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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영어 공용화론을 따진다

2001.10.13 12:40

사무국 조회 수:1709 추천:1

영어 공용화론(共用化論)을 따진다

영어 공용화론(共用化論)을 따진다

(※엮은이 군소리 : 이 글은 어느 신문에 실린 글을 그 논리만 따와서 입말투 이야기로 대폭 바꿔 쓴 것임. 세상 갖가지 일에 대해 잠깐씩 살피고 가자는 뜻에서 실었음.)

  요즘 "영어를 우리 국어의 하나로 모시자!"는 얘기가 오락실의 고슴도치처럼 슬금슬금 또 머리를 디민단다. "에이, 말도 안 돼!"하고 대뜸 눈살 찌푸릴 분들께는 왜 그것이 말이 안 되는지 새삼 일러드릴 필요가 그다지 없다. 이미 꿰뚫고 계시니까. 하지만 그렇긴 해도 그런 말 떠들고 다니는 사람한테 어떻게 맞서야할지 함께 자세히 따져 본다는 점에서는 이 글도 읽어볼 값이 있을 게다.

  만일 그런 짓을 어느 정권이 밀어붙일 경우, 과연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우선 학생들한테 곧장 난리가 나겠지? 유치원 아니 두세 살 코흘리개부터 만사 제쳐놓고 영어학원을 학교처럼, 아니 학교보다 더 거룩한 곳으로 받들고 등교할 걸? 꽤 자란 청소년들은 폼나는 직장에 빌붙기 위해서 에미애비 자갈논 팔아서, 아니 집안 기둥뿌리 뽑아서라도 '미국 연수' 다녀올 거야. 유능한 엔지니어도, 대학교수도 '영어학원장'이 더 수지 맞는 직업이니 차라리 회사/대학 때려치고 이 엄청나게 커진 영어 시장(市場)에 구름처럼 몰려들 거구. 가만, 코흘리개적부터 영어 배우기에 돈 퍼부어야 하니, 그 교육비 만만찮으렷다. 살림 꾀죄죄한 서민들만 죽어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여러분, 여기까지 말하면 '영어 공용화론'을 떠드는 친구들이 얌전히 설득될까? 그랬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 바른 친구들이라면 아예 그런 주장이 나오지를 않았겠지. "서민들 피 빨아 먹을 생각이냐? 영어공용화론이니 뭐니, 개뿔같은 소리 집어치워라!"하고 수백만 백성들이 데모 벌이고 눈 부릅뜰 때라야 앗, 뜨거라 하고 입 다물 친구들이지, 아직 백성 여론 들끓기 전에는 좀체로 설득되지를 않아. 왜 그럴까?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민들이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하고, 그러려면 '제2 국어'로 삼는 길뿐이라는 논리가 뭔가 그럴싸한 구석이 있거든. 그러니까 이 논리를 헤집어 봐야 해.

  이 친구들은 "영어 실력이 곧 국력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다들 영어를 나랏말로 삼고 익혀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국가주의의 논리를 편다.('영어 공용화'를 반대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몰릴 판이다.) 여러분, 우리는 나라를 위해 밥 먹고, 나라를 위해 똥 싸고, 나라를 위해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르고, 나라를 위해 입사 준비 토익/토플을 공부하는가? 삼성그룹에 몸 담은 간부는 나라를 위해 현대그룹의 산업기밀을 염탐하는가? 기본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산다. 자기에게 도움되니까 영어공부를 한다. 그럼 백성들에게 '자기'를 위해 영어공부 하라고 냅두게나! 유식한 말로 하자면, '시장 원리'에 맡기라는 말씀이다. '아메리카'노 '나라'노 독판 행세하고 있는 지금 세상에서 빠가야로 조센징(=朝鮮人)노 백성들 죽어라, 영어 공부 하게 되어 있쓰무니다!

  그 친구들은 '선진화'와 '영어화'를 같은 것이라 여긴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백성들이 한국 백성보다 대체로 영어를 잘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원인 ↔ 결과'를 혼동하지 마라. "독일/네덜란드의 높은 경제수준, 비슷한 언어구조, 잦은 교류를 낳은 지리적/역사적 잇점(=원인) → 높은 영어 실력(=결과)"이지, "높은 영어실력(원인) → 높은 경제수준(결과)"으로 이어진 게 아니다. 서유럽처럼 영어교사가 나랏돈으로 현지 언어연수 다녀오고, 한 반의 학생숫자도 15-20명쯤 된다면 '공용화'의 난리굿 벌이지 않고도 학생들 영어실력은 크게 나아진다. 또, 아무리 '세계화'가 날로날로 깊어진들,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어 능통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야 영재교육 또는 특기자 양성을 제대로 벌인다면 길러내기 어렵지 않다.

