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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기획] 5. 인식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과 변증법

2011.07.18 21:46

진보교육 조회 수:2183

<‘인식’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과 변증법>

김태정/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

1. 들어가며

‘마이크 콜’이 아주 정당하고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비고츠키의 [생각과 말]을 비롯한  주요저작에 대해 인간의식의 자본론이라고 부를만한 하다고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비고츠키 주장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혹은 의식발달에 있어서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주장이 ‘비고츠키’ 이후에도 다른 맑스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강조되었다는 점이며, 그 대표적인 논자로 ‘카렐 코지크’와 ‘요하임 이스라엘’을 들 수 있다. 아래에서는 코지크의 [구체성의 변증법](1967)과 이스라엘의 [변증법](1979) 그리고 로젠탈의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타난 변증법의 제문제](1955)과 레닌의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1914) 등의 글에 근거하여 인식에 있어서 언어의 역할과 인지과정과 의식발달에 있어서 변증법과정이 중요성을 비고츠키 주요 저작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2. 맑스주의 인식론의 출발 “실천”

맑스주의 철학이 기존의 관념론은 물론이고 조야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핵심에는 바로 인식론에 있어서 ‘실천’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맑스의 초기저작 중 하나인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번과 3번으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테제 1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의 주요 결함은 대상이나 실재, 감성 등을 단지 대상이나 직관의 형식으로만 파악했다는 점이다. 즉 감성적 면모를 띤 인간적 행위나 실천으로서, 다시 말해서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다. (하략)

테제 3
환경 및 교육의 변혁에 관한 유물론적 학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환경도 인간에 의해 변혁되어야 함, 교육자 자체도 교육되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중략) 환경의 변화와 인간적 활동의 변화 그리고 인간의 자기변화는 오직 혁명적 실천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그리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교육이론을 재구성하고자 할 때 위 테제가 갖는 함의는 매우 중대하다. 우리는 위 테제를 이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1) 대상(세계), 실재(사물,역사..) 감성을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직관이 아닌 그것과 직접 부딪치고 경험하는 (맑스 표현대로 감성적 면모를 띤)행위 즉 실천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 세계(다른 표현으로 환경)은 인간과 관계 맺는 환경이고, 인간에 의해 규정되고 변화되는  세계(환경)이다. 때문에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변화(변혁) 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3) 그런데 이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이자,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실천이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6번에서 강조했듯이 “인간의 본질은 사실상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테제 8에서 규정했듯 “모든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를 인식론으로 재구성하면 인간의 의식이란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성 또는 실천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 즉 인간의 의식은 실천 자체의 한 계기 또는 한 측면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의식’이 사회 속에서 취하고 있는 형식들은 사회적 실천이라는 형식을 띤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의식이 실천자체의 한 계기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 의식발달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육을 사회적 실천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인간이 대상세계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과정 즉 ‘실천’에 있어서 ‘언어’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판단한다.  


3.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실천에 있어서 ‘언어’의 기능

[생각와 말]에서 비고츠키는 경험을 성찰하고 정교화하는 수단인 언어가 매우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심오한 사회적 인간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세련된 주장을 제시한다. 그는 개인과 사회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본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아동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기호- 사용 행동은 말하기다. 아동은 말하기를 통해 환경의 직접적 많은 제약들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아동은 말하기를 통해 미래 활동을 위한 준비를 한다. 즉 다른 사람의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고, 통제한다. 말하기는 또한 기호 사용의 최고의 예다. 말하기가 내면화되면, 말하기는 고등심리과정의 보편적이고 심오한 일부분이 된다. 말하기는 지각, 기억, 문제해결과 같은 행동들을 조직하고, 결합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비고츠키는 [아동발달에서의 도구와 상징]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다.

“1) 인간과 인간의 물리적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2) 노동이 인간을 자연과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수단이 되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활동들은 무엇이며, 이러한 형태의 활동들의 심리적 결과는 무엇인가? 3) 도구 사용과 말하기 발달간의 관계는 어떤 성격을 띠는가?”

이를 다시 정리하면 위 질문은 인간이 행동을 통하여 환경을 바꾸는 실천에 있어서 언어와 인간발달의 상관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동발달에서의 도구와 상징]에서 비고츠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인간에게 특수한 형태의 실용지능과 추상 지능을 생겨나게 하는 지적 발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이전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발달 경로를 밟던 말하기와 실용활동이 만날 때 일어난다”
“아동은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기 전에 말의 도움으로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행동 그 자체를 새로이 조직할 뿐 아니라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이러한 행동 형태의 창조는 나중에 지성을 만들어내며 생산적인 작업의 기초가 된다. 즉 인간만 가지는 특수한 형태의 도구들을 사용하게 만든다”
“우리의 실험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명했다. 1) 아동의 말하기는 목표를 완수하는데 행동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동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그들의 말과 행동은 주어진 문제해결을 향한 ‘하나의 동일한 복잡한 심리적 기능’의 일부다. 2) 상황에서 요구되는 행동이 복잡할수록 그리고 그 해결이 덜 직접적일수록, 전체 작업에서 말하기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때로 말하기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어서, 말을 못하게 했을 때 어린 아동들은 주어진 과업을 완수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관찰들은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했다. 아동은 눈과 손뿐 아니라 말하기의 도움을 받아 실제적인 과업들을 해결한다. 지각 말하기 행동의 통합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유일한 행동유형들을 분석하기 위한 중심주제가 된다”

비고츠키의 다른 논문 [고등심리 기능의 내면화]에서도 언어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되며, 여기서는 ‘기호’로 표현되고 있다.

