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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읽을거리_프랑스 68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2004.04.28 17:28

jinboedu 조회 수:4121 추천:46

프랑스 68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최문경 ∥ 사무국장


1968년 5월 프랑스는 혁명을 경험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내지 못하고, 드골 정권을 끌어내지도 못한, 결국은 '실패한' 혁명으로 귀결되었지만 파리의 거리를 메웠던 '대중'들은 '5월 혁명'으로 자유와 행복을 경험했다고 본다. 이번 회보에서 우리는 바로 이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5월 혁명'을 다시 지면에 옮기는 것은, 그 당시에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는 것은 그 시기에 혁명운동은 어떠했으며, 그들의 이상과 혁명의 지향점은 '무엇'이었는가 주목하고자 함이다. 편집자의 말 1. 시기별 정리

3월 22일

3월 22일 파리의 중심지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12,000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소르본느 낭떼르 분교에서 학생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낭떼르 분교는 도서관조차 없어 학생들은 공부하기 위하여 소르본느 본교에 있는 도서관까지 가야 했다. 또한 외부기숙사의 방문금지, 남녀학생의 자유로운 교제금지 및 정치적 종교적 선전활동이 절대 금지되어 있었다. 3월 22일 낭떼르 분교에서의 학생투쟁은 외형적으로는 대학 내의 민주와 자치, 정치적 활동의 보장,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1)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월 22일 운동이 발발한 처음에는 학생운동지도자 중 한 사람인 콘-밴디트를 중심으로 불과 몇 안 되는 소수의 학생들이2) '교수제도 및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이의제기'를 걸고 시작되었다. 이는 그 당시 낭떼르 학생대중에게는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문제라고 인식될 만큼 대중과의 소통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3월 22일 낭떼르 분교에 모인 학생들은 시위를 힘차게, 또는 격렬하게 전개해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학생운동가 3명과 21세 학생 6명이 체포되면서, 3월 22일 투쟁은 급반전하게 된다. '교수제도 및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이의제기'에 조소를 보내던 학생대중들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학부장 그라뺑은 낭떼르의 질서유지의 명목으로 경찰을 요청, 그 당시 콘-밴디트 그룹에 반대입장을 취해왔던 좌파학생들의 결집을 낳게 했으며, 대학을 독립성, 표현의 자유, 비판적 사고의 장으로 인식했던 학생대중의 자율적 시위대가 형성된다. 게다가 3월 28, 29일 양일간에 걸친 대학폐쇄조치는 그때까지 과격한 학생들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취하던 낭떼르 교수들의 동조와 젊은 조교들의 시위동참을 유도하게 된다. 144명의 3.22 투쟁이 거대한 학생대중의 자발적 참여, 교수와 조교들의 동조 등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그라뺑 학부장은 5월 2일 소르본느 총장 로쉬에게 당분간 낭떼르 분교를 전면 폐쇄할 것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낭떼르 분교의 전면 폐쇄조치는 낭떼르 분교에서 소르본느 본교로 투쟁이 옮아가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 3.22 학생, 교수, 조교들의 운동을 잠재우지 못한다.  

5월 3일 이후

5월 3일 오전 12시 소르본느 교정에서는 낭떼르 분교폐쇄에 항의하는 집회가 개최되었으며, 장기적인 운동을 이끌어갈 학생행동대가 결성되었다. 이에 당황한 소르본느대학 총장 로쉬는 경찰의 학내개입을 요청하게 된다. 3)경찰에 의해 해산된 학생들은 까르체 라당에서 자연발생적인 저항을 벌이며, 밤 11시까지 시위를 계속 진행한다.

