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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2001.02.08 15:12

정은교 조회 수:1870 추천:2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정 은 교 (21세기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소장. 책임연구원)

<< 이야기 하나 >> 교사운동 전환론에 대하여

  지난 '우리교육' 10월호에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특집 기사의 일부로, 전교조 부설연구소랑 한국교육연구소랑 우리 연구소가 나란히 답한 '서면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이수일 선생이 답신한 대목을 읽어보니, 우리 것과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별로 눈에 띄지 않더군. 우리가 전교조 내부 실정, 즉 지도력 취약 문제를 솔직히 드러내서 문제삼은 반면, 그쪽에선 전교조부설 연구소이니만치 그런 예민한 부분 짚어내기를 삼갔다는 차이쯤이랄까. 부설연구소쪽과는 서로 영향 주고받고 쬐금이라도 돕는 관계를 어렵지 않게 맺어나갈 성싶다. 이수일 선생이 우리더러 이중(二重) 멤버십을 갖고 참여해 달라고 부탁해온 바도 있고, 실제로 우리 중 한둘이 참여도 해 왔지만 이것 갖고 '힘껏 참여했다'고 말하기는 쑥스럽다. 다만 '뜻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일손도 많지 않고 또 게을러서 거들지 못했노라는 얘기만 전하고 싶다.

  유상덕 선생은 서면인터뷰를 사양하여 딴 데 실린 그분의 글 <교사운동 전환론>을 옮겨 실었다 한다. 그래서 같은 질문(=구체적인 현안 문제)를 놓고 의견을 견줄 수 없었다. 그분 글이 일반론적인 뭉뚱그리는 얘기라서 그 글을 설렁설렁 읽은 독자들 중에는 '셋 다 생각이 비슷한 거 아냐?'하고 갸우뚱거릴 분도 혹시 계실지 모르겠다. 가까운 지기(知己) 중에도 왜 '한국교육연구소'랑 '진보교육연구소'랑 병립해야 하는지, <하나> 될 수는 없는 것인지 유감을 나타낸 분이 있었다. 이분의 '소박한' 충정에도 대답을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한국교육연구소쪽이랑 우리랑 무슨 생각이 서로 다른지 특집 기사를 놓고 따져 보기로 한다.

  관점의 차이가 '대뜸' 드러나는 대목은 <새로운 세기(世紀)에 대한 이해>라는 중간제목을 단 첫 문단이다. 간추려 옮겨 본다.

 << 20세기는 물질 분배를 놓고 대립하던 상극의 시대였던 반면, 21세기는 지식/정보가 중요한 지식기반사회요, 공존 공생하는 상생의 시대이다. 그것은 인류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 선택이며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세기이기도 하다. >>

  한 마디로 말해,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지식기반 사회' 켐페인을 고스란히 읊조리고 있다. 우리 창립 심포지엄(7월)에서 자세히 짚은 것처럼 이 '지식기반 사회론'은 일찍이 60년대부터 자본가/경영자들이 내세워온 '정보 사회론'의 재탕 삼탕일 따름이요, 현정권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그럴싸하게 분칠하여 백성들을 어르려는 홍보 용어/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읽게 해주는 학문적 개념이 아니올시다. 더군다나 공존 공생하는 '상생(相生)의 시대'라니! 온 세계에 지금 남북의 격차가, 호모 사피엔스 족속과 '자연(自然)'과의 불화(不和)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마당에 무슨 유토피아가 문지방 앞에 엎드렸다는 말씀일까. 언젠가(!!) '상생의 시대'가 올른지는 모르겠다. 그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다들 제 힘 닿는 데까지 애써야 함도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다가올 새천년의 벽두는 아직 상극(相剋)의 시대 그대로다. 아니, '상극의 기운'이 세상을 <20 대 80의 아수라장>으로 온통 뒤흔들 지경까지 이르렀지. 무엇이 우리를 '눈먼 길'로 치닫게 하는가? 바로 '지식/정보'를 모조리 제 손아귀에 움켜쥐고 확대재생산의 드라이브를 거는 자본의 논리가! '지식 사회'는, 지식=정보를 앞세운 세계 독점자본은 상생의 시대를 열기는커녕 우리를 끝모를 상극의 심연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른바 '지식 사회'의 허깨비를 물리칠 때라야 그나마 상생의 시대가 쬐끔 열리는 것이다!  

  << 21세기 현대는 근대 산업사회보다 더 성숙해진 시민사회다. 현대 시민사회는 국가 기관의 민영화, 규제 완화를 통해서 '자율적인 운영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근대에는 '국가'가 교육을 모두 책임졌다면, 현대에는 국가, 시장(기업),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떠맡는다. 모든 지역사회가 공동체적으로 참여하여 새 교육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

  '민영화 이전(以前)'은 타율이요, '민영화 이후'는 자율적인 시민 사회가 되는 것일까? 그 이전/이후를 따지는 것은 <국가 ↔ 기업>의 관계를 밝혀줄 뿐이지, <국가 ↔ 시민사회>의 역학 관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시민사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기업의 경제권력이 커진다는 뜻이 아니라, '비판적/자주적인 시민공동체'가 확립되어 국가권력을 견제한다는 얘기다. 글쓴이는 시장(기업)이 교육주체로 새로 참여하게 된 것을 '사회의 성숙'이라 보는 듯한데, 우리 생각과 너무너무 다르다. 이분은 학교의 민영화 추진, 교원 신분의 안정성 철회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대의 요청'이라 본다는 얘기다.(...'시대'가 아닌, '자본'의 요청이겠지..)

  근대 사회에서 '국가'란 무엇이뇨? '총자본가' 노릇을 하는 기관이네. 이를테면 개별 기업가들은 저희한테 필요한 인력(人力....'사람'이 아니라 '인력'!!)만 곶감 빼먹듯이 빼먹고 싶지, 백성의 교육비에 기꺼이 많은 돈을 낼 생각이 없다. 모든 기업가들이 그렇듯 짠돌이로 논다면 유능한 인력이 제대로 길러질 리 없다.(...독일쪽 기업과 견주어, 미국기업들은 주식시장에 거의 의존한다. 주주(株主)들은 저희네 단기 이익 좇기에 급급하니 긴 앞날을 두고 기업 경영하는 데는 아랑곳 없다. 그래서 종업원 훈련을 상대적으로 게을리한단다. 참고 삼을 얘기다...) 그래서 유능한 자본주의 국가라면 교육복지 예산 지출에 인색한, 다시 말해 기업세율 내리려고 안간힘쓰는 개별 자본가들을 달래서 나랏돈으로 노동력 양성에 힘쓴다. 개별 자본가들의 반발을 눌러가며 결국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일(='전인 교육'이 아닌, 노동력 양성...)을 국가가 '총자본가'로서 대행하는 것이다.  

  학교 운영이란 돈벌이되는 사업이 아니다. 아니, 개별 기업가들의 돈벌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들이 (학교에) 바라는 바는 국가를 통해 실현하려고 애쓰면 된다. 기업들이 (저희를 '어련히' 알아서 잘 대변해줄 자본주의 국가를 제쳐 놓고) 굳이 교육의 주체로 소매 걷고 나서겠다면 노동조합 세력도 교육부 장관 제청권을 갖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직접 나서야 사회 형평에 맞는 것 아닐까?

  << ㉠ 현대 국가는 국가와 시민사회, 시장(기업)이 상호 보완적으로 역할을 나눠 갖는 시민이다.

      ㉡ 학생, 학부모, 교원, 지역사회 인사, 기업, 교육행정가들이 공동으로 교육 문제를 결정하는 시민사회 교육론을 다시 세워야 한다.

      ㉢ 모든 지역사회가 공동체적으로 참여하여 교육개혁을 이뤄야 한다. '교육 공동체' 운동이 필요하다! >>

  ㉠: 기업이 무슨 역할을 새롭게 나눠 맡다니? 세금 내는 일을 새삼 맡는다? 아니면 무엇을 서로 보완한다는 말일까? 모호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장은 주어/서술어 관계도 일치하지 않는다.

  ㉡: '지역 사회 인사'는 말은 표현만 그럴싸하지 그 실체는 '지역 유지(有志)'다. 민중/시민운동 단체의 참여를 명시해야 한다. '학생'의 참여? 참으로 바라는 바인데, 대단한 사회 혁신 없이 그게 가능할까? 과연 국민회의 중도우파(?) 정권이 첫 화살이라도 날릴 수 있을까? 중산층 시각에 휩싸이기 마련인 학부모, 기득권 계층의 차지가 되기 쉬운 '지역사회 인사', 돈벌이만 눈에 어른거리는 기업, 끗발 상실에 조직적으로 저항할 교육관료들이 모여 밀고 나갈 '시민교육 운동'이라는 게 어떤 꼴이 될지 미루어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 '공동체적으로'는 '함께'라는 뜻이겠지. '말의 인플레'는 삼가는 게 좋다. 앞 뒤 문장을 잇달아 읽으니 다음과 같은 '환각 효과'가 생기는 듯하다. "모두 공동체적으로 참여한 운동이라서 교육공동체 운동이 된다.⇒ '기업'도 교육공동체의 한 식구가 되었으니, 기업들이 추진하는 민영화/규제 완화도 교육공동체 운동의 한 부분이다...." 공교육의 기반을 허묾으로써 교육공동체가 건설된다? 박정희식 표현을 빌어 말한다. 쓸데없이 '환각 효과'에 시달리는 '불행한' 교사가 나말고 또 없기를 바랍니다!

  << 교육공동체 운동은.... 첫째, 인간적인 교육현장을 가꾸기 위해서, 둘째, 교육관련 당사자나 단체들의 이해/요구를 올바로 수렴하기 위해서, 셋째, 근대적 가치들이 혼란을 겪고 있고, 지식/정보 산업구조로 바뀌기 때문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

  교육공동체 가꾸기란, 학교를 공장/병영이 아닌 아늑한 삶터로, 동네 마당으로 바꾸는 일이다. 위엣 세 가지 중에 첫째 목적과만 관련된다. 왜 '범주/개념'이 서로 무관한 둘째/셋째 얘기를 넣었을까? 글쓴이는 보통명사로서 공동체 운동을 말한 게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국민회의 정권이 밀고 가는 '(새) 교육공동체 운동'을 들먹인 것이다. 그 운동의 목표는? 교원들의 반발을 어르고 달래 가며 저희가 원하는 교육부문의 구조 조정을 수월히 단행하는 것! 교육공동체를 가꾸자는 말씀은 그저 악세서리일 뿐이여. '근대적 가치' 어쩌구 한 대목은 너무 동떨어진 얘기구.   

