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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그들은 아니다

2001.02.08 16:24

정은교 조회 수:2104 추천:1

그들은 아니다!

그들은 아니다!

정 은 교 (소장. 책임연구원)

이야기 하나 : 넋두리 한 줌

 정초에 쓴다. 지난 세밑, 동무들 술자리에서 정치판 노가리가 안줏감으로 오르자,  '민주신당'에 얼굴 내놓는다는 이른바 '386세대'를 놓고 송영길(전교조 前 정책실장)이 분노를 돋구었다. 학생운동이 한창 동력을 얻고 있을 때 (이마 파아란 나이에) 장(長) 하나 맡아 잠깐 나댄 것 말고 걔네가 한 일이 뭐가 있어? 노동/민주운동에 몸을 던져 이름없이 헌신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열매는 '장(長)'자(字) 붙인 몇이 따 먹냐? 기성 정당에 문 두드린 사람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온갖 고초 겪으며 재야 운동 벌여온 이창복 선생이나 전교조 출범 훨씬 이전부터  교사운동에 헌신해온 유상덕 선생(전교조 前부위원장)이 걔네들보다야 훨씬 무게 나가거늘,  기성 정당이나 장사꾼 언론들은 걔네들의 '상품 가치'를 더 높이 매긴다. 인생무게 아닌 상품 값이라니, 참으로 얍삽한 호로- 정치판이로고!

  市中 잡지에 이 얘기를 방아 찧어댄 좌담이 있어 쬐금 옮긴다.

      A: 그때(80년대) 정말로 고생했던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가장 많이 상처 받았고, 실제로 일은 다 했으면서도 지금은 아무 '경력'이 없고, 당시 활동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꽤 많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운동권 노멘클라투라/귀족이 있어요. 자기들끼리 권력싸움을 한 사람들... 그때 저는 참 이해를 못 했어요. '노선 싸움'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중요한 거냐. 그런 짓을 하다가 지금에 와서 386이 어떻네 하면서 정치권으로 들어간다는 건 말 그대로 '웃기는 짬뽕/짜장면'이거든요. 그러니까 갈테면 개인적으로 가라, 제발 386이라는 이름은 팔지 말고! 제발!

B: 386이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할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바람직할 거예요.

A: 그 사람들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며언- 힘들거든요오. 당장 뛰어다니며 전단/팜플렛을 만들어 돌려야지요. 누가 '몸소' 그 짓을 하려고 하겠어요? '회장님들'께서!!.

  '386'세대라는 풍선은 조선일보가 많이 띄워댔다. 전두환/노태우 시절에 민주운동 '때려잡기'에 미쳐 날뛰던 그 조선일보가! 지금도 그악스레 극우 이데올로기를 움켜쥔 채, '서북청년회'의 후계자 노릇에 여념 없는 조선일보가 '386'세대와 이제는 화해했습네,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너스레를 떨어 젊은 세대를 구독자로 끌어들이는 것이다.(--그럼, 그럼, 조선일보에는 읽을거리가 많아요!!??)  앞엣 좌담을 더 옮긴다.

   B: 조선일보의 386 켐페인을 보면서, 더 가증스러운 것은 386을 '소비 주체'로 몰아간다는 거예요. 첫째, 386이 예전에는 비판적이었는데, 지금은 잘 먹고 잘 살더라. 이런 맥락에서 가령 연봉 1억원 어쩌구, 금융시장 펀드매니저들을 내세웠더라고요. 둘째, '글로벌 에티켓'이 중요하다, 이건 386이 이젠 순치됐다, '돌아온 탕아'라는 얘기겠지요. 셋째, 386세대들도 박정희 시대가 더 좋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A: 그 시리즈에 소개된 사람이 과연 전형적인 386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박정희때가 더 좋았다."는 식의 말은 정상적으로는 못할 얘기인 거고.

C: 어느 세대건 '극우'도 있고, 멍청이도 있는 겁니다.

B: 바로 그렇기 때문에 뭉뚱그려서 '세대론'을 내건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지요....  

 펜티엄 2, 3까지 나온 마당에, 386 얘기는 그만 접자. 송영길은 지금 국민회의, 아니 민주신당, 아니 새천년민주당, (평민당? 신민당?) 아니 청와대의 공천을 얻으려고 뛰고 있는 '유상덕 선생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했다. 교사운동에 함께 매진하던 시절에는 그 전술 방향과 운동 스타일이 한결같이 달라서 늘 왕배야덕배야 겯고튼 사이 아닌가. 하지만 (진보정당 아닌) 기성 정당에 투신하겠다는 본인 생각을 말릴 수 없는 한,  거기 가서라도 잘해 주기를 바라고, 성원을 보내는 게 온당한 마음가짐이렷다. 이왕 뜻을 일으켰으면 금뱃지를 확실히 거머쥐어야지, (전교조 출신이) 기껏 당내 예선전에서 낙방한대서야  빈 들녘 허재비처럼 쓸쓸한 노릇이다.

  기성 보수정당에 진출한 옛 민주운동가들이 십중팔구, 별다른 구실을 해오지 못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앞으로도 이 사정은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하지만 그 나름으로 값지게 의정 활동을 벌여온 경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노동운동이 무력했던 시절, 노동자들을 앨써 대변한 김말룡 의원도 그렇고,  최근으로 치자면 그다지 신망을 얻은 정치인은 못 되지만 '민주화 유공자 법안'이 내실을 갖추게 하는 데 이신범 의원(한나라당)이 제법 애를 썼다. 칭찬할 것은 칭찬해 줘야 한다. 그러니 유상덕 선생이든, 정해숙/윤영규 선생이든 의회에 진출한다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라도) 나름의 구실을 해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분들에게, 또 우리 자신에게 들려줄 시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독일 문학가 브레히트가 쓴 시.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분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정초에는 아시다시피 대통령께서 '교육부총리를 세웁네.' 근사하게 신년사를 발표하셨지. 이에 맞장구쳐서 전교조의 '환영 성명'이 나왔고, 한동안 Go Cham 자유발언대에 사이버-방아가 쉴 틈이 없었다. 얼핏 훑으니 "꼭 개혁장관 기다리는 품새다. 이해찬에게 그만큼 당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당해야 하느냐."고 코침 먹이는 글이 여럿이요, "현장에는 환영 분위기도 제법 있다."고 궁색하게 두둔한 글이 하나 있더라. 몇 가지 점만 차분히 짚어 보자.

  '성명'에서 밝힌 대로, "교육개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의지를 밝힌 점"에 대해서 환영하겠다는 것이 순진하게 '형식 논리'로 살핀다면 '흠' 잡을 게 없다. "교육개혁이 중요하니 열심히 해보겠소."하는 말 자체야 그릇된 게 아니지.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그 얘기만 해야 하는가? 그건 참 순진한 말씀 아닌가? 그 뜻은 설령 좋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별로 나아질 게 없거나, 오히려 결과가 엇나갈지 모른다면 그 뒷얘기를 '결론'으로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의 언론들은 노동운동 세력의 소식/의견을 알리는 데에 대단히 인색하다. 한겨레도 정부와 전교조 사이에서 양비론(兩非論)을 떠드는 판이다. 이 정치 지형(地形)을 접어둔다 해도, 본래 언론에서는 성명의 '결론'만 싣기 마련이다. "--이라면, --에 대해서만큼은"과 같은 조건문(條件文)은 단칼에 거두절미(去頭截尾)해 버린다. 꼭 형사/검사가 피의자를 다그칠 때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Yes, No만 대꾸해!"하고 을러메는 식이다. 전교조는 이번 조치를 찬성한다! 이 성명이 흩뿌릴 정치적 함의는? "아, 현정권이 좋은 개혁을 하겠다는군! 저런, 한때 과격 단체였던 전교조마저도 손들어 주잖아? 이번 총선(總選)에서 다시 찍어줘?"  이 메시지를 전하려고 성명서를 썼는가? 우리도 본부의 성명 작성자에게 질문해 보자. "현정부에게 교육개혁의 의지(意志)가 있다고 여기느냐?"는 한가로운 물음이 아니라, "교육부총리가 생기면, 그 덕분에 우리네 학교가 나아질 것이라 예상하느냐?"를!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것으나, 교육부 장관 끗발이 높아진다고(→'부총리'로 승격), 뭔가 나아질 구석은 바이 없다. '경험 법칙'만 떠올리면 되지, 구구하게 논거를 댈 것도 없다. '총선'을 앞두고 생색내기 작전을 펼치는 것임을 일반 교원들도 다 꿰뚫는다. 아, 환상을 품을 구석이 있긴 있군. 끗발이 높아졌으니, '예산' 좀 더 타낼 수 있지 않겠냐구? 이보시오, 박정희때부터 '생산적 복지'입네, 떠드는 현정부에 이르기까지, '복지 정책 不在'의 행정이 일관돼 온 것이 어디 '부처 개편'으로 풀릴 문제요? 통일 '부총리'가 어디 끗발 부리는 것 봤소?

  게다가 '부총리 승격'은 '지금' 들여올 경우, 역기능마저 걱정된다. 관료들끼리 행정의 효율성 높이는 면에서야 얼마간 도움될 지 모르나(--흩어져 있는 교육관련 업무의 통합), 국가/관료의 독점/전횡을 허물고 백성의 민의(民意)를 받들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짜는 면에서는 더 완강한 걸림돌이 될 위험이 높다. 여러분, YS, DJ '교육개혁'이 실패로 돌아간(...그렇다! 실패했다!...)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 개혁 대상이 개혁 주인으로 똬리 틀었기 때문 아닌가? '평가 나발' 힘차게 불며 행차하시는 교육부 나리들께서 먼저, 그동안 난지도 산더미로 쌓아올린 비리와 무능함을 솔선하여 평가 받으시고 감사(監査) 받으셔야 하거늘!

