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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6(발간 : 2015327)

 

[담론과문화]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문학산책 2 그리스 문학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

 

 

눈동자(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옛 그리스인들의 교과서, ‘일리아드

 

일리아드는 일리오[트로이]의 노래라는 뜻이다. 민중 사이에 입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모아서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가 이오니아[그리스의 식민 지역, 지금 터키의 서쪽 바닷가] 방언으로 썼다. 시간 순서대로 줄거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불화不和의 신 에리니스가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나중에 아킬레우스를 낳는다]에 자기만이 불청객임을 알고는 부아가 났다. 피로연 자리에 황금의 사과를 던지고는 최고의 미인에게 주라고 외치고 사라진다. 여러 여신들이 모두 이것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바람에 거북해진 제우스는 트로이왕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에게 그 판정 일을 떠넘긴다. 여신들이 다들 파리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는데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줬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자기와의 약속대로 헬레네와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아가멤논 왕의 동생인 스파르타 왕자 메넬라오스에게 시집간 유부녀였다. 파리스는 헬레네를 납치해서 트로이로 데려갔다.

아내를 잃고 분노한 메넬라오스가 형[아가멤논 왕]과 상의해서 트로이 원정군을 꾸렸다. 여러 영주들[아킬레우스, 오딧세우스, 디오메데스, 아이아스 등]이 저마다 부대를 이끌고 참가한다. 아울리스에 10만 대군이 모였다. 그런데 아가멤논이 사냥 중에 아르테미스 여신의 사슴을 죽인 탓에 노여움을 사서 갑자기 해풍이 잠잠해졌다. 그리스 함대가 항구에 발이 묶였다. 예언자의 말로는 아가멤논 왕의 맏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야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이 풀린댔다. 오디세우스에게 시집을 보낸다는 구실로 아가멤논이 맏딸을 보내서 희생시키자 바람이 다시 불었다.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 잔인한 희생을 알고는 영영 남편을 용서하지 않는다.

트로이 섬에 도착한 그리스 군은 바닷가에 진을 치고 트로이 성에 9년이나 쳐들어갔다. 트로이왕 프리아모스는 이미 늙었으나 아들 헥토르가 분투하고 이웃 나라 동맹군의 도움도 받아 끈질기게 버텼다. 그들은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를 두려워하여 들판에 나가 그와 싸우는 것을 꺼렸다. 신들은 변덕스럽게 이편을 도왔다 저편을 도왔다 한다. 사상자가 늘어나고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으나 트로이 성의 함락은 여전히 어려웠다. 게다가 그리스군 내부에 영웅들 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났다...

사실史實부터 살피자. 19세기말 슐리만이 터키 북동쪽 헬레스폰토스 해협 근처 언덕에서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했다. 그래서 미케네[아테네 남쪽] 사람들이 이곳을 침략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밝혀냈지만 트로이가 그 침략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전쟁은 있었고, 이곳이 바닷길의 길목이라는 것과 연관될 것 같다. 하지만 ‘10만 대군 어쩌구...’는 뻥구라다.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이 기원전 12~14세기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그 시절의 사람들 경제 규모가 10만 명의 군인을 지탱할 수는 없었다.

헬레네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퉜다는 것도 당연히 픽션[허구]이다. 그런데 이 얘기나 아가멤논이 자기 딸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것으로 봐서, 그때 여성들이 가부장제도 밑에서 얼마나 억눌려 살았을지 넉넉히 짐작이 간다. 정복자들의 외래 신화인 올림푸스 신화 이전에 토착민들의 티탄족 신화가 있었는데 토착민 사회에서는 가부장제도가 덜했을 것이다. 아시아든 유럽이든 옛날에 사람 제물 이야기가 참 많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는 얘기가 나오고 우리의 심청이도 있다. 그 사회에서 덧없이 희생당하는 사람 얘기를 신에게 바친다는 그럴싸한 구실로 덧칠하여 꾸며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리아드는 정복전쟁에 나선지 10년째 되던 해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이야기들은 대부분 전기[傳記, biography]처럼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다.”하는 식으로 평범하게 전개되는데, 일리아드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질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플롯plot 구성이 근대 소설을 선취한 셈이다. 근대 소설은 지금 이야기에서 시작해 중간에 과거를 넘나들 때가 무척 많다. 비극 외디푸스 왕도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핵심 대목만 압축해서 보여줬다. ‘플롯은 그리스말 미토스mythos를 영어로 번역한 것. 이야기의 얼개[구성]을 가리킨다. 실제의 일리아드는 다음의 플롯에 따라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느덧 전쟁이 10년째를 맞이했을 때, 아폴로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리스군 막사[텐트]에 역병[전염병]이 돈다. 그리스군이 아폴론을 모시는 사제의 딸을 납치한 데다가, 사령관 아가멤논이 그 딸을 돌려보내기를 고집스레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을 비난하며 사제의 딸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가 얻은 여인 브리세이스를 대신 데려간다. 망신살이 뻗친 아킬레우스가 그리스군을 돕지 않겠다며 자기 천막에 틀어박힌다. 그 뒤로도 두 군대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그리스 장수들이 잇따라 부상을 당한다. 그러자 아킬레우스의 벗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대신 입고 싸우러 나갔는데 아킬레우스의 충고를 묵살하고 트로이군을 성벽까지 추격했다가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싸움터로 뛰쳐나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붙들어 매고 끌고다니며 모독한다. 밤을 틈타 찾아온 프리아모스왕[헥토르의 아버지]이 아들의 주검을 돌려줄 것을 호소하자 아킬레우스가 허락한다....

 

이야기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매우 짧다. 실제로 사건이 벌어진 때는 보름 남짓에 불과하다. 중간 중간에 옛날을 회고하고[되돌아보고] 앞으로 벌어질 얘기도 암시한다. ‘트로이의 목마를 비롯해 전쟁의 결말 부분은 중간에 살짝 암시되는데, 성이 함락되는 대목은 잃어버려서 알 수 없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노여움을 샀다? 실제로는 그 여신을 모시는 신관[사제]들이 왕에게 불만을 나타냈던 것으로 읽을 일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애인이라는 추측도 있다. 옛 그리스에는 싸움터에서 동고동락하다가 동성끼리 애인이 되는 일이 많았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덕virtue이 있는 영웅과 거리가 멀다. 아가멤논은 혼자 잘난체하는 인물이고, 파리스는 저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헬레네를 돌려 보낼 수 없다고 우긴다. 아킬레우스도 제 자존심이 짓밟히자 전쟁을 나 몰라라했다. 신들도 부도덕하게 묘사됐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질투에 휩싸이고 공연히 화를 낸다. 그래서 플라톤이 이 서사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하면 신들이 인간 위에 근엄하게 군림하지 못한다. 그때 그리스인이 자연세계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신비스런 신 이야기 대신에 인간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생각이 옮아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스군의 장수들에게 아가멤논은 왕이 아니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누가 대장 노릇을 하지 못하는, 다들 고만고만한 존재였다는 얘기다. 올림포스 신화는 이런 단계의 사회를 반영하는 이야기다.