  << ㉠교원들은 (구조 조정으로 말미암아) 이전보다 '권력'이 약화되고 신분이 불안정하게 된 것을 감수해야 한다.

     ㉡학생 주도(=자기주도 학습), 수요자 중심 교육으로 바뀜에 따라 교원은 교육에서 차지하던 역할에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교원들이 노동권, 정치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학부모 등 다른 교육주체들과 충돌하게 된다.

     ㉣교원의 기본권인 교육과정 평가권은 자율성이 점점 넓어지고 '성적 평가권'이 강화되면서 교원들의 책무성도 높아진다.

     ㉤'공공 봉사자'로서의 역할보다 이젠 시민사회의 '전문가'로서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  

  ㉠: '권력'이라는 낱말은 '지위'로 바꿔 써야 온당하다. 가르칠 '권리'는 쥐꼬리만큼 있었는지 몰라도, '권력'을 누렸다니 택(!!)도 없는 소리다. '감수하라'니!

  ㉡: '학생 주도'로 진짜 바뀌었수? 그게 가능한 얘기유? 지금 삼천리 곳곳에는 공부할 맘 깡그리 사라져서 학교를 난장판으로 휘젓는 아이들 투성이인데, 그래서 수많은 교사들이 끌탕을 앓고 있는데 그게 수업방식 바꿔보는 흉내 좀 낸다 하여 풀릴 문제유? 찻잔 속 태풍 쬐끔 일으켜 놓고서 진짜로 교육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진 양 스스로 속지 마시유.

  ㉢: '노동권 어쩌구'에 굳이 대꾸하지 않는다. 교사에겐 지금 '정치 활동의 자유'가 허용돼 있지 않다는 사실만 일러 둔다.  

  ㉣: "몽땅 주관식으로 출제해!" 교육감 말 한 마디가 그대로 '법'이 되는 형국이다. '성적 평가권의 강화'는 사실과 다르다.

  ㉤: '공공봉사자'와 '시민 사회의 전문가'가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지, 대관절 '시민 사회의 전문가'가 뭘 가리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 교육 운동의 기본 방향 :  첫째, 비판과 견제만으론 안 된다. 교육 주체들이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직접 교육에 참여하고 내용을 같이 만들며 같이 책임지는 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둘째, 문화적 관심을 갖고 학교공동체 운동을 펼치자. 셋째, 전향적인 운동을 펼치자. 발상의 전환, 지역의 주체성, '다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기... >>

  한국교육연구소쪽이 내세우는 운동 방향을 한 마디로 나타내자면 <방향 전환론>이 되겠다. 비판과 견제에서 <참여>로 전환하자!! 둘째/셋째 얘기는 구색 갖추는 내용이니 따질 것 없겠지. 이분들 슬로건을 들으면 마치 교육운동 진영이 '참여를 원하는 쪽'과 '참여를 반대하는 쪽'으로 갈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교육정책 결정에 참여하기를 정말로 애타게 바라는데, 교육부 당국이 이 바램을 악착같이 막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단체교섭 사안>이 아니오!" 고개를 외로 꼬며.

  패 갈려 말싸움 벌여온 지난 날의 씁쓸한 기억들 때문에 '단결!'을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분들이 전교조 안에는 많다. 그분들에게 읽히고 싶어 한국교육연구소쪽의 문건을 후루룩 살펴 보았다. 길다면 꽤 길게 서술한 셈인데, 다시 간추려야 할까? 차별성이 너무 뚜렷하니 '요약'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멘!

<<이야기 둘>>  학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9월 30날, 참실위 주최로 '학교를?' 토론회가 열렸지. 주최쪽 예상보다 많이 참가하여 자료집 300부가 동이 났다. 아무렴, TV 카메라도 달려오는 판인데!

  거북스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고등학생이랑 대학생이랑 마이크 잡고 하는 얘기가, "선생, 112에 고발하기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선생들이 학생들 마음, 얼마만큼이나 헤아리느냐?" "전교조에게도 실망이 든다!"니 어쩌니. 자유발언 시간에 한 조합원 교사가 그래도 '관점의 균형'을 잡쟀더나, 어쩌쟀더나 나무늘보같은 말씀 끄집어 내니, 대학원생이 대뜸 마이크를 넘겨받아서는 그 발언을 단칼에 제압하더군.(...걔네들이 더 高手여. 기성세대, 다들 정신차려야지....) 궁금하신 분들은 주최쪽에서 통신에 올린 토론회 자료집을 찾아보시라. 여기서는 토론회에서 다뤄진 내용을 몇 군데만 찝어서 소개한다.

  가장 무게 있는 진단은 조한혜정 교수가 해주었다..... <학교의 실패>를 과감히 인정하라. 지금의 문제 상황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 '근대 기획의 전반적인 실패'에서 비롯된 아주 복합적인 현상이니, 어느 한두 가지 원인만 탓해서도, 음모론에 빠져서도 곤란하다. '우리들 교사가 못난 탓이오' 애먼 제 가슴만 쥐어뜯지 마라.

  그런대로 차분히 교육제도가 진화해온 유럽과 달리, 부실한 고도성장을 서두른 우리는 내실을 다질 겨를이 없었다. 일찍이 소비사회로 접어드는 80년대에 학교의 권위체제를 바꿔냈어야 하는데, 그 때를 놓치는 바람에 <변화에 대한 공포감>이 휩쓸고, 대안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아, 교사운동의 험난한 과업이여!)

  이제는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괴로운 삶을 견디기 힘들어서, 교사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학교 개혁에 나서야할 때다. '교단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네 통탄할 일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성이 살려지는 때'가 되었다며 그 가능성을 읽으라. 교사/교수가 '업그레이드'하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학교가 망신(亡身)살 뻗쳤네, 감추지 말고 이를 공론화(公論化)하여 학교가 거듭날 기회를 찾으라.

  거대 학교를 한꺼번에 바꾸기는 힘들겠지. '학교 안 다니면 끝장'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학교 밖에선 대안학교의 공간을, 학교 안에서도 조그만 '틈새'들을 열어가자.......  

  구구절절이 귀담을 말씀이다. 특히 학생들과 의사소통 길을 뚫는 데에 조한 교수의 문화인류학적 시각은 크게 쓸모있다. 하지만 이분의 눈길은 주로 문화적 측면에 쏠려 있다. 자본의 책략에 어찌 맞설 것이냐, 국가기구의 변혁을 위해 진보정치를 어떻게 일굴 것이냐는 정치경제학적 관심에는 소홀한 편이다. 당장에는 '학교를 가볍게 보기', '틈새 내기' '차이를 인정하기=세대간 소통의 정치학'이 절실한 과제이겠으나, 길게 보아서는 근대 공교육제도의 윤곽을 어떻게 바꿔내야 하느냐, 그 상(像)을 세우는 일이 기다림을 잊어선 안 된다.

  김동춘 교수는 학교와 지배질서의 관련성에 대해 가닥만 몇 개 짚었다. 학생들 인권을 멋대로 짓밟는 일은 예전이 더 심했는데, 왜 그때는 잠잠했는가? '공포 정치'가 설쳤다는 것 말고, '졸업장을 타면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을 꼭 붙든 학생/학부모들이 병영같은 학교 규율에 스스로 순응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엔 '청소년'이 없다. 모든 청소년들을 학교로 몰아넣고는 가정도, (지역)사회도 그 훈육/선도의 책임을 학교에 떠넘겼다. 모든 사회모순을 응축한 곳이 학교였으며, 학업성취의 신화가 무너지자 그 모순의 최대 피해자요, 자신의 요구를 공론화할 능력이 없는 학생들은 노동자들이 '태업'으로 맞서듯이 '개기기 작전'으로 학교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학급 붕괴'다. 인성/도덕 교육을 어떻게 베풀어야 할까? 정치가들/국가계급이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이미 못된 '본'을 보이고 있는데, 건국때부터 (복종/성공하는 인간상 빼고는) 아무런 이념 없이 학교가 굴러 왔는데, 어찌 개별 교사가 '정당한 권위'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국가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 교육이 바로 설 수 없다!      

    심성보 교수는 '얼치기 교육개혁'이 학교의 <위기를 어떻게 악화시켜> 왔는지, 교수방법론의 열림에만 치우친 옹색한 '열린교육', 돈을 미끼로 한 평가만능주의, 운동권 학생들을 '왕따'시키려한 이해찬의 대학 신입생 꼬드기기 따위를 들어 날카롭게 짚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석을 다룬 본론은 다소 지리하고 흐릿하여 잘 읽히지 않는다. 결론에 내놓은 개혁방향의 서술 중에 눈에 띄는 몇 가지: ㉠ 학급 운영의 입법자로서, 집행부이자 사법부로서 '학급 공동체'를 세워라. ㉡ '협동학습' 모델을 개발하라!(....중학교 국어과목에는 '경청하여 듣기'라는 단원이 있다. 세상에, 그같은 듣기/말하기 단원을 따로 설정하여 그것만 따로 연습할 수 있는 일인가? '교과를 통합'해내고 학습방법의 개발이 더해질 때만 그 단원의 취지도 살릴 수 있다. 이처럼 취지만 그럴싸할 뿐 겉도는 교과 내용들이 수두록하다...) ㉢ 교사의 전문성/자율성을 보장하며 '학력'에 책무성을 지는 '한국식 차터학교'(charter school: 국가가 돈을 대는 사립학교) 모형을 만들어 보자.(⇒이는 자칫 수월성 추구하는 일류 학교를 특화하는 길 아닌가? 조한혜정 교수가 취재한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츠 카운티의 대안자율학교처럼 기존 학교에 싫증 내는 학생들을 위한 차터 스쿨을 만들겠다면 북돋울 일이로되, 심교수가 그리는 상은 신중히 따져야 한다.)

  길게 살펴야 할 꼭지는 부설연구소 산하 <학교교육연구실>에서 내놓은 문건이다. 97 % 옳은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혼란스런 대목이 3 %쯤 불거지니 들추어 본다.

  문제는 '교사 책임론'을 둘러싼 대목이다. 먼저 그 글 '부록'에 실린 두 문장을 뜯어 읽자.

