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담론과 문화]1
음악으로 생각하기, 생각으로 음악듣기 : Daniel Lanois의 [Death of a Train]  - 통한의 아메리카인디언사

이성우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음악이야기
다니엘 라노이(Daniel Lanois)는 캐나다 퀘벡주에서 태어났다. 라노이라는 이름에서 프랑스계임을 알 수 있지만, 그의 몸 속 일부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다니엘 라노이는 유복한 음악 가문에서 자랐으며, 양친 모두 음악에 조예를 지니고 있어 라노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라노이는 10대 후반에 개인 스튜디오 차려 놓고 음반 제작 활동에 몰두했다. 권위 있는 팝 음악지 [롤링 스톤즈]는 다니엘 라노이를 80년대 음반 제작자 중 가장 비중 있는 인물로 꼽은 적이 있다. 라노이는 자신이 몸담았던 그룹 U2와 Peter Gabriel 그리고 Bob Dylan의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Death of A Train]은 라노이의 1993년 앨범 [American Edition]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다니엘 라노이의 색깔과 음악적 역량이 잘 발휘된 비범한 곡이다. 사운드의 전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가사가 심상치 않다. 노랫말의 배경이 너무나 궁금하여 ‘정보의 바다’를 몇 번이고 뒤졌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가사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곡이 수(Sioux)족과 관련된 아메리카 인디언의 저항과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 Hey, there, captain, is that you. Could you tell me, tell me what to do. I've been twenty years on that Sioux line. Now we don't ride your train no more.
이봐요, 거기 대장님 아니신가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 좀 해 주세요. 저는 20년간이나 수(Sioux) 라인을 타왔건만, 이젠 더 이상 당신의 기차를 타지 않겠어요.

여기서 기차는 인디언 전사단에 대한 메타포인 듯한데, 캡틴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수(Sioux)에는 백인과의 항전에서 지혜와 용맹을 떨쳤던 훌륭한 추장이 많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씨팅불(Sitting Bull)이다. 그의 영도 하에 수 족은 생존을 위해 백인과의 처절한 싸움을 전개해 나간다. 씨팅불의 영웅적인 삶과 고향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있었던 수 족의 비극적인 최후는 대대손손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Death of A Train]의 배경엔 이 이야기가 연관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비극의 시작
인디언의 전사(戰史)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찬란한 그들의 무용이 백인의 간교한 술책과 가공할 폭력에 의해 피로 얼룩질 때 흥미는 전율과 분노로 바뀐다. ‘개화’ 또는 ‘진보’라는 미명하에 순수의 땅을 유린한 백인의 폭력과 야수성은 문명과 야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정말이지 인간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지구란 조그마한 별에서 인간에 의해 벌어진 끔찍한 일들이 이다지도 많은가 하는 충격과 함께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하지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한줄기 빛은 오히려 불편으로 다가갈 지 모른다. 모르면 편안한 것이 인생이겠으나, 빛을 거부하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없으며 무지는 필연적으로 죄로 연결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간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인간 백정, 콜럼부스를 위대한 모험가로 윤색하여 아이들에게 영웅이라 가르쳤으며, 노예 상인이자 인디언으로부터 도둑질 한 땅으로 자손대대 부를 축적했던 앤드류 잭슨 - 제7대 대통령으로서 20달러짜리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 - 같은 인물들을 프론티어 정신의 화신으로 숭상하지 않았던가? 또한, 수많은 인디언의 주검을 깔고 서 있는 [큰 바위 얼굴]이 오만의 극치임을 모른 채 우리는 저 뻔뻔스런 ‘나다니엘 호돈’에게서 감동을 찾으려 했다. 아메리카를 바로 알자. 아메리카를 제대로 읽으면 미국을 알게 되고, 미국을 바로 알면, 세계의 실상이 보인다. 아메리카를 읽자. 과거부터 읽자. 과거를 알면 현재가 보인다. 알다시피, ‘백인 악마들’에 의한 아메리카의 비극은 먼저 남쪽에서 시작되었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듯이, 아메리카는 백인의 땅이 아니었다. 또한, 콜럼부스가 발견한 땅은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었기에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하는 말들도 가당치 않다. 역사의 날조는 용어의 날조에서 시작한다. 콜럼부스가 그들을 인디언으로 명명한 - ‘Indian'은 ’India(인도)'의 고유형용사이다. 1492년, 콜럼부스는 자기가 도착한 바하마 제도가 인도인 줄 알았다 - 이래 지금까지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불러왔건만, 양심이 있다면 그들을 아메리카 원주민(原住民), 아니 ‘원주인(原住人)’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공인된 모든 역사는 서구인의 역사일 뿐이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인류사의 진보를 가져온 대탐험, 과연 콜럼부스는 위대한 영웅인가? 진보가 있었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콜럼부스가 영웅이고 신대륙 발견이 진보라는 주장은 발견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치가 떨리는 모욕일 것이다. 