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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노무현 정부의 학문정책 과제들

2003.07.14 10:45

강내희 조회 수:1615 추천:3

현장으로

노무현 정부의 학문정책 과제들

 

강내희 ∥ 교수노조학문정책위원장/문화연대집행위원장



Ⅰ. 취지

 

1. 문명의 전환과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

 

지금은 문명의 전환기로서 새로운 삶의 지혜와 능력이 요청되는 시기임. 경제 발전을 중시한 20세기의 근대적 삶의 패러다임은 나름대로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도 했으나, 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 문화의 상품화와 획일화, 나아가서 민족·계급·성·인종·세대·지역을 둘러싼 모순과 갈등을 양산했음. 이제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상생을 이루는 지속 가능한 문명발전을 위해 삶의 패러다임과 사회발전의 기틀을 새로 짤 필요가 있음.

 

2. 학문발전에 기반을 둔 사회발전

 

학문발전에 기반을 둔 사회발전 전략이 필요함. 사회의 발전이 학문의 융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문명사회의 상식임.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에서 '성인정치'(聖人政治)를 이상으로 내세우고 플라톤이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장한 것도 학문을 사회발전의 기틀로 삼자는 것임. 조선조의 세종과 정조의 예가 보여주듯 한국사에서도 학문과 도덕성에 바탕을 둔 정치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을 때 가장 큰 사회발전을 이루었음.

 

3. 자생적 학문 기반의 결여

오늘 한국사회는 학문의 발전을 통해 사회발전을 추진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음. 기초학문의 무시에서 드러나듯 '학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명시적인 사회정책의 일환으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음. 이 결과 오늘 대한민국은 첨단이론이나 학문 방법론, 특히 독자적인 사상과 자생적 지식 생산 능력의 측면에서 볼 때 세계에서 지닌 학문의 상대적 지위가 중세 조선보다도 뒤떨어진 형편임.

 

4. 학문정책의 수립

 

주체적인 사유의 수준과 그 현실 적실성을 높이려는 노력, 사물을 보는 올바른 태도와 올곧게 실천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하여 학문정책을 올바로 수립해야 할 것임. 그래야만 자신을 성찰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산적한 사회적 문제들을 파악하여 대처하는 능력,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적 능력을 되찾을 것임. 사회발전의 초석은 학문의 융성을 통해 닦아야 함.

 

Ⅱ. 학문정책의 기본 방향

 

1.  '학문전략'의 수립

 

현재 한국사회는 학문전략을 수립하려는 체계적인 노력도 주체도 없음. 학문이 사회발전에 핵심적으로 중요함을 인식한다면 이제 우리사회도 학문전략을 수립해야 함.

 

1) 학문정책과 교육정책의 구분과 양자의 올바른 관계 설정

학문정책을 올바로 세우려면 학문정책의 범주와 개념을 제대로 설정해야 함. 이를 위해서는 현재 학문정책이 '교육정책'에 포함되어 있는 현실을 시정해야 할 것임. 현대사회에서 교육이 학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이 학문을 주도하는 것은 아님. 오히려 교육의 내용을 선취해야 하는 학문이 교육을 선도하는 견인차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

2) 학문정책은 '학문학'의 관점에서

당대의 바둑 수준이 최고수의 기량에 의해 결정되듯이 학문 역시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수준이 향상된다는 특징이 있음. 우리사회의 학문수준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학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됨. 그 동안 학문정책이 교육정책 담당자, 교육학의 책임으로 간주됨으로써 학문 자체의 발전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편임. 이제 학문정책은 교육학과 교육정책에서 벗어나서 학문의 내용과 체계, 학문들간의 관계를 고려한 '학문학'(science of the sciences)의 관점에서 독립시킬 필요가 있음.

3) 대학정책에 학문정책 관점 반영

대학정책은 교육정책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학문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그리고 대학이라는 제도는 교육에 못지 않게 학문 진흥에도 비중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임.

 

2. 학문의 민주화

 

1) 대학민주화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학문생산기관인 대학개혁이 필요하고, 이 개혁의 출발점은 민주화와 자율화임. 현재 대학의 권력구조는 매우 비민주적임. 국공립과 사립 가릴 것 없이 재단, 교육부, 대학본부 등 관리자나 경영자의 권한이 비대해져 상명하달 식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임. 사립학교법을 위시한 교육관계법을 개정하여 대학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함.

2) 학문과 사상의 자유 실질적 보장

학문사상의 자유에 대한 학계 외부로부터의 압박을 종식시켜야 함. 학문의 자유가 위축되면 학문의 생산성이 제고될 수 없기 때문임. 우리 사회의 지적, 문화적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야 하며, 이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것을 의미함. 사찰 당국이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학문을 검열하고 탄압하는 일은 과거에 비해 진전된 측면이 있으나 지금은 신자유주의 시장논리가 대학에 침투함으로써 학문의 목표가 시장의 목표에 의해 제한을 받는 등 개선할 점이 계속 생기고 있음. 학문의 자유와 그 한계를 설정하는 문제는 학계의 자율에 맡겨야 할 것임.

