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진보교육] 57(발간 : 201576)

 

[현장에서]

초짜 지회장의 투쟁기

 

 

문태주(전교조 서울지부 초등관동지회장)

 

 

 

나는 오랜 한나라당 지지자였다. 그런 내가 전교조 지회장을 하고 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살아가게 될 줄 몰랐다. 나도 내가 어쩌다 이런 길을 오게 됐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됐고, 나의 전교조 활동 기록을 정리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기로 했다.

내가 전교조를 가입하게 된 것은 발령 3년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1인 분회인 학교였고, 당시 분회장이 내가 전교조 가입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많이 의아해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나는 학교에 발령 받은 첫 해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해 헤맸었고, 적응이란 것을 한지 2년 정도 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전교조 가입을 했지만, 이듬해 병역의무로 인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은 전교조라는 것에 가입을 했고 누가 무엇을 어떤 주제로 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집회라는 것을 분회장과 함께 한번 서울시 교육청으로 간 단 하루 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어머님 학교에 한 번 오시라고 해라.”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돈 없어서 못 간다고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전했더니 담임 선생님께서 조용히 부르시더니 걱정 마시고 선생님이 전교조라고 말씀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학교에 찾아가지 않으셨지만, 어머니가 전교조가 무엇인지는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지만, ‘전교조라는 좋은 기억이 내게 남아 있게 되었다. 사실 내가 전교조를 가입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다.

병역의무를 마치기 직전, 마지막 휴가 때, 새롭게 발령을 받게 된 분회를 인사차 찾아갔다. 교장, 교감 선생님 얼굴 뵙고, 나는 분회장님이 있다고 하는 곳을 향했다. 전교조 활동이란 것을 해 본적도 없고, 소속감도 없는 내가 새로운 학교를 가게 되니, 분회장을 나도 모르게 찾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 학교로 간 후 그 분회장님께서는 내가 분회장 역할을 맡아주시길 원하셨다. 그리하여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9개월짜리 분회장을 맡게 되었다.

분회장이 되니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전교조에 대한 애착이 조금 더 생기기도 했고, 대외적으로는 정보를 조금 더 빨리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회에서 연락이 와서 정세에 대한 파악을 잘 할 수 있었다. 지회에서 하는 행사도 자주 참여했다. 지회에서 집회 안내 문자를 보낼 때 분회장 필참이렇게 보내온 적도 많았다. 나는 분회의 대표가 되어서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거의 참석하였다. 분회장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도 있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같다.

그렇게 해를 넘길 때 즈음 지회장으로부터 지회집행위를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내가 분회장이 아닌 조합원이었을 때 전교조 집행부에 대한 신뢰는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전교조 집행위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한 번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보자는 조금은 불순한 의도로 동참하기로 했다.

처음 맡은 일은 지구장이었다. 정해진 지구의 선생님들과 지회와 소통하는 일이었는데 이건 거의 초짜 집행위에게는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초면에 사람 대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정신도 한 몫 한 것 같다. 그렇게 지회 집행위들과 1년을 지냈지만, 특별한 정도 없었고, 친분도 잘 생기지 않았다. 여름에 활동가 연수를 제부도로 간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나는 서울의 한 부지부장님이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반갑다고 인사하시면서, 지회장과 사무국장 중에 누구랑 더 친하냐고 물으셨다. 지회장과 사무국장이 각자 기대감을 보였고, 나는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둘 다 아무랑도 안친한데요?” 둘의 허걱하던 표정과 대사를 아직 난 잊을 수 없다.