이는 마치 정신대 할머니 앞에서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과도 같다. 좁은 지면을 통해 콜럼부스를 인류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로 고발할까 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부스! 그에게 꿈이 있었다면,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선량한 사람들에게서 황금을 갈취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주1) 그러나 생각과 달리 히스파뇰라(현재의 아이티)에는 그다지 많은 양의 금이 없었다. 콜럼부스는 최대한의 금을 모으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하루 일정량의 사금채취량을 할당하였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미개인’들에 대해서는 손목을 절단한 뒤 서서히 피 흘려 죽게 했다. 변변찮은 무기 하나 없는 아라워크인들이 스페인 군대를 상대로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섬이라서 도망갈 데도 마땅치 않았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수단은 자살이었다. 비극의 땅에 태어난 아기들도 나자마자 다름 아닌 부모에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동물의 왕국’에서도 구경 할 수 없는 일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더 이상의 황금이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한 뒤 콜럼부스는 이들 ‘미개인’들을 자국의 노예시장에 상품으로 내다 팔기로 했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상륙한 2년만에 25만명의 아라워크 원주민들 중 절반이 학살당하거나 자살로 죽어갔다. 1650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순수 아라워크인은 아이티에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콜럼부스에 이어 코르테스와 피사로에 의해 찬란한 잉카와 아즈텍의 후손들이 아이티 원주민들과 유사한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백인악마들, 은혜를 원수로 갚다
북아메리카에 백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양탐험 시대가 시작된 16세기 초였다. 노르만인, 포르투갈인,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에게 빵과 브랜디를 맛보게 하고 비버 가죽을 얻어가 자국에서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러나 백인 선원들은 차츰 원주민들을 하인처럼 잔인하게 다루었고 부녀자들을 욕보이곤 했다. 또한 이들이 옮겨온 천연두는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급기야 분노한 원주민들은 힘을 합쳐 백인들을 몰아내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권총 한 자루로 원주민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북아메리카의 ‘야만인들’은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총의 위력이 아무리 센들 소수의 백인 무리들은 용감무쌍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별 심각한 적수가 못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어 점점 많은 백인들이 이주하면서 평화로운 북아메리카의 땅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1607년, 체스피크만 주변에 영국인 144명이 정착하여 최초의 영국인 마을을 만들고 ‘제임스타운’이라 이름 붙였다. 이윽고 1620년대에는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에 닻을 내렸다. 이들 이주자들은 모피 상인들과는 달리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선택된 인종(WASP)으로서 신으로부터 야만의 땅에 가치를 부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한 청교도들의 눈에 인디언은 미개한 야만인, 심지어 악마의 자식으로 비쳤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디언들은 이방인들을 친밀한 호기심으로 대했다. 인디언들의 눈에 이방인들은 덩치만 컸지 약해빠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안내자 없이는 먼 길을 나서지도 못했고, 험한 날씨나 해충에 대한 저항력도 약했으며, 사냥에도 서툴었다. 인디언은 백인의 고초를 외면하기엔 너무나 정이 많았던 탓에, 허기진 백인들에게 식량을 주었고 사냥하기 좋은 장소를 안내해주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호의를 “야만에 대한 문명인의 당연한 대가”로 생각했다. 실로, 야만인들이라고 부르던 원주민이 없었다면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초기 제임스타운 시절, 1609년과 1610년 사이에, 대기근이 북아메리카에 닥쳤다. 자연의 순리를 알았던 인디언들은 시련에 잘 대처해 나갔지만, ‘무능한’ 백인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백인들 사이에 식량을 구하기 위한 혈투가 벌어졌고, 심지어 사람의 시체나 배설물을 먹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백인들은 노동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자신들의 허기를 채워줄 옥수수와 부를 가져다줄 담배를(주2) 경작할 하인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콜럼부스가 남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디언을 노예로 만들 수는 없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겐 집단사살 같은 공포 분위기의 조성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인이 인디언에게 학살을 자행하면, 똑같은 보복이 되돌아왔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주3)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엉뚱한 인종이 화를 입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 온 것이다.