 

일리아드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다. 그는 나중에 발꿈치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 제가 죽을 운명일 줄 알면서도 복수를 위해 싸움에 나서는 의기義氣가 있다. 이야기의 절정[클라이막스]은 그가 헥토르를 죽이는 사건이다. 아들을 잃은 프리아모스왕이 어둑해질 무렵 남몰래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찾아와 그의 무릎을 잡고 두 손에 입을 맞추고는 말을 건넸다. “그대 아버지는 그대가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것이오. 그대 아버지를 생각해서 나를 동정해 주시오! 내 손으로 내 아들의 주검을 묻게 허락해 주시오.” 그가 제 친구를 죽인 원수의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가 겪는 슬픔을 공감하는 장면이 이 이야기의 백미[白眉: 가장 멋진 대목]이다. 사람은 남의 슬픔에 공감할 줄 알게 될 때 성숙한 사람이 된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는 저마다 부성[父性: 아버지됨]과 원시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읽을 수 있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인류가 가족[씨족] 단위로 생활을 꾸린 뒤에 탄생했다. 어머니가 혼자 자식을 돌볼 때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 그러니까 부성父性은 사회와 문화에 의해 나중에 생겨났다. 반면에 남성성은 그저 생물학적 존재이고 파괴적, 공격적 충동에 지배된다. 아킬레우스는 처음에 남성적인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戰士였다. 일리아드에서는 부성이 남성성에 여지없이 패배한다. 하지만 헥토르의 주검을 거두는 과정에서 아킬레우스도 남의 슬픔에 연민할 줄 아는 문화적인 인간으로 바뀐다. 뒤이어 소개하겠지만 트로이 함락 이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우스는 부성父性이 결국 빛을 본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는 아버지의 의지가 아닌가. ‘고개 숙인 아버지들이 크게 늘어난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오디세우스는 우리에게 씁쓸한 향수를 자아낸다.

일리아드는 밝은 이야기인가? 헥토르도 아킬레우스도 다 허망하게 죽었다. 사람들은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트로이의 목마라는 협잡도 등장했다. 비극까지는 아니지만 슬프고도 냉혹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무슨 교훈을 퍼뜨릴까? 그리스인들은 사람은 불사不死의 신들과 달리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많이 생각했다. “위대한 영웅도 결국엔 덧없이 죽는구나!”하는 쓸쓸한 정조情調가 서려 있다.

 

일리아드에는 여러 가지 재미난 일화도 담겨 있다. 아킬레우스가 아무리 해도 헥토르를 잡을 수 없어서 쩔쩔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일화의 맞짝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얘기다. 제논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 토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역설[파라독스]을 지어냈다. 아가멤논의 아내 클라임네스트라가 딴 사내와 놀아나 남편을 죽이고 자식들이 제 아버지의 죽음에 앙갚음하는 얘기에서 나중에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나왔다. 엘렉트라는 아가멤논의 딸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미워했다.

성서에는 글쓰기를 말한 곳이 430 곳이나 된다는데 일리아드에는 한군데 밖에 없다. 구약 성서가 2백여 년 뒤[곧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붙들려 있을 때]에 씌여지기도 했지만, 그 시간상의 차이가 큰 게 아니다. 원래 나라가 망하면 그 구성원들이 믿던 국가종교도 가라앉게 돼 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종교를 일으켰으니 국가종교로부터 보편종교로 대단한 정신적 혁신을 했던 셈이다. 유대 민족은 국가의 울타리가 없는데도 오직 같은 신앙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민족을 이뤄냈다. 그랬기에 누구나 글을 쓰고 읽을 것을 장려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호메로스 시절의 그리스는 페니키아문자를 받아들여 저희 알파벳을 만들기는 했어도[호메로스가 창안했다], 민중 대다수는 구술[口述: 입으로 주고받기] 문화에 폭 빠져서 살았다는 얘기다. 입으로 전하는 얘기는 그리고 말이야...”하고 끝없이 이어진다. 냉정하게 사물을 살피는 얘기보다 현실에 뛰어들어 자기 감정을 불어넣는다. 차분히 따지기보다 입씨름을 즐긴다. 추상적인 얘기를 싫어한다. ‘일리아드에는 어린 아킬레우스가 선생[개인교사]한테 배운 얘기가 나오는데 무술武術과 말하기[변론술] 뿐이다. 학교라는 것이 없고 주로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쳤다. 그리스인들에게 유일한 교과서는 일리아드오디세우스뿐이었다.

 

 

 

고대에 살았던 근대인 오디세우스

먼저 줄거리부터 옮긴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 이타카로 떠났으나 가는 곳마다 온갖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고향에서는 이타카 영주 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그의 아내 페네로페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려고 그의 집에 아예 눌러 앉아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다.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壽衣를 짤 때까지 청혼을 기다려 달라고 연막을 치고는 낮에 베를 짠 것을 밤마다 도로 풀렀다. 나이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가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다녔다.

귀향길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외눈백이 괴물 키클롭스에게는 자기 이름이 Nobody라고 거짓말로 둘러대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아들 키클롭스의 얘기를 전해 들은 포세이돈 신의 노여움으로 한동안 풍랑을 겪었다. 마녀 키르케를 만났을 때는 그의 부하들이 모두 돼지가 돼 버렸다가 나중에 풀려난다. 바람을 다룰 수 있는 아이올로스에게 귀향길을 훼방 놓을 바람을 다 가둬둔 푸대 자루를 받는데 그가 잠든 사이에 그게 보물인 줄 알고 부하들이 푸대를 풀어버려서 도로 처음 자리로 되돌아왔다. 잠깐 저승에 들러서 죽은 동료들도 만난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홀리는 마녀 사이렌을 만났을 때는 제 몸을 돛대에 묶어서 그 유혹을 견뎌냈다.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태양신 헬리오스의 가축을 먹어치우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은 그의 부하들이 몽땅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칼립소 섬에 들렀을 때는 그곳의 님프가 그에게 반해서 7년 동안이나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다. 님프와 달콤한 삶을 누리느라 옛 생각을 잊고 지내던 그는 어느날 문득 고향을 떠올리고는 펑펑 울었다. 신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간신히 풀려났다. 파이아케스 섬에 표류해서 영주 알키노스의 딸 나우시카와 마주친다. 그녀를 따라 영주의 집에 가서 도와줄 것을 청했고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향 이타카의 땅을 밟는다. 무려 20년이 걸렸다!

