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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준비 1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_손지희역

2001.10.11 11:58

애플 조회 수:1470 추천:5

이글은 『Education』(1997, Edited by A.H. Halsay, Hugh Lauder, Phillip Brown, Amy Stuart Wells)에 수록된, Michael Apple (1993), "What Postmodernists Forget : Cultural Capital and Official Knowledge", Curriculum Studies 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애플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교육학자이다. '교육과 권력', '교육과 이데올로기'등의 번역서를 교직과목을 통해 접했던 기억이 난다. 계급, 성, 인종 모순과 교육내 모순이 어떻게 중첩되어 있는 지를 밝히려는 자칭 네오 맑시스트인 애플이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 저자는 90년대 들어서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온 포스트모더니즘적, 후기 구조주의적 논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자 한다. 그동안 거대담론에 가리워져 있던 여러 가지 세부사항을 다루는 논의 또한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지만 현시기 교육이 겪고 있는 일들을 규명해 내기 위해 어떤 관점을 견지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사실, 거대담론이 여러 미시적 사항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적 논의가 너무 쉽게 거대담론의 통찰력을 폐기처분해 온 측면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얼마나 균형있는 시각으로 지금의 상황을 날카롭게 파헤치느냐이다. 날카로운 분석적 설명 없이는 어떤 정책이나 제안이든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 현장에서 느끼는 많은 문제들이 결코 거시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직관, 그리고 현장교사들의 행위들이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는 믿음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거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교사와 학생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What Postmodernist Forget)이라는 애플의 글은 그다지 세밀하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우는 데는 필요한 측면이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런 흐름 속에 휩쓸려 가도록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과 우리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는 일은 둘이 아닌 하나의 작업 속에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
: 문화 자본과 공식적 지식

박윤경, 손지희 譯 /교육이론분과 연구위원

 

<역자주>

『Education』(1997, Edited by A.H. Halsay, Hugh Lauder, Phillip Brown, Amy Stuart Wells)에 수록된, Michael Apple (1993), "What Postmodernists Forget : Cultural Capital and Official Knowledge", Curriculum Studies 을 번역한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

글쓴이 애플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교육학자이다. '교육과 권력', '교육과 이데올로기'등의 번역서를 교직과목을 통해 접했던 기억이 난다. 계급, 성, 인종 모순과 교육내 모순이 어떻게 중첩되어 있는지를 밝히려는 자칭 네오 맑시스트인 애플이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

글쓴이는 90년대 들어 유행처럼 번져온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의논의가 놓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그동안 '거대 담론'에 가리워져 있던 여러 가지 세부 사항을 살피는 논의도 요긴한 것이지만, 지금 시기 교육이 겪고 있는 일들을 밝히려면 어떤 관점을 견지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사실, 거대 담론이 여러 미시적 사항들을 다루지 못하긴 했지만, 거꾸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논의도 너무 쉽게 거대 담론의 통찰력을 폐기처분해 온 혐의가 짙다. 문제는 얼마나 균형있는 시각으로 지금의 상황을 날카롭게 파헤치느냐이다.

날카로운 분석적 설명 없이는 어떤 정책이나 제안이든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 현장에서 느끼는 많은 문제들이 결코 거시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직관, 그리고 현장교사들의 소박한 실천이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는 믿음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하겠다.

미국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거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교사와 학생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What Postmodernist Forget)이라는 애플의 글은 그다지 세밀하게 논의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어떤 시각을 견지해야 할지에 대해서 일러주는 바가 크다. 무엇이 우리를 이런 흐름 속에 휩쓸어 넣는지를 통찰하는 일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은 서로 뗄 수 없는 한 가지 일이다.

들어가는 말

모두가 놀라서 학장(the department chair)을 응시했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방안 가득히 분노와 불신의 소리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학장이 '위에서 내려온 것'을 알려주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없애고 있는 벽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역자 주 - 이것은 계속 진행해오던 작업, 즉 경제적 합리화를 바탕으로 교육을 산업에 통합하려는 시도의 일부이다.] 동시에 그것은 경제적 경쟁과 합리화에 교육을 완전히 통합시키려는 우파의 계획으로부터 교육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쉽게 질서를 회복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서서히,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는 가운데, 주 교육부(the State Department of Public Instruction)와 주 의회(the Legislature)의 결정이 위스콘신의 모든 학생-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부터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대학생은 전부 '자유 경영 체제의 혜택'이 핵심을 이루는 직업 교육(Education for Employment)과정을 이수하게끔 되었다. 또한 초·중등 - 다섯 살부터의 - 학교 교육 과정 역시 그러한 직업 교육 프로그램 내로 통합될 것이며, 직업교육은 아무리 일찍 시작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교육은 단지 사적(私的) 영역을 위해서 '인간 자본'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위엣 이야기를 꺼내서 이 글을 시작하는 까닭은 지금의 보수주의적 상황 속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겪는 고충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게다가 우파가 들이미는 사회개혁 요구의 과도함을 다소나마 억제하려는 새 연방정부가 출범했는데도, 논쟁의 어조와 경제·사회적 조건들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더 현저히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Apple, 1993). 우리는 학교와 대학에서 일어나게 될 일을 놓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특히 주정부가 재정 위기를 겪고 있고 두 정당이 보수적인 사회, 경제적 개혁요구의 주요 측면을 수용하게 될 경우 더더욱 감상(感傷)을 피할 일이다. 앞의 이야기는 대학 등의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게 될 많은 일에 대한 일종의 은유(메타포)일 수 있다.
보수주의 동맹이 꾀해 온 '교육과 사회의 더 큰 변화'라는 맥락에서 위의 이야기를 살펴 본다.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

보수주의는 바로 그 이름 자체를 통해, 그것이 내세우는 의견에 대한 한 해석을 드러낸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보수'는 '지킨다'는 뜻이다. 비꼬아 말해서, '보수주의'란 '절대로 새로운 일이 시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이다. (Honderich, 1990:1). 그러나, 지금 상황의 여러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볼 때, 이런 식으로 보수주의를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 우파가 우세를 떨치는 여러 나라들이 오히려 더 기세 높게 사회 경제적 개혁 방안들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보수주의가 내세우는 정치학은 <변화의 정치학>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보수주의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교육 등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Honderich, 1990:4).