백인에게 인디언은 야만인이었지만, 흑인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원양어선에 다랑어를 실어 오듯, 백인들은 한 번에 보다 많은 노예들을 배에 실기 위해 갑판 아래에 무더기로 처넣었다. 흑인이 다랑어와 다르게 취급받았던 점은 발 달린 짐승이었기에 몸에 사슬이 채워진 것이었다. 아프리카를 떠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많은 노예들이 자신의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깔고 앉은 채 죽어 있었다. 사인은 산소부족이었다. 타살된 자도 있었는데, 힘센 자가 자신의 몫으로 보다 많은 산소를 챙기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돈에 눈먼 문명인들이 저지른 이러한 만행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말콤 X가 백인들을 ‘백인 악마’라 칭한 것은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그리고 흑인이 아메리카에 상륙한 뒤 어떤 고초를 겪게 되는 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수의 백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신대륙을 탐욕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탐욕은 대부분 잔인한 학살을 수반했다. 퀘이커 교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백인 청교도 집단이 동부 연안에서 아팔라치아 산맥을 넘고 미시시피강을 건너 북부의 미주리강에 이르기까지 근 200년 이상에 걸쳐 인디언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피로 물들이며 지나갔다. 학살의 전모를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그 예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 주오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와 하워드 진의 명저 [미국민중사 A People's History of U.S.A.]를 읽어보기 바란다. 자 이제 이 곡과 관련되었을 법한 수 족과 그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 가보자.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백인과 인디언과의 만남은 시종일관 기만과 배신 그리고 쌍방간의 무자비한 살육과 보복행위로 이어졌다. 백인은 회담 장소에 나온 추장을 무장해제 시킨 다음 사살하거나 독이 든 위스키를 마시게 한 뒤, 군대를 보내 인디언 마을을 초토화시키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정면 대결에서도 싸움의 결과는 거의 백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인디언이 아무리 날쌔고 용맹스러운들, 조직적으로 훈련받고 막강한 화력을 갖춘 미 기병대를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 미합중국 군대를 상대로 유일한 대승리를 거둔 자랑스런 부족이 있었으니 인디언어로 다코타(Dakota), 영어로는 수(Sioux)라고 불리는 부족이다. ‘다코타’란 우리말로 ‘동맹’이란 뜻이다. 다코타 또는 수는 산티와 양톤 그리고 테톤의 3개 부족이 결합한 부족 연맹체였다. 그리고 이들 세 부족의 산하에는 다시 작은 단위의 여러 소부족들이 지파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테톤의 지파인 훙크파파와 오글랄라에는 불세출의 두 전사, 씨팅불(Sitting Bull)와 미친말(Crazy Horse)이 영웅의 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씨팅불과 미친말의 부족은 조상 대대로 미 북부의 대평원에서 물소 사냥을 하며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유목 부족 특유의 호전성과 용맹심에 대해 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캐나다와 인접한 북부 대평원을 주름잡던 수 족에게도 백인은 탐욕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뻗어왔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을 효과적으로 파멸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인디언의 생계는 들소(버팔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백인들은 사냥꾼들을 시켜 들소를 대량으로 살육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 굶주림에 지친 인디언들이 백기를 들고 제 발로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들어맞았으나 목표달성이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다.