  이쯤 말해도 변함없이 '벽창호'로 노는 친구들한테는 영어 공용화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더 덧붙일 수밖에. 한반도는 늦든 이르든 통일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영어를 배울 형편이 못 되는 북한인들이 꼬부랑말 씨부려대는 국제화된 남한인들과 어울릴 때, 얼마나 '왕따'로 처박히겠는가? '통일'이 희망의 출발점이 아니라 더 골 깊어지는 비극의 서곡이 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술자리에서 싸움이라도 붙을 경우, 북한인들이 이렇게 절규할지 몰라. "우린 김일성이한테서 남한은 '미제(美帝)의 식민지'라고 배웠어. 그 말이 영판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100% 참말이구먼!" 그러니까 영어를 하늘에서 내려보낸 '만나'처럼 숭배하시는 친미파들께서는 자신들이 '북한 주체사상'의 진실성을 보증해주는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깊이 새기셔야 할 터. 당신들이야말로 국가보안법으로 쇠고랑 차야 하지 않는가?

  그 친구들은 '나랏힘'을 기르기 위해 영어를 나랏말로 삼자고 갸륵하게 부르짖었다. 과연 이 길이 나랏힘을 기르는 길일까? 프랑스는 나랏힘을 기르려고, 민족의 정체성을 다지려고 저희말 보호정책에 안간힘을 다한다. 우리처럼 온세계에 제 겨레 퍼뜨린 민족도 많지 않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이 ('패권'이 아니라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데 엮이는 '한(韓)민족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길이야말로 '나라의 힘, 아니 겨레의 힘'을 키우는 길일 게다. 헌데, 본국 백성마저 '한글'에 등 돌릴 지경에 해외 동포가 왜 '조국/모국'을 찾겠는가? '한글 교육' 없이 한민족의 정체성은 설 수 없으니, 세계 한인(韓人)공동체의 이상은 깡그리 사라질 터. 소탐대실(小貪大失)이로다!!!

  영어 공용화론자들은 '모두'에게 이 이익이 돌아간다고 둘러댄다. 실제로는 누구에게 99% 이익이 돌아가는가? '영어 능통자' 얻어쓰는 몇몇 기업주들과, 한국사회를 주름잡는 영어권 유학파의 특권을 영구히 굳히는 잔꾀일 따름이다. 가장 큰 피해는 누가 입는가? 영어 한 글자 몰라도 생업에 아무 어려움 겪지 않는 수많은 서민들이다.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영어 모르는 허물로 '천덕꾸러기 2등 국민'으로 대접받아야 하는가?

  여기까지 더 말해도 납득하기를 거부하는 친구들에게 다시 호소한다. 어느 한 때에 영어 공용화가 결정, 시행되었다 치자. 겉이름은 '제2 국어'라지만 실제로는 힘센 말 영어가 '제1 국어'다. 우리 겨레말은 점점 박물관으로 내몰릴 게다. 히틀러처럼 스탈린처럼 캄캄한 중세때의 부역제도처럼 몰아붙이면 '영어 공용화'는 너끈히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어를 나랏말로 삼으려면 학교공부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글'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아야 하니. 제 자식 영어 제대로 가르치고, 저 자신도 영어 모르는 까막눈 까막귀로 고통 당하지 않으려면 집안에서도 온통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니, 자식들한테 천덕꾸러기 되지 않기 위해서도! '공용화'가 선포된 시점의 부모 세대는 24시간, 365일, 아니 무덤 갈 때까지 '영어 노이로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난리굿 벌이고 났는데, '아메리카'노 '합중국'이노가 만약 세계의 패권을 잃고 2등 국가로 처진다면 '공용화 굿' 벌이느라 애쓴 보람은 또 어디서 찾을 것이무니까?

  '영어 공용화'가 왜 웃기는 짬뽕인지 설명하노라 해보았다. 국민 대다수가 "말도 안 돼!"하고 밀쳐 버린다면야 이런 설득이 굳이 필요없겠지. 허나, 여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믿는다면 대학생 상당수가 이 '영어 국어화론'을 지지한다 하니, 문제는 간단치 않다. "난 이미 영어공부 기간을 완수해냈어. 그러니 영어 공부한 덕 좀 봐야지."하는 속좁은 마음이 바닥에 깔려 있을 거라 보이는데, 힘 없고 가방끈 짧은 이웃 백성들 사정을 헤아릴 사회적 상상력이 참으로 빈곤하다 아니할 수 없다. 학교가, 사회 지식인층이 백성에게 '인문학적 교양'의 토대를 애써 길러주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언제 어떻게 야만의 정글로 빠져들지 모른다. 허허, 참! '신경림' 시인의 시나 한 수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