  ㉠ 비인간화된 학교의 ⓐ'일차적 책임'은 교사에게 있다....(한겨레신문)

  ㉡ 교사들은 교육의 모든 과정을 ⓑ'일차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학교 문제를 다룰 때 가차없이 다뤄지거나 무시되며 심지어는 대부분의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받는다. (그들은) 교사의 전문성조차 인정하지 않는다....('학교교육연구실'의 서술)  

  ㉠은 우리가 꼼짝없이 수긍해야할 말씀인가? "교사들은 학교가 황폐해진 것에 책임을 통감하라!"고 누가 꾸짖는다면 우린 두말않고 승복하겠다. 신나게 혼내시면 ×나 맞겠다. 한강철교에 원산폭격에 쪼그려뛰기까지 하라면 하겠다. 밤송이도 까라면 까겠다. 하지만 '일차적 책임'을 지라고 누가 옆구리를 찌른다면 그가 아무리 웃는 얼굴, 살가운 낯빛을 띠었다 해도 우린 얼굴의 온기를 거둔다. 왜 '일차적'이라는 낱말 하나에 그렇게 예민하냐구? <실천적인 함의>가 다르기 때문이여!

  -"너희는 책임을 느껴야지!" ⇒ "그러니까 앞으론 잘하라구!" ⇒ "알았어, 정신 차릴게."

  -"으뜸 책임은 너희가 져라!" ⇒ "부적격자 솎아내는 것도 감수해!" ⇒ "그려, 입이 열 개나 된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남? 시키는 대로 혀야제."  

   상식 하나 묻자. 장관이 시켜서 그 졸병이 무슨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다. 누가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가? 000이 발포 명령을 내려서 00들이 발포했다. 누가 으뜸 책임을...? 그동안 보수/독재 정권은 '교장의 명'을 따르지 않는 선생들을 처벌했다. 학교 황폐화의 1차 책임은 마땅히 교장(들)과 교육부 나리들과 부귀영화 누렸던 정권들에게 있는 것 아닌가? '교무회의가 의결기구'로 격상되고 학교가 평교사 집단의 뜻에 따라 운영돼 왔을 때라야 교사 책임을 더 사납게 캐물을 염치가 생기는 것 아닐까?

  ⓑ구절은 뜻이 혼란스럽다.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집단이니 무슨 제재 수단이든 입 다물고 받아들이라'는 뜻인지, '(시키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실제로 그 일을 떠맡은 사람은 교사들'이라는 얘긴지... ⓒ에 견주어 읽으면 그 맥락으로 보아, 뒤엣것으로 읽히고 그럴 경우 뜻은 통한다. 다만 그 뜻이라 할 때, 현실과 맞지 않은 서술이 된다. 현실에서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쪽은 '국가'이지, '교사 집단'이 아니니까. '일차적 책임'이란 말은 조심해서 써야할 텐데 왜 이렇게 아무데서나 마구 남발할까? 우리 사회에 "날 책임져!"하는 말이 난무하니까 무심결에 따라 썼나?

  ㉠ 지식 교육의 실패: 학생들이 교실 수업을 외면하고 학원으로 쏠린다. ⓐ물론 전적으로 교사의 책임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을 헤아려야겠지만 그렇다고 ⓑ교사의 책임이 자유로와질 수는 없다.

  ㉡ 기능 교육의 실패: ⓒ말하기, 토론하기, 컴퓨터 조작하기, 탐구 설계/수행하기, 예체능 실기, 실업 교육의 위기 등등. 너무 심각하다. 대관절 학교와 교사가 기능교육을 할 뜻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 가치/태도 교육의 실패: 이것에 이르면 교사들이 할 말을 잃는다.... ⓓ교사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교장의 '근무 평정'은 신뢰받지도 못하고, 교사를 자극하지도 못한다.

  ㉤ 학교에는 자질/능력이 부족한 교사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을 견제/배제할 아무런 평가 체제가 없다.

  교사들이 잘못하는 점을 꼬치꼬치 살피는 것은 백 번 훌륭하다. 하지만 ㉠-㉢에서, 지식/기능/가치- 이 모든 영역을 싸잡아 도매금으로 깎아내리는 수법은 삼가는 게 좋다. 왜냐구? 이 글의 필자는 '자질/능력이 부족한 교사들을 견제/배제할 평가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은근샐쭉 내비치는데 ㉢의 실패자들을 색출할라 칠 때, '목'이 붙어 있을 교사가 몇이나 되겠는고? 글쓴 분! '교과'를 잘 가르치는 문제랑 '인성 교육' 베푸는 문제는 서로 갈라서 따져야지 않겠는가? '희한하게 못 돼먹은 교사 몇몇'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치자. 브라보! 따봉! 그 몇몇만 내쫓거나 혼내주면 가치/태도 교육이 제 자리를 찾겠는가? 심성보 교수께서 '평가 만능주의'를 질타하셨음을 떠올리라. '근대 기획의 전반적 실패/ 학교 제도의 전반적인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태도/가치 교육이 실패한 것이거늘, 몇몇을 분풀이로 내쫓는다고 화끈히 달라진단 말인가? 내 얘긴 그런 희한한 사람도 '오냐 오냐' 받아주자는 말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학교 살림의 당당한 발언권을 주기만 하면 그런 사람도 머잖아 순한 양으로 돌아올 것이거늘(...안 돌아오면 학생들한테 혼나지요...), 그게 무슨 신비롭고 난해한 과제라고 정공법(正攻法)을 놔두고 굳이 암수(暗數)같은 '평가'를 들먹이느냐는 말씀이다.

  글쓴이의 논리는 이렇다. < ① 지식교육, 교사의 책임이지.  ② 기능교육, 할 생각도 안 하지.  ③ 태도교육, 악, 할 말을 잃어욧!   ④ 그러니 내쫓거나 혼내주는 제도가 있어야제? ⑤ 그런데 근무평정, 헛껍데기여.  ⑥ 우리가 '평가' 못 받겠다고 버팅겼다간 '왕따' 돼버려! ⑦ 그러니 우리가 나서서 새 평가제도를 만들자!   ⑧ 그러면 저쪽이 노리는 (살벌한) 평가를 물리칠 수 있다.  >

  ①→③의 연결은 수사학에서 '점층법'이라 한다. 그런데 ③은 '되.에.에.게' 강렬한 서술이긴 하지만, 오로지 평가제도 도입의 근거가 돼 주기에는 '너.무.우.우.나도' 심각한 현실이다. '평가'라는 땜질이 아니라 근본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②는 어떤가? 여기서도 '허풍끼'가 솔솔 피어오른다. '실업 교육의 위기'는 좀더 알맞은 표현으로 바꿨으면 쓰것고.  '탐구 설계/수행하기'는 제법 수준 높은 능력인데, 이것이 '기능 교육'의 범주에 속하는가? 그려그려, 갖다붙이면 못 붙일 것은 없것제. 하지만 "이것조차 못 길러주다니!"하고 개탄할 때의 '이것(=기능 교육)'은 읽고 쓰고 셈하는 따위의 소박한 기능을 말하는 것 아닌가벼? 컴퓨터 다루기, 이것 우리가 엄청나게 실패하고 있는가? 글쎄다. 우린 초등학생한테 인터넷에 들어가라고 요란법석 꼬드기지만 프랑스에서는 사람/자연과 뛰노는 게 더 중요하다고 접근을 말린단다. 실업계 고교의 컴퓨터 교육이 엉성하다는 얘긴 옳겠지... 말하기/토론하기? (국어 교사로서 제 전문성을 걸고 말씀드리는데) 이것은 쉽게 길러지는 게 아니어요. 또, 한국의 교사들 중에 이것, 그런 대로 해보려고 애쓰는 교사들 많어요. 너무 타박하지 마시어요. 그분들 슬퍼하셔요.(.....그것은 기능교육 같지만 기능교육이 아니어요. 학교가 민주화될 때라야 길러지는 것이지, 그 전에는 어림도 없어요! 명심하시어욧!)  요컨대 ②는 너무 쓸데없이 싸이렌 울려대는 감성적인(?) 문단 같어요. 그리하여 점층법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요.

  글쓴이는 '(아무리 구조적 요인이 크다 한들) 교사가 교육 실패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거듭 말한다.(→위엣 ⓑ와 ⓓ).  지당하신 말씀!  하지만 이쯤의 뜨뜻미지근한 근거에서 '무능한 교사를 견제/배제할 평가체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끄집어 내기에는 뭔가 허술하다. 그래서 ⓐ에서는 슬그머니 '교사=1차 책임론'을 끄집어내고(...잘 읽어 보시라.), ㉡과 ㉢에서는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투  비분강개조(-調)를 투입(input)한다.

  그런데 눈길을 다시 가만히 치어다 보시라.  ④와 ⑦에서 말하는 '평가'가 서로 다르지 않은가?  분명히, 글쓴이는 ⑦에서 저쪽의 '평가' 공세를 물리치려면 차라리 우리가 선수 쳐서 '평가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개발하겠다는 '평가'는 교육학적으로 온당한, 살풍경하지 않은 평가겠지.    그런데 ④에서 부르짖는 평가는 저쪽 복안 그대로다. 살풍경하다.

  가만가만, 글쓴이가 ④를 부르짖은 바 없다구?  눈길을 더 위쪽으로 옮기셔서 그 바로 위엣 ㉤문단을 살피시라. 무능한 교사들에게 자극을 주고,  채근/격려하는 평가가 아니라 견제/배제할 평가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배제'는 우리네 또렷한 토박이말로 고치면 '내쫓기'다. '견제'는 '혼내기/ 상여금 삭감'쯤 되겠구. 한자말 써서 얼버무리지 말고, 뜻을 또렷이 나타내라. 그 제도 도입의 근거를 '무능 교사가 실제로 있다'는 데서 찾았지. 그럼 한 명만 있어도 비정한 평가를 끌어대야 할까? 그 숫자가 얼마나 된다는 얘긴가? 대한민국의 누구도 그 숫자를 정확하게 모른다. 그저 몇몇 사례를  보아 넘겨짚을 뿐이다.

  글쓴이는 모순된 두 생각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눈길이 교사들 얼굴로 쏠릴 때는 바람직한/살풍경하지 않은 평가 상(像)을 떠올리다가도, 바깥에서 사납게 들려 오는 규탄/궐기대회 함성 소리에 소스라칠 때는  문득 냉정한 평가 제도가 '나라와 조국'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겠냐는 속삭임에 설풋 끌리게 된다. 아무렴,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깟 비정함쯤은 견뎌내야 한다??         

                  주(主)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글쓴이는 우리가 '왕따' 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그렇게도 끔찍히 두려워할 일인지, 과연 우리가 나서서 개발하면 막아낼 수 있는지, 까짓거 여지껏도 '왕따'로 견뎌 왔는데 좀더 견디면 안 되는지, 아예 우리가 저쪽을 왕따시킬 수는 없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바람직한 평가 모델'의 윤곽을 떠올린다면 어떤 것이겠는지부터 간단하게 살펴 본다.

