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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9(2015.12.15. 발간)

 

[담론과 문화] 윤주의 육아일기

#19. 영유아발달검사, 그리고 늦은 우리 아기.

 

김윤주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아기 키우며 처음으로 심각한 걱정과 자괴감에 휩싸여있다.

석달 전, 2년차 영유아 발달검사 결과 아기가 몇 개 영역에서 표준치보다 낮은 발달점수를 얻었는데, 사실 나는 검사결과를 받고서도 아기가 조금 늦된 것일 뿐이라며 대수롭잖게 여겼다. 체크리스트에 내가 너무 짜게 점수를 줬다 혹은 기출문제를 좀더 집중적으로 학습시켰어야 했는데!!~~”하며 신랑이랑 히죽거리고 농담이나 해쌌던 차에,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 또래 다른 아기들에 비해 좀 많이 늦는 것 같다며 전문가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지속적으로 의견을 표해왔다. 자꾸 들으니 헷갈리고, 내심 걱정도 되고, 계속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자니 괜히 내 배짱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결정적 시기의 아기를 방치하는 결과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대학병원에 발달검사를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 운동 영역과 인지 영역검사를 했고, 한 달 뒤 언어영역 검사를 하게 될 것이다. 운동기능은 처음부터 별 문제가 없었고 테스트도 무사 통과했다. 그러나 인지영역은 검사자가 테스트를 중단하고 검사불가를 선언하였는데, 아기가 테스트 활동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저 혼자 연구실의 이런저런 장난감을 갖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선 워낙 익숙한 장면이었고, 27개월된 아기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는데, 검사자는 아기의 사회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결과로서 해석을 내렸다. 아기가 엄마 외의 다른 사람은 거의 사물과 동급으로 취급하며, 관찰컨대 엄마에게 하는 말도 상호작용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욕구에 기반한 것이며, 혼자하는 놀이의 수준 또한 월령에 비해 낮다고 했다.

 

이게 불과 사흘 전 일이다. 남편과 나도 다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데, 아기가 가족 외 사람들에게는 현저하게 관심이 없고, 혼자 노는 것만 좋아라하여 그 부분이 노심초사다. 또래모방이 없이 저 홀로 뭐든 익히려니 발달이 늦어지는 것은 원인-결과로 보이는데, 이 부분이 고착되면 자못 심각한 발달지연이 발생할 듯 하여 조바심이 난다.

 

어머니는 애비가 원체 늦되었으니 완전 부전자전이구만!”이라고 호탕히 웃으셨고, 친청엄마는 일케 잘 놀고 잘 크는 애를! 요즘은 애 좀 늦된 거 가지고 애한테 별소리들을 다한다.”며 역정이시다.

큰 시누 왈, “아기 발달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거 다 너무 상업적인 부분이 크고, 그런 조언이라도 해주면 뭐 본인이 대단히 아이에게 관심많고 전문가인 척 보이는 줄 알고 함부로 얘기하는 어린이집 교사들 너무 많아. 어린이집 가서 무조건 다 정상이라고 결과 받았으니 이제 우리 아이에 대해 일절 염려 말라고 딱 못을 박아.”

시누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는 유사자폐를 염려할 만큼 발달지연이 심각한 유아기를 보냈지만, 몇 해 전 수능을 만점받은 수재로 성장했기 때문에 지금은 시댁의 자랑거리다. 본인이 조카 키우며 겪었던 맘 고생과 설움까지 더해져 격분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유아전문가들의 문제있다는 소견과 아무 문제없다!”는 가족들의 호언장담 사이에서 내 마음도 갈팡질팡이다.

 

아기는 늘 잘먹고, 잘 놀고, 건강했으며 부모에게 애교도 많았다. 세상 많은 부모가 그러하듯 나는 우리 아기가 내 자랄 때 비해 참으로 좋은 조건을 누리는 행운아라 여겼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조금 방만하게 아기를 키웠다. 밝고 친절하며 교양 있는 중산층 부모의 외동자녀는 내 어릴 적 로망이었는데, 요 녀석이 딱! 그 포지션이 아니냐!