“기호와 도구는 기본적으로 매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유사성이 있다. 따라서 기호와 도구는 같은 범주에 포함 될 수 있다.”
“기호사용의 핵심은 인간이 기호를 통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기호나 도구 모두 매개 활동이 중심이 된다.”
“도구는 외적 지향이다. 즉 도구는 사물의 변화를 주도한다. 도구는 자연을 통제하고 정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외적 인간활동의 수단이다. 반면 기호는 심리적 작용의 대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기호는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내적 활동의 수단이다. 그래서 기호는 ‘내적’ 지향이다.”
“(그런데) 이 내적 활동과 외적활동은 실제로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자연의 통제와 행동의 통제의 발달에도 실질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개조가 다시 인간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자연의 통제와 행동의 통제는 상호관련되어 있다”
“도구 사용이 활동범위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이러한 활동 범위속에서 새로운 심리기능들이 작용하듯, 매개활동으로 전환시키는 인위적 수단(기호)의 사용은 모든 심리작용들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심리활동 속에서 도구와 기호가 결합하는 것을 지칭하는 ‘고등심리’기능이나 ‘고등행동’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외적 작용의 내적 재구성을 ‘내면화’라고 부른다. (중략) 이 과정은 일련의 변화과정으로 구성된다. (1) 처음에는 외적활동을 나타내는 어떤 움직임이 재구성돼 내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고등정신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기호-사용활동의 변화다. (2) 사람들 사이의 과정이 개인 내적과정으로 변화된다. (3) 사람들 사이의 과정이 개인 내적 과정으로 변화하는 것은 일련의 긴 발달과정의 결과다.”

그러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 세계를 변화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역할을 강조한 다른 저작을 보자.
앞에서 우리는 맑스가 인식에 있어서 “감성적 면모를 띤 인간적 행위나 실천”을 강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모든 감성적 경험은 오로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은 [변증법]에서 이렇게 논증한다. 인간의 지각 자체는 항상 주관적이고 사적이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빨갛다는 나의 경험... 다른 사람의 빨간 것에 관한 경험... 그것이 나의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엄밀하게 동일한 경험인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가 빨간 사물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지각을 반드시 분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일반과 이 언어 속에서 개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제 개념은 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설득력있게 입증했듯이, 홀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언어는 항상 개방적이고 간주관적이다. 제 개념은 그것이 제도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이것은 언어 및  제 개념이 다수의 사람에 의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공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과 관련해서, 그것은 그 개념들의 의미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개념들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그 사용자들에 대해서 강제적이라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 그러나 모든 개념이 다수인에게 동일한 이미를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개념이란 다른 개념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 의미는 오직 이 상호관계의 맥락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개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상언어를 익힐 때, 이 개념들이 공동성을 지니고 있고 오직 한가지 공통된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공통된 의미가 없을 경우 말하는 것은 무의미해지거나 불합리해 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제안은 지각이 아니라 언어가 인식의 논의를 위한 토대로서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논의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언어가 인식에 있어서 근본적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의 하나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고츠키가 앞에서 도구와 기호를 언급한 것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우리는 언어가 지각을 위해 근본적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1. 우리의 모든 감성적 경험은 오로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가 있다. 2. 우리의 감성적 경험은 언어의 매개를 통하여 비로소 의미있는 경험이 된다는 두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의미는 부호, 단어, 개념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어의적 관계의 표현이다 (볼로시노프)”
“인식론에 있어서 지각대신에 언어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관념론이라고 비판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언어는 정확히 인간의 신체나 생산수단 만큼 현실적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일예로 볼로시노프(1973)는 “자연적 제 현상, 기술장비, 소비재 등과 나란히 하나의 특수한 세계-부호의 세계가 실존한다” “ 모든 이데올로기적 부호는 현실의 반영 또는 음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이 현실의 물질적 부분이다” “의식은 오직 부호의 물질적 체학속에서만 존립하고 생존능력이 있는 사실일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 하였다.“