5월 6일

시위대는 5월 6일의 토요일 집회 조직화에 수많은 리플렛과 선전, 선동으로 비교적 평화로운 이틀을 보냈다. 5월 6일 또다시 학생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당페르 로쉬로(Denfert-Roucherrau)에 집결한 약 20,000여명의 학생들이 셍 제르멩 데 쁘레까지 행진하는 동안 경찰과 충돌이 일어나 422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이에 즉각적인 체포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과의 충돌로 약 8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이날의 엄청난 광경을 두고 "이것은 폭동이다!",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혁명입니다!"라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만들었다. 이날 '중등교육교원 전국조합'(Syndicat Natioal de l'Engneignement Secondaire=S.N.E.S)이 학생들과 교원들의 투쟁조직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조직에 대해서도 힘찬 연대를 아끼지 않겠다는 것과 학생들의 석방과 소르본느, 낭떼르 대학의 재개방을 요구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5월 7일

5월 7일 저녁에는 당페르로쉬로에서부터 에뜨와르 광장으로 나가면서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약 50,000여명의 시위대가 '꼬뮌 만세'(Vive la commune)라고 씌어진 플랭카드를 선두에 세워 행진을 하였다. 경찰은 시위대의 해산 명령에 상관없이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며,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전국학생연합과 전국고등교육교원조합은 체포된 학생들의 즉각적인 석방, 모든 지구에 경찰철수, 폐쇄된 학부의 재개의 3개 조건을 내걸며 무기한 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5월 8일

프랑스 전국학생연합, 전국고등교육교원조합 공동 집회에서 '중등교육교원 전국조합'과 리세(고등학교)의 교사들에게 시위에 참가, 연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전국고등교육교원조합 서기장은 정부와의 교섭의 용의가 있으나 만일 불충분한 결과를 도출하게 될시 경찰이 도시를 포기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5월 8일 밤부터 소르본느는 학생들과 교사들에 의해 점거될 것이라고 선포하게 된다. 당시 각처의 리세에서도 선동이 성행되어 많은 '혁명적 행동위원회' (C.A.R) 가 구성되었다. 같은 날 저녁 알로벵에서 집회가 개최되어 약 20,000명에 달하는 시위행렬이 룩상부르공원을 향해 행진해 나가는 동안 집회가 시위대의 지도자들에게 의해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분노한 시위대의 항의가 일어났다. 이미 운동의 주도권은 조직의 대표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내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5월 9일

교육장 뻬이르피트에 의해 낭떼르 분교와 소르본느 대학이 재개된다는 소문이 정부로부터 나돌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부의 위장전술에 불과했다. 이것이 학생들과 교사들의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든다. 이와 함께 그 전날 5월 8일 집회 해산 지령의 자아비판이 프랑스 전국학생연합, 연맹 등의 지도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이와 별도로 소르본느에서는 자연발생적인 학생들의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 날 집회에서는 모든 운동의 대표자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방식이 취해졌다.  

5월 10일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이 수도에 넘쳐났으며, 한 학교씩 차례로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 날 저녁 당페르-로쉬에 모인 20,000여명의 대중들은 '합리적인 부르주아 담론'을 근본적으로 제기하기 위하여 다른 전술, 전략이 필요했다. 시위대가 드골이 있는 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체포된 동지들이 있는 감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시위대가 자발적으로 근거리에 위치한 체포된 동지들이 있는 감옥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운동의 지도자인 콘-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총사령관도 지도자도 없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책임지도 있으며, 각 열마다 그 열에 책임이 있다. 여러분이 바로 총사령관이다"

5월 10일 시위대는 전술로써 짱돌을 들게 된다. 짱돌은 이내 자신들의 운동의 상징인 바리케이트로 변신한다. 거리 곳곳에서 수많은 짱돌로 이루어진 바리케이트가 쳐지게 된다. 그 날 쳐진 바리케이트를 중심으로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두고 5월 10일은 이른바 '바리케이트의 밤'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된다.

5월 11일

11일이 되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0일 밤에 노동총동맹(C.G.T)는 총동맹의 본부에서 간부들과의 논의를 통해 학생들과의 연대행동을 광범위하게 벌여낼 것과, 13일 24시간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의 모든 대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될 것을 의미하게 된다.