   ('감사'에도 걸리지 않는, 관료들의 엄청난 태업 행위 하나 : 우리는 그동안 학력고사, 수능고사, 수없이 전국적인 시험을 치렀다. 이 자료들이 학계에 널리 개방됐어야 우리는 학교 교육이 과연 실패하고 있는지/아닌지 엄밀하게 짚고, 상세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학생들 학력 실태가 어떠한지" 별다른 자료 검증 없이 온갖 여론몰이가 난무하는 판이다. 김기석 교수는 "그간 이뤄진 주요 교육개혁 가운데 교육학적 검토를 거쳐 성안된 것이 거의 없다."며 비분강개한다. 이는 학자들의 무능함을 탓하기 앞서, 쉬쉬하며 자료를 감추고 탱자탱자 저희끼리 속닥이 맞춰온 관료들의 죄를 캐물을 일이다. 그의 책 '교육역사사회학' 서설을 참고하라.)

  지난해 '두뇌한국 21' 반대 시위를 벌이던 대학교수들 속에서 "교육부를 해체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지. 너무 뜬금없는 과격한 구호 같은가? 아직 여론의 힘을 크게 못 일으킨 우리 형편에서 '머언 얘기'임은 사실이되, 그 자체가 무슨 황당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교육부' 간판까지 꼭 떼내느냐, 마느냐는 문제는 나중에 고민할 곁다리 문제요,  새겨 들어야 할 그 합리적 핵심은, 한 통속의 관료 패거리와 교육부장관 1인에게 더 이상 '주된' 학교 살림을 맡기지 말자는 것이다. 각계 각층이 참여하는 합의제 행정기구 '교육위원회'가 주된 정책을 결정하고, 예전의 관료들은 ('노사정위원회'의 실무를 도맡은 공무원들처럼) 그 기구를 뒷받침하는 행정팀으로 복무하는 게 옳다.(---결정은 여럿이, 집행은 몇몇이!)

이것이 민주주의다!  예전의 덩치 큰 '문교부'가 '교육부'로 축소된 것도 '민주화 압력'에 떠밀려 이뤄진 것 아닐꼬? 그런데 교육부 끗발을 높여 옛날로 돌아가자는 발상은 이러한 발본(拔本)의 민주화와도, 교육의 지방자치 흐름과도 거스르는 발상 아닐런고?

     (손호철 교수는 깨끗한 정치도, 근대적인 진보정당의 육성도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서 지역 패권주의와 대통령제의 폐단을 허물 유일한 대안은 '내각제'가 아니라, '연방제' 비슷하게 중앙정부의 권력을 대폭 지방 정부에 넘겨주는 길이라 말한다. 꼭 중앙정부가 맡아야 할 '국방과 외교' 따위만 빼고. 지구화/지방화의 세계 흐름에 맞추는 데도, 남북통일 뒤에 서로 이질적인 남/북을 아우르는 데도 이 체제가 썩 어울린단다. 21세기에는 기존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민주주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고작해야 '장관의 승격'이라니!)

  우리는 어떤 셈평에서 이 성명이 씌어졌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나, 행여 '개혁 인사를 임명하면 혹시나... 미련'이 그 행간에 얼풋 배어 있지는 않은지 씰떼-업씨- 걱정 해본다. IMF 위기가 겉으로는 가라앉았대도, '한국'호의 구조적인 체질은 예나제나 한 가지로 병골(病骨)이다. 전체 사회가 대단히 허약한데, 학교만 잘 될 턱 없다. 전체 사회를 변변히 이끌어 오지 못한 세력에게 '교육 개혁'만은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긴가? 참개혁을 이끌 대안 세력이 힘있게 성큼 모여들지 않는다 하여, '선전/스펙터클 정치'만 일삼는 세력에게 자꾸 헛미련 둘 셈인가? 이 비판은 꼭 이번의 날탕 같은 성명서만 꼬집어 쏘는 게 아니다. 지난해 '두뇌한국 21' 반대 시위가 들끓었을 때, 전교조에서는 성명서 한 장 내놓지 않았다. 대학교 동향에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바빴는지?  

  ※한겨레신문을 무심히 펼쳐든다. '정부기구 개편/人事 어쩌구--'하는 글을 썼던 참이라, 그 비슷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떨고 있는 ㉠반개혁/비리 의원들, -시민운동단체의 '낙선 운동' 강력한 영향력 예고>라는 제목의 큼지막한 기사 곁에, <재경-㉡'개혁성', 교육-'전문성' 초점 : 개각 기준 '신년사' 바탕>, 따위 제목의 기사가 나란히 실려 있다. '개혁'이라---. ㉠의 '반개혁'이야 '사립학교법 개악' 따위를 가리키는 뜻일 테니 흠 없는 용어라 하겠지만, ㉡의 '개혁'이 과연 온당한 규정인지는 되물어야 한다. "현정권에서 '개혁성'과 추진력을 인정받은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이 거론된다."고 기자는 썼는데, 그동안 예산처 장관이, 아니 현정권이 나랏살림을 제대로 '개혁'해온 것일까? 즈그덜 생각으로는 개혁이겠으나, 우리가 보기엔 '擬似의사, 類似유사=pseudo, 사이비' 개혁일 따름이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여!

  얼마 전에 "예산처가 툇짜 놓는 바람에, 국악 FM방송 설립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는 보도가 있었지. 거기 드는 돈은 겨우 20억 원이었다! 최근엔 '교육정보화를 서두르라.'는 DJ 한 마디에 추경(追更) 예산 짜느라 법석이라는데, 거기 드는 돈은 무려 1조 원이라 한다. '교육정보화'도 필요한 일이긴 하되, '그렇게나' 돈 꼴아박을 일은 아니다.(⇒그 엄청난 血稅 낭비, 우리 힘껏 까발겨야 한다. 이번 '부총리' 성명에도 그 얘기가 담겨야 했었다. 부총리, 일없다, 정보화, 천천히 하자, 교원정원부터 늘려라, 이거 상식 같은 얘기, '상식'이다 못해, 아예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일쑤인 얘기하는 게 순리 아닌가?)  몇 년 전부터 교육정보화 나팔이 난리뻐꾸기였던 까닭이 컴퓨터관련 기업 돈 벌어주기 위함이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 아니던가. 그 혜택이 여러 기업에 골고루 돌아갔던 것도 아니라는 게 사후(事後) 평가다. 엉삼이때 한보그룹이나 지금의 대우그룹 따위 뒷설거지하는 데 드는 돈을 떠올리라. 재벌의 '밑 빠진 독'에는 하릴없이 쏟아붓고, 백성의 복지와 문화 창달에는 단 한 푼도 짜디짜게 내미는 게 '개혁' 예산인가? 밀레니엄 '쇼!'에는 펑펑 돈 쏟고, '국악 살리기'는 걷어차는 게 '경쟁력 확보'인가? 응?

   한국의 신문들은  정권이 내거는 용어(用語) 그대로 늘 제목을 달고 기사를 싣는다. 저들이 '개혁 장관'이라 하니, 따라서 '개혁 장관'이라 부른다. 저들이 '개혁한다.'고 일컬으니, 그런 줄 안다. 그래서 그것은 '옳은 일'이 된다. 유신시대 김명수의 시 '하급반 교과서'는 지금도 우리들 등짝을 후려치는 현실이다.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이여.>

  우리가 참교육 참개혁을 꿈꾼다 할 때는 기성 권력과 적당히 짝짜꿍하는 기성 언론들의 용어법(用語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안목쯤은 품고서 그런 청사진을 그려야 할 터. 전교조가 내놓는 성명서 한 줄, 팜플렛 한 장에도 참개혁의 관점이 늘 깔리게끔 공부하고 또 공부할 일이로다. 할!

이야기 둘 : '제3의 길'은 없다

  초등 우리교육 신년호에 실린 강순원(한신대)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의 글이었는데, 내가 '흥미롭다.'고 말한 까닭은 그가 YS, DJ의 교육개혁을 '대체로' 옹호해온 쪽이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는 "현정부의 교육정책은 분명히 한국판 신자유주의의 흐름 안에 있다."고 밝히고 있거니와, 그렇다면 내 선입견이 부정확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생각이 요즘 와서 많이 바뀌었는지 좀 갸우뚱하다만, 아무튼 지적(知的)/이론적 영역에서나마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한풀 꺾여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반갑다.

  그는 우리가 놓인 딜레마를 먼저 짚는다. 정부는 '수요자 중심론'을 내세우는데, 우리도 '학생 중심'의 교육을 부르짖지 않았던가. '계약직 교사의 다양한 채용'이 교원에게는 '노동권 침해'이겠으나, 학생 처지에서는 어쩌면 바라던 바가 아니겠는가. 세계화 바람에 '민족통일의 과제'도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고, 영어 공용화론이 득세하는 것이 심정적으로는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세계화가 밑으로 시민운동 부문의 국제 연대를 넓혀줄 가능성 면에서는 희망을 던져주기도 한다.

  그는 한때 이해찬 장관에게 기대 걸었노라 털어놓는다. 현정부의 정책 기조가 비록 신자유주의의 흐름이긴 하지만, (사회운동가였던 만큼) 언젠가는 그것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추구하겠지! 하지만 지금의 난맥상으로 보아, 현정권에게 기대 품기는 어렵고, 앞에서 짚은 딜레마를 (예전보다 훨씬 토대가 탄탄해진) 교육시민운동 세력이 나서서 뚫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과 민의 협력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현장 중심의 개혁! 그런데 어디로 가자는 얘긴가?

  '세계화의 덫'에 빠질 단순한 신자유주의의 길이 아니라, 공공성 위에서의 경쟁! 공존의 가치도 터득하고 경쟁력도 키우게끔 교육하기! 새로운 개인주의! 기든스가 내건 '제3의 길'! 영국 노동당이 내건 '모두를 위한 수월성'! 우리의 대안을 찾자면 고등교육은 철저히 '시장'에 맡기고, 보통교육은 공공성 개념을 강화하자는 것!