자기 집은 구혼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늙은 개와 유모乳母만 변장한 그를 알아봤다. 몰래 들어가서 아들과 만나 복수를 꾸민다. 페넬로페의 새 남편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무예武藝를 뽐내고 구혼자들을 죽여 버렸다. 진짜 남편인지 알아보는 페넬로페의 시험에도 붙어 마침내 행복한 결말을 이뤄냈다.

 

먼저 그의 아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남편을 20년이나 기다린 것이 눈물겹다. 구혼자들을 아직 베짜기가 덜 됐다고 거짓말로 속여 넘기며 살아야 할 만큼 고단한 삶이었다. 한 집안[가부장제도]을 지탱하려면 여성이 얼마나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본보기로 알려준다. 아틀 텔레마코스도 구혼자들의 암살 음모를 겪어내고 스스로 눈이 빠져라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오디세우스에는 어린 사람의 성장 이야기도 담겨 있다.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서 돼지가 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돈독[상품 물신숭배]에 빠진 현대인에 대한 은유[메타포]로 읽힌다. 몸은 돼지가 됐지만 머리는 아직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그들은 고통스러웠다. 아도르노[20세기 독일 학자]는 사이렌한테 홀리지 않으려고 오디세우스가 배의 돛대에 제 몸을 묶은 것에서 놀라운 계몽적[근대적] 합리성을 읽어 냈다. 왜 그는 자기 귀를 틀어막지 않았을까? 못 말리는 호기심 때문이다! 부하들한테는 귀를 틀어막고 노를 젓게 했다. 그들은 그녀의 매혹적인 노래를 맛볼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오디세우스 자신은 그 노래[예술, 쾌락]를 즐기되, 치명적인 위험만 멀리하게끔 꾀[책략]를 부렸다. 사이렌은 신화의 세계를 대표한다. 신화myth의 해로움을 덜어내고 길들이는 합리적 인간이다. 생명공학의 지식을 무더기로 쌓은 현대의 인류는 유전자 조작따위가 빚을지도 모를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은 채 과학놀이를 계속해 갈 수 있을까? 똑똑한 부하라면 사이렌의 노래를 혼자 들은 오디세우스가 괘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귀를 싸매고서 노만 저으라, 해놓고 자기만 들어?” 배불리 먹고 사는 사람들만 예술을 누리는[향유하는] 세상을 비꼰 얘기로도 읽힌다.

칼립소 섬의 이야기도 망각과 기억의 주제를 건드린다. 키르케의 돼지가 돼버린 오디세우스의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풍요로운 고장에서 님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무척 행복했다. 행복의 양만 따지자면 공리주의자 벤담한테 표창장을 받을 일이다. 그가 고향과 자기가 살아왔던 세월만 깡그리 잊어버린다면 그러한데, 어느 날 문득 옛 기억을 떠올린 그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고향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가 고통스러웠던 까닭은 옛 기억을 아예 저버릴 수 없고, 제가 살았던 옛 삶에 어떻게든 응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웅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돼 있는 옛 문학작품 중에 주인공이 나약하게 울어댄 이야기는 오디세우스밖에 없다. 근대 소설을 선취先取했다.

 

오디세우스는 파이아케스 섬의 영주의 환대를 받고 답례하는 뜻에서 제가 겪은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려준다[그런 형식으로 모험담이 서술됐다]. 여기서 그 환대[따뜻한 대접]에 담긴 뜻을 읽어보자. 요즘 우리가 낯선 도시에 가서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면 아마 집 주인은 우리가 미친 놈이라고 여겨 대뜸 경찰서에 전화를 걸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래도 됐다. 대문 옆의 외양간이라도 기꺼이 자리를 내줬다. 호메로스 시절에 그리스에는 모든 나그네와 거지는 제우스신한테서 온 것이니까 업신여기면 안 된다.”는 격언이 퍼져 있었다. 이것을 사람들이 착했구나!”하고 읽는 것은 겉핥기 독서다. 그것의 본질은 경제 관습이다. 그때는 선물을 주고 받는 경제가 기본이었다. 낯선 나그네한테 내가 친절을 베풀어야 나도 낯선 곳에 갔을 때 그 보답을 받는다. 하나 더. 고대 사회에는 거지를 환대해야 한다는 도덕규범이 작동했다. 거지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빈부 격차가 생겼다는 뜻이다. 공동체가 깨지면 다들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거지를 나 몰라라하지 않았다. 고교 윤리 교과서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대문짝만하게 소개해 놨는데 이 사람의 결론이 별것 아니다. ‘거지들한테 밥 한 술은 꼭 챙겨서 줘야 한다는 수준일 뿐이다. 요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 정도의 복지 예산을 쓰기는 하는데 옛날과 달랐던 것은 호메로스 시절에는 거지들을 돌보는 것이 제우스 신의 뜻이어서 사람들이 거지를 경멸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20~21세기 유럽 국가들의 지배세력은 일할 생각은 아니 하고 복지 기금만 타 먹으려고 하는 밥벌레들!”이라고 그들에게 심하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 사람들이 실업자失業者로 관청에 등록하지 않고 견디며 사는 일도 많았다. ‘의 뜻은 누구의 뜻인가?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랬다. 그때 사람들이 합의해 놓은 정신[규범]이다.

그런데 누구나 웃는 낯에 마주 웃어주고 찡그린 낯에는 마주 찡그린다. 이타카섬의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를 환대할 생각이 없었다. 환대가 깨지면 앙갚음이 시작된다. 그때 사회는 환대도 아주 융숭했고 복수도 아주 격렬했다. 이것은 국가사회의 원리가 아니고 씨족사회의 원리다. 물론 국가가 생기고 난 뒤에도 그 원리가 계속 얼마쯤 존속돼 왔다. 그래야 국가 지배층한테도 보탬이 되니까.

 

신화에서 벗어나 계몽의 시대로

오디세우스는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말해 반영웅이다. 옛 이야기들은 너나없이 고귀한 핏줄에, 용맹무쌍하고 착한 사람[곧 영웅]을 주인공으로 받들었는데, 이 이야기만 남다르다. 그러니까 전형적[典型的, typical]인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아킬레우스처럼 무예가 출중하게 뛰어나지 않다. 아킬레스가 친구의 죽음에 대해 원한을 갚으러 제가 죽을 줄 알면서도 나섰고 적장敵將의 아버지를 동정할 줄 알았던 이상적인 영웅인 반면, 그는 권모술수에 밝다. 꾀가 많고 말재주가 뛰어나고 사람을 잘 다룬다. 그래서 믿음을 살 때도 있지만 미움을 [특히 신들에게] 살 때도 많았다[가령 포세이돈 신의 노여움]. 이름 자체가 미움 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병역을 피하려고 갖은 꾀를 다 쓴 것을 아는가? 임순례가 만든 영화 세 친구에는 한 청년이 병역 의무를 피하려고 파란색 잉크를 들이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엑스레이에 이상異常 있음으로 나올까 기대해서다. 오디세우스도 그런 비슷한 꾀를 부렸지만 들통이 났다. 이것, 보통사람의 몰골이다.