그 해 두 명의 조합원이 우리 학교에 오게 되었다. 규모는 36학급 학교에 조합원 수가 네 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눈치 없게도 지난 학교에서 분회장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는 분께 분회장을 부탁했다. 학교에 새로 오자마자 분회장을 하기는 어렵고 그런 경우도 별로 없다며 극구 사양하였으나, 내가 지회집행위에 나가게 되었으니 간부의 수를 늘리자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허락을 받았다. 난 조합원이었지만 무늬만 조합원이었다. 그런데 분회장을 새로 세우고, 함께 자주 모임을 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나는 원래 학교가 그런 곳인가보다 했었다. 침묵을 한 것도 아니고,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2006년 네이스 연가 투쟁이 있을 때, 나가려고 했더니 교장이 연가 승인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안 나갔던 조합원이었다. 그러나 분회 모임을 갖게 되면서부터 함께 이야기하면서부터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자주 모일 때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되고, 학교에서의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교 평가가 들어오는 시기에 학교평가 ABC 반대를 위한 서명을 했고, 그 서명은 아마도 우리 분회에서 처음 진행된 것이었을 것이다. 정말 많은 동료교사들이 서명을 했고, 승진을 포기한 교감 선생님도 나도 학교 평가 반대여~” 라는 말과 함께 서명을 해 주셨다. 교장보다 일곱 살이나 많아서 교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퇴임을 앞두신 교감 선생님이기에 가능한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 일로 교장이 교육감실에 직접 불려가, 속된 말로 쪼인트(?)를 까이고 왔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그렇게 학교의 헤게모니를 조금씩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조합 활동을 한 적이 없는 내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사안이 있을 때마다, 특히 말도 안 되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똘똘 뭉쳐서 싸웠고, 설득해 나갔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잘 지냈다. 이런 저런 이유로 1~2년 후에 조합원이 배가 되어서 8명까지 되었었고, 부장회의가 있던 목요일 3시 이후는 조합원들과 항상 함께 만났다. 그렇게 하면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성과급 1/N을 조직하게 되었고, 40명이 넘는 학교에서 2년간이나 30명 이상의 조직을 하기도 했다. 우리 분회장이 해직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랑 성향이 비슷한 분회장과 나는 막 지르고, 사고치고 맘대로 하고 다녔다. 그 뒷수습은 착하기도 하고 착해 보이기도 하는 또 한명의 선배 조합원이 후배들을 다독이며 했고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삼국지에서 도원결의를 한 것처럼, 세 명이 모이면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활동을 시작한 이듬해 사무국장이 지회를 떠나게 되었고, 사무국장을 할 활동가를 찾는데 지회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었다. 그 시국에 어쩌다 사무국장을 하게 되었다. 사실 활동이란 것을 하게 된지 1년 만에 사무국장 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당시 지회장은 대학시절에 운동을 했었냐고 물었다. 나는 태권도 동아리를 하던 터라 태권도를 했다고 대답했다. 그 운동은 그 운동이 아니었다.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보수적인 대학생활을 했었다. 사무국장이 되고 나니 지부 집행위에 갈 일도 가끔 생겼다. 거의 새내기였던 나는 지부집행위를 참석했을 때, 두 가지 놀란 점이 있었다. 하나는 정말 이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고심하고 행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사람들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전교조 가입을 했지만, 보수의 색깔이 강한 사람이었고, 조직에 1년밖에 활동하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지부집행위라는 큰 자리에서 나라는 사람을 믿고, 대외비적인 내용도 서슴치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세작은 아니다. 다만, 처음 보는 나에 대해 지회 사무국장이라는 이유로 경계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사실 지금도 이 부분은 누군가 세작으로 들어온다면, 조직이라는 곳이 좀 취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쨌거나 나를 믿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훈훈한 마무리? ^^)

