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꺼리] 제1세계 진보정당들이 못다한 책임(박노자)

2003.08.29 17:04

희야 조회 수:1183 추천:31

kdlpnews-135 호
2003.6.2 발행

제1세계 진보정당들이 못다한 책임

진보의 창

노르웨이에서 몇년 전에 노동당이 집권했을 때의 일이었다. 노동당의 당수이자 그 당시 수상인 옌스 스톨텐베르그는 구소련의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석유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해 노르웨이 국영 석유개발회사 스타트오일이 이미 유전 개발을 하고 있는 '석유의 황금밭'이기도 하고, 부정부패와 정적 암살, 반대파 숙청으로 악명이 높은 알리예프 족벌이 철권으로 다스리는 독재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문중인 노르웨이 최대 진보정당의 당수 스톨텐베르그는 아제르바이잔 인권단체 등의 수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노르웨이 자본과 기술로 개발 중인 카스피해 유전을 보고 "바로 여기서 다음 세대 노르웨이 연금생활자들의 연금이 나올 수 있겠군"이라고 말해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명색이 '진보정치인'이라는 사람이, 제1세계의 연금 생활자들이 제3세계 자원 약탈을 통해 제3세계 노동자 임금보다 몇 배나 되는 연금을 받는다는 세계체제의 '더러운 비밀'을 별다른 수치심도 없이 언론이 지켜보는 데에서 털어놓은 셈이었다. 어찌 해서 진보를 내세우는 유럽 정치인들이 제1세계에서 태어날 행운(?)을 타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토록 냉소적이고, 이기적이며 무관심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봐서는, 비서구권을 약탈해온 서구 자본과 국가들의 식민지적, 신식민지적 행각을 방관하거나 방조해온 것은 서구 '주류' 진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치부인 셈이다.

이와 같은 태도의 구조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국가와 자본의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진보정당의 대중적인 기반인 숙련 노동자층이 식민지 약탈로 벌어들인 초과 이득의 일정 부분을 재분배 받아 중산층 하부에 준하는 생활 수준을 향유할 수 있는 이상, 진보정당으로서 식민지 약탈 문제를 제기하기란 여간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해 기존의 권력기구와 협력해야 할 위치에 처하게 되면 기존의 관행에 포획돼 식민지 지배나 채권을 통한 제3세계 재정적 약탈을 하나의 '기정 사실', '불가피한 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현재 명색이 '진보'인 영국 노동당의 당수 블레어가 극우 부시의 '푸들'이 돼 이라크 침략의 공범이 된 데에 대해서 놀라고 경악하지만, 노동당이 사상 최초의 내각을 조각했던 1923년 12월에 노동당의 식민성 장관 토마스(J. H. Thomas)가 "대영제국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게끔 여기로 부임돼 왔다"라고 발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노동당 정권 묵인 하에 인도에서 시위대 유혈 진압 등의 만행이 잇따랐다. 즉, 제국주의와의 비틀어진 '협조'가 블레어의 창작품이 아니고 노동당의 유서 깊은(?) 정책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담론적인 차원에서는, 마르크스 자신을 비롯한 상당수의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만성적인 정체에 빠진 타율적인 비서구 지역에서 식민주의만이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해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점진주의자'의 전형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우리 식민지들을 그냥 독립시켜주는 것이 곧 미국을 다시 인디언들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은 격의 어리석은 아이디어다.…문명인들이 야만인들의 후견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회주의자들도 인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우파적 사민주의자들이 얼마나 서구중심주의와 인종주의에 깊이 포획돼 있었는지를 만천하에 보여준 일이 유명하다.

즉, 어떤 차원에서 봐도 유럽의 '주류' 진보주의자들이 제3세계 해방의 투사가 되기란 참 힘들었다. 사민당의 정치인 슈뢰더(현 독일 국무 총리)가 국제법을 무시한 이라크 주권의 피탈과 이라크 민중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간힘을 다 써서 국제적 깡패 부시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모습을 볼 때,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유럽의 '주류' 진보정당들이 제3세계 민중들과의 진정한 동등한 협력을 할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해야 하는가? 꼭 그렇지만 않을 듯하다. 진보정치의 황무지인 미국과, '주류' 진보정당들의 지분이 큰 유럽 사이의 물밑 갈등과 암투가 커가고 있는, 그리고 주변부 대중들의 반미 목소리가 강해지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유럽의 사민당들의 입장에서도 주변부, 준주변부 진보정당들과의 협력이 시급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다만 바라는 것은, 그들이 식민지, 제3세계를 무시하고 방관했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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