트로이의 목마 아이디어도 그가 꺼낸 잔꾀다. 그때 폴리스와 폴리스끼리는 전쟁도 벌이지만 서로 손을 잡을 때도 많았다. 서로 철천지 원수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시절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목마木馬를 가짜로 넣어서 적군을 속이겠다는 것이 좀 야비한 짓 아닐까싶기도 하다. 싸움에도 법도rule가 쬐끔은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 이야기에는 그의 잔꾀 얘기가 잔뜩 나온다.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선조들이 그런 남다른 주인공 하나를 지어낸 셈인데 아마 이오니아인들이 해상海上 무역에 일찍 눈이 트이고 이재理財에도 밝았던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빈틈도 많았다. 키르케의 유혹에 덜컥 빠져들지 않나, 귀향해서도 남편으로서 위엄을 보이지 못하고 구혼자들과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오디세우스는 고대古代 사람 같지 않다. 근대인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아도르노는 그를 가리켜 자연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신화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의식을 품게 된 시민적 개인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그의 귀향길은 계몽적 주체가 신화적인 힘들과 맞서고,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길을 묘사했다.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사실주의]을 표현하는 이야기다.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낡은 종교와 미신에서 헤어날 것을 깨우치는 계몽주의 사상운동이 유럽에 활발했더랬는데[볼테르, 디드로, 백과전서파 등], 그 정신은 신화의 껍질을 벗고 나온 사람을 처음 그려낸 이오니아의 시인 호메로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200년 뒤에 이오니아 철학자들이 아르케[만물의 근원]를 캐묻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두 서사시를 견주자면 일리아드에는 자기를 따로 떨어진 존재로 바라보는 개인個人이 없다. 개인으로서 자기생각[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몸 담은 공동체가 곧 자기 자신이어서다. 자연과 초자연의 구별이 없고 신들과 사람이 하나의 세계에 어우러져 산다. 등장인물들이 마음 속으로 갈등할 때에는 신의 음성을 듣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때에는 짐승처럼 군다. 거울을 들여다 보며 나는 누굴까의문을 품어보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런데 신들은 영원한 지복至福의 삶을 누리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존재로서 이 둘 사이는 까마득하게 멀다. 이 서사시는 아킬레우스의 허망한 죽음에서 지혜를 찾으라고 민중을 일깨운다. 반면에 오디세우스에는 개인이 있다. 아직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절반쯤 기대지만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 문명을 건설하고 싶은 개인. 그는 하늘의 별을 우러르며 길을 찾고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세상 누구로부터도 고립돼서 외롭고 슬픈 정서에 휩싸이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 그에게서 드러난다. 그래서 개개인을 주체로 내세우는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루카치[20세기 폴란드의 철학자]는 서사시epic와 근대에 생겨난 소설novel을 견주어 살폈다. 서사시는 삶이 하나의 전체[총체성]를 이루던 시대의 문학인데 반해 소설은 개개인들이 저마다 뿔뿔이 자기의 좁은 밀실에 조개처럼 갇혀 살아가는 시대의 움추러든 서사시라는 것이다. 옛 그리스 사회와 같은 총체성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소설이란다. 근대의 소설가들은 이야기 하나에 세상의 모든 모습[곧 총체성]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개개인이 전체 세상을 통째로[!] 경험하기가 어려워진, 푸대 속 고구마처럼 낱낱의 원자[아톰]들로 굴러다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전체 삶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이것을 움켜쥐고서 세상을 그려내려고 애쓴다.

별빛을 바라보며, 아테나 여신의 도움도 받고 길을 찾았던 옛 선조 오디세우스와 달리, 근대의 개인들은 나아갈 길을 일러 주는 신, 별자리도 없이 세상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래서 소설은 문제적인[문제를 잔뜩 떠안은] 고독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해 내 영혼은 늘 마찰을 빚고 부조화不調和를 일으킨다. 이런 개인들이 우리 세계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이야기가 소설에 담겼다. 헤겔과 루카치는 소설을 가리켜 신이라는 길라잡이 관념이 빛이 바랜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라 일컬었다.

오디세우스에는 온갖 희한한 얘기가 다 나온다. 예컨대 그가 동굴 안에서 괴물 키클롭스에게 “There is nobody!”하고 외쳐서 그를 속여넘긴 장면은 멋진 말놀이[중의법]의 한 사례다. 그런데 이 말장난이 예사롭지 않다. 그 이름은 지배세력이 과학기술 데이터베이스까지 움켜쥐어서 개인프라이버시 정보도 다 털어가고, 유전자 정보를 거대 농사기업이 독점해서 농사꾼들도 자기들의 유서 깊은 지혜를 발휘할 길을 빼앗기고, 자동화 기계의 발달로 노동자의 일자리가 차츰 사라져가는 현대를, 다시 말해 인류 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2800여 년 뒤의 시대를 섬뜩하게 예기豫期하는 것 같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못 되는 자들[프롤레타리아]이지. 그래서 돈과 권세를 움켜쥔 자들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라. 가 유로 바뀌는 기적을 한번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nobody라는 낱말은 [이름]이 뭐냐도 생각하게 해준다. 누가 여기, 아무도 없어!”하고 아무리 벽력처럼 소리 지른다 해도 그런 말을 떠드는 그 누구는 엄연히 있다. 누군가의 말은 상황[조건]에 비춰서 판단돼야 하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다 안다. 헤아리기 쉬운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관념적인 얘기로 들어가면 어리둥절해 할 때도 있다. 자기 동네에 개가 있는지, 고양이가 있는지는 코흘리개도 안다. 그런데 개가 있듯이 애완짐승도 있는가? 모기가 있듯이 해충도 있는가? 내 무릎 위에 기어오르는 것이 내 사랑을 듬뿍 받는 어떤 개인가, 아니면 애완짐승인가? 까마귀를 어느 인간 종족은 길조吉鳥, 어느 종족은 흉조凶鳥로 여긴다. 해충과 애완짐승과 길조, 흉조는 여럿을 묶어서 부르는 이름[관념]으로만 있지, 실제로 있지 않다는 생각을 유명론唯名論이라 한다.