5월 12일

소르본느 부근은 여전히 경찰들 의해 견고하게 경비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 가운데 프랑스 전국학생연합, 전국고등교육교원조합과 3월 22일 운동그룹은 "투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10일과 11일에 걸친 정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한 적절한 보복조치가 필요하며.... 5월 13일은 그야말로 학생, 교사, 그리고 노동자들을 결집하는 광범위한 인민항의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공동성명서를 채택하게 된다.

5월 13일

이리하여 13일에는 학생과 교사, 노동자들에 의한 공동시위가 대대적으로 감행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이른바 '5월 운동'은 학생의 문제로부터 노동자의 문제 등의 개별적 사안을 넘어 노동자, 학생, 교사들의 전체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2. 왜 : '5월 혁명' 유발 원인 조명

2-1. 전체적인 면

3월 22일 소르본느의 작은 분교인 낭떼르 분교에서 시작된 학생투쟁이 어떻게 노동자, 교사, 학생들의 전체문제로 연결이 되었을까. 이에 <르몽드>에 기고한 어떤 논자에 따르면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비교적 정부당국이나 대학당국에 유리한 해석으로 학생투쟁의 원인을 단순히 교수 사회의 반봉건적인 전통주의, 사회의 요구와 과년한 대학의 부패, 학생의 사회진출과 지식의 유용성에 관련된 교육제도의 결함 등에서 찾으려는 태도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근대화 개혁을 이룩하는데 있는데, 개혁의 구체적 내용은 대학에 나타난 부패를 청산하고, 대학의 교육방법을 충실하게 갱신하고, 학생들에게 개방적이며 자유롭고 건전한 대학분위기를 제공하여 확실한 사회진출의 길을 열어주는 것 등에 달성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인 해석으로 대학을 근대생활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개량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부르주아 사회를 저열하고 쓸모없을 뿐 아니라 억압적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관리적이라는 신분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신분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경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성인들의 사회에 보다 신속히 통합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인들에 의해 구축된 사회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의제기를 행하고 있다는 점(육체노동과 지식노동 분할 반대, 이에 종속되는 지식 차별에 대한 저항)에 주목해야 한다.

2-2. 프랑스 내적 원인

하나, 프랑스 대학 고등교육의 시대착오적인 면.

지나치게 자세한 훈련규율, 종합적인 비젼의 결여, 추상적 개념의 우위, 시대에 떨어진 도식의 이용, 관념과 이론의 수준에 머무는 공허한 탁상공론 등의 문제, 대학 교육 형태에 있어서 계단식 강당이나 대형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강의가 대부분이어서 창의적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로지 주입식 교육만 이루어지는 문제, 대학의 보직이 교수가 가르치는 교육내용이나 교육적 역할과는 무관하게 교수의 경력이나 출신 대학의 졸업장으로 결정되는 것, '주택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시험제도의 문제, 교수, 학생, 교직원, 조교 등의 대학 구성원의 '자기 결정 배제의 문제', 콩나물시루와 같은 강당, 강의실의 문제 등이 대학 구조와 내용 전체에 엮어 있는 문제로 부각되었다.

둘째,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인구증가로 인한 압력.

1950년대까지는 17만명에 불과하던 대학생 수가 10년 후 약 60만명 이상으로 증가되면서 대학 부지나 건물, 설비 그리고 교원 수의 절대적 부족 현상.

젊은 청년층과 성인층 간에 단절 현상.

셋째, 10년 동안 유지되어 온 드골 독재정권이 상하 간에 의사소통을 이룰 수 있는 중간기구들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국가 권위주의에 대한 사회적 제기 심화

프랑스 국민들의 정치지향적인 성향을 억눌러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저하시키려는 시도->오히려 이것은 국민들의 저항과 반발을 불러일으켰음.

국가의 권위주의에 대한 사회적 제기가 심화되었음->비단 학교와 의회 등에 제기만이 아니라 가족의 권위주의까지 제기됨.

