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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9(2015.12.15. 발간)

 

[담론과 문화] 타라의 문화비평

기억 저장소에 남아있는 것들

 

타라 문화연구분과

 

 

 

기억이 주관적이라는 건 이젠 제법 많은 이들에게 동의를 얻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소소한 사건들에서 는 내가 보았다고 믿고 체험한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그리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인들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사회라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교섭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기체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인정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주관적 기억의 충돌과 실체의 모호함은 즐겨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기억 상실과 기억 조작 혹은 왜곡까지 기억을 둘러싼 많은 드라마들이 넘쳐난다. 최근에 재개봉한이터널선샤인을 필두로내가 잠들기 전에,메멘토는 모두 주인공의 기억 상실이나 단절을 중심 테마로 하고 있다. 확실히 기억산업이 번창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기억부산물들이 요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억이란 한 주체가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현재와 관련짓는 정신적 행위이자 과정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상실과 단절, 조작은 과거 시간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파국을 가져온 과거의 것들을 간단히 떼어내거나 지워버리고 우리가 유리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기, 이른바 전체나 일부를 리셋(reset)하기 위해 기억 저장소의 버튼 누르기처럼 말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응답하라 1988(tvN)과 막장에서 명품까지 논란이 분분한애인 있어요(SBS) 역시 각각 집단과 개인의 기억을 매개로 한 드라마이다. 그리고 이들은 2015년 한국사회가 기억을 대하고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제주43 이나 518 민주화항쟁 등 침묵의 공조를 깨고 돌연히 나타났던 진상규명과 기억투쟁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박제된 기억과 망각으로 사뿐히 안착하려는 날개짓이 감지되는 것이다.


 

박제되는 기억과 노스탤지어


국민드라마 응팔이라는 신조어를 낳고 있는응답하라 1988은 지상파 드라마가 아님에도 13.8%라는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응답하라 1997,응답하라 1994이상의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80년대의 촌스러움과 푸근한 감성몰이는 당대를 추억하는 40~50대만이 아니라 10대 등 다양한 세대들을 고루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응답하라 시리즈들이 2030세대를 겨냥했다면 이번 응팔4050세대 시청자들까지 사로잡는다.

쌍팔년도의 복고 패션과 음악들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따뜻한 가족애와 풋풋한 러브라인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전략은 응팔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의 변두리 쌍문동 봉황당 골목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람살이 속에 돈과 가난의 설움까지 적절하게 끼워넣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때의 가난은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지만 서로의 신세를 염려하고 챙겨주던 낭만의 시대를 호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런데 왜 하필 1988년인가? 연출을 맡은 신원호 PD198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둔 연감에서 희한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해로 1994, 1997, 1988을 지목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1988은 이웃 간의 인심이 살아있었던 때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한하게 많은 일들의 중심에는 대형사건, 사고와 함께 대중문화 담론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억팔이서사는 복고 문화 코드의 적절한 배치로 구성된다. MBC 강변 가요제 대상곡이었던 이상은의 담다디열풍, 대학가요제 대상곡이었던 신해철 보컬의 그룹사운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댄스그룹 소방차의 출현, 이미연, 최수지, 최재성 등 하이틴 스타들의 대두 등 이른바 신세대 문화의 부상이 이 드라마의 볼거리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1988년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격변기였다. 국제적으로는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한 냉전 종식, 국내적으로는 저달러·저유가·저금리 ‘3를 기반으로 한 경제호황과 고도성장, 서울올림픽 개최,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 결정, 맥도널드 국내 1호점 설치 등이 있었다. 한국사회가 이른바 개방과 자유화의 물결에 휩싸이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은 1988년의 이러한 격변의 바탕에는 1987610 민주화 항쟁이라는 집단적주체의 폭발적인 항거가 있었다. ‘응팔에서 고등학생의 시각으로 당대를 회상하면서 배제해버리는 집단적 주체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연탄과 석유난로, 88담배와 썸씽 스페셜, 못난이 인형과 아모레 아줌마, 나이키와 포니2자동차, 금성TV 등으로 당대 풍속을 세밀하게 복원해놓고 있다. 그러나 응답하라 1988에는 화려하게 개최된 서울 올림픽 개막식은 있으되 달동네 철거라는 빈민투쟁의 역사는 흔적조차 없다.

복권 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금성사 대리점 주인, 빚보증 탓에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은행원, 고교 교사와 보험설계사 부부, 남편 연금으로 살고 있는 주부가장, 국보급 바둑기사 아들을 둔 금은방 주인은 골목길 공동체를 이루고 빈부갈등 없이 따뜻하게 살아간다. 바깥세상의 소식은 이곳 부락민들이 모여앉아 넋 놓고 시청하는 TV뉴스를 통해서나 이따금 환기될 뿐이다. 그리고 그 마저도 유머코드 속에 잡음섞인 소리로 금새 흘러가버린다.

