라. “, 세월호 귀신이 아직 구천九天으로 가지 못하고 자꾸 서울 땅을 떠도네. 그래서 뱃지를 뗄 수 없구나. 으악, 니 뒤에 어른거린다! 뒤돌아 봐라!”

 

 

. 칸트를 생각한다

 

젊어서 한동안 소설을 썼던 내 또래의 선생은 80년대 후반, 상고商高인 일신여상에서 국어를 가르쳤을 때가 선생으로서 제일 보람찼다고 내게 털어놓은 적 있다. 오래 전 얘긴데 그 시절에는 몇몇 상고商高에 똑똑한 학생들이 몰렸다. “교과서는 저 멀리 제쳐놓고 윤흥길의 장마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혔지. 애들이 눈길 한번 흩뜨리지 않고 내 말에 열렬하게 귀를 기울였어. 어떤 제자는 졸업하자마자 직장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만들고는 내게 찾아왔더라.”

그런 일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경기도의 어느 젊은 선생도 얼마 전 내게 귀띔했다. 작년 1년간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고등학교 국어선생인데 혼자 한 학년을 (모처럼!) 다 맡을 수 있어서 리얼리즘 문학과 노동현실에 대해 애들한테 본격적으로 읽히고 토론을 시켰단다. 모둠토론을 시키느라 힘은 들었지만 정말 보람을 맛보았단다. 그런데 올해는 한 학년을 도맡을 수 없어서 교과서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노동 해방이 참교육의 주된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 하나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교과서에 들어 있는 수많은 얘기들을 갖고서도 참교육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이 맞닥뜨린 문제들을 마르크스의 얘기 하나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예전에 노동운동에 투신한 청년들의 학습 교재에서는 딴 사상가들 모두가 마르크스[와 레닌]에게로 넘어오는 전단계로서만 배치됐다. “칸트는 헤겔에 의해 지양되고,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지양됐다. 마르크스가 이론을 완성하고 레닌이 실천을 완성했다!”는 식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정치권력의 지도이념이 된 뒤에는 어땠는가? 스탈린 시대의 철학사전은 플라톤에 대해 노예 소유계급의 사상가라고 달랑 한 줄만 적어 놨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세상을 외눈으로 살핀 셈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거의) 해체된 지금은 마르크스[또는 레닌, 또는 스탈린이나 김일성]를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는 식의 단순 편리한 잣대를 서슴없이 내려 놓고, 세상을 다시 여러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생태론적 지평에서 기존 사상들을 되살필 줄도 알아야 하고, “칸트와 헤겔 같으면 마르크스의 얘기를 뭐라고 비평했을까?”하고 물을 수도 있다. 마르크스보다 헤겔이, 헤겔보다 칸트가 더 혜안慧眼을 보인 대목도 있으니까 말이다.

 

 

쪼가리 낱말들 무작정 외우라는 도덕책

 

여기서는 <칸트>와 관련해서만 생각한다. 일화 하나. 달포 전에 (공부 좀 하는) 고등학생 둘과 잡담을 나눈 적 있었는데 한 녀석은 연세대학에 (진화론 아닌) 창조론 강의가 하나 개설됐다더라.”는 내 말에 분노를 나타냈고, 한 녀석은 (내가 칸트 얘기를 꺼냈더니) “칸트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어쩌구.” 하는 거다. 칸트를 말 한 마디로 깔아뭉개는 패기는 씩씩해 보였지만, 세상 공부가 얕은 데서 비롯된 단순도식을 넘어서도록 이끄는 것이 교사의 과제겠다.

그런데 자못 궁금하다. 고등학교 도덕교과를 맡은 선생들은 요즘 칸트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생활과 윤리책을 들춰 보니 윤리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을 내리 먹임 하겠다며 공리주의적 접근(벤담과 밀)과 의무론적 접근(칸트), 덕 윤리(아리스토텔레스와 매킨타이어)와 배려 윤리(길리건과 나딩스), 책임윤리(요나스)와 담론윤리(하버마스)에 대해 줄줄이 풀이해 놨다. 30만 교사들 가운데 가장 똑똑할 리야 없지만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으로는 인정받는 나도 매킨타이어와 길리건과 나딩스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10대 코흘리개들더러 그런 이름까지 외우라고?