사실, 보수주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함의를 달리한다. 그것은 때로는, 방어적인 행동과 관련되며, 때로는 현상(status quo)에 대항하여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Honderich, 1990:15). 지금의 보수주의는 두 가지 특성을 다 갖고 있다.

따라서, 공식적 지식의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는 지금의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1) 2차 대전 이후 교육 정책의 상당 부분을 이끌었던 합의는 파기되기 일쑤다. 정부와 재계 및 인민주의 사회 운동 내의 주도 세력들은 교육, 복지 등 공익 영역에서의 쟁점들을 - 때로는 매우 퇴보적인 방식으로 -호시탐탐 재정의하려고 한다. 교육의 존재 이유는 바뀌고 있다(Apple 1993). 더 이상 교육은 여러 '소수' 집단, 여성, 교사, 지역 사회 활동가, 진보적 입법가와 정부 공무원, 그리고 학교를 위한 (제한적인) 사민주의적 정책2)제안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묶어주는 사회적 동맹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교육정책과 사회 정책에서는 새로이 엮인 동맹의 힘이 커지고 있다. 이 세력권(power bloc)은 신우파와 신보수주의 지식인 및 자본주의 장사꾼(business)의 결합이며, 이들은 여성, 유색인종이나 노동자들(이 집단들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음은 분명하다.)이 더 풍부한 삶의 기회를 누리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의 관심은 국제 경쟁력, 이윤, 규율을 늘리는 한편 '이상적인' 가정, 가족, 학교라는 낭만스레 포장된 <옛날>로 세상을 되돌리는 데에 있다. 저희들의 이해 관계에 합치된다고 믿는 교육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Apple 1993). 이런 주제가 중요한 효과를 발휘하게 하려고 굳이 백악관까지 통제할 필요는 없다.

이 동맹의 힘은 막강하다. 그들은 대학을 겨냥한 정책이나 제안뿐 아니라 일반적인 학교 교육 정책 및 제안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더 넓은 구도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등 교육 기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음의 정책 제안들이 그들의 작품이다.

(1) '선택'을 위한 방안. 학교를 완전히 이상화된 자유시장경제처럼 만들려는 의도를 간직한 바우처 플랜(Vaucher plan)과 세금 환불제(tax credit) 등
(2) '표준을 강화'하려는 전국적인 움직임. 즉, '자격'(교사, 학생 모두) 부여, 교육 과정의 기본 목적과 지식을 '표준화된 검사(주단위, 전국단위) 시행'에 떠맡기려는 국가와 주 정부의 끈덕진 움직임
(3)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공격. 즉, 학교 교육 과정의 반 가족적이고 반 자유 기업적인 '편향', 세속적 인문주의, 애국주의의 결여 그리고 '서구 전통'과 '실제적 지식'이 가지는 가치나 지식에 대한 무시 등을 근거로 한, 학교 교육 과정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
(4) 기업과 산업의 요구를 모든 단계의 교육에서 으뜸 목표로 만들어내려는 압력의 증대(Apple 1988, 1993).
이것들이 이끌어낸 갖가지 효과들 - 문화 전쟁, 증폭되는 교육재정 위기, '정치적 조정'에 대한 공격 등등- 은 대학에서도 예외없이 실감한다.

본질상, 보수주의로의 복고를 옹호하는 새 동맹은 '교육'을 더 넓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통합해 왔다. 다시 말해서 교육의 목표와 경제·사회적 부를 추구하는데 지침이 되는 목표들은 같다. 이 목표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첫째, '자유 시장'[옮긴이 주-규제 없는 시장] 확대
둘째, 사회적 요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철저히 덜어내기(설령 클린턴 행정부가 이를 그다지 넓지 않은 범위에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방식으로 조정한다 할지라도)
셋째, 이동 구조의 경쟁적인 성격을 재강화.
넷째, 사회적 다윈주의3)의 성격이 뚜렷한 사고 방식의 대중화(Bastian et al.1986).

이미 다른 곳에서 따갑게 목청 높여 왔듯이, 미국의 정치적 우파는 걸핏하면 경제 내부의 위기를 학교에 떠넘겨서 교육 체제 및 고용자들에 반대하는 흐름을 [옮긴이 주-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직하는 데 꽤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식의 떠넘기기가 해낸 중요한 성취는 경제위기가 일으키는 여러사회 문제들 - 실업과 불완전 고용, 경제 경쟁력의 상실, 가족·교육· 작업장에서의 '전통적' 가치와 표준의 붕괴 조짐 - 에 대해 비난이 몰려야 할 지점을 효과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난의 화살을 경제, 사회, 문화 정책에 미친 지배 집단의 영향탓에서 학교를 비롯한 다른 공공 기관탓으로 돌린 것은 바로 '떠넘기기 전략'을 통해서였다. '공(公)'은 이제 모든 '악'의 중심이며, '사(私)'는 모든 '선'의 중심이 되었다(Apple 1985).

미국과 영국에서의 보수주의 복권은 다음 네 가지 경향이 그 특징이다. - 민영화(privatization), 중앙집권화(centralization), 직업훈련화(vocationalization), 분화(diffe-rentiation) (Green 1997:27). 이 특징들은 대부분 동맹 내의 가장 강력한 진영인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차이들 때문에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는 '약한 국가'를 지향한다.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모든 국면을 자유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어가도록 내맡기는 사회야말로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라 여긴다. 이에 견주어, 신보수주의는 몇 가지 영역만은 '강한 국가'를 이상으로 내세운다. 이를테면, 신체·성(gender)·인종 관계의 정치학, 규범, 가치, 행위,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마땅한 지식 등의 영역은 강한 국가가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Hunter 1988). 국가에 대한 서로 다른 이상(理想)은 그저 이념형4)(ideal type)일 뿐, 이 두 입장[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이 보수연합 내에서 양립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우파의 움직임은 모순적이다. '<상실>을 완전한 유동성으로 대신'하는 가운에, 상실감과 향수를 전부 시장의 예측불가능성에 연결짓는 것에는 어떤 역설이 있지 않은가?5) (Johnson 1991:40)