1860년에서 1875년 사이에 미국의 들소는 깡그리 멸종되었다. 이 시기는 미국 여러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철도 건설이 활발히 진행되던 것과 일치한다. 철마는 들소 떼에게 가장 무서운 괴물이었다. 그리고 ‘들소 신’의 멸종은 곧 인디언의 멸망을 의미했다. 대평원에서 가죽만 벗겨진 채 썩고 있는 들소의 시체는 그 자체로 자연을 사랑하는 인디언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야기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황금에 눈먼 백인과 생존을 위해 들소와 땅을 지키려는 인디언간의 치열한 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백인 금광업자들은 군대를 매수해 인디언 토벌을 종용했다. 그 선봉에 선 인물은 불패를 자랑하던 미 제 7기병대 소속의 카스터 장군이었다.
야심가에다 자만심이 강하고 용감무쌍했던 죠지 암스트롱 카스터는 남북전쟁 중에 21살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합중국군은 총력을 인디언 토벌에 쏟아 부었는데, 1868년, 카스터는 와시타 부근에 있는 샤이엔 족을 몰살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카스터의 직속 상관 셔리던 장군 또한 인디언에겐 무자비했던 인물이다. 셔리던은 출병하려는 카스터에게 간단명료한 명령을 내렸다. 마을을 불태우고 말(주4)을 없애 버릴 것이며, 성인 남자는 다 죽이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생포해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스터는 일을 더욱 간단하게 처리했다. 남녀를 가려서 사살하는 것을 시간낭비로 생각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이다. 그날 사살된 인디언은 103명이었는데, 그 중 성인남자는 11명뿐이었다. 그날, 무수한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흔들며 개선한 카스터 장군은 영웅이 되었고 인디언에겐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셔리던은 다음과 같은 불멸의 말을 남긴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주5)


내 영혼을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1874년, 수 족 영토 내의 블랙 힐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투기꾼들은 미 병력을 앞세워 제 2차 라라미 협정(1868)때 수 족에게 약속했던 땅에 대한 권리를 무효화했다. 1875년 10월 경, 미 정부는 전체 수 족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전원 보호구역으로 철수할 것이며, 이에 불응 시 응당 대가를 치룰 것이라는 통첩을 보냈다. 이에 대해 씨팅불은 “블랙힐은 우리 땅이다. 우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는 답신을 보내 백인과의 결사항전의 의지를 천명했다. 3월,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미친말을 비롯한 전 수 족의 추장들은 강대한 씨팅불의 부족 훙크파파를 향해 캠프를 옮겼다. 이때 훙크파파 족은 연례행사인 태양춤(Sun Dance)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씨팅불은 사흘 동안이나 춤을 추었다. 씨팅불은 뼈를 깎는 듯한 신체적 고통 이후 나타나는 황홀경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노라고 부족민들에게 말했다.
“이 자들은 귀가 없는 자들이니 나는 이 자들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백인들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는 자들이니 위대한 정령 와칸탕카가 백인들을 인디언에게 내주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미군들이 고개를 늘어뜨린 채 하늘에서 메뚜기처럼 쏟아져 내렸다고 덧붙였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여 미친말이 활약한 두 차례의 전투에서 백인을 물리친다. 특히, 5월 25일 벌어진 리틀 빅혼 전투에서는 인디언 킬러 카스터 장군과 그의 부하 285명 전원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리틀 빅혼에서의 참혹한 패배는 미합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신문지상에서 카스터는 문명의 편에서 싸우다 죽은 순교자로 소개되었다. 백인 사회의 반향은 보다 증강된 군사 행동을 부채질했다. 인디언들도 한 차례의 대승리가 영원한 승리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용감무쌍한 수 족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다름 아닌 굶주림이었다. 1875년을 기점으로 들소가 자취를 감춘 상황에서 수 부족들은 하나둘씩 점차 항복해 갔다. 1877년, 씨팅불은 잔여 용사들을 이끌고 국경을 건너 캐나다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미친말을 찾았으나 미친말의 부족은 미군을 피해 숨어 있던 중이었다.