3) 학문 운영의 민주화

학문 운영의 비민주적 관행을 혁파할 필요가 있음. 학문의 세대간, 영역간 권력관계를 민주화해야 함. 일부 학자들이 학문전공분야를 마치 봉건영토처럼 취급할 경우 신진학자가 성장할 기반을 없애는 것임. 진정한 학문적 권위를 지닌 학자들이 학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임. 현재 학회의 권위가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학문의 중시현상으로서 바람직한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기존학회의 권력만을 강화하여 신생학문의 출현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개선할 여지가 있음.

 

3. 기초학문의 육성

 

1) 기초학문 육성의 필요성

지식의 진전은 궁극적으로 기초학문과 기초과학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초학문은 사회발전의 초석임. 현재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응용학문의 존립 자체가 기초학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기초학문의 붕괴는 학문 전체의 붕괴를 의미함. 학문의 붕괴가 사회적 가치, 생산성, 민주주의 등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초학문의 육성은 사회발전에 필수적임.

2) 기초학문 지원 강화

기초학문은 장기적인 배려 위에서만 융성하므로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함. 미국처럼 학문 발달이 상대적으로 잘 이루어진 나라에서도 산학협동과 같은 외부 지원이 적은 인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인문학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과 예술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을 통합하여 예술인문학진흥기금을 두고 있음. 이는 인문학과 같은 기초학문 분야가 당장 경제적 이윤을 내는 데 쓰이지 않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엄청나게 큰 효과를 가진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 조치임.

3) 기초학문 연구자의 생활안정  

기초학문 육성을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연구자, 특히 차세대 학자들의 생활안정 정책임. 지금 학술진흥재단에서 기초학문지원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여 주로 박사학위 소지자 기초학문연구자 지원을 하고 있으나 이는 한시적인 조치일 뿐임. 기초학문연구자의 생활 안정을 위해서는 차세대 학자들을 연구원, 교수 등으로 채용하는 장기적인 대책이 요구됨.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대학 연구소에 연구원을 배치하도록 하여 기능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면서 연구자의 생활안정도 보장해야 할 것임.

4) 기초학문 전공자를 위한 시장 창출: 문화적 공공부문의 확충

현재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 분야,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사회과학 분야, 물리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분야 발전을 위해서는 이 분야 전공자의 사회진출 통로가 필요함.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문화의 집, 문예회관, 문화원 등 전국 각지의 공공문화기반시설의 대폭 확충과 운영 프로그램의 개선으로 기초학문 전공자의 사회진출의 기회를 크게 확대함으로써 기초학문 분야에 대한 수요를 늘여야 할 것임. 또한 제3부문의 확대로 전문연구인력의 사회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기초학문 전공자의 사회진출을 도와줄 필요도 있을 것임.

 

4. 학문생산의 다양화와 특성화

 

1) 학문의 탈식민화와 자생적 능력 강화

현재 한국은 서울대학교 등 국내 상위 대학들마저 일부 학문영역을 제외하면 최고 역량을 갖춘 학자 배출 능력이 저조하여 고급인력을 외국,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선진' 국가 대학들에 의존하는 형편임. 이 결과 학문의 종속화와 식민화가 초래되고 있어서 학문의 자생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학문이 외국에 의존하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사회운영의 전망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학문의 탈식민화를 위하여 자생적 학문 기반의 구축이 시급함.

2) 서울대학교 모델의 하향재생산 지양

현재 한국의 학문생산은 서울대학교 모델이 지배하고 있음. 서울대학교의 학문제도 모델은 근대적인 포드주의조직과 유사한 분과학문들의 병렬적 배치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 이 모델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다른 유형의 대학이 나올 수 있도록 대학모델의 다양화를 추진해야 할 것임. 대학을 학과 중심 이외에 협동과정, 특정 연구프로그램, 연구소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할 필요가 있음. 그래야 대학들이 서로 다른 학문방식과 학문내용을 가질 기회가 커질 것임. 대학모델 다양화를 위해 새로운 대학들을 설립할 경우 기존에 이미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유형의 대학 모델을 따르도록 유도해야 할 것임. 신설대학의 경우, 특성화에 입각한 프로그램을 지닌 소규모 대학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함.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미 일정한 수 이상의 대학에 설치되어 있는 학문분야와 학문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지양해야 함. 기존의 학문분야와 학문방식의 개선은 기존의 대학에서 추진하도록 하면 될 것임.

3) 학위수여 방식의 다양화

학위수여를 장기적으로는 대학 등 현재의 공인 학위수여기관 이외에도 개방할 수 있는 방식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 대학의 모델을 다양화함은 물론이고, 학문기관도 다양화하고 그 능력에 따른 권한 부여도 다양하고 신축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 단 이런 제도의 개방이 특수한 기득권 층의 이익추구를 합법화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임.

4) 소집단 연구 활동의 활성화와 학문대중의 양성

학문이 공식 기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 학문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재야학자들의 연구활동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음.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 아마추어 연구자들의 소모임이 활발하여,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성(古城)을 연구하는 모임만도 수십 개에 이름. 연구 소모임, 독서 모임, 기행 모임 등이 활성화되도록 지원이 필요함. 이런 지원은 주5일 근무제 도입으로 늘어나는 대중의 여가가 생산적인 학술적, 창조적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임. 또한 독자 저변의 확대로 학문대중을 구축할 수도 있음.