내 보기에 이 아이가 짊어질 생의 무게란 온전히 이 세상사와만 관련되어 보였다. 돼지 똥구멍보다 더러운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형세가 아기엄마로서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었기에 이 육아일기의 지면도 대체로 그에 대한 단상으로 채우곤 했다.



#19-1. 내가 잘못한 걸까.


육아를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언니네 조카가 다였는데, 종합병원 수간호사였던 언니는 나보다 더 정신줄 놓고 연년생을 키웠더랬다. 특별한 장난감도 집에 없는 채로 돌 지나 바로 어린이집에 입성하였으니, 조카들은 사실상 남의 손에 자랐지만 지금은 다 너무 반듯하고 똘똘하게 잘 자랐다. 교사생활 중 보아온 무수한 사례에 언니네 사례까지 더해져, 나는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올바르게 제 삶을 산다면 굳이 요란떨고 키울 필요가 없다는 신조를 확고히 갖고 있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의 극성맞은 육아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도 기가 질려서 문센 같은 데를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고, 값비싼 교구들을 월령에 맞춰 대령하지도 않았다. ‘우리 다 저런 거 없이도 잘만 컸다구.’

나는 부모 스스로가 사랑과 행복감, 지성을 충만하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아기에게 가장 큰 자양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지나치게 아이를 주시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해롭다는 생각에 지배 받고 있었다.

!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 밀려드는 혼돈과 자괴감.


 

#19-2. 표준점수의 빛과 그림자


비단 아기 발달뿐이랴. 인간이 느끼는 모든 행불행의 8할은 남과의 비교에서 올테지.

오직 내 품에 아기를 품고 있었을 시기엔 우리아기가 세상 가장 똘망해 보였다. 아무것도 못하던 그 핏덩이가 제 힘으로 여기저기 올라다니고, 구석구석 돌아보다 제 나름껏 안전을 탐색하며 제자리로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등은 일상 속에서 관찰하는 아기의 눈부신 발달이었다. 사물의 명칭을 익혀 그것들의 첫 음절을 말하고 그 어휘가 점점 확장되는 것도 너무 신기해서 아이고 똑똑해라~~~!!”칭찬이 절로 나왔으며, 엄마덕후라 언제나 나를 물고 빨고 타넘고 했기 때문에 사회성도 좋다고 여겼다.

우리 아기는 아역배우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생김새나 모든 표정과 자태가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지극히 아가스러워서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똥강아지마냥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면서 즐거워하고, 침대에 풀썩풀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재밌어 죽겠다는 듯 꺄르륵거리면 내 입에서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이구 귀여운 것! 사랑에 겨워 아기를 꼬옥 안아주면, 그 행복을 고스란히 만끽하기라도 하듯 쏘옥 내 품에 안겨웃곤했다

 

그런데그래, 어린이집! 4월부터 아기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라? 크게 월령차도 안 나건만 다른 아기들은 시간이 가면서 금새금새 문장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친구의 이름은 물론 친구 누구의 엄마까지 금방금방 꿰었다. 다 여자애기들이라 두 돌쯤 되자 벌써 어깨를 넘는 찰랑찰랑한 직모의 흑발소녀가 되어 누가 봐도 어린이의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눈빛이나 태도 또한 일상의 규율이나 일과 정도는 스캐닝이 다 된, 말 그대로 어린이의 분위기를 갖추었다.

아직 아기사자의 황금빛 솜털 같은 베이비헤어에, 너무나 아가 같은 표정과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아이. 그래서 동갑내기인 어린이집 친구들이 아가라고 부르며 마치 동생보듯 본다.