 하나하나 따져 살피자. 강순원뿐 아니라, 한국 사회과학계 여럿에게(한상진 등등)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은 한때 무언가 희망의 새 길을 비춰줄 등불로 다가왔지. <책임을 거느린 권리, 민주주의 위에 세워진 권위,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공공성과 경쟁의 결합...> 좌파와 우파의 사상을 중도 통합하려는 그의 담론은 그 자체로서는 큰 '흠'을 찾을 수 없다. 아니, 무식한 '시장 근본주의'의 폐해도 바로잡고,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불러온 설익은 좌파 이론도 현대화하겠다는 취지야 백번 옳은 것이렷다.  문제는 유토피아를 그리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제3의 길'과 그 깃발 아래 영국 노동당 블레어 총리가 벌여온 현실 정치로서의 '제3의 길'이 갖는 함의는 '한참 다르다.'는 사실이다.

  블레어 정부가 입으로는 민주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을 부르짖었어도, 실제로는 자유주의 실천에 거의 기울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세계시민사회나 세계민주주의'를 내걸면서 실제로는 미국 패권주의에 들러리 서 왔고, 평등과 복지를 중시한다면서 내놓은 정책이라고는 보잘것없는 최저임금제뿐이었다. 기든스조차 블레어가 (입에 발린) 선전 정치를 통해 집권했고, '스펙터클/눈요깃거리의 정치'로 몰락할지 모른다고 경고한 적 있다.

  그런데 기든스 자신은 아무 흠이 없는 것일까? 제 이론은 아무 흠이 없는데 권력이 악용했을 뿐인가? 그는 한편으로 블레어가 자기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편들어준 바 있다. 김대중을 방문해서도 격려한 적 있다. '중도 통합'의 추구가 현실에서는 '우편향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꼴로 나타난다면 그 이론은 허울만 그럴싸한 '관념적인' 이론 아니겠는가?

 '제3의 길'이라는 용어 자체도 대중을 어지럽힌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것부터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중간(=1.5) 길을 가겠다는 얘기였는데, 그것과 자유주의의 중간이라면   중간길이 아니라, 중도우파(=1.25)의 길일뿐이다. 그런데 내거는 용어는 마치 '중도(中道), 중용(中庸)'의 지혜를 그러모으는 것인 양,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강순원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가 과연 현정권에 대한 기대/미련을 (지금은) 떨쳐버렸느냐는 점이다. 현정권은 '한국판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이어간다 했고, 자신은 기든스/블레어 류의 '제3의 길'을 좇는다 했는데, 김대중도 자신을 '기든스의 추종자'로 내세우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그는 '교육시민운동 세력'에게 기대를 건다 했다. 그들이 지금 '(교육재정) GNP 6% 확보하기' 운동을 펼치는 것이야 마땅히 손뼉칠 일이지. 하모! 하모! 하지만 그 '연대 회의'에 참가하는 단체 모두가 개혁 방향에서 '민중적인 길'을 제대로 밟아 왔노라 말하기는 어렵다.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와 '참교육 학부모회'가 현정부가 내세운 '교육 공급자/수요자 대립구도'에 솔깃하여 따라갔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요, '경실련'이나 '흥사단'이 노동운동에 대해 삐딱한 선입견을 품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하여 김대유(전교조 정책연구국장)도 따끔하게 경고하고 있다.

  <...교육부는 '교직 발전안'을 밀어붙이려고 학부모단체와 전교조를 '대립 구도'로 몰고갈 확률이 크다. 우리는 그동안 이 문제에 미적지근하게 대응해왔다. 학부모단체와 되도록 협조 관계를 맺어야겠지만, 때로는 '대립'도 피할 수 없다. 과감하게 학부모단체를 비판하는 것도 이제는 필요하다. 또, 민노총이나 한노총 같은, 서민 대중을 대표하는 단체와 한시바삐 공조(共助)체계를 꾸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의 시민운동을 무턱대고 다 찬양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를테면 그런대로 넉넉히 점수를 줄만한 '참여연대'의 경우도 그들이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가게끔 민중운동 쪽에서 길잡이를 하는 한도에서만 그네들 운동이 진보성을 띨 수 있다. 매스컴의 관심을 끌었던 그네들의 <소액주주 운동>도 그렇다. '소액 주주'들이란 어떤 사람인가? 재벌 대주주한테 늘 뜯기는 존재라는 면에서는 '약자(弱者)'이지만, 일확 천금의 단기(短期) 이익을 좇게 마련이라는 점에서는 사회의식이 건강하지 못하다. 저희 배당금과 투기 이익을 위해서는, 몰인정한 정리해고에도 서슴없이 찬성표 던져 반(反)노동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소액주주의 권리 높이기'는 <'노동조합의 경영권 참가'와 결합될 때만> 엇나가지 않는다.   

  강순원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한편으로 무작정 '교육시민운동 세력'을 칭송하고, '관과 민의 <협력>'을 다시 들먹이는 것을 보면 그가 '지적(知的)인 곡예'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놓인 딜레마'라며 그가 "계약직 교사의 채용이 학생들에게는 바라던 바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먹인 것도 그렇다. 학생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가 어찌 '교사들을 자꾸 갈아치기'이겠는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정말로 쓸모있는 수업을 듣는 것 뿐이지. 일찍이 30여년 전에 한 초등학생이 '내 무거운 책가방'이라는 시에서 그 진실을 꿰뚫어 갈파했다. "....아주 공갈 사회책....얼마나 더 공부해야 어른이 되나?" 그 무거운 책가방  덜어줘서 수십년 절절히 맺힌 염원 좀 풀어주고, 아이 눈에도 '공갈'로 비치는 엉터리 교과서들 본때있게 혁신해내고, 그 다음에 '선택과목 어쩌구' 고민해야 순서 아닌가? 어째서 알 만한 분이 얄팍한 '7차 교육과정'을 무슨 아리아드네의 실꾸러미인 양 여겨, 현혹돼 있다는 겐가?

  그가 내놓은 얘기 중에 제일 심상치 않은 대목은 <고등교육을 철저히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다. 그는 <보통교육 → 공공성, 대학교육 → 경쟁>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제3의 길'이라 내세우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관념의 누각(樓閣) 짓기'일 뿐이다. 물론 아르헨티나처럼 초등학교마저도 마구 '민영화'하는 나라와 견주자면, 이 영역만이라도 공공성을 지켜 주겠다는 말씀이 고맙기는 하지.  문제는 '대학교'라 하여, '철저히' 시장에 맡기자는 얘기가 가당하냐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이 살아난다? 진짜로?

  '시장(市場) = 만능'이 아니라는 얘기는 비판경제학자들이 너나없이 일깨워준 이야기다. 이번 회보 뒤쪽에 실은 참고자료 '장하준'의 글을 꼭 읽어주시기 바란다(!!)  자본주의 나팔꾼들은 소리 높여 '자유방임!'을 받들어 외치지만, 어느 선진국이든 강력한 '국가 개입' 없이 저절로 경제를 일으킨 나라는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고만고만한 대학끼리 아웅다웅하며 '도토리 키 재기'하는 형편에서 '대학 개혁'을 일구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혹시 '케 세라 세라'가 웬만큼 먹혀들지도 모르지. 허나, 이미 굵직굵직한 대학들이 학벌/족벌/학연으로 똘똘 뭉쳐 저마다 아성(牙城)을 쌓고, 1등에서 꼴등까지 완강한 서열 구조를 굳혀 놓고 있는 마당에,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만 거두면 자유경쟁이 저절로 꽃피고, 입시 지옥이 슬그머니 스러질 것이라구? 아서라, 낮꿈 깨시게나! 그동안 교육부 당국이 '성적'말고 여러 가지로 선발 기준을 다변화하라고 아무리 꼬드겼어도, 이른바 명문대들이 '수능 고득점자' 끌어모으기에만 핏발 세워 왔던 현실을 떠올리라.

  -우리가 내세우는 것은 단순한 '국가 개입'이 아니라, 백성들의 여론이 국가 기구를 통하여 관철되는 것이다. (관료들더러 대학 운영에 간섭하라는 게 아니라), 나랏돈을 보통교육에는 얼마, 고등교육에는 얼마큼 베풀지, 비리(非理) 사학재단은 어찌 다스리고 학교 운영체제는 어찌 혁신할지, 백성들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고 백성의 성난 눈초리들을 원군(援軍) 삼아 대학을 수술/개편하라는 것이다. '市場'은 수술이 끝난 뒤, 일상 국면에서 작동케 하든지, 말든지 따질 일이다.     -김기수 교수가 '사립대학의 주인은 그 재단 이사장'이라고 버젓이 써논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분이 '시장 만만세!' 외치는 손꼽힐 나팔꾼이다. 그런데 사학재단이 저희끼리 멋대로 학교를 주무르고, 교수들은 교주(校主) 눈치 살피기에만 허둥댈 때(...이사장한테 '이일-또옹- 기립!' 거수경례까지 올려붙인 대학이 있었단다....), 학문경쟁력이 과연 살아날까? '비판정신' 없이 학문은 꽃피지 못한다. 민주주의 없이 市場은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한다. 교수/학생더러 학교 기구의 운영에 열성껏 참여케 할 '제도 개혁' 없이 학교의 '경쟁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인데, '시장 만능론자'에게는 이 문제의식이 까맣게 지워져 있다.

  -대학의 기초 학문은 당장 돈 되는 영역도 아니요, 시장이 그 졸업생들 일자리를 제대로 마련해주지도 못한다. 길게 돈 들여야 할 영역은 국/공립대 쪽에서 떠맡아 키워야, 사립대 쪽이 돈 부담 덜 지고서  제 구실 꾸릴 수 있다. 이것을 어찌 시장에 맡긴단 말이뇨?