 

5.  학문편제의 개선

 

오늘날 개별 학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대학의 학과나 학부, 또는 프로그램으로 제도화되어 있음. 이론적으로는 이런 제도가 없어도 학문이 존립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함. 따라서 학문을 학문제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 제도의 편성 여하에 따라서 학문의 성격이나 운영 방식이 바뀐다는 데 유념해야 할 것임.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학문들의 편성 방식이 매우 중요함. 학문제도의 틀, 관행, 실천을 학문분야들의 연관 및 관계설정에 의해서 정하고, 학문제도 운영방식을 혁신할 필요가 있음.

1) 학문의 폐쇄적 운영 지양

학문영역간의 소통 부재 현실을 타파해야 함. 학문의 폐쇄적, 배타적 운영은 학문 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함. 학문영역의 독식과 분점(分占)을 막고 학문간의 개방적 교류를 유도해야 함. 동일 전공영역에서 학부-석사-박사과정을 이수한 사람을 선호하는 신임교원 임용 관행도 시정할 필요가 있음. 특히 학회의 폐쇄적, 배타적 운영이 야기하는 실험적 신생학문 억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학회간, 학문영역간 교류의 활성화를 유도하고 학문영역을 횡단하는 실험적 학문의 학풍을 진작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

2) 학문의 다양성과 통합성 제고

김영삼 정권의 1995년 교육개혁안 이후 대학에서 학과 통폐합, 학부제 및 복수전공제도가 도입됨. 이 조치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일환으로 문제를 낳고 있으므로 학문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새롭게 설계되어야 할 것임. 학문 분과영역간 개방과 통합의 기운이 존중되어야 함. 그러나 학문분야들의 무조건 통합이나 폐쇄는 바람직하지 않음. 학문에 따라 고도의 세분화가 필요할 수도 있고, 역사가 장구한 기초학문은 통폐합보다 보존과 지속이 중요할 수도 있음. 따라서 학문의 다양성을 지키면서 통합학문들을 육성하는 정책 연구가 필요함. 이 문제는 아래 '새 정부 학문정책의 당면과제'의 하나로 구성할 것을 제안하게 될 <학문정책위원회>에서 신중한 논의를 거친 다음에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출해야 할 것임.

3) 가능한 모든 학문 분야의 운영

앞으로는 우리 학계도 가능한 모든 학문분야를 운영해야 할 것임.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와 우리의 시각을 중심에 두는 주체적인 태도로 세계를 이해하는 통합적 능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임. 현재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학문선진국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연구하는 학문분야를 학술 재정이 허용하는 한에서 운영하고 있음. 세계 도처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생태적 문제가 발생할 때 이들 나라에서는 자국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대처하고자 하기 때문임. 현재 세계경제 12위권으로 도약했고, 외국인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는 만큼 한국사회도 전략적으로 가능한 모든 학문을 운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함. 이를 위해 연구소 제도의 활성화가 요구됨. 연구소는 대학의 학과제도와 달리 연구자만 보유하기 때문에 소수의 정예 연구자만 지원하면 됨. 현재 국내 학문생산기관들이 학문분야들을 중복 운영하는 낭비를 최소화하여 이런 연구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필요함.

 

6. 학문여건의 개선

 

1) 연구 네트워크 확산 및 학술 정보 관리의 개선

현재 정부의 개별 부처 산하에는 수많은 연구기관들이 있어서 각종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연구의 분산 진행으로 말미암아 총괄 파악이나 연구간 연관이 없는 형편임. 기초연구를 유기적으로 하기 위해 정부 주도 연구들의 총괄 네트워킹이 필요함. 이를 위해 정부 산하 기관들에서 수행되는 연구들의 진행 과정과 성과의 총괄적 전산화를 통하여 중복 연구를 피함으로써 재원 낭비를 막고, 연구 성과의 공유 비율을 높여야 할 것임.

생산된 연구보고서도 통합 및 연관 관리를 통해 상호연계성을 구축해야 함. 정부 활동과 관련된 서류, 문화재 발굴 이후의 보고서 등 각종 보고서도 총괄 관리 및 활용 체계를 만들어 공공 접근이 쉽게 해야 함. 도서관 운영 체계도 지역 혹은 권역별 풀제를 도입하는 등 혁신해야 함.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은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으로 되어 있어서 학문정책과의 유기적 연계가 잘 이루어져 있지 못함. 도서관 체제를 개선해야 함. 민족의 학술자료들도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 대학 도서관 등에 분산 보관되고 있기 때문에 자료의 확인조차 하기 힘든 형편임. 이런 난맥상은 자료의 소유나 보관을 이권으로 여긴 결과로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것임.

