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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가족주의, 교육 그리고 월드컵

2002.07.22 12:42

송경원 조회 수:2124 추천:4

가족주의(Familialism)의 눈으로 본 교육, …, 월드컵

가족주의(Familialism), 교육, …, 그리고 월드컵

송 경 원

<제1편> 우리 집 편

(우리 집이 정면으로 보이고, 사람들이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간다)
우리 집, 우리 아빠, 우리 강아지, 우리 엄마, 우리 동생, 우리 애인.
'우리'보다
더 편안한 말은 없습니다.
평생행복 네트워크
우리금융지주(주)

<제2편> 결혼식 편

(결혼식 기념촬영을 위해 잔디밭 위에 사람들이 모인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삼촌, 우리 친구들, 우리 동생, 우리 강아지.
'우리'보다
더 편안한 말은 없습니다.
평생행복 네트워크
우리금융지주(주)

지난 4월부터 TV에 방영된 우리금융그룹의 CF이다. 보다시피 광고 컨셉은 '우리'이다. 이 그룹 산하의 우리은행(한빛은행과 평화은행의 합병체)은 탤런트 원빈을 모델로, '실업자 0'와 '평균국민소득 3만불'을 모토로 한 CF를 내보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꽃인 CF는 상품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영상매체이다. 이 때 이미지는 대중의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하는 것으로, 굳이 상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필요가 없다. 반복효과로 인해 상품과 이미지는 결합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는 CF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이미지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효(孝)'와 보일러, '정'과 초코파이, '우리'와 금융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로 인해 다소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 CF를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어느 새 '효'하면 보일러가 떠오르고, '정'하면 초코파이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CF보다 '효', '정', '우리' 등 한국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화면에 더 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보니 CF 제작사들은 한국인의 정서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인다.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꽃답게 한국인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가족주의를 간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주의는 가족이기주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주의는 가족만을 생각하는 가족이기주의가 아니다. 가족이기주의가 가족주의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가족주의란 가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기초한 가부장적 질서(孝)의 행위양식과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일단 한국인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족이다. 지나가는 청년 이상은 '아저씨', 여자는 '아줌마', 노인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의 친족 용어로,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은 '형', '오빠', '누나', '언니' 등의 가족 용어로 부른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시작점에서는 간단한 통성명 후 가족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학교는 어디 나왔습니까?", "어느 지역 출신이지요?", "같은 성씨인데 본관은 어디입니까?" 등. 그러다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으면 다리를 만든다. "누구 아시죠! 전 누구의 누구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內)집단인지, 외(外)집단인지 구분한다. 그리고 만약 내집단이면 '우리'가 된다. 가축의 '집'에서 파생된 표현인 우리(!)가 되는 것이다.

구분이 끝나면, "나 몇학번이야", "나 몇대손이야", "나 몇살이야", "나 경력이 몇년이야" 등으로 서열을 정한다. 이 서열 속에서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신고식이 끝나면, 인간적 도리와 분수라 하여 윗사람은 아랫사람 대소사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겨주고 아랫사람은 존댓말과 함께 '이 한 몸 다 바쳐' 윗사람을 받들고 따른다. 연고주의와 프롬(E. Fromm)의 부정적 권위주의가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윗사람은 체면을 차리고 아랫사람은 눈치를 살피면서 서로간에 의례적인 언행이 오고간다. "밥 먹었냐?", "잘 지내냐?", "건강하시죠?" 등. 이 의례성이란 상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증진시키기 위해 속마음과는 다르지만 상황에 적합한 언행을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밥먹은 것이 궁금하지 않은데) "밥먹었냐?"고 묻고, 이에 대해 (밥을 안 먹었지만) "예"라고 대답한다. 이런 의례성을 가지고 한국인의 형식주의, 겉치레, 표리부동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내집단의 상호 관계에서는 사회적 교환이론이 정확하게1)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관계를 물(物)의 관계로 여기는 사회적 교환이론과는 달리 '우리'의 상호관계에서는 손해보는 장사(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잘못도 쉽게 용서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데.....", "한번만 봐달라",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라는 말들이 발달되어 있다. 그러면서 공(公)과 사(私)는 역전이 되어 비리를 눈감아주거나 함께 비리를 저지른다.