이스라엘은 더 나아가 언어는 행위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언어는 일종의 행위이다. 행위일반과 언어의 사용은 상호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면, 또한 우리가 이 행위로서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안다.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사회가 실존하고 언어의 사용능력이 다시 이 사회를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언어의 인식과 현실의 인식을 구분하는 전통적 이원론적 구분법에 대한 배척을 포함하고 있다. 체계로서 간주되는 언어자체의 객관세계와 체계로서의 언어가 귀속되는 사회세계는 공동으로 현실을 형성한다. 현실의 인식은 언어의 인식을 포함한다. 언어의 인식은 현실의 인식, 특히 사회적 현실의 인식이다.”
“우리는 언어와 현실을 변증법적 통일체로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언어와 현실은 상이하다. 말할 수 있다면, 어떤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어떤 것은 현실, 즉 객관세계이다. 때문에 둘째, 언어는 또한 현실의 일부인 점에서 이 현실을 다룬다. 셋째, 언어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현실의 인식이다. 현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언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관계속에 얽혀있는 제요소가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 즉 동일한 특성을 지니고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언어는 현실에 관해 말하는 것의 필요조건이다. 언어 및 그 근본적 논리규칙을 버린다면, 현실도 또한 버리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가 현실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언어를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언어를 오직 현실에 대한 지시물로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앞에서 우리는 의식의 형성과정 즉 인간의 인식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4. 인식에서 변증법의 중요성

왜 맑스는 인식에 있어서 ‘실천’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대상세계는 그 스스로 본질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현상과 본질은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과 철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카렐 코지크는 [구체성의 변증법]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변증법은 사상(事象)자체를 추구한다. 그러나 사상 자체는 인간에게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 우회하는 것이 필요하다.”
“변증법적 사유는 사상에 대한 표상과 개념을 구분한다.”
“인간이 현실과 일차적 직접적으로 접할 때에, 인간은 추상적인 인식 주체, 즉 현실을 사변적으로 다루는 사유하는 두뇌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이고 실천적으로 활동하는 존재, 즉 자연과 타인에 대하여 실천적인 행동을 수행하며 사회관계의 특정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목적과 이해를 실현하는 역사적 개인으로 접한다. 그러므로 현실은 일차적으로는 직관 연구 이론화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감각적 실천적 활동의 영역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이러한 활동이 인간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직관의 기초가 된다.”
“사람들은 화폐를 사용하여 그것을 가지고 대단히 복잡한 거래관계를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화폐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직접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실천과 그에 상응한 통속적 사고는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끔 하고 사물들과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하며 또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도록 하지만, 사물들과 현실에 대한 개념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인간생활의 매일의 환경과 일상적 분위기에 꽉 들어차 있고, 자율성과 자연성이 있는 듯 한 가상을 주는 일종의 규칙성과 직접성, 자명성을 지닌 채 활동하는 인간의 의식에 침투해 들어가는 이 현상의 접합이 바로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를 형성한다.”
“사이비 구체성의 세계는 참과 거짓이 섞여 있으며 모호하게 진행된다.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줌에도 불구하고 또한 본질을 은폐한다. 본질은 그 자신을 현상 속에서 드러내지만 그것은 부분적이며 어느 정도까지 일 뿐이고, 어떤 측면과 양상 속에서일 뿐이다.”
“본질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상에 의해서 매개되며 따라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보여준다. 본질은 현상 속에서 자기자신을 드러낸다. 본질이 현상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그것이 운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본질은 고정되고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본질은 현상과는 달리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사상의 은폐된 기초는 특수한 활동을 통하여 드러내져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과학과 철학이 존재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만약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동일한 것이라면 과학과 철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일상적 사유는 일상적 인간 행위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그러나 인간의 물신숭배적 실천, 조작과 조달 속에서 인간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비록 그것이 현실세계의 ‘견실성’과 ‘효력’을 갖고 있기는 해도, 진정한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상의 세계’인 것이다. 사상에 대한 표상이 사상 자체인 양 가장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외보를 띠지만 그것은 사상이라 현실의 자연적 속성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특정의 화석화된 역사적 상황이 주체의 의식속에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또한 [변증법]에서 유사한 주장을 하면서 인식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확증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배가 오렌지 같은 맛이 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이 참된 것인지를 알려면 모택동의 충고대로 그것을 먹어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가 맛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면 이 충고를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맛”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옳은 언표를 할 수 없다면 즉, “맛”이라는 표현의 의미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을 전혀 모르는 자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다음과 같이 바꿔 표현 할 수 있다.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규칙을 정식화하도록 해주는 언어를 옳게 사용하는 능력이 없이 진리를 검증하는 판정방법의 규칙을 세울 수 없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자. “누군가에게 산법(算法)을 설명하는 중에 이 배우는 자에게 선생님의 계산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또다시 설명하는가? 그러나 이런식의 설명은 끝이 없을 것이다” 어떤 언표의 옳음을 검증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어떤 주장의 “진리성”을 검증하기 위해서 행위규칙을 밝히는 것은 충분조건이다.“

그렇다면 사이비 구체성을 극복하고 대상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판적 사유’이다. 코지크는 이렇게 주장한다.

“표상과 개념,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람들의 일상적인 공리주의적 실천과 인류의 혁명적 실천을 구별한다는 것, 즉 한마디로 하나를 둘로 나눈다는 것은 바로 사유가 사상자체에 도달하기 위한 양식이다. 변증법인 사상자체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을 체계적으로 찾아가는 비판적 사유다.”