초·중등학교 수준에서, 우파 연합내의 신보수주의적 구성요소와 신자유주의적 구성요소 사이의 모순이 해결된 것은 Roger Dale이 '보수적 근대화'라고 일컬은 성격을 띤 한 가지 정책을 통해서였다. (Dale, Edwards et al에서 인용. 1992:156-7)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는 개인들을 통제하고 경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개인을 '자유롭게' 풀어주라 ; 사실상, 경제적 '자유'로 인해 불평등이 증폭되는 한, 사회통제의 필요는 커지게 마련이다. '작지만 강한 국가'는 되도록 많은 복지(와 그밖의 활동들)을 시장에 넘겨줌으로써 국가의 활동 범위를 제한한다. 이때, 시장을 보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국가의 구실이다.지금 교육계에서는 꼭 경쟁과 선택을 옹호하는 목소리만 들리는 것은 아니다. ; 대신, 그들이 교육계에 대해 갖는 속셈은, <'시장'화된 학교와 '최저'화된 학교…로 양극화되는 이중적인 체제>이다.

즉, 부잣집 아이들을 위해서는 비교적 규제가 덜하고 점차 민간화되는 영역이 선사될 것이다. 그 나머지 - 가령, 도시 지역 내에서 이러한 '최저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와 인종 구성은 너끈히 예측된다. - 를 위한 학교는 엄격한 통제 정책이 적용될 터요, 재정 부족에 늘 허덕일 것이며, [졸업장은]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

시장화(市場化)가 '강한 국가'와 결합한 탓에 생겨나는 주된 효과의 하나는 교육정책이 공적 논의에서 제거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선택은 개별 부모의 소관이 되고, 나머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떠맡는다. 이런 과정에서, 교육이 양식과 목표를 공적으로 논의해야 하는 대중정치 영역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은 움추러든다(Educaton GroupⅡ. 1991;268).

한편으로, 학교교육의 실제 및 정치에서 사람들의 권리를 북돋우려는 민주적인 시도와 딴 편으로, 시장화와 민간화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웅변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여 있다. 전자의 목표는 '확장된 정치', 즉 대중적 토론, 논쟁 그리고 협상을 강화하는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민주적 실천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선천적으로 민주적 실천을 교육적 실천으로 여기는 민주주의적 전망에 터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정치를 억제'하려고 한다. 그것은 정치를 '선택'과 '소비'라는 윤리에(Johnson 1991;68), 즉 '정치를 경제에 환원'시키려 든다. 세계는, 이를테면 '수퍼마켓'이 된다.(Apple 1993)

사고 파는 것-경쟁이라는 단어 속에서-이 사회의 지배적 윤리가 되도록 하는, 사적 영역의 확대는 밀접하게 연관된 일련의 명제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것은 사적 영역의 확대가 더 많은 개인들이 더 열심히 일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고 가정한다. 결국, 우리는 사기업이 효율적이고 활기있는 반면에 공무원 조직은 비효율적이고 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이기심과 경쟁이 창조성의 엔진이라고 가정한다. 이기심과 경쟁 덕분에더 많은 지식과 실험이 창출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을 바꾸는 데에 쓰인다. 그 과정에서, 보다 적은 '낭비'가 창출된다.6) 이렇듯 만들어진 더 효율적인 기제는 관리비용을 최소화하며, 궁극적으로 자원은 더 폭넓게 배분된다(Honderich 1990: 104).

물론 이것은 단순히 소수에게 특권을 준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옮긴이 주-소수에게 특권을 주는 데 지나지 않으며 불평등을 증폭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라는 항변]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모든 사람은 Eiger의 north face나 에베레스트 산에 오를 권리가 있다. 물론 당신이 등반에 매우 재능이 있고 등반에 필요한 제도적 재정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보수적 사회에서는, 사회의 사적 자원(그리고, 기억할 것, 거의 모든 사회적 자원을 사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임을!)에 대한 접근은 대부분 개인의 지불 능력과 '기업가적으로 또는 효율적으로 획득하는 계급형의 인간이냐'에 달려 있다. 다른 한편, 사회의 (급속히 줄어드는) 공적 자원은 필요(need)에 달려있다(Honderich 1990:89). 보수적 사회에서, 전자는 극대화되고, 후자는 극소화된다.

그러나 대다수 보수주의 형태들은 대부분의 주장과 정책에 있어서 특유의 인간관-인간 본성을 본래 이기적인 것으로 보는-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보수주의는 맨 처음에는 진실인 듯이 보일 만한 것에 모든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게끔 인간 본성을 깎아내리려고 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성공을 거둬왔다. 아마도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인간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바에 대한 보수주의의 절대주의적이고 환원적인 이상에 눈이 멀어, 자신들이 해온 짓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옮긴이 주 - 보수주의자들]은, 공격적으로 인민의 인격을 끌어내리기 시작했으며,(Honderich1990:81)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정한 가치와 인격이 인민에게는 결여되었다는 이유를 들먹여 가난한 자와 권리를 빼앗긴 자들을 공격해 왔다.

이쯤에서, [옮긴이 주-우리 아이들의 삶에 대해 느낀] 나의 분노를 보이기 위해 주제를 벗어나도 용서하리라 믿는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에 대해 분노할 수 있겠는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

신보수주의적 그리고 특히 신자유주의적 의제의 주된 요소들이 점차 대학을 지배해 가고 있다. '어느' 대학에 가게 되는가(또는 가지 못하게 되는가)를 두고 커져가는 계급과 인종의 양극화, 인문주의적이고 (또는) 비판적인, '비생산적'(이는 정말 폭로성을 띤 은유임.)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 삭감, '효율성'과 표준을 강화하라는 압력 증가, '공통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청,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수 행위, 연구, 재정 등등의 여러 대학기능을 산업 프로젝트에 점차 통합시키는 것 - 이를 포함한 많은 것들이 우리의 일상 생활을 복잡하게 재구조화하는 두 요소[옮긴이 주-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의 효과를 말해준다.