아무튼 오디세우스는 재미나는 모험담의 원형이다. 가지가지로 상상하거나 유추[유비추리]할 대목이 넘친다. 모험길과 귀향길의 이 강렬한 모티브 곧 제재題材가 없었더라면 중세 유럽의 기사도 문학, 돈키호테와 세익스피어의 문학도 활짝 꽃피기 어려웠다. 일리아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 모티브가 거의 전부인데 반해, 이 이야기는 바다와 뱃사람들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비롯해 갖가지 일화가 다채롭다. 또 근대 유럽에서 청소년의 성장문학으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등이 꼽히는데 그 기원을 찾자면 텔레마코스[오디세우스의 아들]가 겪는 성장통[사춘기 시련] 이야기다. ‘오디세우스1~2천년 동안 구전口傳되고 글로도 옮겨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 길가메시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고 한다. 수메르 남쪽의 도시국가 우루크의 초인超人에 가까운 왕 길가메시가 주인공이다. 신에게 도전하고 영원한 삶을 꿈꿔본 영웅 이야기다.

오디세우스는 후세의 문학가들에게 숱한 영감靈感의 샘물이 돼줬다. 등장인물의 하나인 장님 테이레시아스는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에도 신들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알려주는 예언자로 다시 등장한다. 세이렌은 안데르센 동화에서 인어공주로 부활했다. 20세기에 제임스 조이스는 이 서사시에 빗대어서 율리시즈라는 소설을 썼는데, 현대의 일상日常을 살아가는 고독한 개인들의 머릿속 모험 이야기다. 나우시카 공주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로 되살아났다. 키르케의 품 안에서 놀았던 돼지들은 마음껏 소비할 것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에 푹 빠져 있는 노동자 계급을 떠올리게 한다.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에 유혹 당해 파멸할 위기 속에서 우직한 부하들 덕분에 가까스로 통과했던, 두 절벽 사이의 좁은 틈새는 지금의 인류가 헤치고 나아가야 할 험난한 바늘길[좁은 길]을 예시하는 것만 같다.

 

우리 모두 오이디푸스다

 

소포클레스가 지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기원전 429년에 처음 아테네 원형극장에 올랐다. 꽃피는 4월 축제 때 열리는 디오니소스 비극 경연대회에는 만 2천 명의 관객이 모여드는데 소포클레스는 이 대회에서 수없이 1등 상을 받았다. 이것에 뒤이어 쓴 작품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안티고네. 먼저 배경 설화를 옮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왕이 예언자한테서 자기 아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는, 갓난아기 오이디푸스의 발을 핀으로 단단히 묶어서 죽이라고 시종에게 시켰는데[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은 자라는 뜻] 시종은 아기를 차마 죽일 수 없어 들판에 내버린다. 오이디푸스는 양치기에게 발견돼 자식이 없던 코린트왕 폴리버스의 품으로 건네진다. 나이가 든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코린트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긴가민가했다. 그는 누가 자신의 친부親父인지, 아폴로 신전의 예언자에게 질문했다가 너는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맺어질 운명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는 그 운명을 피하려고 코린트를 떠난다. 테베로 가는 길에 친부와 맞닥뜨렸다. 누구 전차戰車가 먼저 가느냐를 놓고 다투다가 친부를 죽였다. 테베 왕국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침에 발 넷, 오후에 발 둘, 저녁에 발 셋인 생물은?”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그 보상으로 마침 남편이 죽은 왕비 이오카스테를 차지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그로부터 여러 해 뒤, 테베에 역병[전염병]이 나도는 어느 날 벌어진 사건을 그려낸다.

 

이 비극도 지루하게 늘어지는 이야기story가 아니라 핵심만 압축해낸 플롯[plot, 구성]이다. 옛 그리스 비극은 플롯을 짜는 데에 다음의 원칙이 있었다.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만 다뤄야 한다. 종이책으로 읽는 소설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 연극이라서 그렇다. 영화와 달리 연극은 무대 장면을 함부로 바꾸기 어렵다.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로 압축해야 한다. 그날의 사건을 통해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게 해야 한다. 한 가지 중심 사건[행동]만 다뤄야 한다. 2천명의 귀와 눈길이 한꺼번에 쏠리는 무대인데 군더더기 얘기가 끼어들면 관객들이 헷갈려 한다. 또 관객들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입으로 전해오던 설화說話. 플롯을 정교하게 짜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핵심이지, “어머나! 옛날에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대!”하고 사건을 알려주는 것이 초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실제 플롯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머리말[프롤로그] : 왕궁 앞에서 테베 시민들이 오이디푸스 왕에게 역병[전염병]에서 구해달라고 호소한다. 파국이 찾아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1 코러스[합창] : 신들에게 테베를 지켜 달라고 비는 노래

1 삽화[에피소드] : 크레온[이오카스테의 오빠]전왕前王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벌하라는 신탁의 응답을 갖고 돌아왔다. 왕이 불러서 장님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왕궁에 왔다. 왕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예언자에게 진실을 찾아 달라고 청한다. 예언자는 진실을 알고 있어서 대답을 머뭇거리지만 왕이 자꾸 다그치자 마침내 진실을 털어놓는다.

2 코러스 : 예언자가 테베 도시를 스핑크스에게서 구해낸 오이디푸스를 의심하고 괴롭힌다는 노래

2 삽화 : 하지만 왕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크레온을 의심한다.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으로 티레시아스를 추천한 것 아니냐고! 왕을 안심시키려고 이오카스테가 옛 신탁을 들려준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왕은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사건의 증인으로 친부를 모셨던 시종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3 코러스 : 애국자[]를 보호해줄 것을 빌면서도 누구도 신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고 내비치는 노래

3 삽화 : 때마침 의붓아버지 폴리버스가 늙어서 눈을 감았다고 알리는 코린트 왕국의 전령[메신저]이 왔다. 전령은 오이디푸스를 새 왕으로 모셔 갈 생각이었다. 왕은 폴리버스가 자기 친부라고 믿고 있었다. 왕이 신탁의 예언[어머니와의 결혼]을 두려워해서 귀국을 머뭇거리자 전령이 그가 입양됐었음을 알려 준다. 불길한 생각이 든 이오카스테가 더 들춰내려고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그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못 배기겠다!’고 부르짖는다.

4 코러스 : 왕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노래

4 삽화 : 그러는데 양치기가 와서 진실을 털어놓았다. 진실을 금세 알아챈 이오카스테가 양치기의 증언을 듣다 말고 방으로 뛰쳐 들어가서 스스로 목을 맸다. 오이디푸스는 아내이자 어머니의 옷에서 브로치를 뽑아 자기의 두 눈을 찔렀다. 그는 크레온[새로 왕이 된다]에게 자기를 테베에서 추방해줄 것과 자기 아이들을 돌봐 줄 것을 부탁한다.