이런 관계에서 '정(情)'이 형성2)되고 집단은 보스(Boss)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2차 갈건데, 다 가야지. 빠지면 죽어!". 그러다 보니 특정 목적의 모임이 만들어져도 그 모임의 목적에 맞는 활동 뿐만 아니라 '공동체'라고 칭하면서 인간적인 정도 강조하게 된다.

한편, '우리'가 아닌 외집단에게는 내집단에서의 언행과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인다. 일단 경계하고, 심한 경우에는 적대적인 반응도 나타낸다. 특히 외집단이 약자일 때는 왕따처럼 정신적·육체적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여기에 고정관념이 작동된다. 고정관념이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몇 사람을 만나거나 보고 들은 것(경험)으로 그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한 후 그 집단의 다른 사람에 대해 집단의 멍에를 씌운다. "내무반에 충청도 애가 있었는데, 얼마나 느려 터졌는지. 역시 충청도 사람은 느려. 야! 너도 느릿느릿하지!" 하면서. 그래서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내집단은 용서가 되지만, 외집단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작업들은 끊임없이 진행된다. 개인이 처해있는 각각의 사회에서 '우리'를 만들고, 그 '우리'를 확대해간다. 그러다 보니 기업이나 나라, 우주마저도 가족으로 생각한다. 기업, "노와 사는 한 가족입니다". 국가, 나라 國 집 家. 우주, 집 宇 집 宙. 그렇게 가족주의와 우리주의3)(Weness)가 삶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 지배로 인해 가족적 사고방식과 행위양식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시선과 관심이 가로막힌다. 여기에는 진보진영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도 역시.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할수록 최면에 잘 걸린대나.

가족주의는 개인주의적 삶을 살고 있다는 젊은 세대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전환이라기보다는 가족주의를 이면에 깐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는 직장인 273명에 대한 연구결과] 이들의 의식 속에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이 나타났다. 다양한 개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내집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집단에 대하여 의존하는 경향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

[연구자는] 한국식 개인주의는 "시대변화에 따른 개인주의의 올바른 정착이라기 보다는 집단주의적 사회에서의 개인의 발견에 대한 도취이며, 자신의 권익이 중요한 만큼 남의 권익도 존중되어야 하는 개인주의의 진면보다는 자기지상주의와 자기편의성의 추구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 한규석, [사회심리학의 이해], 493∼494쪽.

가족주의의 형성과 극대화/전면화

그런데 가족주의는 한국의 전통이 아니다. 이것은 유교의 성리학적 가치관으로서 17·8세기에 국가 통치(또는 동원)의 기본 단위로 가족을 설정하면서 형성된 것이다4).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니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하면서. 집에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은 왕에게 충성하는 것과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도 기존 질서에서 탈주할 수 있는 마을굿 등의 존재는 가족주의가 극대화되는 데에 장애물이 되었다. 마을공동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마을 내부에서 '우리'가 아닌 남을 생각하거나 행위해 볼 기회, 촘촘히 짜여진 질서 속의 '나'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조국근대화'의 기치 아래 마을굿 등을 미신이라며 없애버리면서 가족주의의 훼방꾼이 사라지고 가족주의만 남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사회의 특징인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가족주의 전면화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복지시스템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은 만약의 사태에 개인이 무방비라는 것을 의미하는 바5), 이를 대비한 든든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밖에 없으며, 그 무엇인가에 가족이 자리잡게 된다.

자신의 일상을 재구성해보자. 자신이 존재하는 가정 이외의 사회에서 공식적인 삶보다는 비공식적인 삶에 더 마음이 간다. 학교나 직장의 '우리' 친구들이나 '우리' 동문회(iloveschool.com 등)/향우회 그리고 '우리' 인맥/줄. 물론 가족과 친척은 끊임없이 만난다. 그러면서 가끔씩 유교의 종교의식이자 신섬기기인 제사6)를 통해 가족을 확인한다. 또한 백일, 돐(출생), 초상(사망), 결혼, 생일, 회갑 등의 경조사에서도 가족은 어김없이 등장한다(이 때 주인은 개인이 아니라 집안이다). 그 속에 성인 남성 대부분으로 하여금 내집단의 서열화와 흡사한 사고·행위양식을 체득하게 만드는 군대와 언제나 화목한 가족을 보여주는데 여념이 없는 각종 매체가 결합된다.