불행히도, 이런 재구조화의 주요소들은 고등교육 내의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공동체에 있는 집단들의 토론 의제로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우리가 지금 어떤 종류의 지식에 수업의 공식적 허가가 부여되어 가는지를 살펴볼 때 그렇다.

보수주의의 복권을 지지하는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공격 때문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몇몇 동료들에 의해 'posties'로 알려진 것에 의한 다소간의 과장으로 말미암아 포스트 모던과 후기 구조주의의 형식에 대한 논쟁은 계속 격렬해졌다. 반면, 지식에 대한 정치경제학, 즉 지식의 사회적 위계 (사회 내에서 높은 지위로 인정되는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치경제학에는 거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분야는 '문화전쟁7)'에 참여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자연과학'과 '응용과학(공학)8)'이라고 알려진 것들 - Walter Feinberg의 말에 따라 '기술/관리 지식'이라고 부르는 - 에 모든 단계의 학교들(초,중,고등교육)이 점점 더 역점을 쏟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교육과정 시간배당, 재정분배, 위세, 여러 국가 기구들의 지원(Apple 1985), 그리고 기술적 해법과 기술 지식을 위해 전념하는 워싱턴의 새로운 행정부에서 기술/관리 지식의 강조는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여전히 다소 잠정적이긴 해도 다음과 같은 직관에 따른 답변이다.

첫째, 기존의 분석틀과 시각[옮긴이 주 - 계급을 본질로 다루는 거대서사들]에 대해 엄청난 공격을 퍼붓고 분노하는 것9)은 다분히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직관

둘째, '우리'는 교육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네오-맑시즘적 전통이 낳은 가장 중요한 통찰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직관

여기서 말하는 것이 재구성되지 않은 Stalinoid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즉, 나는 여지껏 맑스적 전통 내의 환원주의적 경향을 거론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해 왔다.)10) 복잡한 관련에 대한, 본질주의가 아닌, 철저히 본질적인 이해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본질적인 이해를 추구한 것은 지식과 모종의 힘의 관계 간의 관련성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지식이 높은 지위를 부여받느냐'와, 고려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데도 쉽사리 잊혀져온'권력 관계들'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는 얘기다. 대학에서의 힘의 관계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대학까지 진학(또는 진학하지 않는)하는 학생들을 교육하는(또는 교육하지 않는) 초·중등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가혹한 변화도 짚어본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를 지지하는 다양한 입장의 성장은 문화와 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담론과 이해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모든 지배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 서사가 있을 수 있(고 있어야만 한)다는 환상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것, 정치영역으로서의 '미시적 수준'에 초점을 맞추는 것, 힘-지식 간의 관계가 갖는 복잡성을 조명하는 것, 정치적 관심을 계급·성·인종이라는 '신성한 삼위 일체' 바깥의 영역에까지 넓히는 것, 탈중심화된 주체 즉 고정적이지 않은 아이덴티티를 가진 동시에 정치투쟁의 장 속에 존재하고 있는 탈중심화된 주체라는 아이디어, 생산뿐 아니라 소비의 정치학과 실천에도 초점을 맞추는 것-이 모두가 (줄잡아 말해[옮긴이 주-꼼꼼하게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Clarke 1991; Best and Kelmer 1991)

그러나, 비판적 교육연구와 문화연구 분야에서 포스트모던적이고, 후기 구조주의적인 작품이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어떤 전통[옮긴이 주 - 맑시즘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도 급속히 늘어났다. 그 전통은 [옮긴이 주-화석이 된 전통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생기들로 넘치며] 활기있게 계속되어 왔으며, 핵심적인 통찰, 다시 말해서 학교를 지배하는 교육과정의 본질과 교육의 본질을 꿰뚫어 볼근본적인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예컨대, 계급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통이 가진 힘을 부정하는 구실로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물론, '계급'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관계들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분석적 구성물[옮긴이 주-분석을 통해 혹은 분석을 위해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계급을 범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인간 형성의 다양한 기제들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바탕으로, 계급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러한 인식과 주의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론 - 아이덴티티와 이데올로기를 계급적 위치와 연결시키는 이론 - 과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 일치하지 않거나 그들의 행동이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계급이 멀리 사라졌다고 가정해버리는 것은 잘못이리라.(Apple 1992)

똑같은 것11)이 경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자본주의는 변화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자본주의]은 여전히 구조화12)의 거대한 힘으로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 이론-계급을 본질화하는 이론-이 예측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인종적·성적·계급적 분업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 혹은, 설령 우리가 계급을 본질로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제·문화적 생산 관계를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Apple 1992)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비판적인 교육 연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실제적인 위험들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공동 기억collective memory의 상실13)이다. 현재 [비판적 교육연구의] 이론 '수준'에서 보이는 활기는 위대한 것이며 또한 필요한 것이다. 반면 비판적 연구의 상당부분은 종종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해오곤 했다. 비판적 교육연구는 이론에서 이론으로 빠르게 옮겨간다.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혹은 유럽 문화 이론(되도록 프랑스)에 더 많이 기반을 둔 것일 수록, 더 나은 것으로 가정하는 듯하며, 그런 것을 좇아 이동하는 듯하다. 학문 내 소수 신중간 계급분파에 의해 일어나는 신속한 이론적 이동과 편파적인 선택14), 이것은 다른 전통 속에서 만들어져온 성과들을 부인하거나 혹은 새로운 외피를 씌워서 그것들을 재진술하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또는 그것은 종종 퇴행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푸코는 사회 운동의 힘과 역사적 동인(agent)를 부인하는 신빙성이 없고 몰역사적인 개념의 소유자이자 사회통제(다소 우아해지긴 했지만)에 대한 또하나의 이론가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수주의적 사회 운동이 가진 힘, 그리고 보수주의적 운동이 개입되어 있는 구조적 위기, '두 가지 다'이다. 우리는 후기 구조주의를 향해 휩쓸려 가면서, 구조적 역동-우리가 그 일부이기도 한-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잊어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인식[구조적 역동의 강력함]과 더불어, 대학에서의 지식의 역학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특히 대학의 역할이 복합적이고 상충되는 경제적, 문화적 '요구'들, 즉 경제적 합리화, 국내외적 경쟁 및 이와 관련된 의제들을 향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왔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겠다. 논의를 더 밀고 가려면 상품화 과정에 대해 따져 봐야 한다. 지식과 제도가 구체화되는 방식, 특히 잉여 가치를 뽑아내는 데에 사용되게끔 구체화되는 방식에 대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식이 어떻게 자본의 흐름에 어울리게 되는지를 살피기 위해 지식을 상품으로 다룬다.

