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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현장에서] 핵고리 시민이 끊는다

2014.07.15 17:41

진보교육 조회 수:476

[현장에서]
핵고리 시민이 끊는다

황경민 / 카페 헤세이티 쥔장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나는 내내 ‘고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세월호는 이미 가라앉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고리는 여전히 누구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호 침몰에 대한 그 모든 사실적 실체를 밝혀내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 카페에 찾아온 부산의 몇몇 친구들(활동가)에게 ‘고리’가 시급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사뭇 냉담했다.

“그래, 고리 문제 심각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호에 집중해야 한다. 고리는 그 이후의 문제다.”

‘그 이후’, 과연 그들이 말하는 그 이후는 언제일까? ‘그 이후’를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나는 그 날 당장 자발적 시민모임을 꾸려야 된다고 결심했다. 시민모임을 제안하면서 이런 취지의 글을 올렸다.

“수명이 다한 <고리 원전 1호기>는 원전마피아들의 비밀스런 커넥션 아래 그 누구도 그 실체에 다가가지 못한 채 가동중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못하고,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절멸의 가능성이 가동중인 것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더 이상 위임할 수 없고,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더 이상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먹을 수 없다.

가칭 <고리 1호기 폐쇄 및 탈핵 사회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를 만들자.
진보와 보수, 좌우의 구별 없는 대책위원회를 꾸리자.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는 조직이 아니라 참석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조직을 만들자.

완전한 자발적 시민모임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해 가며, 참여자 모두 계급장 떼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시위하고 함께 나누며, 승리의 기억을 공유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영감이 될 수 있는 '민회', '평의회' 방식의 기구로서 싸움을 시작하자!“

그리고 모임 첫날, 서른 세 명의 사람이 <가칭) 고리원전 1호기 폐쇄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 제 1차 준비모임에 참석했다. 우리는 그 어떤 의제도 정하지 않았다. 참석한 사람 모두가 두 번, 세 번 돌아가며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자리였다. 계급장, 나이, 성별, 신분 따위는 개에게나 줘버리는 자리였다. 참석한 사람은 모두가 단 한 명의 시민자격이었을 뿐이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얘기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제 각각이었고, 핵발전에 대한 생각도 그 층위가 달랐으며, 모임에 대한 생각 역시 다양했다. 물론 <고리 원전 1호기>를 폐쇄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서른 세 명이 다 제각각의 입장과 처지에 서 있었지만 ‘고리 원전 1호기’를 폐쇄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 것이다. 이보다 더 명백한 의견일치가 언제 있었는가? 이보다 더 서로가 공감하고 반대한 사안이 어디 있었는가? 이보다 더 ‘살고 싶다’는 절박한 호소가 언제 있었는가?

“탈핵을 넘어 생명을 사유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무척 반갑다.”
“나는 정치적으로 보수다. 그러나 고리 1호기는 폐쇄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한다.”
“핵발전에 대해 잘 모른다. 앞으로 같이 공부하자.”
“지금 당장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싶은 심정이다.”
“더 재밌고, 더 신나는 모임이 되길 바란다.”
“시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시위방법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명확하고 간결한 대응논리를 찾아야 한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와서 정말 반갑고 고맙다. 늙다리들은 당신들을 지원하고 지지할 것이다.”
“세월호 이후 죄책감을 씻어버릴 수 없었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말들이 꽃망울이 부풀 듯, 폭죽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래, 우리는 활동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운동가가 아니었고, 지식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만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시민이었다.
우리는 다만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지만 우리 자신의 삶과 생명과 죽음을 스스로 책임지는 단 한 사람의 시민이었다.

<세월호> 이후 사람들은 분명 어떤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스스로 변하려고 하고 있다. 아직 위험한 상상, 불법적 상상, 전복적 상상에는 가 닿지 못했지만 그들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겁먹지 말자.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 섣불리 이기지 말자. 그러나 단 한번 끝끝내 이겨야 할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고, 다음 세대의 생존가능성과 직결된 문제다.
수명 연장한 <고리원전 1호기> 이것은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이자 직접민주주의(독점)와 지역자치(중앙집중=>분산)의 문제이고, 우리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능성을 묻는 문제다.
그리고 그 동력은 오로지 우리 자신(민중, 인민, people)에게 있다.
자발적 변화가능성이 넘실거리고 있다. <고리원전 1호기>는 오직 생존불가능성을 마주한 '나'만이 폐쇄시킬 수 있다. 그 '나'들의 무수한 각성, '자발적 시민의 힘'으로만 폐쇄시킬 수 있을 뿐이다.

잠 못 드는 새벽, 휘갈긴 시 한 수 나누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혹성

바람이 불었다고 썼다가 지운다
바람이 울었다고 썼다가 지운다
바람이 젖었다고
바람이 아팠다고
바람이 말랐다고
바람이 바랬다고 썼다가 지운다
바람에 관한 모든 수사를 지운다
세상의 모든 바람을 지운다
지운 자리에 드디어
바람이 불었다고 썼다가 지운다
지운 자리를 다시 지운다

바람의 꼬리를 지우고
바람의 여백를 지우고
바람의 알리바이를 지우고
바람의 소식과 무소식을 지우고
불지 않은 바람마저
없는 바람마저 지운다

이 진공의 세계,
메아리가 없는 세계,
토끼처럼 바알갛게 겁먹은 세계,
달아난 발자국만 남기고
너를 지운다

황경민


카페헤세이티 소개

뭐, 별 거 없심다. 그저 이대로는 몬 살겠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당을 해보자고 만든 장소입니다. 아무쪼록 마이들 오셔서 매출 좀 올려주이소. 더분데 힘듭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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