백인 군대는 미친말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크룩 장군은 이미 투항한 노추장 붉은구름을 시켜 미친말이 투항하면 파우더 강 지역에 주거지역을 정해주겠다는 약속을 전하도록 했다. 붉은구름이 도착했을 때, 미친말의 오글랄라 족 900 여명은 아사 직전에 있었다. 미친말은 부족민을 생각해서 마침내 투항을 결심한다. 미군과 싸워서 한번도 져 본 일이 없는 이 영웅적인 추장이 이제 무기와 말을 압수당한 채 보호구역의 인디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영웅이었다. 크룩은 미친말에게 워싱턴으로 가서 큰아버지(미합중국 대통령)를 만나 뵙자고 했다. 그러나 미친말은 거절하였다. 그는 워싱턴에 다녀온 추장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눈여겨보아 잘 알고 있었다.
8월에 네즈페르세 족이 미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군들은 인디언 용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8월 31일, 미친말은 미군복장을 입고 같은 인디언을 해치기 위해 출전하는 젊은이들을 혐오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부족민을 데리고 파우더 강으로 다시 떠나겠다고 공언한다. 크룩은 미친말이 떠났다는 제보를 받고 8개 기병중대를 풀어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미친말은 체포되어 로빈슨 요새에 감금되었다. 거기서 미친말은 그의 신병을 인도하러 온 경찰을 보곤 깜짝 놀랐다. 그 경찰은 예전에 블랙힐을 팔겠다고 나서는 추장은 죽여 버리겠다고 외쳤으며, 울프 산의 얼음 덮힌 기슭에서 자기 곁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그 용감한 전사, 작은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1877. 9. 5), 미친말은 파란만장했던 서른 다섯의 생을 마감했다. 즉, 좋은 인디언이 된 것이다. 다음날 새벽 미군은 미친말의 부모에게 시신을 넘겨주었다.
1877년 가을, 캐나다의 씨팅불에게로 향하는 인디언들의 긴 행렬이 있었다. 그 중엔 아들의 유골을 가슴에 간직한 영웅의 부모도 끼어 있었다. 부모는 그들만이 아는 장소, 운디드 니(Wounded Knee ; 상처 입은 무릎)라고 불리는 조그만 강가에 자식의 뼈를 묻었다.
씨팅불이 캐다다로 간 뜻은 백인에게 항복하기는 죽기보다 싫었고, 그렇다고 부족민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씨팅불은 그래도 양키들보다는 캐나다인들이 더 인간적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온정의 손길을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캐나나 정부는 이들의 생활고를 외면했다. 1881년, 씨팅불은 미친말이 그랬던 것처럼, 굶주림에 허덕이는 부족민을 보다 못해 보호구역으로 들어갔다. 1883년 이후 씨팅불은 스탠딩 록 주재소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거기서도 씨팅불은 부족 영토 매매 문제에 대한 저항을 벌였으나 별 소득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론이 씨팅불을 주목하고 있었다. 씨팅불은 이미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보호구역을 찾는 사람은 백인이건 인디언이건 모두 씨팅불과의 대면을 원했다. 1883년 대륙을 횡단하는 북태평양 철도 준공식에 초대된 인디언 추장은 씨팅불 밖에 없었다.