우선 대뜸 받는 인상부터 말하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교육과정평가원장이나 교육부 장차관을 만난다면 필자는 그 작자들의 멱살을 움켜 쥐고 한 마디 쏘아붙인 뒤 힘없는 주먹이지만 한 대 올려붙이고 싶다. “느그덜 앉아 있는 자리에서 당장 꺼져, 이 사기꾼 놈들아!” 불과 15쪽 밖에 안 되는 지면 안에 온갖 이론을 다 진열해 놓으면 무엇이든 겉핥기 얘기를 벗어날 수 없다. “누구는 무슨 주의主義, 누구는 무슨 주의主義...”하고 딱지 붙이는 것 말고 더 깊이 생생한 앎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험 전 날, 달달 외우는 학생이 이뻐 보이는가? 넋 나간 짓들을 하고 있을 뿐인데? 거기는 아무런 배움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데?

교과서는 대학의 윤리학 교수들이 즈그덜끼리 주고받는 지식을 그냥 늘어놨다. 자세한 얘기를 줄여서 썼으니 덜 황당하기는 해도 그게 무슨 얘긴지 아이들이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아이들의 영혼에 다가가려면 즈그덜 학자끼리 떠들 때보다 열 배는 더 숙고해야 한다. “고교생한테 덕과 배려, 책임과 담론 윤리에 관한 학설까지 꼭 들려줘야 하냐?”하는 것이 첫 번때 찾아오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담론discourse’은 지식인들이 생산하고 퍼뜨리는 것이다. 지식인들끼리 고민하는 얘기를 대중[학생들]한테 자기 문제로 주체적으로(!) 고민하라는 것이냐! 그 얘기의 핵심인즉슨 주먹power을 앞세우지 말고, 말로 옳고 그름을 가려 보자!”는 것이다. 그 핵심이야 꼭 담론 윤리라는 어렵고 낯선 낱말을 부려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설파할 수 있다. 차라리 도덕책의 지식형태로서가 아니라 감동적인 문학작품 읽기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하버마스는 누구한테 그렇게 권했을까? 일반 대중이 아니라 사회 지배층에게! 그거, 쉬운 일인가? 참으로 쉽지 않은 주문이다. 힘없는 민중들이야 주먹을 내려놓는 일이 쉽지만 권력을 병풍으로 두른 지배층은 그런 순진한 체질의 인간들이 아니다. 하버마스의 희망대로 그렇게 주먹 아닌 말로 정치를 할 세상이 어떻게 해야 실현되는데? 민중이 들고 일어나 우선 지배층의 권력을 꺾어놓지 않고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문제를 들이파 보면 또 다른 더 커다란 문제가 튀어 나온다. 그러니까 담론 윤리(고등학생이 알아야 할 만큼) 과연 강력하고 또 새로운 화두話頭일까, 싶은 것이다. 그거, 정말 하버마스가 처음 말한 것일까?

교과서라는 쇼윈도에 굳이 네 가지 윤리학설을 죄다 진열할 때에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나는 이 넷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하는 궁금증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칸트와 요나스와 하버마스는 미세하게 다를 뿐이지, 큰 줄기에서는 다르지 않다. 철학자에게는 칸트와 요나스와 하버마스를 구분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일반 학생에게 이 세 사람의 학설을 선택의 문제로 떠안으라는 주문은 무리한[쓸데없는] 요구다. “요나스와 하버마스는 칸트의 사상을 대부분 계승했지만 어느 대목에서는 좀더 진전된 생각을 내놨다.”는 정도로 가볍게 알아도 충분한데 그렇다면 접근1, 접근2...”하는 식으로 거창하게(?) 제목을 붙여서는 안 된다.

 

 

교과서가 비겁한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된다

 

대결을 붙일 필요가 있는 것은 의무론과 공리주의, 이 둘 사이다. 다른 둘[/배려, 책임/담론]은 대학 교양과정으로 넘겨라. 그 두 부류의 학설이 전혀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고등학생들은 앞의 둘[의무/공리]을 소화하는 것만도 벅차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것은 여러 학설을 지식형태로 소상하게 섭렵하는 일이 아니라 그 학설들에서 간취看取해야 할 합리적 핵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테면 요나스의 환경윤리는 매우 소중한 깨우침이지만 따로 환경문제를 다루는 대목에서 환경위기에 대한 과학적인 조명과 더불어 제시하는 것이 훨씬 생생한 커리큘럼이 된다. 환경위기가 얼마나 끔찍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현실을 생생하게 알아야 그래, 요나스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삶의 방식을 바꿔야겠어.”하고 학생들이 비로소[가까스로] 결심하지 않겠는가. 그런 결심[영혼의 변화]을 동반[또는 채근]하지 않는 윤리학 공부라는 것은 얼마나 허접쓰레기 같은 것일까.

