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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6(발간 : 2015327)

 

[기획1] 진보적 교육학의 재정립

 

비고츠키 교육학으로 본 수업혁신

- ‘융합수업을 중심으로 -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

 

 

1. 대한민국은 지금 수업혁신?

 

수업은 정책으로 직접 통제가 가능하거나 쉽사리 변화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아니다. ‘수업혁신은 입시개혁에 비하면 정책에 의한 현장의 변화가 쉽게 감지되지 않으며 의도한 결과가 쉽사리 드러나지도 않는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실제 과정까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정책은 없다. 모든 교사가 일시에 수용하는 완벽한 수업모델이나 자료가 존재할 리도 없다. 그런데 정부는 헛된 생각으로 교사들과 현장을 압박하고 있다.

 

교사들에게 있어서 수업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10099는 수업을 교직의 의미를 실현하는 중요 영역으로 설정할 터이다. 수업이 재밌다거나 집중이 잘 된다거나 선생님은 참 잘 가르친다거나 하는 얘기를 학생에게서 들을 때 교사는 아마도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예뻐요 착해요(물론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만한 캐릭터는 아니다)라는 말보다 이게 더 좋은 교사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반면 고개 숙이고, 엎드리고, 딴 짓 하고, 아무리 하라고 해도 안하고, 심지어 대들기까지 하면 울컥 화도 나지만 내 수업에 문제가 있나?라는 자기반성을 하기도 한다. 수업에 대한 만족감을 교사 스스로 느끼기 어려우면 심한 경우 교직 자체에 대한 회의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수업은 교사들이 중시하는 영역이다. 그런데 헷갈린다. 수업이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것인지 나를 좋아해서 수업에서 잘 참여하는 것인지? 반대도 가능하다. 수업을 못해서 싫어하는 것인지 싫어해서 수업을 거부하는 것인지? 하지만 대전제는 이거다. 기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든 학생이든 어쩔 수 없이 한다라는 것. 중요하지만 힘든 것. 가급적 적게 했으면 하는 것. 그러나 안 할 수는 없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있어서의 수업이다.

 

입시위주 교육의 견고한 벽 앞에서도 교사들은 열정적으로 자발적인 모색들을 했었다. 시키지도 않았고 입시에 필요하지도 않거나 심지어 항의를 받을 수도 있는 토론 수업을 구태여 어떻게 해서든지 해보려고 하고 연극도 시켜보고 발표도 시켜보고 글쓰기를 해서 일일이 피드백을 하는 교사들이 생겨났었다. 개별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교과 모임을 결성해서 집단적으로 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인 신선한 수업방법과 자료들이 전파되었고 수업지도안, 학습지도 때마침 발달하기 시작한 인터넷 망을 타고 활발히 공유되었다. 힘든 노동을 무릅쓰고 선다형의 객관식 평가를 지양하고 서술형 논술형 평가를 도입하였으며 이후 수행평가의 모태가 된 다양한 평가 방법을 구안하는 등 현장 교사들은 평가와 수업방법 개선을 선도하는 주체였었다.

 

이러한 자발적 현장실천 동력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교과서와 입시에 대한 전일적 지배로도 모자라 교사와 학생만의 은밀한 영역을 적극적으로 침범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였다. ‘수업마저 자기 의제로 가져가버리고 교사들이 만든 실천의 성과들을 제도화시킴으로써 한 때 싱싱했던 귤은 시들시들 탱자가 되었다. 이 때는 신자유주의 교육개편의 청사진이 그려질 때이며 정년단축을 빌미로 교사들에게 무차별적 공격을 퍼부어댈 때이며 입시가 마치 근본적으로 바뀔 듯 허위선전을 하던 무렵이었다. 교사들의 근무조건은 열악해지고 있었으며 학교붕괴, 교실붕괴 이야기에서 짐작하듯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현장은 뒤숭숭했고 교사들은 업무에 쫓겼다. 7차 교육과정, 수준별 수업, 수업과 평가방법 개선 압박, 교단선진화 기자재 도입 등으로 현장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생산한 결과물들에는 제도화의 족쇄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자발적이던 것이 업무 부담으로 탈바꿈했다.