씨팅불의 명성과 인기가 날로 상승하고 있을 무렵, 버팔로 빌이란 닉네임으로 통하는 흥행업자 윌리암 코디가 씨팅불을 자신이 이끄는 와일드 웨스트 쇼(주6)에 출연시키고자 교섭을 벌여왔다. 인디언 사무국(B.I.A.)(주7)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위험인물을 쫓아낼 생각에 씨팅불을 설득시켜 버팔로 빌에게로 보냈다. 물론, 씨팅불은 인디언 사무국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대로 갔다. 씨팅불은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인디언의 참상을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 가는 곳마다 씨팅불은 큰 인기를 끌었다. 씨팅불은 쇼를 통해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자신을 졸졸 따라 다니는 굶주린 백인 아이들에게 거의 다 나누어주었다. 그는 소외 받는 백인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백인들은 뭐든지 잘 만들어 내지만 그걸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땅에는 평화를, 사람에겐 자비를
1889년,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해 인디언 보호구역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하던 때에 망령의 춤(ghost dance)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은 워보카란 인디언 주술사가 창시한 신흥종교로서 백인을 몰아내고 인디언 전통을 복구해 줄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예언을 골자로 하였다. 황당무계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메시아란 인디언의 모습으로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니 이 종교는 인디언의 무속 신앙과 백인 프로테스탄트교의 합작품인 듯 하다. 씨팅불은 이 신흥종교가 좀 수상쩍기는 했으나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영험한 통찰력으로 전체 인디언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망을 얻고 있던 씨팅불의 허락 한 마디에 망령의 춤은 전 인디언 지역에 불길처럼 퍼져 갔다. 실의에 빠져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아가던 인디언들이 이 신흥종교를 통해 희망을 되찾으려는 것을 보고 미군 당국은 위기를 의식했다. 당국은 배후의 핵심 인물로 씨팅불을 지목하여 체포를 명령했다. 씨팅불의 제거는 벌써부터 벼르고 있었던 터였다. 씨팅불은 인디언들을 백인 식으로 개조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1890년 12월 15일 새벽, 인디언 경찰 43명이 씨팅불의 침실을 둘러쌌다. 씨팅불은 잠에서 깨어나 의연한 태도로 연행에 응했다. 수많은 수족 전사들이 인디언 경찰을 저지했다. 이들은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인디언 경찰 붉은도끼는 쓰러지면서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씨팅불의 머리를 관통했다.
인디언의 마지막 남은 ‘큰 산’이 무너졌다. 백인을 향해서는 서릿발같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던 호랑이였지만, 부족민에겐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훌륭한 소리꾼(singer)에 늘 다정다감하고 유쾌한 태도로 매력을 발휘했던 사나이,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예언력과 혜안으로 갈길 잃고 방황하던 인디언들에게 한줄기 서광과도 같았던 존재, 그의 이름은 요탕카 타캉카(앉은 소, Sitting Bull)였다.

1890년 12월 28일 아침, 백인사회에서 가장 큰 축제날인 크리스마스가 막 지났을 무렵, 수족의 영토 운디드 니 근처의 파인릿지에서 인디언을 상대로 한 마지막 학살이 벌어질 참이었다. 학살의 주인공들은 리틀 빅 혼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던 제 7 기병대 소속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유산탄을 장전한 기관총까지 지니고서 인디언들을 포위한 후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인디언들은 순순히 응했고 모두 무장해제 했노라고 알렸다. 그러나 미군 사령관은 인디언의 말을 믿지 않고 부하를 시켜 천막을 수색하게 했다. 미군들이 그렇게도 뒤졌지만 고작 소총 두 자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중 한 자루는 신형 윈체스터였는데, 검은이리라는 귀머거리 전사의 것이었다. 검은이리는 자기가 비싼 돈을 주고 산 총이니 못 내놓겠다고 소리쳤다. 실랑이를 벌이던 중 누가 쏘았는지는 모르지만 총성이 울렸다. 때를 같이해 미군의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파인릿지에 있었던 350명의 인디언 중 300명이 사망했다. 미군도 25명이 죽었지만 대부분 동료 미군의 총알이나 유탄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부상자들은 인근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때는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찢기고 피 흘리는 부상자들을 아래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설교단 위에는 큰 글씨가 쓰인 현수막이 있었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겐 자비를.”