  -지금 한국의 대학들은 서울대를 본따서 서열 경쟁과 덩치 키우기를 일삼느라 매머드처럼 비만해진 것들 투성이다. 이것이 '국가'만의 잘못일까? 같이 짝짜꿍 맞춰온 '시장의 실패'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감한 군살 빼기 구조 개혁이 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그저 '교주(校主)'들에게, 아니면 각 학교 교수들끼리 알아서 정하도록 맡겨놀 일일까? 응?

  -우리는 '경쟁'이라면 치를 떠는 외눈백이 국가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동구권의 몰락이 우리에게 '시장 발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 '경쟁'을 말하자. 우선, (산업현장과 달리) 학교부문은 시장 경쟁이 '크게' 주름잡아서는 아니될 영역이다. 또, (강순원은 '공공성과 경쟁의 결합'을 얘기한다만) 우리네 학교에 어디 '공공성'이 제대로 뿌리내려 있는가? 중등학교는 아직 의무교육의 혜택을 베푼다 말하기 어렵다. 세상에, 온 가산(家産)을 털어 부어야 과외비, 대학 학비 메꾸는 판인데, 이 요지경을 시장이, 요컨대 사립대학 당국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니, 국/공립대를 없애 주겠다니 될 법이나 한 얘긴가? '공공성 세우기'부터 궁리할 일이로다.   그들이 오매불망 애태워 그리는 '경쟁'은 '때 되어' 고민해도 늦지 않으리. 지금은 '공공성의 확립 자체가 경쟁력 확보의 길'임을 깨칠 때로세.

  강순원은 아무리 봐도, '제3의 길'에 깊이 반해 있다. 그리고 "교육시민운동 세력이 힘껏 거들어 주기만 하면, 신자유주의 냄새 물씬 풍기는 현정부도 '중도'의 길로 되돌아 오려니..", 변함없이 포옥- '짝사랑'을 품고 있다.(....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정권의 가을'인가요?...)  

현정권이 요즘 들어 '생산적 복지'를 내걸자, "어머나! 이제 드디어 탕아께서 돌아오셨군요! '중도' 정권을 모시게 돼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환영 플래카드를 내거는 분들이 있단다. 그런데 아시는가? '생산적 복지'도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일부(一部)라는 사실을!  이것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이 펴온 복지 정책을 '소모적/소비적' 복지라고 깎아내리며 일찍이 영국의 대처가 내걸었고, YS도 진작에 치들었음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라도 들여온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합네만, 우리에겐 '복지'랄 것이 애시당초 없어서 '생산적 어쩌구' 하며 삐뚤어진 수식어를 덧붙일 염치가 없다. 통계를 들춘다. GNP 대비 복지예산 지출이 스웨덴 34%, 독일 30%, 영국 23%, 한국은 정부예산기준 1%, 정부지출기준 3%다! 앞으로라도 나아질 것인지 그것마저 불투명하다. (유럽 기준으로는) '악독한' 것으로 정평난 영국형 신자유주의에도 한참 못 미치는 복지 정책을 두고서 '중도 정권'이라니!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람들 중에는 'DJP 연합'을 '한국판 제3의 길'이라며 칭송하는 분마저 계시단다. 우라, 할렐루우야! 어떻게든 '신자유주의'의 추악한 몰골을 가리려고 안달하는 꼴들이여. 그렇게 너도나도 저희를 꾸미려고 갖다 들이대는 '제3의 길'이라는 것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우향우(右向右)!'를 변명하려고 만들어낸 '제3의 길'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없다. 신자유주의 패권을 다소곳이 '운명'으로 떠안는 '제3의 길'에는 도무지 희망이 없다. 이 푸른 별 어디에도 백성들의 '대동(大同) 세상' 소망과 함께 갈 '제3의 길'은 없다!  

이야기 셋 : 바리데기의 노래

  지난 해, 지방 선생님들과 밤 이슥토록 이야기판 벌인 자리에서 사회주의, 아니 자본주의의 진로(進路)를 둘러싼 토론이 잠깐 튀어나왔다. 밤도 짧고, 우리네 체력도/지혜도 짧아 긴 얘기 못 나눈 것이 못내 아쉬워, 이 참에 몇 줄 간추려 적는다. Michael Lebowitz가 쓴 'BEYOND CAPITAL'('백의'사 펴냄)에서 많이 옮겼으니, 지식에 마르신 분께는 이 책을 권한다.

  먼저 우리들께 묻는다. 다음의 3단 논법은 옳은가, 그른가?

  ① 자본주의는 여지껏 끄떡없다.

  ② 노동자 계급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헤게모니에) 질질 끌려가기만 한다.

  ③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영원하리라! (Pax Capitalismus!)

  ①과 ②가 사실이라 해도, ③이 반드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①과 ②는 '대체로' 사실이다. 그래서 ③의 결론을 희쭉해쭉거리며든, '울며 겨자 먹기'로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 해도, ③이 '논리 필연'은 아니라는 얘기다. '대체로 사실'과 '논리 필연/우연'의 이 좁은 틈새를 현실에서 뚫어내려면 <우리네 정신이 눈 앞의 현실에 무릎꿇지 말 것!>이 전제(前提)돼야 하겠지.

  고르바초프와 옐친이든, 황장엽이든, 수없이 와르르 전향(轉向)한 데는 맑시즘이 스탈린주의 쯤으로 옹색하게 깎여서 퍼뜨려진 까닭이 컸다.(--물론 맑스가 쓴 책들의 내용이 들쭉날쭉에 미완성이었으니, 그렇게 一面化될  구석이 맑스 자신에게도 있었다.)  스탈린주의의 특징이 무엇인고? 바로 (인간 주체의 실천을 지워버린) '생산력주의'니라. 흔히 인용되는 맑스의 글부터 읽어보자.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르면 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시대의 생산관계와 갈등하게 된다...그 생산관계들은 생산력 발달에 족쇄/장애로 바뀐다. 그래서 사회 혁명의 때로 접어든다...어떤 사회구성체도 그 사회가 허용할 만큼 "생산력이 완전히 발달하기 전에는" 사멸(死滅)하지 않으며, 낡은 사회의 틀 안에서 새로운 생산관계가 태어날 '물질적 조건'이 성숙하기 전에는 낡은 생산관계가 더 우월한 생산관계로 바뀌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얘기가 옹색하게 읽히면, 전향(轉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본'이 생산력 발달에 더 이상 '최적(最適)'이 아닐 때라야 '자본'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팍스 아메리카나'의 현실이 웅변하듯이 '자본'의 통솔 밑에 생산력은 거듭 커나가지 아니하는가. 그러니까 '자본'의 깃발은 앞으로도 한참 동안 드날릴 터이로라!! 이 논리를 쬐금만 더 밀고 나가면, '자본주의'말고 딴 대안은 찾을 길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역사 발전'은, 인간의 의지, 사회적 실천과 아주 동떨어진 자동적인/추상적인 과정이 돼 버린다.

  그런데 백성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밑에서는 도무지 못 살겠소! 갈아치웁시다!"하고 일어설 때는 그 생산관계가 자신들의 '필요욕구'를 거의 채워주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게다. 무슨 '욕구'인가? 이승만때 터져나왔듯이 "배고파서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 길 찾자!)"는 아우성 쯤인가? 그것 쯤이야 자본주의가 너끈히 해결해줄 수도 있다. "그런것쯤 우리가 알아서 다 들어줄 테니 군소리 말고 우리를 '하늘'로 모시라."고 자본은 의기양양 뽐낸다.

그러나 이를테면 "우리, 쏘나타/카니발/그랜저 몰고 팔도강산 유람 다니는 것도 일없다.   깨끗한 물/공기 마시는 게 더 소중하다."고 백성이 들고 일어난다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최적(最適)'의 가면을 버젓이 둘러쓰기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후천개벽을 간구할 때는? GNP 성장이 둔해지는 때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계발된 사람들의 필요 욕구에 걸맞는 방식으로 생산력이 발달하지 못하게끔 자본이 가로막을 때>다! '생산력 우선' 명제는 '필요욕구 우선' 명제로 바뀌어야 한다.

  왜 자본주의는 영생 또는 평화를 누릴 수 없는가? 우선,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과잉생산/과소소비에 따른 공황을 일으킨다. 1929년의 대공황, 그리고 IMF 부도사태의 바닥에 깔린 구조불황을 기억하라. 또, 자본은 끊임없이 자연/환경을 착취한다.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가능한 미국의 자본주의 농업을 찬양할 일이 결코 아니다. 세계 곳곳의 땅이 황폐해져서 '사막'으로 뒤바뀌는 실태를 모르는가?  옥수수박사 김순권이 '슈퍼 옥수수'를 베풀어 북한의 식량난을 구한다지만, 기적이야 땅심의 착취에서 나올 뿐이지. 오래오래 땅심(地力)을 가꾸며 먹거리 얻는, 공공의 이익에 터한 참농업과 자본주의 논리는 양립할 수 없다. 우리네 부(富)의 원천은 무엇인가? 땅과 사람/노동자다. 그런데 자본은 '내 죽은 뒤에 대홍수가 나건 말건',  이 둘을 갉아먹으며 번성한다.

  궁핍해진 사람이 새 세상을 꿈꾼다. 여기서 '궁핍'이란 그저 <상품을 사들일 돈이 모자란다>는 뜻만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저만치 밀쳐버리는, 상품 아닌 것들에 대한 인간적인 욕구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달디단 공기를 삼키고, 자유시간을 즐기고, 공동체를 이루며 오손도손 살고픈 바램까지를! '자본주의는 빈곤을 물리쳤다.'고 자랑 삼는 사람이 많다. 세계 전체를 통틀자면 그 명제 자체도 썩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이렇게 ('궁핍'의) 뜻을 넓힐 때,  "자본주의는 반드시 '궁핍화'를 데불고 다닌다."는 현실이 선연해진다.