골목길 최고의 수재이자 유일한 대학생으로 등장하는 보라는 이른바 운동권이다. 그녀는 동생을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을 거칠게 강요하는 인물이자 잘난 척하고 까칠한 서울대 사범대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냉정하게 보이는 외면과 달리 이웃에게 인정을 보이는가 하면 자가용을 운전하며 동지가를 부르는 보라의 모습은 386세대로 불리던 이들에 대한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편, 최루탄과 화염병, 백골단으로 점철되어 있던 당대의 치열한 시위에 대한 기억은 전경에게 쫓기던 학생을 동일(보라의 아버지)이 아버지인 척 구해주는 온정적인 삽화로 처리된 후 멀찌감치 치워진다. 게다가 보라의 닭장차 연행과 방출도 고교생인 선우와의 애틋한 사랑 서사의 도화선으로 활용되는데 그친다.

응팔에서 1980년대 기억은 88올림픽과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활황으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80년대의 문화적 기억으로 다듬어져 2015년 한국사회의 기억저장소에 안치된다. 여기서는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라는 사회과학 서적도 운동권 대학생의 소품이자 덕선이가 집안의 둘째로서 겪는 설움을 묘사하는 상징적 기표로 활용되고 만다. 요컨대 응팔은 선택적인 기억의 배열을 통해 과거를 낭만화하고, 소비하기 매끄러운 서사를 통해 집단기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생존마저 담보하기 버거운 2015년 한국사회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는 없는 주체들은 골목길로 표상되는 따뜻한 가족애와 공동체로 회귀하고 싶은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느낀다. 그러나 골목길 평상에 펼쳐진 박제된 기억들에는 1980년대에 실재했던 주체들의 불안, 상처, 어두운 기억은 일체 없다. 단지 복고로 치환된 디테일한 일상의 문화 소품들이 즐비할 뿐이다.

 

 

파국 그리고 기억의 증발


기억 상실증은 드라마 속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특히 인간의 탐욕과 질투를 서사의 중심 테마로 삼고 있는 막장드라마에서 이중삼중으로 얽힌 이야기를 단박에 해결하는 수단으로 손쉽게 차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애인있어요에서 기억 상실증이 다루어지는 방식이 흥미롭다.

애인있어요파국(破局)’에서 시작한다. 재벌 아들 최진언의 끈질긴 구애로 어렵게 맺어진 첫사랑 도해강과의 결혼은 어린 자식의 죽음을 계기로 파경에 이른다. 결혼 후 해강은 천년제약의 사냥개 노릇을 하며 상위 1%의 삶을 향해 매진하는 냉혹한 변호사가 되고, 그녀의 갑질에 분노하여 죽이러 돌진하던 차에 딸 은솔이가 죽는다. 그 즈음 최진언은 고아이지만 밝고 당찬 후배 강설리에게 끌리게 되고, 극단으로 치닫던 결혼생활은 이혼으로 막을 내린다.

한편, 해강은 쌍둥이 동생인 독고용기(천년제약 비리를 폭로하려다 죽은 연구원의 애인)로 오인되어 큰 사고를 당한 후 기억을 잃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강석(독고용기의 고교동창)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그녀는 독고용기로 불리며 태양의 집에서 고아들과 함께 살아간다. 변호사 강석의 사무장으로 일하던 중 천년제약 약품 푸독신의 부작용 사건을 맡아 일인시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매료된 최진언과 다시 사랑에 빠진다.

본격적인 드라마 서사는 긴 에필로그를 끝내고 해강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데서 시작한다. 사고 후 해강은 태양의 집이라는 소박한 공간에서 오직 강석이 말해주는 독고용기로 자신을 채워간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해강은 소박하고 윤리적이다.

천년제약이라는 대기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을 위해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을 하던 법무팀 변호사 도해강이 힘없고 서러운 을들의 대변자로 돌변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은 기억상실이라는 만능 장치에 의해 정리된다. 게다가 해강은 천년제약의 비리를 낱낱이 밝힘으로써 자신의 추악한 과거에 맞서 싸울 강인한 의지마저 보인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축적 논리와 자기계발하는 주체로 최적화되어 있던 인물이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불의한 것들을 기억에서 싹 지운 채 정반대의 인간형으로 리셋된다는 설정은 주목을 요한다. 게다가 차가운 괴물로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에 치를 떨며 해강이 좀 치워달라고 절규하던 최진언이 불과 4년 만에 전 아내에게 순애보적인 사랑으로 돌진하는 모습은 다분히 돌출적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기억을 잃은 아내의 모습에다 대학시절 청순했던 해강의 모습을 회상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오버랩시키면서 진언의 갑작스러운 변심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파국적 상황에서 보였던 그의 난폭함과 불륜은 증발해버리고, 담벼락에 기대어 이어폰으로 아내와 음악을 나누는 낭만적이고 따뜻한 감성의 사내가 있을 뿐이다. 현재 상황을 자초했던 어두운 기억은 통째로 사라져 버리고 첫 만남의 풋풋한 기억과 지금 현재가 바로 접합된다. 기억저장소에서 아름다운 기억 조각들만 꺼내어 재가공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해강과 최진언 부부의 파국적 상황에 대한 과거 기억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강설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매끈한 현재에 균열을 내는 존재라고나 할까? 그런데 실은 불과 몇 회 전 방영물에는 이들 부부의 분노와 혐오가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나간 모든 걸 날려버리고 눈앞의 낭만적인 사랑에 공감한다.애인있어요는 파극에 대한 서사다. 어두운 기억은 말끔히 끊어내고 다시 시작할 것을 강권한다. 어쩌면 이처럼 재빠른 망각과 기억의 증발은 신자유주의적인 파국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기체 나름의 생존 전략일 수도 있겠다.