물론 지금의 한국에도 축제는 존재한다. 민족의 명절이라 하여 설과 추석이 있기는 하나, 몇 시간동안 고생해서 역시 가족을 만나고 확인한다. 여기서 간단한 심리학 하나. 힘든 일에 많은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미미할 땐, 대부분 그 성과를 과대포장한다. 노력을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사랑(실패했기에 첫사랑이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명절의 고생은 아주 고생한 사람(여성)을 제외하고는 가족에 대한 정과 사랑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가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과 '사랑', '희생', '용서', '포근함'으로 충만한 곳임과 동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리고 공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국가 권력의 희생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 가족의 사랑 때문에 가족이 국가권력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못한다. 왜냐하면 가족 내의 사랑과 애정이라는 것이 워낙 원초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즉 가장이 직장을 잃어도 가족끼리 보듬어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 이것은 국가가 수행해야 할 공적인 책임을 가족에게 완전히 전가시키는 국가체제이다. 이것을 우리는 '가국체제(家國體制)'라고 부를 수 있다.

가국체제는 가족을 모델로 하는 정치 체제다. 가족을 모델로 하는 것은 국가와 가족이 각각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나누어져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국가가 공적인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떠맡고 있는 체제를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 '가(家)'가 바로 '국(國)'이 되는 체제, 사회라는 공적인 영역이 부재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 이득재,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17쪽.

그래서인지 사회적 안정망, 즉 사회복지에 대한 의식은 다소 의외의 형태를 띤다. 1986년과 1991년에 복지의식을 조사한 김영모는 사회와 국가의 복지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커지고는 있으나, "화이트칼라일수록 사회적 책임을, 자영업 및 생산직일수록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고 밝혔으며, 1995년 안치민은 "구중간계급이 신중간계급과 달리 공적복지에 대한 선호가 강하며, 노동계급보다 그 지지도가 높다"고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사회적 안정망의 부실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볼 집단이 사회와 국가에 의한 복지에 대한 인식이 낮고 개인(가족)에 의존하는 복지를 사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IMF 이후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2000년 상반기에 전국의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이성균은 "공적부조7) 영역의 [국가책임지지도] 요인점수가 가장 낮은 집단은 고용주이며, 가장 높은 집단은 중간계급이다. 또한 복지서비스 영역의 [국가책임지지도] 요인점수가 가장 낮은 집단도 고용주이며, 가장 높은 집단은 실업자이다. [노동계급은 공적부조나 복지서비스 영역 모두에서 중간정도이다]"고 밝혔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체감했음에도 여전히(또는 오히려 더) 가족주의에 매몰되어 복지의 국가책임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한국의 경우 공공성이 현실화된 적이 없기 때문에, '공공성'이라는 구호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가족 뿐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등장할 수 있다. "사회의 부재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극대화된 것이 아니라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사회가 부재한 것 아닌가?"라고.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그렇다'라는 대답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인종주의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가족주의가 원죄라면, 가족주의적인 정서가 발생한 17·8세기부터 잘못된 것이다. 즉 그 때부터 근 4∼5백년 동안 한국인들은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근대 초기 식민지 건설의 정당성을 제공한 "모든 사회는 일직선으로 발전하므로 먼저 발달한 사회가 미발달한 사회를 계몽/교화시켜도 된다"는 사회진화론("한국은 미국에 비해 20년, 일본에 비해 10년 발전이 늦다"도 이것이다)과 일맥상통한다.

둘째, '사실에 반하는 분석(counter-factual analysis)8)'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다'라는 대답은 만약 한국에 가족주의가 없었다면 사회부재 현상이 없었을 것(복지가 발달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미국, 캐나다, 영국과 같은 국가들은 가족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사회복지가 발달하지 않았다. 또한 남부유럽은 가족주의가 광범위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가 발달하였다.

동아시아 복지유형론은 가족주의와 같은 특수한 요인에 기초하여 한국복지국가의 저성장을 설명하며, 나아가서는 그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의 광범위한 존속으로 인해 한국은 '태생적으로' 그리고 '적어도 중장기적으로는' 복지국가의 확대를 기대할 수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이 글이 시사하는 바는 다른 자유주의 유형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복지국가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노동운동의 분열이나 사회민주당[또는 좌파정당]의 부재와 같은 보다 보편적인 요인 때문이며, 이 부분에서의 변화가 있을 경우 한국에서도 지속적인 복지확대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조영훈, "유교주의, 보수주의, 또는 자유주의?", 맺음말에서.