  그런데 변혁의 때는 언제 무르익는가? '어느 때가 임계점'입네 밝혀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흔히 '공황'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나타내는 것이라 믿고 싶어 하지만, 이 때는 자본의 정체가 드러날 때, 정체 파악이 쉬워질 때일 따름이다. 백성이 원해서 더 / 덜 생산하는 게 아니라, 자본이 이윤을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공장 설비가 멈춰 서고, 쓸모있는 일꾼들이 쓸모없는 실업자(失業者) 신세로 내동댕이쳐지는 때! 하지만 단지 궁핍해졌다 하여,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깨달음이 저절로 싹트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눈 앞의 빈곤/실업'을 해결하려는 싸움은 자본주의 테두리 안의 '개량 요구'로 그치게 마련이다. 왜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기는 까다로운가?

  ....한 젊은이가 취업 시장 앞에 섰다 치자. 그가 호구(糊口)를 이으려면, 저를 받아줄 수많은 기업이 있어 줘야 한다. 기업들이 탈없이 굴러가지 않고서 어찌 수많은 노동자들이 취직하고, 토끼 낳아 기를 엄두를 내겠는가? '재벌이 나라 경제 망쳤습네.'들 떠들지만, 한편으로 삼성, 현대, SK가 으리으리한 위용(威容) 갖추지 않고서 어찌 한국경제가 놀라운 고(高)성장을 이뤘겠냐는 되물음이 나올 만하다. 자본이 노동을 등쳐 먹는다구? 내가 일해준 만큼 월급 받아오고, 그 돈으로 그런대로 살 만하거늘, 내가 어째서 삼성, 현대...한테서 뜯겼단 말인가? 내가 일하는 공장은 값비싼 최고급 기계설비가 가득하고, 우리 노동자 몇몇이 맡은 구실이라야 그 자동화 설비가 굴러가는 것, 거드는 일뿐이다. 눈부신 생산성 향상이 우리 덕분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

<개별> 노동자가 맞닥뜨리는 자본(들)은 그가 살아가는 데 필수의 '전제(前提)'로 비친다. 회사와의 노동 계약은 자유롭고 대등한 거래같은 느낌을 준다. 몇몇 노동자의 땀보다는 비싼 생산수단/기계설비가 더 생산성을 높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전체>로서, '재생산'돼 가는 것으로 헤아릴 때, 이같은 환상은 슬며시 걷혀 사라진다.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처럼 진공(眞空) 속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지평 위에서 '전체'를 볼 때!

 특별난 '생산 수단'을 들여와 생산성이 늘었다면 이는 무슨 신비한 힘 덕분이 아니라 그 생산 수단을 만들어낸 '딴' 노동자들 덕분이다. 삼성과 현대, SK가 고성장을 이뤘다면, 이는 그 재벌 총수들에게 신비로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본을 매개로 하여> 수십 만명 노동자들의 사회적 노동이 효율적으로 결합되어 생산성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개'하게끔 예속파시스트들의 국가가 물질/이데올로기 양면으로 뭉텅이뭉텅이 지원했지. 고성장과 생산성 향상의 공(功)은 '전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가야 하거늘, 몇몇 자본가는 천문학적인 부(富)를 누리고, 대다수 하층 계급은 갈수록 빈궁해진다.

  자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본'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일하는 백성 스스로 생산을 조직하여 협동 경제를  꾸린다는 얘기다. 저마다 능력/재주가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의사소통도 변변히 이뤄지지 않는 수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어찌 한 뜻으로 규모 큰 사회의 살림을 꾸릴지, 코웃음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본들 '자본' 없이는 세상 경영이 안 돼!"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백성의 뜻을 '전체'로 결집해내는 데 무력한 한, '노동자정당이 집권한대도' 그 정부는 기업가를 비단방석에 모시고, 자본주의 제도를 재생산해내기 바쁘다. 사회주의가 타락하여 국가자본주의가 된다.  

  그래서 후천개벽이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동구권이 몰락했고, 그래서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이 신자유주의 경쟁틀을 흔쾌히 떨쳐낼 엄두를 못 낸다. 자본주의가 '최적의 자원 배분'을 해내고, 최고로 생산력 발달을 자랑해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정규/비정규, 숙련/비숙련, 대기업/영세기업, 백인/흑인, 남성/여성, 본국인/이주민으로 갈가리 찢겨 있기 때문에, 나뉘어 있는 한도에서 자본은 '늠름한 매개자'로 자신의 권력을 뽐낸다.(--자본의 목표는 '효율성 그 자체'가 아니라 가치 증식과 자본축적, 즉 '자기 몸집 불리기'임을 잊지 말라.)      

  자본주의를 넘어설 '충분 조건'은 무엇인가?  노동자들이 '전체로서 자본의 권력'에 맞서는 싸움 과정에서 자신을 '하나의 단일한 존재'로 세우는 일이다. 계급 투쟁이 떠맡는 으뜸 구실이 바로 이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의 '매개' 없이도 백성 스스로 뜻을 모아 이 세상을 굴려 갈 수 있음을 다들 깨닫는 일이다. <정말로 수준 높은 자각>이 백성 대다수에게 싹틀 때라야 우리는 딴 사회를 현실 프로그램으로 밀고갈 수 있다.   이것은 폭좁은 노동조합의 요구만 내걸어서 될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 탈바꿈하려는 임금노동자/임금노예들의 싸움"이 성공하려면, 생태계 살리기(...'온생명' 사상의 깨달음), 가부장제도의 타파, 자본주의가 뭉개는 왼갖 문화가치들을 북돋는 싸움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혁명은 '그저 궁핍해서'가 아니라, 온세상에 깨친 백성의 무리가 결집될 때라야 가능하다.

  까마득한 일일까? 그것이 까마득히 느껴지는 까닭은 세계 혁명의 어려움 때문이지, 결코 자본주의의 효율성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엉망투성이 현실만 만들어낸다. 나는 머리가 아둔해서 자본주의가 영생(永生)을 누리리라, 흰소리 치는 사람들 얘기를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다. 가령 미국의 총명한 지식인 레스터 서로우가 쓴 책 '지식의 지배'가 감명 깊었노라는 뇌까림이 있어 훑어 보았더니, 여러 가지 정독할 대목이 많긴 하더라. 하지만 그가 자본주의를 예찬/두둔하는 논거는 형편없다. 그 친구는 '자원의 유한함'을 걱정 말라며, 기술이 혁신될수록 예전엔 채굴할 엄두를 못 냈던 것까지 더 캐낼 수 있다 한다! 그렇다고 무한히 캐낼 수 있다는 얘긴가? 선진국이 될 수록 환경도 개선된단다! 그러니 당장 지구에 종말이 닥칠 것처럼 '패닉'에 빠지지 말라는 충고로서야 온당하겠으나, 그 은밀한 전제= '모두 다 선진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는 명제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까마득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경문제를 깊이 통찰하는 사람들의 문명 비판에는 자본주의 원리에 대한 비수/은장도가 겨눠져 있다. 인간끼리 최대생산력, 최대 효용만 추구하다가는 그 물질이 거덜나기 전에 그 정신이 외로움을 못 이겨 타락해버릴 수도 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적게 먹고 가늘게 싸는 길'뿐이라는 판단은 물질 면에서든, 정신 면에서든 쉽게 논박할 수 없다.    

  까마득한 일일까? 소름 돋게 까마득하다. 한겨레신문을 들추니, 우리 나라 대학이 '경쟁의 무풍지대'임을 개탄하면서, "한번 추락하면 영원히 낙오자가 되고 마는 무자비한 (국제)경쟁에서 (한국 경제가) 살아남고 봐야 한다. 자원 없는 나라에선 '경쟁력 강화'뿐!"이라고 부르짖는 (김형배의) 칼럼이 실렸다. 우리 대학들이 그동안 '개판'으로 굴러왔음은 분명하지. 앞으로 구조개혁을 통해 '얼마만큼' 경쟁을 들여오는 것도 수긍할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학생운동 배경이 있는 필자가 '성장 일변도' 정책을 지지한다니, 못마땅해 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성장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며 사생결단(?)을 다그치는 태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수십년 샴페인 터뜨려 가며 고도성장을 누린 결과가 지금 고작 '생존/안위'에 벌벌 떨어야 할 지경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는 대학교수들의 보신주의를 매질하기 앞서, 지배/기득권 세력을 수술하고, '성장 일변도' 정책을 단호하게 수정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러고나서, 경쟁이고 나발이고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존 자본주의에 무릎 꿇겠냐, 아니면 까무러칠 거냐,' 양자택일을 눈 부릅떠 강요하는 세력만 판치고, 백성은 생존에 허덕이기만 할 때, 새 사회의 전망은 열리지 않는다. 블레어가 을러댔다지? '딴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고! 블레어, 이 사람아, 딴 대안 마련 못하면 세상 백성들 오래 못 살아(There Are No Lifes!)! '시민 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실현 행동(아탁)'을 이끄는 한 프랑스의 석학은 미국 지배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반(反)세계화' 국제여론이라며, '세계화 압력'에 멍청하니 굴복하지 말 것을 부르짖는데, 한국의 언론은 "느그덜, 죽을 텨? 살 텨?" 협박만 일삼는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아엠에푸의 간섭을 늠름히 거부했고, 프랑스 정부는 '투자에 관한 다자(多者)협정'(MAI)을 걷어차 물거품으로 돌렸는데, 김대중씨는 아엠에푸의 권고를 120% 추종하여 '아엠에푸 서울지부장'의 명예(?)를 얻었다.(→손호철의 책 '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 참조.)  까마귀숲 저 너머가 까마-득하노매라.