문화자본의 정치경제학

여기서 제기하는 것은 다소 위험스러울지도 모른다. 지식을 의미 구성과정 및 기존의 구성물이 구체화된 것 두 가지로 보이려는 시도와 지식을 해체[dereify, 옮긴이 주-구체적 지식을 추상적 수준에서 분석적으로 이해]해보는데 몇 년을 보냈다. 일단 지식을 물건처럼 다루게 되면, 이처럼 몇 년의 시도를 통해 얻은 성과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진행 중인 여러 가지 변화를 이해하려면 그러한 이동[옮긴이 주 - 지식의 구성과정을 다루는 것에서 지식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으로의 이동을 말함]은 필수적이다. 그러한 '이동'에 앞서 『교육과 권력』(Apple, 1985)에서 제기한 바 있는 여러 주장을 개괄해 본다.

우리는 '지식'을 '자본'의 한 형태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제도들은 특정 계급들 혹은 계급내 분파들이 경제적 자본에서 많은 몫을 차지하게끔 조직(때로는 파괴)된다. 마찬가지로 대학 같은 문화적 제도에서도 그런 일[옮긴이 주-몫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말미암은 제도의 변형-조직과 파괴]들이 일어난다. 그런 제도들은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데 주된 구실을 한다.

여기서는 "문화자본" 개념을 부르디외가 사용했던 방식과는 다소 다르게 쓴다. 예컨대, 부르디외는 지배 집단의 스타일, 언어, 문화적 성향, 심지어 신체 -아비투스- 까지도 문화자본으로 인식한다. 그러한 문화자본은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화폐로 전환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배집단의 지배는 유지된다. 지배집단 출신 학생이 성공하게 되는 것은 문화자본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Bourdieu and Passeron 1977 ; Bourdieu 1984)

부르디외 식의 문화자본 개념은 어느 정도 강점이 있다. 그것은 특정 학생들에게 지식을 '분배'해주는 것이 교육제도의 기본 역할이라고 가정한다. 이때, 계급, 인종, 성적 위치로부터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문화적 혜택을 누린 학생들에게 지식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은 특별한 종류의 문화자본(이를테면, 기술·관리 지식)의 생산에서 대학이 하는 역할을 포착하지 못한다. 이런 상품[기술·관리 지식]의 생산에 다수의 대학이 점점 더 많이 관여하고 있고, 대학에서 가르쳐야 하는 지식의 원천에 대한, 그리고 무엇이 '전통'으로 간주되느냐에 대한 논쟁도 많았다만, 여전히 지식의 분배를 대학의 유일한 역할로 가정한다.(물론 되도록이면 학생들과 함께 지식을 해체해서 재구성한 후에 분배된다.) 이런 식의 논의는 구조적 핵심을 놓칠 수 있다.

나라 안팎의 경제경쟁으로 인해, 후기 법인 자본주의 경제15)는 높은 수준의 기술·관리 지식 생산물을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팽창 기회가 극대화되면서 이런 류의 지식은 소통 및 문화적 통제, 합리화 등을 위해 더 정교해진다. 그러한 조건에서 실제로 요구되는 것은 고도의 지식이 대중에게 널리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 생산을 극대화하는 것이다.(Apple, 1985)

경제적 자본의 축적과 문화자본의 축적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다. 이는 높은 수준의 기술·관리 지식을 모든 사람이 꼭 다 알아야 할 것은 없다는 뜻이다. 높은 수준의 기술·관리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학생이 얼마나 많으냐는 것은 그 지식이 얼마나 사용가능한 형태로 정교해졌느냐만큼 중요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후기 산업사회에서 기술·관리 지식은 필수적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요소이다. 지식의 조직화 및 통제 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생산된 지식의 양이 놀랄 만큼 늘어나게 되면, 기술·지식 정보의 양과 종류를 급속히 늘리라는 요구가 뒤따른다. 한편으로, [자본]축적과 작업장 통제를 강화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장'과 '인간관계' 연구에 대한 요구도 계속 늘어난다. 그 결과 정보의 생산 역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방식을 따르게 되며, 또한 그러한 생산방식이 효율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산물들은 -지식이라는 상품-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비-물질적인 것이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는 지식 또한 필수적인 생산물임에 틀림없다. 법인형 축적에서 있어서 방위관련산업이 차지하는 막중한 구실, 식품산업 및 식품공학의 법인형 독점에서 점점 커지는 농업관련 산업의 구실이 기술·관리지식에 추가될 때, 이러한 종류의 문화자본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David Noble은 과학-기술-교육제도-산업 관계에 대한 역사적 분석에서, 기술·문화 자본 생산에 대한 통제가 [자본주의] 산업전략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은 시장과 작업장, 설비 뿐 아니라 과학도 통제하려고 한다.