 

2015. 어렵고 힘든 세월을 건너 지금 현장은 과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변했다면 많이 변했다. 물론 온도차는 급별로 교사별로 지역별로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30년 전의 천편일률적 교과서 해설식 수업과 선다형 평가는 엄청나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있는 상태다. 그저 앉아서 40~50분을 보는 척, 듣는 척만 하며 힐끔힐끔 시계를 쳐다보며 종칠 때만을 기다리던 과거와 판이하게 다르기도 하다. 재미있는 요소도 많이 도입되었고 수업에서의 활동들도 많이 다양해졌으며 발전된 기술의 도입으로 흥미로운 시각적 자료를 접할 기회도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와 같은 경직되고 무서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져 학생들이 자유롭게 교사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교사집단의 자율적 역량을 믿지 못하고 이것저것 시키기 바쁘다. 놔두면 알아서 잘 할 교사들더러 정부는 자꾸 수업혁신을 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융합수업, 스토리텔링, 자유학기제, 교과교실제,메뉴가 다양해 보인다. 먹을 만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혁신밥상에 이것저것 풍성하게 올려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이와 관련된 자료들이 볼 엄두가 안 생길 정도로 많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밥상에 끌어 앉혀 놓고 열심히 떠먹이려 한다 해서 소화가 잘 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골라먹으려 해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어렵고 취사선택하기에는 압력이 너무 강하다. 자유학기제와 교과교실제는 거의 일방적으로 학교에서 채택하면 따라야 한다. 물론 그 결정과정에서 교사들의 주체적 의지가 매우 희박한 영향만을 발휘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융합수업은 선진적 교사들이 주장하던 통합교과와도 일맥상통하는 듯해서 혼란스럽지만 막상 하려해도 제시된 예시들을 보니 대부분이 두세 교과 내용 짬뽕이라 이를 융합수업이라고 하기에도 좀 이상스럽다. 스토리텔링은 맹목적이고 단순한 문제해결을 넘어서는 기법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무엇을 취할지 가려내기도 쉽지 않고 옳지 않다고 과감하게 반론을 펼치기엔 뭔가 있어 보기기도 하고 왠지 해봐야 할 것 같은 조급함도 생긴다.

수업을 잘 하는 것을 넘어 훌륭한 수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서야 무차별적인 수업혁신 압력에 줏대 있게 맞설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줏대를 가지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론이 비고츠키교육학이다. 비고츠키교육학은 수많은 교육이론 중에서도 수업의 교육적 가치를 매우 과학적인 방식을 기반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이론이다.

 

2. 비고츠키교육학의 수업론

 

(!) 발달을 이끄는 수업이 훌륭한 수업이다.

 

훌륭한 수업의 가장 본질적인 조건을 비고츠키교육학은 발달에서 찾는다. 비고츠키는 실험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교수-학습(수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교수-학습은 오직 발달을 앞서 갈 때만 유익한 것입니다. 어린이를 위해 올바르게 조직된 교수-학습은 어린이의 정신 발달을 선도하고, 교수-학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총체적인 일련의 발달 과정에 활력을 불어 넣습니다." (비고츠키, 1933 ; Rene Van Der Veer, 2007)

 

한 마디로 훌륭한 수업은 발달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수업이다. 아닌게 아니라 십수 년 간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어도 학습자가 아무런 긍정적인 변화도 이루지 못했다면 서로 간에 고통을 주기나 하면서 쓸모없는 짓을 십년 넘게 한 것이다.

비고츠키는 훌륭한 교수-학습이 무엇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교수-학습과 발달의 관계부터 논의한다. 교수-학습과 발달, 흔히 쓰는 일상의 용어로 바꾸어 수업은 발달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고츠키교육학에서는 학교에서의 교수-학습을 학습자의 내적 변화를 이끄는 인간발달의 중심적 기제로 바라본다. 쉽게 질문을 던져보자. 수업과정을 통해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가? 사실 지금의 수업에서도 대체로 그렇다. 지식교육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러한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비고츠키는 이러한 외적 변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교수-학습을 통해 학습자의 외적 행동 변화 뿐 아니라 그 이면의 내적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어린이는 특히 글말과 문법 덕분에, 자신이 학교에서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기능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배운다. 어린이의 능력은 무의식적, 자동적인 측면에서 의지적, 의도적, 그리고 의식적인 측면으로 이동한다. 글말과 문법에 대한 교수-학습은 이러한 과정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생각과 말, 470, [6-4-22])

