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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지식의 '생산자'로 태어나기: 교사양성에 대한 소고

2003.07.14 10:43

하병수 조회 수:1518 추천:5

교원양성

지식의 '생산자'로 태어나기

하병수 || 참교육연구소 사무국장


문제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

"95%의 비전공교수가 매해 2만5천명의 예비교사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고 있다."

"100명 지원에 10명만이 임용되고 있다."

"90년부터 사범대 학생들은 더 이상 예비교사가 아니었다. 교직으로 진출이 불가능하거나 예비비정규직 교사로 그 지위가 바뀌고 있다."

"예비교사들의 교직관은 '노량진'에서 맡고 있다."

"11과목을 소화해내야 하는 교대생들, 그들은 4년내에 '철인' 11종 경기를 하고 있다."

교원양성과 임용문제를 놓고 흔하게 표현되는 것들이다. '교육'을 모르는 교수들에 의해, 현장과 동떨어진 '론'을 외우며 살다가 결국은 배움의 터전을 등지고 노량진 입시학원에서 교직의 전망을 키우는 예비교사들, 바로 그들이 대한민국의 백년지대계를 짊어지고 있다.

'교대'와 '사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또 하나의 실체가 보인다. 교대와 사대는 현재의 교육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돋보기'다. 예비교사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를 알면, 교육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현주소와 미래까지도 보인다. 이렇듯 교원양성기관은 공교육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교원양성기관의 변화를 말하는 것은 공교육의 변화, 구체적으로 '교사의 역할'과 '학교변화'를 수반한다. 어쩌면 독립적으로 교원양성기관자체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현재 한국교사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권리'는 무엇인가? 제한적 자율을 통한 '참교육'실현도 있지만 한국교사들의 대체적인 권한은 '교육권'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생활지도'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표현하면, 한국의 교사들은 가르칠 내용을 '생산'하지 못한 채 '집행'만 할 뿐이다. 흔히 장학사들이 날마다 읊어대는 교과서의 재구성은 '생산'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가치'의 근본적 변형이 아니며, 국가평가제도에 의해 그 '한계'가 명확하다. 또한 '생활교육'은 지식교육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오래전부터 교사는 주류지식과 주류문화를 전수하는 대리자, 집행자 노릇을 해오고 있다.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적 통제장치로서의 '학교'는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우리나라 교사의 '제한적' 권리는 현재의 교사양성과정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교육과정을 직접 만드는 훈련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150학점중 대부분이 '주류내용학'이며 정서적으로 '방법론'을 중시하고 있다.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지 못한 채 "주류 지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있다. 또한 교과외에 올바른 교직수행을 위한 '교직과목'은 현장과 동떨어진 '론'에 불과하며, 아이들의 '자치'와 '주체성'을 존중하도록 교육받지 못하고 있다.

교사는 '주어진' 교육내용을 잘 전달하고 '무리없이' 생활하도록 잘 통제하고, 학생들의 비판적이고 주체적 활동은 '평가절하'되고 있다. 작금의 도구적 교원노동은 교대와 사대교육과정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사범대 교육과정은 법적 규정 없이 일반대학 교직과정에 맞춰지고 있다. 이러한 부실한 개론수준의 교직과목 이수는 예비교사로 하여금 올바른 학생관과 교직관을 내재화하는 데 있어 제도적 장애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장에 투입된 이후 통제적 생활지도에 철저하게 저항하지 못한 채 그대로 흡수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초임교사시절 아이들에 대해 '체벌'을 가하면서 느끼던 '약간'의 반성적 회의는 금새 '어쩔 수 없는' 통제수단으로 합리화하게 된다. 이것은 '체벌'에 대한 전통적 '논쟁'을 떠나서 교사의 통제를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피동적 존재'로서의 학생관이 내재화되는 과정이다. 피동적 존재로서의 학생관은 교직수행에 있어 많은 한계와 편협함을 드러내게 한다.