결말[엑소드] : 코러스가 무대를 떠나며 이렇게 노래한다. “지혜로와서 권세를 누린 오이디푸스가 겪는 비극을 봐라. 누구든 죽기 전까지는 행복하다, 불행하다 말할 수 없구나!”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지 마라

 

나이 어린 학생 중에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져서는 안 될 끔찍한 사건 내용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이 이야기를 곰곰이 따져 살피는 것조차 꺼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근친상간, 왜 일어났지?’ 따위의 궁금증을 푸는 일이 아니다. 그런 끔찍한 운명[신탁의 예언]과 맞닥뜨린 사람이 그 운명과 어떻게 대결해 가느냐를 면밀히 살피는 일이다.

오이디푸스는 어떤 사람인가? 위에 간추려 놓은 줄거리에서 이를 말해주는 한 문장을 찾아 보라. 자기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 누가 반역의 마음을 품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왕? 아니다!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다! 밝혀낸 사실이 자기를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해도 말이다. 앎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 이는 그 무렵의 활달한 그리스인들에 대한 예찬이 아닌가.

그는 지혜롭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테베 왕국을 재난에서 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인간은 늘 바뀌어가는 존재요, 태어났다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 이 수수께끼에 들어 있다. 그 맞은 편에 누가 있는가? 바뀌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신들이 있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지혜와 신들[테이레시아스]의 지혜를 암암리에 견주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다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가 누군지, 어떤 운명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이 이야기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부조화, 괴리]로 가득차 있다. 그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피하려고 애쓸수록 그 운명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친부모와 같이 살았더라면 원래 그런 일이 생길 리 없다. 제 운명[신탁]을 피하려고 또 의붓아버지의 집을 떠났는데 오히려 그 행동이 인륜을 짓밟는 행동을 가능케 했다. 전령이나 이오카스테나 오이디푸스가 죄인일 리 없다고 열심히 변호했는데 그 말들이 오이디푸스의 전력[前歷 : 살아온 자취]을 더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뽐냈다. 장님 예언자에게 니가 예언자라면서 변변하게 예언해낸 것이 있었느냐? 빛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뭘 알겠느냐?”하고 퍼부었다. 예언자에 대한 불신은 신탁[신의 말씀]에 대한 불신과 닿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던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를 우습게 여겼는데, 결국 그는 무지無知했던 자신을 처벌하려고 스스로 제 눈을 찔렀다. 상징적인 자살自殺이다. 제 눈을 잃어버리고서야 세상의 깊은 진실을 소름 끼치게 깨달았다.

소포클레스는 누구를 겨냥해서 인간의 지혜가 짧다!’고 말했을까? 그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시대에는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이 대세大勢였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도 인간이 만물의 척도[잣대]’라는 진취적인 지식론을 굳건히 믿고 있었다. “인간 지성의 발달이 제국帝國의 발판이라고 찬양했다. 소포클레스 자신의 진리관[지식관]이 어땠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나 인간의 지혜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외디푸스왕을 통해 소피스트적인 지혜를 찬양하는 시대 흐름에 경고를 던졌다. 아테네는 오이디푸스처럼 자기가 지닌 지혜와 힘만 뽐내다가, 이 연극이 초연된지 십여 년 뒤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변두리 동네의 스파르타에게 여지없이 패배하고 나라가 급격히 기울어 버렸다.

문학의 흐름을 살피자. 서사시는 사회 구성원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다 모아지는 시대, 공동체 안에 뚜렷한 분열이 없을 때의 문학이다. 기원전 8세기, 이오니아의 좋았던 시절[다들 자유롭고 평등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지 않았던 때]에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태어났다. 그 뒤로 이오니아 식민사회에 이소노미아[지배 없음]의 진취적인 기풍이 차츰 가라앉고 삶의 총체성에 금이 가면서 서정시가 생겨났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읊게 됐던 것이다. 그리스는 기원전 6세기가 서정시lyric의 시대였다. 사랑과 우애를 노래한 여류시인 사포를 꼽는다.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냐고 묻는다면 ... 나는 생각하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비극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활짝 꽃피었다. 술과 풍요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가리켜 크기를 가진 고귀하고 완전한 행동의 모방이라 했다. ‘고귀한 행동이란 인간이 맞닥뜨리는 시련과 걸림돌 앞에서 정신이 무릎꿇지 않는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제 신념에 따라 자유로이 결단하는 행위가 비극을 낳는다. 국법보다 더 고귀한 자연법을 따른 안티고네가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이다.

 

비극의 구성은 크게 봐서 코러스와 삽화[대화], 둘로 나뉜다. 대화는 두세 명의 배우가 나와서 주고 받는다. 배우 숫자가 차츰 늘어났다. 합창대[코러스]의 숫자는 12~15명 쯤이다. 춤도 추고 가끔 사건 해설자 노릇도 한다. 코러스는 연극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둔다. 극 내용을 낯설게 바라봐서 관객들의 주의attention를 끌어들인다. 또 민중[관객]이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한 마음으로 드높아지는 것을 북돋는다. 코러스는 한 사회가 공동체 의식을 누리던 시절의 연극장치다. 코러스는 아테네에서도 그 비중이 차츰 줄어들다가 근대 사실주의 연극에 와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서사극을 추구한 브레히트[20세기 독일의 극작가]는 코러스를 다시 들여오는 실험을 꾀하기도 했다.

근대 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개념을 대부분 이어받았다. 관객이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해서[공감해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맛보고 그리하여 카타르시스[영혼의 정화]를 이뤄내는 것을 연극이 목표로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브레히트[20세기 독일의 극작가]는 관객이 연극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기보다 비판적인 거리를 둬서 세상을 깨닫게끔 돕고 싶었다. 유럽이든 아시아와 남미든 그의 교육극 개념과 그가 제안한 여러 기법[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기 등]을 참고하는 연극인이 늘어났다. 이는 카타르시스론과 다른 얘기다. 국문학자 조동일도 인류의 연극이 카타르시스 미학하나로 수렴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중세 인도의 산스크리트 연극에는 라사[미감美感이라는 뜻]’의 미학이, 우리 마당극에는 신명풀이의 미학이 있다고 했다.