2-3. 국제적 원인

세계적으로 무제한적이고 낭비적인 소비사회에 대한 아메리카, 독일의 지식층과 학생들의 이의제기,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 아메리카 뉴레프트나 흑인들의 궁핍과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제국주의와 독재정치에 대한 투쟁 등이 프랑스 68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더불어 제국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투쟁, 중국의 문화혁명, 쿠바, 베트남, 아랍사회주의 영향 등도 있었다. 거기에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료주의, 강대국 중심주의, 스탈린주의와 이데올로기적 문화영역의 독단주의 등에 대한 지식층, 학생들의 투쟁, 그리고 보다 광범위한 자유화를 요구하고 각종 결정에 대한 일반대중의 참가 확대를 요구하는 투쟁 등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3. 그들의 주장: 교육문제를 중심으로4)

3-1. 정상적인 대학, 비판대학의 상

① 정상대학

정상적인 대학이 가지는 유일무이한 존재 이유는 내적으로 강한 질적 입장과 외적으로 확대된 양적 입장에서는 지식의 확장이다.

첫째로 권력관계에 대한 재정립으로 교수-학생사이의 권력관계를 제기한다. 정상적인 대학은 교수-학생 사이의 신분적 질서가 아닌 '대학인'으로써 존재한다고 명명한다. 모든 대학인은 권력으로부터가 아닌 단지 가능성으로부터 생긴 역량을 가지고 교육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배우려고 하는 것을 먼저 알고 있는 모든 대학인이 교육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가르치려고 것을 알고자 하는 모든 대학인이 교육받는 것이다.

둘째로 지식에 대한 재정립이다. 교사와 학생간의 계약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함께 수동적인 소비자 대중(학생)에서 지식을 당연히 공급하고 있는 교사의 결론을 철저히 규명하게 된다. 지식은 위계적이고 소비적인 시험에서 반복되어지는 수동적 기억이 아닌 생산적 능동적 과정, 정신이어야 한다.

셋째로 시험과 또는 그릇된 선발기제에 대한 제기이다. (수동적)지식에 대한 회고에 불과한 시험은 존재 이유를 못 가진다. 누구든지 지식의 확대에 참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상적인 대학은 만인에게 개방되며 실질적으로 인간 내부에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체계와 (지식)내용을 가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입시제도가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넷째 지식확장의 원리를 제시한다. 정상적인 대학은 고정된 지식을 거부한다. 따라서 유동적이자, 생산적인 지식 확장을 위하여 고정적인 조직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제기되어지는 주제와 관련된 부분에 따라 혹은 그 친화력에 따라 세미나가 결정되고 그곳에서 다시 결정되어 간다. 정상적인 대학은 따로 지정되어야 할 부지가 필요 없으며, 지식이 전개될 시간과 공간에 따라 위치가 결정되어야 한다.

넷째로 정상적인 대학의 외적 궁극목적으로 모든 대학인은 사회의 요청에 따라 또는 사회의 희망에 따라, 사회계층 내부의 기능적 규약을 몸에 익히기 위하여 대학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② 비판 대학

대학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대학은 이제 장래 사회의 기능적 간부를 배출한다거나 지식의 자동 분배기가 아니다. 대학은 비판과 대결의 수단이고 거기서 창조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따라서 교육과 이념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세계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대학이 사회에 대한 효과적이고 정당한 비판을 수행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또한 이것은 장기적으로 정신노동자와 육체 노동자간의 화합을 가능케 할 것이다. 비판대학은 지식을 재정립시키고 선택하여 비판함과 동시에 지식을 개성화하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 창조하기 위한 가능성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3-2. 종합적 분석

이외에도 고등학교에서의 정치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교육제도의 근본적 변혁으로 자치와 공동관리5)를 주장한다. 종합하여 살펴보면, 그 당시의 주장은 다른 대학 혹은 내용(지식)의 제기는 대학 내부에서 출발하여 대학 내부를 개량화 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대학을 경제에 종속시켜 실용적, 효율적 잣대로 (대학)지식을 이분화하는 것, 즉 고도화된 지술중심 지식과 그렇지 않은 지식간의 위계화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지식의 분할(위계)는 사회적으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과 차별을 낳는다. 이들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시작한다. (대학)지식이란 사회구성원들의 제기로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선택되어지며, 비판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류사회의 발전적이자 비판적 지식이 창출되는 장소는 대학만이 아닌 다른 장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를 위한 대학인의 유동성을 강조한다.