2) 도서관 운영체계의 혁신

도서관은 학문의 기반시설로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 한국은 제대로 된 도서관이 어디에도 없는 실정임. 빠른 시일 안에 전 세계에서 나오는 모든 책을 모으는 도서관을 적어도 한 곳은 마련하고, 학문분야별 전문도서관도 필수적으로 세우고, 나아가서 학문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일반인을 위한 공공도서관을 곳곳에 세워야 할 것임. 특히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은 도서구입예산이 20여 억 원밖에 되지 않아서 열악한 실정이므로 시급히 개선해야 할 것임.

3) 연구 재원의 증대와 배분의 효율화

학문발전은 사회적 투자를 통하여 촉진되는 법이며, 이는 주로 연구자의 신분보장과 연구비의 지원에 크게 의존함. 현재 국내에서 연구비로 지원되는 금액은 외국에 비하여 턱없이 낮으므로 학술진흥을 위한 연구비의 획기적 증액 조치가 필요함. 단 연구비 지원은 지식생산성 증대를 위해 전략적 운영이 필요하므로 학문정책의 기본 방향과 연계하여 판단해야 할 것임.

대학 등 학문생산기관에 있는 부설연구소의 활성화를 위해 연구소의 설립조건을 심사하는 체계가 필요함. 군소 연구소의 난립으로 연구의 집중과 전략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대학별 연구의 특성화를 유도하여 연구능력의 분산을 막을 것. 대학간 역할 분담과 기능 통합 등을 통해 연구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동일 연구의 중복을 피함으로써 연구의 체계를 개선할 것. 아울러 연구의 네트워킹을 통하여 재정 낭비를 최소화할 것.

연구재원 배분에서 기초학문 발전을 위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함. 학문의 생산성은 기초학문의 발달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임. 단기적 효과를 보고 산업기술과 연관되는 연구에 연구 재원을 집중 배분하면 결국 더 큰 창조성과 생산성을 지닌 기초학문의 황폐화를 가져와 결국은 기술혁신의 기반을 무너뜨리게 될 것임.

4) 비제도권 학자의 활동 지원

대학 등 공식 학문 제도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학문활동가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함. 이를 위해 학술진흥재단이 사용하는 연구비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교수나 박사 등 공식 직함이나 자격이 없더라도 잠재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할 것으로 판단되는 연구자와 지식인에게 할당해야 할 것임. 이것은 앞에서 말한 '소집단 연구의 활성화'와 일맥상통하는 정책과제이면서도,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적 학문생산자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현실화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별개의 정책과제임.

5) 연구 평가의 다면화

학문의 수준은 연구프로젝트나 출간 논문의 수를 높이는 양적 팽창을 통해서만 달성되지 않음. '장좌불와(長座不臥)', '면벽구년(面壁九年)' 등의 표현이 말하고 있듯이 득도나 학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장기간이 필요함. 따라서 연구의 독려와 관리는 일률적인 데서 벗어나 연구의 종류나 특성에 맞게 차별화할 필요가 있음.

학문발전을 위해 대학평가는 해야 하지만, 학문분야의 특수성을 무시한 일률적 연구평가는 지양해야 할 것임. 이공계열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인문사회계열에 적용하는 지금의 관행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사이의 차이, 나아가서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간의 차이를 무시한 것임. 연구의 양적인 팽창이 반드시 질적인 고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함.

학문은 그 수준이 중요하며, 일정한 수준에 이른 경우에는 이룩한 학문 수준만큼의 확산이 중요함. 이 때 강의의 중요성이 커짐. 모든 대학교원에게 동일한 강도의 연구를 강요하는 것은 학자 양성에 교육이 미치는 중요성을 무시하는 섬세하지 못한 조치임.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강의와 학생지도에 진력하게 하는 것이 연구논문 발표보다 학문 생산성 제고에 기여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구와 교육의 평가를 다면적으로 해야 할 것임.

6) 학문성과 활용의 공공성 강화

학문과 연구의 성과는 논문, 보고서, 저서 등의 형태를 띠며, 이들은 출판, 유통, 전시 등을 통하여 공공의 자산으로 전환됨. 공공이 학문성과를 쉽게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가 발주한 정책보고서를 포함하여 개인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학술 자료와 정보의 배포, 보관, 이용 등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음. 이를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도서관 운영체계의 혁신이 중요함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음. 학문성과에 대한 공중의 접근을 보장함으로서 지식의 사회적 평등을 구현할 필요가 있음.

 

7. 차세대 학자 양성

 

학문 발달을 위해서는 학문의 전승이 필요하며, 이는 학문 차세대 양성을 통하여 이루어짐. 학문 차세대 양성은 사회적 과제로서 정책 당국자의 특별한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문제임. (아래 '차세대 학자 양성을 위한 지원 강화' 부분 참조)

 

Ⅲ. 노무현 정부 학문정책의 과제들

 

1.  대통령 산하 학문정책위원회의 설치

 

학문발전은 사회발전의 기반이라는 점에서 학문발전을 국가의 핵심 프로젝트로 삼는 국가적 차원의 전략 수립이 요청됨. 현재 한국은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할 수 있는 시점에 왔으며, 이에 따라서 주체적인 사유의 수준과 그 현실 적실성을 높이려는 노력, 자생적인 학문방법론 모색과 학풍의 조성, 새로운 연구분야의 개척 등 학문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음. 그래야만 자신을 성찰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산적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적 능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임. 학문의 융성을 통해 사회발전의 초석을 닦는 것이 중요함.

