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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빨갱이”로의 진화  -「안녕! 사회주의」를 읽고    
                

                                                                                               유짱 l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작년엔가? 수업에 빠져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기다 학생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그랬다. “선생님 그런 말하면 잡혀가요" 국어교과서에 등장하는 희곡 ‘들판에서’를 가르치면서 미국 욕을 했을 때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성질이 나서.. “ 야~ 요즘이 어떤 시댄데, 잡혀가냐? 신고해 !! ” 해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내뱉고 교무실에 와서 가만 생각해보니, 괜히 느낌이 괴이했다. 잡혀갈까봐 걱정되는 마음보단 내가 내뱉은 ‘OO주의자“라는 말이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사회주의자가 됐지?  

나는 늘 밝히지만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 아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 가사는 지금도 부르다보면 틀린다. ‘투쟁’ ‘동지’라는 말도 아직은 어색해서, 정말 기세가 up됐을 때만 쓴다. ㅋ ‘사회주의?’는 커녕, 난 사실 제대로 된 근현대사 공부도 못해보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다. 지금도 애들이랑 수업하다가 보면, 가치혼란을 느낄 때가 너무나 많다. 못 배워서 그렇다. 심지어 막스의 ‘자본론’ 같은 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안 지도 몇 년 안 된다.
왜 그렇게 무식했냐고 욕해도 할 수 없다. 26살 이전엔 나에게 그런걸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난 그냥 어려서부터 경쟁에 이기는 걸 기쁨으로 알고, 그 기쁨의 절정인 ‘임용고시 합격’을 거머쥔 사람이다. 그냥 난 그런 사람이었다.

  우끼는 일이지만, 처음엔 그래서 ‘학교’라는 곳이 나에겐 참 어이없었다. 난 온갖 경쟁에서 이기고 당당히 ‘교사’가 되었는데... 학교에서 이런 날 개무시 하는거다. 난 그냥 공문 한장에 좌우되는, 아니 어쩔 때는 심지어 교장쌤 기분에 좌우되는 그런 하찮은 인간인거다. 아니 난 ‘우리집 귀한 자제요.’ ‘명문대출신’ ‘교사’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거얏! 그래서 못된 교장에게 울고불고 생떼를 쓰다가, 나랑 같이 싸워주는 선생님들을 따라 전교조에 가입했다. ( 참.. 쓰고 보니 민망한데 진짜다. )
  
본격적으로 2005년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배웠다. 뭘 어쩌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정신없이 빨간물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명문대 출신 교사’라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 받아야 하는 거고, 우리 학생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귀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이 모든 변화는 시작되었다. 경쟁이란 함정에 속아 사느라, ‘사람’이 왜 ‘사람’인지도 모르던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듯... 온 우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전교조 선배님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배우며, 비로소 '빨갱이'로 진화하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심지어 재미까지 있었는지, 처음엔 많은 곳을 쫓아다녔다. 내가 우리 학생들을 맘 놓고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게, 그 까짓 교장보다 더 독한 교육정책임을 알고는, 교육부 앞으로 팔뚝질하러 다니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평택 대추리에 가서 미군에게 짓밟힌 우리 농민들도 봤고, 새만금 갯벌에 가서 사람의 욕심에 짓밟힌 너무도 귀한 생명들도 보게 되었다. 또, 여기저기 비정규직투쟁 현장에서 자본에 짓밟힌 귀한 사람들도 만났으며, 그런 모든 것들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죽어라 싸우는 동지들을 만났던 게 가장 큰 배움이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늘 마주치게 되는 ‘그 분’!!  이 모든 짓밟힘과 아픔에는, 공통적으로 (내가 그렇게도 미워했던 못된 교장은 쨉도 안되는) ‘그 분’이 계시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망가질 때로 망가진 몸뚱아리를 사정없이 휘저으며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분’.
  나 역시도 "빨갱이" 물들기 시작한지 2~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설경구 인생 전체를 먹어치웠던 ‘그분’의 존재를 자꾸만 실감하게 된다. 그 분이 가장 무서운 건, 이런 ‘나’ -우리 아부지가 술만 드시면 내가 전교조활동을 한다고 "빨갱이"라 부르는 - 나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는 끊임없이 ‘그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내 몸과 마음은 ‘그분’의 명령에 쉽게 순응하도록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듯 자연스레 움직인다. ‘그분’은 쉴새없이 ‘달콤한 자본’으로,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당당한 ‘권력’으로 우리 마음으로 임하시며, 우리가 스스로 MB같은 괴물을 만들고!! 섬기게까지 한다는 게 너무나 끔찍하다.  
물론, 철없이 교육운동을 막 시작했을 땐, 내가 예전에 못된 교장에게 그랬듯, 문건을 쓰고 화를 내고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면 뭔가 달라질거라 생각했다. 왜냐? 글쎄.. 당연한거 아닌가? 교과서에서 정의가 승리한다고 배웠으니까..      
근데, 살아보니(ㅋㅋ 얼마나 살았다고?) 그게 아니었다. ‘그분’은 쉽게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는다. 우리가 난리버거지를 쳐서 겨우겨우 ‘잠정보류’같은 성과(?)를 얻어내도, 그 분은 금새 말만 바꾸거나, 우리를 분열시킬 더 악랄한 방법을 궁리해내기 일쑤다. 처음엔 우리가 지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은 어쩌다 쟤네들이 물러서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다. 음... 이 쯤되니, 생각이 바꼈다. ‘그 분에게 뭔가 있다...’
  얼마 전에 경기도에서 교사를 하는 친구가 애를 낳아서, 친구들과 같이 그 집에 놀러갔다. 그 집 거실에 한겨레신문이 놓여있기에 들춰보며 이런 저런 수다를 떨었다. 친구도 명색이 전교조 조합원이라고 “명박이 보기 싫어서 요즘엔 TV 켜기가 싫다. 그리고 요즘 교원평가 진짜 들어오는거냐? 그리고 서울에서 공정택 못 막으니까 경기도까지 피본다.” 라고 투덜대고, 나도 맞장구를 한참 치고 있는데, 곁에 있던 다른 친구가 중간에 끼어든다. “우리 애 3살 되서, 영어유치원 보내려고 하는데, 니네 싸고 좋은데 아는데 없냐?” 교사가 아닌 이 친구는 평소 친구들이 교사인데도, 맨날 입만 열면 “교사들 문제 많다”고 노래를 부르는 애다. 듣자마자 열 받아서 ‘너 같은 학부모가 애들도 망치고 이 나라도 망친다’고 한 마디 해주려고 나서는데, 방금까지 나랑 같이 MB를 욕하던 교사친구가 바로 이런다.
“ 아? 진짜? 우리 애는 몇 살부터 보내야 될까? 얼마나 한데? 남들 다 보내는데, 안 보낼 수도 없고. 우선 방과후학교라도 해서 돈이나 많이 벌어놔야겠어...”  

