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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담론과문화] 돈의 맛을 배우는 시간

2012.06.20 14:51

진보교육 조회 수:986

[담론과문화]

돈의 맛을 배우는 시간

강신현 / 무원고등학교

고3. 천하통일 수업교재 EBS로. 홍길동전을 배운다. 길동이는 서자로. 비범한 능력을 타고 났으나 서자였기에. 호부호형을 못하고. 급기야 자객에게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타고난 용력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니까. 그는 영웅이다.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은 임상수 감독의 전작 ‘하녀’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전도연의 미련스러울 정도의 백치 연기가 돋보이는 ‘하녀’는 저택의 주인들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몸에 불을 지르고 죽는 은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켜보던 나미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미의 생일 파티를 하는 저택 가족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여섯 살 나미는 ‘돈의 맛’에서 백씨 집안의 장녀인 나미와 연결된다.
‘하녀’ 이후 20여년이 흐른 뒤, 백씨 집안의 비서인 주영작 앞에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돈의 산이 펼쳐진다. 영작은 최고대학의 경영학과 출신이다. 빈틈없게 일처리를 하는 말쑥한 사나이다. 뛰어난 능력은 갖고 있지만 그에겐 가장 중요한 돈이 없다. 금고 속 거대한 돈의 산은 그의 핏줄을 뛰게 한다. 하지만 그는 사장님 부부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자본주의판 하인이다. 금옥과의 굴욕적 하룻밤을 보낸 뒤 뜨끈한 목욕물에서 부드득부드득 이를 갈면서 사표를 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어제 있었던 일은 한 번뿐이야’라는 금옥의 쿨한 선언에 ‘강하다’를 연발하며 다시 머리를 조아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타고난 용력이 없는 범인(凡人)일 뿐이다.

길동은 집을 나와 활빈당을 조직한다. 관아와 사찰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는. 길동의 영웅적 활약이 펼쳐진다. 나라에서는 급기야 길동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돈의 힘을 믿는다. 검찰에게 빳빳한 돈다발을 수북이 안긴다. 아들 윤철을 구명하기 위한 로비자금이다. 윤철은 로버트와 함께 외국계 법인을 통해 자본 유출과 탈세를 저지른다. 로버트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이런 일 하면 감옥간다고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말한다. 하지만 윤철은 천연스럽게 대거리한다. “니네도 식민지에서 강탈해 간 것이 아니냐”고. 국적불문하고 재벌가들의 돈뺏기 경쟁은 치열하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돈 연주에 놀아난다. “정치하는 것들, 판사 검사 공무원 기자 교수 나부랭이들... 돈 달라는 것들 투성이야”. 돈의 가호는 세상 구석까지 미친다.  하지만 있는 자들의 대화는 배가 아플 만큼 불편함이 풍성하기도 하다.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 장면을 보면서 윤철이 던진 한 마디. 파업노동자들이 아파트 한 채만 갖고 있었더라면 격하게 싸우지 않았을 거라 너스레를 떤다. 자본가들의 해법은 돈으로 통한다.
영작은 재벌가의 검은 거래와 성에 탐닉하면서 허무함에 젖어간 윤회장의 모습을 목격한다. 또한 윤회장의 비밀연애를 감시하며 마녀처럼 절규하는 백금옥의 모습을 바라본다. ‘재벌가도 별 볼일이 없다. 도덕도 없고, 그들 역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공허함에 시달린다.’ 이럴 법도 하건만 영작은 재벌가의 파렴치한 경영 행태와 그들의 타락한 모습에 굳게 입을 다물고만 있다.
대신 영작은 백회장의 금고를 턴다. 향긋한 돈냄새를 맡으며 듬성듬성 돈다발을 쥐어 챙긴다. 그리고 그 돈다발을 고스란히 자신의 집 거울 뒤편에 모셔놓는다. 가끔 거울을 보는 영작. 자신을 성찰하는 것. 아니다. 거울 뒤편의 돈다발에 절로 눈이 흐뭇해한다. 돈에 사로잡힌 영작. 영작은 돈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영웅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우리는 검은 거래가 연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읽어 볼 수 있으나, 뭔가 허무하다. 활빈당이 없어서. 영웅이 없어서일까.

신출귀몰하는 길동을 잡지 못하자. 나라에서는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길동은 영웅적인 능력을 발휘해 조정을 굴복시키지만 회유에 넘어가고. 조선을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백금옥 집안의 하녀 에바는 필리핀 여성이다. 한국에서는 하녀지만 자국에서는 또 하녀를 부린다. 세계화는 계급구조마저 세계화한다. 윤회장은 그녀를 사랑한다. 단 한 번 진심으로. 사랑을 진심으로 바랐기에 그는 돈의 세계에서 아웃이다. 돈 세계의 주인 금옥에게는 윤회장의 사랑 타령, 허무 타령이 귓등으로도 안 들린다. 시간 낭비일 뿐. 급기야 백금옥은 영작을 사주하여 에바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윤회장 대신 영작을 키우기로 한다. 어디까지 올라오나 보려고.
그러나 ‘없는 것들은 머리 조아리고 존경하면서 살아’란 윤철의 말에 한 대 더 맞고, 정의의 주먹 한 대도 윤철의 얼굴에 명중시키지 못한 채 흠씬 두들겨 맡은 영작. 살아남기로 각오한 영작은 자신이 에바를 죽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에바의 주검이 담긴 운구와 함께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이성이 마비되고 돈의 괴물이 열연하는 모습만 보이는 듯했던 영화에서 영작의 이성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돈의 맛을 배워가던 영작과 나미 앞에 새로운 출발이 이어질까.  
궁금해진다. 영작의 미래는 어떨까? 현실의 부패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고 돈의 맛이나 감상하고 말지, 평범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을 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이 이어질지.
바라건대, ‘진보신당’의 현재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개혁적 세력이라 평가받지만, 실상 병조판서란 자리에 굴복하고, 힘으로 율도국을 뺏어 굴복시킨 길동이와 같은 ‘권력지향적 영웅’은 아니었으면 한다. 자본주의의 달콤한 ‘돈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도 ‘권력’만을 탐하지 않는 새로운 모습의 인간, 그리고 그들의 연대를 추구하는 희망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이성이 깨어있는 사람이 임상수의 후속 편에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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