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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열공] 레이먼드 윌리엄스 다시 읽기

2013.10.10 19:33

진보교육 조회 수:1777

[열공]
레이먼드 윌리엄스 다시 읽기

김형숙 / 진보교육연구소 문화분과

  껍질을 벗겨낸 책에는 붉은 색 거죽에‘The Long Revolution’이라는 흑색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글자 끄트머리에 중절모 쓴 남자의 실루엣이 종결점 마냥 찍혀있고. 기나긴 혁명보다는 장구한 혁명이 훨씬 본래의 의미를 살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집어든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스터디라는 다소 강압적인 장치 때문이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21~88)는 영국 좌파 전통의 진보적인 정치평론가이자 문학 및 문화연구가이다. 리비스(F.R. Leavis)의 실천적 비평을 이어받은 그는『문화와 사회Culture and Sociology: 1780~1950』(1958),『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1961),『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1962),『텔레비전Television : 기술과 문화 형식』(1974),『키워드Keywords : 문화와 사회 관련 용어』(1976),『마르크시즘과 문학Marxism and Literature』(1977),『문화사회학The Sociology of Culture』(1982) 등의 저서와 소설, 희곡, 오웰의 전기,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관련 논평들을 통해 영국의 현대 문화연구 및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웨일즈 지방의 철도 신호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1946년부터 15년간 옥스퍼드대학 개별교육위원회(성인교육단과 노동자교육협회의 연합기구)의 강사로 일하며 노동계층을 대변하는 개혁적 좌파로 활동했다. 영국의 루카치로 불리기도 했던 윌리엄스에 대한 국내 연구는 주로 영문학에서 문학 비평 및 문화유물론적 접근이나 언론학에서 텔레비전 및 커뮤니케이션론에 집중되어 있다.
  송승철의 말을 빌자면 이론 영역에서 윌리엄스는 거의 죽은 개나 마찬가지다. 포스트구조주의시대의 이론가 가운데 그의 유산을 물려받으려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다들 적당히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매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의 문화이론을 이렇게 던져두어야 할까?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흔히 문화주의자로 경험론자로, 또는 애매하고 추상적인‘육체없는(disembodied)’문체 이는 핵심적 발언이 나와야 할 순간에 저자가 매우 애매하고 추상적인 목소리로 말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리비스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를 사회주의적 전망으로 극복하려고 했고, 그러면서도 맑스주의적 색채를 띤 용어는 피하려 했던 그의 특이한―‘고독한’―위치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흔히 말해진다. 송승철,「기나긴 혁명 : 왜 윌리엄스로 돌아가야 하는가」,『안과밖』24호, 영미문학연구, 2008. 참조.

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그는 경제결정론적이고 경직화된 문화에 대한 속류 맑스주의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문화를 사회적인 물질적 실천으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문화 자체의 자율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문화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일상적인 것이다.
  윌리엄스에게 문화는 일상적인(ordinary) 것이며 공동의 것이다. 공동의 문화(common culture)는 소수 엘리트의 신념이 일반적으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의미와 가치의 명확한 표현에 전체 구성원이 참여해서 얻는 조건의 창출을 의미한다. 따라서,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의 조각이 다른 사람에게 단순히 확장(교육)되어 공동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면 이는 공동의 문화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구성원이 생활방식을 만들어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공동의 문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생물학자 영(J. Z. Young)의 견해-우리의 인식행위 자체가 이미 창조적 활동이다-를 원용하여,‘창조’를 특정한 예술 활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에 적용되는 일반 원리로 간주한다. 따라서 개개인이 일상적인 의미에서‘볼 수’있기 위해, 그리고 묘사하기 위해 문화의 규칙들을 배우는 것도 창조 행위가 된다.
  여기서‘창조적(creative)’이라는 것과‘총체적인 생활방식(whole ways of life)’이라는 문화의 두 가지 의미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개념 속에 포괄된다. 그에게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단순히 전달만이 아닌 수용과 반응이며   '공동체의 이론' 이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묘사하고 의사소통하는 수많은 방법들 중의 하나이며, 대부분의 예술이란 분명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발전시킨 것이다-몸짓에서 춤이 나오고, 연설에서 시가 나오듯이. 그러나 묘사는 의사소통의 한 기능이며, 우리가 예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묘사하여 실현하고(사실 이 묘사란 경험을 의사소통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묘사의 생물학적 목적인, 다른 유기체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생생한 관계를 보아야만 한다. (p.58) R. Williams, 성은애 역,『기나긴 혁명』(1961), 문학동네, 2007. 앞으로 이 책에서 인용한 부분은 페이지 수만 표시하겠음.