"모든 기본적인 학교 교과목에 대한 우리의 다른 모든 연구들은 우리를 동일한 결론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즉 교수-학습이 시작될 때 생각이 성숙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연구를 토대로 더 본질적인 결론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교수-학습을 심리적 측면에 따라 검토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지속적으로 학령기의 기본적 신형성인 의식적 파악과 숙달을 축으로 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교수-학습의 교과들이 어린이의 심리 속에서 공통된 토대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공통된 토대는 학습의 경로와 과정을 통한, 학령기의 이 근본적인 신형성의 발달과 성숙이지만 시작과 더불어 그 주기가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립할 수 있을 거이다. 학교 교수-학습을 위한 심리적 기반의 발달은 교수-학습을 앞서지 않고, 그들은 교수-학습의 진전의 경로 속에서, 그와 분해불가하며 내적인 연결 속에서 발생한다." (생각과 말, 471, [6-4-24]

 

하지만 매시간 아이들은 발달하고 있다고 교사들은 느끼는가? 사실 그렇지가 못하다. 주어진 학습목표를 행동적으로 수행을 하는가 못 하는가에 따라서 유능한 학습자와 느린 학습자가 구분될 뿐이다. 이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학교수업을 따라오는 것만도 아니고 하나를 가르치면 거울에 비추듯 학습자가 가르친 바 그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님을 비고츠키는 아울러 강조한다. 이를 비고츠키는 발달곡선과 학습곡선은 일치하지 않으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하고 이러한 앞서거니 뒤서거니의 불일치의 관계를 아하경험으로 설명한다. 교수-학습과 발달에는 각각의 결정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인데 바로 이것이 '아하 경험'(발달상의 변화)의 순간이다. 구구단을 간신히 외우던 어린이가 어느날 갑자기 두자릿수 곱셈을 하고 나눗셈을 한다. 그것은 배운 것을 실시간으로 자기화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 오랫동안의 외적 활동을 통한 숙달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경지로 도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발달의 과정에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산술적 조작이나 어떤 과학적 개념이 습득된 순간 이러한 조작이나 개념의 발달은 완성과는 거리가 멀며 오직 시작되었을 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 문제를 틀리지 않고 푼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진정한 내적 변화까지 실시간으로 동시에 일어났다고 섣불리 볼 수도 없다.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 예를 들어도 이해를 못하다가 여섯 번째에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아하하면서. 따라서 수업 과정에서 학생들이 매 시간 잘 하거나 못 하거나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학습을 위한 준비는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준비가 완벽한 상태라야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고츠키교육학에서는 교수-학습을 위한 심리적 기반의 발달은 학습을 앞서지 않으며 학습과의 연속적이고 내적인 연결 속에서 발달한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글쓰기에 필요한 심리적 토대가 준비가 되어서 글쓰기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글쓰기 학습을 통해 새로운 고차적 심리기능들이 형성된다. 이렇게 보면 여러 활동들로 이루어진 수업의 과정들은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어린이, 청소년은 학교에서의 학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내적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그 과정에 교사들이 함께 한다.

비고츠키교육학에 따르면 고차적 심리기능들은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 존재로 인간이 발달하는 과정, 타인과의 협력과 교류를 통해 문화역사적 주체로 되는 과정은 자연발생적이고 일상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학교에서의 체계적인 교수-학습이 결합되어 양자가 통일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이 비고츠키 교육학에서의 수업을 통한 발달의 핵심적 의의이다.

 

(2) 발달을 선도하는 수업의 조건

 

첫째, 발달을 이끄는 수업은 전적으로 교사에게 달린 일도 학습자에게 달린 일도 아니다. 발달을 이끄는 수업의 토대는 교사와 학습자 간의 협력이다.

수업은 가르치는 일을 뜻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침의 대상 즉 배우는 자가 존재해야 비로소 성립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일이지만 실제 교수-학습 과정에서 이 둘은 상호작용하며 통일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교수와 학습의 이와 같은 관계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학습자는 수업을 매우 다양하게 역동적으로 펼쳐지게 만드는 변인이다. 이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사라는 변인과 학습자라는 변인이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수업의 상황이 펼쳐진다. 교수와 학습을 모두가 통일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교수와 학습을 이분법적으로 여기는 경향들은 꽤 많고 강하다. 학습자나 교사를 수동적 존재로 상정하는 각종 교수법과 학습법, 학습자 중심주의, 배움 중심 수업 등이 그러한데 교수-학습 과정을 능동적인 주체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관계로 상정한다는 것이 이러한 경향의 본질이자 오류이다.