가족주의와 공적 영역의 부재는 일종의 의식과 물적 토대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이다"라는 알뛰세르(L. Althusser)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간단히 시간을 예로 든다.

(1) "○○네 집에 마실가자. 저녁 먹고 넘어가자구."

(2) "저녁 7시 30분에 △△에서 만나자. 이번엔 10분이라도 늦으면 안돼."

(1)은 나이드신 어른들이 쓰는 표현이고, (2)는 그보다 어린 세대의 말이다. 이렇게 시간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 단위로 사고·행위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아래는 분이나 초 단위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따라서 나이드신 분들이 신세대의 랩을 따라가지 못하고 노래도 아니라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농촌 마을공동체의 삶과 도시 자본주의의 삶이 다른 것에서 기인하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일제가 서울역에 대형시계를 설치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가족주의와 교육열(Educational Zeal)

교육학 관련 책에서 교육은 자아실현, 사회화, 문화의 전달, 전면적인 능력의 계발 등으로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들은 책상 위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에게 교육이란 그것도 대학이란 돈이자 명예이고 성공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양반은 사라졌다.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와해된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질서가 형성되어 갔는데, 이 때 신분상승의 유력한 방안으로 교육이 떠오른다. 즉 가난한 집 아이라 할지라도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및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등장한 것이다. 이 믿음은 '학교는 공정하다'는 또 다른 믿음과 이른바 '출세한 사람들'에 의한 확인을 통해 보다 강력해진다. 여기에 사회보장시스템이 극도로 부실한 한국의 사회상에서 나온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요구가 결합한다. 이런 연유로 한국인에게 교육은 특히 사회진출의 관문인 대학은 돈·명예·든든한 빽·성공·안정 등(또는 최소한의 자격)으로 간주된다.

대입경쟁을 살펴보자. 산술적으로만 생각하면, 대학의 정원과 대학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거의 1:1에 육박하고 있는 지금 대입경쟁은 이전보다 많이 누그러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대입경쟁이 대학에 가려는 경쟁이 아니라 하늘(SKY: S, K, Y대)로 올라가려는 것으로, 7∼8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많아야 2만 명 안에 들려는 다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1위부터 꼴등까지 줄서있는 대학의 모습, 학력·직종별로 임금 및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존재하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이 둘의 관련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인의 교육열만을 탓할 수 없다. 교육열이란 굴절된 사회에서 '잘 살아보자'는 순수한 욕망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왜곡에 가족주의, 특히 가족이기주의가 기여한다.

교육열의 본질적 속성이 교육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성취욕에 있기 때문에, 교육도 자녀성취욕의 수단이며, 교육열도 교육이란 자녀성취욕구 충족수단을 열광적으로 활용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이 심리적 상태를 비난할 수 있지만, 비난해서 얻어질 것이 없다.

- 이종각, [교육사회학신강], 272쪽.

따라서 교육열에 대해 보수주의자처럼 전국민이 가해자라고 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들은 가족이기주의에 빠진 국민들로 인해 교육열이 발생하였다고 보며, 그런 이유로 교육열의 해소를 위한 의식개혁운동을 해방 이후 지금까지 외치고 있다. 하지만 30년은 족히 넘었을 의식개혁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 역으로 지난 72년 고등학교 평준화 실시 이후 고등학교 진학 단계에서의 교육열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교육열은 졸업 후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있는 보다 나은 학력을 획득하기 위한, 만인에 대한 집안의 투쟁이요 경쟁('연합적 경쟁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에서 교육이 표면적으로는 공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교환가치를 지닌 하나의 문화자본이며, 사적인 것이고 경쟁을 통해 획득해야 할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육을 사적인 것으로, 하나의 소비와 투자이자 경쟁 기제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먹혀들었던 것이다.

이 때 공공성의 부재도 문제이지만, 경쟁 역시 불행을 자초한다. 경쟁은 동일한 목표, 목표를 추구하는 2인 이상의 성원, 제로섬 게임(Zero-sum, 더해서 0)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쟁이 격화된다 함은 목표 획득의 관문이 좁은 가운데 목표의 유인가가 상당하여 이를 획득하려고 하는 성원의 수가 많아지고 +1과 -1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원의 수가 많아지면 승자보다는 패자의 확률이 커진다. 거기다 하나의 경쟁에서 그 다음 경쟁 사이의 기간이 짧으면, 즉 경쟁이 많아지면 그 확률은 더하다. 결국 경쟁이 심화될수록 승자보다는 패자가 많이 배출된다. 이 속에서 '경쟁을 통해 질을 향상시킨다'는 자본의 논리는 통용되기 어렵다. 패배를 약으로 삼는 것도 한두 번에 불구하며, 나중에는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난 원래 영어를 싫어해", "난 공부 체질이 아닌가봐"라고 합리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쟁은 발달의 장애물이 된다.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우리' 코리아!