일은 잘 하지는 못했지만, 지회장, 사무국장, 조직부장 중에서는 그나마 체질에 제일 맞았다. 지회장은 지회의 대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 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조직부장은 사람들과 연락을 자주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국장은 사람 만나는 일이 많지 않아서 그나마 할 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이듬해 새로운 지회장이 지구장 안 시키는 조건으로 사무국장을 다시 맡기는 했지만, 지회 사정이 안 좋아 결국 10개 학교나 맡게 되었다. ㅠㅠ 학교 이외의 일을 해보지 않은 나에겐 많이 벅찬 일이었다. 지회장을 잘 보필하지 못하였지만, 지회장이 알아서 잘 해주어서 날라리 사무국장이 적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다시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일 잘 안하고 땡땡이치는, 그러나 회의는 빠진 적이 없는 날라리 사무국장이었다. 지회장과 조직부장이 번갈아 맡고, 사무국장은 내가 하는 체제로 가게 되었다. 그러한 체제로 4년의 사무국장 생활을 마치고, 지회를 옮기게 되었다. 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지회장과 조직부장에게 전화를 해서 학교 사안과 대처 방법, 전교조 사안에 대한 질문들을 자주 했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척척 대답해주는 지회장과 조직부장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사무국장을 몇 년 하게 되면서 누군가 내게 그런 전화를 하고, 나는 예전의 지회장과 조직부장처럼 척척 대답을 하고 이것 저것 알려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정말 잡초처럼 쓰러지지 않고 잘 버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내공은 공부해서는 얻을 수 없고, 수련의 시간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임을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이런 잡초 같은 활동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깊이와 신뢰가 부족하다. 진보 교육감이 계속 나왔지만, 잡초 같은 활동 없이 갖고 있는 머리는 돌아설 수도 있다는 것을 내게 더욱더 느끼게 해 줄 뿐이었다. 내가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면에서 서울시장은 확실한 포지션을 보이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사무국장과 함께 대의원도 함께 시작했다. 아는 것은 없었지만, 우리 대의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궁금했고, 나도 주체적으로 참여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008년 무주리조트에서 대의원대회를 했었는데, 가는데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오후 세시 정도에 도착해서 그 다음날 새벽 다섯시까지 약간의 정회시간과 저녁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된 회의가 이어졌다. 정말 신기한 것은 300여명의 사람들로도 회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저 사람 이야기가 맞는 것 같고, 정말 아리송하기도 하였다. 항상 상층부로부터 내려오는 지침에 맞춰서 나는 수동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었는데, 대의원대회를 통해서 그러한 사안 하나 하나가 검토되고 수정되고 열띠고 열띤 토론을 거쳐 결정되는 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조직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사무국장을 하던 시절에 우리 분회 분회장님이 일제고사에 대한 선택을 학생과 부모가 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함께 해 보자는 의도로 편지를 보냈다. 당시 나는 4학년 담임이라 일제고사 해당 학년이 아니었고, 분회장은 6학년 담임을 맡아 일제고사 해당학년이었다. 2/3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일제고사를 실시하지 않고 체험학습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학부모와 학생이 함께 내렸다. 첫째 날은 체험학습을 가고, 둘째 날은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는 어린이를 위한 대체 수업을 조합원 중심으로 비조합원 선생님들까지 함께 이미 빈틈없이 계획하였다. 일제고사 보는 첫째 날 아이들은 체험학습을 다녀왔고, 둘째 날은 대체 수업을 진행하고 큰 무리 없이 마쳤다. 수능 보는 날 비행기도 못 뜨고, 직장도 늦게 가고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마당에도 수능은 신청해도 원하지 않으면 시험을 안 볼 수 있는데, 전집으로 하겠다고 하는 일제고사는 보지 않으면, 아이들은 대체수업을 해도 결과 처리 결석 처리 등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는 어처구니 없게도 파면과 해임이라는 징계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일제고사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안내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일들은 내가 다 진행하고, 교장이 아이들 내 놓으라고 강당 수업하고 있을 때 쫓아오고 해도, 거부하고 수업을 했던 나는 흔한 경고 한 장 나오지 않았는데, 분회장이 해임 처분을 받은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당시 우리 지회에 두 명의 해임이 있었는데, 이는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당신을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고 내 있는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 정말 이 기간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쏟아부었다. 학교의 교장감, 연구부장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고, 교장감, 연구부장을 제외한 모든 교사들의 탄원서도 받았다. 학교에 혹시나 분회장이 찾아올까봐 경찰 병력이 교문을 지키는 일도 있었고, 모든 주차장을 폐쇄하는 일도 있었다. 교장, 교감, 행정실장, 담임장학사, 주무장학사와 15의 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뒤집어 엎어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상대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멍청하게도 교장, 교감, 행정실장, 담임장학사, 주무장학사 그들은 학교의 병력을 해체하지도, 주차장 문을 열으라는 요구에 명령이 없으면 못한다는 말 뿐이었다. 지역교육청 초등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열기로 했다. 이런 멍청한 사람들은 그 전화 한통에 그냥 모든 내 말을 따르기로 했다. 교장은 부장들을 시켜 아침에 교문을 지키게 하고, 의식 있는 한 부장이 모두들 교실로 돌아가라 했고, 부장들도 부끄러움을 알았던 터라 교실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분회장에 대한 탄압은 없었으며, 많은 격려를 받고, 학부모의 도움도 받고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판결에 유리한 고지를 얻었다. 당시 지회장은 개인 사정으로 지회일을 거의 그만둔 상태였고, 조직부장과 함께 꾸려가고 있었는데, 내년에 지회장을 하기로 한 조직부장 선배가 결국 이 징계 투쟁을 위한 총 책임자로 나서게 되었다. 나는 언론 싸움이 없으면, 사라지고 만다고 생각했고, 선배는 기본적인 농성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입장이 서로 달랐으나, 결국 나는 학교내 농성을 했고, 선배는 언론을 그 농성에 붙여 줌으로써 제대로된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자칫 이러한 징계가 세상의 관심 없이 그냥 끝날 것처럼 보였었는데, ‘도둑괭이선생님의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알려지고, 다시금 사라질 때 즈음, 우리 분회의 조합원들과 친조합원들의 학교앞 피켓 시위가 선생님을 돌려주세요라는 학생들의 피켓 시위로 이어지면서 선배가 보내준 기자에 의해 경향신문 1면에 기사가 나게 되고, 제대로 된 투쟁 국면으로 들어갔고, 선전전, 서명받기, 1231일의 보신각 앞 노란풍선 날리기 행사까지,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업고 판결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3월초 일제 진단고사 싸움에서도 징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똑같이 안내를 하고 시험을 보지 않은 학생들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선생님은 끝까지 굳은 심지로, 해임 파면을 받은 선생님들과 같이 어떠한 행정과 관련한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정직을 얻어냈다(?). 이는 모든 해임 파면 교사를 살리는 일이 되었고, 결국 해임 파면은 과한 처분이라는 증거를 남겼다. 결국 징계 저지 투쟁에 성공하면서 내 약속대로 우리 분회장을 학교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정말 그 시간이 힘든 시간이었지만, 돌아올 수 있음에 감사했고, 분회장은 항상 아니라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싸움을 통해 나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조합원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지내다 지역교육청을 옮기게 되었고, 새로운 지회의 선생님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지회집행위 하느라 고생했을 터이니 한 학기만 푹 쉬고 지회집행위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정말 그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그러나 다른 지역교육청에 혁신학교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을 하고 그 학교에 가게 되면서 초등관악동작지회로 유입되었다. 6개월간 머물렀던 지회에 정말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혁신학교를 준비하면서 나의 역량을 혁신학교에 집중했고, 내가 담당한 업무의 장학사들과는 모두 싸웠다. 혁신학교를 길들이려 하고 나를 길들이려고 해서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간섭하지 않게 길들였다. 이렇게 1년 반동안 지회집행위를 하지 않으며 업무전담팀에서 내가 생각하는 혁신학교의 기초를 닦았다. 2년간 지회집행위를 쉬었더니 감도 떨어지고, 혁신학교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2014년 지회장을 선출하지 못해 비대위로 움직이는 지회에 비대위로 합류하면서 지회장을 권유 받았으나, 새로운 지회에 와서 지회집행위를 겪지도 않고 지회장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비대위에 설득을 했다. 내년에 후보가 나타나지 않으면 지회장을 하리라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으로 올해 지회장을 맡게 되었다.