  까마득한 일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요즘 부도 재벌에 빚더미 재벌이 잇따르자, 진보학술진영에서 '재벌을 국민이 접수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접수'라 하여 엄청스레 과격한 제안이 아니다. 몇 %도 채 못되는 지분/몫을 내세워 거대한 생산력을 온통 쥐고 흔든 재벌총수들의 경영권을 빼앗고, 그 기업/재벌에 돈 대 준 은행이 '빚을 출자로' 바꿔서 경영권을 행사하라는 것이요, 그 은행을 '국민의 것'으로 구조개혁하자는 얘기다. 무슨 신비한 자본의 철옹성 쯤으로 여겨졌던 재벌그룹도 (몇몇 '난- 놈들' 아닌) 여러 어중이떠중이 백성이 모여서 너끈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경험들이 모이고 쌓인다면 '자본 독재'를 한 풀 꺾어낼 뿐 아니라, '자본 자체'를 퇴출시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까지도 서서히 잠재울 수 있다.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탈자본주의 의식은 하루가 다르게 커나간다.

  까마득한 일일까?  세계 백성의 지혜를 한층 높여내기는 꿈같은 일일까? (자본이 팔아먹는) 소비재 즐길 자유에만 살포시(?) 젖어 노니는 젊은이들을 스칠 때마다 한숨이 나오지만, 그 모양 그 꼴로 언제까지나 이어가란 법은 없다. 한때 우리네 젊은이들은 '포효하는 사자들'이었다. 긴숨 못 버티고 풀꺾인, 대학물 먹은 80년대 지식청년 얘기가 아니다. 새 세상 건설에 일떠선 해방정국 시절, 학교 문턱 못 밟은 일자무식(一字無識) 농민의 자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찍이 파올로 프레이리는 '글 배우기'를 무슨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소설 '상록수'식) 소박 단순한 계몽주의가 아니라, '세상 바꾸기'와 맞물려야 한다고 부르짖었거니와, 그때 그가 염두에 뒀던 것은 브라질 까막눈 농민들이었다. 글자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과정이 바로 세상눈 새롭게 틔워가는 과정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고, 70년대 교사운동 길찾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았지. 허나, 모델을 한참 먼 데서 찾을 일이 아니었다. 우리네 아버지, 큰아버지 세대에 그보다 훨씬 혁명적인 실천이 있지 않았더냐.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에게 예전에 들은 얘기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 山으로 갔어요. /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신동엽이 노래한 山사람 얘기다. 그이들은 너나없이연필에 공책을 들고 다녔단다. 그이들이 저희편에게 적어 보내는 글 첫머리는 늘 '세계 정세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됐단다. 그 거창한 분석을 펼치는 이는 무슨 대학 먹물 먹은 사람이 아니다. 몇년 전만 해도 김매고 밭 매는 일에만 목을 매던 '눈 뜬 소경'들이었다. 새 세상 건설에 몸을 일으키고부터야 비로소 '글 배우기'에 나섰지. 글을 배우고서 세상에 눈 뜬 게 아니라, 눈 뜨고서 떠듬떠듬 글을 배웠지. 혁명하려고! 그네한테 연필은 너무나 귀중한 변혁의 도구였다. 닳고 닳아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에도 못 미치는 짜리몽땅 몽당연필이 서늘히 잠들어 있었다 한다.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린' 곳에.  

  새 세상에 대한 벅찬 열망이, 까막눈으로 하여금 겨우 한두 해만에 '세계정세 분석 논문'의 필자로 거듭나게 했다. 비록 '거대한 패배'로 끝나긴 했어도, '깨친 백성'이 세상을 온통 뒤바꿀 수 있음을 그이들은 증명했다. <앉은뱅이 나자로>들이 벌떡 일어서는 것이 꼭 '기적(奇蹟)'만은 아님을 우리는 한국에서 배운다. 언젠가 세계의 '나자로'들이 한 치 두 치 무릎 펼 날이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무릇 사람들은 기다림에 지치다 보면 스스로 행동에 나서기도 하니까.     

  '20 대 80의 사회'로 나아갈 '80들'의 역사적 운명을 설핏 떠올리려니, 우리 민속 설화에 나오는 한 인물이 얼비친다. 들어 보시려나?

      ...옛날 어디 한 나라에
      임금 부부가 살았네
      오순도순 두 어른 잘 살았는데
      다만 하나 자식 복을 못 누렸다네
      떡두꺼비 아들 하나 빌고 빌어도
      딸만 내리 일곱을 떨구고 나니
      임금이 기어이- 썽이 났네
      낳자 마자 홧김에 그 일곱째를
      서러운 산골짝에 퍼다버렸네
      지지리 복도 없는 이 애 이름은
      '버린 애'란 뜻이 담긴
      '바리데기'였다네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두 부부는
      늙고- 병들어- 몸져 누웠네
      어쩔 거나, 죽을 날만 기다릴꺼나?
      아니지, 내쫓긴 일곱째가 있지

      어화- 넘자  어화리 넘-
      떠나갔네, 바리데기! 서쪽 나라로
      깊은 산 깊은 물 건너
      땅끝 두메 넘어
      거기서 신비론 약을 구해 왔다지
      버림받은 딸년이 몸을 일으켜
      저를 버린 어버이를 살려 냈다네

      이 얘기 얻어 들은 무당 아낙들
      이 색씨를 저희네 '어머니'로 삼았지
      백성의 병과 근심 달래 주러 갈 때
      이 얘기를 꼬-옥 노래로 불렀네
      '제 설움 버리고
      큰 사랑 보듬은
      한 아낙 있노라'고...

   요즘 미국에서 과학기술 전공한다는 사람 중에는, 화성(火星)에서 사람이 살 '우주 도시' 따위나 궁리하고 설계하고 앉았는 사람도 여럿 있단다.(쯧쯧)  대기/환경 오염이 무척이나 심해졌을 경우를 대비하여 저희끼리 안전하게 살아갈 인공 도시를 그려보는 사람도 있다 하고.  몸져 누운 어버이를 외면한 첫째-여섯째 자식들처럼 그 좋은 머리를 저희끼리, '20'끼리 사는 데만 쓴다. 지구에 남을 사람들이 지구를 살릴 수밖에 없듯이, 세상을 구원할 무리는 '80'의 일하는 백성들밖에 없다. 예부터 온백성이 '바리데기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그런대로 여지껏 탈없이 굴려 왔다면, 요 일이백년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망아지로 나댄다 하여 인류가 희망을 버릴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야기 넷 : 연구대회를 다녀 와서

  전교조 부설 연구소가 마련한 제4회 교육정책 연구대회(1월 14/15일)에 참가하여 얻어들은 얘기를 몇 부분만  소개한다.

  '교직발전 종합방안'과 '7차 교육과정'에 대한 발제 : 시급하게 그 대비책이 토론돼야 할 것은 '수석교사제'다. 정부가 올 예산 칠백 억원까지 잡아놓고, 그 시행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으니까. 이 방안은 교총쪽 로비를 받아들인 것인데, 저들의 '교육개혁'이 완전히 뒷걸음질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야합!

  주최쪽이 내놓은 방침은 당연히 '전면 거부'다. 이에 대해, 수석교사제에 대한 교사들의 지지를 외면해선 안된다면서 '교장 ↔ 수석교사' 이원화 방안을 제출한 사람이 있었으나, 수석교사제가 내포한 여러 문제점을 짚는 발언들에 밀려, 거둬지다시피 되었다.

  교사들 일부, 중년층 교사들 중에 '수석교사제'에 솔깃해할 사람들이 꽤 있음은 분명하다. "전교조, 느그덜 그렇게 나오면 우린 교총을 밀겠어!" 그러니 '전면 거부'보다는 무언가 '절충안'을 찾아야지 않겠냐는 압박/유혹도 받을 만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궁리가 떠오른다. 앞엣 이원화 방안도 그 하나. 그런데 교장/수석교사가 동등한 권한을 누리며 병존한다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두 쪽이 맡는 영역이 분명하게 나뉠 수 있을까? 무언가 평교사의 또다른 승진 방안을 마련하고픈 욕구를 접어 두고, 문제를 살피면 억지스런 제도라는 것이 두 눈에 자-알 보인다.

  특별한 흠이 없는 한, 누구나 '수석 교사'로 승격되게 하는 방안: 정부 방안이 숨겨 놓은 속셈을 제거하고, 중년 교사들에게 어떻게든 대접해 준다는 점에서 검토할 가치는 있는 안이겠다. 하지만 문제를 근본부터 살펴야겠다. 정부안에 따르면, 이들이 맡는 구실이 '자기 수업 + 임상장학 담당 + 현장 연구 + 교내 연수 주도'라 하는데, 우리네 학교는 교과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아서 이들이 할 일이 딱히 찾아질지 의문이다. 이 물음은 제쳐 놓더라도, 경력이 오래 되고 연수를 꽤 받은 교사라면 누구나 후배 교사들을 지도해낼 수 있을까? 국민들 중에는 "나이 먹은 교사들일수록 실력이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꼭 근거없는 의심이라기는 어렵다. 차라리 교재연구/학급운영의 열의가 높은 젊은 교사한테 현장연구, 교내연수 업무를 맡기는 게 낫다고 본다면, '수석'을 들여와야 할 근거는 참 빈약해진다.

  '수석'의 말뜻도 짚어 보자. 쉬운 말로 바꾸면 '으뜸'이니, 한 학교에 한 명만 둬야 그 말에 어울린다. 정부가 교원 숫자의 10%나 뽑는다는 것도 흰 수작이요, 우리가 이를 되받아 '중년교사 대부분을 승격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도 좀 궁색하다. 꼭 나이 먹은 이들을 대접하고프면 '수석'이 아니라 '선임'쯤으로 명칭을 바꾸는 게 온당하다. 그리고 후배들을 온통 지도합네, 그 역할을 뻥튀기하지 않는 게 좋다. 저쪽이 즈그덜 편한 대로 '언어의 인플레'를 일삼는다 하여 맞장구칠 일은 아니다.