학생들은 의무론과 공리주의, 이 둘 사이에서는 제 입장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교과서의 접근법이 별 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무책임한 접근법이다. “행위의 목적이 중요하냐, 결과가 중요하냐?”를 추상적으로, 2분법二分法으로 따져서 아이들이 무슨 배움을 얻을까? 무슨 게임이론처럼 나는 이쪽에 걸래, 너는 저쪽에 걸 거니?”하고 놀아보라는 것인가? ‘교과서 서술자는 자료만 제시할 터이니 느그덜 맘대로 골라보라는 식이다. 문학비평의 용어로 빗대자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할까. 아이들이 과연 슬기롭게 골라낼 폭넓은 눈길을 이미 틔웠다고 전제하는 것인가?

슬기로운 교과서라면 이 두 학설도 선택해 보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뒤죽박죽의 사변思辨만 이끌어낸다. 또 그런 접근법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함의를 숨기고 있다. 교육과정에 들어 있는 숨은 메시지는 지배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느니라!”. 그런데 벤담이 공리주의를 부르짖고 칸트가 벤담을 비판한지 200 여 년이 이미 흘렀다. 두 사상에 대해 역사적인 평가는 웬만큼 내려졌다. 칸트는 유럽 철학의 우뚝 솟은 봉우리로 평가받는 반면, 벤담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 2류 사상가로 자리매김됐다. “그러니까 공리주의는 틀렸고, 의무론이 옳다고 결론을 끌어낸다면 물론 권위[또는 통념]에 기댄 논증의 오류로 흉잡힐 수 있다. 여지껏은 그랬다 해도 앞으로 저울의 잣대가 달라져서 훗날에는 벤담이 더 윗길의 사상가로 평가받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미 내려진) 역사적 평가가 이 둘을 견주는 데에 의미 있는 배경 사실은 된다.

내 얘기는 아이들더러 두 가지 학설을 견줘 보라고 자유방임laissez-faire할 것이 아니라, 왜 학자들이 칸트의 사상을 (벤담의 그것보다) 높게 평가하는지 제대로[알아듣게] 알려주는 것이 더 책임있는 글쓰기라는 것이다. “칸트의 가르침을 이어받자!”는 것이 교과서의 슬로건이 돼야 한다. 거칠게[도식으로] 간추리자면 칸트의 윤리는 새로운 사회를 일으켜 세울 주춧돌[=이성의 자율에 대한 믿음만이 도덕적 주체성의 원천이라는 커다란 가르침]이 되는 반면, 벤담의 윤리는 지금의 시대에는 기성질서 속에서 소소한 개혁밖에 설계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체제 사수死守의 고집스런 윤리로밖에 쓰이지 못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칸트 선생은 자기 제자로 간디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칭송 받는) 장기려를 길러낼 수 있어도 벤담 꼰대와 존 스튜어트 밀 꼰대 밑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순결한 영혼의 제자가 생겨나지 못한다. 안락하게 살아가는 속물이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지닌, 그런 뜨뜻미지근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 윤리학의 (보편적인) 목표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그랬던 것처럼 공리주의자들의 입에 당장 재갈을 물려라!”하고 서슬 퍼렇게[섣부르게] 깎아내릴 일은 아니다. 17~18세기의 영국 사회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벤담의 얘기는 나름으로 급진적인 사회변화를 꾀하는 데에 도움을 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구호가 지금 우리에게 보편적(!) 윤리사상으로 구실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긴 해도, 그 당시 영국의 지배질서를 흔드는 구실을 했던 것도 어엿한 사실이다.