1) 설치의 필요성 ― 학문정책의 통합관리

학문정책의 통합적 수립과 집행을 위해 현재 다양한 기관으로 분산되어 있는 학문 부서들의 역할과 기능을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나, 학술 관련 정책의 수립, 기획 및 집행을 통합하는 기능을 가진 정부 기관이 없음. 이는 '학문정책'의 개념이나 상(像)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학문정책의 범주들과 이 범주들간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지 못하고, 학문정책 과제들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지 않고, 나아가 학문의 주체와 학문정책 주체의 역할 분담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는 전략 부재의 반영임.

현재 학문정책의 주무 부처는 산하에 학술진흥재단 등을 두고 있는 교육인적자원부로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음. 학문연구에 핵심적인 국립중앙도서관은 문화관광부 소관이고, 과학기술 관련 학문정책은 과학기술처와 한국과학재단 등 그 산하기관들에 일임되어 있는 실정이며, 정부 모든 부처 산하에 연구기관들이 난립하고 있음. 학문정책의 이런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책의 범주와 대상, 주체, 효과간의 유기적인 관계들을 검토하며 학문정책을 구상하는 단위가 필요함. 이 단위는 학문정책과 관련된 모든 기관들을 학문영역간의 상관관계, 정책의 원칙과 기본방향에 따라 연계하고, 학문과 무관한 비전문 개인 혹은 집단의 이권 개입을 막으며, 무원칙하고 분열된 학문정책 난맥상을 극복할 통합적 정책기관이 되어야 할 것임.

2) 위상과 기능

학문정책위원회는 한국 학문정책의 기본 원칙과 방향을 설정하고 통합적인 학문정책을 수립하는 상설 국가기구 위상을 지닐 필요가 있음. 학문정책의 수립과 그 집행의 방식과 목적, 효과 등에 대한 평가도 함께 하는 정책적 의결기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임. 그리고 관료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집행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임. 학문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교육부,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과학기술처 등에 분산되어 있는 학문 관련 정책 및 행정의 중복과 비효율을 막고 학문의 장기 발전을 위한 기획들을 통합해야 하므로 대통령 산하 상설위원회가 되어야 할 것임.

3) 구성

학문정책위원회는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기관과 분리하여 교육학자가 아닌, 학문에 대한 통합적 식견을 갖춘 학자들로 구성해야 할 것임. 이들 학자는 학문역량을 갖추고 학문 일반의 원리와 방법론에 정통하면서 학문간 연계와 통합을 몸소 실험하고 실천하며, 21세기에 걸맞은 학문정책의 비전을 지닌 인물들이어야 함. 나아가서 학문정책위원들은 민주적이고, 도덕적이고,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 및 인류문명 발전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사들이어야 할 것임. 지금까지 학문정책을 실제로 지배해온 교육정책 전문가, 특히 과거 정권에서 교육정책을 주무르고 신자유주의 관점에서 학문정책을 왜곡한 인사들은 참여를 금지해야 함.

학문정책위원회의 정상적 가동이 있기 전까지 새 정부의 학문정책 기조를 기획하고 학문정책위원회의 구성을 준비하는 한시적인 기구로서 <학문정책기획위원회>를 구성.

 

2. 학문발전을 위한 대학의 구조개혁

 

현재 한국의 지배적인 학문생산기관은 대학이므로 학문발전을 위해서는 대학의 관행과 제도를 혁신하는 구조개혁이 필요함. 대학은 1995년이래 추진된 교육개혁정책에 따라 '개혁'을 추진해왔으나 이 개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일 뿐 학문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없음.

1) 학부과정의 역할 재조정

현재 대학교육은 전반적으로 직업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임. 학문발전의 견지에서 보면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으로서의 학부교육 성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 취업을 위한 학부교육과 교양과 연구를 위한 학부교육의 분리가 필요하며, 이를 대학별로 구분하고 동일한 대학 안에서도 전공에 따라 다양화가 필요함.

학부과정의 교육내용, 특히 기초학문을 초·중등 교육과 연계하여 재조정해야 함. 현재 초·중등 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7차 교육과정에서 적시된 '통합교육'이나 7차 교육과정 자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통합교육이 실시되려면 고등교육의 산실인 대학에서 편성된 학문제도의 변화가 요청되며, 그 주요 방향은 통합학문이어야 함. 통합학문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분과학문 체제로 운영되는 대학의 학문제도를 '유연화'하여, 개별 분과학문의 발전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새로 편성할 필요가 있음. 이는 대학의 기초학문이 초·중등교육의 요구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초·중등교육 역시 기초학문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재편성되어야 함을 의미함.

학부와 대학원 교육과정의 기능 분할 및 연계가 필요함. 학부에서만 전공할 분야, 학부와 대학원에서 연속하여 전공할 분야, 학부와 대학원에서 분리하여 전공할 분야 등을 구분하여 현재 학부에서 전공분야로 되어 있는 법학, 의학, 경영학, 행정학, 교육학, 도서관학 등 전문직업 관련 학문분야는 대학원으로 이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임. 물론 이런 조처의 선택과 구체적인 형태는 개별 대학이 결정해야 할 것임.

