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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문화] 송원재의 역사 이야기

사교육이 망친 나라, 고려

 

송원재(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올 봄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바야흐로 천하에는 봄기운이 가득하건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진 국자감(國子監-고려의 국립대학)에는 싸늘한 냉기마저 감돌았다. 국자감 판사(判事-현 국립대 총장)인 최성(崔成-가명)은 처소에 딸린 툇마루에 앉아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국자감이 이토록 뼈와 가죽만 남기까지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최성의 아련한 눈길은 먼 과거를 더듬기라도 하듯 복사꽃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뜨락으로 향했다.

일찍이 성종(成宗) 대에 당·(·)의 선례를 좇아 유학을 정치의 대본으로 삼은이래, 국자감에서 글을 읽지 않고는 출사(出仕)하기 어려웠던 게 불과 십 수 년 전의 일이었다. 장차 관직에 나아가 입신양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국자감에 들어오기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글을 읽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이들은 국자감에서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는 판사(判事)나 학유(學諭), 박사(博士)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가문의 광영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국자감에는 잡학(雜學-법률·의학·천문·지리 등 기술학)을 익혀 하찮은 관직을 탐하는 무리들만 득실댈 뿐, 경학(經學-유교경전)과 제술(製述-···책 등 문예)을 논하는 선비들의 그림자가 끊어진 지 모래고 글 읽는 소리마저 점차 잦아들었다.

 

최성은 문득 몸을 일으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이 이토록 어그러진 것이 모두 문헌공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니 간신히 눌러 앉힌 부아가 다시 끓어오른다. 문헌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는 불길 같은 애증이 교차한다. 문헌공이 누구던가? 유교를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은 이가 최승로였다면, 유교의 학식과 덕목이 문신관료들의 뼛속까지 이르도록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이가 바로 문헌공 아니었던가?

명문거족인 해주 최씨 가문에서 태어나 약관(弱冠-20)의 나이에 갑과(甲科) 1등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올라 탄탄대로를 달렸고, 현종·덕종·정종·문종 4대에 걸쳐 네 분의 왕을 섬기는 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재상의 지위까지 올라 율령을 바로잡고 형법을 다스려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이가 바로 문헌공이었다.

 

그러나 공이 40여 년에 걸친 벼슬을 마다하고 고희(古稀-70)의 나이에 학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꿈을 꾼 것이 화근이었다. 무도한 거란의 무리가 쳐들어와 해동의 강역을 유린한 뒤, 공은 전쟁의 참화가 할퀴고 간 폐허 위에 가산을 털어 학당을 세웠다. 조정은 미처 후학 양성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개경의 국자감은 유명무실해지고 지방의 향학(鄕學)은 미처 기틀을 갖추기 전이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공은 자택을 열어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공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미처 거두지 못한 학도들이 거리에까지 넘쳤다. 공은 학도들의 학식과 식견을 가려 아홉 등급으로 나눠 아홉 단계의 강좌를 열었으니, 세간에서는 이를 일컬어 9재학당(九齋學堂)이라 불렀다.

9재학당을 찾는 학도들은 하나같이 명문거족의 자제들로, 그 중에는 문헌공의 명성을 흠모하여 학당을 찾은 자들도 있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장차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문종께옵서도 날로 창궐하는 외척과 종친의 권세를 누르고 왕실의 안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을 젊은 관리들을 얻기 위해 음과 양으로 학당을 도왔다. 학도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자, 공은 여름이면 번잡한 개경을 떠나 풍광이 수려한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따로 강습을 열기도 하였으니, 그 뜨거운 열성이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공은 간혹 이름난 선비들이 찾아오면 여러 제자와 더불어 초에 금을 그어놓고 불꽃이 금까지 타들어가기 전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열었다. 시를 짓는 시간과 시의 품격을 가려 각자 성적을 매기고 성적에 따라 차례로 자리에 앉혀 술잔을 돌리기도 했다. 이를 보는 이들은 우열의 분명함과 질서의 정연함을 감탄하며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은 경학과 시·문장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려 했지만, 과거 급제를 열망하는 학도들의 여망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더욱이 공은 관직에 있는 동안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과거 시험관)를 지내며 과거시험을 주관한 경험이 있었기에,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들은 문헌공도에 끼어 공부하는 것을 과거 급제의 첩경으로 여겼다.

관직에 나아가고자 하는 선비들은 다투어 공의 문하에 들기를 청하였고, 이를 모방하여 개경에 11개의 사학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으니, 세간에서는 문헌공의 9재학당과 더불어 이를 12공도(十二公徒)라 불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지공거를 거치며 과거시험의 출제경향을 잘 알고 있는 문헌공의 9재학당이 가장 성황을 이루었고, 과거 합격자 수에서도 다른 사학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기치 않은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지공거를 역임하자마자 곧바로 관직을 던지고 나와 학당을 세워 잇속을 챙기려는 모리배, 현임 지공거와 은밀히 결탁하여 문제를 염탐하는 음흉한 소인배, 후한 점수를 청탁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잡배까지 설쳐댔다. 마침내 조정애서는 이 같은 폐단을 더 방치할 수 없다는 공론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과거가 치러지기 전에 미리 지공거를 임명하기 때문에 일어난 폐단이라며, 과거시험 하루 전에 지공거를 임명하는 방편을 쓰기도 했지만 폐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자는 자신을 뽑아준 지공거를 은문(恩門) 또는 좌주(座主)로 모시며 평생 문생(門生)의 예를 지켰고, 특정 사학 출신의 관료들은 지공거 직책을 독점하며 같은 학당 출신의 후학을 가려 뽑아 조정 내에 공공연한 파벌을 이루고 권세를 휘두르기도 하였다.