지금으로 돌아오더라도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필자는 학생들한테 (가르칠 기회가 있다면) ‘의무론을 따르라고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윤리이고 도덕적인 원칙인 반면, 현실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공리주의에 의거해서 사물을 판단해야 할 때도 많다. 이를테면 판사들은 어떤 범법 행위에 대해 판단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느냐를 주로 따지고, 그의 행위 동기는 곁가지로만 살핀다. 눈앞의 일을 놓고서 지금의 사회질서를 흔들어 댔느냐, 하는 관점에서만 살피자면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또 공리주의 도덕은 쉽게 간추리자면 니 이익을 위해 살아라. 하지만 남한테 폐는 끼치지 말고, 니 행동으로 하여 남들도 덕을 볼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다.”라는 정도다. 무슨 대단한 도덕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륜의식을 품은 사람은 다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 사상이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가 공리주의 사상을 쉽게 흉볼 수 없는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머리는 설령 드높은 하늘을 쳐다 본다 해도) 일상생활의 대부분은 공리주의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가 되지 말자는 요청은 우리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쉽지 않은 요청이다. “지금의 자본 체제 밑에서는 도무지 못 살겠다!”고 절절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공리주의를 넘어설 각오를 한다.

잠깐, 공리주의에 관해 논변 하나, 할 것을 빠뜨렸다! 걔네들의 기본 논거인즉슨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을 바라거든. 그러니까 도덕률의 기준은 행복 여부가 돼야 해!” 철학에서는 이것을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사실로부터 당위當爲를 이끌어내는 것! 걔네하고 가까운 동네에 살았던 회의주의자 흄이 일러준 말씀이다. “사람들이 다들 폭력을 바란다면 그럼 주먹 잘 쓰는 놈이 가장 훌륭한 도덕군자이겠네?” 대다수 사람들이 행복을 바란다 해도 그 여론(!)에 좌우될 것 없이 무엇이 사람다운 도리냐하는 잣대로서 도덕을 세워야 하는 법이다. 중세 유럽을 지탱해온 불문율不文律이 뭐냐면 “(지금) 있는 것은 다 아름다워요!”였다. 공리주의는 그 기본 논거부터가 박약한[흐리멍덩한] 것임을 새겨 두자.

 

  

착한 사람 될래, 아니면 훌륭한 사람 될래?

 

아무튼 두 도덕론의 대결은 우리가 어찌 살거냐하는 질문과 곧바로 연결돼 있다. 옛날에 어느 중학생이 쓴 다음의 시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이상한 세상

 

내가 아주 어릴 적

엄마는 늘 말씀하셨지요.

예쁘게 자라 착한 사람이 돼라.

착한 게 뭔지 잘 몰랐지만

그냥 그 말이 좋았어요.

 

그러다 성적표라는 것을

받아오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말씀하셨지요.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

훌륭한 사람이 뭔지 잘 몰랐지만

그냥 공부가 싫었어요.

 

그래서 훌륭한 사람 말고

착한 사람 되겠다고 했더니

바보 돼서 뭐하냐?”

어릴 적은 착해지라더니....

엄마가 바본지 내가 바본지.

나는 그냥 사람 되고 싶습니다


이 중학생은 칸트의 실천철학을 직관으로 헤아리고 있다. 여기서 어머니 말씀은 공리주의자의 말씀이라고 읽어도 손색이 없다. ‘선의지善意志라는, 칸트의 뜬구름 같은 낱말은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라는 쉬운 말로 번역돼서 아이들에게 전달돼야 한다. 아이들 대다수의 마음은 그럴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마음을 줄곧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직 잘 모른다. 칸트는 우리에게 혁명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철두철미한) 의무론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넌지시 말해 준다. 젊어서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 중에는 마르크스만 사회주의자인 줄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착한 사람 돼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명령이냐. 그런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필자는 뒤늦게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필자는 칸트가 남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하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옛적의 고교 사회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대단히 강렬한 말씀이지만 좀 똑똑한 사람한테는 여지없이 난도질 당할 얘기다. 그거, 예수처럼 비유법으로 진리를 설파한 사람은 그렇게 선명하게 말해도 상관없지만 일상日常의 산문散文 속에서 그렇게 어설프게 말하면 당장 KO패다. 뜬구름 같은 얘기라서다. 사람이 어찌 남들을 수단으로 부리지 않고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이를테면 수많은 청소년들은 제 어버이를 120% 수단으로 활용해서 제 삶의 터전을 일군다. 칸트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말의 정확한 번역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도 섬겨라. 전자前者의 일상생활 가운데 후자後者의 행동이 잠깐 탄생하는 것만도 이미 기적miracle 아니냐.