2) 학문편성의 특성화와 다양화

학문제도에 대해서도 점검과 반성이 필요함. 현재처럼 거의 모든 대학들에 기초학문분야들을 학과 형태로 배치하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임. 모든 대학이 똑같은 유형의 학과를 둘 필요는 없으며 문학, 철학, 역사학, 물리학, 화학 등 기초학문도 대학에 따라 차별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함. 이를 위해서는 학문과 교육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대학별로 집중 육성할 학문분야들을 전략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있음. 각 대학이 독자적인 학문지형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국가 차원에서는 이 지형의 전체 효과가 현 단계 사회에 적합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할 수 있는지 점검하고, 대학평가에 학문의 지형 평가를 포함해야 할 것임.

3)  '실험적 학문'의 육성

학문의 다양화를 위해 실험적 학문을 육성해야 할 것임. 현재의 지배적 학문분류 방식인 분과학문 체계를 유연화하고 새로운 학문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적.재정적 지원이 요청됨. 학문의 쇄신을 위해서는 학문운영을 학과 중심으로만 하지 않고 다양한 제도와 형태로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며, 학과를 존치하더라도 그 틀이 새로운 학문의 길을 모색하고 실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함. 나아가서 현재 학문제도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학회들의 권력을 분산, 민주화할 필요가 있으며 신생학문이 기존 학회의 통제와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실험학문 육성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음. 이를 위해서는 대학별로 연구소, 협동과정 등 학제간 연계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대학원생의 경우 학문분야들을 자유롭게 횡단하는 연구계획을 허용하는 등 실험학문 육성 전략을 마련하도록 권장해야 할 것임.

4) 주체적 입장에서 새로운 학문분야 개척

그 동안 한국의 학문은 유럽, 미국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연구 방법론도 서구모델에 의존하는 종속성을 보여왔음. 학문의 탈식민화와 지식생산의 주체성을 세우기 위하여 서구 중심의 연구 전통에만 머물지 말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음. 아시아권, 중동권, 아프리카권 연구는 이제 국가 이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조치임. 더욱이 최근 외국인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능력이 더욱 요청됨.

5) 학문 및 교육 현장 중심의 대학 행정

학문정책 차원에서 대학의 재조직화가 요구됨. 교육정책에 입각하여 분과학문체제로 종합대학의 형태를 띠고 있는 한국의 대학들은 학문생산성에서 크게 뒤떨어지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음. 거의 모든 대학들에서 총장 혹은 이사장을 정점으로 하고 그 아래 실·처·관장 등의 행정부서와 학장, 대학원장 등으로 위계화되어 있고, 대학에서 실제 '생산라인'에 해당하는 학과운영은 교수들과 조교들의 책임이 되어 학문과 교육의 주체가 행정 직원(staff)이 되어 있는 꼴임. 대학이 본연의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도록 대학조직을 학문생산 현장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음.

6) 학문의 '동종교배' 근절을 위한 대학출신별 쿼터제도 도입

한국의 학문은 '근친상간'에 의한 열등생식으로 그 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음. 특정 대학 출신 혹은 본교 출신 과다 채용이 가장 큰 문제임. 대학들간의 불균등 발전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소수 대학 출신이 개별 대학의 학문생산과 관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 같은 대학의 같은 학과에서 스승-제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동일 학과에 집중 배치되는 관행을 바로잡고, 대학출신별 쿼터제도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음.

 

3. 학문활동 지원체계의 정비

 

1) 연구활동에 대한 지원 강화

한국의 학문활동 지원은 그 동안 미미하였다가 요즈음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며 지원체제도 잘못되어 있음. 이 문제는 지난 수년 동안 실시된 '두뇌한국(Brain Korea) 21' 사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업의 후유증으로 드러난 기초학문 부실화를 막기 위해 인문학 등 기초학문 분야를 대상으로 전개한 지원 사업도 차세대 연구자들로 하여금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얽매이게 하여 독자적인 연구를 못하게 하는 등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임. 학문활동의 지원을 위해서는 생활비 보조 개념이 아닌 학문활동 지원 개념을 도입해야 함. 학문발전은 연구자들이 실질적인 연구에 전념할 때 기대할 수 있는 효과이므로 교수, 연구원 등으로 신분보장을 함과 동시에 실질적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함.

2) 학술진흥재단의 정비

한국학술진흥재단은 현재 기초학문분야를 지원하는 주무 부서와도 같음. 학진의 연구비 지원 규모는 최근에 좀 늘어나서 연 2,300억 규모이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을 인문사회계에 나머지를 이공계에 지원하고 있음. 그러나 학술진흥재단의 재원을 이공계와 인문사회계 지원에 사용하는 것은 이공계의 경우 학진에 비해 훨씬 더 큰 재정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학재단의 지원도 받는다는 점에서 인문사회계를 상대적으로 홀대하는 문제가 있음.