초기의 [자본의] 과학에 대한 독점은 과학기술의 산물에 대한 직접적 통제로 나타났다. 그후 그것은 산업 연구를 조직하고 규제함으로써 과학이 생산되는 과정 자체를 통제하게 되었다. 이는 [생산] 과정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16)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Harry Braverman이 설명한 바 있듯이, '과학-기술 혁명은 특정 부분에 한정된 혁신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과학 - 기술 혁명은 '생산양식 전체, 즉 과학과 공학기술의 갱신을 기능의 일부로 통합해 온 생산양식 전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혁신은 화학, 전기학, 자동기계 등이나 과학-기술의 생산물에서보다는 과학이 자본으로 변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

산업이 점점 더 분화, 통제, 노동대체 그리고 기술혁신과 강하게 결합되어 가는 상황에서, 시장과 생산물과 소비를 확대하려면 두 종류의 자본-경제 자본, 문화자본-은 급속한 변화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축적이 가능하도록 보장되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는 인력과 지식 둘 다를 만들어내는 장소-대학-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Apple, 1985)

앞서 제시한 특권적 통제17)의 중요성에 대한 Noble의 언급은 중요한 대목을 밝혀준다. 그것은 기술 지식의 축적이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떠맡는 곳이 어디인지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기술지식의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체계적인 특권적 생산과 시장독점의 관건이 된다. 기존의 여러 산업 연구의 첫째 목적은 맞닥뜨린 생산문제의 기술적 해법을 찾는 것이었다.18) 그러나 '발명 경향을 예측하고 기술적 진보와 사업확장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면', 지식생산을 조직화하고 통제하는 것이 핵심이다.(Noble, 1977:128) 독점의 행사와 대학에서의 활동, 특히 대학의 교육과정과 연구활동을 재조직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지식의 주요측면이 통제된다. Noble이 다시 보여주듯이, 상품거래 및 산업에 의해 생겨난 이데올로기는 교육과정의 종류와 교육행위에 구조적 제한(결정하는 것은 아닌)을 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교육과정과 교수행위는 대학과 학교생활의 형식적인 규칙19)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겪는 경제위기가 계속될 경우, 자본의 이해는 앞으로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특히 국가 및 자본의 여러 국면에서 나타나는 클린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국가산업정책 구축은, 21세기를 위해 개조된, 더 경쟁적인 경제를 만들어내려는 합리적 모형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클린턴 행정부의 법인자본주의적 산업정책 속에서 대학과 거시적인 경제적 목적 사이에는 더 많은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통합이 지식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미치는 영향이다.

Henry Louis Gates Jr 은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정책들로 인해 누가 손실을 입게 되는지를 지적한다.

연구, 건물신축, 새롭고 좀더 나은 프로그램에 필요한 재정을 따내려는 투쟁은 대학이 점차 재단, 설립자, 정부, 그리고 다른 기부자들이 가진 우선권에 적응하도록 이끌어간다. 새로운 조합이 사업, 산업, 그리고 재정 관리와 함께 대학의 주요 동반자로 솟아오른다. 이는 국지적 수준에서는 자원이-인간자원 및 물적자원- 법인 엘리트를 위해 연구, 봉사함을 의미했다. 사실, 그런 프로그램에 자원을 충당하는 대부분의 대학은 곤궁한 도시 주민의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에는 자원을 줄이게 마련이다. 이는 상품거래와 산업에 중심을 두는 사회적 이슈를 연구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돈이 흑인, 히스패닉, 백인 노동계급에 관심을 두는 지역적 이슈를 연구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돈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물론 Noble과 Gates 가 지적하는 것들은 상대적으로 경제학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부분, 다시 말해서 대학의 자치나 과학 및 과학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미시적 정책들은 포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토대의 위[상부구조]에서 이루어져온 투쟁 역시 간과한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은 경제 위기 및 국가 재정의 위기 상황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보는 기본적 시각을 제공한다.

위의 논자들은 대학이 지식분배라는 과업과 지식 생산의 극대화라는 과업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 속에 놓여 있음을 알려준다. 상품화를 둘러싼 제도적 논리가 정한 궤도 속에서 대학의 일상적 교육과 연구 활동은 활발해지게 되고, 그러한 경향에 따라서 강조점은 후자[지식생산의 극대화]로 기운다. 동시에, 전자[대학에서 분배되는 지식]를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지식에만 한정시키려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지식의] 경계 논의를 다른 형태로 바꾸려고 한다.

점차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쓸모있는 지식으로 '지각'되는 것에 제도적 승인이 주어진다. 어떠한 것이든 간에 제도적 승인을 얻을 수 있기만 하면 훌륭한 작업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것들은 점점 더 주변으로 밀려난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문화, 의식에 대한 투쟁이 핵심적이라고 인식한다. 이것이 언어와 집단적 기억이라는 문제를 그들이 왜 그토록 중요하게 보는지,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명명하는지를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보는가의 이유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얘기다. 물론,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매끈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는 투쟁이 있다. 높은 지위의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 지식생산을 뒷받침하는데 있어서의 국가의 역할,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교육제도 내에서특정 형태의 지식이 가장 많은 자원과 힘을 획득하게 되는 근거 및 학문이라는 영역의 위계가 사회 내에서 갖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지위 등에 대해서 투쟁이 일어난다. 투쟁이 일어나는 과정 역시 다루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경향만을 말하겠다. 그러한 경향들은 분명히 다양한 방식 - 연구재정, 동료의식, 그리고 학자들, 교수직의 분배, 교수직 감축과 행정 직원 해고, 결정권한 - 으로 충격을 가할 것이다.

미래의 학생들은 더 잘 알게 될 것인가?

여태껏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지식'의 정치와 경제를 둘러싼 모순과 역동의 직관적인 파악을 윤곽만 밝혔다. 제도의 틀 안에서 문화전쟁이 늘 일어나듯이, 그것[지식의 정치, 경제]에 뒤따르는 문화적 관계들과 권위에는, 부분적으로 독립적인, 나름의 역동과 투쟁이 있다. 후자는 역사, 문학, 예술 등의 구체적 학문 영역에서 공식적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의 문화정치학에 관해서이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은 후자이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도 매우 길게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음 두 가지만 간단히 짚는다.

첫째, 미국의 초등과 중등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구성
둘째, 고등교육에 대해 학생들이 가지는 기대에 있어서 공식적 지식의 문화정치학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학에서 자본으로 전환되는 지식의 종류가 계속 바뀜에 따라, 대학 밖의 교육제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 학생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모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고등교육 제도 내에서 미래의 학생들이 사적 이득을 위해 지식을 상품화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게 될지의 여부이다. 이것은 학생의 주관성[주체] 형성과 관련된 복잡한 쟁점이다. 그러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사례들에서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몇가지 위험들을 볼 수 있다.