  이처럼 예술을“창조적 발견과 커뮤니케이션(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자‘삶의 권리’) 이라는 일반적인 인간적 과정 중의 한 특수한 과정”으로 간주함에 따라 예술과 일상적 사회생활은 서로 연결된다. 인간 공동체는 공동의 의미와 커뮤니케이션의 공동 수단을 발견함으로써 성장하고, 개인의 창조적 묘사는 관례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과정의 일부로서 이를 통해서 공동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수단들을 공유하고 활성화할 수 있다.

   만약 사회주의가‘일’과‘삶’의 구분을 받아들여‘삶’을‘여가’나‘개인의 이해관계’로 치부해버린다면, 정치를 공통의 결정과 행동과정이라기보다‘정부’로 본다면. 교육을 체제를 위한 훈련으로 보고, 예술을 식사가 끝난 후의 감사기도 정도로 본다면 (아마도 훈련을 더하고 기도를 길게 하자고 제안할지는 모르지만), 사회주의가 이런 식으로 제안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본주의 정치 체제의 후기 형태이거나 산업 생산의 체제를 둘러싼 좀 더 효율적인 인간조직일 뿐이다. (p.186)

  전반적으로 사회적인 현실 관계들은 전체적인 결정 체계가 넘어갔다 하더라도 계속 나타난다. 왜냐하면 결정의 체계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현실 속의 물질적, 관습적 환경 속에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p.192)

  경직된 맑시즘의‘토대-상부구조’에 대한 도식적 해석을 비판하고, 문화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사회적 물적 활동이자 과정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윌리엄스의 문화유물론적 시각이 포착되는 부분이다. 그에게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직조되는 것으로, 정치와 경제를 넘어서는‘결정’과 (삶의)‘유지’, 그리고 교육 및 생식과 양육 윌리엄스는『기나긴 혁명』에서 경제, 정치, 문화, 가족과 같은 용어를 부양, 결정, 의사전달, 생식과 양육 따위의 생경한 어휘로 대체함. 다양하고 변화 가능한 환경에서 삶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경제를 (생산·분배가 필수적인) ‘유지’ 시스템이라고 간주함.『기나긴 혁명』p.187. 각주 참조.
이라는 일상의‘총체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곧 문화혁명이고, 사회체제 전반의 민주주의 변혁을 이끄는 동인(agent)인 것이다.

  문화 분석 : ‘감정의 구조 (the structure of feeling)’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구조의 결합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나 할까? ‘감정의 구조’는 그가 구체적인 문학 작품의 비평 과정에서 도출해낸 것으로 그의 문화 분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된다. 그에게 문화이론은“전체적인 삶의 방식에 존재하는 요소들의 관계에 관한 연구”였고, 문화 분석은“이러한 관계들의 복합체인 사회 조직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p.91)였다.
  그런데 특정한 시대의 살아있는 경험 속에는 모든 요소들이 용해되어, 복합적인 전체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부가 되어 있으므로,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체감하는 것, 곧 어떤 활동이 하나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
  감정의 구조는 사회적 성격이나 문화적 패턴이 아닌, 오히려“이러한 것들이 체험된 실제적 경험에 대한 감각”이다. 구조라는 말이 암시하듯 견고하고 분명하지만 우리의 활동 중 가장 섬세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서 작동하는, 이른바“한 시대의 문화”(p.93)인 것이다. 다소 추상적이던 이 개념은 후기로 갈수록 "사회적, 물질적 성격을 띠는 것이면서도 완전히 명료하고 규정지어진 활동으로 자라나기에 앞서 태아적 국면에 있는 일종의 정서 및 사고”를 포착해내는“현재적인 실천적 의식”(『이념과 문학』;p.166) R. Williams, 나영균 역,『이념과 문학Marxism and Literature』(1977), 문학과 지성사, 1982.
이자“구조를 지닌 하나의 형성물”로 정교하게 표현된다.