비고츠키 교육학에서는 교수-학습이 발달을 이끈다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교사는 물론 학습자 역시 능동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두 능동적 주체 간의 특정한 결합과정이 수업인 셈이다. 비고츠키교육학에서 교수와 학습의 이러한 역동적이고도 불가분한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있다. "오브체니"란 말이 그것인데 한 단어에 교수와 학습을 동시에 담아냈다. 교수와 학습은 서로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항상 동시에 벌어지는 한 상황의 두 측면으로 파악한다. 교수자와 학습자는 발달을 지향하며 나아가는 매 순간 항상 협력적 관계속에 놓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여기에는 내포되어 있다. 비고츠키교육학에서는 학교에서의 실제 교수-학습 과정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어린이가 집에서 혼자 숙제를 하는 그 순간에도 어린이는 교사와 협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수-학습 과정에서 교사의 지도하에 학생이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여러 활동들을 통해 발달의 가능성은 현실화되며 어린이, 청소년을 발달의 다음 단계로 이끌어 고차적인 기능들을 내재화할 수 있게 되는데, 그 활동 과정의 핵심적 본질은 '협력과 모방'임을 비고츠키교육학에서는 강조한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무의미하고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려면 '모범''새로운 내용'이 필요하고 '이끄는 존재'가 필요하다.

 

둘째, 따라서 발달을 이끄는 수업을 위해서는 학습자와의 관계형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강조해서 말하면 기법과 소재 이전에 관계가 우선이다. 아무리 좋은 기법과 소재라 해도 협력적 상호작용을 창출하지 못하면 그것은 수업의 소재와 기법으로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비고츠키는 사회적 관계와 환경이 문화적 발달의 원천 즉 인간은 관계 속에서 ''로서 발달해나간다고 강조했다. 교수-학습이 발달의 지향하는 의식적 행위라면 따라서 관계의 성격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당연하게도 적대적, 대립적 관계에서는 발달은커녕 수업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아무리 교과서를 앞에 놓고 교사가 뭔가를 열심히 가르치려 한들 이미 그것은 이미 수업이 아닌 것이다. 경험적, 상식적으로도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이 점에서 교수()와 학습()의 역동적 관계를 교사 스스로 의식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발달을 이끄는 수업을 위한 관건은 협력적 관계 구축이다. 그것은 발달단계와 발달상황에 대한 이해와 실질적 고려이다. 다시 말해 학습자를 이해해야 비로소 발달을 이끄는 수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전문성은 수업스킬 이전에 학습자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겠다. "학습자와의 관계"라는 변수가 괄호 처리된 좋은 기법과 소재는 무의미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좋은 기법과 소재라고 소문난 것일지라도 교사의 스타일에 맞지 않고 학습자 집단의 상황에 맞지 않으면 발달의 가능성을 성취하는 것에 실패한다. 이런 점에서 발달단계와 발달상황에 대한 이해와 고려는 중요하다.

올바른 관계란 온정주의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좋은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상호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협력'의 관계이다. 즉 발달이라는 지향을 공유하면서 교수-학습을 해나가는 관계의 구축이 발달을 이끄는 교수-학습과정의 핵심이다. 학생의 어떤 행위나 상태를 발달적 관점에서 진단하지 않으면(예컨대, 선생님 앞에서 욕을 하거나 반말을 할 때, 이것이 반항하느라 그러는 것인지 기능의 미발달으로 인한 부적절한 행동인지 겉만 보고는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 그 다음 단계가 성립하기 어려우며(성찰 교실로 보내!) 관계도 나빠지게 된다.

 

3. 비고츠키교육학의 관점에서 본 융합수업

 

요즘 수업혁신을 장악하고 있는 용어인 융합에 대해 비고츠키교육학의 관점을 들이대어 보겠다. 자유학기제 교과별 운영계획이나 평가계획에도 융합요소를 반드시 넣으라고 하고 이와 관련된 평가 예시안이나 수업지도안 등도 굉장히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감이 안 잡힌다. 정책적으로 하도 강조를 하니 학교현장은 그 압력에 떠밀려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

