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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늦은 감이 많지만, 정말 반갑다

2003.05.03 13:25

송경원 조회 수:1533 추천:4

늦은 감이 많지만, 정말 반갑다

늦은 감이 많지만, 정말 반갑다

[실업계, 얌순이들의 보고서](안재희, 우리교육, 2003) 읽고

송경원 교육이론분과

개인적으로 실업계 고교와 관련한 가지 경험이 있다. 먼저 작년 전교조 모지부 간부연수의 쉬는 시간에 지부 실업위원회 선생님과 짧은 이야기가 오고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실업계 고교의 현재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고 관련 자료를 거의 경우가 없어 대답하기 곤란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기억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역시 모지부 실업위원회 선생님이 실업위원회 구성원들과 학습하기 위한 자료들을 부탁하여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책은 거의 없었고 논문조차 개에 불과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기능주의적인 관점에 있는 논문이 대다수였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을 통해 현장과의 괴리가 심한 한국교육학계의 치명적인 약점이 실업계 고교의 영역에서는 정도가 심함을 확인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다. 학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교육운동진영의 이론 영역에서도 실업계 고교에 대한 관심이 의외로 적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실업계 고교는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찬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목고·인문계와 실업계의 구분이 의사나 취향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계급·계층에 따른 갈라치기가 되어가는 교육불평등과 뒤이어 연결된 사회불평등의 현실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없다.

안재희의 [실업계, 얌순이들의 보고서](이하 '얌순이보고서') 이런 상황에서 정말 반가운 책이다. 특히, 그나마 있는 관련 연구들이 대부분 양적인 접근(각종 통계조사를 활용한 연구법) 치중하여 내부 구성원들(행위자) 실제적인 사고와 행위 상호작용 등에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얌순이 보고서는 관찰과 심층면접, 기타 관련자료들에 대한 분석 질적인 접근을 채택하면서 그동안의 연구에서 논의되지 못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책이다.

책은 공식적으로는 취업을 이야기하지만 진학을 고려하지 않을 없는 실업계 고교의 현실에서 학력에 따른 차별적 사회구조를 간파(penetration)하고 있는 얌순이들이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하는지, 어떻게 학교에 저항하고 있는지, 그러한 저항이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얌순이 문화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 차분히 밝히고 있다. 모든 것들을 짧은 지면에서 소개할 없으니, 얌순이들의 전략 그리고 안에 숨겨져 있는 저항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얌순이들은 사회가 학력에 따라 엄청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나름대로의 저항을 한다. 그런데 저항은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있는 '개기기'나 '비꼬기'가 아니라 학력주의와 학생다움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한 실업계 고교 정체성에 대한 저항이다.

얌순이들의 저항은 기존에 노는 아이들이 보여 준 저항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 [노는 아이들과는 달리] 얌순이들은 지식의 가치를 인정함은 물론 공식적인 형식 내에서 저항할 뿐이다. … 또한 노는 아이들의 저항이 근시안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얌순이들은 학교의 합법적 채널인 대위원회, 학생회 등을 통해 저항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얌순이들은 최대한 학생다움을 유지하며 '태도가 좋은 학생들'이라는 이미지를 충실하게 관리한다. …

그러나 얌순이들이 교사와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해서, 학교 규범과 구조에 순응,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들이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가칭] 잠잠여상의 교육목적인 취업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학력사회를 유지하려면 집단마다 다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얌순이들은 바로 자신들에게 강요된 역할과 가치관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냉소적인 자세로 대함으로써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상고를 졸업하고 취업하게 될 단순사무직과 그에 따른 수동적인 의식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얌순이들의 저항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들의 저항엔 학력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고리인 차별적 사회화 과정을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힘과 가능성이 들어 있다(139∼140쪽).

이쯤 되면 가칭 해머타운(Hammertown) 소재한 공립실업중등학교의 '사나이들'(lads) 중심으로 현장기술지 연구(질적 접근의 하나) 수행한 윌리스(Willis, P.) 저항이론이 생각난다. 그러기에 구조에 치중한 재생산이론의 부족한 측면을 보강하면서 행위자의 실제적인 사고와 행위를 분석하여 구조와 행위를 변증법적으로 결합한 저항이론의 미덕을 얌순이보고서는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속에서 안재희는 얌순이 문화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얌순이들은 계열에 따른 차별적 사회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에 적응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현실 조건을 변화해 가는 능동적인 주체의 면모를 드러낸다. 주어진 구조적 제약을 정치적, 제도적 차원이 아닌 아주 일상적인 차원에서 변형해 가는 얌순이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는 얌순이들의 모습이야말로 그들의 문화가 지닌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산 증거이다(141쪽).

물론 기존의 불합리한 사회질서를 극복할 있는 대안적 가치에 기대고 있지 않은 '사나이들'의 한계(limitation)처럼 얌순이들의 저항은 학력주의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학력주의와 학생다움을 수용하고 있기에 나름의 한계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학교의 입장에 서보면 있다. 얌순이들의 저항이 실업계 고교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까닭에 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얌순이들의 행위를 전적으로 긍정 또는 부정할 없다는 난감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면 얌순이들의 전략과 행위에는 한계와 가능성 모두 가지고 있다고 있다. 그리고 부분까지는 저항이론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동안 이론으로만 이야기되던 저항이론의 문제의식과 방법을 빌면서도 나름대로의 눈으로 한국교육의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얌순이보고서는 저항이론의 단순한 적용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사나이들'과는 달리 학교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얌순이들이 사실은 한국의 실업계 고교에서 가장 저항적인 집단임을 알아챈 안재희의 눈썰미에서도 있다.

그래서 얌순이보고서는 학교붕괴의 현상과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있다. 학교붕괴든 교실붕괴든 실재한다면, 그것은 학교가 지니고 있는 유용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는 현실을 간파한 행위자들의 주체적인 행위가 모인 결과일 것이다(유용성이 약해지는가 라는 원인은 논외로 하고). 이와 관련하여 학력주의 현실을 간파한 얌순이들에게 주목한 얌순이보고서가 그동안의 학교붕괴 논의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였던 '문명사적 전환에 걸맞지 않은 근대식 학교'나 '세대간의 문화 갈등' 논의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고 하겠다. 특히, 학교붕괴 현상이 실업계 고교에서 많으며 심각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얌순이나 아예 대놓고 개기는 진날이가 실업계 고교에만 있을 법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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