 

 

거인은 가고, 난쟁이들만 법석대는 현대

 

칸트를 그저 그런 학자의 한 사람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인류의 사상을 쪼가리 낱말들[또는 단순화된 도식]만으로 섣부르게 읽는 사람이다. 예컨대 칸트가 세상을 현상계와 물자체Ding an sich로 나눈 것에 대해 수긍하지 못하는 후학後學이 많았다. 인류는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맹렬한 족속 아니냐. 더군다나 똑똑하신 학자들이 여기는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칸트가 못박아 버린 것을 고분고분 납득할 리 없다. 또 학자들은 어떻게든 선학先學을 밟고 넘어서야 자기가 빛을 본다. 그러니까 자기 관점에서 어떻게든 선학先學을 깎아내리려 애쓴다. 그러니까 가령 헤겔이 칸트에 대해 틀렸다!”고 꼬집은 것들을 100%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절반은 (헤겔 말마따나) 틀렸겠지만 절반은 과잉 비판이라 여기는 게 온당하다. ‘일단 비판해 놓고 보자는 식이다.

일본학자 가리타니 고진은 칸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겠다고 다짐했는데[그의 책 트랜스크리틱을 참고하라], 그렇게 읽어낸 것의 하나가 ‘()물 자체개념이다. 칸트는 타자the others’를 물자체라 여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들의 처지와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욱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부분과 관련해서만큼은 미지未知의 영역이라 못박아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칸트의 윤리학이 무거운 울림을 갖는 까닭은 이렇게 타자他者를 마주 대하는 과제를 철학사상 처음으로 들고 나왔던 데 있다. “여러분, 후손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윤리 사상과 관련하여 칸트가 물음표를 던진 꺼리들 가운데 현대 학자들이 슬며시 고개 돌린 대목이 참 많다고 한다. 감히 궁리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회피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칸트 윤리학의 서술들 가운데 허술한 대목이 많고, 후학들이 그 대목에 대해서는 진전된 앎을 내놨지만 세상을 둘러보는 문제의식 면에서는 칸트의 스케일[눈길의 크기]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가장 훌륭한 학자는 대답[설명]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문제 설정]을 잘 하는 사람 아니냐. 그런데 칸트가 위대한 자연과학자라면 그의 통 큰 앎이 타고난 지력知力 덕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위대함을 떨친 분야는 자연과학이 아니라[그는 자연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실천철학[윤리학] 분야다. 사람이 어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질문은 세상이 (사람들에게) 그런 깊은 질문을 이미 던질 때에나 순결한 영혼의 사람들이 받아 안는다. 그의 영혼이 프랑스 대혁명의 벅찬 감동을 온전히 받아 안았던 덕분에 그런 깊은 앎[문제의식]이 칸트한테서 나올 수 있었다. 거꾸로, 요즘 학자들이 그가 내놓은 질문에서 (얼마쯤) 고개 돌리는 까닭은 지금의 인류 사회가 정치적[도덕적] 상상력 면에서 칸트 시절보다 훨씬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윤리 사상의 흐름에 있어, 인류 가운데 꼽을 만한 봉우리는 소크라테스와 칸트, 두 사람 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그러려니여길 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칸트가 일깨워준 앎만으로는 인류가 맞닥뜨린 앞길을 헤쳐 나가는 데에 역부족力不足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봉우리가 칸트보다 더 높이 솟아야 한다.”는 말에는 옹졸하고 자잘구레한 얘기만 떠드는 지금의 인류 지성知性들을 싸잡아 꾸짖는 단죄斷罪와 탄핵이 들어 있다.

 

 

진화론이 들이미는 도전장

 

칸트의 사상은 지금도 논전論戰 중이다. 순수[이론] 이성과 관련해서다. 20세기초까지 자연과학의 주도 분야는 물리학이었다. 17세기 뉴턴 역학에 뒤이어, 20세기 초에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아찔하게 꽃피어 났다. 하지만 1970년대에 접어 들고부터는 생물학의 진화론[또는 다윈주의] 패러다임이 자연과학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2009년에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크게 벌어진 적 있다. 거칠게 간추리자면 인문사회과학이 사회생물학 패러다임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없느냐를 둘러싼 다툼이다.