권력을 중심으로 관료화되어 있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대학 권력에 대한 제기 또한 중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동적인 피교육자로써 학생, 지식의 공급자로 자연스레 인식되어진 교수간의 권력관계를 통하여 그들은 교수와 학생 두 영역의 급진적 자치와 공동관리의 개념을 도출시키게 된다. 급진적 자치와 공동관리는 누군가 우리를(나를) 대리하여 질서를 확립하고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혹은 공동체 전체가 (스스로)결정하고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자주관리',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주장이다.     

4. 왜 : '실패와 좌절' 투쟁의 결말

4-1. 학생운동 면

파리에서 서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소르본느대학 분교 낭떼르 대학에서 시작된 3. 22 운동은 선진활동가들의 직접적 선전, 선동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수업중인 교실의 순회선전, 끊임없는 논쟁들을 통한 '이의제기'에 대한 확산 등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둔감한 일반학생대중들을 자발적인 운동의 주체로 이끌어냈다. 대중적 직접행동은 교실점거집회, 분교 본부 점거 등의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낭떼르 분교 폐쇄에 이어 소르본느 대학의 폐쇄는 그들을 학내시위가 아닌 가두시위를 가능케 했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자본주의 사회 전반의 문제를 제기하는 식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투쟁의 목표를 세워냈다.

"노동자여, 당신들의 투쟁은 우리들의 투쟁이다. 우리들은 대학을 당신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동일한 가치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구호처럼, 노동과 교육의 문제를 동떨어진 문제로 보지 않는 선도적인 제기를 하였다. 전 사회적인 문제로 자신들의 문제를 직시한 점과 대중들의 직접행동의 반란은 3.22 낭떼르 분교의 투쟁이 급속하게 많은 학생들을 동참하게 하고 소르본느 대학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수많은 고등학생, 노동자, 일부 서민이 합세한 가두점거, 바리케이트 투쟁을 이끈 중요동력이다. 그러나 직접행동의 반란 행동위원회에 의한 '대중반란조직'이라는 보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요소와 기존의 좌익학생조직들의 간의 혼선과 분열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3월 22일에서 5월 13일까지의 폭발적인 대중 투쟁의 핵심세력은 대중 그 자체에 있었다. 이른바 '자발적 대중투쟁위원회' 말이다. 그러나 조합적·자치회적인 조직들은 대중들의 자발적 역능으로 이루어진 투쟁을 점차 그들의 투쟁으로 변질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들을 하게 된다. 분열과 혼선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직접행동의 반란행동위원회에 의한 대중반란의 조직이라는 요소는 처음의 헤게모니를 잃고 '체포학생의 기소중지', '카르체 라탄으로부터 경찰대의 철수', '봉쇄된 학원의 재개' 등의 세 가지 요구를 목표로 하는 조합적·자치회적 시위투쟁의 경향으로 함몰되기 시작한다. 즉, 이러한 흐름은 반란운동에 의해서 유발된 학생반란과 거기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참가가 이제 조합적 캠페인 스트라이크, 캠페인성 집회로 변질, 구속됨을 의미했다.

이러한 정세를 지배계급은 십분 활용한다.  11일 퐁삐두 수상의 수상방송에서 13일부터 소르본느의 재계, 체포학생의 석방, 경찰의 철수 등을 약속하여, 지배계급은 직접적, 자발적 대중운동을 의회적·조합적으로 수습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5월 13일 사태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게 된다. 5월 13일 노동총연맹에서 24시간 총 파업을 선언한 바로 다음날 14일 낭트시 근교에 있는 슈드 아비아숑 항공기공장의 공장점거 투쟁을 시초로 15일에는 루노 자동차공사 크레옹공장, 16일에는 보베의 록히드 공장 등 전국적으로 공장점거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 수는 17일 30만, 18일 100만으로 이르더니 급기야는 24일 1000만의 노동자의 파업으로 번지게 된다.

