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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이 한이 쓴 교육공공성

2002.06.26 13:12

이론실장 조회 수:920 추천:1

퍼왔습니다. 함 읽어보시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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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속기획 I 교육과 신자유주의 8 ] 교육 공공성의 재구성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비전

이한(학력폐지연대 회원)

교육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교육의 공공성이다. 정부의 교육개혁을 비판하는 주된 논지도 그것이 교육의 공공성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교육의 공공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글은 교육의 공공성에 대하여 흔히 지니고 있는 오해를 분석하며 새로운 공공성의 구축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논쟁적이고 도전적인 글이다. 이 글의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을 통해 교육 공공성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만들기 바란다. 이 글은 『탈학교의 상상력』(삼인)에 실린 「교육 공공성 의미 뒤집기와 채우기」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지금이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구에서는 1980년대부터 이미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향해 으르렁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우파의 날카로운 이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으르렁댈 만한 국가의 활동이 애초에 거의 없었다. 둘째, 국가가 이미 신우파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

90년대 말 이후, 국가는 주로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따라 움직여 왔다. 특히 노동정책의 영역에서 그 교리의 관철 여부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교육에서도, 적어도 고등교육과 관련해서는, 일관되게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관철하고 있으며 대학 간 경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정책에서도 신자유주의가 일관되고 전면적인 정책기조로 작동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교조 합법화, 중학교 의무교육의 전면화, 평준화 지역 확대, 유아교육 무상화 준비, 사립학교법 개정 노력 등의 조치들은 신자유주의적 흐름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많은 교육운동단체들은 국가가 초·중등교육에서도 신자유주의를 교육정책의 기조로 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리부터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긋고 민중의 진보적인 교육개혁을 실시할 수 있는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상할 수 있는 잘못된 정책에 대해 준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정책이 발표되고 나서야 허겁지겁 ‘반대’를 외치는 것보다, 교육을 바라보는 일관된 관점 아래서, 잘못된 정책제안은 미리부터 차단하고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견인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전선의 오른쪽 편의 주장이 무엇인지는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교육예산을 늘리지 않거나 오히려 줄이며,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확립하고, 의사결정을 모두 시장에 맡긴다. 교육기관들은 시장에서 경쟁하고, 교육 소비자들 또한 경쟁한다. 교육은 노동시장 또는 상급의 학교에 진출할 경쟁력 있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전선의 왼편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왼편은 오른편을 오로지 반대로 비추는 거울에 불과한가? 교육예산 감축 반대, 수익자 부담 원칙 반대, 시장주의 반대, 수준별 수업 반대, 노동시장에 필요한 능력을 중심으로 한 교육과정 개편 반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나은 교육정책은 잘못된 교육정책의 반대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의 가치와 대안적 정책 모델이 없다면, 진보적 교육정책은 허상으로만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일관되고 확고하며 설득력 있는 대안적 가치가 실질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면, 전선은 오른편의 정책에 대해 저항하는 단순함을 넘어설 수 있다. 더 급진적인 의제가 제출되고, 삶 속에서 실현되며, 사회적 토론이 그 의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제한되고 경직된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 진실로 자신이 바라는 교육을 만드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면에, 대안적 가치가 모순되고 추상적이며 단순히 국가가 우파적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막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교육 공공성. 이에 대한 혼란과 오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세련되고 진전된 내용을 채워 넣는 일은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의 판을 짜 나가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교육 공공성에 대한 혼란