지금까지 가족주의와 교육열 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족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가족만 남기고 가족주의를 없애는 것이 올바른지("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불온하다"), 가족주의의 장점만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판단하기 곤란하지만, 가족주의의 극복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집단적 탈주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공적 영역의 물적 토대 구축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의 월드컵 거리응원을 하나의 축제의 장으로, 탈주로 보는 시각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한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올랐다. 전국이 온통 들썩들썩 거리고 있다. 특히 경기가 있는 날은 서울 시청과 광화문을 필두로 한 거리응원의 열기와 붉은 물결에 인해 (언론에 의하면) 세계가 놀란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폭발적인 응원 속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이나 저항9), 또는 상상력은 보기 어렵다. 그리고 서유럽의 공장지대에서 발생하여 노동계급의 문화였던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계급문화의 흔적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붉은 색의 집단주의가 눈에 띠는데, 국가 수준까지 '우리'가 확대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것은 우선 동남아의 아동노동을 고발하는 Anti-Worldcup과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노정상의 모습은 외면한 채, '우리' 선수들이 공을 잡기만 해도 나오는 광적인 응원(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밖의 외집단에 대한 몇 가지 태도에서도 관찰되는데, 상대 선수와 충돌할 때 '밟아버려!', '때려!'라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든지, 상대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이중잣대가 담긴 송재익·신문선의 다분히 감정에 호소하는, 편파적인 중계방송이 인기가 있다든지, 승리 후 슬픔에 잠긴 상대국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을 그냥 넘어간다든지, 공동주최국인 일본이 이젠 한국을 응원하지만 터키에게 일본이 패배했을 때 통쾌한 반응을 보인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물론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거리응원 후 청소하는 것을 가지고 '성숙한 시민의식' 운운 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거리환경 조성라는 명목하에 노점상들을 몰아낸 것과 함께 가족주의의 심리적 기제인 '체면차리기'로 보인다. 체면은 특정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이미지로, 자신의 품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질서와 청소를 외국언론과 외국 '손님'의 시선을 의식하여 개최국으로서 체면을 차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정리하면 과연 무리가 있을까?

이렇게 본다면, 거리응원과 열광은 가족주의의 영역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파시즘에 가깝다. 가족주의는 '우리' 내부의 서열화 및 지배와 복종, 외집단을 배척·무시하는 태도 등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왕을 정점으로 귀천·상하를 엄격히 따지고 고수하려던 노력은 지금 한국을 권위주의 사회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권위는 '하늘'로부터 비롯된 천리(天理)로서의 권위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가족을 중심으로 그 관계성에 집착하여 친소를 따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확인하던 버릇은 지금 '우리 가족만'의 가족이기주의로, 내가 속한 혈연·지연·학연의 연줄망을 확대된 나로 해석하는 집단주의 문화로 드러나고 있다. … 자아를 집단의 일부로 파악함으로써 집단의 목표를 개인의 목표에 선행시키며, … 개인에게 그가 속한 집단이란 것은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남'의 집단을, 마치 '나'와 '타인'을 분리하여 생각하듯이 차별하게 된다.

- 국제한국학회, [한국문화와 한국인], 228∼229쪽.

거기다 대학 운동권 중에 민족해방 계열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로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국수적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띄는 것과 관련있다는 김동춘의 지적을 감안한다면, 월드컵 열풍의 주역인 젊은 세대가 국가주의나 국수적 민족주의와 만날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래서인가,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사람 하나 하나는 똑똑할지 몰라도 군중이 되면 청소년 수준이 되어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말하던, 선전선동술의 대가 히틀러(A. Hitler)가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짧은 덧붙임: 월드컵과 유연화