  '수석'은 영국의 '수퍼super 교사'를 본떠 구상한 것일지 모른다. 영/미쪽에 교사자격 세분화 관행이 있어 왔기에, 정부도 흉내내는 것이겠지.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니까 옳은 것.'이라는 따위의 억압 논리에 휘둘려서야 장학사 시험이나 볼 일이지 뭣하러 전교조 하는가? 또, 저들이 설치고 상당수 교사들이 솔깃해 하는 판에 자칫 우리가 '왕따'되기 십상 아니냐는 판단을 먼저 부동(不動)의 전제로 깔아두는 분께는, 소심한 대세론이 패배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음을 일러 드리고 싶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것, 원로교사 우대하자는 속셈 아니냐.'며 학부모단체 사람들이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단다. 이 대목을 범상히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나이 잡순 교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꽤 남아 있는 형편에, '교사 전체의 권익 향상'도 아니고 그분들만 따로 대접해 드리려고 옥상옥(屋上屋) 짓는 것이 반가운 반응을 얻을 리 없다. 그분들의 고단함/쓸쓸함을 덜어드리는 것도 필요한 일이나, 경력 꽤 된 교사들의 수업 시수를 줄여주고, 보수(報酬)를 좀 높여주는 정도에 그쳐야 정도(正道) 아닐까. '교사'라는 것 하나를 자부심 삼아 살자고 설득할 수는 없는가?

  미국에서도 자격제도 개편이 실패한 적 있다 한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교사 길들이기' 압력이 홍역을 낳아 왔음을 떠올리면 우리네 '전면 거부'의 정당성을 더 확실히 새길 수 있겠다. 중년 교사들의 승진 욕구 달래기가 힘겨운가? 그렇긴 해도, 어찌 보면 '수석'에 막무가내로 집착하는 교총쪽과 선을 긋는 과정에서 그동안 따로 놀았던 학부모단체들을 우리쪽으로 끌어당기는 계기가 이참에 마련될지도 모를 일이다.      

 교과서 제도 개혁 발제 : 김주환(국어교사모임)의 얘기에서 잊히지 않는 핵심은 '새 교과서를 우리가 만들어서 현장에서 실제로 써먹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선교사들한테 참고도서로 퍼뜨린다는 얘기가 아니라, 학생들이 다 사서, 그 책으로 공부하게 한다는 말이다. 국어교사모임의 대중기반이 꽤나 넓기 때문에 가능한 도전이지만, 참으로 반가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국정 교과서 밖의 글감은 교사가 일일이 프린트로 찍어서 나눠야 했기 때문에 '교과서를 무시한 수업'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몇몇 학교라도 우리가 만든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보급된다면 '국정'의 틀을 허무는 쾌거가 될 것이 틀림없다.

  나도 '국어'를 맡은 사람이라 하는 말이지만, 지금의/여지껏의 (중학) 국어교과서는 '학업 실패'를 낳기 딱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제대로 쓰인 새 교과서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는 과목의 하나가 '국어'다. 우리가 만든 교과서라고 엄청난 혁신이 이뤄지겠냐고 묻는 분도 있겠다.  국어교사모임으로 결집된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실력을 발휘할지 비회원인 내가 똑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그리는 상(像)을 완벽한 실력으로써 뒷받침해 구체화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혁신'도 가능하다는 생각은 든다. 학습부진아를 위한 교과서까지 따로 만들 수 있다면 '학업 실패'도 뚜렷이 줄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실력>이다! 국어교사모임이 더 분발해 주기를 고대한다.

 대학입시 개혁에 관한 발제 : 김두루한(부설 연구소)은 입시 '제도'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수능고사를 폐지하라! '고교 수행평가'를 전형기준으로 삼는데 수/우/미/양/가의 5등급을 없애고, 학점 단위 우수/합격/재이수 체제로 가자! 전형 권한은 대학에 일임(一任)하되, 학과별 전형으로 하고, 면접 제도를 활성화하자! 김경근(전북사대)은 '대학입시 전면 평준화' 방안을 내놓았다. 자세한 내용은 지지난 회보에 소개했기에 생략한다.

  '대학 평준화'가 뜬구름 잡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프랑스/독일에서 해온 대로 하자는 것 아닌가. 뜻도 좋고, 그 나라들에선 잘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당장 밀어붙이자!'고 들이대면 망설여진다. 판이 다른데 단번에 될 일인가? 물론 김상봉('함께 하는 시민행동')이 '과도기' 조치로 전체 대학을 A/B/C/D/E 다섯 등급 쯤으로 묶는 방안을 내놓긴 했지만, 그것도 어떻게 실현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현실성 문제가 들이닥치기는 김두루한의 제안도 마찬가지다. 수행평가 기준을 '우수/합격/재이수'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긴 하다만, 지금의 입시 체제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래서 그 날도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두 제안의 취지만 받아놓고 끝났다. 어떻게 풀 것인가? '개혁에는 선후(先後)가 있다.'는 묵직한 상식을 되새기는 것으로 '일단 멈춤'해야 할 일 아닐까? 대학 서열 깨기는 대학의 구조 개혁과 맞물려야 힘을 받는다. 국/공립대 통합 운영으로 서울대의 아성을 깨고, 비대해진 종합대학 몸집을 대폭 경량화(輕量化)하여 자유경쟁체제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 먼저다. 그 개혁 없이 '입시'로써 서열을 깨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추진력을 얻기 어렵다. 김두루한의 제안도 '지금' 현안으로 고려하기는 힘들다. '대학에 맡긴다'는 것이 지금처럼 악머구리 끓는 대학 현실을 놔두고 어찌 가능한가?

  그렇긴 해도 전교조가 입시/대학 개혁문제를 더 고민하게끔 촉구했다는 점에서 두 제안자의 발제는 유익했다. 그 점은 밝혀 둔다.

 김대중정부의 교육개혁 비판 발제 : 교육운동연구실(김경욱 외 5인)이 전교조의 사상적 통일을꾀하려는 대담한 뜻을 품고 썼다. 먼저, 그 문건에서 몇 군데 길게 옮겨 적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관료주의/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이 소홀한 듯 하고,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둔하는 흐름마저 있다. '자유'는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처럼 받아들인다. 특히 아이들은 가정과 매스컴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정신/기질이 꽉 차 있다.

 *지금의 '교육개혁' 주도세력은 자유주의의 겉옷을 뒤집어 쓰고 있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자유주의'를 들먹여 빠져나간다.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이들 중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억척스레 비판하는 사람이 그닥 없어 보인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와 힘을 합쳐 구체제(획일주의/관료주의)를 허물 호기(好機)라 여기는갑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자유주의를 아울러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 시장 논리, 수요자 중심, 경쟁, 효율성, 능력 위주, 평가

 자유주의   : 다양성, 학생 중심, 개인 중시, 자율/창의성, 수월성, 선택권, 민간 이양

 *'소질 계발 / 기회 균등'이라는 이데올르기가 설득력을 잃어 가자, 지배계층은 '대학 중심 → 대학원 중심'으로, '학력 → 생색뿐인 적성+학력'으로, '획일주의 → 생색뿐인 다양화+속 빈 정보화+획일주의'로 모순을 회피하는 한편, 이데올로기의 요란스런 재구조화 켐페인을 벌여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옛 관료는 영미 유학파 새 관료로 얼마간 물갈이됐을 뿐, 관료 패권 자체는 흔들림이 없고 국가주의적 통제 기제는 일선학교에 늠름히 살아 있다. (옛 나리나 새 나리나 다 개나리꽃이 피었을 뿐이어라.)

 *자유주의는 자유만 누리면 흐뭇해 하지만, 우리는 관료제를 대신할 '민중 통제'를 원한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몽땅 거부하는 게 아니다. 민주/민중/공동체/생태론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자유'를 올바로 자리매김하자는 얘기다.....

  발제 자리에서 질문이 나왔다. 자유주의를 비판한다면서, 또 몽땅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니 앞 뒤 안 맞는 것 아니냐? 전교조 같은 대중조직에서 어떤 특정 이념을 정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 아니냐?

  뒤엣것부터. 대다수 구성원의 생각이 자연스레 한 방향으로 쏠릴 때는 어떤 이념을 못박는 것도 마다할 까닭이 없다. 우리가 옳은 생각 갖고 옳은 일 하자고 모인 단체이거늘, 대다수가 한 생각으로 쏠릴 때에도 자기 생각 못 내건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위엣 문건은 기존 지배 사상을 뚜렷이 비판하자는 것이지, 어떤 새 이념을 못박자는 주장이 아니니 이 질문은 과녁이 빗나갔다. 나중에 사석(私席)에서 어떤 분이 내게 두려움을 털어 놓더군. 발제 내용이 국기(國基)를 건드리는 것인데 조선일보 쪽에서 사상 시비(是非)를 걸어오지 않겠냐며. 허허허. 그분 교무실(...포항 지역...)에서는 허화평이가 선량(選良) 물망에 오른다는데, 그 동네는 보수본류 박태주니조차도 DJ와 짝짜꿍 논다는 점에서 맘에 안 들어 하고, 존두아니 똘마니를 졸라/존나- 미는 분위기라니 그런 두려움도 가질 만 하겠구나, 이해는 되더라.(걔, 그놈아아 허화평이가 금뱃지 일단 집어먹고나서는 얼마든지 여당에 기어들 인물임을, 아니, 여당에서 모셔갈 것임을, 기존 보수정당/정파 간의 차별성이라는 것이 지역감정 빼고 별반 없음을 그 백성들은 모르는갑다.)