그러면 이 ‘비판적 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그리고 총체성을 견지할 때만 가능하다.


5.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과 구체적 총체성

코지크에게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것이 변증법적인 사유, 비판적 사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과 구체적 총체성이라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코지크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사상의 구조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변증법은 외부로부터, 혹은 뒤늦게 인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인식의 속성도 아니다. 오히려 인식은 변증법의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의 형태를 띠고 있는 변증법 자체이다. 즉 인식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에서 ‘개념’과 ‘추상’이라는 용어는 사상의 구조를 지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하여 즉 사상을 개념파악하기 위하여 하나는 나눈다는 방법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전체란 혼돈되고 불투명한 전체이다. 이러한 전체를 인식하고 개념적으로 파악하며, 명료하게 하고, 개진하기 위해서는 우회로가 필요하다. 즉,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을 매개로하고, 전체는 부분을 매개로 해서만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진리의 길은 우회로이다. "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상승이라는 방법은 사유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개념들과 추상의 지반 속에서 실현된다.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 의로의 상승은 하나의 수준(감각적인 것)에서 다른 수준(합리적인 것)에로의 이행이 아니라, 사유 작용 속에서의 운동이며 사유의 움직임이다. 사유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려면 사유가 자신의 지반에서 즉 감각적인 직접성, 직관성, 구체성을 부정하는 추상적 수준에서 운동해야 한다.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에로의 상승은 추상적인 데서 출발하여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이 추상성을 극복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에로의 상승은 일반적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현상으로 총체성에서 대립으로 대립에서 총체성으로 객체에서 주체로 주체에서 객체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마르크스는 연구방법과 설명방법을 구별했다. 연구방법은 다음과 같은 세단계로 되어있다.
① 소재를 포괄적으로 자기화하고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접근가능한 모든 상세한 부분까지 최대로 그것에 정통한다. ② 이 소재의 상이한 발전 형태들을 분석한다. ③ 이 형태들의 내적인 연관을 추적한다. 즉 소재의 상이한 발전형태들의 통일을 규정한다."
"과학이 서술의 출발로 삼는 것은 연구의 결과이며 소재를 비판적 과학적으로 자기화한 결과이다. 그러한 서술의 시작 즉 문제의 과학적인 전개의 시작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는 연구를 시작할 때는 알 수 없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상품의 분석에서 시작된다. 상품이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이며 그것의 전개가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적인 내부구조를 재생산할 추상적인 싹이라는 인식, 즉 이러한 서술의 발단은 연구의 결과이며 소재를 과학적으로 자기화한 결과이다.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절대적 현실’이다. 왜냐하면 상품은 모든 규정들의 통일이며 모든 모순의 씨눈이기 때문이다. "
"연구의 시작은 자의적이지만 서술은 사상의 개진이다. 왜냐하면 서술은 사상을 그 필연적인 내적발전과 전개 속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회-인간적 현실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방법으로서의 유물변증법은 정신적 가공물이 지니는 현세적인 핵심을 찾는 것이 아니며, 문화적 현상을 경제적 등가물로 귀속시키거나 문화를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하는 것도 아니다. 변증법은 환원의 방법이 아니라 현실을 정신적이고 지적으로 재생산하는 방법이며, 사회적 현상을 역사적 인간의 객관적 활동을 기초로 전개하고 개진하는 방법이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맑스의 방법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논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원칙들 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맑스는 구체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맑스는 "다양성을 통일“ ”수많은 규정들의 총괄“로서의 구체적인 것, 다시 말해서 생생하고 복잡하며 수많은 측면들과 속성들로 이루어진 따라서 단 한번에 인식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구체적인 것이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이 전체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분석을 통해 그것을 개별적인 구성부분으로 분해하고 각각의 개별적인 것들을 그 자체로 탐구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이 구성부분들은 사유속에서 다시 결합되고 또 구체적인 전체는 규정들의 전체적인 풍부함으로 표현된다. 구체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는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사유의 운동을 실재적인 현실에서 생성되는 과정으로 간주하였던 헤겔을 비판하였다. 헤겔은 그가 하나의 “절대이념”이라는 신비적인 형태로 치장하였던 사유를 1차적인 것으로 보고 실제적인 현실을 2차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실재적인 세계가 논리학의 범주들, 사유의 범주들의 발전을 통해서 생성되면 그에 따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맑스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상승은 구체적인 것을 하나의 정신적인 구체물로 재생산하는 사유의 방식을 뿐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의 생성과정 자체는 결코 아니다”고 하였다.
개념, 즉 과학적인 추상은 따라서 객관적인 세계가 인간의 감각기관에 직접적으로 미친 작용을 토대로 해서 성립하는 직관과 표상에 대한 하나의 가공이며 무엇보다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실천적인 적응, 주체의 대상적 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는 인식의 출발점이 추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생생한 직관, 구체적인 것에 관한 직관적 표상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레닌은 객관적 진리의 인식가능성에 관해, 인식은 생생한 직관에서 추상적인 사유로 나간다고 말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맑스는 이 추상에서의 구체로의 상승과 관련하여 바로 상품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자본주의라는 구체를 분석하기 위해 상품이라는 추상을 동원한 것이다. 이는 상품이 자본주의사회의 세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이렇게 적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맨 먼저 부르조아(상품) 사회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대량적이고 가장 일상적이며 헤아릴 수 없이 목격되는 관계, 상품교환을 분석하고 있다. 그 분석은 이 가장 단순한 현상속에서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의 맹아를 폭로한다. (중략) 이 방식은 또한 변증법 일반의 탐구 방법임에 틀림없다. 이미 이속에는 개별은 보편이라는 변증법이 존재한다. (중략) 각각의 개별적인 것들은 수많은 이행들을 통하여 다른 종류의 개별적인 것들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등. 이미 여기에는 자연에 있어서의 필연성과 개념과 객관적 연관등의 요소, 맹아가 있다.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현상과 본질은 이미 이 속에 현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반은 한 인간이다. 슈트스카는 한 마리의 개다. 이것은 나뭇잎이다 라고 말할 때 이미 우리는 일련의 특징들을 무시하고 본질적인 것을 현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켜 하나를 다른 하나에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각각의 임의 명제에서 세포처럼 변증법의 모든 요소의 맹아를 폭로해내고, 그리하여 변증법인 모든 인간의 인식 일반에 고유하다는 점을 밝혀낼 수 있다. (중략) 변증법은 다름 아닌 인식론이다. (중략) 인간의 인식은 직선이 아니라 일련의 원환들, 나선형을 그리고 무한히 접근해 가는 곡선이다. 이 곡선의 각 파편, 부분, 조각은 하나의 자립적이고 완전한 직선으로 전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직선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그 때에서는 늪 속으로 빠지고 만다”

