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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9(2015.12.15. 발간)

 

[열공]

마이클 애플 초청 심포지엄 후기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일상적 이해 뒤엎기

 

함영기 / 서울교육연수원 교육연구관

 



 

'학교지식의 정치학(Apple, 1993)을 다시 읽고 있는데 2판 서문에 이런 말이 있었나 할 정도의 명문장이 있다. "교육과 사회 정책에서 그 동맹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은 '보수적 현대화'(Roger Dale, 1989)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보수적 현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소비 관행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만다. 또한 시민권은 소유적 개인주의로 축소되어 왔고, 타인에 대한 적의와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책이 지속되도록 강요되어 왔다."

이것을 한국적 상황으로 쉽게 풀어보자. '보수적 현대화'는 현대화가 보수들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보수의 현대화'와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은 '보수의 필요'에 따른 이행이지 대중들의 요구에 따른 진전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접근이라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첨단 테크놀로지' 역시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듯 화려한 수사로 포장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수익 창출을 위한 자본끼리의 무한 경쟁에서 진화해 왔다. 그러하기 때문에 보수는 변화하는 세계에 잘 적응해 왔다. 물질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세계라면 이것에 적응하기 위한 물적토대와 환경이라는 조건은 보수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애플은 '타인에 대한 적의와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책'을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 이것 역시 '민주주의가 소비된다'는 개념 속에 자리잡는다. 민주주의를 상품화된 재화처럼 기획해낸 것은 보수들의 기획이다. 이 기획 안에서 구성원끼리 경쟁하고, 다투며 서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기 위해 소모적 에너지를 쓰게 만든다.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도 특정의 주제로는 경쟁 상대가 되도록 하는 것, 어느 한 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한 쪽은 반드시 손해가 되도록 하는 것(예를 들면, 복지예산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젊은이와 노인들의 갈등을 아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등이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이런 기획이 현재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보호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보는 태생부터 '변화'를 앞세웠다. 그런데 그 변화라는 것은 무엇일까? 보수의 틀, 즉 지배권력 중심으로 공고화되어 있는 세계를, 그 세계의 주인인 민중들에게 재위치시키는 변화이다. 생산되는 모든 물질적 재화를 그것을 생산한 주체들인 노동자들이 평등하게 나누도록 하는 변화이다. 이같은 변화의 개념을 일상을 사는 시민이 각성하기에는 힘겹다. 진보는 '변화'를 언급하지만, 그 개념은 '권력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 이상을 넘지 못한다. 결국 진보가 말하는 변화란 진보끼리 대화할 때는 속이 시원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는 파급력을 갖기 힘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수의 변화 속에는 많은 개념이 선점돼 있다. 세상의 변화, 기술의 진보, 생활의 변화 등은 이미 보수의 전유물로 고착화돼 있다. , 진보는 권력을 변화시키려 하고 보수는 문명을 변화시키려 한다. 미디어는 문명의 변화에 관심을 갖는다. 진보의 그림이 시민들에게 추상적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보수는 압도적 권력으로 시민의 일상을 장악한다. 그들은 이 힘을 제도적으로, 물리력으로, 문화적으로 행사해 왔다. 미디어를 소유하기 위해 보수가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보라. 보수는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선점, 생산, 전파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그들은 힘과 자본을 묶어 견고한 우파 블럭을 형성한 후 개념과 의미를 장악한다.

'자유'라는 개념이 어떻게 보수 프레임 속에서 해석되는지 보자. 아이가 자유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배울 때는 모든 강제로부터 놓여나는 것으로 개념화하지만, 성장하면서 이 개념이 모든 이들에게 같은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힘을 가진 보수들에게 자유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전적으로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파생한 '자유 민주주의'를 보자. 진보는 여기에 들어가 있는 자유를 누구에게도 예속 당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로써 생각하지만, 보수는 기득권을 방해받지않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권리로 생각한다. 그 권리는 보장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그것이 보수가 생각하는 자유 민주주의이다. 이런 이유로 보수가 생각하는 자유 민주주의는 명확하게 '경제적 동기'를 함의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자유롭게 보장하는 것, 즉 경제적 동기가 더욱 고도화된 자유주의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미 보수는 제도적, 문화적, 생활 속 프레임 경쟁에서 진보를 압도하고 있다.

나아가 '공정'이라는 개념을 보자. 위의 공식대로라면 보수는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을 공정이라 생각한다. 이미 축적된 자원을 기초로 펼치는 경쟁은 결과가 뻔한데도 이들은 이것을 공정이라 개념화한다. ? 그들에게 공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조건으로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진보에서 생각하는 공정은 도적적, 윤리적으로도 출발점이 같은, 평등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보수는 모든 개념을 경제적 동기, 하나로 명확하게 수렴시킨다.