예를 들면, '학급회의'가 잘 되지 않는 상황을 놓고 아이들을 원망하기 쉽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을 표현할 줄을 모른다" "자신밖에 모른다." "너무 소란스럽다." "학급회의는 너무 힘들어" 결국은 학생들의 민주적 의사표현의 장을 쉽게 포기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 쉽다. 사실 학급회의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학교안에서 학생들에게 시민적 권리가 전혀 주어지지 않으며 학생회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권리가 없는데 무슨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공식적이고 민주적 의사표현능력은 1주일에 한번 학급회의를 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일상생활속에 거의 매일같이 경험하지 않으면 습관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교무회의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평교사들의 심정과 학급회의에서 침묵하는 학생들의 마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비교사들의 흔들림 없는 투철한 '학생관'과 '교직관'은 현재 일반화되어 있는 행동주의 심리학, 인지심리학 등이 강조하는 방법론적이고 기능주의적 이론을 극복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지배질서'에 그대로 편입시키는 '방법론'을 거부하고 아이들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민주적 사회적 관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교사가 환경을 조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현재 학교에는 학생자치활동을 활성화시키지 못하는 것에보다는 '학업성취'를 높이지 못하고 '자율학습' 정숙을 지도하지 못하는 '행위'에 반성하고 있는 교사들이 많다. 적어도 예비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것'에 답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사회'에 기여하는지?"

"'학교 규칙'이 학생들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충돌하고 있는 지점은 없는지?"

"'권한'없는 학생들에게 '허구적' 민주주의 장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

"학교의 억압적 폭력에 대항하면서 민주적 경험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지?"

 

현재의 교대, 사대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 없다. 그것은 한국 '교육'이 사회관계를 재생산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할 뿐 어떠한 '이의제기'도 권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성'의 허구적 관념에 규정받고 있는 교원양성기관의 탈정치화는 교사로 하여금 '학생'을 사회의 적극적 시민으로 키워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대 / 안

 

우리는 오랫동안 교사에게 교육과정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기를 요구해왔다. '교육과정'은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장이다. 언제나 교사는 '신화적' 교육과정을 의심해야 하며 늘 새롭게 구성하고 창조해내야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주류지식과 주류문화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로하고 새로운 학습상황을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무비판적으로 교육내용을 흡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자신의 경험과 교과서를 의심하도록 해야 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럴 때만이 '학생'을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 '소극적' 시민이 아닌 비판적 주체적 '적극적' 시민으로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헨리 지루의 말대로 교사는 '양심'과 '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변혁적 지성인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무를 갖는 '용기'있는 시민으로 키워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비교사들에게 필요한 능력과 양성교육과정에 있어 개선될 만한 '것들'을 제시해보면,

 첫째,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며,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올바른 사회상은 '풍부한' 교양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비교사들의 자율적 학회활동,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이어야 하며, 비판적 사회학습이 가능한 교양과정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현재 교사양성과정에서 교양과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사대의 경우 30%수준, 교대의 경우는 11개 과목에 이르는 과도한 전공과목 이수로 인해 교양과정은 전무하다시피하다. '사회적 통념'수준의 사회인식이 아니라, 아이들이 누리고 지향해야 할 '사회상'을 내재화하는 것은 교사실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둘째,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흡수하고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문해가 가능해야 한다. 대중문화는 아이들의 '감각'을 잘 드러내주는 긍정성이 있다하더라도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아이들을 생산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생산적 예술 및 문화활동'을 폭넓게 보장해주어야 한다. 현재 지식교육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청소년시기에 필요한 인성과 감성교육을 축소시켜 균형적 인간 발달을 저해하고 있다. 초중등교육과정에 영수국 비중을 줄이고 예능과목을 상대적으로 늘려야 한다. 또한 모든 교과목에 대한 이해를 단순히 암기하는 학습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역사적 이해, 창의력, 상상력, 감수성, 의사소통능력 등 다양한 감각을 이용한 '문화'적 문해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지식습득의 과정이어야 한다. 예비교사들의 '지식'에 대한 접근방법을 다양하게 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대와 사범대 전공에 대한 개념의 틀을 바꿔야 한다. 교사양성기관의 전공은 일반대학의 전공과 구별되어야 한다. 즉, 교육내용학과 교과교육학을 통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 말은 '내용'을 공부하는 것은 항상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일반대학 교직이수과정의 경우 교육내용학과 교과교육학을 완전히 분리하고 있으며, 이것에 준해서 사범대 교육과정이 구성되어 있다.

