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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은 ‘아웃’시키자


강유미 | 자유기고가

 

 

‘가족이 붕괴되고 있다?’

여성학적 입장에서 보면 여성의 물적 소유 행위에 법적인 토대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기존 사회의 양식을 안정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수행된 결혼과 가족이라는 틀이 무너져 가고 있다. 그와 함께 결혼과 가족, 그리고 여성에 관한 도발적이고도 발칙한 상상이 요즘 우리 영화들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영화 ‘바람난 가족’은 기존의 가족관과 여성관이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는 요즘의 세태를 보여주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허한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가치관을 제기하고 있는 듯 하다. 임상수 감독은 ‘바람’이라는 성적 화두로 새로운 성 정치학적 지형을 그려낸다.

70년대 초기 산업 자본주의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장선우 감독이 그린 여성은 가슴속에 불같은 욕망을 간직했지만 남편의 폭력 앞에 무기력했다. 그녀의 바람은 실존적 자아를 찾으려는 투쟁이라기보다는 야수 같은 남편으로부터의 도피행에 가깝다. 그녀는 자신을 의지할 또 다른 누군가를 찾지만 새로운 사랑에 실패하자 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다.

반면 장선우 감독은 ‘너에게로 나를 보낸다’에서 같은 감독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다. 주홍색 실크 터치 카메라 필터로 아득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표현했던 ‘우묵배미…’와는 달리 ‘너에게로…’의 화면은 밝고 경쾌하다. 이 영화에서 성은 새로운 정치학적 지형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엉덩이가 큰 여자는 거리낌없이 섹스하고 자신의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입으로는 독재타도를 외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파쇼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소유한 남성은 관념의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희화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반드시 기댈 언덕이 필요하고 그녀의 몸은 그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도구일 뿐이다.

‘바람난 가족’에서 성이라는 화두는 남녀노소를 이어주는 공통요소이다. 영작은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노력하는 양심있는 젊은 변호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못 배우고 못 사는 서민들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그저 ‘내 안에 가득 찬 무언가’를 젊은 애인에게 쏟아 붓지 않으면 일상을 견뎌내지 못한다.

단란주점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눈 뜬 어느 날의 영작. 거리를 걷는 그의 어깨 위에 쓸쓸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득히 고인다. 평생 알코올과 외도를 벗삼았던 피난세대인 영작의 아버지는 간암으로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그런 그를 냉정히 바라보던 어머니 병한은 초등학교 동창과 외국으로 떠난다. 이제야 말로 오르가즘이 무엇인지 알겠다고 일갈하며.

그런 시어머니를 은근히 응원하는 호정은 그만 옆집 고등학생과 바람이 나고 만다. 이쯤 되면 영화는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패륜인들의 집합소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임상수 감독이 주목한 것은 해체된 기존의 가족관의 빈자리이다. 남편이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호정의 반응은 담담할 뿐이다. 그녀에게 남편은 인생의 도피처도 생계를 위한 보호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에게 외치는 말은 오직 ‘남의 인생 참견 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는 것이다.

사랑과 신뢰로써 지켜지던 가정의 개념, 이 세상에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보금자리이자 혈연으로 굳건하게 지켜지던 가정의 개념은 이 한마디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영작과 호정의 아들인 수인이 입양아인 것은 이즈음에서 매우 의미 깊은 설정으로 다가온다. 가부장제라는 남성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심리적, 사회적 부담감과 여성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희생을 강조하며 유지되어 온 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감독은 개인주의 철학을 대안으로 들이밀고 있는 것일까?

본래 개인주의는 종교개혁 이전 절대적인 교황권의 반동으로 태동했다. 루터의 만인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 즉 사제를 빌리지 않은 개인의 자격으로 신과 소통한다는 이념과 함께 18세기 시민사회의 사회계약설, 초기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에 그 이념적 굴림을 둔다. 또한 밀은 개인주의 이념이 개인적 자유의 무한한 확산이 아니라 거대한 정부의 위세 앞에서 개인의 소박한 권익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보았다.

사회와 가족, 조직이라는 집단의 메타 이념이 개인을 넘어서던 시절은 이제 막을 내리는 것일까. 더욱이 포스트 모던한 21세기 탈집단적, 탈이상(理想)적 이념은 호정의 말처럼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 위해주며 살기”위해 개인의 욕망을 육체적으로도 솔직하게 체화시킨다.

임상수 감독은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서로의 인생에 파쇼적인 권력을 휘두르거나 서로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은 냉철하게 ‘아웃’시키자고 말한다. 더 이상 남자는 강한 척 하지 말고 여자는 희생자인 척 하지 말자며 혈연 관계가 뭐 그리 대수냐고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주의가 새로운 가족관의 대안이 될 것인가는 의문이 남는다. 절대적인 도덕관과 가부장적 가치관 앞에서 억눌리고 짓눌려진 개개 구성원들의 욕망은 해방되어야 마땅하지만 우리에게 ‘공동체’는 여전히 아름다운 숙제가 아니던가.

혹자의 말처럼 ‘공존’의 철학이라면 어떨까. 당당하게 자신을 존중할 줄 알고 또 그만큼 타자를 존중할 줄 아는 실존적 완성체로써의 개인들이 혈연과 기존의 가치관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그러한 가족의 상을 그려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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