논리적으로 매우 초보적인 오류들이 교육의 공공성 논의에 버젓이 존재해 왔다. 초보적인 오류들은 서로를 감싸며, 명료한 사고나 생산적인 논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잡탕들을 생산해 왔다. 제대로 논의를 구성하려면 당연히 이런 오류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오류는, “교육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이므로, 사적인 의사결정 원리에 맡겨 둘 수 없고, 국가가 담당해야 하며 이것이 교육 공공성의 필요조건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왜 교육이 공공재인가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답을 하지 못한다. 교육이 국가에 의해 제공되기 때문에 또는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공재라는 주장은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공공재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비경합성. 이는 어떤 사람이 이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에 참여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소비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배제 불가능성. 이는 일단 만들어 놓으면,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것을 소비하려는 사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엄격하게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재화는 없지만, 대체로 만족시키는 재화들을 공공재라고 한다. 등대나 국방 같은 서비스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서비스는 이 두 가지 성격 때문에 민간에서 제공할 수 없다. 무임승차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은 경합적이다. 몇 십 명의 사람이 어떤 교실을 이용하고, 어떤 강사에게 강의를 받으면, 다른 사람은 그 자원을 이용할 수 없다. 또한, 학원에서 수강증을 발급받지 않은 사람은 강의를 못 듣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배제가 불가능하지도 않다. 민간에서 완전히 생산가능한 재화이므로 공공재가 아닌 사용재(私用財)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면, 교육받은 사람 자체가 ‘공공재’라는 주장은 어떤가? 교육받은 사람은 사회에 기여를 많이 하지만, 사회는 누가 사회에 기여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 사람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하지 못한다면 이 주장이 맞을 것이다(무임승차자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얼마나 교육받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학력사회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투자한 이상의 보상을 받는다(2와 8의 생산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기업이 이 두 사람을 학교 졸업장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다면 기업은 8의 생산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8만큼의 임금을, 2의 생산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2만큼의 임금을 준다. 그런데 학력사회에서는 보통 불평등의 격차가 생산성 이상으로 커지는 경향이 있다. 즉, 2의 생산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1을, 8의 생산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9를 주는 것이다). 마이클 스펜서(Michael Spencer)는 그의 저서 『시장의 능력 신호 획득하기 Market Signaling』(Harvard University Press, 1974)에서 학력이 시그널 효과를 가지고 있을 때, 교육투자의 사적 편익은 사회적 편익을 넘는다는 논증을 보였다. 사람들이 사립대학을 자기 돈을 내고서라도 가려고 하는 이유는, 투자를 하고도 그 투자비용 이상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즉, 교육을 일부러 안 받아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만든 사회적 이익을 빼앗는 무임승차의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너도나도 교육을 받으려고 기를 쓴다는 것이다. 교육이 공공재라면 누가 굳이 교육을 받고자 하겠는가?

두 번째 오류는, “시장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게 되므로, 교육이 평등하게 제공되려면 국가가 담당해야 하고, 이것이 교육 공공성의 필요조건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모든 시장 또는 사적인 교환이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산출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시장은 교섭력과 정보가 비대칭적일 때 불평등을 산출한다. 사적인 자본축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능력, 기술,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 사이의 교환에는 불평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교환은 그들의 자유이며, 그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다.

모든 사람의 소득이 동일한 사회를 잠시 떠올려 보자. 이 사회에서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 교육비를 마련하여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을까? 배우는 사람들이 교육에 쓸 수 있는 자원의 기회가 동등한데도, 사적인 교육의 실시는 여전히 불평등을 창출하는가? 답은 ‘아니오’다. 두 번째 오류의 핵심은, 교육자원이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불평등을, 민간이 실시하는 교육과정 자체에서 생기는 불평등으로 호도한 것이다.