위 인용문에서처럼 직선 즉 파편, 부분만 보는 것은 늪으로 빠지는 꼴, 즉 대상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때문에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과 함께 강조되는 것이 총체성의 개념이다. 여기서 다시 코지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총체성이라는 입장은 현실을 그 내적인 법칙에서 파악하고 피상적이고 잡다한 현상 속에서 필연적인 내적 연관을 밝히려 한다. 이는 잡다한 현상에 머무른 채 현실의 발전과정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험론적 입장에 대립된다.”
“객관적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적 원리는 구체적 총체성의 관점이다. 이는 모든 현상이 전체의 한 계기로서 파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인간의 인식은 나선형의 운동속에서 진행되며 그 속에서는 어떠한 시작도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라고 가정한다. 만약 현실이 변증법적인 구조화된 전체라면,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사실과 사실 혹은 발견과 발견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그리고 부분에서 전체로, 현상에서 본질로 그리고 본질에서 현상으로, 총체성에서 대립으로 그리고 대립에서 총체성으로 진행하는 구체화의 과정일 것이다. 모든 개념들이 상호적으로 운동하고 상호적으로 밝혀주는 이러한 나선적인 총체화과정속에서 비로소 인식은 구체성이 이르게 된다. ”
“변증법적 인식은 단 한번에 구축된 불변의 기초위에 수립된 개념들의 집계적 체계화가 아니라 개념들이 상호침투되고 상호조명되는 나선형적 과정이며 추상성을 극복하는 변증법적 양적 질적 후퇴적 전진적 총체화의 과정인 것이다.”
“총체성의 변증법적 파악은 부분들이 내적으로 상호작용하고 부분들 자체 사이에 그리고 부분과 전체가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것만 의미할 뿐이 아니라, 전체가 사실들 위에 군림하는 추상 속에서 화석화될 수 없다는 것도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로 부분들의 상호작용속에서 전체는 자신을 전체로서 형성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현실을 관계들과 사실들과 과정들의 총합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들을 형성하는 과정이며 이들의 구조이고 발생이기도 한 전체로서 파악하고 서술한다. 전체의 형성과정, 통일의 형성과정, 대립물의 통일과 그 발생 등은 모두 변증법적 전체에 속한다. ”
“총체성이란 이미 완성되어 있어서 나중에 내용이 채워지고 부분들의 속성과 관계가 채워지는 전체가 아니다. 오히려 총체성은 자기 자신을 구체화하며, 이 구체화는 내용이 형성과정일 뿐만 아니라 전체의 형성과정이기도 하다.”