지회장은 사실 내게 너무나도 과분하고 어려운 자리였다. 내 역량이 사람을 챙기는 일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낯도 가려 지구장도 어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향 지회에서 지회장은 정말 못하겠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며 사무국장을 내리 4년간 하면서 버텨왔는데, 정말 지회 상황 하나도 모르는 곳에서 지회장을 하려니 겁도 많이 났고, ‘이제 피할 만큼 피했구나라는 생각도 함께 났다. 고향 지회 지회장에게 많이 미안했다. 이렇게 할거 였으면 미리 해서 고향 지회 지회장님 덜 힘들게 많이 도와드릴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시작하는 지회장이었지만, 선배들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힘을 얻고 자신 있게 하기로 했다. 또한 지회장 찬반 투표에서 100% 찬성을 받은 게 아마 엄청 오랜만이거나 처음일거라는 선배의 격려도 지회 조합원들의 격려도 자신 있게 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무국장에게 다 맡겨야지 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지회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내가 지회장이 되고 첫 지부집행위를 가게 된 순간, 조금 더 이르면 지회 LT를 가게 된 순간, 이미 나는 지회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껏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구나생각했다. 지회장은 타고 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지회장으로서의 역량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겠지만, 지회장을 하게 되면 지회장이 되는 것이었다. 마음가짐 하나가 사람의 역량을 끌어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 꼭 지회장으로 해보고 싶은 것은 많은 조합원 선생님들을 만나고 같이 놀고 자주 보고 서로가 서먹하지 않고 지회가 가까워지는 기틀을 다지는 것이다. 1학기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나는 지금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지부집행위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것을 우선 순위로 두고 차 순위로 조합원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차 순위에 계획한 것들은 거의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 내 맘 같지 않은 것들도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지회장으로서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앞으로 지회장이 아니더라도, 원칙은 지켜가며 살아볼 생각이다.