사실 학계에서 통섭 이야기가 나온 지는 몇 년 되었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이 쓴 통섭(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책에 대한 소개를 보니 인간의 지식이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서로 협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게 통섭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학문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의 제시로 보여진다. 인간학문의 진화과정에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점점 세밀하게 쪼개져 온 분과학문체제 속에서 인간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조망하는 것은 20세기부터 지금까지 내내 위축되어 왔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더 반가운 것은 과학에서도 이제는 인간들이 협력을 해야만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이 대세화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학계 변화의 조류에 편승해서인지 지금은 초중등 학교교육에서도 융합이 대세다. 물론 교사들의 실제 수업의 대세를 이룬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수업혁신정책을 대표하는 낱말이 요즘엔 융합이라는 정도다. 그런데, 정작 이를 중요하다고 추진하는 당사자들도 통섭의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온간 말들을 만들어내고 지도안을 제작하고 평가예시안을 만들어 내려보내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 글쓰기를 배우고 숫자셈을 시작한 아이들에게까지 통섭유사품인 융합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STEMART를 추가해서 STEAM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한동안 영어약자 그대로 쓰다가 근래에는 융합이라 표현하고 있다. 스팀교육이라 하던 것을 지금은 융합교육, 융합수업이라 부르는 것이다. 풀어서 쓰면 창의적 인재 육성을 위한 융합교육이다. 5가지 요소를 담은 발음하기 좋게 첫 자만 나열한 영어 낱말에 의미와 의도를 투영하였다. ‘도구적 관점이다. 앞으로의 과학의 대세가 융합이니 지금의 교육을 이에 맞추어 융합으로 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는 이거다 하는 쌈박한 정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찾기 힘들었는데 그 중 눈에 띈 것을 가져와보면 다음과 같다. 대전광역시교육청 교육국 과학직업교육과에서 작성한 문서의 일부이다.

 

융합인재교육(STEAM)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예술(Art), 수학(Mathematics)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로써 창의적 인재 육성을 위해서 학생이 문제 해결 상황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 제시, 학생 스스로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창의적 설계, 학생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성공의 경험(감성적 체험)을 준거로 하고 있으며, 융합인재교육(STEAM)의 세부 요소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구분

요소

세부 설명

STEAM 교육 활동 준거

상황

제시

상황 제시

전체 프로그램을 아우르는 상황을 제시하였는가?

자연스러운 융합

과학과 수학, 기술, 공학, 예술 교과가 자연스럽게 융합되도록 설계되었는가?

창의적 설계

학생 중심

교사 중심에서 벗어나 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학생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설계되었는가?

아이디어 발현

프로그램에 학생이 자신의 아이디어와 발상을 반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가?

자기 문제화

학습자가 학습 주제를 자기 문제로 인식 하도록 수업이 구성되었는가?

학습 방법

개념을 교사가 직접 설명하지 않고 활동을 통해 학생이 깨우치도록 설계되었는가?

과정, 활동 중심

결과보다 과정이, 지식보다는 활동이 강조되었는가?

다양한 산출물

프로그램의 결과물이 모둠별 또는 개인별로 다르게 산출되도록 설계되었는가?

협력 학습

동료, 교사, 다양한 도구와의 협력 학습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가?

감성적 체험

Hands-on

학생들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열정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가?

성공의 경험

학습자가 성공을 경험하도록 설계되었는가?

새로운 도전 요소

연계된 활동에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설계되었는가?

자기 평가

학습자가 스스로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는가?

 

무려 13가지의 요소가 충족되어야 융합교육이라는 것인데, 융합을 거꾸로 세분화해서 그 결과가 융합이 될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될 지 가늠할 수 없다. 융합인재교육에 대한 개념적 정립마저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동안 자유주의 교육학에서 좋다는 것에 협력을 끼워서 나열한 모양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예전에 잠시 유행했던 발견학습, 탐구학습과 비슷해 보인다. 과학이 강조되는 시대면 으레 나타나는 그런 흐름 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뭔가 대세라고 유행할 때마다 저러다 말겠지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정부가 주도하는 이런 수업혁신의 일환으로서의 융합교육의 방향과 내용은 실현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학적으로 따졌을 때 상당히 문제가 많다.

 

먼저, 비고츠키교육학의 발달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융합수업은 발달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채 무차별적으로 학교 현장에 들이부어지고 있다. 인간의 발달과정은 미분화에서 분화로 그리고 보다 고차화된 통합으로 고양되는 식으로 나선형을 이룬다. 피아제는 기능이 미분화된 어린이의 인지적 특성을 혼합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비고츠키 역시 지각, 기억, 주의, 사고 등의 기능은 어린아이들은 미분화 상태로 있다가 이것이 각각의 기능으로 분화되고 다시 이것이 을 매개로 서로 연관된 이루며 총체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적 체제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과학과 수학, 기술, 공학, 예술 교과가 자연스럽게 융합되도록 설계되었는가?”라는 대목에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과학, 수학, 기술, 공학, 예술에 대한 지식과 기능발달 수준이 아직 높지 않은 어린이, 청소년에게 융합까지 하라고 요구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발달의 특정한 과정에 있는 어린 학습자가 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하므로 이는 교육적으로 의미가 없다. 모방가능한 범위에 있어야 교사와 학생의 협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7차 교육과정에서 실패를 맛본 학습자 중심주의를 반복하고 있다. 구성주의 학습론의 교사는 학습의 보조자라는 교사에 대한 수동적 인식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개념을 교사가 직접 설명하지 않고 활동을 통해 학생이 깨우치도록 설계되었는가?”라는 대목에서 학습자를 고독한 탐구자로 여기는 피아제의 생물학적 개인주의가 떠오른다. 참고로 비고츠키교육학은 서구에서는 60년대에 피아제의 대안으로 샛별처럼 떠오른 이래 미래교육의 선구자로 21세기인 지금 더욱 각광받고 있다.