아이의 놀이가 월령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는 검사자의 말을 들은 후로, 뱅글뱅글 돌거나 침대에서 덤블링을 하는 모습도 귀여운 똥강아지로 보이지 않고 우려스러운 상동행동으로 캐치되기 시작했다. 제가 획득한 어휘 중 자신있는 발음을 엄마에게 부지런히 해보이는 행동도 기특하고 장해보이기 보다는 상호작용과는 무관한, 맥락없는 발화의 반복으로 보여 예전처럼 칭찬해 줄 수 없었다. 혼자서 발음연습을 웅얼웅얼 많이 하고 무슨 상상을 하는지 훈계나 연설하듯이 말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아이구 예에~예에~아멘아멘, 맞습니다 맞고요!” 장단을 맞춰주면서 함께 즐거워하곤 했는데, 그런 혼잣말 또한 사회성 없는 아기의 특징이라 하니, “? 뭐라고? 엄마 눈 보면서 직접 말해봐봐어거지로 상호작용을 강제해본다.

자동차에 열광하여 자동차를 요리보고 조리보고 깊이 탐색하는 저 몰두도! 지극히 연구자적인 성향과 집중력을 가진 제 아빠를 닮아 너도 메카닉한 분야의 수재가 되려나 기대케했던 그 열중함이란 것도 하나의 사물에 집착하는 사회성 결여의 한 지표가 아니라던가. 나를 웃게 했던 사랑스러운 행동 하나하나가 이제는 지켜보는 내 맘에 그늘을 드리우는 체크항목이 되어 기어코 어두운 음색으로 아기에게 말하고 만다.

우리 이제 딴 거 하자.”

 

내 걱정은 진행형이고, 이런 우려가 지금의 시기에 우리아기에게 아주 유효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 발달지표와 병증의 체크리스트 항목이란 것이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보다 사물에, 그것도 자신이 꽂힌 한정된 사물에 집중하는 것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고 특성이 아닌가. 나는 다방면에 얕은 흥미를 가진데다 관계지향이 뚜렷하여 이것저것 호기심을 채우고 사람들의 인정이나 시선, 함께하는 즐거움을 획득하는 데에 주로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왔다. 그 때문에 한 분야를 파고들어 일가를 이루는 성취와 재미를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했으며, 그런 내 성향에 대단히 한계를 느껴왔다.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기질의 남편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이 존경심은 다툼에 의한 분노나 짜증이 폭발하던 중에도 감정적으로 침범 받지 않았다.

27개월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아기인데, 그 아기가 좀 단순하게 놀면서 즐거워하고, 제 욕구나 감정 위주로 일방소통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샛별 같은 눈빛을 수시로 내게 쏘며 방긋거리고 웃어대던 아기가 어제는 내가 억지로 눈맞춤을 시도하자 필사적으로 내 눈을 피해 딴 곳을 보았다. ‘! 이제보니 눈맞춤도 안되네? 어떡하지?!?!’ 당황과 공포가 일순간 내 몸을 휘감았지만 이내 부질없게 느껴졌다. 사실 멀쩡한 어른도 누가 이유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억지로 시선을 마주치려하면 그 기운이 부담스러워 눈을 피하지 않는가. 혼잣말도 그렇다. 어른도 곧잘 어떤 장면, 어떤 말을 하는 공상에 잠기곤 한다. 입으로 굳이 발화하지 않는 것은 뻔히 잘 하는 말인데 굳이 소리내기가 귀찮기도 하고 남의 눈이 무서워서지만, 영어공부를 하거나 연설을 준비할 땐 소리내서 연습하지 않는가. 이제 두 돌 지난 아기가 남 의식 않고 혼잣말을 신나게 하고, 발음을 연습하는 게 뭐 그리 흰눈 뜰 일인가. 저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그래본다고 벌써부터…ㅠ

 