히딩크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냄비언론을 비롯한 여기저기에서 그를 칭송하기에 바쁘다. 동시에 '히딩크를 배우자'는 말들도 많다. 과연 무엇을 배울까?
자본은 그의 축구전술보다는 선수기용과 훈련방식에 주목할 것이다. 인맥과 명성 및 인기에 상관없는 선수기용, 선수들 사이의 경쟁,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의 육성. 이건 능력주의와 노동의 유연화이다. 자본의 다음 행보가 눈에 훤하다.
물론 지단, 피구, 베컴, 델피에로, 라울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계속되는 유럽 프로리그 경기와 A 매치의 강행군(노동강도의 강화)으로 인한 부상, 체력 저하 등 컨디션 조절 실패(한국 승리의 외부 요인)에 대해 자본은 침묵할 것이다. 솔직히 이번 월드컵의 전체적인 경기 내용은 기대 이하였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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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금융그룹, http://www.woorifg.com/

주--------------------------

1) '정확하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사회적 교환이론도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다. 인맥을 예로 들면, 챙겨주고 따르는 관계의 이면에는 서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사회관계에서 자본주의의 삶을 체득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자본주의에 걸맞은 가족주의의 모습인 것이다.
2) 정은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에게 맞춰가면서 또는 희생하면서 형성된다. 그런데 맞춰가는 것이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서로가 비슷해져 맞출 것이 없어진다. 정을 느낄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내재된 정임에도 불구하고 '정이 없다'라는 오해가 발생한다. 이 오해를 풀고 정이 없는 것인지, 넘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관계를 멈추어야 한다. 떨어져 지내보면 아는 것이다.
3) 물론 '우리'와 'we'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에 대한 한국 대학생의 반응은 '정', '친밀감', '포근함', '상호수용' 등의 감정적 연대감이 가장 크지만('나'는 '우리'/관계 속의 나), 'we'에 대한 캐나다 대학생의 반응은 개인들의 집합이 가장 많다(나는 나). 그렇지만 우리주의에 대한 적당한 영문표기가 없어 'Weness'라고 통칭한다.
4) 가부장제의 형성과 같다고 보면 된다. 보다 자세한 것은 <교육비평> 제8호(2002년 여름호)에 실린 송원재의 "절반의 하늘, 그 하늘의 반란"을 참조하기 바란다.
5) 가족 중의 하나가 매우 심각한 질병에 걸리면, 집안의 돈은 온데간데 사라질 뿐더러 가족 중의 다른 하나이상은 거기에 항상 매달려야 한다.
6) 유교가 신이 없다고 보면 안된다. 다른 종교와는 형태가 다르지만 신은 존재한다. '조상'이란 이름으로.
7) 사회복지의 형태는 크게 사회보험, 공적부조, 공공서비스 등 세가지이다. 사회보험은 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국민연금 등 4대 보험과 같은 것이며, 공적부조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라고 보면 되고, 공공서비스는 의료·교육·주택 등의 무료/저가 제공이라고 보면 된다. 한국은 사회보험 주도(73.4%), 공적부조 보완(14.3∼21.2%), 공공서비스 부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회보험이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요하는 만큼(배제의 원리 작동), 한국의 복지영역에서는 시장개인주의가 팽배해있고 가족의존성이 발달해있다,
    한편, 이성균의 인용문에서 구분한 공적부조 영역과 복지서비스 영역은 각각 빈곤층·실업자와 노인·장애인·여성·소년소녀가장이 대상인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8) '사실에 반하는 분석'은 실험이 불가능한 사회과학에서 어떤 사회현상의 발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원인을 규명할 때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만일 어떤 사회현상(E)을 가져온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고, 각 견해가 가장 중시하는 요인들로 A, B, C, D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단지 A→E라는 A가 E에 선행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B, C, D에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만일 A가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보여주려면, A의 역→E의 역, 즉 A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E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면 된다. 이처럼 '사실에 반하는 분석'은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발생한 것으로 가정하여 사회현상의 원인을 찾는 방법으로, A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니거나 단순한 상관관계가 있을 경우에는 A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요인에 의해 E는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9) 지루(H. Giroux)에 의하면, 반항과 저항은 다르다. 1981년의 [교육이론과 저항 (Theory and Resistance in Education)]에서 저항과 반항 모두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저항은 집단적인 정치투쟁을 위한 특정한 이념이 있는 것이며 반항은 그렇지 못하다고 논하였고, 이것을 1988년의 [교사는 지성인이다 (Teachers as Intellectuals)]에서는 저항과 대항적 헤게모니(counter hegemony)라는 용어로 설파하고 있다.