흥미롭고 또한 놀라운 것은 이러한 현상과 본질의 관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실천 중요성,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총체성이라는 방법론이 비고츠키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비고츠키는 [방법의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적응과 역사적 발달은 동물의 적응과 역사적 발달과는 다르다. 인간의 심리적 발달은 인류의 일반적인 역사적 발달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연구 방법은 엥겔스를 따르고 있는데.. (중략) 엥겔스에 의하면 역사적분석에서 자연주의는 자연만이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자연적 조건만이 역사적 발달을 결정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접근법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또한 자연에 영향을 주며, 인간은 자연속에서 자신의 변화를 통해 생존을 위한 자연 조건들을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고래의 겉모양은 포유류보다는 어류에 가깝지만 그 생물학적 특성은 상어보다는 소나 사슴에 가깝다. .. 어떤 문제의 발달적 연구는 그것의 기원, 즉 그것의 원인-동태적 기초를 밝히는 것이다. 표현형은 대상의 현재 특성과 겉모습에서 직접적으로 시작하는 분석이다. 이 두가지 견해를 혼돈해서 생겨난 심각한 심리학 오류들이 많이 있었다.”
“외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 살 반에서 두 살 사이의 아동의 말은 겉모양은 성인의 말과 비슷하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스턴과 같은 연구자들은 18개월 된 아기가 기호와 의미 사의 관계를 이미 인식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발달적 관점에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현상을 같은 범주로 분류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중심적 말은 그 겉모양이 내적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발달적 관점에서는 내적 언어와 같은 범주로 분류돼야 한다.”
“어떤 것을 역사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변화의 과정속에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방법의 기본적 요구사항이다. 연구 속에 연구 대상의 모든 발달단계와 변화의 과정을 포함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의 특성, 그것의 본질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움직임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심리학적 분석의 목표이자 핵심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대상분석에 반대되는 과정분석 2) 과정의 외적 모습만을 기술하는 것에 반대되는 실제적인 인과-동태적 관계를 밝히는 분석, 즉 기술적 분석이 아닌 설명적 분석 3) 근원으로 되돌아가 주어진 구조의 발달을 모든 측면에서 재구성하는 발달적 분석, 발달의 결과는 기술심리학이 생각하는 순수한 심리적 구조가 아니며, 연상 심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기초적 요소들의 단순한 합도 아닐 것이다. 발달의 결과는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질적으로 새로운 형태가 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고츠키가 맑스가 [자본론]에서 상품을 분석의 단초로 삼았듯이 [생각과 말]이라는 저작에서 인간의식의 분석의 단초로 ‘낱말’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전형적인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방법론에 다름 아니다. 마이크 콜은 각주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연구에서 세포를, 가치가 상품에서 구체화되는 방식 속에서 발견했듯이 비고츠키는 자신의 세포를 낱말 속에서 구체화되는 의미에서 발견한다”
실제로 비고츠키는 [생각과 말] 7장 ‘사고와 말’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낱말과 사고사이의 내적관계는 선행조건이 아니라 인간 진화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요소로 분해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언어적 생각 전체를 성분단위들로 나누는 분석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요소와는 다르게, 연구되는 현상의 전체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속성들과 구체적이고 단일한 측면과 관련이 있는 주요한 구성부분인, 분석의 산물을 뜻한다. 또한 요소와는 다르게 그들은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며, 분석의 대상이 되는 전체의 속성을 잃지 않고 전체가 가진 속성들의 가장 단순하고 최초적인형태들 담고 있다.”
“우리는 생각과 말의 전체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여주는 단위를 낱말의 의미에서 발견했다. 낱말의 의미는 두 과정으로 분해 될 수 없는 전체의 속성을 담고 있는 단위로서 우리는 이를 더욱 분해할 경우, 말의 현상을 나타내는지 혹은 생각의 현상을 나타내는지 단정할 수 없다. 의미가 없는 낱말은 낱말이 아니다. 그것은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즉 의미는 필수적이고 변별적인 신호이며 낱말 자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그 내적 측면에서 바라본 낱말 그 자체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바라본 낱말의 의미는 오직 일반화 혹은 개념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일반화와 낱말의 의미는 동의어이다. 모든 개념의 형성은 가장 특수하고 매우 실재적이며 가장 명백한 사고 작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낱말을 의미를 생각의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 토대를 가졌다”
“생각과 말의 연구에 제공하는 새롭고 본질적인 사실은 낱말의 의미가 발달한다는 것이다. 낱말의 의미가 변화하고 발달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생각과 말에 관한 이전 이론들의 토대에 놓인, 말의 의미가 영속하고 변화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리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이해하는 것은 낱말이 주는 친숙한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마음에 나타나는 연합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사로를 낱말로 표현하는 것은 동일한 연합적 경로를 통해 사고에 표상된 대상들로부터 그것의 언어적 지시물로의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대부분의 경우 낱말과 낱말이 지시하는 대상은 통합된 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두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일반적인 구조적 연결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것은 낱말 자체에 특정한 어떠한 것도 그 안에 포한하지 않는다. 모든 두 개의 대상, 예컨대 막대기와 과일 또는 낱말과 그것이 상징화하는 대상은 동일한 법칙에 의해 단일한 구조안에서 모아진다.”

이상에서 변증법의 주요한 방법론과 그것이 비고츠키의 저작에서도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것은 인식의 과정에서 변증법 즉 부정의 부정으로 알려진 지양과  그것이 비고츠키의 저작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이다. 이를 다음에서 다루겠다.