 한참 애써서 대꾸했네. 우선, 자유주의와 '국기'인 자유민주주의는 좀 다르다. 막돼먹은 자유주의가 얼마간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나온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그 자유민주주의를 또렷이 집어내서 '타도합세!' 부르짖은 게 아니니 설령 시비가 붙더라도 '이적(利敵)' 판결 안 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문딩이 콧구녕의 마늘씨만큼 변변찮긴 해도) 웬만큼 '민주화'가 된 세상이다. 합법화된 단체를 두고 이적 시비 안 걸어 온다. 아니, 못 걸어 온다. 정치 지형이 달라졌으니, 제발 걱정하지 마시라. 그 조선일보 놈들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모양인데, 그놈들 여전히 끗발 큰 것은 분명하지만 예전만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한다. 그 썌끼들, 정치면에서는 노년 극우층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문화면에서는 젊은층에게 아부하느라고 '진취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꼴을 봐라. 최장집이가 당한 것땜시 그렇다구? 그 사람, 법원에서는 당하지 않았네. 보수층에게 죽어 지내는 DJ가 너무 소심한 탓에 알아서 기었지. 그래서 내쫓긴 것 뿐이네. 물론 그것만으로도 조선일보는 훌륭히 목적 달성을 한 것이지만. 그 섀키들, 정부내 개혁파를 쫓아내야, DJ를 즈그덜 통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 치열한 권력 투쟁 벌인 것일 따름. 그런데 조선일보가 우리 전교조를 해꼬지해서 즈그덜한테 무슨 떡고물이 생기남? 한참을 더 설명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아무튼 우리 갈 길이 멀다 싶으니 씁쓸했다.

  앞엣 물음의 답 : 모순되지 않는다. 교육운동연구실의 동지들은 '지금' '여기'의 자유주의 흐름을 겨냥한 것이지, '자유주의 일반'을 마구 싸잡아 욕한 것도 아니요, '자유 일반'을 부정/폐기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렇게 간추리자. 한때 자유주의 사상이 세계 역사에서 진취적인 구실을 맡은 적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뚜렷이 자리잡고부터 자유주의자 중에는 보수반동으로 뒷걸음질친 축이 많았으나, 새 현실을 받아들여 자기 사상을 수정해나온 축도 꽤 있었다. 급진적 자유주의 중에는 사회민주주의와 진배없는 사상마저 더러 생겨났다. 이런 쪽을 도매금으로 욕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말이다. 1970년대 이래 서구/세계 자본주의가 긴 세월 구조불황에 접어들고부터 (경제적)자유주의는 다시 반동으로 돌아섰지. 왜? 눈앞의 자본가들을 먹여살려야 하니까. 걔네 챙기는 것 빼고는 거들떠 보지 않았으니까.  경제면에서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완전 동의어(同義語)다. 그럼 문화면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대놓고 악질 노릇 벌이는 것은 아니니 신중하게 비평할 필요는 있으나, 지금의 현실을 갱신해 내는 과제에 한참 못 미치는 한가로운 소리를 늘어놓고 있음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은근슬쩍 편들기까지 한다. 그러니 그 점은 따끔하게 짚어야 한다.    

   '여기/이곳'의 자유주의는 어떠했는가? 근대화를 제 힘으로 성취한 서구와 달리, 한국의 자유주의는 '수입품'에서 출발했지. 그러니 불량품 투성이였다. 몇 사람만 둘러보자. 일본과 놀아난 윤치호/이광수, 가부장 사회에 무릎 꿇은 여류화가 나혜석을 보라. 앞잡이 되거나 헛되이 패배했다. 요즘은 어떤가? 검열과 맞붙은 마광수-. '표현의 자유'를 쟁점으로 일으킨 공은 있으나, 대중의 진보적 문화를 일으키는 데는 별다른 구실을 못 했다. '인물과 사상'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강준만-. 언론 비판의 궂은 일을 해낸 공은 있으나, 한편으로 DJ를 맹목/궤변으로 싸고 돌고 진보진영 헐뜯기에도 열 올렸다. 복거일-. '영어 공용화 합세.' 개소리 짖어댔다. 조선일보께서 이 친구를 싸고 도는 바람에 쓸데없는 헛논쟁이 벌어진 적 있다.(→'참여연대'의 박원순도 이 놈의 조선일보 불매운동 안 벌이고선 시민운동 발전 못한다며 썽내더라.)  영화 '거짓말'로 대중의 관심을 끈 장선우-. 끝없이 미학 실험에 몰두하는 자세는 평가해야겠지만, 성(性)을 주된 소재로 삼은 영화들에서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 '거짓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다. 초기 작품 '우묵배미의 사랑'에 깃든 리얼리즘 정신을 되살리는 게 나을 터. (→'삼인'에서 펴낸 '자유라는 화두' 참조.)

   발제때 몇몇 분이 '앗 뜨거라' 반응을 보인 것은 표현된 낱말에 과민반응 일으킨 탓도 컸다. '자유주의와 전선(戰線)을 긋자...'어쩌구하는 말들에! 내가 참견했지. "운동진영에서 쓰는 낱말에 속지/겁내지 맙시다. 누구 인물과 싸우자는 얘기도 아니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어떤 사상과 '전선'을 긋자는 얘기는 그 사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척박한 한국의 자유주의라 해서, 어찌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겄는가? 시인 김수영처럼 소박하지만 철저하게 밀어붙인 자유주의 사상도 있는 터에. 하지만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설 자리>는 '예전에도 좁았고, 앞으로는 더 좁아들리란' 사실을 새겨 두는 일은 지금의 현실을 헷갈리지 않기 위해 무척 긴요하다.

  발제 뒷부분은 '주제문'만 듬성듬성 뽑는다. 편하게 내리닫이로 훑으시라.

 *공교육의 목적은 '공민/공중'을 길러내는 일이다. 학교에 '참여 민주주의'가 꽃피어야 한다.

 *학교를 갱신하려면 공교육이 떠맡는 범위를 줄이고, 그 목표를 높여야 한다. 모든 지식을 죄다 전해줄 욕심보다는 '위대한 평민' 키우기를 목표 삼자.(--작은 학교, 큰 교육)

 *지금 긴요한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획일성 속에 숨겨진 분열/불평등을 해소하는 일!

 *참개혁의 핵심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 회복/정상화!

 *학교는 공동체성(소집단, 생활공동체)을 바탕으로 하여 '공민'을 기른다.

 *'학생 중심'은 삐뚤어진 표현이다. 그것은 흔히 '학부모 중심'으로 빗나가고, 불안정한 교육체계를 낳기 마련이다. 학생이 주인되면 나머지는? '학생들의 내적 동기/자발성'을 북돋우라는 얘기에는 허점이 있다. 상업문화가 판치는 곳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문화가 아이들에게 계발해주지 않는 '동기'를 애써 틔워줄 의무가 있다. '학생 중심'에서 사줄 핵심은 권리/자치/복지이지, 선택권이 아니다. 새로 걸어야 할 슬로건은 "교육 주체 간의 참다운 만남을!"이다.

이야기 다섯 : 나는 왕이로소이다. 걱정의...

  우리 연구소 워크샵(1/29), 밤샘 뒷풀이 마치고 와서 쓴다. 전교조 돌아가는 미주알고주알 소식을 한 무더기 들으니 심사가 서늘하다. 우리 사회 전체도 그렇거니와, 교육부문의 정세도 엄중하기 짝이 없거늘, 이에 맞설 교원노조 지도부의 '지도력'이 여엉- 허술한 듯 싶으니, 다다닷. 된된된- 정정정- 걱걱걱- 아아앗-... 이 판단에 대해 길게 논증(論證)할 마음은 없다.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라 여기는 분은 그냥 그렇게 낙관하시라. '염려스러운지/아닌지' 선뜻 판단이 들지 않는 분은 전교조 사정을 좀더 신경써 둘러보시고 고민해 보십사! 잠깐 옆구리 찔러드리려고 이 토막글을 쓴다.

  분회장 다섯 명이 불현듯 노조 일을 손 놓아 버렸다 치자. 크게 염려할 일은 못 된다. 수많은 딴 분회들이 전교조를 밀고 가면 된다. 그 다섯이 전교조에서 으뜸가는 억척꾼 활동가들이었다 해도, 그들의 은퇴가 주는 타격은 별로 큰 게 아니다. 하지만 본부 지도부의 다섯 명이 갑자기 갈짓자 걸음으로 사업을 꾸려 간다고 가정(假定)하면 이는 태평스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분회장과는 견줄 수 없이 막중하니까.

  본부에 일손이 모자란다. '지부'도 많이 그러겠지. 그래서 힘있게 일을 못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먼산바라기해야 할까?  저마다 뿔뿔이 똬리 틀고 앉았는 지금의 널부러진 구조를, 여러 활동가들이 뜻을 모아 개편해낼 수 있다면 사정은 '얼마라도' 나아진다. 지도부가 사심 없이 통크게 조직을 구성한다면 좀더 사람을 모아낼 수도 있다. '얼마간'의 개선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것, 얼마쯤이라도 개선해낼 지도부라야 듬직한 지도부 아닐까?      

  지금이 싸워야 할 때라는 사실은 지도부가 모르지 않는다. 무슨 물밑 교섭이니, 권력과 친한 누군가가 누구랑 독대(獨對)해서 건의하면 뭔가 얻어낼 게 있지 않으냐는 둥, 상층 교섭주의의 미련밤퉁이 꿈을 꾸는 분은 우리 주변에 '거의' 없다. 전교조의 사상(思想) 수준이 꽤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원집단에 대한 지배층의 공격이 지금 본격적으로 나팔 울린 마당에, 그쯤으로 흐뭇해 할 일이 결코 아니외다. 사업계획서에다 1월은 무슨 싸움, 2월은 무슨 싸움... 많이많이 계획을 배치하기만 하면 올랄라- 만사형통하시는가? 지금 국면에서 어느 싸움에 초점 모을 터며, 대중의 분노는 어찌 북돋아낼런지, 지도부는 워떠케 치고나갈 작심인지 치밀한 계획을 단호히 밀고가지 못하면 '될 일'도 아니 되나니라. 지금 우리에게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주어져 있음을 잊지 맙서. 관성(慣性)대로 사업하다, 때 되면 대강 스토브 리그나 달굴 노릇임둥? 어련 잘 허시것지라잉? 2월 대의원대회에는 정말 심사숙고한 사업안이 오르기를 고대함메. 앞으로 한 2년간은 아예 교섭테이블 근처로 지나갈 것도 없이, 오로지 대중의 싸움을 일으키는 데만 힘 기울일 일 아니게씀둥? 전교조 지도부여, 분투허시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