   옆엣 음악 선생(→성악 전공)한테 여쭤 보았다. 순위고사때는 노래와 반주 능력과 이론 실력, 셋을 평가받았단다. 쉬운 말로, 세 가지 '시험'을 봤지. 그런데 늘 연습하고 몸관리도 애쓰는 전문 성악가가 아닌 다음에야  나이들수록 노래 실력이야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음악 교사에게 중요한 능력은 자기 실기 능력이 아니라 아이들을 요령있게 잘 가르치는 것이라 본단다. 아니,  더 중요한 능력은 아이들한테 '음악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는 것!'

  실기 지도 능력은 어떻게 평가하누? 수업 지도안 내놓으라 해서? 그거 베껴 내는 것, 누군들 못하리? 심사관이 수업 참관하고서? 그거, 한번 휘딱 살피고 어찌 자세히 알아볼꼬? 여러 날 잇달아 참관해서? 보통일이 아닐세. 평가 행차 떠납네 요란법석이 가관이 아니겠네. 그거 평가하여 봉급 산정에 꼼꼼히 반영하겠다는 목적 아니고선 그렇게 '큰 일'을 벌일 수 없을 걸세. 그런데 월급봉투가 왔다갔다 하는 일이라면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것이요, 그저 극소수 유별나게 자질 모자란 사람 솎아내기 차원이라면 평가의 의의는 한참 깎일 터.(....1/2 + 1/3 = 1/5이라고 버젓이 가르친 무식꾼이 있노라 거품 문 분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온나라 초등교사에게 1/2 더하기 1/3은 얼마냐고 질문지를 쫙 돌려라. 그래서 솎아낸 뒤, 다시는 그런 우스운 질문지 돌리지 마라....)   

  앞엣 평교사께선 핵심을 일깨워 주었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음악 선생이야말로 으뜸가는 선생이요,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에 정 붙이게 할 일등 공신이라고! 그런데 그런 선생이 되게끔 채근하려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도무지 한결같은 음악 교과서부터 싸그리 바꾸고, '학교에선 대중음악 가르쳐선 안 된다'는 (음악 교사들 상당수가 붙들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녹여낼 일이지, 무슨 '평가'가 가설라무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짓 벌일 일이 아니지 않을까? 지금 나리/나리/개.. 나리,  아니 관리 나리들께서 하셔야 할 일은 미국처럼 노래 부르고 싶은 아희는 일년 내내 꾀꼬리로 놀고, 북장구 두드리고 싶은 아희는 그것만 왼종일 두드리게 교육과정을 과감히 손보는 일 아닐까? 헌데, 대관절 즐거움을 선사하는 능력은 어떻게 측정하누? 아주 많이, 쬐금 많이, 보통, 쬐금 적게... 뭐, 이렇게 '5지 선다'로 콕콕 찍으라 그럴까?

  영어 선생께 여쭤 보았다. 음악 수업의 경우, 아희들에게 얼마나 즐거움을 주는지, 아이들에게 의견을 들어보면, (유식하게 고쳐 말해) 아이들 평가를 받아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영어과목 경우는 어떨 것 같아요? "저도, 내 수업 받은 것에 대해 평가해 보라고 애들한테 설문지를 돌린 적 있어요. 좋게 평가해 준 아이도 있었고, 불만을 털어놓은 아이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러저러하게 수업방법을 바꿔 달라고 건의는 올라 왔지만 그 요구대로 내 수업방식을 고치는 것이 잘 되지 않더군요. 또, 제가 마음이 약해서요, 불만의 글 내용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계속 스트레스 받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평가 받는 일을 그만뒀어요." 쓸쓸히 웃고 돌아서는 그 아낙의 등이 그날따라 저녁 햇살을 이고 터벅터벅 사막 등성이를 넘어가는 낙타 등처럼 유난히도 굽어 보였다. 그렇다. 평가를 능사로 알지 말라. 수업 방법 바꾸기는 꼭 평가를 거치기만 하면, 따끔히 혼만 나면 지끈 뚝딱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그저 지지리도 실력 없는, 영어 철자도 못 외우는 유별난 몇몇을 가려 내려고 평가의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 빼고는 평가가 해주는 구실이 참으로 보잘것없다. 학생들 평가 앞에서 뒷걸음질 친 이 아낙에게 누가 핀잔을 던질 셈이냐?

  과학 선생께로 발길을 옮겼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교수 강의 평가하는 일을 얼마전부터 벌였다는데, 중동고교에서도 그런 것 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학에서도 그 평가가 얼마나 타당한지 의심하는 분들이 많대요. 학생들이 자기네 좁은 잣대를 들이대거든요. 저희들 고교때 버릇대로 '요령껏 정리해 주는' 교수, 이른바 '암죽식' 수업을 끌어가는 교수를 더 높이 친다든지 하는 식으로. 대학생도 그런데 하물며! 물론 가끔 학생들 평가를 '곁들이는 것'쯤이야 '탈'도 크지 않고, 의의도 약간 있겠지만 그걸 마구잡이로 들이대면 아마 곳곳에서 꼴볼견이 벌어질 걸요?"

  그럼 누가 평가하는 게 좋을까요? "교사들끼리 상호평가하는 게 제일 정확할 텐데, 만약에 그 평가를 바탕으로 '연봉'을 산정한다든지 할 경우, 누가 냉정하게 평가해 주겠어요? 서로 인간관계가 파괴될 터인데." 새-앰께선 교사의 능력 중에 무엇을 더 쳐 줘야 한다고 보시나요? "교사에겐 전문지식 해박하게 쌓는 것보다 수업 연구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과학을 어려워 하고, 흥미까지 잃어버리는 아이들이 수두록하니까요. 아는 것은 많은데 가르치는 솜씨는 젬병인 사람을 저는 실제로 알고 있어요. '흥미 고취'가 간단한 게 아니에요.  무턱대고 실험에만 매달려서도 안 돼요.

  참, 그런데 제 경우에는 교사들 여럿이서 <공동 수업안>을 짜본 것이 아주 값진 경험이었어요. 제가 많이 알지 못하는 분야는 딴분들 아이디어를 얻어와서 수업에 응용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공동 연구'를 해내기까지 '팀웤' 이뤄내기가 무척 어렵긴 했지만요.  저는 굳이 평가라는 걸 하겠다면, 그 교사가 '공동수업안' 짜기를 몇 번이나 실천했는지, 그걸 점수에 넣었으면 좋겠어요. 실력이 쫌 딸리는 교사들이 '공동 수업안' 짜기를 통해 많이 자극 받고 배우는 광경을 몇 번 봤거든요."

  그렇다. '공동 수업안 짜기'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얼마나 창의적인 수업안을 '함께' 개발했는지 꼼꼼이 살펴서 열성파 모둠을 칭찬해 주는 것을 '평가'라 부른다면 그런 평가는 일어서서 맞이하겠다. 개그맨 김국진이 진행한 TV '칭찬합시다' 프로그램, 기억하시는가? 그 프로그램의 경우야, 야누스의 두 얼굴을 띠고 있지만(...IMF 난국이 그런 예절/미덕으로 풀리리라고 백성들을 달래주는 이데올로기 효과가 잠복해 있다!), 교사들에게 '칭찬 건네기'는 (당분간은) 아무리 남발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평가'라 부른다면 좀 우습기는 하다. '공동수업안 짜기 운동'일 뿐이지. 약간의 강제성이 필요악이라서, 안 하려는 분들에겐 얼마간의 불이익을, 훌륭히 해낸 모둠에겐 격려를 베푸는 제도가 더해지면 더 좋겠지만.

  '평가'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시험'을 돼지 족발처럼 즐기는 분들이 계시다. 이 사회의 엘리트 집단 대부분이 그렇지. 그분들, 옛날 경기/서울/경복/경남/경북/광주일고/진주고....다들 한 가닥 하는 학교에 뽑혀, 일찍이 소싯적부터 고개를 뒤로 제꼈제. 자랑스런 교모(校帽) 비껴 쓰고 하교길을 늠름히 활보했제. 시험 경쟁의 승리자로 서울대/연고대...에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했것다. 선택 받은 저희끼리 어깨 겯고 속닥질 맞추어, 피 섞고 돈 나누어 이 사회의 지배층으로 똘똘 뭉쳐 떠올랐것다. 이분들 우뇌, 좌뇌 어디에고 '인생이란 시험을 치르며 사는 것'이라는 단순 사실만 입력돼 있지. 그럴 수밖에. 범생이 인생밖엔 살아본 바 없으니. 이분들 개똥철학을 한 마디로 간추리면 "뭐니뭐니 해도, 거저-, <시험이 최고>야요!"겠지. 시험 잘 본 덕에 출세했으니. 이분들 두뇌구조로는 '사람이 시험 없어도 신명내서 일할 수 있다'는 논리를 출력해낼 수 없다. 이분들 두뇌피질 밑으로 흐르는 신경 분비물질은 '시험이 사람 잡기도 한다'는 애달픈 사실에 털끝만큼도 반응하지 않는다.

  이분들이 평가의 불도저를 슬슬 밀고 나올 속셈인갑다. 보라, 여러분! '시험'이 학교를 얼마나 꼴볼견으로 만들어 왔는지, 눈 부릅떠 살피라. 오로지 시험에 매달려 벌벌 떠는 아희들과 시험에 담 쌓은 아희들이 요지경으로 빚어내는 이중주(二重奏)를! 이를테면 '나는(=날아가는) 컨닝' 잡으려고 '기는 교사들'이 시험때마다 난리굿 치는 광경을! 교원들이 시험에 들 날에는 또 무슨 희한한 난리굿이 벌어질꼬?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전국학력고사 성적으로 표현되는 학생들 학업성취도에 의거하여 학교/교사를 평가한다는갑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  먼저, 제도적 배경이 너무나 달랐다는 점을 떠올리자. 영국은 오랫동안 학교마다 커리큘럼을 자유로이 짜 와서, 학교간 학력 편차가 너무 컸고, 그래서 '국가 표준'을 설정할 필요가 '일정하게는' 있었을지 모른다. 일사불란한 군대식 규율을 자랑해온 우리는 새삼스레 '표준'을 설정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다. 또, 우린 일찍부터 닳도록 학력고사/모의고사 치러대서 이제는 시험을 덜 강조해야할 때 아닌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항변하며 꽃다운 넋이 하늘로, 하늘로 질라래비 훨훨 날아오른 일, 하얗게 잊었는가? 그래서 '수행평가'니 어쩌구가 생겨난 것 아닌가? 둘째, 선진국이 하는 짓은 다 옳은 것이라는 발상은 사대주의 아니런가? 학생들 시험성적으로 교사를 평가하는 제도가 도입될 때 한국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질지는 뻔히 짐작가는 일이다.