내가 기출문제라고 시시덕거렸던 발달지표행동, 가령 용변 후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하는가?” “숟가락질을 능숙하게 하는가?” “계단을 난간이나 부모의 손을 잡지않고 능숙하게 오르내리는가?” 같은 문항이 아기의 자조능력과 소근육 및 대근육 발달의 절대지표란 것에도 의구심이 든다. 우리 아기는 응가한 기저귀를 아무렇잖게 차고 앉아 놀아서 늘 내가 확인하고 갈아주어야만 하고 배변훈련을 전혀 못하고 있는데, 대신 어디가 조금이라도 답답하거나 불편하면 즉각 내게 도움을 요청하며, 모자나 양말, 마스크처럼 조금이라도 답답한 것은 씌어주기가 무섭게 제 손으로 벗겨내 버린다. 숟가락질은 아직 서툴러서 밥알을 식탁에 떨어뜨리고 얼굴에 묻히지만, 작은 과자부스러기나 쌀알 한톨도 능숙하게 손으로 줍고, 내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떼주곤 한다. 이건 유전적 성향이나 부모영향이 크다고 보이는데, 우리 부부는 청결에 둔감한 편이나 속박감과 이물감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예컨대 남편과 나는 특별히 땀이나 먼지로 뒤범벅이 된 날이 아니면 샤워를 못해도 남들처럼 끔찍하게 여기지 않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드러눕는다. 그러나 목걸이나 반지, 시계 등의 속박감은 견디기가 너무 힘들고, 목티나 후드티조차 목뒤가 답답해서 입지 않는 편이다. 아기가 바닥에 음식을 흘리며 놀거나 그것을 주워먹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 편이지만, 아기의 신변안전에는 민감하여 계단을 오르내릴 때 늘 아기 손을 꼭 잡는다. 아기는16개월에서야 제 발로 걸었는데, 무언가를 잡고 걸은 건 8개월 무렵이었으니 안전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까지 대단히 오래간 걷기에 대해 탐색한 편이며, 그 대신 넘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늘 잡아주던 손을 놓고 계단을 혼자 걷게 했더니 엄청 나게 조심스럽게 혼자 걸어 내려왔다.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생길 때 까지 안한 것이었다.

 

어쨌든 걱정의 쇠몽둥이를 맞은 나는 제정신을 잃고 육아커뮤니티의 발달관련 게시물을 폭풍 검색했는데, 정말 오버스런 말들이 넘쳐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를테면 다른 모든 행동발달이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의 특성을 나열한 후 말미에 그런데 우리아기가 자동차들을 자꾸 기차처럼 일렬로 나열하면서 놀아요. 자폐인가요?” 어이없는 질문을 한다. 그러면 사물을 일렬로 나열하는 것은 자폐스펙트럼에 해당되는 행동입니다. 잘 관찰해보시고 정 걱정스러우시면 전문기관을 찾아 검사를 받아보세요.” 라고 댓글이 달리는 식이다.

 

옛날엔 그저 늦된 아기라며 오랫동안 아가 대접을 받았던 아이들이 이젠 발달지연’ ‘사회성 결여’ ‘자폐스펙트럼등의 무시무시한 딱지를 달고 치료대상이 되고 있다. 그 중에 진짜 꼭 치료가 필요한 아기들이 있을 것이고, 이를 조기발견하면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을 테니 영유아발달검진은 분명 중한 의미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는 참 서글픈 일이다. 생후 세 돌도 되기 전에 표준점수를 획득하지 못하면 문제 있는 아이로 낙인 찍히는 현실이.

그리고 아기발달과 관련된 무수한 말들은 대체로 정상범주의 아이들이 조금 늦는 걸 갖고 발달지연을 따라잡는 것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혹시..설마.. 우리애가??’ 청천벽력 같은 장애를 피하고자하는 부모의 두려움에 기반한 것이다. 세상에는 조기진단이나 치료로도 교정될 수 없는 장애아들이 엄연히 적잖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런 분위기는 이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벗어나야할 두려운 그 무엇으로 전제하고 있어 소외를 기정사실화한다.

발달지연 이후의 결과도 천차만별이어서, “30개월이 넘도록 엄마 소리한번 못했던 아기가 어느순간 수다쟁이가 되더라. 이젠 영어도 술술이다. 걍 늦되는 거고 아가들마다 자기 속도가 있으니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라는 경험담도 넘쳐나고, 반대로 믿고 기다리다 개입시기를 놓쳐, 예닐곱살이 되도록 정상발달이 되지 않아 교정기관에 다니는 부모들의 한숨 소리도 많았다.