  모든 실제의 공동체에서 그것[감정의 구조]은 매우 심층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소유되고 있는데, 그것은 의사소통이 의존하는 기반이 바로 감정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세대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이 물려받은 독특한 세계에 대응하여, 추적할 수 있는 수많은 연속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따로따로 묘사될 수 있는 그 사회조직의 많은 측면을 재생산하지만, 그들의 삶 전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다르게 느끼며 그들의 창조적인 반응을 새로운 감정의 구조로 형성해낸다. (pp.93~94)

  감정의 구조가 용해물[사회적 경험이 용해 ‘용해(solution)' 는 토대-상부구조 도식에 따른 기계적인 반영(refrection) 이론에 비판적인 윌리엄스가 즐겨 사용하는 어휘로, 복합적인 총체로서의 문화 형성물을 언급할 때 주로 등장함.    
된 것]로서 관계를 맺는 우선적인 대상은 부상적 형성물들(비록 이것들이 빈번히 낡은 형태들 내부에서의 수정 내지 부조화라는 형태로서 존재하기는 하지만)이다. …… 그것은 구조를 지닌 하나의 형성물로서 의미적 가용성에 바짝 접근해 있는 탓에 특정한 표현법들-새로운 의미표상들-이 물질적 실제 속에서 발견되기까지 하나의 앞선 형성물로서의 특징을 많이 지닌다. (『이념과 문학』; p.168 )

  그런데 왜 하필‘감정(feeling)' 인가? 그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그 까닭은“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보다 정형적인 개념들과 이 개념[감정]을 뚜렷이 구분하기”(『이념과 문학』;p.165) 위해서였다. 기계적인 반영론과 형해화된 이론에 비판적이었던 윌리엄스는 체험의 직접성은 추상화되는 순간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입장에서 감정의 구조에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이 부분은 그가 경험주의적 오류에 침윤되어 있다고 비판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체험을 재현보다 앞세우는 구도는 오히려 현실 문화 분석에서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 대목은 그가 알튀세로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비판적으로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와 알튀세 사이의 이데올로기와 문화 개념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은 별도의 정치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므로 여기서는 그가 문화유물론을 전개하면서 알튀세를 비판했던 지점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데 그친다.

  모든 제도의 총합이 곧 하나의 유기적 헤게모니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헤게모니적 과정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순과 미해결의 갈등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작용으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장치가 가변적이긴 하나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헤게모니의 전반적 과정은 훨씬 광범위하며, 상당히 중요한 측면에서 자생적이다. (『이념과 문학』; 149 )
  
“삶의 현실적 조건들에 대한 개별 주체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으로 이데올로기를 정의함으로써 내부에 문화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의 한 기구로서 문학, 예술, 스포츠 등을 ‘문화’ 라고 칭함.
를 포섭하는 알튀세에 반해 윌리엄스는 실현된 의미화 체계로 이루어진 삶의 전체 방식을 포괄하는 문화라는 역동적인 장에서 하나의 추상적인 범주로 이데올로기(“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의 특징적인 믿음 체계”)를 바라본다.

  문화적 실천
  레이먼드 윌리엄스에게‘문화’는 미학적이거나 인본주의적이 아닌 철저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국가나 정부 또는 권력투쟁으로 표상되는 오염된 정치가 아닌 평등에 입각한 민주주의-랑시에르의 말을 빌자면,‘몫이 없는 자들’도 참여하는-의 실천이다. 그의 문화이론은 철저히 현실적인 역사적 고찰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검증도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맑시즘의 토대-상부구조에 대한 도식적 이해로 문화에 대한 구성적인 성질이 약화되고 도구적인 관점이 강화됨에 따라 문화와 사회의 물질적 삶과의 분리가 변형된 상태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비판하며 생산력의 인간적 해석을 통해 문화의 물질성을 회복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의 삶이 곧 문화라는 그의 문화 개념은 이후 비판적인 문화연구그룹-폴 윌리스(Paul Willis), 딕 헵디지(Dick Hebdige) 등-에 발전적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P 톰슨의 비판처럼 윌리엄스의 문화 분석에는 사회 성격들 사이의 정치·경제적인 계급투쟁의 흔적이 없으며 온화한 상호작용에 가깝다. 그리고 분석의 핵심 도구인‘감정의 구조’역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공통적인 체험을 한 세대 간의 공유하는 정서와 사상, 느낌의 구조로 진술되고 있으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 그리고 헤게모니와는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명쾌하게 설명되고 있지 못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개념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계급’을‘구조’나‘범주’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형성체로 보는 E.P 톰슨은『영국노동계급의 형성』중‘노동계급의 형성’을 논하면서‘감정의 구조’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감정의 구조’를 문화 분석의 도구로 정교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인지과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기호학의 연구 성과들이 세 축으로 결합된다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해 볼 일이다. 온갖 것이 용해되어 있는 현실에 천착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윌리엄스의 문화론에서 교육과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대한 민중의 전유 가능성과 현실 문화 정책에의 개입 방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장구한 문화적 실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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