  미국의 학교 역사를 힐끗 들추니 '성과급/능력급'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벌어진 공방이 재미있다. 두뇌 구조가 대다수 백성들과 무척 다른 보수 지배층이 능력급제를 들여놨다가는 교육계 여론에 밀려 후퇴하고, 또 꺼냈다가는 물리고.... 우리 사회도 이제부턴 이 공방전을 피할 수 없나보다. 그런데, 이 공방전에서 상대방 논리에 휘말리면 끝장 아닌가?

  '학교교육 연구실'에서는 우리가 "평가 안 받을래!" 무턱대고 도리질할 경우, 자칫 '왕따'가 될 수 있음을 걱정한다. 일리(一理) 있는 걱정이여. 대놓고 그런 말 공언하는 것은 조심해야겠지. 허나, 거꾸로 "우리가 교사평가 모델을 개발하겠소!"하고 스스로 소리치는 것도 신중해야 할 일이다. '거짓 관료(?)'가 아닌, '참교사(?)'가 궁리하면 뭔가 쌈빡한 평가 모델이 탄생할 성 싶은가?

  줄거리부터 짚자면, 교사가 하는 일은 엄밀하게 평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대다수 교사들이 이 사실을 직관으로 꿰뚫어 안다...). 그러니 교사의 무사안일을 욕하고 "느그덜은 무슨 용가리 통뼈라서 시험을 안 치르겠다는 거냐?" 삿대질하는 쪽의 기세가 아무리 드세다 해도, 자칫 제 꾀에 제가 넘어갈 발언을 터뜨려선 안 된다. "우리가 개발하겠소!" 먼저 선수치지 말고, "당신네가 밀어붙이려는 그 시험은 희떠운 장난이오. 시험을 함부로 들먹이지 마시오. 교사의 일은 마구잡이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오!"하는 말부터 고지식하게(?) 못박아야 한다. 물론 말펀치가 오가는 과정에서 "당신네가 굳이 '평가'를 하겠다면 그런 식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해야 역기능이 덜할 것이오!" 되받아쳐야 할 때가 있기는 하겠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내놓아야 할 대안은 그저 '골자'일 뿐이지 무슨 상세한 프로그램이 아닐 터이다. 상세하고도 나무랄 데 없는 프로그램을 창안한다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불가능할뿐더러, '견제/배제'를 위한 평가가 아닌 다음에야 상세하게 작성할 필요도 없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끝내 외쳐야 한다. '평가'는 교원들을 견제/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려/채근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요란스레' 벌일 일이 아니라 '학교개혁 켐페인' 속에 자연스레 묻어가야 한다고! 눈앞의 시험 성적 높일 목적에서가 아니라 학교교육을 제대로 바로잡는 차원에서 벌여야 한다고!

  따지자면 더 있다. 앞에서, 무능한 애물딴지 교원들이 얼마나 되는지 실증 조사된 바 없다는 얘기를 짚었지. 백성들께서는 한 가지 면을 더 보셔야 한다. 무능한 교원의 숫자가 세월이 흐를수록 줄었는지, 아니면 제자리맴맴이거나 오히려 늘었는지를. 뒤엣 경우일 때, 학부모들께서 무슨 역정을 내시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엣 경우라면 학부모들께서도 성화를 좀 누그러뜨리고 좀 온건한 요구를 해주실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변동 추세가 어떠한지, 우리도 엄밀하게 파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악화/개선 여부를 얼핏 짐작케 해주는 굵직한 간접 지표 하나는 알고 있다. 나이 잡순 교원들 중에는 정규 대학 아닌 단기 강습소 출신도 꽤 있었다. 건국 초창기에는 제대로 교원 양성 과정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젊은 교원들 중에는 실력 부족한 사람이 훨씬 적으리라 믿을 만하지 않은가? 세월이 흐를수록 개선되는 추세인데 좀 너그러워질 수 없는가? 어느 한 해에 무능한 교원에게 수업 받았다 치자. 그쯤으로 하여 받을 피해가 과연 얼마나 클까? 저 혼자서도 웬만큼 해내는 게 공부 아닌가? 아니, '학교 붕괴'의 위기를 생각하면 학생들 공부를 더 '잘' 시킬 것을 걱정하기 전에, 공부에 염증 내는 아이들을 위해 공부량을 어떻게 얼마나 '줄일 것'인지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백성들께서는 또다른 면도 보셔야 한다. 무능한 교원들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님을.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80-90년대에 교육개혁이랍시고 학교를 마구 흔들 때, 무능한 교원들을 질타하는 보수층의 여론 공격이 드셌다고 한다. 아니, 근대학교 제도가 도입된 초창기부터 '실력 시비'가 끊이지를 않았다. '자질/품성'이 아니라 아이들 학력을 높여주지 못하는 '능력'을 탓한 것이다! '아하, 어느 나라에든 교원의 실력에 대한 불만이 널려 있구나!'하는 앎을 얻는다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불신 풍조에 정신없이 휩싸여 거품 물고 욕을 퍼붓는 일만큼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100% 실력 갖추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니, 좀 허술한 교원들도 있겠지.' '교원들 성토하기에 일떠서는 쪽이 어느 나라에서나 보수지배층인 것을 보면, 걔네가 딴 꿍심이 있어서 뻥튀기하는 것 아니겠어?'하는 깨달음마저 얻은 학부모님한테라면 우린 '일부 무능한 교원들의 존재'를 얼마든지 털어놓겠다.

  생각의 균형잡기를 위해, 미국의 경우를 좀더 살핀다. 아시다시피 1959년 러시아에서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을 저희보다 먼저(!) 쏘아올리자, 미국에 난리가 났다. "선생들, 뭐한 거야? 제대로 가르친 거 있어?" 댓바람에 교육계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미국 교육의 위기-수월성의 실종'어쩌구 하는 보고서가 쏟아졌고, 그때부터 교원들이 들들 볶였다. "여보쇼들!

'수학 및 과학 국제학력 경진대회'에서 미국이 만날 꼴찌야! 당신들, 월급 받아 먹고 한 일이 뭐가 있어?" 여러분, 옛 성현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사꾼 엄살에 속지 말랍디다. 미국 지배층의 엄살은 더더구나 믿어선 안 됩니다. 러시아 과학자 집단이 놀랍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미국과 라이벌 노릇할 만큼 큰 것뿐이오. 미국의 초등학생들이 띵까띵까 노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의 학문(특히 자연과학) 엘리트들은 그제나 저제나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소. 미국의 대학생들이 밤낮없이 공부에 돌입할 수 있는 비결도 초등/중등학교에서 넉넉히 놀려준 덕분 아니겠소? 똑똑한 몇 놈 잘 키우는 데만 관심 갖는 미국 보수층의 엄살에 우리가 부화뇌동, 놀아날 것 없지 않겠소? (....미국 보수층의 엄살/구랏발이 얼마나 지독한지 곁다리로 '예'를 더 들지요. 미국 정보기관 CIA에서는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훨씬 전부터, 아마 브레즈네프때부터 러시아 체제의 내실이 얼마나 허약한지 상세히 알고 있었답니다. 미국과는 쨉이 안 된다는 것을. "러시아가 대단해요! 무서워요!"하며  오랫동안 떠벌이지 않았냐구요? 순진하기는! 서방 진영 백성들을 '반공'으로 묶어 세우려면 걔네가 ×나 무서운 존재라고 자꾸 읊어대야지! 그런데 우스운 것은, CIA 간첩들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결론이 미리 내려진 엉터리 보고서만 만날 올리다 보니 저도 몰래 저희가 저희 보고서를 믿어버리게 되더랍디다. 냉전이 낳은 희한한 '환각'이지요....).             

    간추리자. 자유주의부르조아세력이 '개혁의 전도사'입네 떠벌이고 나선 뒤로, 교사 집단은 개과천선해야 할, 도매금의 개혁 대상으로 자꾸 내몰려 왔다. 이 수세에서 마땅히 벗어나야 하지만, 평가 모델을 개발하겠노라, 우리(=전교조)가 먼저 선수친다 하여 그 수세를 벗을 것 같지는 않다. 조급해 하지 말자. 우리 할 일 많은데, 평가모델의 세부 항목 다듬는 데 골몰한다면 신선놀음 아닐까? 우리가 교육개혁에서 선수를 뺏어낼 길은 '평가'영역에서가 아니라 갈수록 황폐해지는 학교 현실을 생생하게 폭로해 내는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폐허가 돼 가고 있는 실업계 교육에 경종을 난타하고, 그 대안을 부르짖는 일! 이 문제를 두고서 저들이 어찌 방방거릴 수 있을꼬?

  토 달기 ① : 학교교육연구실 문건의 다음 대목은 좀 한가롭고 순진한 느낌을 준다.

  <....전교조가 평가 척도를 개발하고 이를 먼저 조합원들 사이에 활용하자. 그리고 점차 전체 교사들에게 확대해 가자. 그렇게 해서 교사/교육의 질이 향상된다면 더 이상 비합리적인 교사개혁 이야기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전교조 분회장이 비조합원들에게 "우리 평가모델을 한번 써보세요!"하면 다들 앞다퉈 받아가서는 적용할까? 아니, 조합원들은 할까? 강제성을 띠고 내려올 때라야 평가가 이뤄지는 것 아닌가? 전교조 얘기가 먹혀들어서 교육당국이 그 모델을 채택할 때라야 겨우 될까말까한 일 아닐까? <평가>는 기본적으로 화합이 아닌 갈등의 공간이다. 대학에서 벌이는 '교수강의 평가제'를 보라. 대학 당국은 학기말 시험 그 도중에 곁다리로 설문지를 끼워 넣어, 부실한 대답이 나오기를 부추긴다. 프랑스에서도 교육부 당국의 '교사 평가 시도'에 교원들이 집단적인 '개기기'로 맞선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사보타지(=태업)라 하지. "사보타지는 '무조건' 나쁜 것"이란 흑백논리를 혹시나 갖고 계신 분이 있다면 미련없이 버리시라.

  또, "바람직한 평가 모델이 적용되면 교사/교육의 질이 향상된다"는 가정(假定)도 꽤나 허술한 것임을 새기자. '평가'가 기여하는 몫은 원래 얼마 안된다. 게다가 전교조가 평가모델을 퍼뜨려서 얻는 효과는 더더욱 작다. 전교조가 열성파 교사들에게 상여금을 줄 것도, 깎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위엣 대목은 '전교조가 창안하는 평가 모델은 뭔가 큰 혁신을 가져온다'는 자기도취의 단꿈에 젖어 있다.