사실 나는 사실 부정 부패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었다. 대통령인데 몇 천억원 해 먹을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첫 선거 때 놀다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가 이회창 후보를 찍지 않으셨다며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나도 그 때 반성을 많이 했었다. 아버지는 당시 대구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한 표 행사를 하기 위해 선거 때만 되면 언제나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가 한나라당을 지지하게 된 것은 우리 집이 YS를 예전부터 쭉 지지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YSYS의 당에 투표하셨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이것저것 잴 거 없이 YS를 좋아하게 되었다. 3당 합당을 했을 때, 그게 얼마나 우리 사회를 망쳐 놓는 일이었는지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YS가 드디어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됐구나라며 기뻐하기만 했다. YS의 아들의 비자금 소식에도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이 뉴스에 자주 나왔는데, 같이 살던 외할머니는 쯧쯧, 저놈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역시 내게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좋아하기만 하면 발전은 없이 궤변만 늘어난다. 메르스 사태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만을 하게 할 뿐이다. 큰 잘못을 해도, 방어 기제만 생기지 비판할 생각은 하지 않게 된다.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왜 그렇게 남을 헐뜯는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내가 바뀌게 된 것은 하나의 경험이었다. DJ가 집권을 하면 우리 나라가 적화통일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나의 생각이 잘 못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까지는 불과 몇 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MB 서울시장 당시 추진력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 친구와의 대화에서 혹시 그 추진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하게 되면 어쩔꺼냐라는 말을 듣고, 많이 흔들렸다. 수십년간 가지고 있던 생각이 내가 사유하게 되는 친구의 한 마디와 기호 1번이 대통령이 안될 수도 있고, 그렇다고 정말 나라가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나의 마음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런 나를 겪어 왔기에, 앞으로도 비판 없이 무작정 숫자 1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닫고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도 계속 하나씩 하나씩 경험하고, 옆에서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귀가 따갑게 이야기하면 돌아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우리 부모님은 1이라는 숫자를 이제는 좋아하시지 않으신다. 때로는 2라는 숫자, 3이라는 숫자, 4라는 숫자를 나와 함께 고민하신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비판 의식은 조합 내에서도 굉장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나와 친분이 있기에 쓴 소리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과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나와 항상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생각이 다르면 다르다고 말해야 하고, 옳지 않은 판단을 했을 경우 과감히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내가 다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비판을 하고 또 상대쪽에서 반론을 하거나 반성을 하게 되면서 내 스스로 또 피드백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도 완전히 완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난 언제나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나라는 사람의 의견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생각이 맞을 때는 지지하고, 생각이 맞지 않을 때에는 맞서기도 한다. 어찌 보면 사실 나는 편이 없다. 각 사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힘을 합치고,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맞서기도 하고 함께 맞서는 사람들과 힘을 합치기도 한다. 친분은 사적인 친분으로 묻어두고, 할 이야기는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 대한 적을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조직이 건강하려면, 일방통행이 아닌 여러 갈래의 길을 함께 모색해 보고 힘을 합쳐 큰 길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내편일 뿐인 외로운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중에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지금 나의 삶의 방식이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의 변화는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조직 내에서는 일관되게 행동해 왔고 앞으로도 외로운 독자적인 포지션에서 일관되게 행동할 생각이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한 길을 꾸준히 지켜왔던 일꾼으로 조합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 [권두언]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구른다 file 귀카 2015.07.28 797
17 [특집] 1. 자본의 위기, 정권의 무능, 혁명적 교육의제로 정세를 열어가자 file 귀카 2015.07.28 372
16 [특집] 2. 권력개편기 교육노동운동의 방향 file 귀카 2015.07.28 283
15 [기획] 1. 서구와 제3세계에서의 맑스주의 교육학 file 귀카 2015.07.28 894
14 [기획] 2. 사회주의 국가에서 맑시즘 교육론의 전개 - 소련을 중심으로 file 귀카 2015.07.28 521
13 [초점] 2015초등교육과정 개악의 문제점 분석 및 대응방향 file 귀카 2015.07.28 1141
12 [초점] 미리보는 2015 교육혁명 대장정 [1] 귀카 2015.07.28 209
11 [만평] 메르스 (메마른 이땅의 레알 소통) file 귀카 2015.07.28 213
10 [진보칼럼] 세월호와 메르스 file 귀카 2015.07.28 397
9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 - 아무 것도 묻지 말기를 ... 쇼스타코비치 file 귀카 2015.07.28 465
8 [담론과 문화] 타라의 문화비평 - [풍문으로 들었소] file 귀카 2015.07.28 514
7 [담론과 문화] 윤주의 육아일기 - 토양의 이끼들 file 귀카 2015.07.28 187
6 [담론과 문화] 송원재의 역사이야기 - 일본의 조선출병, 아직 끝나지 않은 악몽 file 귀카 2015.07.28 579
5 [맞짱칼럼] 모진 꿈이 우뚝 서는 날들 file 귀카 2015.07.28 341
» [현장에서] 1. 초짜 지회장의 투쟁기 file 귀카 2015.07.28 305
3 [현장에서] 2. 불통 교육과정에 분통 터지는 이야기 file 귀카 2015.07.28 354
2 [열공] 1. 아들러 심리학 개괄 file 귀카 2015.07.28 925
1 [열공] 2. 감정의 시대 문화 읽기 file 귀카 2015.07.28 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