현재 학진은 교육부에 예속되어 보조금 사업만 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성이 없음. 모든 지원 액수를 교육부의 주무 과장이 결재를 하는 실정임. 학진으로 하여금 독자적 예산편성과 집행 권한을 갖도록 함으로써 학문활동 지원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음.

단 학진은 근본적으로 평가기구로 바꾸고 대학 연구소들이 연구계획서를 내어 연구비를 받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할 것임. 이래야만 대학의 연구능력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음. 이 경우 규모가 큰 대학들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이므로 취약한 대학들에 대한 특별 지원체계도 마련해야 할 것임.

평가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다면화할 필요가 있음. 연구계획서만으로 지원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발표된 논문이나 저서를 평가하여 학문적 업적을 보상하는 새로운 보상체계 도입도 고려해야 할 것임. 단 이 시스템 도입을 위해서는 연구결과를 평가하는 사회적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

3) 학문정책위원회에 통합적 기능 부여

현재 크게 한국과학재단과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 학문활동 지원 기관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문제임. 두 재단의 차별적 역할을 인정하되 양자의 기능을 연계하여 지원이나 기능의 중복을 피하려면 통합적 시각이 필요함. 이를 위해 위에서 제안한 학문정책위원회에 두 기관을 감독하는 권한을 갖게 함으로써 위원회의 통합적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임.

4) 도서관체계의 정비, 강화

한국은 지금 훌륭한 도서관은 고사하고 변변한 도서관도 하나 없는 형편임. 이것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서 현재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지식생산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21세기에는 커다란 국가적 손실로 이어질 것임. 이제부터라도 전 세계에서 나오는 모든 책을 모으는 국가대표도서관을 적어도 한 곳은 마련하고, 학문분야별 전문도서관을 세우고, 나아가서 학문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일반인을 위한 공공도서관을 곳곳에 세워야 함. 도서관의 증축과 그 기능의 강화는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지식불평등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을 방지하는 데도 매우 중요함.

국립중앙도서관의 기능을 강화하여 국가대표도서관으로 재 탄생시킬 필요가 있음. 현재 중앙도서관은 도서구입비가 연간 20여억원 수준으로서 미국의 일개 대학인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연간 270억을 책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더라도 지나치게 낮아 한심한 실정임. 도서구입비를 500억 단위로 올려서, 자료축적 및 제공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대표도서관으로 만들어야 할 것임. 또한 위치도 지금의 서울 서초동에서 문화중심지인 광화문 부근으로 옮겨서 시민과 국민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해야 함.

전문도서관, 중앙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에는 전문사서제도를 도입해야 함. 전문사서는 현재 서울대학교에도 없는 형편인데, 이것은 학부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하게 하여 지금까지 배출된 사서들의 전문성이 없는 데서 기인하기도 함. 도서관학의 경우 대학원에서 전공하도록 하여 사서자격을 주도록 해야 할 것임.

현재 한국의 도서분류체계는 존듀이 방식으로서,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지식분류 방식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임. 그러나 국가별로 지식과 학문의 분류는 독자적으로 해야 하며, 우리는 당연히 한국을 중심에 놓고 분류를 해야 함. 또한 각 도서관으로 하여금 장서평가제도를 도입하도록 해야 할 것임. 장서수집과 보관, 그리고 질에 대한 평가를 해야 도서관의 기능이 강화되고 효율성이 높아질 것임. 나아가서 부분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도서관들간의 연계망을 더 구축하고 강화해야 함. 이 과정에서 학술정보의 전자화도 꾀함으로써 학문지식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음.  

 

4. 새로운 대학모델의 개발

 

1) 필요성

한국사회가 학문적으로 낙후된 것은 그 동안 운영해온 학문제도가 20세기 초반의 낡은 대학모델에 근거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음. 현재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는 지식생산양식을 반영하려면 대학들이 취해온 지식의 독점 및 분점 전략을 극복해야 함. 그러나 기존의 대학에서는 이런 혁신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대학 모델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음.

2) 학문운영 혁신에 기여하는 대학에 대한 지원

학문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위하여 대학들이 기존과는 다른 유형의 학문제도를 도입하도록 장려할 필요가 있음. 이는 현재 학문과 교육을 편성하는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잡은 학과체제가 지식생산 효율성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데 따른 보강 조치임. 대학들이 학과와는 별도로 협동과정이나 연구소 등을 통해 새로운 연구 및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을 권장할 필요가 있음. 단 이들 협동과정과 연구소가 내실을 갖추도록 독자적 교수진을 반드시 구성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임. 새로운 학문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대학에는 특별 지원도 할 필요가 있음.