셋째, 아이들과 관계에서는 일방이 아닌 '대화'적 관계여야 하며 이러할 때 아이들의 경험과 생활을 바탕으로 교육과정이 구성되고 주류사회의 종속으로부터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지식은 사실상 '객관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이라고 표현되는 대부분의 지식들은 그 사회의 지배적 규범에 따른 것이다. 결국 어떠한 지식도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모든 지식은 주관적이며 가치 편중적이다. 근대학교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교사뿐 아니라 학생들 또한 교육과정의 창조활동에 함께 해야 한다. 교육과정은 텍스트가 아니며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매개다. 지식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제기적'이어야 하며, 토론과 의사소통이 허용되는 교실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비교사는 '교육과정'을 '가치'중심으로 사고하고 학생들과의 대화적 관계를 통해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실습'의 기회를 많이 보장받아야 한다. 현재 한 달간 이루어지는 종합실습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교육'적 실습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반나절 실습'등을 통해 양성기관과 현장학교가 결연을 맺고 1주중 반나절을 예비교사들이 고정된 학급에 가서 실습을 받도록 한다. 실습후 반드시 '총화'를 통해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첨 / 언

 

대학이 무너지고 있다.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배우는 것과 상관없이 제한적 노동시장에 몰리고 있다. 민중의 자녀들이 이러한 대학을 다니기 위해 12년 '인생'을 '입시'에 저당 잡혀 살아가고 있다. 입시열풍이 '태아'까지 미치고 있다. 태교를 위해 '수학정석'을 풀고 '성문종합영어'를 되뇌이고 있는 지경이다. '대학'허깨비에 인권이 짓밟히고 나라가 망하고 있다.

더 이상 민중의 '돈'과 선발'경쟁'방식으로 대학을 키워낼 수 없다. 구태를 버리고 새로운 근본을 찾아야 한다. 대학에 식민직화된 12년의 삶을 해방시키고 대학을 통해 사회의 균형적 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공공의 원리'가 지배해야 한다. 국가는 '경쟁'이 아닌 '책임'(특히, 재정)을 가지고 개인을 양성해야만, '학연'과 '서열높이기'등 비효율적 대학경쟁을 줄일 수 있고, 인재의 사회적 책무성을 높여 균형적 사회발전을 달성할 수 있다.

현재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후기중등과정의 통합(즉,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통합)과 대학평준화 논의가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대학평준화를 제기하고 있는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세분화되어 있는 고등학교 2·3학년 교육과정이 대학교 1·2학년 교양과정으로 확대 배치되고 대학교 3·4학년 과정은 전공과정으로 운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원양성과정의 학제변경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전공과정 선택이 2학년때 이루어짐에 따라 교원양성교육과정도 3학년때 시작하도록 할 수 있다. 단, 2년제로는 교원양성교육과정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존의 4년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2+4 운영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대학수학중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실시되고 있는 '교직과정 이수제도'는 폐지될 수 있다.

 

 마 / 무 / 리

 

'한가지 습관'을 기르려면 최소한 200번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철저하지 못하면, 휩쓸리기 십상이다. '능력별 학급편성' '상과 벌' '학습속도 높이기'등 모두가 행동주의 교육철학에 근거해 있다. 예비교사들은 '삐아제'에 익숙해 있다. 이로 인해 교육에 있어서 '문화적 환경'보다 개인의 사회화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인간 발달'의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환경을 중시하는 '비고츠키'를 배우지 않는다. 전통주의적 교사론은 배우지만, 이데올로기, 권력, 계급, 대화, 비판 가능성의 담론을 주장하는 '프레이리'를 배우고 있지 못하다.

학교 현장의 구조적 모순을 밝혀주고 이 시대의 교사가 진정 변혁적 지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200번의 학습과 200번의 실습을 통해 현장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교·사대 교수의 보수성을 벗겨내기 위해 '진보적' 교사들이 교원양성기관의 교사로 임용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독일은 교원양성기관의 교수를 뽑을 때 현장교육경력 10년 이상을 기본자격으로 두고 있다. 교·사대 교육과정 개혁을 위한 '국가기구' 건설과 이러한 기구에 혁명적 지식인의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예비교사들을 단순지식의 집행자로 전락시키고 있는 '임용시험'을 폐지하고, 모두가 유토피아를 꿈꾸며 지식의 생산자로서의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그 일차적 조건이 '책임발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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