== 주 ==
1) 한 인물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파렴치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이들의 위인전에 등장하는 것은 말도 안될 일이다. ‘신대륙’ 탐험 도중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는 콜럼부스라는 인물의 인간 됨됨이를 잘 말해 준다.
   콜럼부스 일행은 스페인을 떠난 지 2개월 동안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가 둥글다는 진리가 일반인들에게 피부로 와 닿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이들은 점점 멀리 갈수록 자기네들이 심연의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불침번을 서고 있던 로드리고라는 선원으로부터 “육지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육지를 발견한 것은 선원 전체의 기쁨이기도 했으나 로드리고에게는 특별히 그것이 자신의 장래를 보장해주는 행운의 발견이었다. 스페인 여왕은 최초에 육지를 발견한 사람에게 연간 10,000 스페인화를 종신토록 연금으로 하사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콜럼부스는 로드리고를 협박하여 자신이 대륙을 발견한 것으로 하여 연금을 가로챘다.
2) 당시만 해도 유럽사회에서 담배는 값비싼 기호상품이었다. 콜롬부스 이전엔 문명사회에서 담배란 것이 없었다. 따라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란 까마득한 옛날이 아니라 최소한 16세기 이후의 어느 시점을 말할 것이다.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니꼬(Nicot)는 담뱃잎을 프랑스 왕비 까뜨린는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에게 바친 덕택에 ‘니코틴(Nicotine)’이란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었다.
3) ‘scalp':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적을 죽인 뒤 머리가죽을 벗겨낸다. 이 이상한 행위는 콜럼부스 이후에 널리 자행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채로 머리가죽만 벗기는 경우도 있는데, 인디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힘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가죽이 벗겨지고도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도 많았다. 물론, 평생을 대머리(?)로 살아야 했겠지만.
   이 이상한 습성 때문에 백인들이 인디언에게 치를 떨었고, 인디언을 향한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문화의 차이‘로 본다. 즉, 인디언들은 영혼불멸을 믿는데, 자신의 손에 죽은 사자의 혼이 머리에 남아 내세에서 자신을 괴롭힐 것을 생각해, 말하자면, 후환을 미리 없애기 위해 ’scalp'를 행하는 것이다. 이로쿼이의 ‘검은 매(Black Hawk)’ 족 추장이 백인과의 전투(아브라함 링컨이 이 전투에 행정장교로 출전했다)에서 패한 뒤 낭송한 항복 선언의 일부를 들어보자.
    ...... 백인들만큼 악한 인디언은 없다. 그런 자는 우리 부족에서 살아 남질 못한다... 백인들은 웃음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악수를 건네고 술을 권했다. 그들은 우리 부족 여자들을 농락했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백인은 우리처럼 사람의 머리가죽을 벗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심한 짓을 한다. 사람의 영혼을 독으로 물들인다......
   추장의 말 가운데 바로 잡을 부분이 있다. 추장은 백인도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겼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버지니아 식민지 시절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로쿼이 인디언은 프랑스 편에 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벤자민 프랭클린, 죠지 워싱턴을 핵으로 한 영국군 측은 인두피에 상금을 걸어 군인들로 하여금 보다 많은 수의 인디언 머리가죽을 벗겨 오게 했다.
4)  콜럼부스가 나타나기 전에 아메리카인들은 ‘말’을 몰랐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말을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인디언에게 말은 ‘성스러운 개’로 불릴 정도로 소중한 가축이었다. 유목 부족은 캠프를 옮길 때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 또 사냥할 때나 전투 시 기동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서 말을 유용하게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이 귀할 때는 말고기를 먹었으며, 심지어 잔인한 백인들이 마을을 침략할 때, 인디언들은 말의 내장을 꺼낸 뒤, 아이들을 그곳에 숨기기도 했다. 말을 다 죽인다는 것은 인디언에게 파멸을 의미한다.