6. 언어의 이중성과 변증법적 지양

언어는 인간의식의 발달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체로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며, 언어는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다. 이 제도화된 체계의 규칙들은 우리의 언어가 의미를 지니도록 배려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규칙들은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규칙들을 이해하거나 인식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말하는 행위로의 언어의 경우, 말하는 행위는 항상 말하는 자와 듣는자의 상호작용이고, 언어논리의 근본적 규칙들은 공동적 이해의 간주관성을 배려한다. 언어행위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관계는 사회적이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언어의 이중성에 착목해야 한다. 즉 소쉬르가 지적했듯 “구조를 지닌 규칙체계로서 언어(langue)”와 “말하는 것 또는 말하는 행위로서의 언어(parole)"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규칙체계로서의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다. 이는 곧 언어가 사회적 규정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제도화된 규칙체계로서의 언어는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할 때 우리는 항상 역사적으로 제약된 구체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언어변증법의 한 측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시에 우리는 실존하는 제도화된 언어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볼로시노프는 이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주제와 의미를 구분하고 있다. 주제는 생성과정의 주어진 게기에 적응하려고 시도하는 복합적이고 동태적인 부호의 체계이다. 의미는 주제의 실현을 위한 기술적 장치이다.”
“이 장치는 언어 사용자가 공동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수한 어떤 것을 표현하려는 어떤 것은 다른 것과 공통된 성질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이 공통된 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특수한 어떤 것에 의해 - 화자의 구체적 상황에 의해 묘사되어야 한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현실”과 관계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제시되는 “현실”의 묘사들은 다양한 변형태를 낳는다. 그러나 일정한 범위안에서 이 묘사들은 동일해야 되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전혀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

규칙체계로의 언어와 말하는 행위로의 언어를 구분하는 것은 비고츠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소쉬르를 인용한 규칙체계의 언어는 비고츠키의 ‘글말’에 말하는 행위의 언어로 비고츠키의 ‘입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비고츠키는 이 둘이 그 발달에서 다른 경로를 가진다는 것을 논증했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 6장 ‘아동기 과학적 개념 발달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장이 제기된다.

“연구는 글말의 발달이 입말의 발달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두 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유사성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외적이고 증상적이다. 글말은 입말을 문자적 기호로 번역하는 것 이상이다. 글말을 숙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쓰기 기능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일단 글말의 이러한 기제들이 학습된 이후에는 글말이 입말만큼 풍부하고 발달될 것이며 번역판이 원본과 유사하듯 글말과 입말이 서로 닮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글말의 발달에서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글말은 완전히 고유한 발화 기능이다. 그 구조와 기능하는 양식은 내적 발화의 구조와 기능 양식이 외적 발화와 다른 것과 같이 입말과 다르다. 글말은 그 발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어서 조차도 높은 수준의 추상화를 요구한다. 글말은 음악적 억양과 표현성을 가지 않는 즉 일반적으로 소리의 측면을 갖지 않는 언어이다. 글말은 입말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물리적 재료를 갖지 않는 생각과 표상의 언어이다.”
“입말을 통하여 어린이는 객관적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의 높은 수준의 추상을 획득하였다. 글말을 통하여 어린이는 새로운 과업에 당면하게 된다. 어린이는 말 자체의 물리적 측면으로부터 추상화를 해야 한다. 어린이는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이 표상을 사용하는 추상화된 말로 이동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추상적 사고가 지각적인 사고와 다른 것과 똑같이 글말은 입말과 다르다.”
“글말은 다른 측면에 있어서도 입말에 비해 더욱 추상적이다. 그것은 대화자 없는 담화이다. (중략) 글말은 담화 -독백이다. 그것은 흰 종이와의 대화이며 가상의 개념화된 대화자와의 대화이다. (중략) 글말은 어린이에게 이중의 추상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발화의 음성적 측면으로부터 추상화와 대화자로부터의 추상화를 요구한다. 소리가 결어된 발화는 어린이들에게 대수가 산술보다 어려운 만큼이나 입말보다 어려울 것이다. 글말은 발화의 대수이다. 그것은 새롭고 더 고차적이며 산술적 사고를 뛰어 넘는다.”
“글말은 입말보다 더욱 의지적이다. (중략) 입말과는 달리 글말에 있어서는 어린이는 낱말의 음성적 구조에 대해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분해하여 의지적으로 시각적 기호로 재구성해야 한다.”
“글말은 말의 가장 확장된 형태이다. 입말에서 생략될 수 있는 것들 조차도 글말에서는 명확이 되어야 한다. 글말은 다른 이에게 최대한 이해가능 하도록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완전히 펼쳐져야 한다. 최대한 압축된 내적말(즉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부터 최대한 확장된 글말(즉 다른이를 위한 말)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는 의미 조직의 자발적 구성에 있어 대단히 복잡한 조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글말의 기호와 사용은 어린이에 의해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동화된다. 반면 입말은 무의식적으로 학습되고 사용된다. 글말은 어린이가 더욱 지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그것은 말하는 과정 바로 그 자체에 대한 의식적 파악을 요구한다.”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보다 중요한 변증법적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다. 비고츠키는 “내적말로부터 글말로의 전이”라는 표현을 쓴다. 즉 인간의 의식발달 고등정신의 형성과정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에서 다른 이를 위한 말로 전이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왜 타인에게 즉각적으로 말을 하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말을 하는 과정이 필요할까? 그리고 이것이 도대체 인간의 고등정신의 형성과정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의 [변증법]의 다음 주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식” 즉 이미 소유하는 어떤 것과 “인식” 즉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지식의 1차적 의미로 우리는 어떤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숙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반드시 설명할 수가 있는 능력이 없이도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를 운전한다. 우리는 그저 “안다” 라는 의미에서 지식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지식의 2차적 의미는 당면한 것, 자명한 것, 명백한 것으로 현상한 것에 관하여 깊이 고찰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가 숙지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게 행동하는 경우, 어떤 외국인이 우리의 모국어를 틀리게 말하는 경우를 들을 때 우리는 것을 정정하고자 한다”
“지식의 3차적 의미는 우리가 “인식하다”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에 부합되는 의미이다. 그것은 지식생산의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앎의 한계 및 문제화된 앎의 한계를 능동적으로 극복하도록 해 주는 과정이다.“
“지식의 4차적 의미는 지식생산의 생산물은 새로운 통찰, 새로운 이해나 개념파악이다. 앎의로서의 지식은 문제화된 앎으로 이끌어지는 반성적 고찰을 통하여 의문에 붙여질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새로운 지식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리고 지양을 통하여 생산되는 인식과정, 즉 우리의 개인적 지식의 기존한계를 뛰어넘는 인식에 대해 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통합될 경우 우리의 일상적 앎의 일부가 되는 통찰로 이끌어질 수 도 있다.”