3) 실험적인 소규모 국립대학의 설립

서울에 인문사회과학 중심의 새로운 소규모 국립대학을 세울 것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 기존 대학들은 20세기 초에 설계된 낡은 학문제도와 대학모델을 고수하고 있어서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기호학, 인지과학, 서사이론, 도상학(iconology), 문화연구, 시각문화연구, 지역학, 과학철학, 정치경제학비판, 문형학(文形學), 글쓰기 테크놀러지(technologies of writing), 미학, 수사학, 장르이론, 매체이론 등 전통적으로 혹은 새롭게 발전한 학문들을 연계하여 통합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다루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형편임. 한국이 현재 세계경제 12위라는 위상, 그리고 앞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더 높은 위상에 걸맞은 지식생산, 학문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연구 및 교육의 세계적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전략적 사고를 실천하는 대학이 필요함. 이 소규모 국립대학이 제 기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설립된 지 오래지 않아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처럼 단기간에 집중 투자를 할 필요가 있음. 교수진의 경우 30명 안팎 정도면 될 것이고, 학생 수도 많을 필요가 없으며, 대학원 교육 기능에 집중해야 할 것임. 대학의 소재는 반드시 서울 중심에 위치해야 하고 교정 없는 건물도 무방함.

이런 소규모 실험대학을 국립대학의 형태로 꾸려야 하는 것은 국가적 학문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임. 현재 세계는 중대한 지식생산 변동을 맞고 있고, 지식생산 능력이 곧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능력으로 치환되고 있는 중이므로 국가적으로 이에 대처해야 하나 지금의 대학모델로는 불가능한 상태임. 특히 지식의 식민화에 책임이 큰 서울대학교의 한국 학문 지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서울 시내에 국립대학을 만들 필요가 있음. 새로운 국립대학을 만들자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대학이 전문가에 의한 지식 생산과 공급이라는 전통적 학문방식을 고수하여 새로운 지식생산양식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 기득권 층에 의해 장악되어 있어서 개혁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임. 따라서 학문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학모델 개발은 신설대학을 통하여 할 필요가 있는데, 단 이 새 대학은 실험정신을 살려서 소규모로 그 조직도 유연하게 만들어야 필요가 있음. 국가가 설립한 소규모 대학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기존 대학에도 변화를 유발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임.

4) '지성강좌'의 개설

한국 최고의 지성이 강의하는 '지성강좌' 혹은 '시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필요함. 프랑스의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처럼 정기 강좌를 개설하고 일반 시민에게 개방한다면 학문의 대중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임. 이 시민대학은 국가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하며, 그 운영 책임은 위에서 언급한 국가학문정책위원회에 두고, 강의는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학문주체 집단의 추천과 대중적 여망에 따라 선정된 인사들에게 위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수강자들에게는 제도화된 대학기관에서 수여하는 것과 동일한 자격의 학위를 수여하는 것도 고려함직 함.

 

5. 차세대 학자 양성을 위한 지원 강화

 

1) 차세대 학자의 국내 양성을 위한 조치

차세대 학자 양성은 학문의 발전에 핵심적인 과제인데도 현재 우리 사회는 대부분 학문 분야가 외국유학에 의존하는 등 차세대 학자들을 제대로 양성하고 있지 못한 실정임. 독자적인 학자양성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회가 온전한 발전을 이룰 수는 없으므로 더 이상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차세대 학자를 양성할 전략이 절실함. 이와 관련 인사정책에서 국내대학 출신을 우대하는 정책 배려가 요구됨. 현재 과제인 지식의 탈식민화를 위해서도 국내대학 출신의 우대는 꼭 필요함.

2) 학문활동의 기회 확대

새롭게 배출되는 유능한 학위소유자의 학문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더욱 활성화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함. 차세대학자의 활동 현장은 기존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이나 연구소 등임.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원 혹은 신임 교원 채용에 관한 정책을 차세대학자 양성 정책과 연계하여 개선할 필요가 있음. 현재 국내의 젊은 학자들은 잘못된 수급정책으로 양산된 상태에 놓여 있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 이런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신임교원 임용 과정을 공개하여 정당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독려하고, 나아가 현재의 학문생산체제를 개혁하여 유능한 학문인력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도록 해야 할 것임.

3) 대학원생에 대한 지원과 강사의 처우 개선

학문 차세대 양성을 위해 대학원생 지원체계 수립이 필요함. 대학원생들은 조교 직책을 수행하여 학비나 생계의 도움을 받거나, 박사과정 학생의 경우 주로 시간강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임. 이로 인하여 학업에 열중하지 못하여 학문수준을 높이는 데 많은 지장을 받음. 또한 박사학위 취득 후 시간강사, 즉 비정규직에 머물 경우 그 신분이 극히 불안정하고 처우도 나빠 학자로서 활동하는 데 큰 장애가 되고 있음. 대학원생과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고 신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강구해야 할 것임.

4) 석사, 박사 학위소지자들을 중등교사로 활용

석사, 박사 학위소지자들을 중등교사요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음. 이런 정책을 실시할 경우 기존의 사범대출신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으나 과연 사범대 출신, 그리고 교사임용고시 합격자들만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는 사회적 토론을 거쳐서 결정해야 할 것임. 교사의 품성, 자질을 위해 교육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겠지만 교사의 학문적 능력도 반드시 필요함. 석사, 박사 학위소지자들을 소양교육을 포함한 선발과정을 거쳐서 중등교사로 채용하는 방안을 마련할 경우 대학의 기초학문전공자에게 진로를 열어줄 것이므로 대학에서 학문 차세대를 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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