  토 달기 ② : 다음 대목... "교사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교사들도 시인한다. 전교조가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거나 외면한다면 비난받고 국민의 지지까지 잃을 것이다."

  ⇒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전교조가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지' 않으려면 자주 기자회견 열어 "교사들, 정신차려!" 외쳐야 하는가? 대관절 무슨 일을 하라는 얘긴가? 전교조는 교과모임 열심히 열어서 자기연수 노력을 했다. 전교조가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고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혹시나 앞으로 그럴지 몰라서 경고하는 것인가? 여지껏 교과모임 열심히 해왔으면, 그 충정을 믿는다면 쓸데없는 경고는 삼가야하는 것 아닐까? 혹시나 '정년단축 반대'를 은근슬쩍 겨냥하여 비난하는 것일까? 전교조가 단순히 '떳떳치 못한 집단이기주의' 욕심탓에, '가재, 게 편 들기'를 한 것이라 여기는가? 아무래도 그것 말고는 달리 해석되지 않는다. 딴 쪽이 뇌까린 소리라면 모르되, 전교조 활동가가 왜 이다지도 전교조를 겨눠 사납게 얘기할까? 차라리 솔직히 "그 문제에 대해 전교조 주류가 보였던 의견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밝히고,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전교조 교사들은 너나없이 '달라지려고' 애썼다."고 덧붙여야 공정한 발언 아닐까? 왜냐면 말 많고 탈 많은 '정년단축 문제' 빼고는 전교조 조합원/활동가들이 '교사가 달라져야 하는 과제'에 대해 외면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토 달기 ③ : 어떤 교사가 내쫓겨야 하는가? 여론몰이 하는 작자들 속셈은 실력없는 교사들을 내쫓자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라. 학생들이 입는 더 큰 피해는 인격을 못 갖춘 교사들에게서 받는 정신적인 상처 아닐까? 그런데 현실에서 그 문제는 얼렁뚱땅 넘어간다. 까맣게 지워버린다. 뭐, 검증하기 어렵다나, 어쨌다나? 그려, 누가 그런 사람 일일이 솎아내자 그랬남? 그런 사람들이 꼬리를 내리게끔 학교 문화를 개혁하는 게 최고로 중요하다 그랬지. 여론몰이 하는 작자들, 예전에 무슨 학생 자살사건 연거푸 터져 나왔을 때는 "비인간적인 입시 지옥을 없애고, 인성 교육 하고, 어쩌구" 공자말씀 뻔지르르 부르짖었을 게다. 그럼 그 문제부터 따져야지, '입시 지옥 어쩌구'는 빈 말이요, 이제는 슬그머니 저희 새끼들 점수 못 올려준 것에 혈안이 되는고? '실력 없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버젓이 숨쉬는 문제'를 놓고, 전교조도 고민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작자들에게 놀아나는 식으로 문제를 보아선 안 된다.    

  토 달기 ④ : 교육개혁의 나팔이 울린 뒤로, "너희 전교조, 국민의 지지 얻으려면 똑바로 혀!"하고 을러대는 말씀을 우린 많이 들었다.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은 당연한 숙제이지만, 그것이 보수세력이나 내 새끼 눈앞의 성적 챙기기에만 바쁜 학부모들의 조바심에 설설 기는 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지지'에 앞서 '교사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터. 지금은 교사들이 온갖 곳에서 날아드는 주먹에 얻어터져 곤죽이 돼 있는 형편 아닌가. 개중엔 성깔 더러운 폭력 교사도 있을 테고, 더러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애물딴지 교사들도 섞여 있을 터이지만, 애물딴지 몇몇을 겨눠 "똑바로 합시다레!" 소리치는 것이 우리의 주된 임무가 돼선 안 되니라.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애꿎은 대다수 교사들 옹호해 내야 하는 게 우리 과업 아니런가. 이 과업에 우리가 혹시나 게으르지 않았는지 새삼 살펴볼 일이다.

  교무실에서 얘기판 벌이다가 몰상식한 학부모들한테 겪은 경험담이 옥수수알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집에서 아이를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에 "우리 아이, 그만하면 됐지, 뭐가 어때요?  왜 자꾸 못살게 구세요?" 톡 쏘아붙이는 어머니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는 한 선생. "영국에서는 사고 저지른 청소년은 그 부모가 대신 책임진다=갇힌다."고 딴 나라를 부러워하시는 또 한 분. "전교조 뭐해요? 교권이 이렇게 짓밟히고 있는데, 앞장서서 해결해야지!"하며 나를 째려보는 사람... 물론 한 어머니, 한 아버지... 들여다 보면 일찍이 교사들한테서 받은 피해의식이 과민반응으로 나타난 일도 많겠지. '아이 싸움→ 부모 싸움으로 발전하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국인답게(?) 갈등 현장에서 교사편만 두둔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교사가 최소한으로 존중받는 문화 관행을 뿌리내리려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깊이깊이 고민하고, 필요하면 제도 개혁도 추진하자는 얘기다. 이것이 평가모델 세부안 작성보다 더 긴급한 숙제 아닐까?        

<< 이야기 셋 >>  '교단 위기론'을 다시 읽는다

  우리교육 96년 9월호에서 '교단의 위기, 교사의 위기'를 특집으로 다룬 적 있다. 3년이 지난 지금, '위기'를 넘어서 '교실 붕괴'가 거론되고 있으니 그때보다 사태가 더 악화된 것이라 봐야겠지. 그러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때 좌담 참석자들은 사태를 제대로 진단한 것일까?  그무렵 우리가 허술히 보아넘긴 어떤 면이 있다면, 그 오류 또는 편향은 지금도 얼마간 재생산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좀 흘러간 얘기이긴 하지만 그 속에 깔린 논리를 잠깐 살피기로 한다.

  이 좌담에선 주로 '교사들을 향한 (내부) 비판'의 발언이 쏟아졌고, 그 반론의 말은 수세(守勢)에 몰렸다.  비판의 발언을 A로, A에 대한 반론을 B로 표기하여 몇 가지 간추린다.

  A : ㉠전문성이 모자란다. 수업도, 생활지도도 자신이 없다. 아이들은 잘 꾸민 상품으로서의 교육 서비스를 원하는데 이에 부응하지 못한다. 공부할 시간도, 의욕도 없다. 그래서 절망한다.

       ㉡권위적 틀에 갇혀 살다보니 교사 집단의 자기생명력/변화 대응력이 없어졌다. 고정된 생각으로 아이들을 대하니 갈등이 생긴다.   

       ㉢아이들은 대상화되기를 거부한다. 교사는 아이들의 변화에 맞추어 난이도 조절하기와 아이들을 주체로 세우기에 실패했다. 아이들은 수업에서의 소외감이 크고, 교사는 '질'로서 승부하지 못하니 아이들을 휘어잡지 못한다.  

       ㉣학생들 변화에는 부정면도, 긍정면도 있다. 부정적인 변화라 해도 학생들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B : 자꾸 교사의 자질, 의식에만 초점 맞추지 마라. 모든 것을 개인적인 노력으로 돌리지 마라. 돌출적인 노력을 일반화해선 안된다. 교사의 위기는 더 주되게는 교육과정 전반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A : ㉤상부에 제도 개선 요구해야겠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동안 딴편으로 교사의 능력을 힘껏 키워야 한다.

       ㉥교사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니다. '교사의 질'만을 따로 떼서 볼 순 없지만 '현장의 문제를 제기할 주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교사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론 수업 못하니, 이것을 개선해 달라"는 말을 그 교사 아니고 누가 하겠는가?

     ㉦개인적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지만, 개인적 노력의 끝에 '연대'가 있는 것!

     ㉧"비리/무책임 교사는 '극히 일부분'이라고 말하는 데 반대한다. 바깥에는 그렇게 말해도 우리끼리는 부끄런 면들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이 좌담이 '교사의 자기 갱신'에 초점 맞춰지다 보니, B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A에 심정적인 표를 던지게 된다.

  ㉠+㉡+㉢ : 하나하나의 말을 따로 살피면 다 옳은 얘기다. 문제는 말의 논리적 연결이다. ㉠에서 발언자는 그저 '전문성의 부족'만 따지고 든다. 그러다 보면 선생들의 '자신 없음'은 오직 '전문성이 모자란 탓'으로 저도 몰래 돌려지기 쉽다.  ㉢을 뜯어 보면 '교사가 노력만 하면 <질로써 숭부>할 수 있다'는 전제(前提)가 들어 있는 듯하다. '교실 붕괴'의 여러 가지 한심한 장면들을 떠올리라. 대다수 교사들이 수업 자체를 힘들어 하는 형국이라면 위엣 전제는 '특출난 노력을 기울이는 교사'한테나 어울리는 얘기 아닐까?   

  ㉣ : 옳다. 이 얘기는 <→학생들이 아무리 부정적으로 바뀌어도, 교사들이 포용해야 한다>는 얘기로 나아가겠지. 그런데 이 얘기가 <→포용해야 하는데 포용 못하니 느그덜, 정말 한심해!> 사납게 눈 부릅뜨는 쪽으로 곧장 옮아가는 것은 조심해야지 않을까? 교사들이 교무실에 둘러 앉아 걸핏하면 못마땅한 아이들 흉보는 광경도 좋아 보이지 않지만, 포용 못하는 교사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서로의 소통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벽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B의 반론에 대해, A는 ㉤-㉨에서 되받았다. ㉤은 이의 달 것 없이 옳은 말씀. 그런데 ㉥의 밑줄친 말은 타당한 반론이 못 된다. <'교사의 질'만을 따로 떼서 볼 수는 없지만...>에 이어져야 할 말은 <...그렇다 해도 '교사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교사 자질 높이기부터 시작하자.>쯤일세. "문제 제기의 주체는 교사이다."에서 발언자는 '주체=개별 교사'를 상정(想定)하는 듯한데 참 소박한 생각 아닐까?  '개선해 달라고 그 교사가 (개별로) 요구하니 되더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문제 제기'는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게 대부분이요, 그러니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때라야 가까스로 해결되는 것 아닌가?

  위엣 문장을 고쳐 써본다. "'교사의 질'만을 따로 떼서 볼 순 없지만(≒구조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교사의 (집단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  '동어반복'에 진배없다.  발언자의 원래 뜻에 가깝게 다시 고친다. "...떼서 볼 순 없지만, '개별' 교사가 (제도 개선을 위해)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말이 안 된다.