가장 중대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이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 그들이 알게 될 것, 그들이 가지게 될 가치 -이기 때문에 논의의 방향을 여기에 맞춘다. 이 때문에,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학교에도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초등과 중등학교 단계에서, 조직화되고 많은 지원을 받는 교육과정개혁은 수학과 과학 교육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예체능 교과를 과학, 수학 같은 기본교과와 동등하게 만들 것을 제안하는 것이 수사법으로는 큰 비중을 가질지 모르나, 정책적인 비중은 거의 없다. 특히 LA 같이 규모가 큰 교육구가 예체능 교과 폐지와, 모든 학교급의 예체능 교사해고를 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20) 예체능 교과와 비슷한 일이, 필수적 성격이 덜한 교육과정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역사교과'에서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다. Diane Ravitch과 보수성향의 동료들이 캘리포니아의 사회과목 교재의 개요[초안]를 제공했었다. 미국 학교에서의 공식적 지식을 교과서가 지배하고 있고, 또한 거의 모든 교과서 출판사는 캘리포니아나 택사스 같은 주에서 팔수 있는 것만 출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지배집단의 눈을 통해서 쓰여진, 저희들의 '진보'를 자화자찬한 역사를 배워야 하고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Apple 1988, 1993 ; Apple and Christian-Smith 1991)

그러나 인문교과 폐지와 특정 서술양식의 강조도 [지금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중요하기는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 전체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부분이다. [전체변화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예를 끄집어 내겠다.

지금은 교육과 산업의 '협력관계'가 이뤄지고 있는 새로운 세대이다. 교육과 산업의 협력 관계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관계'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한 흥미로운 협력관계는 Channel One 으로 일컫는다. Channel One은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텔레비전 뉴스프로그램이며, 미국내 수천 학교에 방영되고 있다. Channel One에서 하는 묘사는 겉보기엔 매우 단순하다. 10분 동안 국내외 '뉴스'를 방영하고 2분 동안 Whittle Communication사가 만든 흠잡을 데 없는 상업광고가 나간다. Whittle은 전세계 시청자를 현혹시키는 데 능란한 광고제작자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것[뉴스와 광고]이 곧바로 교실에 방영된다.

학교가 Channel One만 수신되는 위성수신기를 사용하는 대가로 받은 것은 각 교실에 설치된 두 대의 VCR과 TV 모니터이다. 학교들은 학생의 90%가 계약 기간의 90%의 시간을 학교 안에서 방송을 시청하도록 하는 3-5년 짜리 계약을 맺고, 계약이 지켜지는지 감독받는다. 늘 재정 빈곤에 허덕이는 학교든, 겉으로 여유있어 보이는 학교든, 교과서를 그야말로 누더기가 될 지경까지 사용해야 할 만큼 학교의 재정위기는 심각한 형편이다. 지하실, 화장실, 체육관 등을 가릴 것 없이, 사용가능한 장소는 수업에 이용한다. 교사들과 상담전문가와 행정직원이 툭하면 내쫓긴다. 미술, 음악, 외국어 과정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간다. 몇몇 도시에서는 전체 학년도를 채우는 것이 불가능해질 지 모를 만큼 학교 재정문제가 심각하다. 그와 같은 재정위기와 Whittle이 사용하는 수사적 전략21)의 맥락 속에서, 학교들은 Channel One을 '중요한 지식'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재정문제 해결을 도와주는 하나의 방안으로 여겨왔다.

Whittle이 사용하는 정당화의 수사법, Channel One을 교실에서 방영하도록 만드는 수법, 만들어진 뉴스와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교사와 학생이 그것을 가지고 실제로 하는 것이 뭔지 등을 Official knowledge(Apple 1993)에서 분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가 35%내지 40% 정도의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광고주의 현혹에 휘말리는 시청자로 팔아 넘겨 왔다는 사실이다. 그 학생들은 스스로를 소비자로 자리매김하며, Channel One에 광고비를 쏟아 붓는 기업은 광고에 현혹되는 시청자로서 학생들을 사들인다. 이 상황에서 학생들은 상품화된다.

지금 학생들과 교사들은 Channel One, 특히 상업광고가 준 재료를 가지고 벌이는 '카니발'에 자주 참여한다. 그들은 뉴스에는 무관심하며, 오히려 광고에 관심을 집중하며 광고를 가지고 장난도 친다. 여전히, 그리고 다시, 우리의 교육제도는 이윤창출을 위한 장소로 재구성되고 있다. 몇 년 동안에 걸쳐 학생들은 [광고에] 현혹되는 시청자로 만들어질 것이다. 학생들의 일상적 경험과 상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윤창출을 위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지식의 변화 주변에서일 것이다. 대학에서 정당화되는 것이 초·중등학교라고 해서 정당화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경제적 가치에 따라 지식을 정의하는 것이 고등교육을 더 많이 지배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상업광고주에게] 팔아넘기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라는 사실이 뭐 그리 놀라운가?

결론

여기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은 교육을 상품화하고 사적 영역에로 내몰려는 지금의 경향을 표면적으로만 다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중요한 것은 [교육의 변화 경향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며, 정치경제학과 계급관계에 대한 관심을 주변화하는 '후기 이론가'[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잘못된 편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이런 지적은 이전의 '거대 서사'들을 부활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거대 서사가 가졌던 '알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는 그다지 문제삼을 까닭이 없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을 뿐이다. 그러한 거대 서사들은 이것이 여전히 -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차별을 만들며,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학교 이후의 삶까지 차별화하는 - 자본주의임을 일깨워준다. 문화자본이 경제적 자본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를 무시한다고 해서 상황을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진 않는다. 세계는 일종의 text이기도 하지만, 어떤 집단들은 다른 집단들보다 훨씬 쉽게 우리의 삶을 그들의 이야기로 덮어버릴 수 있다.