4-2. 노동운동 면

위에서도 잠깐 언급되었지만, 프랑스 68혁명은 대중들의 자발적 투쟁위원회로 구성된 대중투쟁과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 이른바 좌파학생조직으로 구성된 의회적·조합적·자치회적 방식 투쟁이 대립, 대결하게 된다. 5월 13일 프랑스 퐁삐두 수상이 체포학생의 석방, 경찰의 철수 등의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은 3.22 운동그룹, 자발적 대중투쟁단위, 노동자 투쟁위원회 등의 일정정도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생반란, 그리고 이에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대중적 반란 등을 일단락 짓기 위한 지배계급과 조합적·의회적·자치회적 사이에 통일전선이 성립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4일 1000만의 노동자들의 대규모의 공장검거투쟁식의 파업이 조직된 것은 통상적인 조합적·의회적 파업 방식이 아님은 틀림없다. 자본의 대리인이 공장에서 노동자를 활용하여 자본가의 상품을 만들게 하는 현장인 공장을 점거한다는 의미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를 대리하는 '법과 질서'의 반란과 반역을 의미한다. 자본에 의한 관리를 넘어 자신들의 올곧은 자치의 의미인 자주관리, 통제성을 회복함을 또한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공장점거 투쟁은 조합적·의회적 조직방식과는 전혀 다른 직장투쟁위원회와 직장투쟁위원회가 전 공장으로 결합한 전국공장투쟁위원회를 통해 대규모의 공장점거투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직장·공장투쟁위원회는 공장점거투쟁이 지배계급에 의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할 경우 즉각적인 무장투쟁위원회로 전환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산과정을 기초단위로 한 대중투쟁조직·대중무장조직이다.

반면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은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공장점거투쟁이 프랑스 전국으로 확산되자, 우선 조합기관의 통제를 회복하고 그것을 다시 조합적인 요구투쟁, 조합적·의희적 압력파업으로 변질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동시에 5월 22일 정부, 지배계급과의 파업 종결을 위한 교섭을 진행한다. 5월 27일 마침내 그들은 10%의 임금인상, 520프랑의 최저임금제 확립, 노동협약 실시, 취직대책 등을 골자로 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그르넬 협정'을 체결한다. 이는 바로 공장투쟁위원회에 거부되지만, 이후 공장점거투쟁이 조합적·의회적 변질이 한결 쉬워졌다. 공장점거 투쟁, 학생투쟁, 일반 시민들의 투쟁이 불 붓듯이 번지고 있는 동안 국가권력이 이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자, 지배계급들은 조합적·의회적 투쟁들을 고수하고 있는 운동세력과 담합하여 급진적인 세력들을 각개격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의도 하에 프랑스 공산당, 노동총연맹의 교섭조건들을 들어주게 된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 노동총연맹의 조합적·의회적 투쟁 전술은 5월 24일 드골이 노동자의 기업경영참여, 교수-학생의 대학운영의 참가를 골자로 하는 소위 국민 참가 혁명을 묻기 위한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다. 그들은 '국민투표'를 반대함과 공시에 '반 드골정당'을 결집하여 총선거투쟁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반란을 프랑스공산당과의 의회투쟁으로 좁혀가는 전술을 택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노동자반란을 선거투쟁으로 집약함과 동시에 공포의 양자택일(반란으로 인한 사회질서혼란, 경제위기 VS 현질서의 유지)에 의해서 선거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드골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전술로 이어지게 된다. '드골인가 혼란인가'라는 유명한 위협의 효과는 프랑스 모든 질서 파들을 일치단결하게 만든다. 한편 프랑스공산당, 노동총연맹은 자기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총선거를 노리고 공장점거파업을 조합적인 수습에 전력을 기울였다. 즉, 공장점거파업으로부터 정치적 성격을 박탈하여 조합적·의회적 파업으로 타락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5월 25∼27일 '그리렐 교섭' 이후로 노동자, 학생들의 투쟁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공장점거파업 해체를 주장하는 노동총연맹과 지배계급이 결탁하여 공장점거파압을 무력으로 짓밟고, 10∼11일 카르체 라탄의 바리케이트전을 구실로  선거기간중의 모든 시위금지를 선포하기도 했으며, 6월 16일 소르본드에 경찰을 투입하여 점거학생을 짓밟아 학생반란의 잔여세력에 최후의 타격을 주었다.