 

셋째, 교사를 대상화하고 주변화하는 관점이 숨어 있다. 비고츠키교육학에 따르면 교사는 학생과의 협력적 관계 속에서 발달을 이끌어가는 수업의 주체이다. 교사는 수업에서의 활동의 의미를 판단해야 하고 의미있는 활동들을 창조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발달의 와중에 있는 어린이, 청소년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고 교과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가르칠 소재와 방식을 택하는 것은 직접 가르치는 교사들의 특권적 영역이어야 한다. 핀란드에서는 이러한 비고츠키의 관점을 수용하여 교수방법과 평가에 대해 교사의 권한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융합교육은 교사의 수업 철학이나 발달에 대한 필요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맹목적으로 주입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그간의 수업혁신정책 실패를 답습하고 말 것이다. 문제는 실패로 귀결된다 해도 그 과정에서 현장은 고역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융합이 중요하다면 학자가 강조했듯 협력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교사간의 협력을 방해하면서 교사 개개인에게 융합수업을 떠맡기니 이건 말인지 막걸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4. ‘통섭하는 어른으로 이끌기 위해

 

통섭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상에 대한 총체적 인식쯤 될 것이다. 통섭에는 못 미치더라도 풍부한 안목을 가지고 대상을 통찰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성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가진 고차적 기능, 이를테면 개념적 사고’, ‘창조적 상상등은 어린 시절에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창조적 상상은 유년기의 놀이였으며 개념적 사고는 처음부터 개념적 사고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다. 발달은 생물학적이고 기초적이었던 것들이 새로운 것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이다. 체계적이고 협력적인 학습을 포함한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발달적 변화는 이루어진다.

작은 통섭을 키운 결과로 통섭에 도달한다고 여기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당장의 융합수업으로 미래의 통섭하는 과학자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순진한 발상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발상이 가능한 것은 양적 발달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 나는 것은 맞지만 자라난 콩과 팥의 최초의 형태는 그것의 축소판이 아니었으리라.

분과 체제의 체계적이고 안정적 운영에 주제학습을 부분적으로 결합하고 무엇보다도 협력기능을 내면화시킬 수 있도록 함으로써 통섭 기능은 형성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각 교과의 내용은 현실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는 안목들(=범주들. , 관계, 시간, 공간 등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각 안목들은 하나의 주제나 대상을 보면서 또한 체계적으로 결합되어야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 안목들은 하나의 주제나 대상을 보면서 또한 체계적으로 결합되어야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교과의 내용은 세계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과학적 활동을 통해 형성한 지식이다. 특히 지식교과로 분류되는 과목들은 특히 그러하다. 수학은 논리적, 추상적 사고와, 사회는 관계적 사고와, 지리는 공간적 사고와, 역사는 시간적 사고와 관련이 깊으며 예체능 과목은 고차적 지각과 감수성의 고차화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을 가진다. 따라서 각 교과의 지식 체계가 주로 내포하는 범주를 내재화함으로써 인간의 사고와 활동의 다양한 측면들을 숙달하고 이것을 '주제' 학습을 통해 실현하는 종합의 과정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보화가 대세라고 하면 정보화 교육, 스마트 교육, e-러닝 같은 것을 뚝딱 만들어 학교에 들이밀고, 학제 간 협력연구와 통섭이 미래사회의 대세이고 경쟁력이라고 하면 곧바로 융합수업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발달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데서 비롯되는 행태들이다. 지금은 비록 아니지만 미래의 통섭으로 갈 현재의 싹이 무엇이며 미래의 협력적 노동과 삶으로 나아갈 싹이 현재에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조급증에 걸리기라도 한 듯 미래에 나타날 것을 지금 당장 만들어내라고 닦달하는 것에 대해 우리 교사들은 줏대 있게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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