뒷말

오늘도 여전히 아이들을 열심히, 힘들게 가르치고 계시는 선생님들.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교과서의 지식을 한 번 '낯설게' 바라보십시오. 이 지식이 왜 중요한 것인지를. 또 그것을 가르치고 배워서 얻는 결과가 무엇일지를.

그리고 왜 시간에 맞춰 수업에 들어가야 하고. 왜 출석부를 들고 들어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십시오. 과연 처음부터 이랬을까? 꼭 이렇게 해야할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잡무에 시달리고 계시는 선생님들. 왜 그리 잡무가 많아지고 시간에 허덕이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왜 교사는 자기 주장을 하기가 궁색한지. 직원회의만 되면 쌓이는 일거리. 내가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리고 이건 별로 할 필요도 없는 일인데....라는 생각들을 한 번 해 보셨나요?

자신의 일상을 낯설게 보고 그 일상이 구성된 더 넓은 맥락을 보려는 노력은 교사 누구에게나 필요한 작업입니다.

교사 자신이 제 한계를 깨닫는 그 순간 극복의 가능성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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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보수주의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현재 보수주의자들의 주도하에추진되는 일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수주의의 모습을 규정하는 시대와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적일 수 밖에 없다는 뜻
2) 예를 들어 교육 기회 확대, 결과의 평등을 위한 제한적 시도, 다언어적bilingual이고 다문화적인 교육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등
3) 진화론적 시각. 적자생존의 논리. 자본주의적 경쟁을 정당화하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옹호하는 데 활용되어 왔던 논리.
4) 베버의 개념
5) 현시기 보수주의가 '모든 것은 시장에 맡겨라'는 신자유주의적 움직임과 결합되는 것은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본질주의적 시각, 즉 '지켜야 한다'는 보수주의의 입장이 '변해야 한다'는 이질적인 것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6) 어색한 번역이지만 저자의 강조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낭비가 줄어든다'라는 표현대신 '보다 적은 낭비가 창출된다'는 표현을 그대로 옮겼다. 이는 '낭비'를 줄이려는 시도가 과연 진짜로 '낭비'를 줄이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의 표시이다. '낭비'를 줄이려는 시도로 인해 무언가 박탈되고 누군가 희생되는 것은 아닌지라는 것을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낭비를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려는 '정리해고'는 정말 보다 적은 낭비를 '창출'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짜로 창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7)무엇이 '적합한' 지식이며, 무엇이 가르침과 앎에 '적합한' 형태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수사적이고 문화적인 '전투'(부디 남성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 표현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한다. 이것은 내 독창적 표현이 아니다.) -저자
8)저자는 sciences와 technology, 즉 자연과학이라든지 응용과학이라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분야를 technical/administrative knowledge 즉 기술·관리 지식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다. 이는 지식을 경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용어 선택이다. 이는 지식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과학'으로서 정당화되는 이면에 숨어있는 지식의 정치경제학, 즉 지식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위계화되고 선택, 배제가 이루어지는 상품으로서의 속성을 드러내려는 의도이다.
9) 예컨대, 텍스트적 분석형태의 하나인 정치학에 대한 공격과 분노,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 비록 산만하게 구성된 것일지라도-로 보는 것에 대한 공격과 분노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분노는 다름아닌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담론에 있는 요소이다.
10)이는 저자의 입장이 '스탈린주의적' (혹은 교조주의적)이라거나 '환원주의적'(혹은 경제결정론적) 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한 표현이다. 계급을 강조한다고 해서, 거대서사의 중요성과 통찰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환원주의는 아님을 이해시키려고 저자는 무척 애쓰고 있다.
11) 몇가지 현상적 징후들을 근거로 성급히 계급의 개념을 폐기하려는 것
12) structuring-구조화.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만들어 간다." (마르크스,『 무월 18일』)
사회학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아왔던 문제는 미시와 거시의 연계시도, 구조와 행위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구조나 행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양자의 균형을 시도하려는 개념이 '구조화'이다. 구조는 행위의 조건으로 주어지지만 그 구조는 다시 행위에 의해 변화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구조화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는 조건을 만드는 커다란 힘을 행사하는 요소로서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조화의 과정에 행사하는 거대한 힘까지 사라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13)포스트 모더니스트즘적 논의가 이론적 논의를 활발하게 하는 것은 인정할 만 하나, 그로 인해 어떤 기억의 공유나 공통의 유산이 상실되어버리는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다.
14) 그들의 의도는 대학내의 서열적 위계 안에서 대학의 문화적 자원을 이동시키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론적 이동과 편파적 선택)은 종종 대학 등에서 지배와 예속에 대항하는 다양한 투쟁과의 극도로 수사학적 관련말고는 모조리 잃어 왔다.
15)advanced corporate economy
16)과학지식 및 과학인력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제도의 발전과 과학에 기반을 두는 산업협력체제 안으로 그러한 제도들을 통합하는 것
17)'특권적'은 patent의 번역이다. 저자가 특권적 통제라고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는 않을 지라도 통제의 권한을 특정 부문 혹은 집단(이를 테면 자본)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8)'생산'에는 '특권적'이라는, '시장'에는 '독점'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시장과 생산의 메카니즘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생산영역은 합법적인 형태로 독점이 은연중에 보장된다는 의미에서 '특권적'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고, 시장은 제도상으로는 독점을 합법화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특정집단의 영향이 시장에서 절대적임을 표현하기 위해 '독점'이라는 수식을 붙인 것이다.
19)technical institute life - 학교에서의 생활이 제도적 규칙 형태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 개인의 실제 생활모습 그 자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지라도 학교가 어떤 제도적 틀을 갖추고 있느냐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된다. 이를테면, 교복이라는 제도는 학교에서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 영화 '홀랜드 오퍼스'를 보면 음악 교사의 해고가 후반부에 나온다. 물론, 영화의 중심이 한 음악교사의 '해고'문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낭만적으로 교사의 해고문제가 다뤄지고 있긴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는 일의 단면을 읽을 수는 있다.
21) 세계에 대한 지식이 일자리를 얻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한다는 식의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