  발언자는 '교사의 자질 높이기'와 구조적인 위기 요인들을 견주어 설명하라고 독촉받았다.

구조적인 요인들의 중요성을 그가 모르지는 않는다.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구조'보다는 '개별 교사의 노력'을 강조하고 싶었다. 두 가지를 원만하게 절충하려다 보니, 묘안이 생각났다. "아무튼 (개별) 교사들이 다 노력해야 하는 거야! 수업 연구와 참교육 실천도 교사들이 저마다 해야 하는 것이고, 잘못된/낡은 관행과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개별) 교사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개별'이란 낱말까지 덧붙였으면 뜻이 더 분명해졌겠으나, 그러면 논리가 더 허술해진다. 교사가 개별로 나선들 얼마나 제도 개선을 이뤄내겠느냐는 날카로운 반론이 들이닥칠 터이니. 그래서 그 낱말은 뺐다. 어찌 됐건 '교사들의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교사들의 노력'이 뭣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인고? 발언자는 그저 절충하려고 서둘렀을 뿐, 이 노력이 딴 무엇보다 중요한지는  찬찬히 견주지 않았겠지. 그렇지만 '교사들의 (개별)노력'과 견줄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 교사단체의 집단적인 활동뿐이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의 '교사들 노력'은 제도개선 싸움을 위한 노력이다. 그러면 제도 개선을 위한 교사들의 노력이(→개별 노력들의 단순 총합? 단체 전체의 힘?) '구조적 요인의 개선'보다 중요하다??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잘못 읽었는가?       

  발언자의 머릿속은 '교사들 전문성 높이기'의 전도사(傳道師)다운 열정으로 온통 가득차 있다. "그게 '구조 개선'보다 먼저요! 구조 개선? 그거 나중에 생각합시다!"하고 내심 부르짖고 싶은 거다. 그래서 ㉦에서 '단계론'을 내놓는다. '개인적 노력만으론 해결될 수 없지만--'?? 여기까지는 옳게 대꾸했으나, '개인적 노력 끝'에, 고쳐 말해 '개인적 노력을 <먼저> 하고서' 그 다음에 연대(連帶)가 와야 한다? 여기에서 오류가 흘러나온다. 단계론의 오류!

  그동안 한국 사회에는 헬수없이 많은 '단계론'들이 흘러다녔다.  ◎도산 안창호의 단계론-. 독립 준비를 위한 물산장려운동이 먼저요, 독립 전쟁에 나서는 것은 그 다음이옷!! 그 다음 언제? 일본이 우리를 대동아전쟁 병참기지로 싸그리 말아먹고 난 뒤? 그때쯤 돼서 흥사단 사람들이 독립전쟁 벌이긴 벌였수?  ◎'비지파(=DJ 비판적 지지파)'들의 단계론-. '민주'가 먼저요, '진보'는 나중이오옷! 그러니 DJ 집권할 때까지는 DJ를 밀어야 하오! DJ 안 밀면 '역적(逆賊)'이요옷!! 백로처럼 목을 길게 뽑아 DJ가 대통령 먹을 날만 기다리다 진보 세력이 말라비틀어져도 좋단 말이우? 언제까지 밀어야 하우? DJ가 전두환과 사이좋게 노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때까지? DJ가 집권했는데 '이젠 우리 갈 길 가자!'는 얘기가 왜

김근태씨, 이해찬씨 입에서 안 나오는 거유?

  현실에선 함께 간다. 독립 준비와 독립 투쟁이, 민주와 진보가, 개인적 참교육 노력과 집단적 제도개선 싸움이! 양쪽은 현실에서 서로 떼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억지로 머릿속에서 따로 떼내어 어느 것에 방점 찍을 때 논리와 실천의 오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 버릇을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 일컫지. 형!이!상!학!!  

   왜 이런 단계론 취향이 도드라졌는지 그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96년쯤이면 사람들 '복직'은 이뤄졌어도 옛 중국의 누구처럼 깡패들 다리가랭이 사이로 기어서 지나가는 굴욕을 맛본 지 얼마 안 되었고, 합법화 전망은 불투명했으니 전교조에 전투적인 기풍이 솟아나기 쉽지 않았다. 제도개선 싸움이 힘 받기 어려우니, 저마다 개별 노력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않겠냐는 소박한 심리가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이 얘기를 솔직하게 하면 흉이 되지 않는다. 흉이라니! 전문성과 '질'로 승부하여 '교단의 위기'를 벗어나겠다는데, 남들이 도저히 흉내내지 못하리만큼 수업 실천에 몰두하고 있는데, '누구는 밤9시까지 남아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더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 전교조 참교사의 명예를 휘영청 빛내 주는데 감히 흉을 잡다니! 다만 '개별 노력이 구원의 길이오!'하고 전도사처럼 나설 때는, 그것도 말표현을 얼버무려서 나설 때는 그게 쬐그만 흠이 될 따름이지.

   ㉧에서 발언자(들)은 '비리/무책임' 교사가 '극히 일부분'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과연 몇 %쯤 되는지 발언자들이 또렷이 알고 말한 것인지 궁금한데, 우리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래도 기본 가닥은 잡을 줄 안다. 조신하게 반성해야 할 교사는 '극히 일부분'이 아니라 참 많다. 우글우글하다. 이것은 실증조사, 통계 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우리네 직관으로 꿰뚫는다. 그러나 퇴출/견제 대상으로 명단에 올라야 할 만큼 게으르거나 비리를 저지른 교사 숫자는, 모르긴 몰라도 얼마 되지 않으리라. 발언자들은 저희 생각을 되살펴야 한다. 못된 교사가 참 많다고 부르짖었을 때, '퇴출/견제'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닌지를.

  끝으로 ㉨에서 좌담 사회자는 Α에 심정적인 표를 던지겠다고 했다. 이 좌담이 '우리 교사들,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열렸다면 군소리없이 Α에 투표해야것지. 하지만 '교단의 위기'를 진단하는 '논리적인' 좌담일 경우, 우리를 옭죄고 있는 구조적인 요인도 아울러 짚었어야 한다. 그때 좌담자들은 '그저 우리가 (참교육실천을) 열심히 하자!'고 의견을 모았건만, 현실은 더 암울한 쪽으로 흘러 왔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학교의 위기는 교사들이 수업 연구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야! 그게 주된 원인이야!'하고 부르짖을 셈인가?

  조한혜정 교수가 뜻깊은 사실 하나를 일러준 적 있다.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80년대에 노동계급 중심론이 세력을 떨칠 때에 그쪽 얘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 계급 모순하고 엮어서 해석하니, 계급모순만 '짱/캡'이라고 떠벌이니 그럼 우리 여성운동은 핫바지저고리란 말이냐? 그런데 90년대 접어들어, 계급운동이 점점 쇠퇴해 왔을 때, 저희를 얕잡아 본 계급운동이 주저앉았으니 저희가 이젠 기(氣) 펴고 활약해야지, 잠깐 들었던 생각은 참으로 단견(短見)이었음을 곧장 깨달았다는 거다. 계급운동이 진보운동의 큰 몫을 차지해 왔는데, 이것이 가라앉을 때 진보운동의 딴 영역이라고 성할 리 없었다는 얘기다. 여성운동도 80년대의 활기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요즘은 자신의 제자들이 실업(失業)과 가난의 고통에 허덕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기가 나서서 '계급!'을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씀도 덧붙인다.     

  그렇다. '교과 모임'은 저희끼리 열심히 굴리기만 하면, 잘 굴러가겠는가? 노동조합 운동의 무풍지대인가? 그저 수업안 짜는 것 하나만을 제 임무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전교조가 단체교섭 싸움에 잇달아 죽을 쑬 때, 참교육실천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전교조 지도부가 만(萬)의 하나라도,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포섭돼 갈 때, '참실위'라 해서 바른 방향 쉽게 잡을 리 없다. 두 가지를 서로 떼놓고 사고(思考)하지 말자는 얘기다. 아니, 단체교섭 싸움과 나아가서는 진보운동의 실천에 무관심하고 싶은 사람들이, 또는 분회 울타리 바깥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흔히 '단계론'이니, 뭐니 자족(自足)의 논리를 들먹이기 마련이라고 의심하면 억측이 될까? 억측이라시면 0.1초 안에 물리겠다.

  '편향의 재생산'이라--. 글머리에서 이것을 살피겠다 했다. 편향은 편향이되, 크게 불거져 나온 편향은 아니다. 운동 방향을 어긋나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힘을 모아내는 데 가끔씩 맥빠지게 만드는 역기능쯤의 문제다. 이 글의 실천적인 의의도 무슨 경종을 울리는 차원까지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사고의 균형을 위하여 노파심으로 덧붙인다.

 (나중에 덧붙이는 글: 얼마 전 전교조 신문을 들춰보니, 어느 간부가 칼럼을 썼더라. 요약하자면, "본부/지부에서는 단체교섭을 열심히 할 터이니, 분회에서는 참교육 실천을 열심히 해다오!"하는 당부 말씀이더라. 옳은 말씀이지만, 참으로 한가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꼬? 나 같으면 달리 말하고 싶더라. "평소에는 참교육 실천을 열심히 해주시되, 단체교섭에 힘 실어줘야 할 때가 되면 악착같이 가담해 주셔야 합니다. 전교조는 지금 정부와 전혀 밀월 관계가 아니고, 이 사정은 한참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니까요. 상부는 싸움하고, 하부 단위는 싸움에 구경만 하는 식으로 '분업'이 이뤄지면 전교조는 끝장 납니다!" 10.30날 수도권 결의대회가 있었다. 개인 용무가 있어 부득이 대회에 불참했던 한 동료 조합원이 '몇 명 참석했느냐'고 나중에 내게 물었다. 000명 쯤 참석했노라, 대꾸했더니 그분 가라사대 "음, 제법 많이 왔구먼!"  그 말을 듣고 돌아서며 슬그머니 심술궂은, 아니 서글픈 추리가 떠올랐다. 분회 바깥의 단체행동에 일일이 따라나서기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전교조 단체교섭 싸움'을 '잘 돼 나가는 쪽'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는! 뒷풀이에서 소줏잔 건넨 한 서울지부 간부는 '예상 최소 인원'이 참석했노라며 울상을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집회엘랑은 늘 나오는 사람만 단골로 참석해서야 전교조 투쟁동력이 가까스로 명맥은 이을 지언정, 어찌 저쪽에 타격을 가하고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겠는가. 동지 여러분! <분업>은 안될 말씀이오. '분업'에 자족하고픈 분들을 불편케 해드릴 말씀밖에는 할 수 없소. 소크라테스의 암소 등에 달라붙은 등에처럼 이 말씀이 불편하시더라도.....)   