최근의 진화론적 인식론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내놓은 개요표가 틀렸다!’고 단정짓는다[비토리오 회슬레가 쓴 ‘21세기의 객관적 관념론참고]. 칸트가 선험적인 개념[범주]이라 여긴 것들은 물론 경험 이전에 존재하고, 경험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들이 계통발생적으로 진화과정에서 형성됐고, 그런 한에서 후천적a posteriori인 것이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구실한다는 것이다. 후천적인 성격은 왜 범주들이 현실에 들어맞는지, 왜 더러는 현실과 일치하는지 등을 설명해준다고 한다.(진화론적 인식론의 얼개는 로렌츠가 일찍이 1940년에 짰는데, 한동안 주춤거리다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촘스키의 생득적生得的 변형문법론 같은 이웃학문들이 발달한 덕분에 19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칸트의 인식론에 대한 평가는 진화론의 지적知的 도전을 받아 얼마쯤 수정돼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칸트[와 여지껏의 인류]는 이성ratio을 의식意識의 꽃이라 여겨 왔다. “수많은 생각[의식]들 가운데 이치에 닿는 것이 이성理性이니라!” 이것은 사람만 놓고 떠올린 판단이다. 진화론에 따라,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다 안다know’, 앎의 개념을 전환하면 이성과 의식의 관계도 바뀔 수 있다. (앎의 주체의) 범위를 넓히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아는 것과 아메바가 제 몸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위대하신 사람님의 앎은 인식認識이고, 하찮은 아메바의 앎은 정보情報일 뿐이라고 아무리 둘러대도 둘 다 아는 것이란 점은 같지 않은가. 진화론 학자들은 생물체에게 의식보다 이성이 먼저 생겨난다고 그런단다. 필자도 자세히 모르는 얘기라 더 풀이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칸트 시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 정도나 전해 왔을 뿐) 생물학이란 학문 자체가 변변찮았다. 그도 진화론적 추리를 어렴풋이는 했다지만 아무튼 칸트 인식론은 후대의 진화론을 만나 얼마쯤 변용을 겪어야 한다.(그러나 진화론이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 이론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칸트 동네[주관적/객관적 관념론 패러다임]와 진화론자들 사이에 불꽃 튀는 입씨름이 벌어졌다고 한다. 필자의 막연한 짐작으로, 진화론에서 받아들일 부분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는 것이 옳은 입장이겠지만[모든 생명체를 다 아우르는 이론을 추구한다면 그 이론의 보편성이 확 넓어진다], 그들 말을 다 받아줄 수는 없다. 그것이 철학에 대해 들이미는 도전[=다윈주의가 모든 학문을 통합(!)하는 이론이 될 수 있다는 주장]만큼은 여지없이 틀렸다! 다윈주의는 과학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또다른 형이상학으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는데[현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다윈주의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그런 비약만큼은 대단히 허술한[허튼] 논리에 의거하고 있다.

이를테면 진화생물학은 의식consciousness의 발생(생물학으로) 설명해냈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그때그때 자신의 자아自我에 대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본질로 하는 내성[內省, introspection]은 자연과학의 개념과는 범주가 다르다. 이것은 자연과학의 관찰의 틀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진선미眞善美와 같은 범주는 인과론적 분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불변하는 자연 법칙이 있다는 말[]을 자연과학[또는 진화론]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는가?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 것처럼 자연과학은 자신이 전제前提하는 원리를 자신이 입증할 수는 없다. ‘형이상학으로서 탐구해야 할 영역이 어딘가에는 불가피하게 있다. 학문의 역사는 과학이 낡아버린 형이상학을 무너뜨리고, 그 결과로 한동안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격랑에 휩싸이다가 다시 새로운 형이상학이 싹터 나오는 그런 흐름을 거듭해 왔다. “과학이 모든 앎을 다 떠맡을 수 있다!”는 자랑은 단호하게 비판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지켜낸 형이상학마저 무분별한 과학주의 이데올로기의 격랑에 덧없이 떠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진화론적 인식론의 경우, 기술적인 인식이론에는 중요한 기여를 하지만, 인식론의 규범적 근거 문제나 타당성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해결책도 내놓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심각하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과 따로 노는 철학은 한갓 쓸데없는 휴지조각 신세로 추락하겠지만, 철학의 삿대를 내팽개친 과학은 또다른 괴물로 변신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도 빗나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의 인류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지도 모를 위험한 고비를 맞았는데도 변변히 방향타를 움켜쥐고 있지 못하다. 칸트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