세 번째 오류는, “공동체가 합의하여 이룬 공통의 문화를 강제에 의해 전수하지 않으면, 문화적 파편화나 개인주의의 심화, 또는 노동능력만의 계발로 귀결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동일한 교육은 필수적이다”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서 사용되는 강제의 방법은 두 가지인데 시험과 졸업장 같은 학력차별 기제를 계속 유지하고 활용하는 것과 국가가 인정한 양식의 교육기관에만 재정지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하려면 동일한 양식의 교육기관에서, 동일한 내용을 공통적으로 전수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육내용과 방법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하는 것은 공동체를 전체주의적으로 만들고 획일화시켜 침체시킨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공적인 의견에서부터 사사로운 취향까지 통일할 것을 유도한다. 그러므로 민주적 토론과 개인의 자유는 사라진다. 이런 바탕 위에 생기는 것은 적대감과 권위의식뿐이다. 또한, 다양성에 기반한 문화적 충돌과 비판 그리고 상호침투가 없기 때문에 의식의 발전도 그만큼 낙후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획일적인 문화의 전수가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적이고 협력적인 태도를 기름으로써 발전한다. 또한, 노동시장만을 위한 교육을 강요하는 주범이 누군지를 생각해 보면, ‘노동능력만의 계발’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적반하장이라 할 것이다. 학력제도가 바로 경제적 이유만으로 배움을 추구하는 태도의 원인인데도, 그것을 계속 유지하면서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교육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도대체 ‘공동체가 합의하여 이룬 공통의 문화’라는 것을 누가 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교과서를 만드는 위원들이 그런 것을 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억지다. 교과서 집필자, 편집자들도 결국 이 사회에 존재하는 지식과 가치 중 부분적인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사회의 학교에서는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내용을 보편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가르쳐 왔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주의를 가르친 곳은 학교나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대학의 동아리와 공장의 노조였다. 교육이 사회보다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에서 합의된 것을 획일적으로 전수하는 것이 바로 공공적인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교육은 분명히 다른 재화, 예컨대 컴퓨터 오락기나 음악CD와 완전히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다. 교육은 이들과 다르며 특수하다. 그러나 무엇이 다르고 특수한가를 엄밀하게 논하지 않으면, 이제까지 살펴본 오류들에 빠지게 될 것이다. 교육을 각자 알아서 하도록 완전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을 둘러싼 제도를 국가가 정비하고,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할 필요는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대안적 가치의 핵심인 교육 공공성의 실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평등’으로서의 교육 공공성

소득이 같은 사회에서는 교육비를 마련해서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사람들마다 소득이 똑같지 않다. 그러나, 소득이 같지 않다 해도, 컴퓨터 오락기나 음악CD는 각자 알아서 사든지 말든지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교육이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육이란, 사람이 자아를 실현하고, 직업 활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점이다. 즉, 교육은 자기계발 과정이다. 컴퓨터 오락이나 음악CD를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지만, 교육을 받지 않고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교육은 능력 개념으로서의 ‘자유’ 그 자체이다. 교육은 결과를 보장해 주지 않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 협동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조건이 가정 형편에 따라 갖추어지기도 하고, 갖추어지지 않기도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왜냐하면 가정 형편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임의적인 특질이므로, 그것에 의해 삶의 기회를 차별받는 사태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의한 사태를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회적 평등’의 달성이다. 사회적 평등은 모든 영역에서의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을 자율적으로 건설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필요조건들, 즉 능력과 기회와 자유를, 신체적 불리함이나 가정형편과는 무관하게 갖추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1)