<< 이야기 넷 >> '대학입시 평준화'를 숙고하자

  김경근 교수(전북대)가 요즘 펴낸 책 '대학 서열 깨기'를 구해 읽었다. 한국에서 입시경쟁이 유별나게 극성을 떠는 주된 까닭은 대학이 1등부터 꼴등까지 한 줄로 줄서기한 탓이라며 근본 해결책으로 '대학입시 평준화' 방안을 내놓았다. 현실 진단이야 진보적인 교육주체들에게는 일찍부터 공유돼온 앎이라서 그리 새삼스럴 것이 없지만, 대학 서열구조를 깰 구체안으로 '평준화 방안'을 <분명하게> 내놓고, 그 실현가능성을 자세히 짚어가며 옹호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존심'이 쬐금 깎였다. 맞아, 이것이 화끈한 대안인데, 우리 연구소 패에선 왜 이 대안을 '확실하게' 꺼내들 생각을, 아니 자세히 짚어낼 준비를 못했을까. 프랑스나 독일에서 해온 대로만 하자는 얘긴데, 현실에서 이뤄진 일이요 그러니 의제(議題)로 제출 못할 까닭이 없는데 그저 '아, 걔네들 나라가 부럽다.'고만 궁시렁대며 지내왔으니...  우리는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딴 진보 교수들이나 전교조 활동가들 중에서는 '구체 방안' 내놓을 생각들을 안 했을꼬?

  다들 교육문제 다룬다고 다뤄 왔지만,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만 골몰하다보니 그랬는지, 아니면 입시현실이 너무 지독하여 그 앞에서 주눅이 들어 그랬는지 그저 '대학 서열구조 깨야만 뭔가 달라질 거야!'하는 막연한 방향 제시에만 머물고 한 걸음 더 나가지를 못했다.  아니, '서울대를 없애자(또는 쪼개자)!'는 얘기는 몇 군데서 꺼냈지.(김세균, 강준만...). 좋은 방안이지만 그것만 갖고 될 일인가?  

  김경근이 말한 내용 몇 도막을 두서없이 적어 본다.

 ▶서울대가 2002년부터 '무시험 전형' 하겠노라 발표했을 때, 언론에서는(...'한겨레'에서도) 대단하게 칭송했는데 면피용 계획서에 장단 맞춘 꼴이다. 과외와 서울대병은 전혀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학교내 경쟁은 더 치열해질 터. 서울대 당국은 '수능 고득점자' 독점에만 혈안이 돼 있다. 명문대 당국들이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해 있는 판에, 그들이 어째서 순순히 서열 구조를 깨리라 예단하는가?  

 ▶한국 대학들의 '서열'은 주로 입학생 수능점수에 의해 결정될 뿐, 대학의 여건이나 '교육의 질'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수능성적순 지원방식만 없애면 서열이 폐지된다.

 ▶어느 해 대학정원이 100명이고 진학 희망자가 120명이라 치자. 먼저 정원의 70%인 70명쯤을 '내신'만으로 뽑는다. 그러면 120명에서 70명, 즉 상위 60%는 고교 성적만으로 진학을 보장받는다. 나머지 50명은 학력고사를 치러 그중 30명을 뽑는다. 내신 우수학생은 시험없이 진학하고, 내신이 처지는 학생은 학력고사로 실력 발휘 기회를 얻는다. 공교육의 활성화도 노리고, 학교간 격차에 따른 불이익도 줄일 수 있다. 그럴 때 커트라인 안팎에 걸리는 10-20명쯤을 빼면 '과외'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다.

 ▶학생 지망권이 무시되지 않느냐구? 계열별로 묶어 뽑으면 된다. 법대/의대 같은 특수대학은 학부를 폐지하고 전문대학원체제로 가는 게 좋다.

 ▶대학이 하향 평준화될 걱정은? 현대는 소통능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한다. 지금같은 성적별 격리주의가 더 위험하다. 그리고 학력 차이는 여러 등급의 강좌를 열거나 우수 학생은 대학원 강의도 받게 하여 해결한다. 석사 과정에서는 우수학생끼리 모이므로 엘리트양성을 걱정할 것 없다. 대학원에서의 경쟁은 '과열'을 염려할 것 없다.

 ▶우수 학생이 손해볼 걱정은?  평준화체제에선 '간판'이 아니라 '학점'이 절대적이므로 대학 가서 다 인정받는다. 오히려 여지껏 명문대생은 간판만 딴 뒤, 탱자탱자 놀거나 간판 위에서 잠잤다.  

 ▶고교생들이 게을러질 걱정은? 고교생은 더 놀고, 대학생은 더 많이 공부해야 '정상'이다!

 ▶부실대학 문제는? 그것이 약간 걸림돌인데, 교육부당국이 엄격하게 '대학 평가'를 하여 악질 학교에는 폐쇄명령까지도 내려야 하며 '구조 조정'도 추진해야 한다.(...대학간 빅딜을 통해 비슷한 학과끼리 교환/통합하기.)

 ▶사립대는? 평준화하면 공/사립 등록금을 똑같이 매겨야지. 사립대도 이제는 나랏돈 혜택을 입고, 오히려 공립대 등록금이 높아진다. 하지만 '과외비 지출'이 없어지니 큰 시름은 던다. 또, 부모 소득수준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적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명문대의 운명은? 서울대는 '학부'를 반드시 없애고, 딴 명문대는 알아서 없앤다. '명문'의 명예는 대학원대학으로 거듭나서 찾을 일이다.(...지금 명문대 여럿이 발표한 '대학원중심으로의 전환'은 눈 가리고 아웅하려는 계획이다.)

 ▶수십년 굳어진 '서열' 없애기가 단칼에 될까? 중학교, 고등학교 평준화를 두 차례나 성공시킨 '기억의 자산'이 있다. 평준화가 낳는 어떤 부작용도 입시지옥을 해소하는 '공'을 상쇄하지 못한다.

 ▶대학정원이 자율화되면 입시지옥 해소된다는데? '줄세우기 구조'에선 아무 소용 없다.

  김경근의 현실 고발 중에 가장 생생하게 와닿은 대목은 '두뇌한국 21'에 관한 얘기다. 그게 '서울대 특별법'의 재판(再版)이며, 돈 안 되는 인문학을 말려죽일 셈이라는 비판은 일찍이 나온 얘기들이지만, 서울대(+몇몇 명문대) 대학원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는 그의 지적은 참으로 통렬하다. 정부는 서울대 대학원에 7년간 7천 억원을 퍼붓겠다고 하는데 그 돈을 장학금, 기숙사, 해외 인턴십 제공 따위에 쓴단다. 그런데 지금 서울대 대학원생 상당수가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으며 대학원 시설이 낙후된 까닭에 박사과정 지망자가 줄어드는 게 결코 아니다. 왜 줄었냐구? '교수' 될 가능성이 바늘구멍이기 때문이여. 우리나라 대학 시간강사들이 몇 군데 부지런히 뛰어야 기껏 월 백만원 움켜쥐는 미천한 '일용 잡급직'으로 대접받아 오면서 그걸 견뎌내게 해준 것은 오로지 '교수 될 가능성'뿐이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누구더러 고달픈 '학문의 길'을 걸으라 등 떠밀꼬? 사물의 뿌리를 봅시다. 한국의 학문 경쟁력을 일으킬, 아니 젊은 학자 지망생들을 재생산하여 학문의 고사(枯死)를 막아낼 가장 급한 길은 시간강사들에게 <생계 걱정이라도 덜어주는 일> 아닐까? '복지'를 내팽개친 '경쟁'이 대관절 무슨 미덕(美德)이 된단 말이뇨?  

  그가 셈한 바에 따르면, 서울대에 붓겠다는 7천 억원으로 무려 8천 명의 박사급 연구원들에게 7년간 다달이 백만원의 생활 보조비를 베풀 수 있단다. 8천 명이면 젊은 연구자들 숫자의 거의 절반에 가깝다. 그 엄청난 돈을 아무렇게나 하수구(下水溝)에 흘려 버리겠단다. 이게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의 소행이라 말할 수 없다.

  하기사 한국의 집권층이 그동안 쓸데없이 낭비한, 쏟아내 버린 나랏돈이 어디 한두 푼인가? 온통 비웃음 산 '금강산댐' 따위는 접어두더라도, 가령 애물딴지가 돼버린 시화호에 쏟아버린 돈만 해도 1조쯤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에는 백성 부담으로 돌아가는 '공적 자금'을 요 몇 년간 7조 원이나 받아먹은 제일은행이 미국자본가들에게 단돈(?) 5천억원에 팔렸단다 글쎄. '어린' 백성들은 참으로 무서운 무의식(無意識)에 시달려 왔는갑다. 만날 싸움질만 일삼는 국회의원들이야 꼴볼견이라 해도, 세계 십몇등 짜리 괜찮은 중진자본주의 국가의 기둥 노릇을 해온 <'관료' 집단은 꽤 똑똑하다>고 무심결에 믿어버리는 위험천만한 무의식! 그럼, KS 마크의 명문 학교를 나온 엘리트들인데, 우린 엄두도 못낸 사법고시에 처억하니, 떠억하니 붙는 고급두뇌를 가진 집단인데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라구! 걔네한테 이성(理性)이 없으면 대관절 누구한테 있어? 그래서 이 사회에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대형 사고가 터져 나와도 그때 며칠뿐, 우리네 지배엘리트들의 무지무능함을 또 잊고, 또 잊어버린다. 종전(終戰)되지 않은 사회에 살면서 '휴전 상태'임을 잊고, 서양 어느 석학이 이름붙여준 '위험 사회'에 살면서 불장난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잊는다. 'BK 21'의 허상 살피기가 우리네 무의식을 한번 더 씻어내는 한 옹큼의 대얏물이 되었으면 한다.

  '경쟁력' 물신에게 경배 올리는 BK21 돈-굿, 그 응달에서 쇠잔해 가는 학문 룸펜프롤레타리아 현실을 견주어 살필 줄 안다면 교사 집단에게 능력급/성과급 들이디밀기는 또 얼마나 살벌한 짓거리인지 너끈히 헤아린다. 능력급/성과급의 논리는 참 묵중/엄중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돌아보라구! 게을러터진 교사들 투성이 아니냐! 이래서야 세계화 파도 속에서 살아남겠어? 뭔가 노력하게 만들려면 '수'를 내야지 않는가!.... 그런데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우리 정부는 공무원/교원들을 한껏 착취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