이리하여 5월 14일 시작된 프랑스 노동자의 공장점거투쟁은 결국 지배계급과 프랑스공산당, 노동총연맹의 공동전선에 의해 조합적·의회적 투쟁으로 변색됨으로 패배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노동자에게 남은 것은 6월 23일과 30일 총선거에서 자기의 반란행위를 체제 내 행위인 투표행위로서 스스로 취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5. 68혁명의 목소리

5-1. '자발적 대중운동'의 폭발점 : 운동의 질서와 조직체계

(경찰) 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병, 재떨이, 겨자 단지가 자신들이 탄 밴에 비처럼 쏟아지자 놀랐다. "학생지도자들도 모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밴에 있는데, 누가 싸움을 조직한 것인가? '이거 당신네 사람들이야?'라고 지도자들은 물었습니다. '아니야....'6)

'우리들은 전진한다' 행동위원회는 전국적인 사무국이나 지도부도 없었다. '우리는 전진한다'는 5월 바리케이트가 처음 구축되던 날 조직되었으며, 성명서를 제출하면서 정식 결성된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을 위한 행동, 운동을 전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진한다'는 그 자체로 운동에 불과했으나, 전국적으로 수천개의 행동위원회, 수만명의 활동가들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조직 자체의 이름과 명성을 날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운동과 혁명을 지속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목해야 될 또 다른 지점은 조직 내의 전국적 사무국과 지도부가 없다는 것이다. 대표자, 사무국 등의  관료적 질서를 넘어 대중운동 그 자체의 중요성과 중심을 일차적으로 놓았다는 점에서 (조직체계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자발적 대중의 역능을 최대한 끌어올린 질서라고 판단한다.

한편 프랑스 노동자 투쟁은 기존의 파업과는 다른 형태와 질서를 띠었는데, 바로 공장점거파업투쟁을 벌여냈다는 것이다. 공장점거파업은 물론 프랑스공산당, 노동총연맹에서 파업을 결의한 것에 첫 출발점을 가지지만, 1000만에 달하는 공장점거파업을 실질적으로 이끈 것은 '직장·공장투쟁위원회'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직장·공장투쟁위원회는 자본의 공격이 시작될 때 무장투쟁위원회로 전환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스스로 엄호, 지속시켜냈다. 5월 혁명을 이끈 대중들의 의식은 혁명이 지속되고, 진전되는 과정에서 자발적 행동, 직접적 자치와 민주에 대한 열망이 물질적 힘을 가지게 됨을 경험한다. '자주관리란 무엇인가', '직접 민주정'이란 어떤 형태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방향성이 투쟁 한가운데 존재했으며, 혁명 한가운데 실현되었던 것이다.

5-2. 학생운동의 선도성

'5월 혁명'이 학생, 노동자, 일반 서민들을 광범위하게 운동을 조직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학생운동이었다. 사회구성으로 볼 때 부르주아 층에 가까운 프랑스 (대)학생층이 노동자계급을 노동자 총파업, 전국적 공장점거 투쟁으로 이끌게 된 것은 그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도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에 나가 기능하게 될 노동자를 통제하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면서, 노동계급과 그들을 분할통치하려는 자본주의 사회를 맹렬히 비판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자들과의 자유로운 연대를 가능케 한 것이다. 비록 학생운동이 낭떼르 분교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학생운동은 그들만의 투쟁으로 혁명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들만의 고립분산적 투쟁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된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대학 내로 안주하는 투쟁 전술을 버리고, 프랑스 전역의 거리로 흘러나와 노동자 계급을 직접 조직하였던 것이다. 가두시위와 공장(현장)활동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 선전, 교육, 조직화 등 가능한 모든 투쟁 전술을 동원하여 '공장점거투쟁위원회'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이점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봐도 너무나 중요한 점이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으로만 국한되었던 한계를 훌쩍 넘어 정치투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낭떼르에서 처음 144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투쟁을 시작할 때, 그들의 첫 발걸음이 프랑스를 혁명의 물결로 뒤덮이게 할 줄은 아마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5-3.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의 절합