이미 권력을 가진 자, 자본을 소유한 자,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를 움직일 수 없는 주체로 상정한 보수는 '민주주의' 역시 상품을 구매하듯이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개념으로 치환해 놓았다. 지나간 선거 과정을 잘 관찰해 보라. 그것은 정책과 신념의 대결이 아니라 상품을 보기 좋게 진열해 놓고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광고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미 전락해 있다. 그러면 결과는 뻔하다. 좋은 상품을 준비한 자, 보기 좋게 진열할 능력이 있는 자, 효과적으로 광고하기 위해 미디어를 장악한 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가공할 힘을 가진 보수의 선전력은 진보의 내부에도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단적으로 '운동'의 진행 과정은 자본주의적 소비 개념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그것은 보수의 프레임 속에서 상품을 진열해 놓고 "우리가 옳아요, 권력 관계를 바꾸어 주세요. 힘은 없지만 잘 할게요."라고 소비자들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구호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이 기획은 누구의 것일까? 진보로 하여금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하면서 시민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게 하고 허공에 떠도는 울림 없는 말로 만들어 내는 것, 따져보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보수의 기획이다.

그래서 '교육'을 사고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어떤 의미가 어휘로 개념화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에 봉사하고, 누군가는 소외시키도록 작동한다. 이것은 모든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절차와 방법'으로 치환하는, 혁신교육에도, 매뉴얼과 연수쇼핑에 기대는 교사에게도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다. 오늘날 교사들이 왜 폭주하는 업무 속에서 탈전문화되고 있는지, 상세화게 잘 짜여진 지도안을 찾고 있는지, 연수이수와 마우스 클릭이 왜 동일한 개념으로 관찰되는지 살펴볼 일이다. 교사들이 이 지경이 된 것, 이제 누구의 기획인지 이해가 되는가? 진정한 교육은 누군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절차와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일상적 이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학교에서 다루는 지식이 누구에 의해 정해졌고,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는 의문은 접어 두고 그저 이것을 전달하는 데에만 매몰된다면 결국 일상적 이해를 뒤엎기 보다는 그것에 순응하는 결과로 귀착될 것이다. 요즘 자주 화제가 되는 '교육과정 재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식의 본질에는 다가서지 못한 채 기존의 지식을 이러저리 필요에 따라 옮기고, 나누고, 합쳐본들 진정한 교육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것은 기존 교육과정을 해석하는 주석 달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보수는 교과서 파동을 통하여 교육과정 자체를 왜곡하려 하는데, 진보는 교육과정의 해체와 재구성에 지레 겁을 먹는다. '교육과정'이란 전문가가 세심하게 고려하여 구성한 다음 현장교사들이 실행만 하면 되게끔 넘겨주는 것으로 개념화되어 있다는 관행화된 사고 때문이다.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교육과정은 국가의 것이 아니다. 직접 가르치고 배우는 자의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을 '자유'라고 해석하거나, 제한없는 경쟁을 '공정'이라 부르는 보수들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지식''권력'을 동시에 선점해 왔기 때문이다. 일찌기 그들은 선전과 계몽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미디어를 소유하는데 공을 들였다. 물론 옛날처럼 무식하게 직접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다. 공영 혹은 민영으로 만들어 관리와 통제를 통한 문화적, 제도적 압박으로 영향력 아래 두는 새로운 방식의 소유이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전근대적이지만, 이 또한 그들의 장기적 기획에서 나온다. '욕 먹으며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저들의 특기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국정 교과서 얘기를 꺼냈다면 아마도 '뜬금없는 시대착오주의자'라는 말을 들었겠지만 이렇게 교과서 문제로 분당질을 쳐 시민들에게 염증을 느끼게 해 놓고, "이런 혼란보다는 국정교과서가 낫지 않겠소?"라고 말하는 것이다. , 국정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떠올리게 된 '바뀐 현실'을 교과서 파동의 성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한편,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운동 과정에서 '진보의 보수성'을 여러번 경험했다. 애플도 지적하거니와 사회 운동이 계급의 관점에서 성공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성(gender)의 위계는 더욱 확고히 했다는 것이라든지, 그 자신 가지고 있는 가부장성이나 후진적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행하거나 분열하는 것 말이다. 혹은 체화되지 못한 민주적 의식으로 그저 '절차'의 완성만으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속에 은밀하게 깃들어 있는 관료성 같은 것들 말이다. 또는 대상과의 공유된 이해를 포기하고 계몽하거나 가르치려는 관행화된 행위도 있다. 말하자면 보수는 자기들 방식대로 현대화하는데, 진보는 전근대성을 유지하는 형국이다.

다시 애플의 말을 상기해 보자.

"지배 집단은 그들의 지속적인 지배에 대한 도전을 자신의 작전권 내에 가져다 놓는데 탁월한 독창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양보하는 아량을 보여왔지만, 그 양보는 자신들의 전반적인 지도력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때로 지배집단은, 분출하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 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철저하게 그들의 '작전' 속에서 관리된다. 얼핏 보아 상황 주도권이 진보에게 있는 것 처럼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오래된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관행과 습속(habitus)을 따르는 것을 과감하게 극복하고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자기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 꽤 오래 걸리겠지만, 외면할 수 없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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