간추리자. 그때의 그리스 비극은 무슨 오락물이 아니었다. 시민을 정치적으로 계몽하는 무게 있는 교육극을 보러 아테네 시민 대다수가 모였더랬는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理解를 담은 고급스런 정치적 예술이 민중에게 그처럼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경우는 옛 그리스 말고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뒤이어 로마시대에는 비극이랄 만한 것이 변변히 나오지 못했다. 인류에게 그리스의 비극과 서사시는 어쩌면 아직도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예술적인 모범[규범]으로 남아 있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안티고네가 있어서 희망을 품는다

 

안티고네는 기원전 441,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에 뒤이어 펴낸 희곡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테베왕국에 반란을 꾀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크레온왕이 역적의 주검을 땅에 묻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이를 묵살하고 오빠의 주검을 땅에 묻었고 그 죄로 생매장형[가둬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조금 뒤 크레온이 마음을 돌이켜서 안티고네를 풀어주려 했으나 이미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는 이야기다. 앞서 펴낸 책에서 소개한 작품이라 줄거리를 자세히 옮기지 않는다. 거기서 읊은 얘기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싶어 보충하여 해설한다. 몇 가지 질문을 떠올려 생각을 끌어내자.

첫 질문. 이스메네가 안티고네보다 더 정답지 않은가?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의 누이동생이다. 언니가 아버지의 길동무가 돼 드리려고 길을 떠날 때 그녀는 따라가지 않은 대신, 이따금 심부름을 해서 거들었다. 하지만 언니가 크레온왕의 명령을 어기려 할 때에는 돕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레온왕이 언니를 죽이려고 하자, 자기도 따라 죽겠다.’고 나섰다. 이스메네는 참 상냥하다. 늘 언니를 도왔고 언니가 죽음의 위기에 빠지자 자기도 따라 죽으려고 했다. 우리는 언니가 오빠의 주검을 땅에 묻을 때 그녀가 언니를 돕지 않은 까닭도 넉넉히 이해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살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언니 안티고네는 다르다. 언니는 이스메네처럼 얌전하고 다소곳하지 않다.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인상을 줬다가도 무슨 문제로 토론이 붙었다 치면 상대방을 사납게 쏘아붙인다. “아무렴, 니 말도 일리가 있지. 하지만...”하고 상대를 다독거려줄 줄 모른다. ‘중용을 좋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으면 그녀와 철천지 원수가 됐을 것이다. 타협을 모른다. 자기가 무엇이 옳다싶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그 생각을 밀어붙인다. 여러분은 누가 더 정답게 느껴지는가?

안티고네는 남들에게 훌륭하구나!’ 하는 소리는 혹시 듣는다 해도 쟤가 참 착해. 동정해 주고 싶어.” 하는 소리는 듣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와 입씨름을 벌인 사람은 어째서 자기 생각밖에 모르냐? 욕심꾸러기!”하고 넌더리를 낼 것이다. “내가 쟤였다면... 쟤가 얼마나 힘들었을까하고 동일시同一視가 선뜻 되지 않는다. 이스메네만큼 착하게 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아도 안티고네처럼 신념 하나로 똘똘 뭉쳐서 불덩이가 되어 나아가는 것은 보통사람이 엄두 낼 일이 아니라서다.

 

두 번째 질문. 테베 민중은 안티고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작가[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 편이다. 안티고네만 생각하면 마음이 찡했을 것이다. 그리스 민중에게 “[세상의 진실을 알려면] 이 사람을 보라!”하고 내세웠다. 관객들이 그 사람의 영혼을 가슴 깊이 느끼고서 전율[떨림]과 카타르시스[영혼의 씻김]를 얻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당시의 테베 민중 대다수가 꼭 안티고네를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녀가 국법을 어기고 역적의 장례를 치러줬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던 그 시점에서는 말이다. “아무리 제 오빠의 죽음이 슬프기로서니 그 놈은 우리 나라를 무너뜨리려 한 반역자가 아니냐! 애도해줄[기억해줄] 가치가 없는 놈이닷! 국법을 어긴 안티고네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는 얘기가 그녀의 무죄를 변호하는 얘기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 안티고네 유죄론이라면 우리가 그녀를 동정해줄 수는 있어도 그녀를 거룩한[숭고한] 존재로 기리는 것은 혹시 부당한 생각이 아닐까?

 

세 번째 질문. 안티고네와 크레온왕은 저마다 무엇을 대변[대표]했을까?

헤겔은 크레온왕이 국법을, 안티고네가 신의 법을 대변한다고 봤다. 인간의 법은 국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떠맡는 정부는 보편적인 권위를 갖는댔다. 반면에 신의 법은 이리저런 것 몇 개를 지키자.”하고 사람들이 써놓고 기억하는 무슨 법조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심결에 자연스레 따르는 생각이다. 그것은 국가보다 더 뿌리가 깊은 가족이 떠받치는 믿음이다. “저 사람이 역적이라지만 내 핏줄[가족]인걸! 내 핏줄의 눈을 감겨주지 않고 들판의 까마귀밥이 되게 버려둔다면 우리 가족들이 어찌 발 뻗고 편히 잠잘 수 있겠냐! 우리는 저 사람을 가족으로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돼!” 이런 생각[곧 신의 법]이 가족을 지배한다.

헤겔은 남성이 국법의 영역을, 여성이 신의 법을 떠맡는다고 했다. 그런데 남성[크레온]은 국법만, 여성[안티고네]은 신의 법만 주목할 뿐, 상대방도 나름의 영역을 떠맡았음을 수긍하지 않고 제 생각을 거스르는 걸림돌 쯤으로만 여긴댔다. 크레온이 안티고네를 용서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래서다. 우리는 내가 맡은 영역의 윤리만 알 뿐, 내 생각과 맞서 있는 남들에 대해서는 모른다. 내가 추구하는 법만 옳다고 완고하게 믿는 외눈백이는 그 법만 실천하려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는 또 다른 법도 작동한다.

그러니 외눈백이는 깨지게 돼 있다. 국법 너머에 또다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기 때문이다. 크레온왕이 안티고네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국법의 위엄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결과를 빚어냈는가? 안티고네를 죽이는 국가사회를 견디지 못해 안티고네의 약혼자였던 자기 아들과 자기 아내가 스스로 제 목숨들을 버렸다. 국가의 기반[곧 왕가의 가족]이 무너져내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안티고네는 자세히 보면 외눈백이가 아니다. 공동체를 지탱할 국법도 필요하다는 생각과 그 국법에 따르자면 제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순순히 수긍한다. 제 행위에 책임질 생각을 했으므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동생 이스메네에게 그녀가 말했다. “너는 네가 [국법에 따를 것을] 선택한 대로 그냥 있거라. 하지만 나는 오빠를 묻겠다. 그러다가 죽는다 해도 할 수 없지. 오빠가 나를 사랑했듯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곁에 누울 거야. 나는 범죄자가 되겠지. 하지만 종교적인 범죄자가 될 거야.” 자기가 떠맡지 않은 다른 영역[국법]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고, 그래서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다. 그녀의 위법 행위는 세상을 아예 바꿔 내려고 횃불을 치켜 드는 행동이다.