 

 

망각의 바다에서 기억을 인양하라


일제강점기 징크스를 깨고 흥행에 성공한암살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1200만 이상의 관객 중 하나였던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박제되거나 왜곡된 기억이 아니라 역사의 뒤안길에 켜켜이 층져 쌓여진 더미 속에서 끄집어내어 되살린 기억이다. 그 속에서 약산 김원봉이 불러져 나오고, “난잎으로 칼을 얻던 우당 이회영이 자산을 몽땅 털어 세운 신흥무관학교가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다.

영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데라우치 총독, 이완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상하이의 조계지, 김원봉의 의열단, 한국독립군의 무장투쟁, 경성 미쓰꼬시백화점, 반민특위의 친일청산 실패 등을 역사적 사실로 고증해낸다. 그러나 김구와 김원봉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 즉 친일파 광산 자본가 강인국, 조선군 사령관 가와구치, 독립군 출신 여전사 안옥윤,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 폭탄 전문가 황덕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요원으로 그려진 아네모네 마담 등은 모두 가공물이다.

독립운동을 배신하고 일제의 밀정이 된 염석진이나 '암살단'을 청부살인하려다 종국에는 그들을 도와주고 최후를 맞는 하와이 피스톨과 영감도 영화 속 허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임시정부와 독립군, 밀정, 친일파와 일본군 수뇌부 등 복잡하게 얽혀있던 당대의 인간군상을 구현하고 있는 역사적 가상들이기도 하다.

암살매혹적인 인물들과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재미를 선사하면서도, 우리의 기억이 머물러야 할 곳을 제대로 포착하여 잠시 응시한다. 그리고 꽤 진지하게 긴 호흡으로 독립군들 한 명 한 명을 호명한다. 마치 이라는 낱낱의 글자를 가슴에 꾹 새기라는 듯이 말이다. 암살 작전에 투입되는 3명의 독립군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작게 읊조리며 빛바랜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자신들의 존재를 역사가 기억해달라는 듯이.

영화는 곳곳에서 죽어간 이들의 넋을 불러내 위무하는 제의를 올린다. 과거의 민낯을 호출해 현재와 대면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침전물 속에서 기억을 건져 올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감은 안옥윤과 헤어지면서 “3000, 우리 잊으면 안 돼라고 또렷이 말하고, 해방 직후 약산은 너무도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말하며, 고량주 잔에 불을 붙이고는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 역시 실제로 월북과 숙청의 지난한 여정 속에 남과 북 모두의 역사에서 증발해버린 존재이기도 하다.

암살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사회 현실을 직시한다. 염석진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웃통을 벗고 총 맞은 자리를 가리키며 항일운동을 한 민족주의자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다가 미치코로 착각하고 안옥윤을 따라간 곳에서 자신이 죽인 줄 알았던 명우에게 처형당한다.

영화는 6발의 총을 맞은 염석진이 허허벌판에서 펄럭이는 허연 적삼들 사이를 비틀거리다 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반적인 독해는 바람에 나부끼는 적삼을 독립운동을 하다 죽어간 이들로, 그리고 염석진은 그들을 위한 제의에 바쳐지는 제물로 해석한다. 여기에 친일 청산이라는 한국사회의 소망과 현실의 간극을 판타지로 대신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뭔가 미흡하지 않은가? 영화암살은 우리에게 괜한 비장함을 거두고 역사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염석진의 손상된 육체가 내동댕이쳐진 벌판은 우리가 멀찌감치 밀어두었던 불편한 기억 저장소이다. 그 곳에는 너울거리는 허연 적삼들을 걸치고 치열하게 투쟁했던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들의 넋을 어설프게 위로하기 이전에 그들 각자의 생생한 이름과 얼굴을 역사 속에 되살려내야 할 것이다.암살이 약산 김원봉과 신흥무관학교를 망각의 수렁에서 건져올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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