5) 이 말의 유래는 이러하다 :
   코만치 족의 토사위 추장은 셔리던에게 투항하면서, 서툰 영어로 “토사위, 좋은 인디언(good Indian)” 라고 말했다. 자신은 백인에게 적대감 없는 인디언이니 살려 달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셔리던은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었어” 라고 응수했다. 이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셔리던의 부관에 의해 옮겨져서 백인 사회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한다. 당시, “좋은 인디언은 오직 죽은 인디언뿐이다”라는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인디언에게 듣기 좋은 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인디언을 경멸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좋은 인디언은 용감했기 때문에 모두 죽고 말았다”는 뜻이며, 후자의 경우는 “(백인에게) 좋은 인디언이란 죽은 인디언이다. 즉, 모든 인디언은 다 죽여야 한다”는 뜻이 된다.
6) 때는 아직 영화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라서 연극이나 쇼가 최고의 볼거리였다. 이 쇼단은 로데오, 묘기 사격, 인디언과의 싸움 광경을 잇달아 보여주었다. 이 쇼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두 인물은 명사수 리틀 애니 오클과 수 족의 늙은 추장 씨팅불이었다.
7) 보호구역내 인디언들의 동태 감시를 주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이다. 인디언 사무국의 직원들은 부정과 부패, 횡령을 일삼았으며 보호구역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때문에 워싱턴에서 보내진 소량의 배급식량이 원주민들 손에 들어올 땐 더욱 줄어들어 보호구역내에서도 인디언이 배곯긴 마찬가지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4 [해외동향]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의 반정부 시위의 양상과 본질 file 진보교육 2011.04.10 1092
193 [기고] 1.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활동을 위하여... file 진보교육 2011.04.10 817
192 [기고] 2.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그리고 그가 말하지 않은 몇 가지 file 진보교육 2011.04.10 871
191 [열공] 1.비고츠키교육학 실천연구모임 현황과 방향 file 진보교육 2011.04.10 1250
190 [열공] 2. 2011년 진보교육연구소 기획토론회 file 진보교육 2011.04.10 941
189 진보교육39호 목차 진보교육 2010.10.13 1808
188 [권두언] 공교육개편운동으로 반격의 기운을 진출시켜 나가자 file 진보교육 2010.10.13 1428
187 [정세와 전망] 2010년 하반기~2012년 교육노동운동의 과제 file 진보교육 2010.09.29 1644
186 [진단과 모색] 교원평가의 담론지형의 변화와 대안 논의 file 진보교육 2010.09.29 1303
185 [특집] 1. ‘혁신학교사업’ 분석 : 한계와 문제점 file 진보교육 2010.09.29 3971
184 [특집] 2. 공교육개편운동과 혁신학교사업 : 의의와 과제 file 진보교육 2010.09.29 1675
183 [특집] 3. 혁신학교 모델 구상 : 인간 발달 지향 ‘민주공동체’ 학교 file 진보교육 2010.09.29 2179
182 [진보칼럼] 쿠바혁명을 만들고 혁명 쿠바를 위기에서 구한 학교 file 진보교육 2010.09.29 1369
181 [현안]“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2009개정 교육과정 file 진보교육 2010.09.29 1823
180 [초점] 학생의 정치적자유를 허(許)하라 file 진보교육 2010.09.29 1299
179 [기획] 1. 공교육 개편운동의 깃발을 다시 들자 file 진보교육 2010.09.29 1134
178 [기획] 2. 2010년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하반기 사업방향 file 진보교육 2010.09.29 1160
177 [스케치] 청소년 활동가대회 ‘쳇[Chat]’ file 진보교육 2010.09.29 1421
» [담론과 문화] Daniel Lanois의 “Death of a Train” - 통한의 아메리카인디언사 file 진보교육 2010.09.29 1796
175 [담론과 문화] 봉선생 대 깡선생 file 진보교육 2010.09.29 2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