당신들의 투쟁은 우리들의 투쟁이다. 노동자여, 당신들의 투쟁은 우리들의 투쟁이다. 우리들은 대학을, 당신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동일한 가치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7)

실제 소르본느 대학 분교인 낭떼르는 교육환경이 너무나 열악하였다. 한국 대학과 마찬가지로 대형강의실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되고, 학생에 비하여 교수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심지어는 도서관도 없었다. 교수-학생간의 관계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본의 권력관계와 흡사했다. 대학 민주·자치 실현과 교육환경 개선이 대중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3.22 낭떼르 시위를 전개했던 (학생)운동그룹은 대학 내 민주주의와 자치의 실현, 지식의 자율성 확립 등 대학 개혁을 우선 과제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대학 구성원의 10%도 안 되는 노동자들의 문제점과 자신들의 사회 진출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관리인으로 배출되는 것을 제기하였다. 이른바 사회개혁과 대학 개혁을 동시에 사고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 그들에게도 직장을 갖게 하도록 우리들이 투쟁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심리학과, 사회학과의 졸업생은 인사선발계 심리조사원, 직업지도원 등으로 되어 당신들(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왜곡하면서 조정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수학과 졸업생은 기사가 되어 보다 생산적이긴 하지만 당신들에게는 더욱 참기 어려운 기계를 제작해 낼 것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노동자와 관리자 혹은 감독자의 구별을 없애고 싶은 것이다.8)

1968년 5월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은 (대학)교육을 부분적으로 손질하는 개량적 요구를 이미 넘어섰으며, 노동자들 또한 조합적·의회적 경제투쟁에 매몰되지 않고 급진적 정치투쟁으로 상승되었다. 그들의 요구는 복지적이고 시혜적인 차원의 학생과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국가요구투쟁을 넘어서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1) 프랑스 68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생운동의 운동의 방향과 지향점은 후에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돌아가기
2) 실제로 3월 22일 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당시 144명에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지극히 전투적인 학생은 겨우 20명 정도에 불과했다.돌아가기
3) 정부 측에서 본다면 소르본드 대학의 경찰개입은 심각한 실수였다. 경찰이 자신들의 밴에 시위대주동자들을 밀어 넣자, 주변 학생대중들이 경찰 밴의 쇠격자를 뜯어내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대의 지도자들과 경찰이 놀랄 정도로 자발적인 학생대중의 반응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돌아가기
4) 프랑스 1968, '5월 혁명'은 프랑스 사회구조와 내용을 넘어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이고 총괄적인 제기가 이루어졌다. 노동, 교육, 성, 가족, 제국주의, 소비사회의 부조리, 직접민주주의 등 폭발적인 수준으로 '이의제기'가 이루어졌다. 자유롭지만, 날카롭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의 저항과 비판을 모두 조명하고 싶지만, 지면상 교육에 대한 제기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돌아가기
5) 올바른 자치가 실제로 작용되고 실현되는 모습으로 공동관리를 이야기한다. 대학내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가를 보장하며, 이는 즉 대학 내부의 권력 분산을 만들어 낸다. 자치와 공동관리는 모든 대학의 종속성과 수동성을 거부하며, 인간의 비인격성을 형성하는 부조리한 대학 구조를 비판한다. 이를 위한 대학의 독자적인 역할로 만인에 대하여 평등하게 개방된 효과적인 사회봉사, 끊임없는 이의제기의 구심점, 문화와 과학에 대한 이의 제기의 중심점 형성을 든다.돌아가기
6) 로널드 프레이저,「프랑스의 1968년 5월」,『1968년의 목소리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P278돌아가기
7) 『프랑스 5월 혁명』P84돌아가기
8) 같은 책.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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