따라서 교육자금을 지원하는 목표는 교육비를 대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원하는 만큼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에 대한 공적 지원을 주장하는 근거의 핵심이고, 따라서 이 ‘근거의 핵심’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지원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원하는 교육을 받지 못하는 주요 원인은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는 ‘유동성 제약’이다. 쉬운 말로 하면 ‘교육에 댈 돈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 이론에서는 미래소득을 할인해서 현재소득으로 쉽게 빌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높은 위험기피도’이다. 부자는 교육에 투자했다가 실패해도 그 위험부담이 별로 높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았다가 예상했던 직업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파산하게 된다. 따라서 ‘대여 장학금’ 제도는 ‘유동성 제약’은 극복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부담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 결국 이 두 제약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보조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유동성 제약(미래의 투자수익을 현재에 끌어다 쓰지 못하는 상황)과 높은 위험기피도(현금 흐름이 적기 때문에 투자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경향)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료보험에서 의료비를 보조해 주듯이 교육비를 보조해 주는 일종의 ‘교육보조시스템’이 필요하다. 교육재정 지원의 핵심이 바로, 가난한 사람의 유동성 제약과 위험기피도를 극복하여 사회적 평등성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공적 지원은 소득이 적은 사람을 ‘우선’으로 해야 하고, 소득이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이’ 공적 지원의 혜택을 줄 필요는 없다(결국 교육에 대한 투자는 투자수익으로 회수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육기관들의 피라미드 체계는 그대로 둔 채, 국가가 교육기관에 지원만 해 주면 교육 불평등이 사라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현재 소수만이 선발되어 받을 수 있는 고등교육에 대한 ‘동등한’ 지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평등을 더욱 벌여 놓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국가지원을 받는 고등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들의 비율은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의 순으로 많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부터 대략 이 계층간의 비율은 50%, 40%, 10%를 이루어 왔다. 반면에 실제 인구분포는 하류층으로 갈수록 많아진다. 우리가 대학에 더 많은 지원을 할수록 계층간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더욱 커지는 것이다!

‘교육예산지출의 혜택 - 조세부담’을 가계소득으로 나눈 소득계층별 수혜율 계산을 살펴보면, 1~10분위로 소득계층을 나누어 보았을 때(숫자가 클수록 고소득층이다), 3분위 소득계층은 대학교육 순수혜율이 -15%인데 비하여 9분위 소득계층은 +5%이다. 중등교육까지와는 달리 고소득계층일수록 고등교육에 대해 공공연히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이상은 『신재무행정』, 배득종, 박영사, 156쪽에 실린 김명숙의 자료를 재인용).

이것은 단지, 교육재원의 수혜율만을 계산한 것이다. 고학력자가 이후에 고소득을 얻게 되는 효과까지 계산하면 불평등 정도는 매우 커지게 된다. 인구분포에서는 작은 규모를 차지하는 ‘잘사는 사람’이 ‘세금의 보조’를 받아 높은 학력을 따는 비율은 ‘못사는 사람’에 비해 높고, 높은 학력을 따면 고소득을 올리게 된다. 불평등의 재생산은 학력제도와 교육비 분배제도 안에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식 선발체제를 전제로 학교를 통하여 ‘간접적이고 동일한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보다 직접 개인에게 주는 ‘소득에 반비례하는 보조율을 가진’ 교육보조제도가 교육재정 지원의 원래 목표를 달성하게 해 주는 것이다.



‘공론영역’으로서의 교육 공공성

공론영역은 시민사회의 의견이 생성되고 교류되는 영역이며, 한 사회의 정치적 선택을 내리기 위한 안들이 ‘심의’되고 토론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교육은 언론, 출판, 시민사회단체, 정당과 마찬가지로 공론영역 중 하나이다. 문화적으로 합의된 것만을 교과서에 담아서 공통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은, 교육을 단순히 ‘가치 전수의 장’으로만 여기지 ‘가치와 의견 생성의 장’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은 기존의 것들을 단순히 옮겨 놓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은 시민사회의 일부였으며, 저항자들의 진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비판성, 창조성, 능동성을 거의 죽여 버린 교육을 실시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금의 고등학교 이하 교육에서는 지식, 가치, 의견들이 생성되거나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교육이 공론영역으로서의 본질을 발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공론영역이라는 의미에서 공공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교육의 비판성, 창조성, 능동성이 진작될수록공공성은 더 잘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교육이 공공적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규제’나 ‘통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참 거꾸로 간 것이다. 규제라는 것은 소수가 전체 공론의 성격과 내용, 방향을 누군가가 사전에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공론영역 본연의 기능을 박탈시켜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론영역’의 핵심은 ‘자율성’이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에 해당하는 조건도 결국 자율성 조건에 포함되는 한 부분일 뿐이다.