또 과거에 들기를 소원하는 명문거족의 인재들이 벌떼같이 몰려들면서 날로 치솟는 강학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선비들과 한미한 가문의 자제들은 갈수록 설 땅을 잃었다. 성현의 가르침은 만백성의 귀한 보배임에도 어느 덧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명문거족의 전유가 되었고, 관직을 탐하는 무리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한 낱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현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고자 했던 문헌공은 뜻은 저자거리의 포목이나 육고기처럼 사고 파는 물건이 되어버렸고, 공이 세운 9재학당이 기어이 그 단초를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최성은 입에서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사학의 폐단도 폐단이려니와, 정작 이로 인해 봉변을 당한 것은 엉뚱하게도 관학(官學)인 국자감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9재학당이 이토록 문전성시를 이루자 국자감은 하루아침에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명문거족의 자제들은 국자감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과거 급제를 소망하는 학도들도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는 과거시험 기출문제와 현임 지공거의 학설을 염탐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국자감의 학유와 박사들은 간곡히 타일러도 보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학도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또 사학에 갈 수 없는 한미하고 가난한 학도들을 딱하게 여겨 은밀히 돕는 학유들도 있었지만, 모두 학도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일인지라 탓할 수도 없었다. 이쯤 되니 국자감의 강학을 도맡았던 당대 최고의 석학들도 가르치는 일에 더는 흥이 나지 않았다.

 

국자감은 일찍이 신라의 관학인 국학(國學)을 계승하여 천하의 근본을 바로잡는 경학과 제술 외에도 제세경륜(濟世經綸)에 긴요한 기술학을 가르쳐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유학학부는 귀족의 자제에게만 입학을 허락했지만, 율학(律學-법률산학(算學-수학서학(書學-필경)을 가르치는 기술학부는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의 입학을 허용하여 배울 기회를 백성들에게 두루 베풀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나라에서는 국자감에 토지를 주어 그 소출로 학도들을 기숙사인 재()에 기거하게 하고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음식을 봉양하게 하여 오로지 학문 수행에만 전념토록 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과 문벌귀족의 탐학으로 조세를 거둬들이는 수조체제(收租體制)가 무너지면서 곳간이 텅텅 비어버린 조정은 국자감을 돌보지 않아 재정이 부실해졌고, 국자감은 학문 수행은 고사하고 홀로 서기에도 힘에 부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국자감의 재정이 빈사지경에 이르자 안향(安珦)의 건의로 문무백관들에게 은()과 포()를 내게 하여 이른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여 임시방편을 세우기도 했으나,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라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종국에는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의 자제가 아니면 학문에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국초에 국자감을 두면서 배움의 기회를 백성들에게 두루 펼치고자 한 뜻에서 크게 어긋난 것이니, 어찌 통탄치 않으랴…….

 

최성의 몽롱한 시선은 멀지 않은 과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당초 국자감 학도에게는 온갖 특전을 주었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우선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다시 국자감에서 감시(監試-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나 국자감의 학도는 입학해서 3년을 공부하면 성적에 관계없이 예비시험을 면제해 주었고, 곧바로 감시를 거쳐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성적이 우수한 자는 감시뿐 아니라 과거의 제1장이나 제2장까지 면제해주어 바로 제3장에 응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는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고, 관리로 입신하려는 자는 누구나 국자감에서 공부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국자감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학문의 최고 전당이요, 유학을 공부한 선비를 관료로 탈바꿈시키는 예비관료 양성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최성의 깊게 패인 주름살에도 어느 새 깊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헌공은 살아생전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별호를 얻었다. 공자가 육예(六藝)에 능통한 7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듯이, 문헌공이 9재학당을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낸 것을 견준 것이다. 그러나 최충은 이 별호가 못내 마뜩찮았다. 문헌공은 많은 제자를 길러낸 훌륭한 학자라기보다는 시류에 편승해 과거시험 교육에 전념한 세상물정에 밝은 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방 성리학의 시초를 연 안향 선생도 감히 공자에 비유되는 것을 극구 사양하셨거늘, 하물며 국리민복을 위해 세운 국자감을 뼈와 가죽만 남긴 채 말라죽게 만든 12공도의 원조인 9재학당을 세운 문헌공이야……. 백보를 물러나서 돌이켜보아도, 공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기보다는 이를 빌미로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조정에 아성을 쌓는 일에 더 공을 들인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최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적막에 싸인 앞마당을 거닐었다.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처연함이 묻어났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었다. 문벌귀족(門閥貴族)은 고려조를 세울 때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뒤 국초부터 관직을 독점했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에 나라에서 받은 과전(科田)을 보태 권세를 쌓아 왔다. 몽고의 내침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도 그들은 흉악한 외적과 결탁하여 권세와 재산을 더욱 드높였다. 이제 그들의 농장은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광대했고, 해마다 곳간에 쌓여가는 쌀가마는 밑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런 그들을 일컬어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 불렀다.

그러나 가난한 사대부들은 국자감을 나와도 갈 곳이 없었고, 과거는 보는 족족 낙방만 거듭했다. 어렵게 관직에 나와도 권문세족의 눈 밖에 나면 미관말직(微官末職)만 맴돌다 생을 마감했다. 사학은 권문세족의 자제들에게 대대손손 관직과 권력을 약속하는 황금의 열쇠였다. 토지, 관직, 학문, 교육……. 그들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최성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교육은 천하의 근본을 바로잡고 만백성을 교화하는 공기(公器)이거늘, 어찌하다가 이익을 탐하는 한 줌 소인배들의 취리(取利)의 방편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느닷없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한 마디 말이 비수처럼 허공을 갈랐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하늘이 우릴 버리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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