단순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앎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통찰로 이끄는 과정 바로 여기서 지양이라는 변증법적 방법론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지양(Aufheben)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지양은 세가지 구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은 “어떤것을 제거한다”는 의미 또는 “탈범주화한다”는 의미에서 “부정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둘째, 의미는 “어떤것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셋째, “어떤 것을 고양시켜” 새로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인식의 과정은 지양을 통한 부정의 부정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지식생산자로서 주체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낡은 지식과 새로운 인식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낡은 지식은 지양의 토대로서 이바지하고, 이 낡은 지식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새로운 지식속으로 지양과 동시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인식을 산출하려고 하는 자는 그의 출발점을 문제화된 현존태에서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같은 변증법적인 지양이라는 방법론이 비고츠키에서는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비고츠키는 [생각과 말] 4장 생각과 말의 발생적 근원에서 “생각과 말은 다른 발생적 근원을 가진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면서 외적말과 내적말 사이의 이행과정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외적말과 내적말 사이에 ‘자기중심적 말(혹은 속삭이는 말)’ 의 중요성을 착목한다. 비고츠키의 다음 주장을 보자.

“우리는 말이 생리적으로 내적인 것이 되기 훨씬 전에 심리적으로 내적인 것이 됨을 보게 될것이다. 자기중심적 말은 그 기능에 있어 내적 말, 자신을 향한 말, 내적으로 물러서는 과정에 위치한 말, 이미 주변사람들이 반쯤은 이해 할 없는 말, 아동의 행동에서 벌써 깊이 안쪽으로 성장한 말이며, 동시에 생리적으로는 외적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위 인용문에서 자기중심적인 말이 지양의 과정에서 어떤것을 부정하는 동시에 보존하고 있는 지점의 그것에 다름 아님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즉 비고츠키는 외적말에서 내적말로의 전이과정에서 자기중심적인 말을 발견하고 설정하여 인간의식의 발달과정이 변증법적인 지양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논증한 것이다.


7. 나가며

이상에서 우리는 비고츠키가 당시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던 사상 조류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맑스주의 변증법을 체화하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관철시키고 있었음을 부분적이나마 확인 할 수 있었다. 당시 그리고 한동안 소련사회를 지배했던 반영이론에 대해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반영명제는 외적세계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의식속의 반영으로서 표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은 주체와 무관하고 이 주체에 대해 외적으로 실존하는 객관적 현실의 영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현실과 이것에 대한 의식의 평행론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첫째 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주정될 뿐 아니라, 현실과 현실에 관한 우리의 말 사이의 이원론적 분리로 피할 수 없게 된다. 둘째, 이 경우 주체는 시기의 수동적인 수용자로 전락하며, 인식의 근본범주로서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부정하고 있다. ”

비고츠키의 이론은 인식론에 있어서 맑스의 실천개념을 의식발달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강조함으로써 더욱 풍부히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사고와 말]이라는 책 제목에서처럼 인간의식의 발달과정에서 언어의 역할을 인간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반영론의 한계를 넘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세계와 관계 맺기 위하여 주체는 그의 지각을 비로소 의미 있게 해주는 언어를 소유해야 한다. 언어의 소유란 간주과정을 전제하기 때문에 관계정립의 제 방식은 사회적 사실로서 객관적으로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