자율성 조건의 첫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어떤 성향과 내용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되는가를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력을 가진 소수집단이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커리큘럼에 대한 의사결정권이 광범위하게 분점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지금의 학교체제와 같은 ‘국정교과서’ 체제나 ‘교육부 - 교육청 - 학교장 - 교사 - 학생’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권력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성 조건의 둘째 내용은, 소수의 발언권이 집단의 힘에 의해 눌려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80 대 20의 표결로, 100명 모두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결정할 수 없다. 또한, 60 대 40의 표결로 무엇이 진리인가를 확정할 수도 없다. 60은 60만큼 40은 40만큼 그 목소리를 전달하고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는 학교의 커리큘럼을 집단적으로 선택하는 메커니즘이 다양한 목소리들을 억압하고 논쟁과 오류 수정 그리고 좀 더 나은 것을 발견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성 조건의 셋째 내용은, 교육 행위가 교육 본연의 목적과 무관한 다른 게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공간에서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을 자본이나 국가 또는 종교 집단이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학력게임이 교육을 ‘학력’의 획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형식화시켜 버린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그러므로 자율성 조건의 셋째 내용은 차별화된 소득과 연결되는 자격증 제도가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도록 민주적으로 통제될 것을 요구한다.

공론영역의 세 가지 조건이 실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각 개인이 자신이 받을 교육에 대해 ‘최종적이고 온전한 통제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배움의 공간을 각자가 풍부한 정보를 지닌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고, 또 배움의 공간 내에서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교육공간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절대적인 권위에 눌려 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습득하고 토론하고 비판하며 창조하며 개선해야 할 사항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내용을 시민사회 내에서 항상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지정한 교과서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서 학력제도나 재정지원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스스로 합리적인 토론에 노출시키고 개방하는 적절한 배움의 공간은 모두 공적인 교육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학력을 폐지하고, 고용과 선발이 다른 제도에 의해 이루어져, 교육영역이 노동시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탈학교 진영에서는 이미 ‘학력폐지와 자격증 검사에 관한 특별법’2) 을 제안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동어반복이나, 초보적인 논리적 오류에 기초하지 않은, 실내용을 가진 교육 공공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제도 또한 대략의 그림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단순히 우파의 거울로서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의 일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일부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운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호주제 폐지와 마찬가지로, 학력제 폐지는 합리적이고 정당하며 윤리적인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사회적 이슈가 된 반면에 후자에 대한 반응은 비판도 지지도 아닌 오직 침묵뿐이다. 한편, 배움의 공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교육보조제도를 실시한다는 의제는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이 정당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가 증명되어야만 한다.

첫째, 배우는 자의 선택은 그들 대다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불평등만 낳을 뿐이다. 자유와 평등을 함께 견지하는 제도는 있을 수 없다. 둘째, 시험과 전일제 출석, 강의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활동의 큰 틀은 문제가 없으며, 이 안에서 약간의 개혁만으로도 사람들의 다양한 배움의 열망은 다 충족될 수 있다. 셋째, 학교독점은 공공성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첫째,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최선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체주의적인 사고다. 그리고 교육기관이나 배움의 공간이 학생을 선발할 권리는 금지시키는 한편, 교육비는 국가가 사회적 평등을 달성하도록 지원한다면, 선택의 자유와 평등은 양립가능하다.3) 둘째, 학교활동의 큰 틀 자체가 바로 문제의 핵심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넘어선 개혁을 원한다. 학교는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는 맥락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셋째, 학교독점은 공공성의 파괴조건이지 필수조건이 아니다. 학교의 교육독점은 자율성 조건에 어긋난다. 자유로운 토론과 지식전달을 억압하고 위계적인 의사결정에 취약하며, 교육활동을 학력 따기 게임에 종속시켜 버린다. 독점은 또한 평등성에도 어긋나는데, 저소득층에게 피라미드적 구조와 일률적 지원으로 기회를 제한시킴으로써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공공성 테제는 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공격적인 것이다. 반사적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사회적 평등성과 자율성을 핵심으로 하는 공공성은 아마도 그 비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