네 번째 질문. 크레온왕은 국법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를 죽여야 했을까?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서 법은 필요하고 위법자는 처벌돼야 한다. 그러나 처벌은 그 사람이 법을 지키도록 강제하자는 것이다. 형벌의 참된 취지는 (위법자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범죄자를 죽여 놓고서 무슨 개과천선[뉘우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한편, 안티고네는 용서됐어야 한다. 그래야 국법과 자연법이 정면 충돌을 피한다. 반역자[폴리네이케스]가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공동체가 안위[안전과 위험]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편으로 사람은 누구나 최소한의 존엄을 누리고 살 권리, 예컨대 사람답게 죽을[묻힐] 권리가 있다. 그런 규범을 자연법이나 신의 법이라 부른다. 국법이 자연법의 규범을 최대한 받아들일 때라야 국가 아닌 다른 영역[가령 가족]과 갈등이 줄어든다. 처벌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다. 통념[상식]에 비추어 적절한 처벌이 있고난 뒤, 사면[용서]됐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국법을 따르는 사람과 신의 법을 따르는 사람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다.

그런데 안티고네를 읽는 데 있어, 이 질문은 사실 좀 한가롭다. 크레온왕이 외눈백이 상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두 쪽의 갈등이 두 기차가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이런 끔찍한 갈등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작가가 안티고네를 굳이 창조해낼 이유도 없었다.

 

 

참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다섯 번째 질문. 안티고네는 어떤 사람인가?

앞서 헤겔의 분석을 잠깐 소개했다. 그런데 국법은 남성이 떠맡고, 의 법은 여성이 떠맡는다는 그의 도식圖式은 너무 간단하고 굵직한[세밀하지 못한] 앎이라서 안티고네를 온전히 다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를테면 이런 반문反問도 나온다. 안티고네가 과연 가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 대사를 읽어 보라. “이스메네를 안으로 데려가라. 지금부터 여자는 자유롭게 바깥에 나와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라.”하고 크레온이 부하에게 명령한 대목이다. 이스메네는 훨씬 여성스럽지만[안티고네는 명예 남성같다], 가족을 대변해서 신의 법을 떠맡는 무슨 뾰죽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아무튼 헤겔의 도식만으로 읽기에는 이 이야기가 너무나 미묘하고 유례[비슷한 예]가 없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두렵다. 국법을 버젓이 묵살하고 함께 죽음의 길로 가자고 내게 요청할까 봐서다. 세상 모든 사람한테서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오직 양심의 소리만 따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내라고 그녀는 준엄하게 다그친다. 그녀는 예수 같고 레닌 같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눈물나게 가엾다. 크레온이 저 년을 잡아 처넣어라! 죽을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마라!”하고 명령을 내려서 안티고네가 석굴로 끌려갈 때 그녀가 탄식했다. “결혼의 행복도 아이를 기르는 재미도 모른 채 친구들한테마저 버림받은 이 불운한 여인은 살아서 죽은 이들의 무덤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그녀가 한참 전에 이스메네에게 너는 살아 있어라. 내 목숨은 이미 죽은 지 오래란다.”하고 말한 적 있는데 석굴로 끌려갈 때는 관객들도 그 사실을 살갗으로 느끼게 된다. 그녀는 지상地上의 사람들을 삶 저 너머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미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숭고하다. 우리는 무엇 하나라도 세상에서 누릴 것, 누리며 살아가고 싶은데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으로서 살았다. 그녀는 소름 끼치게 아름답다. 가녀린 몸뚱이로, 티끌 하나 없이 해맑은 영혼 하나로 총칼과 지엄하신 나랏님에게 전투적으로 맞서는 사람의 등 뒤로 눈부신 광채가 피어난다. 그녀가 크레온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매장 금지 명령을 선포한 자는 제우스가 아닙니다. 또 저 세상에 계신 분들과 함께 하는 정의Justice도 그 같은 법을 인류를 위한 법으로 반포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죽이시겠다구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인간의 법이 얼마나 옹색하고 모난 것인지, 우리는 그녀가 제 목숨을 내던질 때 비로소 살갗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안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세계 너머에 어떤 진실이, 실재實在가 있다. 우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에 매혹돼서 그 두려운 진실the real을 향해 저도 몰래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영혼이 곳곳에 메아리칠 때라야 이 세계가 비로소 허물을 벗고 자기 변화의 기지개를 켠다. 세상은 결코 거저 바뀌는 법이 없다. 그녀는 죽어서 살았던 불멸의 혁명가다.

 

덧대기 :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잠깐 살핀다. 남근기男根期에 있는 갓난아기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멀리 하고 어머니한테 애착을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그는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끌어다가 이름을 붙였다. 모든 학자가 이 설명을 다 수긍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근친상간의 충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냐는 반론도 있다. 이것이 경험적인 사실이라 해도 인류의 타고난 본성일까, 미심쩍다. 이런 무의식은 국가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자리잡기 시작한 가부장제도 밑에서 더 퍼지기 쉽다. 가장家長이 권위가 있고 아이들이 아버지를 은근히 무서워하는 사회에서! 그러니까 이 개념은 가부장 사회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앎의 가치가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힘이 막강하다는 앎을 밝히는 데만 골몰한 편이고, 그 앎을 놓고서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입씨름이 벌어졌는데 중요한 것은 빗나간 성욕의 실재 여부보다 그 개념으로써 유럽 문명사회의 어두운 면을 더 소상하게 파헤치는 일이다. 옛 신분사회에서 왕의 집안은 가까운 피붙이끼리 짝을 짓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고귀한 혈통은 우리뿐이라는 자기애自己愛가 그런 근친상간을 초래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리안족[독일 선조들]만 우월하다는 나치즘의 인종이데올로기도 일종의 근친상간같은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널리 자리잡은 뒤로 가족제도가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말한 콤플렉스도 상당히 시들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밖에도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많겠지만 아무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 단순히 성욕에 관한 심리학적 관심에 머물러서는 큰 앎을 주지 못한다.

안티고네와 관련해서 프로이트에게서 배울(그가 처음 선보인) 안성맞춤의 개념은 죽음 충동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억눌린 데서 헤어나오려는 강력한 충동이 이따금 솟구치는데 그럴 때는 쾌락원칙[고통을 멀리 하고 쾌락을 찾기], 삶의 충동도 덧없이 스러진다고 했다. 좁은 뜻의 자살自殺 충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충동이 치밀어 오를 때에는 나날의 삶을 이어가려는 욕구 따위는 아침 햇빛을 받은 이슬처럼 날아가 버린다는 뜻에서 죽음 충동이랬다. ‘민족의 삶이 바로 내 삶이라는 숭고한 감정에 사로잡힌 순간, 유관순에게 자기 자신의 삶 따위는 한갓 지푸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죽음충동은 그럴 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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