 

명확한 것은 요즘의 아이들 발달기준이 예전에 비해 무척 상향조정되어 있어, 나처럼 걍 우리 어릴 때를 생각하고 아기를 키우는 부모들은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제 어린이집 선생님도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 @@이도 이제 곧 네 살 반에 올라가야 하는데 요즘 네 살은 예전의 일곱살이랑 수준이 같아요. 거기다 여기는 강남이잖아요. 조금 긴장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대로는 네살 반에 적응 못해요

 

이래저래 심란하여 언니와 통화를 했는데, 그 말이 엄마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월요일마다 아기를 봐주시는 엄마는 아기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애정도 깊은데, 분을 못 참고 당장 내게 전화를 하셨다.

뭐가 어째? 검사고 뭐고 아무것도 받지 마라. 괜히 멀쩡한 애 스트레스 주고, 니도 스트레스 받을거고 그거 다 애한테 간다. 애는 키우는 사람이 젤 잘 안다. 엄마랑 니 눈에 아무 문제 없으면 없는거다. 쓸데없는 걱정말고 니 주관대로 해라. 아니 걔가 눈이 흐리멍텅하길 하냐, 의사표현을 안하길 하냐. 저렇게 밝고 잘 놀고 정상적인 애를 데리고 뭐라들 해쌌노?! 단지 걔 성격이 지 관심 있는 거만 파고들고 관심없는 거에 무감하다 뿐인데, ? 갸처럼 집중력있고 애교많으면서도 냉정한 구석이 있는 게 남자로서 얼마나 매력적인 성품이고!!!!!?애 매력 다 죽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마의 마지막 말에 빵터져서 며칠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19-3. 어차피 인생이란 주관과 객관의 이중주.


우리는 끊임없이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한다. 능력, 사랑, 취업, 자존감, 세계관……모든 생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주관은 객관에 의해 흔들리고 상처받으며, 객관 역시 주관의 아우라에 맞춰 흔들리고 변화된다.

 

나는 대체로 내 주관대로 살아왔고, 직관에 의존하는 선택성향은 기질적인 부분이 젤 크지만,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판단하는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후회를 하지 않으며, 자신의 모든 선택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든 결과에 대한 평가 역시도 주관적으로 의미부여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경험에는 다 의미와 교훈, 그리고 내 열정이 스며있는 법이니 어찌 그 나름대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객관적으로 보기엔 실패라 불릴 만한 선택조차도 한번도 실패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며, 그 모든 경험과 선택들이 신의 축복이라 여길 만큼 후회 없이 지내왔다. 그렇게 내 삶에 대해서는 두 번 생각하지 않는 편이지만, 아기의 일에는 그럴만한 자신감이 없다. 나는 그 아이가 아니며, 내가 아이와 관련해 내린 모든 선택과 결과의 해석까지 아름답게 대신 내려줄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 두려움 때문에 나는 전문가의 문제의식을 존중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이다. 어찌됐건 간에 아기에게 관심과 시간을 집중하는 것은 좋은 영향을 주지 않겠나. 다만 아기가 잘 자라고 있다는 내 주관을 버리진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왜냐하면 염려와 공포가 내 마음을 집어삼키고나니 아기의 모든 행동이 문제 있어 보여, 햇살이 가득하던 우리들의 시간이 너무 어둡게 응달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아가야, 네가 어떤 상황이건 너를 사랑한다. 이제 남은 휴직기간을 오직 너에게 집중하라는 하느님 뜻인가보다. 그 기회를 주기 위해 이런 긴장감을 주신 것 같구나. 함께 열심히 커보자꾸나.

유경험자의 관련된 조언 환영하며, 7회만에 처음으로 육아일기다운 육아일기 이번 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