학교에 있다보면 나 역시도 이런 ‘정신분열’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성과급’은 교사의 교육 활동을 점수로 평가하는 거라 나쁜 거라 말하며, 애들이 떠든다고 ‘수행평가 태도점수’를 깎고, ‘벌점’을 주는 건.... 나쁜 게 아니란다. 또, ‘서열화’는 나쁘다고 말하면서, 우열반 수업은 좋아하고, 우리반 누구누구가 특목고- 특성화고를 간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우리는 명백히 ‘정신분열’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곧 ‘그분’인걸.. 물론, 그러니 포기하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자존심 상하게, 포기가 웬 말이냐. 그냥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거다. 그래야 뭔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나는 자꾸만 ‘사회주의’ ‘혁명’을 입에 올리게 된다. 물론 그러면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미로 웃는다. 물론, 나도 그냥 답답한 마음 풀고 싶을 때마다 무슨 ‘주문’처럼 읊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다. 그냥 몇 년의 경험(?)을 종합하여 볼 때 (ㅋㅋ 민망하지만) 그때그때 사안별로 이리저리 피하는 것으로는, 절대 이 ‘그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고 할까?
  평택 대추리-새만금-이랜드-기륭-미친소-용산참사 그리고 학교시장화...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뿌리를 가진 문제고, 바로 그 뿌리를 뒤집어엎는 것이 바로 ‘혁명’이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뒤집어 엎어야하는 뿌리에는 ‘나’도 연결되어 있다. 나부터 ‘자본’으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존엄성’이 우선시 되도록 내 일상을 변화시켜나가는 노력에서부터 혁명과 사회주의는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그래서 ‘지역운동’에 관심이 많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미션~여쩌구 하면서 지역에서 행정, 교육, 의료 같은 공공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하찮고 소심한 내가 ‘자본’ 이나 ‘경쟁’의 논리를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지역의 수많은 동지’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신분열증세’가 호전될 수 있다면.. 대성공 아닐지..  
  
  [안녕 사회주의]란 책은 21세기에 나처럼 어쩌다 ‘사회주의’를 입에 올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386선배들의 반성문 비슷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나처럼 이렁저렁 살다보니, 어느새 ‘빨간물’이 들어버린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꽤 생생했다. 가장 단순하게는 맨 앞표지에 빼곡하게 올라와있는 명단을 훑으며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사람이 아직(?)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수 있고, 글 하나하나마다 대한민국에서 ‘운동권’으로 살다보니 생긴 생채기들 (내가 경험한 정신분열 증세같은)이 진솔하게 담겨있는 부분이 마음을 파고든다. “아파봤어? 안 아파본 사람은 말을 말어~” 개그콘서트에서 나오는 유행어처럼, 아파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걸 난 믿는다.

요즘은 교육운동을 하면서 예전처럼 ‘승패’를 크게 고민하진 않는 것 같다. 그냥 ‘살아갈’뿐이다. 어느덧 ‘투쟁’이 삶의 방식이 되어가고, 그로 인해 내 사고, 내 일상이 변화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젠 충분히 만족.... 아니 만족하고 싶다(?). 결국엔 어쩌다보니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어쩌다보니 아부지 말씀대로 국익을 위해 총살시켜야할 ‘빨갱이’가 되었지만, 내가 언젠가 ‘안녕? 사회주의’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16년동안 ‘사회주의’를 외쳐오신 ‘사회주의’의 달인, 우파 김병만 선생님까진 못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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